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내음 팀블로그/하승우의 "일상과 자치"

강의석과 촛불시위, 배후세력의 정치(경인일보)

'녹색당' 2008. 5. 15. 09:53
강의석과 촛불시위, 배후세력 정체

2008년 05월 15일 (목)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2004년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학교에 맞서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던 고등학생 강의석은 46일간의 단식으로 힘겹게 승리를 따냈다. 하지만 최근 학교가 발행한 '대광 60년사'는 강의석이 "민노당·민주노총·전교조 등의 사주와 조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활동은 '종교의 자유'를 위장한 반미·반기독교 좌파연대운동"이라고 적었다.

2008년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급식에 사용될지 모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촛불집회에 나섰다. 하지만 경찰은 이런 정치참여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서울시 교육감은 "교사들이 막으려고 했는데도 안 막아진다고 하더라"고 하며 "뒤에 세력이 있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 두 사건은 청소년들의 활동을 바라보는 한국 어른들의 눈높이를 드러낸다. 자신의 삶과 관련된 일에서 뭔가 문제점을 느끼고 그것을 지적하는 행동이 왜 외부의 사주나 배후세력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 스스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하려는 행위가 왜 금지되어야 할까? 청소년들이 스스로 생각할 머리가 없다는 것은 사회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상식이다.

이런 어리석은 눈높이와 달리 해외의 흐름은 청소년들이 능동적인 시민으로 거듭나도록 참여를 보장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모이고 있다. 1989년에 유엔은 아동권리협약을 제정해서 청소년들의 권리와 시민참여를 보장하게 했다. 이에 따라 청소년시장과 청소년의회, 청소년참여예산제도, 청소년 도시계획 등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의 장이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그러나 소위 유엔인권이사국이라는 한국은 이런 흐름을 여전히 거스르고 있다. 2003년에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청소년들이 의사결정과정과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를 개정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하기도 했지만 우리의 눈높이는 달라지지 않고 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정치의 비극이 있다. 올바른 정치의식은 20살이 되었다고 갑자기 형성되지 않는다. 정치의식은 일상적인 실천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치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을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그들이 배후세력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니 참으로 한심스런 노릇이다. 자신의 생명권과 생활권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청소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제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배후세력이라니.

투 표율이 떨어지고 정치적 무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염려만 할 게 아니라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정치의 미래는 없다. 사실 역사를 따져 보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때에도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을 벌였고, 4월 혁명이나 5월 광주를 봐도 중·고등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미래의 정치를 두려워하며 부정하는가? 그들은 바로 권력을 잡은 기득권층이다. 그들은 청소년이나 청년이 나서면 언제나 배후세력을 얘기하며 그 싱그러운 열정을 가로막으려 한다.

2007 년 11월 진실화해위는 1991년 5월을 뜨겁게 달궜던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을 다루면서 7개 감정기관과 국과수의 감정을 거친 결과 그 사건이 무죄라고 밝혔다. 당시 죽음의 배후세력을 '만들어서' 국가는 한 사람의 삶만이 아니라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망쳤다. 누가 그 미래를 보상할 것인가?

그 당시에 권력과 결탁해서 배후세력을 떠들어 대던 언론사들은 지금도 '가공의' 배후세력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 괴담이나 문자괴담, 광우병 드라마 등등 신문의 사설들은 연일 청소년들의 배후세력을 찾기 위해 부산하다. 이처럼 한 치의 자기반성도 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작자들이 언론이라는 사회의 거울임을 자처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모순인가?

하지만 지금 우리 청소년들은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배후세력의 핵심을 향해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뽐내고 있다. 장하다, 우리의 중딩, 고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