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환경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과 '환경의 역습'

'녹색당' 2007. 9. 28. 15:14
* 이 글은 2004년 1월12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과 ‘환경의 역습’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행복할 수 있습니까?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대게, 행복한 사람들은 우리가 인지하는 행복의 조건이 얼추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일 것이다. 배우자의 조건, 자녀의 문제, 돈, 종교, 인척간의 관계, 살고 있는 환경, 건강 등.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왜 행복하지 않은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행복의 조건 중 무엇인가가 어긋났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는다면, 그는 행복할 수 없다.

통계자료를 토대로 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사람들의 대답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대답은 일정한 차이점을 보일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즉, 행복한 사람들의 대답은 엇비슷한 반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대답은 제각각일 것이다.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떠올려보자.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 첫 문장을 두고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라고 부른다. 톨스토이는 결혼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조건들이 성공적이어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 중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성공한 결혼생활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은 그 이유가 비슷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유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현대 도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행복의 조건 중 하나를 누군가에게 강탈당했다. 숨쉬고 먹고 이동하는 생활의 기본 요소들로 인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늘에 떠다니는 ‘공기’는 더 이상 대자연의 선물이 아니다. 더 편리한 도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순간, 인간의 행위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고 있다. SBS 2004신년대기획 ‘환경의 역습’은 바로 그런 인간의 자화상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부안에서 벌이는 주민들의 저항을 두고 설왕설래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 에너지시스템의 허점에 있다. 정부가 핵에너지를 고집하겠다는 것은 주민들의 터전에 불행의 씨앗을 뿌리겠다는 의지와 진배없다. 현대자동차가 연간 수출 100만대 시대를 자축하는 사이에 사회적 약자들은 산소 호흡기에 자신의 생명줄을 위탁해야만 한다. 아니,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보기 좋으라고 사과나무에 농약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건강한 미래는 요원한 일이다.

현대화된 도시시스템은 인간에게 행복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대문 앞에 즐비한 자동차의 홍수를 그저 ‘인내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 치의 주차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자정에 이르러서도 경음기를 눌러대며 다툼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왜 자동차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문하지 않게 한다. 식탁 위의 음식도 마음 졸이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가르친다. 어차피 안 먹어도 죽고, 먹어도 죽을 거면, 차라리 눈 딱 감고 먹는 게 어떻겠느냐고 타이르기도 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그렇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에 의하면, 우린 이미 행복의 조건 중 하나를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식탁에 올라온 음식을 불안에 떨며 먹어야 하는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행복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글쎄.......노엄 촘스키는 말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루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나는 행복을 위해 대가를 치룰 각오가 있는가? 갑신년 새해, 무거운 고민이 어깨를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