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운동 일반
'우리들의 리그'를 위해
'녹색당'
2007. 9. 28. 15:24
* 이 글은 2004년 4월6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신문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텔레비전에 그놈들이 나온다면 이젠 부셔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정치 때문에 맘이 상해서 들이킨 술 때문에 루돌프 사슴코처럼 빨간 코가 되어버린 토끼씨, 이젠 정말 그놈들의 정치, ‘그들만의 리그’에 신물이 났다.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그놈들의 사진을 싸그리 떼어 밑닦개로 쓰고 싶었지만 똥꼬가 헐까봐 참아왔다. 답답한 맘에 술병을 기울여보지만 벌써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그동안 억눌러온 분노를 참지 못한 토끼씨, 드디어 작대기 하나를 떼고 과거의 모습인 도끼씨로 돌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네놈들에게 불벼락을 내려주마, 기세등등하게 현관을 나서던 도끼씨,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거리로 나가서 나는 무슨 말을 외치고 무엇을 위해 싸울 건가?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끼씨는 현관이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이다.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유권자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대표를 선택하고 그 대표가 국민을 대변하며 정치를 한다. 지금 저 곳에서 멋대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국회의원들 역시 국민들이 뽑은 대표자들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인들을 탓하기 전에 그놈들을 뽑은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하는 걸까? 그럼, 이 꿀꿀한 비극이 모두다 내 탓?
힘이 빠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도끼씨, 허망함에 눈물을 찔끔거리다 문득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왜 우리는 선거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야 할까? 왜 우리는 그 속에서만 미래를 봐야 할까? 정치는 진정 ‘그들의 공간’인 국회나 청와대, 정부종합청사에서만 가능한 걸까? 그 옛날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J. J. Rousseau가 말했듯이, 우리는 선거 때만 자유로울 뿐 나머지 시간엔 감옥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도끼씨는 여러분의 한 표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중앙선관위 광고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우씨, 그래도 내가 한때는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도끼씨는 묵혀뒀던 책을 꺼내 읽으며 고민에 빠졌다. “시민들이 자신과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는 후보자를 발견할 수가 없다면 그는 자신의 진정한 대표자를 의회에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시민들은 적은 수의 후보자들 중에서 선출해야 하므로 투표에 들어가기 전에 타협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선거가 시민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상투적인 말이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로버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책세상, p.74∼75)
맞아, 정치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라며 울며 겨자먹기로 맘에 차지 않는 인물에게 투표했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리고 설혹 나를 대변한다고 여기는 인물을 뽑았다 치자. 그 사람이 국회로 들어가 내 의견을 충실하게 대변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비밀투표라 내가 그 사람을 뽑았음을 증명할 수도 없으니, 안 들어주면 그만이잖아. 그러니 ‘철새’정치인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거구. 게다가 4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말고 내가 그 사람을 통제할 장치가 없잖아. 한국에는 국민소환제도 없고. 그러면서도 나는 선거 때 투표하는 것만으로 ‘나의 정치’를 다했다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선거라는 ‘우리’에 갇혀 내가 진정 바라는 걸 까먹고 살아왔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장이 아니라 단순히 나를 지배할 통치자를 ‘승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라면서 왜 우리는 한번도 스스로 지배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고민에 빠진 도끼씨, 이제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리라 마음을 먹고 거리로 나섰다. 원래 정치의 장은 삐까번쩍한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거리가 아니었던가. 대학로엔 반전(反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한 목소리로 이라크전 파병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 정치가 자리잡을 곳은 바로 이곳이야. 도끼씨도 한 목소리로 반전을 외쳤다. “파병 반대, 전쟁 반대” 집회가 끝나고 대중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거리행진이 시작됐다. 같이 발걸음을 떼던 도끼씨는 대열이 광화문에서 탄핵반대집회에 결합한다는 얘기를 듣고 주저했다. 거기 가서 무슨 구호를 외쳐야 하는 거지? 지금 탄핵반대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일까? 불과 몇 달 전,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목을 매고 몸을 불태웠지만 정치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이 땅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파병을 고집하고 있다. 그런 구체적인 정책에 관해 한 마디 논의도 없이 ‘민주 대 반민주’라니, 그건 그들만의 리그에 말려드는 게 아닐까? 주저하던 도끼씨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집회에서 목청을 높였던지라 노곤함이 밀려온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스르르 잠이 든 도끼씨, 꿈속에서 차를 갈아타니 고진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는 마을이장을 뽑기 위한 ‘추첨’이 있으니 빠지지 말고 모이라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이장을 추첨으로 뽑는다고? 참, 희한한 마을도 다 있군. 도끼씨는 궁금한 마음에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정말 마을사람들이 제비뽑기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도끼씨는 앞으로 가 회의를 주도하던 사람에게 말을 붙였다.
“왜 제비뽑기로 이장을 뽑죠?”
그 사람은 별 당연한(!) 질문을 다 한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흔쾌히 대답했다.
“제비뽑기란 권력이 집중되는 곳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우연성에 의해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는 것입니다.”(『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이매진, p.133)
생각해보니 그럴 듯 하다. 제비뽑기로 뽑으면 어느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고, 누가 권력을 잡을지 모르기 때문에 파벌을 만들거나 표를 매수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언제 자신이 뽑힐지 모르니 모든 사람이 항상 마을일에 관심을 가질 것도 같다. 하지만 이장이라면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않을까? 그래서 물어보니 무조건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여러 명을 기명투표로 뽑고, 그 사람들이 제비를 뽑는다고 대답한다. 오호, ‘선거+추첨’이라, 그거 재미있는 발상이네. 어떻게 해서 이런 방법을 생각하게 됐을까?
도끼씨를 궁금하게 쳐다보던 그 사람은 알겠다는 듯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얘기를 덧붙인다.
“우리도 예전에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지요. 선거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자신을 대변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광분하기도 했고. 그때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제안했던 분이 이런 말을 했죠. “인민을 진정으로 대표할 장치로서 상정한 국민투표는 필연적으로 인민을 배반하는 결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국민투표에 의한 결정이 실패로 끝난 경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잘못된 판단을 한 사람들 자신이자 ‘민의’ 자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사람들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포기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혹은 관료 조직에 판단과 결정을 맡겨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따라서 이러한 ‘직접성’에 의해 대의제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대표자(주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끝난다.”(같은 책, p.131) 듣고 보니 옳은 말이더라구요.”
그때 버스가 덜컹거려 도끼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쉬웠다, 더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광화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지 계속 차가 막혔다. 도끼씨는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는 분노는 참여하지 않는 냉소만큼 위험하다. 이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우리들의 리그’를 시작할 때이다.
'우리들의 리그'를 위해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운영위원)
신문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텔레비전에 그놈들이 나온다면 이젠 부셔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정치 때문에 맘이 상해서 들이킨 술 때문에 루돌프 사슴코처럼 빨간 코가 되어버린 토끼씨, 이젠 정말 그놈들의 정치, ‘그들만의 리그’에 신물이 났다.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그놈들의 사진을 싸그리 떼어 밑닦개로 쓰고 싶었지만 똥꼬가 헐까봐 참아왔다. 답답한 맘에 술병을 기울여보지만 벌써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그동안 억눌러온 분노를 참지 못한 토끼씨, 드디어 작대기 하나를 떼고 과거의 모습인 도끼씨로 돌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네놈들에게 불벼락을 내려주마, 기세등등하게 현관을 나서던 도끼씨,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거리로 나가서 나는 무슨 말을 외치고 무엇을 위해 싸울 건가?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끼씨는 현관이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이다.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유권자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대표를 선택하고 그 대표가 국민을 대변하며 정치를 한다. 지금 저 곳에서 멋대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국회의원들 역시 국민들이 뽑은 대표자들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인들을 탓하기 전에 그놈들을 뽑은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하는 걸까? 그럼, 이 꿀꿀한 비극이 모두다 내 탓?
힘이 빠져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도끼씨, 허망함에 눈물을 찔끔거리다 문득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왜 우리는 선거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야 할까? 왜 우리는 그 속에서만 미래를 봐야 할까? 정치는 진정 ‘그들의 공간’인 국회나 청와대, 정부종합청사에서만 가능한 걸까? 그 옛날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J. J. Rousseau가 말했듯이, 우리는 선거 때만 자유로울 뿐 나머지 시간엔 감옥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도끼씨는 여러분의 한 표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중앙선관위 광고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우씨, 그래도 내가 한때는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도끼씨는 묵혀뒀던 책을 꺼내 읽으며 고민에 빠졌다. “시민들이 자신과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는 후보자를 발견할 수가 없다면 그는 자신의 진정한 대표자를 의회에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시민들은 적은 수의 후보자들 중에서 선출해야 하므로 투표에 들어가기 전에 타협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선거가 시민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상투적인 말이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로버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책세상, p.74∼75)
맞아, 정치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라며 울며 겨자먹기로 맘에 차지 않는 인물에게 투표했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리고 설혹 나를 대변한다고 여기는 인물을 뽑았다 치자. 그 사람이 국회로 들어가 내 의견을 충실하게 대변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비밀투표라 내가 그 사람을 뽑았음을 증명할 수도 없으니, 안 들어주면 그만이잖아. 그러니 ‘철새’정치인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거구. 게다가 4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말고 내가 그 사람을 통제할 장치가 없잖아. 한국에는 국민소환제도 없고. 그러면서도 나는 선거 때 투표하는 것만으로 ‘나의 정치’를 다했다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선거라는 ‘우리’에 갇혀 내가 진정 바라는 걸 까먹고 살아왔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장이 아니라 단순히 나를 지배할 통치자를 ‘승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라면서 왜 우리는 한번도 스스로 지배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고민에 빠진 도끼씨, 이제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리라 마음을 먹고 거리로 나섰다. 원래 정치의 장은 삐까번쩍한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거리가 아니었던가. 대학로엔 반전(反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한 목소리로 이라크전 파병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 정치가 자리잡을 곳은 바로 이곳이야. 도끼씨도 한 목소리로 반전을 외쳤다. “파병 반대, 전쟁 반대” 집회가 끝나고 대중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거리행진이 시작됐다. 같이 발걸음을 떼던 도끼씨는 대열이 광화문에서 탄핵반대집회에 결합한다는 얘기를 듣고 주저했다. 거기 가서 무슨 구호를 외쳐야 하는 거지? 지금 탄핵반대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일까? 불과 몇 달 전,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목을 매고 몸을 불태웠지만 정치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이 땅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파병을 고집하고 있다. 그런 구체적인 정책에 관해 한 마디 논의도 없이 ‘민주 대 반민주’라니, 그건 그들만의 리그에 말려드는 게 아닐까? 주저하던 도끼씨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집회에서 목청을 높였던지라 노곤함이 밀려온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스르르 잠이 든 도끼씨, 꿈속에서 차를 갈아타니 고진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는 마을이장을 뽑기 위한 ‘추첨’이 있으니 빠지지 말고 모이라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이장을 추첨으로 뽑는다고? 참, 희한한 마을도 다 있군. 도끼씨는 궁금한 마음에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정말 마을사람들이 제비뽑기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도끼씨는 앞으로 가 회의를 주도하던 사람에게 말을 붙였다.
“왜 제비뽑기로 이장을 뽑죠?”
그 사람은 별 당연한(!) 질문을 다 한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흔쾌히 대답했다.
“제비뽑기란 권력이 집중되는 곳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우연성에 의해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는 것입니다.”(『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이매진, p.133)
생각해보니 그럴 듯 하다. 제비뽑기로 뽑으면 어느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고, 누가 권력을 잡을지 모르기 때문에 파벌을 만들거나 표를 매수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언제 자신이 뽑힐지 모르니 모든 사람이 항상 마을일에 관심을 가질 것도 같다. 하지만 이장이라면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않을까? 그래서 물어보니 무조건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여러 명을 기명투표로 뽑고, 그 사람들이 제비를 뽑는다고 대답한다. 오호, ‘선거+추첨’이라, 그거 재미있는 발상이네. 어떻게 해서 이런 방법을 생각하게 됐을까?
도끼씨를 궁금하게 쳐다보던 그 사람은 알겠다는 듯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얘기를 덧붙인다.
“우리도 예전에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지요. 선거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자신을 대변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광분하기도 했고. 그때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제안했던 분이 이런 말을 했죠. “인민을 진정으로 대표할 장치로서 상정한 국민투표는 필연적으로 인민을 배반하는 결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국민투표에 의한 결정이 실패로 끝난 경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잘못된 판단을 한 사람들 자신이자 ‘민의’ 자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사람들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포기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혹은 관료 조직에 판단과 결정을 맡겨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따라서 이러한 ‘직접성’에 의해 대의제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대표자(주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끝난다.”(같은 책, p.131) 듣고 보니 옳은 말이더라구요.”
그때 버스가 덜컹거려 도끼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쉬웠다, 더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광화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지 계속 차가 막혔다. 도끼씨는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는 분노는 참여하지 않는 냉소만큼 위험하다. 이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우리들의 리그’를 시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