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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풀뿌리 자치의 실상과 과제-2

'녹색당' 2007. 11. 9. 10:43
* 이 글은 월간 자치행정 2007년 9월에 실은 원고 입니다.
 

우리나라 풀뿌리 자치의 실상과 과제②


이  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앞선 호에서 풀뿌리 자치, 특히 지역사회에서의 풀뿌리 자치란 지역 시민들이 지역사회를 운영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임도 설명하였다. 이러한 풀뿌리 자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자치의 주체들이 형성되고 그 주체들에 의한 자치적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시민들의 참여를 위한 시스템을 개발・적용한다 하더라도, 건강한 지역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주체의 형성과 역량강화가 더불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풀뿌리 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의 의의는 왜곡될 소지가 많다.

그런 점에서 최근 행정에서 거버넌스를 자주 언급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행정에서 거버넌스에 대해 언급하고 강조하는 횟수에 비해 실제 그 내용은 매우 부실하다. 행정에서 사용하는 거버넌스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행정과정에 시민들들을 동원하거나 더 나아가도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정도의 단순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거버넌스 이전에 평등한 파트너십이라는 차원에서도 미흡하다. 즉, 당당한 한 주체로서의 시민사회 또는 시민들의 참여를 전제하기보다는 행정의 계획과 집행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합리화 전략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권력을 시장 및 시민사회와 분배하여 그 합의를 통해 우리 사회를 운영하겠다는 거버넌스의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다. 실상, 우리 사회에서는 건강한 파트너십조차 아직은 제대로 형성되어 있다고 보기 힘들다.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행정 및 정치권력과 함께 통치・운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empowerment)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행정의 거버넌스 구호 속에는 그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역량강화를 위한 어떠한 배려와 과정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실상 지역사회에 행정권력과 대등한 파트너가 되어 거버넌스의 한 주체로 작동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량이 축적되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이러한 역량 있는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 거버넌스는 작동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따라서 행정의 거버넌스 구호 속에는 거버넌스의 대등한 한 주체로서의 시민사회, 시민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동시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려는 시민들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집단화된 시민들의 조직을 형성하고 이를 육성・발전시키려는 과정이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 즉, 시민 개인의 역량강화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조직적 역량강화까지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들의 개인・집단적 역량강화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와의 파트너십이 필수적이다. 행정이 독자적으로 주민들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시민사회단체는 지역사회 차원에도 행정과 때로는 협조 때로는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해 왔다. 과거 10여년 전과 비교하면, 이들 시민사회단체는 행정 파트너로서의 자기 위상도 꾸준히 높여왔다. 행정과 시민사회단체와의 협력 관계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1).


A 유형

B 유형

C 유형

D 유형


A 유형은 시민사회단체가 수립한 목표에 대해 행정에서 재정지원과 그 집행에 대한 감시를 하고, 해당 시민사회단체가 집행을 하는 방식이다. 이 유형의 대표적 사례로는 민간단체지원사업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B 유형은 행정과 시민사회단체가 일정정도 목표를 공유하기는 하나, 행정과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은 첫 번째 유형과 마찬가지이다. 이 B 유형의 대표적 사례로는 공공근로나 민간위탁사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유형은 모두 관계의 발의(initiative)가 주로 행정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러한 발의에 대해 민간단체가 반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실제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려는 공동의 노력이 매우 미약한 편이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평등한 파트너십 관계를 기대하기 어렵다. 평등한 파트너십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지역발전을 위한 권한과 책임을 공유한다는 거버넌스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C와 D 유형은 그 앞의 유형과는 사뭇 다른 관계를 나타낸다. C 유형은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는 사업이나 필요한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행정과 시민사회단체가 공유하고 공동집행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D 유형은 이러한 관계와 역할분담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공식적 시스템을 갖춘 상태이므로, C 유형보다 진일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C와 D 유형의 경우에는 상호 대등한 관계를 통해 적절한 파트너십을 형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C 유형은 주로 일시적인 사안별로 이루어지고 한시적으로만 관계가 유지된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는 지역사회 발전이 지속가능성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치명적 약점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형태가 마지막으로 언급한 D 유형이다.

D 유형의 경우에는 거버넌스의 전형적 형태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D 유형의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혹자는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설치・운영하고 있는 지방의제21 기구, 또는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이러한 유형의 사례로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방의제21 기구의 경우 재정지원 등에 있어서 매우 우호적인 지방자치단체에서조차 행정이 진정한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의 경우도 최근에 법이 통과됨으로써 법적 위상을 확보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 자문의 권한 이외에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는 평등한 파트너십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풀뿌리 자치,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거버넌스의 개념은 실제 작동되고 있다고 보기 힘들고, 그러한 노력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와 역할분담 조차도 일부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단체와 전문가 집단에게 국한되고 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즉, 이러한 관계조차도 시민 일반에게까지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모든 책임을 행정에 돌릴 수는 없다. 행정의 역할이 있고 시민사회의 역할이 따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정이 일부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단체들 또는 전문가들만을 파트너로 인식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것이다.

행정에서도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시민들의 참여를 조직하고, 이들이 적절한 권한과 책임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할 책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행정은 지역사회의 시민사회단체를 통해 지역의 시민 대중들을 조직하고 이들이 지역사회의 제반 활동에 참여하고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그에 걸맞는 권한과 책임을 분배하기 위한 노력도 역시 기울여야 할 것이다. 풀뿌리 자치, 풀뿌리 민주주의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점차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의 정책이 단지 몇 년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 내는 식으로 기획되어서는 제대로 된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시민들의 참여와 조직화는 장기적인 계획과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과정과 더불어 풀뿌리 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는 성숙해 지는 것이다.



1) 이 유형의 구분은 남원석(2001), 「지방정부와의 협력을 통한 주민운동조직의 권능강화(empowerment)에 관한 연구 : 서울지역 주민운동조직을 사례로」, 서울대 석사논문에서 사용한 틀을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