한국사회여, 광장에 보드까페를 허하라!
“아빠, 이 옷이랑 바지랑 양말이랑 셋(set)이야, 그치?”
아이 말에 돌아보니 파란색 계통이면서 무늬는 각각 다른 옷과 바지와 양말을 걸치고 있다. 나도 모르게 후훗 웃음이 터졌다. 며칠 전 가르쳐준 ‘SET’이 재밌었나보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접한 보드게임이 SET이었다. 저녁이면 부모님, 동생들과 편을 나눠서 눈에 불을 켜고 게임을 하였다. 막내 여동생이 지금 7살 난 우리집 아이만 했을 때였다. 독보적인 1등은 막내 차지였다. 셋 실력은 정확히 나이와 반비례했다. 나는 그때 처음엔 부모님이 동생들에게 양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 동생들을 당할 수가 없었고, 이제 7살 난 우리집 아이에게 매일처럼 지고 있다.^^ 카드가 깔리면 논리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며 셋을 찾고 있는 사이에 이놈은 직관적으로 셋을 외친다. 당할 수가 없다.
우리 세 형제는 셋 다음에 마이티를 배웠다. 부모님이 잠드시고 나면 나랑 남동생은 여동생을 우리 방으로 불러들였다. 밤새 마이티 삼매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형광등 줄에 끈을 매놓고 혹시나 부모님이 방을 나오시는 기척이 있으면 잽싸게 줄을 당겨서 불을 끄고 숨죽여 기다렸다. 아침식사 자리에서 벌건 눈을 하고서는 낄낄대면서 마이티 이야기를 나누면 부모님은 까닭을 모르시는 채 어리둥절하셨다. 동네 꼬마놈들 모아놓고 마이티를 가르칠 때면 어김없이 지난 시절 삼남매의 밤샘모임이 떠오르곤 한다.
역시 보드게임은 사람과 사람이 무릎을 맞대고 함께 즐기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이 매력만으로도 어디에 비할 수 없는 교육적 효과가 따른다. 하물며 요즘처럼 아이들이 너나할 것 없이 PC게임에 빠져있는 때에랴. 익명적인 공간에서 아이템을 모으면서 시지프스의 노동보다 더 왜곡된 손가락 놀림에 청춘을 다 바치는 요즘 아이들에게 보드게임은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다. 친구들이랑 둘러앉아 보난자를, 카탄(Catan)을 하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자기 혼자 부모님 눈치보면서 밤새 컴퓨터를 붙잡고 있던 아이들이 보드게임 같이 할 멤버를 모으느라 전화질에 여념이 없게 된다. 그 모습이 부모들에게도 자못 신기하다. 처음엔 컴퓨터를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 것 자체가 기특하다가 나중에는 부모들 자신의 호기심이 발동된다. 아이들 노는 판에 기웃거리면서 한번 껴볼 생각이 든다. 급기야는 용돈 더 주면서 아들 딸 친구를 불러다가 같이 티켓투라이드(Ticket to Ride)를 한판 하는 맛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동안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서 우리 동네 아빠들은 술자리에 모이면 픽셔너리(Pictionary)를 한다. 동네 호프집에서 한 대여섯 명 모일라치면 종업원더러 종이하고 펜 갖다 달라 한다. 보통 세 팀으로 나눠서 한 팀은 문제를 출제하고 두 팀끼리 맞붙는다. 문제 출제팀이 문제를 낸다. 나머지 두 팀에서 선수 한 명씩 나가서 문제를 본다. 요번 문제는 ‘질투’다. 햐아~ 요걸 어떻게 그릴까. 좋아. 생각 복잡하게 해봐야 소용없지. 남녀 졸라맨 둘이 손잡고 가는데 옆에서 한 놈이 눈을 째리는 걸 그린다. 질투! 답이 튀어나오고 진 팀에선 천원을 꺼내 팝콘 그릇 밑에 묻는다. 이러다보면 술값 마련은 금방이고 어쩐지 꽁짜 술 먹은 거 같아서 기분마저 상쾌하다. 빨리 집에 가서 애기 엄마한테 ‘질투’를 그려서 이긴 무용담을 늘어놓고 싶다. 픽셔너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정말 감동적인 기억이 있다. 한 대안학교에 보드게임 수업을 나갔다. 그곳은 일반 학생들과 장애인 학생들과 통합해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평소와 같이 픽셔너리를 소개하고 흥겹게 몇 판이 돌았다. 작심하고 ‘경험’을 문제로 냈다. 그리고선 일부러 한참동안 힌트도 주지 않고 아이들이 이걸 정말 그려낼 수 있을까, 맞출 수 있을까 지켜보았다. 아빠들 술자리에선 끝끝내 맞추지 못했던 문제. 10여분 지나 아이들이 몸 비비꼬면서 지겨워할 때 쯤, 한 테이블에서 답이 튀어나왔다. 그쪽으로 뛰어가 보니 평소 왕따 당했다던 자폐아 한명이 씩 웃고 있다. PC게임 캐릭터를 그려놓고 옆에 ‘경험치’를 나타내는 막대그래프를 그린 것이다. 누가 이 꼬마 천재더러 자폐아라 했던가. 그 놈 어머니를 만나 뵙고 그날의 일을 소상히 말씀드리던 날, 눈물 흘리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곳저곳 청소년 수련관에서 아이들이랑 보드게임 수업을 하면서 정말 놀랄 때가 많다. 도저히 초등학생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지 않던 게임을 긴가민가 하면서 가르쳐놓으면 신묘막측한 플레이로 사부(師父)를 흐뭇하게 한다. 푸에르토리코, 상트 뻬쩨르부르크, 증기의 시대 등등 난이도 최상의 게임들을 초등학생들이 능수능란하게 플레이한다. 느긋하게 게임 가르쳐주고 어울렁더울렁 게임하면서 가볍게 밟아놓으려 했는데 중반전부터 당황하면서 기를 써도 종종 참패를 면치 못한다. 본질을 꿰뚫는 아이들의 직관력! 일러주지 않아도 콘 러쉬 달리고(-푸에르토리코)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 상품을 잘도 빼먹는다(-증기의 시대). 이렇게 깨지고 나면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기분이 좋다. ‘햐아... 그놈 참 어떻게 그렇게 멋진 플레이를 할 수가 있지?’
매사에 자신 없어 하던 아이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라 치면 목소리가 한참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알아들을 수 없던 친구였다. ‘핏(PIT)’을 꺼내들었다. 목소리 쉬도록 한 장 두 장 외쳐대며 정신없이 카드를 바꿔야만 하는 게임. 세 판째 이놈이 드디어 목소리를 틔운다. 데시벨을 확 올린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는 표정이다. 친구들이 이놈 때문에 두 시간 동안 핏만 했다. 지독히 이기적인 아이가 있었다. 과자를 사주면 호주머니에 숨겨놓고 같이 놀고 있는 친구들 몰래 하나 둘씩 꺼내먹던 놈이다. ‘카멜롯의 그림자’를 꺼냈다. 아니나다를까, 좋은 패를 한 손 가득 쥐어놓고서는 도통 꺼내 쓸 줄을 모른다. 함께 이기든지, 함께 지든지 둘 중의 하나인 협력게임을 이렇게 하니 어찌 이기겠는가. 한 판 지고 다시 새로운 판이 시작되었다. 자기 혼자 좋은 카드들 다 들고 있어봐야 좋을 게 그닥 없다는 것을 간파한 이 친구가 조심스럽게 아끼던 카드를 내어놓는다. 이 놈을 왕따시키던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감탄한다. “거 봐, 너 혼자 좋은 카드 다 들고 있으면 뭐하니. 니가 잘해서 우리가 이긴 거 같은데?” 친구들의 감탄과 격려에 너무너무 신난 나머지 마구마구 퍼주기 시작한다. 보람 있는 장면이다.
길거리에 좌판을 깐다. 돗자리 펴놓고 보드게임들을 늘어놓는다. 사람 왕래 많은 공원에서 보드게임 약장사를 시작한다. 아이랑 산책 나온 엄마를 꼬신다. “놀다 가세요~” 수줍은 엄마는 아이 손을 붙잡고 저쪽으로 끌고 가는데 아이는 이쪽으로 엄마를 당겨온다. 자, 광활한 미국 대륙에 기차를 깔아보자. 아이가 신나하는 맛에 적당히 봐주면서 플레이하던 엄마가 서서히 열을 내기 시작한다. 적당히 이기려 했는데 결과는 참패! 암만 자식이지만 오기가 생긴다. 허나 다음판도 여지없는 참패... 한두 판 하고 나니 또다른 게임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를 윽박질러서 또 한판 달린다. 달리고 달려도 아이는 한 치 양보 없이 엄마를 밟는다. 요렇게 티켓투라이드 한 너댓판 하는 맛은 정말 짜릿하다. 나까지 덩달아 열을 받아서 엄마랑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만들어보지만 아이는 유유히 다시 한번 일등을 달린다. 이 열기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꼬여든다. 딸이랑 손잡고 온 아빠도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보드게임 삼매경에 빠져든다. “언제 오면 또 놀 수 있나요?” 엄마 아빠들의 이구동성이다. 길거리 보드게임은, 요즘 매일같이 문 닫는 보드까페의 환생이다. 그렇다. 애초에 보드까페는 형용모순이었다. 둥근 사각형처럼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노래방, 찜질방 등등 왼갖 방들이 판을 치는 한국사회에서도 보드게임방 장사는 실패했다. 보드게임은 밀실에 갇히지 않는다. 보드게임은 광장의 놀이다. 남녀노소 어우러져 불꽃을 튀기는 공동체 놀이다. 져도 흥겹고 이겨도 즐거운 만인의 유희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릴 뿐이다. 한국사회여, 광장에 보드까페를 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