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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난 2003년 10월6일자로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길을 잃은 '로드맵’

하승우(시민자치정책센터 운영위원)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유행하는 말은 ‘로드맵’이라는 말일 것이다. '계획안’이나 '시안’이라는 말 대신에 '로드맵’이라는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뜻 그대로 '도로지도’를 그리겠다는 것은 아닐 터이고 무슨 의미를 담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이제까지 해왔던 일방적인 행정의 관행에서 벗어나 자칭 '참여정부’라는 호칭에 걸맞는 새로운 관행을 만들고 싶어서일 것이다. 일단 기본적인 길을 표시한 지도를 먼저 공개함으로써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그 로드맵이 제대로 작동할 것인가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접어두자.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평가는 무리다. 그보다는 로드맵을 만드는데 있어 '기본적인 자세’를 얘기하는 것이 더 건설적인 태도일 것이다. 원래 자세가 잘 잡혀야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법이다.

먼저 로드맵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길’과 '지도’라는 의미를 따로 떼어서 각각 그 기본자세를 살펴보자.
길이 뭔가?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사람이 다니는 곳은 항상 일정한가? 그렇다면 길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만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때론 반대방향으로 가면서 서로 다른 길을 만든다. 그래서 현실에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수많은 길이 나 있고 때론 교차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길을 만들며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그리고 길은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래서 길에는 역사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길을 무심코 지나치지만 그 길을 닦기 위한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그 길에 스며들어 있다.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며 '역사’를 담고 있다.

또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길의 주인은 누구인가? 길의 주인은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길을 가로막고 통행세를 요구하는 자들을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길은 그 길을 만든 사람이나 그 길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소유가 아니다. 길은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만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 길을 걷는다. 함께 걸을 때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진다. 길은 '함께 걷는 사람들의 것’이다.

자, 길에 대해선 이 정도로 얘기하고 다음으로 지도를 보자. 지도란 뭘까? 길을 축소해서 종이 위에 옮긴 걸까? 아니면 길이 갈라지는 곳과 만나는 곳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 지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올 수 있고 그 각각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물음을 바꿔서, 무엇이 '좋은 지도’일까? 지도가 단순히 길의 형상을 종이 위에 옮긴 것이라면 그 좋음의 우열을 가름할 수 없다. 길이 갈라지는 곳과 만나는 곳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좋은 지도일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단순히 물리적인 상황을 지도로 옮긴 것일 뿐이다.

정말 좋은 지도는 그 길을 걸어가다 만날 수 있는 장애물이나 위험을 표시해 준다. 어느 곳에 웅덩이나 함정이 있는지, 어느 곳으로 가면 절벽이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무조건 장애물이나 위험을 피해 빙 둘러가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갈 때 닥쳐올 위험을 예상하고 때론 그것을 버티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 준다. 길이 걸어가기 위한 것이라면, 좋은 지도는 계속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 좋은 지도는 길 만이 아니라 그 길의 '위험’도 표시해 주고 길을 걷는 사람이 단단히 마음을 먹도록 해준다.
또 지도는 그리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즉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리는 지도가 달라지고 그 지도를 보며 걷는 사람들은 다른 현실을 만들게 된다.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항상 세계를 평평하게 그렸고, 둥글다고 믿는 사람들은 둥글게 그렸다. 평평하게 그린 지도를 보며 걷는 사람들은 지구 반대편으로 가면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 믿고 떠나길 꺼렸지만, 둥글다고 믿는 사람들은 과감히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 여행의 경험으로 새로운 세계를 찾고 꿈꿨다. 다른 현실이 가능하다고 외치는 것은 그 다른 현실로 가는 다른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지도는 항상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자, 그럼 이 기본자세를 가지고 지난 2003년 7월 22일 노무현 정부가 발표한 '행정개혁 로드맵’을 보자. "효율적인 행정, 봉사하는 행정, 투명한 행정, 참여하는 행정, 깨끗한 행정”을 5대 목표로 제시하면서, "성과 중심의 행정시스템 구축, 정부기능과 조직의 재설계, 행정서비스 전달체계 개선, 고객지향적 민원제도 개선, 행정의 개방성 강화, 행정행위의 투명성 제고, 시민사회와 협치기제 강화, 공익활동 적극 지원, 공직부패에 대한 체계적 대응, 공직윤리의식 함양”을 의제로 제시했다. 뭐, 말만 들으면 다 좋은 얘기다.

그런데 이런 립서비스 말고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효율성은 해고/퇴직의 칼바람을 날렸던 경제계의 리엔지니어링과 비슷하고, 봉사는 여전히 권한을 행정이 쥐고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얘기며, 참여는 모니터링이나 옴부즈만같은 사후평가로 제한된다. 즉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그 기본 자세는 거의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지방자치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린 역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은 여전히 민원을 제기하고 평가에 참여할 뿐 정책입안과 실행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다. 누가 그 길을 만드는 것인지, 길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거의 없다. 자연히 그 속에는 길이 없다. 또 행정개혁 로드맵은 그 길을 걸어갈 때 어떤 장애물이나 위험에 부딪칠 것인가를 제대로 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세계로 가는 길도 표시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 로드맵은 로드맵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를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그 속에서는 길의 기본 자세도, 지도의 기본 자세도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정치는 사람들이 만나 소통할 때, '수다스런 공론장’을 만들 때 활기를 되찾는다. 그래야 진정 로드맵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처음부터 다시 꿰어가야 한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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