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04년 2월17일 풀뿌리자치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부안 주민투표 승리에 부쳐

김현(풀뿌리자치연구소 연구위원)

김종규 부안군수가 핵폐기장 유치선언 기자회견을 가졌던 지난 7월 11일 이후, 만 7개월 만에 부안군민의 의지가 주민투표로 결정되었다. 아무런 명분도, 절차적 합리성도 찾지 못했던 핵폐기장 추진파들이 이 주민투표 결과를 두고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니, 수용해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미 법원에서 주민투표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마당에 더 이상 위법이니, 불법이니 왈가왈부하지는 말아 달라. 그것이 주민투표의 공정성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을 위로하는 일이다.

현장을 목격하고 느낀 것은 방폐장 문제로 부안 공동체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부안 상황을 이 지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은 역부족일 것이다. 부자간, 모녀간, 삼촌과 조카간 건널 수 없는 갈등의 골이 깊게 패여 있었다. 수개월 간 부안군민들은 일손을 놓고, 한 쪽에서는 반대운동을, 또 한 쪽에서는 찬성운동을 생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지역 경제는 이미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부안 문제에 관심을 갖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빠른 시일 내에 해법이 제시되길 기대했다. 끝  간 데 없는 미로 속에서 하루 빨리 헤어나길 원했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주민투표’라는 작은 실타래를 잡을 수 있었고, 부안군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주민투표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군민들의 의사를 총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민투표를 진행하는 동안, 잠시나마 그들은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고, 아무 사고 없이 주민투표가 잘 마무리되길 희망했다. 헌신적인 부안군민의 노력과 전국 각양각지에서 쇄도한 자원봉사자들로 주민투표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찬성 측이 투표장을 점거함으로써 투표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위도를 제외하고라도 투표율 72%, 방폐장 유치 반대율 92%로 부안군민의 의사가 투표 결과로써 나타났다. 공무원들과 방폐장 유치 천성 측의 끝임 없는 방해 공작을 생각하면 놀랄만한 수치다.

정부는 이번 주민투표 결과를 두고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전체 부안군민의 약 70%가 반대하는 상황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방폐장 유치를 철회하는 것이 부안을 정상화시키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부안군수나 보상금으로 군민들을 이간질시킨 한수원과 산자부도 마땅히 사죄를 하고 이후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이번 부안문제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제2, 제3의 부안 사태를 막는 길은 없다. 이번 주민투표에 참여했던 한 부안 주민의 말은 절망적인 부안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만약, 이번 주민투표 결과를 정부가 수용하지 않는다면.......그 순간 정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작동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여전히 부안은 식지 않은 활화산이다.

2004년은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역사에 있어 후세까지 기억되어야 할 한해가 될 것이 확실하다. ‘직접민주주의 원년’이라고 해도 과함이 없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정부로부터 방폐장 건설 철회를 끌어내는 일도 중요하고, 지역 공동체가 파괴되는 지경까지 부채질 했던 부안군수 등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쉽지 않겠지만, 주민간 갈등을 봉합하는 일도 중요하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안면도와 굴업도 싸움 이후를 상기한다면, 부안에서 구현된 주민자치력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가 현재 가장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토론하고, 참여하고, 대안을 찾는 일련의 과정이 ‘자치적인 부안의 모델’을 만드는데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안이 보여준 에너제틱한 주민자치력을 더욱 다듬고, 더욱 견고하게 지켜내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라고 믿는다.

우리는 정부가 국책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지역공동체를 부안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주민 스스로가 난해한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도 똑똑히 목격했다. 주민은 아둔하지 않았고 현명한 길을 택했다. 주민의 의식은 지방자치제도보다 한 발짝 앞서 있었다. 주민의 의지가 정치적인 성과로 분명히 남아야 할 일이지만, 주민투표 이후에도 연속된 프로그램을 주민 스스로가 찾아 나서고 만들어야 한다. 면 단위의 작은 공간에서부터 주민자치력이 구현된다면, ‘직접민주주의 원년’이라는 칭호는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부안에 희망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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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4년 2월3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부안 공무원들의 처신에 대해"

김현(풀뿌리자치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94년, 지방자치법 13조 2에는 주민투표법 제정의 근거를 마련하면서 따로 법률로 제정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지난 94년과 96년, 여당과 야당에서 각각 주민투표법안을 제출하였으나, 임기만료에 의해 자동 폐기되면서 주민투표법은 공중에서 배회하게 된다. 그 후로도 ‘국민의 정부’는 100대 과제로 추진하였으나 실패했고, 지난 2002년 초, 국회정개특위에서 제도도입을 천명했을 뿐, 이렇다할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 얼마 전, 주민투표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주민투표법이 부침을 거듭했던 이유는 국민의 안녕을 누구보다 위하는(?) 정치인들의 걱정 때문이었다. 지역분열이 심할 것이라거나 정치적 이용 가능성, 그리고 현 정치체제인 대의민주제 훼손의 우려가 있다는 걱정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국민 수준은 아직 멀었다’로 요약된다. 뭣도 모르는 국민이 이렇게 훌륭한 법을 제대로 인식이나 하고 있을까? 그래서 지체 높으신 정치인들은 국민의 수준을 감안하여 지금까지 보따리를 풀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갸륵한 지성인가?

본디 주민투표법이라는 것은 주민이 지역의 주인이므로, 지역의 중요한 문제는 알아서 주민끼리 결정하라는 메시지이다. 주민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칠만한 중요한 사안을 공무원 니들끼리 다 하지 말고, 당해 지역의 주민 의사에 따라 자주적으로 결정하라는 것이 주민투표법의 기본 취지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주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핵발전소를 건설하고 거기서 나오는 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 핵쓰레기처분장을 일방적으로 건설하려고 한다. 쓰레기 매립장이나 대형 소각장을 건설할 때도 반대하는 주민에게 ‘지역이기주의’라고 쏘아 붙일 뿐이다. 혹은 지역발전 지원금이라는 얄팍한 사탕발림으로 주민여론을 왜곡하거나, 간혹 협박까지 일삼는다. ‘국책사업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불이익, 또는 법적 대응’을 하겠노라고.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부안 방폐장 유치 찬․반을 위한 주민투표 행사에 공무원들이 재를 뿌리는 모양이다. 좀 알만한 사람들까지도 ‘위법’이니, ‘불법’이니 가당찮은 언어사용을 남발하고 있다고 하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현행 법체계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하지 말라고 명시된 법률이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주민투표법이 발효가 안 됐기 때문에 모든 것이 위법이라면, 경남 통영시에서 진행된 관광케이블카 설치 주민투표나 울산시 북구에서 개최된 화장장 설치 주민투표, 그리고 서울시 광진구에서 진행된 지하철 출입구 위치를 위한 주민투표 등 여타의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추진한 주민투표가 모두 위법이란 말인가? 몇 년 전, 55층 주상복합건물 찬․반 투표를 성공적으로 마친 고양시 백석동 주민들에게 위법시비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대부분의 언론은 주민들의 의식수준을 높게 평가하면서 ‘민주주의 승리’라고 일컬었고, 시민사회는 그들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냈다. 고양시 공무원들의 어떠한 방해도 없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어느 주민투표보다 공정하게 진행되는 부안 방폐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공무원들이 집단적으로 방해하는 처사는 이해할 수 없는 전근대적 행태이며, 주민들에 대한 인권침해이다.

현행 주민투표법에도 국가의 주요시설 설치 등 국가정책 수립에 관하여 주민의 의견을 듣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행 법 하에서도 국책사업에 대한 주민투표는 주민의 의사를 충분히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자문적 의지가 묻어 있는 것이다. 현재 부안에서 진행되는 주민투표도 이와 동일하다. 주민들이 스스로 주민투표를 실시하든, 중앙행정기관에 의해 실시하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동일한 정치적 효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무원들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귀중한 업무시간에 얼토당토 않는 유인물을 길거리에 뿌릴 것이 아니라, 주민투표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니, 협조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주민들의 행사를 지켜만 봐라. 정, 자신의 주장을 펴고 싶다면, 정정당당하게 합리적인 토론의 장으로 나와라. 부안 방폐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관리위원회는 주민들의 자유롭고 공정한 토론회를 위해 공론의 장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런 다음, 투표장에 가서 자신의 입장을 담은 투표용지를 기표소에 넣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선출직 공무원(국회의원)들에 의해 주민투표법이 유린당한 것을 지켜보았다. 바로 이런 정치인들의 처신으로 인해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국민들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또 오늘, 직업적 공무원들에 의해 부안군민의 정당한 권리가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직업적 공무원들에 대한 불신이 높아질수록, 국민 심판의 칼자루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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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4년 1월12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과 ‘환경의 역습’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행복할 수 있습니까?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대게, 행복한 사람들은 우리가 인지하는 행복의 조건이 얼추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일 것이다. 배우자의 조건, 자녀의 문제, 돈, 종교, 인척간의 관계, 살고 있는 환경, 건강 등.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왜 행복하지 않은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행복의 조건 중 무엇인가가 어긋났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는다면, 그는 행복할 수 없다.

통계자료를 토대로 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사람들의 대답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대답은 일정한 차이점을 보일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즉, 행복한 사람들의 대답은 엇비슷한 반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대답은 제각각일 것이다.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떠올려보자.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 첫 문장을 두고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라고 부른다. 톨스토이는 결혼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조건들이 성공적이어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 중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성공한 결혼생활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은 그 이유가 비슷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유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현대 도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행복의 조건 중 하나를 누군가에게 강탈당했다. 숨쉬고 먹고 이동하는 생활의 기본 요소들로 인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늘에 떠다니는 ‘공기’는 더 이상 대자연의 선물이 아니다. 더 편리한 도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순간, 인간의 행위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고 있다. SBS 2004신년대기획 ‘환경의 역습’은 바로 그런 인간의 자화상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부안에서 벌이는 주민들의 저항을 두고 설왕설래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 에너지시스템의 허점에 있다. 정부가 핵에너지를 고집하겠다는 것은 주민들의 터전에 불행의 씨앗을 뿌리겠다는 의지와 진배없다. 현대자동차가 연간 수출 100만대 시대를 자축하는 사이에 사회적 약자들은 산소 호흡기에 자신의 생명줄을 위탁해야만 한다. 아니,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보기 좋으라고 사과나무에 농약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건강한 미래는 요원한 일이다.

현대화된 도시시스템은 인간에게 행복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대문 앞에 즐비한 자동차의 홍수를 그저 ‘인내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 치의 주차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자정에 이르러서도 경음기를 눌러대며 다툼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왜 자동차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문하지 않게 한다. 식탁 위의 음식도 마음 졸이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가르친다. 어차피 안 먹어도 죽고, 먹어도 죽을 거면, 차라리 눈 딱 감고 먹는 게 어떻겠느냐고 타이르기도 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그렇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에 의하면, 우린 이미 행복의 조건 중 하나를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식탁에 올라온 음식을 불안에 떨며 먹어야 하는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행복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글쎄.......노엄 촘스키는 말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루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나는 행복을 위해 대가를 치룰 각오가 있는가? 갑신년 새해, 무거운 고민이 어깨를 누른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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