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내음 팀블로그/하승우의 "일상과 자치"

한국의 지역사회와 새로운 변화전략의 필요성

'녹색당' 2007. 10. 3. 15:28
[경제와 사회] 2007년 가을호에 실은 글입니다.
여기에 올리니 각주가 다 지워지네요.
그래서 파일로도 올립니다.




 

1. 문제제기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의 직선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방자치제는 중앙정부가 독점해 온 발전전략을 지역 차원에서 재검토하고 지역특성을 살리기 위한 발전의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분권과 균형발전을 가장 핵심적인 공약으로 내걸면서 많은 지지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2007년 현재까지 지방자치제도와 균형발전계획의 진행방향은 그 원래 취지를 거스르며 획일적인 개발로 향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혁신도시, 농촌만들기, 지역만들기처럼 균형발전을 내세운 프로그램들은 하드웨어 중심의 개발사업들로 변질되고 있고, 지방자치단체들도 경쟁적으로 획일적인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과도한 개발열풍의 원인은 단지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같은 정치권력에만 있지 않다. 한국의 경제구조 자체가 개발산업, 건설업을 중심축으로 삼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2000년 기준으로 건설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7%에 이르며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건설투자의 비중도 23.4%로 선진 8개국의 13%에 비해 거의 2배에 이른다. 특히 IMF 경제위기 이후 축소된 건설산업이 부동산 규제완화를 계기로 확대되어 건설부동산산업이 과다하게 비대해지게 되었다.”(변창흠, 2005: 147) 이런 현상은 ‘토건국가’1)라는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다.

반면에 이런 국가와 시장의 흐름을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미약하다. 기존의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은 침체와 위기에 빠져 있고(경향신문, 2007)2), 새로운 대안으로 조금씩 주목을 받고 있는 지역의 풀뿌리운동(grassroots movement)3) 역시 거시적인 사회변화의 대안이 제안되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비민주적인 권력구조는 지역사회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강력한 장벽이 되고 있고, 지역사회의 개발열풍 역시 풀뿌리운동의 노력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방정부와 개발세력, 주민들이 힘을 모아 각종 정부 프로젝트나 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방폐장 유치를 위한 4개 지역 동시 주민투표가 대표적이다)과 비교할 때, 풀뿌리운동의 힘은 약해 보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본의 세계화는 그런 힘의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국가나 시장의 개발주의와 자본의 세계화를 막을 방안은 지역 차원에서의 변화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느리고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지역사회에서 전개되는 운동은 개인의 삶과 생활 자체를 변화시키며 능동적인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변화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4) 물론 작은 지역적인 변화만으로 국가적인 변화를 이루기는 어렵지만 작은 지역의 실험들이 모여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낼 때 실질적이고 강력한 변화의 추진력을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지역사회는 사회변화의 중요한 토대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의 사회/시민운동은 이런 지역사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가령 최진혁은 한국의 시민운동이 엘리트나 명망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소수의 대형 단체들이 중앙에 집중되어 시민운동의 지방분산을 막고 있으며,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최진혁, 2004: 127). 물론 사회운동에서 엘리트의 리더십이나 중앙의 대형단체들의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거나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민을 계몽하고 대상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주민을 주체로 세우고 조직화하는 주민자치운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이호, 2002: 54~55).

본 논문은 두 가지 점에서 지역사회를 변화의 토대로 파악하려 한다. 첫째 지역사회는 주민, 시민, 노동자, 생활자, 그 어떻게 정의하든 사회적인 주체가 재생산되고 생활하는 구체적인 장이다.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지역사회는 구체적인 의제(주거, 보육, 교육, 간병 등)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대의 틀을 형성할 수 있다. 둘째, 지역사회는 운동 차원의 연대만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역량의 발굴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생활상의 욕구(need)를 가진 주민들이 능동적인 시민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거치는 곳 역시 지역사회이다(이 점은 분권과 균형발전이 추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주체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본 논문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의 연대와 주민의 주체적인 역량강화(empowerment)가 새로운 변화의 힘을 생성하리라고 본다.


2. 지역사회(local community) 분석을 위한 전제: 개발과 공동체성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본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지역사회의 의미를 먼저 분명하게 정의하려 한다. 왜냐하면 변화의 계기는 현실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마련될 수 있고, 지역사회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그 변화의 전략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의 지역사회는 공간적 분할에 따른 불균등 발전전략에 많은 영향을 받아 왔다. 과거 한국의 발전전략은 사회적 과정과 공간적 현상을 분리하는 공간분리주의적 사고에 기초했고(김덕현. 1992.: 90~92), 지역간의 위계와 불균등발전에 의한 이윤창출을 목표로 삼는 가치의 지리적 이전과 공간적인 가치배분을 추진했다(김왕배. 2000: 267~268).

이렇게 수도권으로 편중된 힘은 필연적으로 주변 지역의 극심한 불균등발전을 가져와서 한 국가 내부에 식민지를 만들었다(임의영, 2007: 29~35).5) 한국의 비수도권은 수도권을 먹여 살리는데 필요한 농산품과 상품, 전력 등을 생산하는 식민지로 전락했고, 국가는 이런 내부식민지를 유지하면서 발전을 가속화시킬 의무와 지나친 갈등을 막을 의무를 지게 되었다. ‘서울공화국’이나 ‘초집중화’라는 말은 한국사회의 기본적인 갈등구조가 수도권/비수도권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한국의 지역사회는 수도권의 지역사회와 비수도권의 지역사회로 구분될 수 있고, 이 두 사회는 서로 다른 욕구를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비수도권 지역사회는 내부식민지로서 유해시설을 유치해서라도 개발을 추진해서라도 지속가능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체념하는 ‘이중적 타자화’(double othering)(임의영, 2007: 35) 현상에 빠졌다. 따라서 동일하게 개발을 주장한다 해도 그 개발의 방향과 내용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에서 다른 함의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수도권의 주민들은 지역경제의 발전을 위해 방폐장이나 쓰레기소각장같은 시설을 유치하려 하지 않고, 자기 공간의 재생산(재건축 등)을 추구한다.6) 그러므로 지역사회를 분석할 때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이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고 지역이기주의라는 말을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7)

또한 한국의 지역사회는 보통 소규모 공동체로 규정되어 왔다. 정지웅은 “지역사회란 일정한 크기의 지리적 영역을 가진 지역과 두 사람 이상의 인간집단을 뜻하는 사회의 합성어이기보다는 보통 공동체의식(community sense)을 가진 인간집단이 사는 작은 규모의 지역사회(the community)를 말한다”(정지웅, 2005: 11)며 지역사회의 소규모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최옥채는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부각시켜 ‘지역사회주의(communitism)’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최옥채는 지역사회가 생활공동체이자 이웃, 동네, 마을 정도의 소규모 공간이기 때문에 지역과 지역사회를 구분하면서 지역사회를 “동질성이나 자체 변화를 위한 역동성 등이 강한 주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수준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최옥채, 2003: 8).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지역사회를 공동체성만으로 단일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성은 도시와 농촌에서 다르게 구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농촌사회에서는 전통적인 혈연과 지연같은 귀속적인 관계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도시에서는 그런 영향력이 약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농촌의 지역사회는 도시보다 소규모이고(인구의 고령화와 지속적인 인구 이탈), 인근의 규모가 더 큰 지역사회(배후도시)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원활한 생활조건(학교, 시장 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주민이 동일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공동의 생산활동을 모색하고 지역사회를 도시보다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농촌의 지역사회는 도시와 달리 공동체적 관계망을 통해 보육이나 소비활동을 책임지는 특성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지만(푸른경기21실천협의회, 2006: 25~34), 도시에서는 그런 공동체성을 찾기가 어렵다.8)

그리고 소규모 공동체성만을 강조할 경우, 지역의 억압적인 노동관행이나 가부장적인 구조, 억압적인 생활방식이 지역사회의 고유함이나 특수성으로 포장될 수 있다(하비, 2001: 120). 그런 점에서 정근식은 지역사회를 공동체로 표상하는 것이 “지역내 계급관계나 사회적 지배관계를 대체하거나 희석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이라며 “공동체적 요소와 내부의 지배관계를 적절하게 포착할 수 있는 단위가 설정되는 것이 지역사회 연구에서 중요하다”(정근식, 2003: 17)고 지적한다. 이윤갑 역시 “지방사회를 공동체론으로 접근하기보다 ‘다양한 문화적 성향과 사회-경제적 세력들의 각축장’으로 파악하는 것이 역사적 실체에 보다 객관적으로 근접할 수 있는 방법”(이윤갑, 2004: 17)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사회는 단일한 공동체로 규정될 수 없고 다양한 세력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장으로 인식되어야 한다.9) 즉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그 내부의 이해관계를 단순화시키거나 다양성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물론 지역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는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매개로 삼기 때문에 일정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10)) 따라서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은 이미 확립된 전통이나 외부의 모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며 민주적인 의사소통구조를 확립하는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성은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한 전략으로 고민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정체성은 그에 걸맞는 의사소통구조를 갖춰야 하고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국의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중요한 정책의제로 떠올랐고, 균형발전 정책의 외면적인 모습은 지역사회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실제 과정이나 결과는 지역사회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3. 지역사회의 현황과 변화의 필요성


1) 신개발주의와 대안적 발전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분권과 균형발전은 한국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그동안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기 때문에, 분권은 참여와 연대, 생태를 보장할 혁신적인 발전전략으로 부상했다(김형기, 2002: 11~21).

그런데 이런 분권과 균형발전의 실제 모습은 참여나 연대, 생태가 아니라 효율성과 경쟁력을 목표로 삼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국가균형발전과 관련해 “통합된 국가, 효율적인 나라, 경쟁력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방화라는 국가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국가균형발전위원회, 2003: 2). 즉 노무현 정부의 “‘특성화 발전전략’이란 지역별 산업특화를 통해 고유의 경쟁력을 함양함으로써 지역역량을 극대화해 나가는 발전전략을 의미”했고, “이를 위해서는 지역혁신체계를 구축하고, 지역별로 전략산업군집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국가균형발전위원회, 2003: 8).

결국 이 분권과 균형발전은 행정수도 이전이나 혁신거점도시처럼 과시적인 규모만 강조되는 대규모 시설사업으로 변질되어 왔다.11) 그리고 중앙정부는 일본의 지역사회에서 성공을 거뒀던 ‘마을만들기(まちづくり)’도 도입했지만 이 역시 주민들과의 충분한 논의 없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계획들로 변질되고 있다. 마을만들기의 이론적 근거인 내발적 발전론에 따르면 지역 내의 자원이나 주체를 활용해야 할텐데12), 현재의 정부사업들은 외부자원이나 자본을 투입해서 지역발전을 꾀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발전에 관한 당위성만 있지 그 발전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누가 그 발전을 이끌고 지속시킬 것인가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하다.13) 따라서 “참여정부의 균형발전 사업은 외형적으로는 개혁과 지역균형발전을 지향하고 있지만, 실제 구현되는 모습은 지역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을 조성하는 형태를 취하게 됨으로써 개발주의적 속성을 띠게 되는 것”(변창흠, 2005: 144)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명래는 이런 현상의 본질을 ‘신개발주의(neo-developmentalism)’라 정의하면서 그 특징을 “국가를 매개로 하면서 시장과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개발, 즉 ‘신자유주의적 개발’”에서 찾는다(조명래, 2004: 29). 이런 신개발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논리가 공간환경으로 침투하고 강화되는 현상을 말하고, 중앙으로 집중된 개발세력들이 지방화되는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조명래, 2003: 138). 이윤갑 역시 현재의 분권정책이 “‘지역사회의 내생적 발전을 위한 기술-산업-경제 혁신’에 치중”하면서 “주민자치의 확대, 발전과는 괴리되면서, 과거의 지역개발 패러다임에 의거한 지방분권운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지역비전만들기기획위원회, 2005: 211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런 지적들은 타당하지만 비수도권의 지역사회가 신개발주의를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즉 신개발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수도권의 초집중화 현상이 해결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체 총생산 규모는 1998년 약 479조 8천억원에서 2005년 약 815조 2천억원으로 약 335조 4천억원이 늘어났는데, 서울시와 경기도의 증가액이 약 149조 9천억원으로 전체 생산증가액의 44.7%를 차지했다(국가통계포털 http://www.kosis.kr 참조). 이는 분권과 균형발전의 논리가 실효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시도별 문화기반시설 현황과 문화적 소프트웨어와 휴먼웨어의 지역별 양극화 현상도 매우 심각하다(김하림, 2006: 93~95).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의 발전욕구를 지역이기주의로 몰면서 개발을 반대하는 논리(조명래, 2003: 140)는 현실적인 호소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2004년 방폐장 관련 주민투표에서 드러났듯이 한국의 불균등발전 상태를 고려할 때 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비수도권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때로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개발과 함께 시민사회가 실현해야 할 다른 가치들, 생태와 인권, 복지, 평화, 성평등 등을 결합시키는 대안적인 발전방안을 모색해야 주민들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사회운동은 주민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알린스키(S. Alinsky)는 미국 빈민운동의 경험을 통해 모든 운동이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운동은 현실이 “직접적인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권력장치의 투기장이며 그 안에서의 도덕이란 한낱 자기 이익과 정략적인 행동을 위한 수사학적 원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알린스키, 1983: 141). 즉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자기이익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이익이 인간행위에 있어서 기본적인 추진력의 기능을 하고”, “자기이익의 중요성은 한 번도 의심되어 본 적이 없고, 인간 생활의 불가피한 요소로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알린스키, 1983: 155).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무조건적인 개발은 거부되어야 하지만 주민들의 욕구에 기초한 발전요구는 정당하게 수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변화는 추상적인 당위나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욕구(때론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 해도)로 가능하다. 구체적인 삶의 욕구가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고, 설령 사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되었더라도 그것이 기존의 제도적인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운동으로 전환된다면 주민의 능동성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민의 이해관계나 욕구를 부정하지 말고, 다만 그런 욕구가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공론장에서 표출되고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주민들은 오랜 권위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수동성을 내면화해왔기 때문에 운명주의(fatalism)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김서용, 2005: 47). 그런 점에서 무조건 이해관계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 이해관계가 사회의 공공선을 고려할 수 있도록 토의하고 이해관계를 조절할 장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하승우, 2004: 46~47).

또한 <분권운동본부>나 <분권과참여를위한시민사회네트워크>, 최근에는 <수도권과밀반대전국연대> 등 다양한 연대기구들이 꾸려져 분권과 수도권 문제의 해결방안을 강구했지만 ‘지속가능한 수도권 관리’나 의제 제시, 대선후보 압박 외에는 이렇다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수도권과밀반대전국연대, 2007). 그런데 이런 방식은 2002년 노무현 후보가 나왔을 때 이미 사용했던 외부의 권력에 의존하는 방법으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점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설령 과감한 분권정책이나 균형발전정책이 실시된다 하더라도 그런 정책이 실효성을 거두려면 지방에 그런 정책을 감시하고 실천할 세력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지역사회에는 그런 변화를 가로막는 강력한 기득권층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실상 지방의 지역주민들이 신개발주의를 지지하는 듯 보이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이 개발을 지향한다기보다는 개발담론을 체계적으로 전파하고 정책결정과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하승우, 2006b: 56~60). 즉 실제로 개발을 주도하는 세력은 지역주민 전체가 아니라 지역의 정치와 경제, 언론 등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지역토호들이다. 이런 현실의 권력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개발세력을 전체 주민으로 보편화시키는 관점은 위험하다.


2) 후견주의와 지역권력구조의 변화


행정학이나 정치학에서 지역사회의 의사결정구조나 참여구조, 지역자원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사회자본(social capital)과 거버넌스(governance)가 많이 활용되고 있다. 두 개념은 정부가 주도하지 않고 지역내 이해당사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협의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원들이 서로 참여하고 협력하면 과거의 정부주도형 통치방식보다 더 나은 사회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퍼트남(R. Putnam)은 “사람들이 협동한다면 사회가 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상호간의 이익을 위해 조정 및 협동을 촉진하는 규범, 신뢰, 네트웍”을 사회자본이라 정의한다(박희봉․김명환, 2000: 177에서 재인용). 그리고 이런 사회자본이 활성화될 때 협동적인 거버넌스가 형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로컬 거버넌스(local governance)는 “지역수준에서 발생하는 빈곤, 범죄, 경제개발, 환경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와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간에 공통된 목적과 가치를 바탕으로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체계이며, 또한 이들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네트워크가 핵심개념”이다(권해서․최영출, 2006: 2). 즉 두 개념 모두 정부의 역할보다 지역사회의 자율적인 역량을, 그리고 협력과 신뢰,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그러나 아이작(T. Issac)과 헬러(P. Heller)는 퍼트남을 비판하면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이 ‘이미’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자발적인 결사체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국가가 강력하고 계급갈등이 첨예한 제 3세계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14) 그러면서 아이작과 헬러는 오히려 계급갈등과 사회동원 과정에서 능동적인 시민이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Issac․Heller, 2003: 83~86). 마찬가지로 신희영은 사회자본이론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로는 사회조직의 특성을 측정하기 어렵고, 국가제도가 사회자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조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신희영, 2005: 13~14). 또한 사회자본이론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주성수, 2006: 61~62).

실제로 한국에서는 자율적인 협력과 참여, 네트워크를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중앙의 국가권력이 지역사회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과거 군대와 경찰, 검찰 및 사법기구, 각종 정보기관 등 폭력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억압적인 국가기구들이 군과 면 단위까지 지부조직을 만들고 대책협의회를 꾸리며 활동해 왔다(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한국가톨릭농민회, 1990: 66). 그리고 새마을운동협의회, 민족통일협의회, 사회정화추진협의회, 청소년선도위원회, 자유총(반공)연맹 등의 단체들도 중앙정부의 민간동원단체로서 지방권력을 분점해 왔다.15) 이런 단체들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연합을 형성해 왔고, 이런 단체들에 소속된 지역유지들은 “시가지 개발과 관련한 각종의 개발정보는 물론이고 각종 관급공사의 수주나 지방공무원 인사도 지방관료와 유지들의 담합에 의해 좌지우지”(지수걸, 2003: 27)하는 지역의 실세들이다.

또한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는 지방의 자치단체장들이 독자적인 권력구조를 확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신희영, 2005: 2). 자치단체장들은 지방의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정부의 견제와 감독을 피하고, 중앙집권적인 행정구조와 빈약한 재정을 핑계 삼아 지역의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지방의 단체장들은 예산을 무리하게 집행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며 인사권을 남용하는 등 각종 부조리를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이익집단들도 지역사회에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조직된 대한약사회나 이용업협회 등의 전국연합조직의 지부들이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한 지역언론들(중앙언론의 지사들 포함) 역시 지역의 비민주적인 권력구조를 감시하기는커녕 관언유착 관계를 맺고 있고, 지역사회의 핵심사안에 대해 단순보도를 하거나 때로는 노골적으로 지방정부의 편을 들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세력들은 지역사회 내에서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고 일종의 후견주의(clientalism) 구조를 이루며 강력한 연계망을 구성하고 있다. 지역사회 내의 기득권화된 관변단체나 이익집단, 지역언론사 등은 지방자치단체장과 후견주의 구조를 이루고 있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지역사회 내의 후견주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의 유력자와 후견인-피후견인 관계를 구축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의 후견주의 구조가 유지되려면 그의 지위와 권력, 자원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중앙의 유력자들이 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박종민, 2000: 199; 김만흠, 2007: 71~74). 이처럼 중앙 정치인과 지역정치인, 각종 공기업16)과 지방기업, 지역언론, 지역유지 등이 후견주의를 확립하며 성장연합(growth machine)을 구성해 신개발주의를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후견주의 구조를 깨지 않고서 지역사회의 변화를 얘기하는 건 공허한 염불을 외는 것일 뿐인데, 이런 구조를 깨는 것은 주민의 자율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17) 그런 점에서 이윤갑은 국가권력과 지역사회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해명하는 것이 지역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윤갑은 “지역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국가권력과 지역사회 사이의 대립관계만을 부각시키거나, 아니면 반대로 국가권력에 대한 지역사회의 종속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방법을 모두 경계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지역사회가 독자적인 생활세계로 기능하자면 먼저 그 나름의 통합적 질서를 형성해야 되는데 그것이 주로 국가권력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이윤갑, 2004: 19).

비슷한 맥락에서 남미의 분권과정을 분석한 쇤발더(Gerd Schönwälder)는 지역에 기반을 둔 대중운동과 정치적 좌파(political left)의 동맹이 세 가지 이유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장한다. 첫째, 분권이 강력한 엘리트의 중앙국가기구에, 그리고 이미 기득권화된 권력과 자원의 분배에 사실상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것이라면, 상급 단위의 정치적인 지원 없이 성공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18) 둘째, 좌파가 주도하는 정당과 대중운동의 연합구상은 정당과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는 대중운동을, 또는 다른 사회운동과 정치체계를 연계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셋째, 사실상 정치적 좌파는 대중 운동에 가장 우호적인 동맹세력이다(Schönwälder, 1997: 759~762).19)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경험이 부재하다. 2002년 민주노동당이 울산 동구와 북구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을 당선시켰고 의회에서도 다수당이 되었지만 지역사회의 후견구조를 깨트리는데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울산 동구와 북구는 참여예산제를 비롯한 몇 가지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지만 지역사회 자체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브라질에서처럼 진보적인 정치세력과 대중운동의 결합이 가능하려면 먼저 ‘내부정치의 과잉과 외부정치의 부재’(장원봉, 2006: 83)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풀뿌리운동 역시 진보적인 정당운동과 어떤 연계를 맺어야 할지에 관해서 특별한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진보적인 세력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사회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역량은 몇몇 활동가나 소수의 단체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주민을 운동의 주체로 성장시킬 때 축적될 수 있다.


4. 지역사회, 그 변화의 가능성


1) 공통의제를 통한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의 소통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심각한 불균등발전이 가져온 지역간의 격차는 신개발주의 담론을 재생산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데, 이를 해소할 대안적인 발전의 방향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특히 대안적인 발전의 방향을 국가 차원의 의제가 아니라 지역 차원의 의제로 구체화시키고 있는 흐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지역간 격차는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한미FTA와 같은 다른 사회적 모순과 겹쳐지면서 대안적인 발전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고 있다.20)

그리고 귀속적인 공동체성(혈연, 지연)에 대한 강조와 타락한 공동주체성(학벌)21)에 대한 강조는 지역사회의 성격을 지속적으로 왜곡시켜 왔다. 특히 지역사회 내부에 구조화된 지배관계가 은폐된 채 언제나 지역사회는 단일한 공동체로 파악되어져 왔다. 그러다보니 지역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당위적으로 제기될 뿐 실제로 그 변화를 이끌 주체를 찾거나 세력을 구성하지 못해 왔다. 민주노동당이 원내로 진입했음에도 관변단체들에 대한 특별법조차 폐지되지 않았고 지역사회의 후견주의 구조를 타파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지역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잘 보여준다.

또한 시민사회연대회의를 비롯해 연대기구/단체들이 수도권과 지방의 중심지에 포진하고 있지만 국가 차원의 이슈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강화를 전혀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간척지나 방폐장, 미군기지처럼 전국적인 의제가 될만한 사안이 터지면 많은 단체들이 지역사회에 개입하지만, 성공이든 실패든 그 사안의 승패가 결정되면 그 단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다. 이런 ‘기동전’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역사회의 무분별한 개발을 막기 어렵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신개발주의와 후견주의를 타파하려면 그 변화의 주체를 발굴하고 그들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장기적인 ‘진지전’이 필요하다. 지역사회의 헤게모니를 신개발주의에서 대안적인 발전으로 전환시키고 고착화된 지배구조를 해체시키기 위한 준비단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으로 대표되던 기존의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논리는 조금씩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역사회를 매개로 두 운동의 연대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까지 두 운동이 강한 연대감을 형성한 실제 사례는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있고 실천적 가능성으로서 얘기되고 있는 수준이다.

그런 논의의 대표적인 예로 김현우 등은 지역사회를 “자본의 포섭과 통제, 회유와 그에 대한 순응과 크고 작은 갈등, 저항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각축장’”(김현우 외, 2006: 15)으로 파악하면서 지역사회와 노동조합이 연계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특히 타터솔(A. Tattersall)의 이론을 받아들여 노동조합이 지역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개입하고 지역사회의 대안적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지역사회 노동조합주의(community unionism)를 제기한다. 그리고 김현우 등은 한국의 실천적 사례로 2005년 6월부터 진행된 영등포역사 공공성 확보 투쟁이나 과기노조의 과학상점이나 참터, 보건의료노조의 공공병원 전환 투쟁, 전남 공무원노조의 행-의정 감시 연대기구 참여 등을 들면서 그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22)

다른 한편 이근행은 공동체운동의 관점에서 사회운동의 결합을 모색한다. 사회운동이 주류사회와 적대적 긴장관계를 맺으며 제도화를 추구한다면 공동체운동은 주류사회와 이탈과 접합관계를 맺으며 가치와 생활의 일치를 추구한다. 따라서 “제도․정책 차원의 개혁을 주요 사업으로 삼는 사회운동과 공동체운동은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어 긴밀한 연대를 이룰 필요가 있다.”(이근행, 2006: 98) 하승창도 “기존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의 결합도 각각의 운동이 자신을 혁신하면서 새롭게 구성되는 진보의 내용으로 재편되어야 한다”(하승창, 2005 :52)며 새로운 의제설정을 통한 연대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연대는 결코 그런 말만큼 쉽지 않다. 박승옥은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 전북공무원노조연맹 등이 새만금에서의 공사 강행을 지지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어려움을 얘기한다. 기업별 노조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공공적 전망을 가지기 어렵고23), 해당 사업과 일자리가 직접 연계되어 있을 경우 노동조합이 사업 자체를 반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24) 그리고 시민운동 역시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의미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거나(하종강, 2006: 46) 시민적 공공성을 국가와의 관계에서만 확보하다보니 역설적으로 그 재현의 구조에서 국가에 포섭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조정환, 2005: 219).

그런 점에서 강한 연대는 서로간의 이해와 소통을 전제할 경우에 가능하고, 그 소통의 의제는 최근 ‘사회적 공공성’으로 맞춰지고 있다. 공공성 투쟁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연계하는 효과적인 계기라는 주장(신진욱, 2007)은 조금씩 힘을 얻어가고 있다. 특히 과거처럼 어떤 운동이 그 자체로 정당성을 확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공공성을 정의하고 그것의 확보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연대의 틀이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는 보육이나 교육, 주거, 교통 등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이슈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틀의 형성이 용이하다.

실제로 2007년 8월 31일부터 9월 2일로 예정된 사회운동포럼은 ‘소통/연대/변혁’을 주제어로 삼고 사회적 공공성이나 지역과 관련된 기획단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지역운동기획단에는 <문화연대>, <민주노동자연대>, <민주노총서울본부>, <사회진보연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전국학생행진>, <평등사회로전진하는활동가연대>가 참여해 기본적인 소통을 시도하며 지역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새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생태나 여성, 교육, 보육같은 지역의 공통의제를 통해 다양한 실험들이 가능하다. 앞서 얘기한 노동운동의 실천사례만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매개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도 이루어질 수 있다. 가령 사업장 급식을 하는 기업과 농민들이 물류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있고25), 이런 운동은 친환경학교급식운동과도 맞물리는 등 다양한 접합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화연대>가 다른 나라의 경험들을 토대로 추진하고 있는 <민중의 집>도 새로운 지역운동의 흐름이다(최준영, 2007). 만일 이런 연대의 틀이 강해진다면 ‘레츠’(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s)처럼 대안경제의 가능성을 가진 지역적인 대안도 자리를 잡을 수 있다(호지/ISEC, 2002; 크롤, 2003; 하승우, 2007a).

그러나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일단 각 단체들 사이의 소통과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사회운동과 시민/주민운동은 지역을 바라보는 분석틀과 운동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2) 새로운 주체형성을 위한 역량강화 프로그램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이 서로 힘을 모은다 하더라도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주민들이 운동에 결합하지 않는다면 운동의 토대는 여전히 취약할 것이기 때문이다.26) 공동체운동에 관한 글들이 현재 구성된 공동체에 관한 분석에 그칠 뿐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주민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가치의 제시’ 이전에 그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지역사회 변화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고, 어떻게든 지역사회에서 생활해야 하는 주민들은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27) 분권과 균형발전에 관한 수많은 주장들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그런 주체들을 길러내는 과정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8)

지역적인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에 많이 소개된 일본의 생활클럽 생협에서 시작된 <가나가와네토>와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시의 참여예산제는 새로운 주체로서 주민들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과정에 주목했기 때문에 성공을 거뒀다. <가나가와네토>는 미니포럼을 구성해 지역의 이슈를 찾아내서 그 이슈를 순환시켰고, 정기적으로 정치스쿨을 운영해 지식과 현장의 결합, 지식인과 지역사회의 결합을 추진했으며, 참가형시스템연구소를 운영해 시민들이 알아듣기 쉬운 용어로 각종 교재와 팜플랫, 자료집을 발행하고 있다(이기호, 2005: 68~74). 그리고 포르투 알레그리시의 참여예산제 역시 지역별/주제별 총회가 지역의 이슈를 주민 스스로 제기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고 있고 주민들이 지역의 예산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며 지역사회의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지원하고 있다(Gret․Sintomer, 2005; Baiocchi, 2005; 하승우, 2007b). 즉 두 사례 모두 주민을 지역사회 변화의 주체로 상정하고 그들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권리를 보장해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작은 풀뿌리단체들이 주민들과 함께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있지만 각 개별 단체들의 힘만으로 신개발주의나 지역토호와 맞서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여러 단체들을 공통의 틀로 모아내면서 주민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대안적인 발전을 모색하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그런 시도의 한 예로 2006년 3월부터 지리산권역 5개시군(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구례군)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와 공무원,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안적인 지역발전모델을 구상하고 주체적인 역량을 강화하는 지리산권공동학습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29) 이 프로그램은 “1)다양한 주민층이 없이 자치단체와 토호세력의 전횡이 판을 치는 절망적인 농촌지역에서 주민자치의 일꾼이 되어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및 단체 소속 회원 교육, 2)단체 실무활동가들과 소속 회원들이 지역의 현실을 알고 비전을 모색하는 공부프로그램을 통해 안목을 키우고 지역에서 주인이 되어 희망을 일구어갈 자신감 얻기, 3)지방자치단체에서 조장하는 지역 경쟁구도와 갈등을 극복하고 지리산권의 문화 심리적 공동체성 회복, 4)지리산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의 네트워크 형성”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다(지리산생명연대, 2007: 11)

이 프로그램은 ‘세계화에 맞서는 풀뿌리운동’, ‘지방자치단체의 장기발전계획분석: 주민의 관점에서’, ‘지리산권관광개발계획과 그린투어리즘: 실질적 주민참여방안 모색’, ‘지방자치단체 예산분석실무’, ‘주민조직화 방법과 실제’, ‘사례를 통한 주민주도의 지역발전 방안 찾기’, ‘교육 평가와 사업 기획 워크샵’이라는 7번의 강좌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후속 과정으로 참여자들이 각자 마을에서 스스로 조직한 ‘젊은엄마들의모임’, ‘좋은학교만들기’, ‘사포마을가꾸기’, ‘남원생협마을모임’, ‘마산면자치모임’, ‘토종종자살리기운동’처럼 작은 규모이지만 주민의 욕구를 반영한 대안적인 발전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프로그램 구성 과정에서부터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자신들의 욕구를 제기해서 프로그램에 주민의 욕구를 반영했고,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들도 일방적으로 강의를 진행하지 않고 지역의 현안을 중심으로 주민들과 토론하며 지역상황을 이해하고 지식을 교환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진행과정에서 참여자들은 자신의 자아를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30) 골프장, 댐, 도로공사 등 각종 개발사업들이 발전을 핑계로 밀려드는 농촌사회에서 수동적이고 회의적인 의식을 가졌던 참여자들은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변화를 경험했다.31) 또한 이런 변화는 주민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게 해서 후견주의를 타파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32) 더구나 지리산 공동학습프로그램은 소위 사회운동단체라 불리는 농민회와 여성농민회, 민주노동당, 공무원노조와 시민운동단체로 분류되는 여러 단체들, 평범한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장을 마련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많지만 실제로 그런 연대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특정 이슈를 중심으로 하는 일시적인 ‘느슨한 연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을 토대로 했을 경우에는 사회운동, 시민운동, 주민의 ‘강한 연대’가 형성될 수 있고, 이런 강한 연계를 통해 구성된 지역적인 대안발전모델은 신개발주의와 기득권화된 후견주의 구조와 맞설 힘이 될 수 있다.


6. 결론


현재 한국의 지역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이념을 중심으로 탄탄한 후견주의 구조를 확립한 세력들은 신개발주의를 추진하며 지역사회를 개발의 희생양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반면에 이런 흐름을 변화시키려는 다양한 노력들은 아직 연계되지 않고 그 자체적인 힘도 미약하다.

따라서 그 변화의 가능성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경기도 조치원에서 이장-공무원-업자의 개발동맹에 맞서 아파트 건설반대싸움을 벌였던 강수돌의 말은 이 어려움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저들의 개발동맹보다 훨씬 나은 ‘대안동맹’을 결성해야 한다. 우선은 마을 주민들이 더욱 똘똘 뭉쳐야 하고, 양 대학 학생과 교직원들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측면 지원하고, 소신과 실력을 겸비한 변호사 등 10명 정도가 ‘목숨’ 걸고 결합해야 한다. 진행 중인 2건의 행정소송을 수행할 팀도 필요하고, 주민의 역동성을 전면적으로 활성화할 팀이 필요하다. 생명의 대안을 향한 주민들의 생동하는 투쟁이 법정 속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군수와 도지사, 군의회와 도의회를 상대로 민원 제기와 대안의 협상을 담당할 팀도 필요하고, 언론 및 홍보를 전담할 팀도 필요하다. 이 모든 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빈틈 전략들을 활발히 구사해야 한다.”(강수돌, 2007: 201)

따라서 지역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은 지역사회 내외부의 다양한 운동세력들이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성하고, 아직 조직되지 않은 주민들을 지역사회의 정치주체로 성장시키고 조직화하며 대안적인 발전모델을 구성하도록 지원하는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통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힘을 구성할 때에만 지역사회에서 로컬 거버넌스나 민주적 거버넌스가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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