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내음 팀블로그/하승우의 "일상과 자치"

"'풀뿌리는 기만이다"(시민사회신문)에 대한 반박, "'풀뿌리 없는 진보'야말로 기만이다"

'녹색당' 2008. 5. 2. 22:56
[시민사회신문]에 이재영씨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풀뿌리에 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의 얘기를 그냥 지나쳤죠. 어쩌면 그것은 말로 설명을 해도 쉬이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내 자신의 냉소와 회의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곧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이 기획한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2]도 나올 예정입니다. 그 글에서 조금 더 체계적으로 풀뿌리에 대한 냉소와 회의에 답할 생각입니다. 일단은 이재영씨의 칼럼에 대한 반박글만 써 봤습니다.
 
----------------
‘풀뿌리’는 기만이다
이재영_독설의 역설 [42]
이재영
증류수 같이 순수한 이념은 없다. 이념형적인 정치도 없다. 정치이념은 시대의 영향이든, 정치세력이나 정치인의 특성이든, 또는 우연이든 여러 요소에 의해 굴절되기 마련이다.

재야 시절 다져진 시혜적 형평의 정서가 신자유주의에 굴복 굴절된 것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이념이었다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지만 박정희 시절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것이 이명박 정권의 현실 이념일 게다.

이러한 이명박 정권의 ‘짬뽕’에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 의장이 ‘순수 신자유주의’ 입장에서 시비를 걸고 나섰다. 그는 여러 자리에서 “시장을 못 믿고 정부가 힘으로 개입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정부가 좌파 행태를 못 벗었다. 환율 등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이명박 정권의 최근 정책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한나라당끼리 싸운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지 꽤 오래 지났음에도 야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말하지 않기야 않았겠지만, 민주당, 진보정당들, 노조나 시민단체들은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바야흐로 여-여 경쟁 시대가 열린 듯하다. 상황은 1956년 일본 자민당의 첫 집권 때보다 더 심각하다. 사회 의제가 여당 안에서의 쟁투에 독점돼 있거니와, 자유주의 정당이나 급진정당들이라는 게 도대체가 집권 능력은커녕 집권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현재의 야당세력들은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야당만큼이라도 강성인가? 기껏해야 ‘386판 한나라당’이거나, 일본식 노조운동-시민운동의 한국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작금의 고요는 자민당의 38년보다 더 길어야 정상이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긴 호흡과 차분한 준비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모두들 ‘풀뿌리’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사회 곳곳에서 대안 권력을 구축해나가는 장기적 노력을 일컫는 것이라면 옳다. ‘진지전’이라는 그람시의 정리 이전에도 이런 방식은 모든 인간 사회 변화의 정도(正道)였다.

그런데 한국에 소개돼 있는 ‘풀뿌리’란 주로 미국과 일본의 탈사회주의적 비정치 사회운동에 다름 아니다. 가장 앞선 풀뿌리 모델이라는 독일의 녹색당조차 사민당의 판단에 그 운명이 좌우될 만큼 위약하고, 미국과 일본의 암울한 현실이 반세기 동안이나 요지부동인 것은 그 풀뿌리라는 것이 이미 인민의 파괴적 도전을 완충시키는 ‘체제의 풀뿌리’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장제를 넘은 무한복제의 시대에 수공업적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또 하나의 러다이트다. 물론 우리는 오래 인내해야 하고 노력은 훨씬 진지해져야 한다. 그러나 시간은 오랜 산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정치를 위해서다. 산개된 열은 시간이 흘러 다시 식고, 공간적으로 집중된 열은 시간적 축적에 의해 물을 끓인다.

‘자민당 시대’에 진짜 필요한 것은 이기적 정치다. 메마른 풀밭에 날아든 나무 씨앗은 다른 씨앗을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살아 그늘을 이루어야 또 다른 씨앗들이 날아들 수 있고, 전이(轉移)를 이룰 수 있다. 생태계의 변화는 우점종 전체의 진화가 아니라, 비우점종의 개체 확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나라당 독재를 끝내야 된다’거나, ‘한미FTA를 저지해야 한다’거나, ‘비정규직을 살려야 한다’ 같이 고매한 이상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당위나 대의명분 같은 것도 자신의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비하거나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야멸차게 버리는 마키아벨리의 정치를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바의 정치란 무엇인가? 제 얼굴에 똥칠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민의 미래를 위하는 길이라면.
 
-----------------------------

‘풀뿌리 없는 진보’야말로 기만이다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시민사회신문 제 49호에 실린 이재영씨의 “‘풀뿌리’는 기만이다”는 글을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글은 한국 진보의 잘못된 편견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또 이런 글이 실렸네’라며 푸념하고 넘기겠지만 이제는 그런 편견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아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단순한 비교의 정치적 효과는?


이재영씨는 한나라당의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야권이나 노조, 시민단체들이 그에 관해 침묵하는 상황을 일본 자민당 시대와 비교한다.

지난 18대 총선으로 한나라당이 153석을 차지하고 자유선진당이나 친박연대 등의 보수정당을 합치면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보수성향의 의원으로 채워졌다. 그러니 한국의 정치 주도권은 보수로 넘어갔고, 여권 내의 정치적인 경쟁만이 남은 듯하다. 이런 보수의 장기집권이라는 점에서 이재영씨는 한나라당 내의 주도권 다툼을 ‘55년 체제’라 불리는 일본 자민당 구조와 비교하는 듯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을 냉전 시기의 55년 체제와 단순 비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런 비교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장기집권’을 강조해야 총선 이후 무기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소위 진보세력’이 반응을 보일 터이니.

하지만 그런 단순 비교는 매우 위험하다. 보수가 제도 권력을 독점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회 전반의 보수화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18대 총선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수화만이 아니라 46%라는 저조한 투표율이다.

투표율은 낮아졌지만 무능한 대표를 통해 말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늘어나고 있다. 만일 투표율이 떨어지는 것을 정치적인 관심의 퇴조로만 분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르주아 정치의 틀 안에 갇힌 사고이다.

이미 쇠고기 협상이나 대운하와 관련해 민심은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다. 권력을 좇는 집단들이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무능한 그들을 대신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변화의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다만 그 변화의 방향을 어디로 맞출 것인가에 관한 합의가 부족할 뿐이다.


체제의 풀뿌리?


이재영씨는 현재의 보수정국을 벗어나는 방안으로 얘기되는 풀뿌리에 불만이 많은가보다(그의 말처럼 “모두들 ‘풀뿌리’를 이야기한다”면 차라리 좋겠다). 그는 한국에서 논의되는 풀뿌리가 미국과 일본의 탈사회주의적 비정치 사회운동이라는 점에 불만을 품은 듯하다. 심지어 그는 “인민의 파괴적 도전을 완충시키는 ‘체제의 풀뿌리’”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기 때문에 ‘그가 우려하는 풀뿌리’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다. 하지만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고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풀뿌리의 정치 전략이 탈사회주의, 비정치라는 해석은 어떻게 가능한가? 오히려 그런 운동이야말로 정치적인 게 아닌가?

더구나 그는 ‘소개된’ 풀뿌리를 얘기하고 있는데 그 역시 잘못이다. 그동안 한국에는 풀뿌리 운동이 없었단 말인가? 동학운동, 3․1운동, 빈민운동과 야학운동, 협동조합과 공동체 운동 등 이미 한국에서는 다양한 사건과 영역에서 풀뿌리 운동의 흐름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것에 대한 관심 없이 외국의 경우를 얘기하며 ‘체제의 풀뿌리’라 규정하는 오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실 풀뿌리의 영역인 지역사회에서 진보정당만큼 취약한 세력은 없다. 2006년 민주노동당 지방의원들에 대한 한 설문조사는 ‘해병대 전우회’나 ‘향우회’보다도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이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양희선, “노동자여, 학교갑시다!” <노동사회> 제 110호). 잘난 이념을 빌미삼아 외부정치의 무능함을 변명하고 내부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는 게 소위 진보정당의 현실 아닌가. 그런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 없이 다른 운동을 헐뜯는 것이 진보정당의 앞날을 위해 긍정적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지금 진보가 취해야 할 시급한 전략은 자신의 풀뿌리 기반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일본의 혁신자치체 실험이 실패로 끝난 것은 그런 기반 없는 혁신정치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증명한다. 55년 체제 이후에 진행된 다양한 정치실험에 주목하지 않고 자민당 시대에만 초점을 맞추면 외부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점이 없다.


풀뿌리의 이념이 필요하다!


이재영씨는 이렇게 충고한다. 자신의 정치적 에너지를 오로지 집권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기적 정치’를 하라고. 고매한 이상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라고.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이 고작 인민의 미래를 위해 제 얼굴에 똥칠을 하라는 건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인민은 바보인가?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대신 고민하며 똥칠을 해야 할 정도로. 사실 내가 민중을 대신하고 민중보다 훨씬 더 그의 이익을 잘 대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대의제도에 갇힌 정치의식이고,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편견이다.

그리고 집권을 위해서 당위나 대의명분같은 것을 야멸차게 버려야 한다면 그것이 왜 진보인가? 당위나 대의명분이 없다면 왜 운동을 하는가? 단지 집권을 위해서? 만일 그런 세력이 집권하면 지금과 무엇이 다를까?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이념을 세워야 할 때이고 그 이념은 몇몇 이념가의 머리가 아니라 민중의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풀뿌리는 바로 그 점을 얘기한다.

독설은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줄 때에 빛을 발한다. 하지만 정확한 진단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붓는 독설이라면 상처만 남길 뿐이다. 지금은 다른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겠지만 결국은 그 자신도 상처를 피할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