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정치

풀뿌리정치운동와 선거

'녹색당' 2007. 9. 28. 16:29
* 이 글은 2005년 4월20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풀뿌리정치운동와 선거

하승우(시민자치정책센터 운영위원)

현실세계에서는 두 가지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 하나는 대의제라는 제도정치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정치(power politics)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의 다양한 이슈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정치, 즉 기존에는 정치라고 느껴지지 않던 소소한 문제들을 통해 일반 대중이 의사결정과정을 연습하고 실천하는 정치이다. 평범한 대중, 시민, 주민을 정치적 주체(grass)로 삼아 사회를 근본적으로(root)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는, 풀뿌리정치운동은 권력정치보다는 정치적인 것의 정치를 통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정치적인 것의 정치보다 권력정치의 힘이 훨씬 더 세다. 특히나 선거라는 상황이 닥쳐오면 일상의 장마저도 선거를 중심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풀뿌리정치운동은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 정치가 썩어있고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되기에,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가 그 썩은 뿌리를 빨리 잘라내는 것이 절실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는 그런 정치가 싹트지 않도록 아예 그 토대를 바꿔버리는 게(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절실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제도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정치의 차이점은 목적을 실현하는데 있어 전술상의 차이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두 가지의 정치를 단순히 전술상의 차이로 바라보는 것은 큰 오류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국사회의 ‘현실적인 맥락’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솔직히 한국사회에서 대중, 혹은 시민, 또는 주민이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지가 얼마나 되었나? 폭압적인 식민지와 미군정, 군부의 정치를 겪어오면서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망각하고 조용히 사는데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말 많으면 빨갱이였고, 지금도 여전히 자기 목소리를 내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여기며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 시민, 주민은 권력정치에서 배제된 ‘수동적인 사람’이었고 선거 때마다 기계적으로 한 표를 찍는 ‘투표기계’였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거나 직접 문제해결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수동적으로 권력정치에 기대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져 왔다.
이런 상황에서 풀뿌리정치운동은 모든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잉되고 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정치를 대체하는 정치운동이다.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과정이 바로 풀뿌리정치운동이다(비슷한 맥락에서 미국의 흑인정치에서 협의[deliberation] 이전에 자기고백[testimony]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아침이 되어 목소리를 잃어버린 대중, 시민, 주민이 인어공주처럼 거품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살며시 다가가 “당신은 정치의 소중하고 능동적인 주체”라고 속삭이는 운동이, 그 사람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운동이 풀뿌리정치운동이다. 정치의 주체였으나 주체임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다시 그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풀뿌리정치운동이다.
그렇기에 풀뿌리정치운동의 가장 큰 힘은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가져오는 ‘방식’에 있다. 한국처럼 정치가 왜곡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운동은 몇몇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 이전에, 사람들 각자가 바람직하고 올바르다고 여기는 삶의 목표를 얘기하도록 하고 그 얘기를 들어주는 운동이다. 풀뿌리정치운동의 가장 큰 몫은 바로 그런 운동을 실천하는데 있다.
제도정치나 권력정치를 무조건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권력정치를 논하기 전에 황폐화된 일상의 장을, 진정 정치의 토대가 되는 장을, 정치의 주체들이 살며 숨쉬는 장을 재구성하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그러면 권력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허나 그런 주장은 현실을 무시하는 ‘당위적인 주장’이다.
쌍방향 전술 혹은 전략은 양자가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져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아직 그런 균형을 맞춘 적이 한 번도 없다. 앞서 얘기했듯이 언제나 권력정치가 삶의 주도권을 잡고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학습과 임파워먼트(empowerment) 과정이 반드시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지역이라는 장 역시 결코 단일하지 않다. 그 속엔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작동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풀뿌리정치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민사회는 우리 머리 속에 잠재된 환상, 당위적이고 추상적인 원리일 뿐이다.
이제는 두 정치의 장을 구분할 시기가 되었다. 자신의 운동이 어디에 방점을 찍는가에 따라 활동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제는 ‘시민후보’라는 딱지를 떼야 할 시기가 되었다. 정말 제도정치, 권력정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다른 후보들처럼 공약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그것이 기성정치를 변화시키는 길이다). 왜냐하면 시민후보라는 표현을 쓸 경우, 지역의 풀뿌리운동단체들을 선거과정 속에 포함시키고 한 번의 투표로 전체 운동을 평가받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후보가 낙선할 경우 지역의 풀뿌리조직이 동반해서 무너질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풀뿌리운동단체는 결코 선거를 통해 평가될 수 없고 그렇게 평가되면 안 된다. 근본적으로 따질 때, 대의제라는 선거방식은 정치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들기에 풀뿌리운동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는 단기적인 전망(4년)으로 평가받는 장이고 근본적인 가치보다 이해관계, 그런 이해관계의 조직화가 당락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단체의 활동과 선거를 연계시키는 것은 그래서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기존의 활동을 선거운동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지말고, 선거는 선거를 치르기 위한 조직을 따로 구성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풀뿌리정치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후보자는 선거과정에서 실현가능한 풀뿌리 전술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선거의 풀뿌리 전술 역시 내용이 아니라 그 형식에서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성정당들도 조건이 허락하는 한, 아니면 선거 때만 정략적으로 풀뿌리정치의 내용을 빌려서 쓸 수 있기 때문이다(독일에서 기성정당들이 녹색당의 정책을 베꼈듯이, 기성정당도 참여예산제나 여러 내용을 활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용보다 선거의 새로운 형식이, 선거에 임하는 과정이 기성정치와의 차별성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고민할 때, 권력정치의 장도 변화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일본의 ‘대리인 운동’을 한국사회에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약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얘기한 선거와 활동의 연계 외에도, 여전히 한국사회의 현실은 권력정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솔직히 대리인이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보다 ‘누가’ 대리인이 될 것인가를 합의보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의 대리인 운동은 대리인이 되고자 하는 개인에게 구체적인 정강과 정책에 대한 ‘동의’를 요구해야 할 뿐 아니라 동의를 어길 경우 소환하고 징계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누가’의 문제를 넘어 ‘어떤’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
현실의 가능성은 여기저기서 피어나고 있다. 조금 늦게 찾아오긴 했지만 봄은 우리를 찾아온다. 허나 그 봄의 결실을 자신의 것이라 하진 말라. 그건 아무의 것도 아닌, 모두의 것이다.


사상에 대하여

김남주

새로운 사상은
썩고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 태어난다
이를테면 동학이 그러했다 반봉건싸움에서
새로운 사상은 그 초년에는
거리와 시장의 우스갯소리가 되기도 하고
사문난적이라 박해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반역의 씨앗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그것을 멀리하고
굶주린 이들이 그것을 가까이 한다
사상은 노동의 대지를 그 밭으로 삼는다
처녀들은 깊숙한 곳에 호미로 그것을 파묻고
사내들은 억센 주먹으로 그것을 지킨다
밤이 그들의 옷이고 별이 그들의 미래다
고난의 긴 세월 낡은 껍질과의 싸움에서
새싹의 기운은 이기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지천으로 그 가지를 뻗는다
사상의 꽃이 아름다운 것은
민중의 피로 그것이 개화하기 때문이다
그 열매가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만인의 입으로 그것이 들어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