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운동사례

지역문화의 전형을 일군 “원주한지문화제” -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를 찾아 -

'녹색당' 2007. 6. 1. 15:26
"지역문화의 전형을 일군 “원주한지문화제”"
-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

일시 : 2002년 8월 9일 오전 10시
장소 :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 사무실
인터뷰 : 이선경(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 정책연구실장/원주한지문화제위원회 기획위원장)


장장 2시간 동안 이선경 위원장은 거침없이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간 인터뷰 중, 가장 울트라 슈퍼 서스펙스한 대장정의 인터뷰였다. ‘원주한지문화제’에 얽힌 지난한 과정과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각본 없는 한편의 드라마다. 이선경 위원장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한지(韓紙)’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이제 내 머리 속에도 원주 하면 연상되었던 국립공원 ‘치악산’이나 남한강 본류와 합치는 ‘섬강’이 사라지고, 오로지 ‘한지’만이 덜렁 남았다. 세뇌 당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지식의 유입이라고 해야 옳을 일이다. 아무튼, 일개의 시민단체가 부단한 노력으로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될, 아니 없던 것을 새로 만든 지역축제로 발전시킨 역사적인 이야기에 우리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단지 번성한 축제가 아니라, 한 지역의 지존(至尊)을 높이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에 지방자치와 문화라는 관점에서도 높이 살만한 일이다. 자 그럼, 그 서스펙트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원주한지문화제”는 이런 과정을 겪었다!!

'원주한지문화제'의 일대기를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정리하게 되면 많은 지면이 할애될 것 같아,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고 했는데도, 한 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원주시가 이 지역 출신의 최규하 전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가를 보전하고 박물관도 짓겠다며 114억 원의 예산을 잡음.(94년) =====>
▶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는 일제시대 때 만주국 관리 출신으로 친일행각을 했고 광주 학살이 벌어질 때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사죄를 하지 않고 있는 최규하 전대통령이 원주를 자랑할만한 인물이 아니며, 또한 생존하는 인물을 기리는 사업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운동을 전개함. =====>
▶ 시의원과 공무원들은 94년부터 원주시 예산서에 올라온 사업이므로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강행의사를 비침. 당시만 하더라도 통일문제/민주화문제라는 거대 담론을 고민하던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는 지역의 구체적인 살림에 대한 고민이 없었음. 예산 심의, 집행 과정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는 ‘예산’을 공부하기 시작함. =====>
▶ 97년, 처음으로 원주시 예산감시운동포럼 등을 개최, 지역단체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예산감시운동을 전개하고 연구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타 지역에 신선한 자극을 선사함. =====>
▶ 결국, 이런 운동이 기폭제가 돼, 96년부터 전개된 최규하 생가 보전 사업이 3년간의 반대운동 끝에 98년 4월에 백지화됨. =====>
▶ 그렇다면 원주가 무엇인가? 원주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이 최규하 전대통령 밖에 없는가? 라는 고민을 시작하면서, 원주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찾는 일을 시작함. =====>
▶ 원주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찰옥수수 축제”와 “토지문학제”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았더니, 원주를 대표할만한 축제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됨. 찰옥수수는 강원도 횡성을 대표하는 특산품이었고, “토지문학제”는 박경리 소설가가 허락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원주의 정체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인식함. =====>
▶ 직접 지역조사를 착수한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는 3년 동안 비상카메라를 움켜쥐고 일제시대 때부터 살아왔던 70세 이상의 어르신들을 찾아가 사진 찍고, 녹취하고, 막걸리 마시면서 동고동락을 함. 더불어 원주와 관련된 각종 국내 문헌자료를 조사하고,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일본 답사도 여러 차례 실시함. =====>
▶ 이런 결과로 얻어낸 것은, 원주가 한지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임. 인터뷰에 응한 어르신들의 80% 이상이 “한지”를 거론했으며, 특히 원주시에 좋을 ‘호(好)’, 닥나무 ‘저(楮)’를 썼던 “호저면(好楮面)”이라는 조그마한 면이 있는데, 뜻을 풀이하면 “좋은 닥나무의 마을”이었다고 함.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은 이 호저면에서 생산된 연간 40만근의 닥피(닥나무의 껍질)를 가져갔다고 전하고 있음. 호저면을 비롯해 귀래면, 신림면 등은 유명한 “한지 부락촌”이었다고 증언함. =====>
▶ 문헌에 의하면, 원주라는 마을은 서당이나 서원, 향교 등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고, 이 말은 곧, 종이를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고장이라는 것을 암시함. 또한 원주 인근 마을 문막에는 경주 불국사보다 더 큰 ‘법천사’라는 절터가 남아 있는데, 종이를 주로 사용하고 만들었던 곳이 사찰이었음을 감안하면 원주라는 마을의 특수성을 알 수 있음. 이 뿐만 아니라 원주는 600년 동안 강원도 도청 소재지였고, 1년 평균 과거시험에 33명 이상 등급하므로써 한양 이남 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합격률을 보였음. 원주를 선비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이유도 이러한 배경 때문인데, 자연스럽게 종이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음. =====>
▶ 이것으로도 부족해 한지로 유명한 전주를 찾아가기도 했음. 전주시청 문화담당 공무원에 의하면 예로부터 전주는 창호지, 장판지와 같은 하얀색 한지가 유명했고, 원주는 각종 색지 한지로 유명했다고 함. 실제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한솔 종이박물관에는 원주를 대표하는 종이로 색지 한지를 전시하고 있었음. =====>
▶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그들의 마수(?)를 뻗친 것은 당연함. 일본을 세 차례 방문하면서 얻은 놀라운 사실은, 일본의 사이따마현에는 인구 5000여명이 거주하는 시가끼시치부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고노’라는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함. 고려시대 강원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주했다는 뜻에서 ‘고노’라는 성을 사용하는데, 이 마을 곳곳에는 ‘종이를 뜨는 사람의 혼’을 기리는 사당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원주의 한지기술이 이전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음. =====>
▶ 이런 조사를 밑거름으로 99년 제1회 “원주한지문화제”를 개최함으로써 올해 4회 째를 맞음.


평균 연인원 20여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 “원주한지문화제”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역일꾼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3년이라는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은 그들은 아주 소중한 것을 얻었다. ‘숨어 있는 1inch’를 찾은 것이 아니라, 한지문화의 ‘잊혀진 전부’를 찾은 것이다. 인터뷰 내내 이선경 위원장에게서 자부심이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한발 더 나아가 이선경 위원장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가 한지에 주목한 이유는, 한지가 남북이 함께 고민하고 공유할 수 있는 민족의 대표문화라는 것입니다. 종이의 역사는 인류문명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해왔는데, 고려시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친 특산품은 고려한지였고, 담징이라는 스님이 일본에 전해준 문화도 한지였습니다. 즉, 한지는 민족의 정신이자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원주의 한지문화를 잘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남북이 동질적인 문화를 회복하는데 중요한 매개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선경 위원장이 밝힌 궁극적인 ‘원주한지문화제’의 갈 길이다. 물론 그 길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와 이념이 차지한 자리에 문화와 경제교류가 통일로 가는 더 빠른 지름길임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선경 위원장의 바람도 그리 먼 미래의 이야기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한지가 원주의 얼이 담겨 있고, 남북을 잇는 민족의 대표문화라고 한다면 왜 지금까지 원주 한지가 그 실체를 들어내지 않았을까?

“제가 보기엔 이런 것 같아요. 한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돈 있는 사람이나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 또는 글 읽는 선비들이 사용했는데, 한지를 만든 사람들은 다 민중들이었던 거죠. 흔히 한지를 일컬어 ‘백지(百紙)’라고 합니다. 나무를 심는 것부터 한지를 뜨는 것까지 100번의 손이 간다는 뜻이거든요. 민중들의 삶이 묻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돈과 권력이 있는 양반들이 이를 우습게 본 겁니다. 일종에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하! 그렇구나 싶다. 민초들은 주로 한지를 겨울에 만들었다고 한다. 농번기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부락 주민들이 개울에 모여 큰 가마 속에 닥나무를 넣고 쪄서 피를 벗기고, 이를 다시 한지로 뜨는 작업을 하는데, 혼자서 살 수 없는 공동체 노동이다. 이런 공동체 노동을 지체 높으신 어르신들이 장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나마 후손들이 이를 복원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원주한지문화제’를 통해 바라본 지역문화의 방향

‘원주한지문화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철저하게 민간에서 주도했다는데 있다. ‘원주한지문화제’가 처음 개최되었던 지난 99년, ‘원주한지문화제’ 계획서를 들고 경기도청을 찾았다. 공동주관으로 강원도라는 이름을 각종 전단지에 표기해주면 재정적인 지원까지도 약속했지만,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는 이를 거부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전국의 관 주도의 축제가 7-800여 개가 있지만, 관이 관여하는 행사는 모두 망가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민간이 주도할 때만이 올곧게 지역문화로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이 이선경 위원장의 설명이었다. 생색내지 않고 소리 없이 도와준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수용할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하자, 강원도청도 마음이 동했는지, 후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원주한지문화제’는 민간이 주도한 행사다. 행사 현장을 상기해보자. 노란 조끼 입은 수백명의 대학생 자원봉사자들, 또 빨강 조끼 입은 수백명의 청소년체험단, 그리고 수십명의 아줌마 자원봉사자들, ‘원주한지문화제는’ 이렇게 천 단위의 자원봉사들이 만들어낸 지역문화축제다. 그러니 선심성, 일회성, 전시성이라는 단어가 붙을 리가 없다. 이렇게 4회 째를 맞이하면서 공무원들의 마인드도 많이 변한 모양이다. 지금은 오히려 ‘원주한지문화제’를 민간이 계속 맡아 주길 원한다. 그들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선경 위원장은 이렇게 큰 행사를 준비하면서 관이 가지고 있는 우월함, 수월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재원을 쥐고 있기 때문에 관과 적절한 파트너쉽을 취한다면 더 좋은 행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한다.

두 번째는 철저하게 주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축제를 상기해보자. 행사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각종 장터와 포장마차가 즐비해 있고, 야밤까지 먹자 분위기로 전락한 모습. 행정당국도 으레 이런 모습을 부추기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원주한지문화제’는 한지와 무관한 어떤 것도 배제한다. 이를테면, 어떤 지역에 축제가 열리면 소위 ‘축제 브로커’라고 불리는 포장마차 노점상들이 어김없이 몰려온다. 이런 포장마차 상인들이 일정하게 축제 분위기를 돋구는 역할을 하지만, 행사 본래 취지를 상당히 훼손하는데도 일조한다. 아무리 경찰이 으르고 협박해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 결국 행사가 망가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원주한지문화제위원회’는 이를 철저히 배제했다. 공권력을 동원하거나 협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며칠 간, 이 행사의 취지가 무엇이고, 기존 행사와 차별성이 무엇인지 등등 진솔한 대화를 시도했고, 결국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톨게이트 비용, 하루 운송비 등 약간의 보상을 해주고. 이렇듯, ‘원주한지문화제’는 주제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다. 한지를 소개할 수 있는 각종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한지 공예인들을 육성하기 위해 한지대전을 개최하고, 한지로 만든 옷을 만들어 패션쇼를 하고, 각종 체험교실을 만들고, 각종 포럼도 개최하는 등, 볼거리들을 풍성하게 했다. 이런 노력으로 강원도가 지정한 ‘강원도를 대표하는 우수 기획 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앞서 밝히고 있듯, 철저한 사전 조사가 뒤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지역축제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누가 어떤 내용으로 하는가에 앞서 지역을 대표하는 소재를 발굴하고 지역민들이 참여해서 신명나게 놀 수 있는 판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가 다리품을 팔며 3년 동안 지역을 샅샅이 조사한 결과가 지금의 ‘원주한지문화제’를 만든 것이다. 사전조사는 ‘원주한지문화제’의 근간이기도 하지만 이 행사를 추동하기 위한 자신감이기도 했다. 누구도 손대지 않았던 한지에 얽힌 각종 자료들을 지금의 정서에 맞게 재구성한 노력은 100점 점수를 줘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이 민간만이 가지고 있는 자발성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원주한지문화제’를 통해 눈에 보이는 성과도 많이 남겼다. 치악산 구룡사 입구에 마련한 ‘한지공예관’, 사단법인 ‘한지법인’ 설립, 상지대학교에 관련 학과 설립, 그리고 곧 조성될 ‘한지테마파크’의 설립 등이 그것이다. 이 중, '한지테마파크‘의 설립은 한지 대중화에 새로운 전환을 맞이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1차 심사가 끝난 상태이고, 올해 안에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전국적으로 종이박물관이 46개에 달하지만, 우리의 실정은 한솔 기업체가 만든 종이박물관이 유일하다. 유수한 종이의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실정을 감안하면, ’한지테마파크‘가 기여할 문화적인 효과 및 가치는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원주의 대표문화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표문화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종이의 메카‘가 될 것이라는 것이 이선경 위원장의 설명이다.

어느덧 ‘원주한지문화제’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지역 축제로 성큼 자라났다. 민간의 숨은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원주한지문화제’는 지역에서의 문화운동, 또는 지역의 축제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잊혀진 문화를 창조적인 발상과 실천으로 이뤄낸 것이다. 꿈이 있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는 그런 꿈을 이룬 것이다. 올해 ‘원주한지문화제’는 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올 가을, 치악산에서 한지의 숨결을 느끼며 동동주 한잔 기울이는 건 어떨까?


▶ 명 칭 : 제4회 2002원주한지문화제 - 2002 Wonju Hanji Festival
▶ 행사주제 : 한국의 美 - 한지 (The Beuaty of Korea - Hanji)
ꡐ전통과 현대의 만남ꡑ (The Communication of Tradition & Modernity)
▶ 기 간 : 2002. 10. 2(수) ˜ 10. 6(일) 5일간
▶ 장 소 : 국립공원 치악산 구룡사 일대(강원도 원주 소재)
▶ 참가대상 : 국내 초대작가, 한지공모대전참가자, 한지예술 관련 학계, 업체 등 각종 단체
▶ 주 최 : 원주한지문화제위원회
▶ 주 관 : 원주참여자치시민센터, (사)한지개발원
▶ 후 원 :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강원도, 원주시, 강원문화재단
(2002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