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운동 일반

이주노동자들의 오아시스 -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를 찾아 -

'녹색당' 2007. 6. 1. 15:27
"이주노동자들의 오아시스" -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날짜 : 2002년 8월 30일(금) 오전 10시 40분
인터뷰 : 양혜우 소장
정리 : 김현

‘엷은 오렌지색'이 어떤 색인지 아시는가? 앞으로 생산되는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에는 ’살색'이라는 특정 색이 사라지게 된다. 지난 달 1일, 특정인종의 피부색과 유사한 색을 ‘살색’으로 표기한 것은 차별행위라며 외국인 4명이 진정을 낸 것을 국가인권위원회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 색을 대체해서 ‘엷은 오렌지색’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스케치북에 사람을 그린 후, 아무 의심 없이 ‘살색’이라고 적힌 크레파스로 피부색을 그려 넣은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67년 이후부터 ‘살색’이라고 믿어 왔으니, 적어도 한국 사람들은 35년간 ‘살색’의 진실을 잊고 살아 온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아이들이 갖고 노는 크레파스에만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백인 우월주의에 빠진 서양인들이 존재하며, 한국인들도 이런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지고 보면 나찌의 만행도 민족우월주의에서 비롯되었고, 최근까지 그칠 줄 모르는 팔레스타인 분쟁 또한 인종 문제가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 인종 차별의 피해자로 여겨졌던 우리나라도 최근 10여 년 전부터 가해자의 탈을 써오고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다름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드러난 그들의 삶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공백으로 남는다. 고국도 아니고 멀리 이국 타향에서 받는 설움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는 지난 90년 이후부터다.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이하 ‘인권센터’)”가 낸 자료를 보면, 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세계 무대에 부상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이 즈음, 아시아의 노동인력들이 석유 산유국으로 진출하였지만 오랜 중동전쟁으로 인해 노동인력의 수출 활로를 잃어버리기 시작하면서 한국으로 이주하는 아시아계 노동 인력들이 서서히 늘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관광 비자로 입국하여 취업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이 시기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사회로 불거진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 때를 시작으로 한다면 한국의 이주노동자 문제는 이제 막 10여 년을 지나온 셈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피해를 입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평균 500만원의 이주비(주1)를 지불하면서 한국으로 건너온 후, 산업재해를 당했으면서도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경우, 턱없이 부족한 월급, 이주노동자 절반 이상이 경험했다는 임금체불 등 심지어 먼 이국 땅에서 한 줌의 흙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다 있다. 합법적인 연수생조차도 월 16만원에 불과한 임금을 받았을 뿐이며, 이 임금의 절반은 적립금이라는 명목으로 중소기업중앙협의회에 바쳐야했다. 이탈 방지의 차원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과연 인간의 취급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양혜우 인권센터 소장의 말이다.

“이주노동자 인권의 문제의 핵심은 법과 제도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 인력이 거의 40만명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 단순노동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는 단순노동력을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합법적인 노동자들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기만적인 일이지요. 이 40만 명 중 약 8만 명 정도를 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데려와서 고용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법이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은 기본적인 노동의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기는 것은 모든 문제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월급 못 받아서 노동부에 이를 고발하러 가면, 사업주가 출입국 관리소에 불법 체류자라고 신고합니다. 결국 그 자리에서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지요. 또 어떤 노동자는 한국 사람에게 구타를 당해서 경찰서에 갔더니, 경찰이 대충 조사만 끝내고 ”당신은 미등록 노동자이니 출입국 관리소에 가야 한다“며 끌고 가서 강제 출국을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어떤 문제가 있어도 자기 문제를 하소연할 수가 없어요.”

그리니까,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80%는 불법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찰이 ‘강제출국’을 명령하면 그렇게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는 우리나라 제도가 현실을 너무나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는 90년대 초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현장에서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런 필요성에 의해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이 묵인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을 합법적인 노동자로 인정하려다 보니, 모든 부대비용이 덩달아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용간접 비용 즉, 주택문제, 의료문제, 월급문제, 퇴직금 문제 등 정부가 정당한 대가를 해줘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꼴이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는 한 두 가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제도를 구비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한국의 사업주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자신이 필요로 해서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대우를 하고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예전에 비해 사업주들의 구타와 협박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한다.

인권센터는 바로 이렇게 차별 받는 외국인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일을 한다. 그렇다고 지역의 관심사를 핵으로 하는 풀뿌리단체는 아니다. 인권센터의 역사는 이제 갓 1년을 넘겼다. 왜 인천으로 왔는지 궁금했다.

“저희 단체에서 일하는 상근자들은 인천에 아무런 지역적 토대가 없습니다. 수도권의 경우, 인천과 의정부가 외국인이주노동자가 많은데, 상근자들의 조건상 의정부로의 출근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저도 서울에 살거든요. 또 몇 몇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기왕이면, 인천이 의정부보다 큰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외국인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판단했고, 사회단체들과의 연대도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역적인 토대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상담 같은 경우도 1/3에서 절반 정도가 인천에 거주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징적인 의미로서 인천을 택했다는 양혜우 소장의 이야기다. 첫 삽을 뜬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다보니, 특히 재정적인 어려움이 남다른 것 같았다. 양 소장이 건네준 회지를 들춰보니 그 동안 네 명의 상근자가 월평균 받아간 활동비는 140여 만원에 불과했다. 이를 네 사람으로 나누면 35만원 불과한 액수다. 재정은 곧 역량의 문제이기도 한데, 양 소장에게 어렵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일단 이사회비로서 한 15-20%를 충당합니다. 나머지 80%는 일반 후원자들이죠. 사실, 매달 우리 단체가 200만원 정도의 적자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빚은 없구요.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재정이 한 60% 정도 됩니다. 40% 재정확보가 아직 안되었구요. 사실 실무자들의 상황이 어려운 형편이죠. 상근은 4명이 합니다. 최근 들어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있는 창구가 마련되고 있다고 합니다만, 일단 정부지원을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운영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단체는 재정의 목적으로 프로젝트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돈 없이 살더라도 당분간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말자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곧, 제가 생각하는 경제적 자립은 ‘우리가 하는 일의 질로 승부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을 보고 판단해서 마음이 동한다면, 충분히 후원회원에게 작지만 소중한 회비를 모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실, 이런 고민은 올해부터 시작된 것이라서, 올 12월까지 재정을 꾸려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고 이후에는 안정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계획입니다.”

사실, 오래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치고 활동비를 제 때, 또는 제대로 받지 못한 경험을 한 번이라도 갖고 있지 않은 활동가는 없을 것이다. 열악한 조건임에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념에 대한 신념, 이를 위한 실천, 그리고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불어 그 일에 대한 신명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양혜우 소장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별하게 이주노동자 문제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구요, 저는 84학번인데, 저희 학번이 가졌던 사회적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이런 사회적 의식에 눈을 뜰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학생활 때, 우연하게 선배의 요청으로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하루 일당이 3,300원이었습니다.(85년) 그 당시에 친구 만나서 커피 마시고 점심 먹고 하면서 쓰는 돈이 5,000원을 넘었습니다. 당시 부모님께 받은 용돈이 한 달에 10만원이었는데, 공장에서 일하면서 받은 월급 8만5천 원보다 더 많았던 셈이죠. 하루 종일 일하고도 그 정도였습니다. 그 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가난이 개인적인 게으름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현장에서 일하고 보니 우리 사회에 너무나 큰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 이 사회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겠다 싶어, 공부방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거죠.”

청년 전태일의 심정도 그랬는지 모른다. 그의 문제의식이 바로 외국인 노동자에게로 전이된 느낌이다. 이주노동자 문제로 인해 사회가 원하지 않는 또 다른 전태일을 양성한다면, 국제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가해자는 쉽게 잊을 수 있지만 피해자의 멍든 가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한국의 자화상이 그러하다면, 그들의 노여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일이다. 그들에게 선심을 베풀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인권센터를 방문한 다음 날, 노동 분야 전문가 김진 변호사를 만났다. 김진 변호사의 입장도 단호하다.

“우선 연수생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이주노동자들에게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런 다음 보충성과 평등대우가 필요하며, 사업장 이동권 보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노동자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겠죠. 또한 외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하는 경로는 아주 복잡한 루트를 거치게 되는데, 제가 파악하기로는 현지인까지 포함해 대략 9개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이 정도면 이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입니다. 따라서 취업알선은 공공기관이 맡아 처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양혜우 소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받은 혜택을 자국의 노동문제, 나아가 사회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서로 나누는 삶’이 되기 위한 인간관계의 회복이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 일을 하면서 한 동안, 저는 비정상적인 인간상이었습니다. 일밖에 몰랐던 일벌레였죠. 밤에 늦게 집에 가서 잠만 자고, 아침에 와서 일하고,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이주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런 것을 고민하지 못하고 기능적인 사건 해결을 위한 해결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내가 그들을 인간적으로 접근하고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했던 공동체 지원활동과 같은 지향점들이 없어지고 기능적인 일들만 했던 거죠. 그러다가 제가 어느 순간 이런 기능적인 일, 자기 개발이 없다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제게 요구하는 것이 늘어나고 저는 또 제가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어났었죠.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잠시 제 시간을 가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즐겁고 신나고 평생 할 수 있는 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면 평생 직업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양혜우 소장에게는 이주노동자 문제가 삶의 일부분이다. 스스로가 ‘집요한 성격’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이제 갓 1년을 넘긴 조직을 더 안정적으로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도 많다. 재정의 문제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인권센터의 활동상을 그려나가는 일이 시급하다. 외국인노동자의 의식 변화, 이를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더불어 사는 활동이 병행되는 것이 양혜우 소장이 밝히는 활동의 상이다. 그런 활동이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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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소위, 브로커비로 통하는 이 검은 돈은 어느 나라에서 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양혜우소장에 의하면,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상당액을 국가에서 부담하고 있다. 이는 국가정책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데, 여타의 나라는 전액 사비부담으로 1,000만원이 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20만 명일 경우 1조원이 넘는 계산이 나오는데, 불합리한 브로커비를 없애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2002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