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선거?, 우리들의 민주주의!
-----------------------------------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더 이상 희망의 언어와 행동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떠들어대는 희망은 미래의 생명과 공동체를 팔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겠다는 ‘계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계산된 희망들이 TV와 인터넷을 타고 사람들을 홀리고 있다면, 시민들이 느끼는 일상의 무기력함은 오히려 절망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미래라는 단어를 입에서 꺼내기가 두려울 만큼 이런 희망과 절망은 묘하게 어우러지며 우리 현실을 답답한 구렁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때 사람들의 가슴을 후끈 달궜던 민주주의(‘어떤 민주주의였던가’라는 물음이 필요하지만)라는 말도 이제는 “밥 먹여주나?”라는 기본 욕구를 넘어서지 못하는 옹색한 단어가 되었다. 물론 인간에게 밥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밥 먹여주나?”의 밥은 생명의 원동력으로서의 밥이 아니라 하루하루 먹고 사는 끼니를 뜻할 뿐인데,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될만큼 우리 현실은 각박해졌다. 그러다보니 자아실현, 자기발전, 공공성 등 시민으로서 응당 요구해야 할 정치적인 권리들이 끼니에 밀려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옛날부터 정치는 현실의 절망을 벗어나기 위한 방안이었다. 각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해결될 수 없는 공동체의 과제를 풀기 위해 정치는 등장했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공적인 장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고 타인의 얘기를 듣고 서로 논쟁하면서 정치의 불을 밝혔다.
그러니 우리는 현실정치가 불러온 절망을 다시 정치를 통해 극복해야 하는 모순된 과제를 풀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 지금의 몇몇 정치인들이나 특정 정당에게 의지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절망의 정치’를 유지해온 핵심적인 구성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망의 정치로 대중의 정치적인 잠재력을 빼앗고 자신에 대한 수동적인 신뢰가 마치 능동적인 정치활력인양 선전해온 세력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치, 자율, 공동체 같은 희망의 언어들을 왜곡시키며 조금씩 대안을 옥죄어 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런 세력들에게 의지하는 건 날카로운 산꼭대기로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려는 시지프스처럼 헛수고를 거듭할 뿐이다. 이제 ‘인물의 정치’나 ‘세력의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절망을 극복할 ‘희망의 정치’는 이제 외부의 누군가나 특정 세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나와야 하고 내 자신이 그것을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희망은 올바르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 자신의 노력에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주위의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와 손을 맞잡는 연대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실현가능성’이나 ‘현실성’보다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 상상력은 존재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던 과거를 미래와 이으며 새로운 정치적 활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시도들은 끊임없이 현실에서 좌절을 경험해 왔다. 그러나 실패했다고 해서 그런 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실패한 만큼 그런 시도들은 더 간절히 필요했던 현실이 아니었을까?
이 글은 그런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정치의 원래 의미로 돌아가 보려 한다.
무능한 정치와 질주하는 경제
흔히 한 사회를 움직이는 두 가지 축은 정치와 경제라고 한다. 두 축이라는 얘기에서 드러나듯이 정치와 경제는 하나로 통합되어서는 안 되고 구분되어야 하는 원리이다. 경제가 개개인의 이익을 토대로 사회를 떠받치는 물질적인 바탕이라면, 정치는 그렇게 물질화된 사회에서 개개인의 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바에 관해 각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실천하는 틀이다.
따라서 정치는 물질적인 이익을 늘리는 일 자체가 아니라 물질적인 이익을 조정하고 이익 외의 살림살이들, 즉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거나 남과 다른 나의 앎이나 잘남을 드러내는 일과 관련된다. 물질적인 부와 관련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가 유지되도록 공정하게 분배하려면 분배의 정의와 조정하는(rectificatory) 정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적인 합리성에는 어긋나지만 부의 지나친 불평등이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는 부를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역할은 부 자체를 생산하는데 있지 않았다.
사실 물질적인 부만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다. 물질적인 이익은 인간의 기본욕구(의식주)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키는가에 따라 그 만족이 달라진다. 가령 10평의 집에 살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100평의 집에 살아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무조건 이익을 쌓아놓는다고 해서 사람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그런 행복을 정의하고 그 행복을 추구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복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건 정치의 역할이 아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가치는 사람마다 서로 다를 수 있고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사람들에게 행복에 관한 고민을 던지고 얘기를 나눌 뿐 그것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정치는 공적인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이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좋든 나쁘든 행위와 언어로써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그런 공간이라고 봤다. 아렌트는 공적인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키고 독특한 행위와 업적을 통하여 자신의 잘남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만 자신과 세계를 알아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독특함을 깨달을 수 있으며, 그런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증명하고 흔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런 자유롭고 다원적인 공론장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아렌트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 대항하며 사는 사람 모두가 고독한 인물”이라고 보면서 정치적 다원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정치가 곧 전체주의라고 보았다.
반면에 이런 공론장을 보장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특정한 언어와 행위를 강요할 경우 권력은 폭력으로 변한다. 아렌트는 “폴리스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힘과 폭력이 아니라 말과 설득을 통하여 모든 것을 결정함을 의미한다”고 못을 박으며 폭력과 권력의 경계를 분명하게 갈랐다. 폭력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이지만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으로서, 폭력이나 강제가 동원되는 상황은 이미 권력이 실종된 상태이다. 동양에서도 정치와 폭력은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치의 ‘政’자가 ‘치다, 두드리다’라는 뜻을 가진 ‘攴’자에서 파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폭력은 정치의 요소가 될 수 없었다. ‘폭력을 가지고는 한낱 필부의 뜻조차 굴복시킬 수 없다’는 공자의 인식은 현실세계의 폭력을 넘어선 말의 정치, 인위적인 강제를 넘어선 정치를 구현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그런데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경제와 시장이 모든 정치적 의제를 압도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대통령’이라는 모순된 표현은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정치라는 구분되어야 할 영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회적 양극화, 늘어나는 비정규직, 청년실업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논리는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 정치적인 조정에서 나와야 하는데, 지금 현실은 정반대이다. 파이를 키워서 나눠준다(더 이상 키울 파이가 없고, 파이를 키우지 않아야 함에도)는 무지한 경제논리가 정치의 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 중 어느 누구도 물질적인 이익 외에 다른 행복을 얘기하지 않으며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경제적인 발전에는 파괴와 폭력, 확장이 뒤를 따른다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 중에서 식민지를 가지지 않았던 나라가 없다는 점은 경제발전이 제국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뜻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목표가 선진국이어야 할까?
또 대선에 나선 정치인이 가져야 할 능력은 무엇일까? 그 능력이 반드시 경제발전과 관련된 것이어야 할까? 오히려 정치인이 가져야 할 자질은 획일적인 행복의 기준을 가지지 않도록 다른 가치를 몸으로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공론장을 구성하는 능력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정치는 한참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는 정치인을 경계해야 한다. 아렌트의 말처럼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맞서는 사람만큼 고독한 인물이고, 그래서 그는 정치인으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 뿐 아니라 전체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모두를 위해 일하겠다는 정치인들만 가득한 우리네 선거판을 어찌해야 할까?
선거는 민주적인가?
한때 선거를 얘기할 때면 고무신, 돈봉투 등이 떠올랐던 때가, 그래서 ‘공정선거’를 절실히 요구했던 때가 있었다. 직선제로 선거를 치르는 것이 민주주의를 뜻하는 목소리인 때가 있었다. 독재세력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강렬히 열망했지만 정작 그 내용에 관해 고민하지 않았다. 이들은 특정 이념을 맹목적으로 따랐을 뿐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떤 내용과 형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형식적인 선거방식만이 논의되었고, 우리는 선거가 곧 민주주의라고 여기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데 선거는 정녕 민주적일까? 선거는 민주주의를 보장할까?
민주주의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고대 아테네 사회로 돌아가는데 익숙하다.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에클레시아(ekklēsia)라 불리던 민회의 민주주의로 알려져 있다.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성들이 민회에 모여 도시의 중요한 정책을 직접 결정했다는 점에서 아테네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 얘기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직접민주주의가 이상적이지만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배워왔다. 거대하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는 대의민주주의가 ‘가능한’ 대안이라고 배웠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의견을 대변할 대표자를 투표로 선출하면 직접 참여하는 것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고, 뛰어난 대표자가 의견을 수렴하고 정리하면 국가의 전체적인 이익까지 고려할 수 있다. 그리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권력을 나눠서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도록 하면 정치적인 부패나 독재를 방지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온 민주주의의 원론이다.
허나 이 원론은 이미 예전에 무참하게 깨졌다. 아돌프 히틀러(A. Hitler)는 독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정치인과 학자들은 우매한 대중(mass)에 대한 두려움을 온 사회에 퍼트렸지만, 사실 이 사건의 본질은 대중의 광적인 열광이나 분별없는 판단력이 아니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팩스턴(R. Faxton)이 『파시즘』(교양인, 2004)에서 지적했듯이, 파시즘은 사회적 양극화와 정치적 대립의 교착상태에서 전통적인 엘리트 기득권층과 민족주의 과격파가 결탁하면서 탄생했다. 기득권층은 사회의 불안정을 해결할 해결사를 원했고, 파시스트들은 대중의 열광만으론 부족했던 정치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대의민주주의는 이런 결탁에 무능하다.
선출된 대표자들이 대중의 의견이나 이익을 무시하고 결탁하거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내세우며 전쟁과 파괴로 몰아갈 때, 대의민주주의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나? 답은 한 가지이다. 다음 선거를 기다려라. 그래서 장 쟈크 루소(J. J. Rousseau)는 “영국인민은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의원을 선거하는 동안만의 일이고, 의원이 선출됨과 동시에 영국인민은 노예가 되어 무로 돌아가 버린다. 자유로운 짧은 기간에 그들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자유를 잃는 것은 당연함을 알 수 있다”고 얘기했다.
이처럼 대의민주주의가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고대 아테네의 민회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사실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동력은 민회라는 제도보다 그 제도가 보장했던 여러 권리들, 즉 평등한 발언권을 의미하는 이세고리아(isēgoria), 법 앞의 평등을 의미하는 이소노미아(isonomia), 시민이라면 누구나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이소고리아(isogoria), 오늘 다스리는 사람이 내일에는 다스림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소크라티아(isokratia)가 직접민주주의를 보장했다. 그리고 이런 원리를 충실히 구현한 것은 민회라는 공간보다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베르나르 마넹(B. Manin)은 『선거는 민주적인가』(후마니타스, 2004)에서 “대의정부와 직접민주주의의 주요한 차이를 밝히려 한다면, 선거의 효과와 추첨의 효과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는 추첨을 통해 선발된 행정관들이 행정을 담당했다. 700명 가량의 행정직 중 600명 정도가 제비뽑기(klēros) 방식으로 충원되었다. 30세 이상의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행정관에 지원할 수 있었고 1년 동안 행정직을 맡았다. 행정관만이 아니다. 부올레(boulē)라 불렸던 시민대표 평의회의 위원들 500명도 추첨으로 임명되었고, 30세 이상의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1년 동안 임기를 맡았다. 그 뿐 아니다. 헬리아스타이(hēliastai)라 불렸던 시민재판정은 매년 30세 이상의 지원자 중에서 6,000명을 추첨으로 선발해 1년 동안 배심원직을 맡겼다. 그러니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는 30세 이상의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공직을 맡아야 했다.
마넹은 민주주의의 원리란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느 날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그 전에는 명령에 복종했던 사람이라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인민의 입장을 참작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다스리는 자는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뛰어난 인물, 추종해야 할 인물이 아니라 동등하고 평등한 시민이었다. 그러니 동등하게 얘기하고 자신의 권리를 내세울 수 있었다.
추첨은 모든 시민이 한번쯤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교체를 보장하고 일반 시민들이 권한을 가지게 해서 전문가의 지배를 막았다. 마넹에 따르면, 이런 “교체와 추첨의 결합은 전문성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전문가가 필요하지만 전문가들에게 모든 권력을 맡긴다면 그들이 지배하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추첨은 언젠가 나를 찾아올 공직을 준비하게 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나는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에 관심을 가지며 공직을 준비해야 했다.
일본의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도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에서 “선거를 부패시키지 않기 위해 또 상대적으로 뛰어난 대표자를 뽑기 위해”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진은 제비뽑기와 선거방식을 결합해서 무기명 투표로 세 명을 뽑고 그 중에서 대표자를 제비뽑기로 선출하는 방식이 가장 민주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경우 파벌대립이나 후계자 싸움이 무의미해지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대표자가 선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첨을 통과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가 없으며, 추첨에 떨어진 사람도 대표자에 대한 협력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정치적 기술은 ‘모든 권력은 타락한다’는 진부한 성찰과 달리 실제로 효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이용될 때 제비뽑기는 장기적으로 보아 권력을 고정화시키지 않고 우수한 경영자,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법이다.”
마넹과 가라타니의 말을 따른다면, 선거는 비민주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이다. 선거는 대중이 무능하고 전문가가 정치를 맡아야 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비민주적이다. 그리고 선거에서는 자기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기 위해 갖은 술수와 흑색선전, 매수 등이 남발된다는 점에서 야만적이다. 이런 야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부활하는 직접행동
대의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대표를 통해 말하도록 한다. 대표를 통하지 않고서 말은 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이 직접 행동하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철저히 금지된다(한화그룹 사건을 보면 대기업 회장은 이 원칙을 따라지 않아도 되는 듯하다). 내 일을 스스로 처리하려는 직접행동(direct action)이 법치주의와 충돌한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그런데 에이프릴 카터(A. Carter)는 『직접행동』(교양인, 2007)에서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동기에서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직접행동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중요한 힘이라고 주장한다. 시민의 직접행동은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시장 중심의 질서를 통제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공공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가령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땅을 점유하는 농민,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에 자기 몸을 묶는 환경운동가 혹은 국경 통제와 이주자 정책에 항의해서 강에 보트를 이어 다리를 놓는 운동가”들은 이런 직접행동을 대표한다.
특히 카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직접행동이 더욱더 중요해졌다고 본다. 개별 국가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로는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기업들이 가난한 제3세계 민중을 착취하고 빈곤을 확대시키는 현상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초국적 기업을 통제하려면 그와 마찬가지로 초국적 운동이 필요하고, 이런 운동은 제 3세계에서 “사건의 영향을 직접 받는 빈곤 계층과 상대적 약자층의 직접행동형 반대운동”이 결합할 때 힘을 발휘한다. 1세계와 3세계를 넘나드는 저항의 물결이 넘실거릴 때 카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제하고 민주주의의 결손(deficit)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카터의 지적은 국가라는 ‘경계에 갇힌 상상력’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카터는 이런 직접행동이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카터는 대중의 직접행동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하는 듯하다. 직접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카터는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간디(M. K. Gandhi)를 언급하며 비폭력을 강조한다. 카터는 간디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폭력성과 정치원리를 비판했지만 그의 사상이 자유주의와 연결될 수 있고, 간디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교의인 “법의 지배와 적법 절차를 깊이 신봉”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카터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이 스와라지의 원칙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간디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녹색평론사, 2006)에서 “진정한 스와라지는 소수의 사람이 권위를 얻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권위가 남용되었을 때 모두가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에 의해 실현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비폭력은 따라야 하는 외부의 원칙이 아니라 내 속에서 우러나는 자율적인 능력, 자율과 자치이다.
그리고 자율과 자치는 국가만이 아니라 ‘사악한 산업문명’에 맞서야 하고, 간디는 “어떤 대가를 치르든 산업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과제라고 강조했다. 산업주의의 폭력과 파괴에 맞서는 힘이 자급자족에 있음을 간디는 간파했다. 그런 점에서 간디는 초국적 운동의 마음이 마을에 있어야 함을, 즉 세계가 마을을 구하는 게 아니라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간디는 대의제도를 파괴하자고 주장하거나 대의제도를 그 자체로 인정하자고 주장하지 않고 대의제도를 괄호 속에 넣고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과 뜻에 따르는 정치를 주장했다. 간디의 말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미 야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실행할 용기가 우리에게 부족할 뿐이다. 그들의 선거에 절망하거나 냉소하지 말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은 무엇일까?
무효표를 조직하자!
2007년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재미없는 선거라는 점은 이미 분명해졌고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누구를 찍을 것인가라는 수동적인 결단만이 남아 있다. 더구나 사표(死票,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를 고려해 전략적으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라는 쓸모없는 고민도 해야 하고, 고민이 귀찮아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비난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 사면초가란 이런 상황을 뜻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대안적인 상상력을 펼치며 직접행동할 방법은 없을까? 한 가지 아이디어만 얘기해 보련다. 요즘 UCC(User-created Contents)가 유행이다. 이를 본 따서 CCP(Citizen-created policy)를 유행시키면 어떨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투표소에 가서 내 정치적 의지를 무효표로 드러내고, 내 블로그에 내가 원하는 정책 몇 가지를 쓰면 된다. 예를 들어, 지리산에 댐이나 골프장을 만들지 말자, 한미 FTA 비준을 반대한다, KTX승무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자 등등. 그리고 이런 얘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트랙백을 걸고 그 내용에 자신이 요구하는 정책을 더하면 된다. 이렇게 각자가 원하는 정책이 트랙백으로 서로 연결되어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가면 그들이 욕망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마을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트랙백을 따라가며 나와 비슷한 소망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그런 내용들이 실현가능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그런 내용만으론 정책이라 부를 수 없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런 내용이 실현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현실이 무능해서가 아닌가? 그리고 실현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무엇이 올바른지를 알고 있는데도 왜 현실을 그렇게 만들지 못한단 말인가. 또 그런 주장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드는 일을 하라고 공무원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시민이 세금을 내는 거라고. 그 세금을 타먹는 정당 역시 그런 일을 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만일 시민이 세세한 정책까지 다 짜서 말해야 한다면 국가와 정당이 필요 없으니 그것을 해체하라고.
이제는 대의정치를 개조하는 게 아니라 그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 만일 그렇게 사람들의 소망이 모인다면 내년의 절망적인 정치판에 희망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권은 계산되지 않지만 무효표는 계산되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적 의지로 표현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모일수록 그 힘은 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선거에서 누구를 당선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선거 자체를 괄호 속에 집어넣으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정책을 요구할 수 있다.
생뚱맞은 말처럼 들려 아무도 참여하지 않을 수 있으나 나는 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