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희망(내인생의 첫수업)
상처와 희망
이 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40대 중반에서도 후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의 누구라도 그 인생에 있어 다치고 아파하고 고민하고 좌절한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겠다. 그러한 상처들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중요한 과정이기에 내 인생의 중요한 수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수업이라 치부하기 힘든 것은 때때로 잊은 듯 했던 상처들이 다시 돋아나곤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FTA 반대 집회 도중 한 사람이 분신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막연한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런데 분신한 사람의 이름이 어딘지 많이 익숙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1990년대 초반 봉천동 철거지역에서 함께 철거투쟁을 했던 주민이었다. 그 지역의 철거가 끝난 얼마 후에 나는 그 지역을 떠났고, 가끔 그 지역에 일이 있어 갈 때마다 그 분을 만났었다. 그 때마다 항상 웃으며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했다. 자신들의 철거투쟁을 조직하고 지원해 준 것이 고마웠다는 뜻이다. 과연 그 분이 그 철거투쟁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처음 하게 되었는지, 그 전부터 그러할 생각과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후자이기를 바랐다. 내가 그 분의 죽음에 조그마한 영향이라도 끼쳤다는 사실을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사회운동에 대한 회의를 가졌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해왔던 주민 조직화 활동이 정작 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생각하면서였다. 장장 6개월이란 시간 동안 주민조직화의 경험이 풍부한 선배들로부터 조직화에 대한 훈련을 받았고, 그래서 처음 빈민지역에 간단한 이삿짐 챙겨서 들어갔을 땐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것이 내 실수의 시작이었다. 내가 뭔가를 잘 할 수 있다는 착각! 실상 주민조직화는 내가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주민들이 스스로 뭔가를 잘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뭔가를 잘 하려는 욕심이 나를 부추겼다.
10여년 전 어느 날 길거리에서 그 몇 년 전에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에서 함께 철거투쟁을 하던 주민을 우연히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그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서는데, 그 사람은 내 반대쪽으로 황급히 걸어가 버렸다. 나를 못 봤는가? 분명히 나를 본 것 같았는데... 또 다른 사례 하나. 철거가 끝난 후 임대아파트에 입주한 주민들을 오랜만에 만나 함께 식사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때 합석한 한 아주머니, 철거투쟁 당시 주민조직의 부위원장이었다. 당시 투쟁으로 많은 고소고발 등의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었는데, 이 투쟁이 끝난 지 어언 1년이 다 가도록 이 분은 당시 문제로 법원에 오가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당시 입은 부상으로 아직도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몇 번 더 겪으면서 그간의 활동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회의가 닥쳐왔다. 아마 내가 유혹했던 그 길을 가는 것이 그리 큰 희생을 거쳐야 하는 것임을 그 주민들이 사전에 알았다면 결코 나와 내 동료들의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희생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주민들을 그 과정으로 유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어떤 사회운동의 명분이나 활동의 필요성도 정작 당사자들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로 인해 이제는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세상과 사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기쁘고 즐거운 일에 참여할 때 만들어 진다는 나름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이 글이 지금도 힘겨운 투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비하하거나 그 용기를 무시하는 듯이 읽혀졌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그들에게 사회적 연대를 표하는 것이야 말로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예의이자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인적 경험에 의한 개인적 교훈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