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참여제도/주민투표
주민투표법(안)에 대한 단상
'녹색당'
2007. 9. 28. 14:56
* 이 글은 지난 2003년 8월21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아래 문제를 풀면서 이야기 해보자.
다음 중에서 행정자치부가 제출한 주민투표법(안)에 의해 주민들이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는 사안으로 적당한 것은 무엇인가?
1) 전북 주민들은 새만금 사업의 추진 여부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2) 부안군 주민들은 핵폐기장 설치의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3) 평택 주민들은 미군부대 재배치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4) 과천 주민들은 송전탑 지중화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정답은 몇 번이겠는가? 정답은 ‘없다’가 정답이다. 행정자치부가 제출한 주민투표법(안) 제8조 2항에는 ‘국가 또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권한 또는 사무에 속하는 사항’은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의 보기는 모두 국책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된 국가사무이므로 주민이 청구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8조 1항이 이를 규정하고 있는데, 공공기관 설치에 관한 사항, 자치단체 명칭, 구역의 변경, 페치, 분합에 대한 사항, 사무소 소재지 변경에 대한 사항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4. 그 밖에 주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결정사항으로서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는 사항”이 그것이다. 이 문맥만으로 보면 어떤 사안이 대상이 될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과도한 부담’, ‘중대한 영향’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고 너무 불확실한 개념이다.
이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었다고 가정하고, 주민투표를 청구해보기로 하자. 20세 이상의 주민이 50만 명인 S시에서 최근 소각장 건설을 두고 자치단체와 주민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갔다. 그래서 주민들은 자치단체에 주민투표를 청구하기로 마음먹고, 청구인명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청구인 서명 수에 기가 눌리고 만다. 주민투표법(안)은 20세 이상의 주민 총수의 5분의 1 이내라는 상한선을 두고 있다. 만약 조례가 법안을 그대로 따른다면 주민들은 10만 명의 주민에게 서명을 받아야 한다. 10만 명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서명하지 않고서는 몇 몇 주민들의 다리품만으로 10만 명을 채우기란 그리 쉽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지방의원들을 설득해 주민투표를 청구할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주민투표법(안)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청구에 부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S시의 지방의원은 27명이다. 그러니까 18명 이상의 의원에게 찬성표를 얻으면 된다. 그러나 이것도 만만치 않다. A당 의원 12명, B당 의원 8명, C당 의원 4명, D당 의원 2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된 지방의원들의 성향을 보면, 하나의 사안에 의기투합할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인다. Cross Voting 방식을 택하더라도 정당과 자치단체장과의 관계에 따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지방의원 특유의 책임회피성 몸 낮추기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시작부터 주민들은 좌절을 맛본다.
물론, 주민에 의한 청구나 지방의원에 의한 청구가 아니더라도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있다. 제9조는 ‘국가정책 등을 위한 주민투표 특례’를 명시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국가사무에 관한 주민투표를 지방자치단체에 요구할 수 있다. 주민투표에 부칠 것을 요구받은 지방자치단체장은 90일 이내에 주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얼핏 보면 국가사무에 대한 중앙행정기관의 권한쯤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한 번만 곱씹으면 중앙행정기관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충분히 있는 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중앙행정기관이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자치단체장에게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고, 요구를 받은 지방자치단체장은 무조건 주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가령, 현재 국가적 이슈로 떠오르는 새만금 사업이나 핵폐기장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 농림부장관과 산업자원부장관이 주민이 판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나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이를 무시하고 주민투표에 부칠 것을 요구한다면, 지방자치단체장은 그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자치적인 결단보다는 타치에 의해 집행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련 조항은 주민들의 참여와 자치에 역행하는 독소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개별 조례가 주민 청구 수를 완화한다면 좀 더 수월하게 주민투표를 청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법이 명시하고 있는 주민 청구 수의 상한선 범위를 대폭 완화할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얼마나 되겠는가? 거의 모든 분야의 조례가 지역적인 특색의 반영 없이 천편일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몇 몇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 유별나게 톡톡 튀는 조례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용감한 자치단체장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최근에 도입된 주민발의제도의 경우, 20분의 1 범위를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5분의 1 범위 이내’라는 문구는 너무나 가혹하다. 주민발의제도 수준으로 낮추든지, 아니면 개별 조례에 위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주민투표법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지역의 중요한 정책을 주민들의 직접 참여에 의해 결정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의 통로를 활짝 열어야 한다. 주민투표(안)이 제시하고 있는 조건은 주민투표를 하지 말자는 뜻과 같다. 과연 실효성이 있겠는가? 생색내기용 제스처라는 시민들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외에도 뜯어고쳐야 할 조항은 많다. 행자부의 시안에서 제시하는 투표청구 연령은 20세 이상의 성인에 제한하고 있는데, 최근 국회에서 선거 연령을 두고 19세, 또는 18세로 낮추려는 움직임에 비추었을 때 시대적 흐름에 못 미치는 조항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직접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민주주의 학교의 역할이다. 20세로 규정한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지방의원 청구 요건도 낮출 필요가 있으며, 또한 주민투표선거운동에 대한 규정도 주민참여의 길을 스스로 좁히고 있다는 지적도 많이 제기되고 있다.
주민투표법이 오랜 동면 생활을 마감하고 잠에서 깨어나려 한다. 그러나 첫 모습은 시민들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주민투표법은 현 정부가 내세우는 ‘참여’라는 모토에 가장 잘 어울릴법한 제도지만, 스스로 ‘참여’라는 모토를 부정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 법안은 시안에 불과하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첫 걸음부터 헛발질 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없다. 여러 단체의 의견서와 공청회 과정을 통해 그 불안감을 말끔히 씻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부디, 이런 필자의 느낌이 ‘느낌’으로 끝날 수 있길 희망해본다.
주민투표법(안)에 대한 단상
김현(풀뿌리자치연구소 연구위원)
아래 문제를 풀면서 이야기 해보자.
다음 중에서 행정자치부가 제출한 주민투표법(안)에 의해 주민들이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는 사안으로 적당한 것은 무엇인가?
1) 전북 주민들은 새만금 사업의 추진 여부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2) 부안군 주민들은 핵폐기장 설치의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3) 평택 주민들은 미군부대 재배치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4) 과천 주민들은 송전탑 지중화 찬반에 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정답은 몇 번이겠는가? 정답은 ‘없다’가 정답이다. 행정자치부가 제출한 주민투표법(안) 제8조 2항에는 ‘국가 또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권한 또는 사무에 속하는 사항’은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의 보기는 모두 국책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된 국가사무이므로 주민이 청구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8조 1항이 이를 규정하고 있는데, 공공기관 설치에 관한 사항, 자치단체 명칭, 구역의 변경, 페치, 분합에 대한 사항, 사무소 소재지 변경에 대한 사항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4. 그 밖에 주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결정사항으로서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는 사항”이 그것이다. 이 문맥만으로 보면 어떤 사안이 대상이 될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과도한 부담’, ‘중대한 영향’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고 너무 불확실한 개념이다.
이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었다고 가정하고, 주민투표를 청구해보기로 하자. 20세 이상의 주민이 50만 명인 S시에서 최근 소각장 건설을 두고 자치단체와 주민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갔다. 그래서 주민들은 자치단체에 주민투표를 청구하기로 마음먹고, 청구인명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청구인 서명 수에 기가 눌리고 만다. 주민투표법(안)은 20세 이상의 주민 총수의 5분의 1 이내라는 상한선을 두고 있다. 만약 조례가 법안을 그대로 따른다면 주민들은 10만 명의 주민에게 서명을 받아야 한다. 10만 명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서명하지 않고서는 몇 몇 주민들의 다리품만으로 10만 명을 채우기란 그리 쉽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지방의원들을 설득해 주민투표를 청구할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주민투표법(안)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청구에 부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S시의 지방의원은 27명이다. 그러니까 18명 이상의 의원에게 찬성표를 얻으면 된다. 그러나 이것도 만만치 않다. A당 의원 12명, B당 의원 8명, C당 의원 4명, D당 의원 2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된 지방의원들의 성향을 보면, 하나의 사안에 의기투합할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인다. Cross Voting 방식을 택하더라도 정당과 자치단체장과의 관계에 따라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지방의원 특유의 책임회피성 몸 낮추기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시작부터 주민들은 좌절을 맛본다.
물론, 주민에 의한 청구나 지방의원에 의한 청구가 아니더라도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있다. 제9조는 ‘국가정책 등을 위한 주민투표 특례’를 명시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국가사무에 관한 주민투표를 지방자치단체에 요구할 수 있다. 주민투표에 부칠 것을 요구받은 지방자치단체장은 90일 이내에 주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얼핏 보면 국가사무에 대한 중앙행정기관의 권한쯤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한 번만 곱씹으면 중앙행정기관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충분히 있는 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중앙행정기관이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자치단체장에게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고, 요구를 받은 지방자치단체장은 무조건 주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가령, 현재 국가적 이슈로 떠오르는 새만금 사업이나 핵폐기장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 농림부장관과 산업자원부장관이 주민이 판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나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이를 무시하고 주민투표에 부칠 것을 요구한다면, 지방자치단체장은 그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자치적인 결단보다는 타치에 의해 집행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련 조항은 주민들의 참여와 자치에 역행하는 독소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개별 조례가 주민 청구 수를 완화한다면 좀 더 수월하게 주민투표를 청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법이 명시하고 있는 주민 청구 수의 상한선 범위를 대폭 완화할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얼마나 되겠는가? 거의 모든 분야의 조례가 지역적인 특색의 반영 없이 천편일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몇 몇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 유별나게 톡톡 튀는 조례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용감한 자치단체장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최근에 도입된 주민발의제도의 경우, 20분의 1 범위를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5분의 1 범위 이내’라는 문구는 너무나 가혹하다. 주민발의제도 수준으로 낮추든지, 아니면 개별 조례에 위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주민투표법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지역의 중요한 정책을 주민들의 직접 참여에 의해 결정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의 통로를 활짝 열어야 한다. 주민투표(안)이 제시하고 있는 조건은 주민투표를 하지 말자는 뜻과 같다. 과연 실효성이 있겠는가? 생색내기용 제스처라는 시민들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외에도 뜯어고쳐야 할 조항은 많다. 행자부의 시안에서 제시하는 투표청구 연령은 20세 이상의 성인에 제한하고 있는데, 최근 국회에서 선거 연령을 두고 19세, 또는 18세로 낮추려는 움직임에 비추었을 때 시대적 흐름에 못 미치는 조항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직접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민주주의 학교의 역할이다. 20세로 규정한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지방의원 청구 요건도 낮출 필요가 있으며, 또한 주민투표선거운동에 대한 규정도 주민참여의 길을 스스로 좁히고 있다는 지적도 많이 제기되고 있다.
주민투표법이 오랜 동면 생활을 마감하고 잠에서 깨어나려 한다. 그러나 첫 모습은 시민들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주민투표법은 현 정부가 내세우는 ‘참여’라는 모토에 가장 잘 어울릴법한 제도지만, 스스로 ‘참여’라는 모토를 부정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 법안은 시안에 불과하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첫 걸음부터 헛발질 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없다. 여러 단체의 의견서와 공청회 과정을 통해 그 불안감을 말끔히 씻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부디, 이런 필자의 느낌이 ‘느낌’으로 끝날 수 있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