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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29 박수칠 때 떠나라 3
 박수칠 때 떠나라


   지금도 내 자신이 그리 둥글둥글한 성격이라 생각지 않는다. 대인 관계 역시 그렇고, 특히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관련해서는 모가 많이 나 있는 편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내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고치려고 노력하는 데도 그리 쉽게 고쳐지지는 않는 편인 듯하다. 다만, 과거에 비해 그 정도가 조금 완화되었다고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한창 현장에서 - 도시빈민지역(소위 '산동네')에서 주로 활동했었다 - 일할 당시에는 그런 모난 성격이 더욱 강했었던 것 같다. 우리가 합의했던 사회운동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들을 견디지 못해 독설을 퍼붓곤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존경받아야 마땅한 선배들과 갈등도 많이 겪었다. 당시 빈민지역은 주민자치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주민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어린이 집이나 공부방 활동을 많이 하였다. 실상, 오늘 날 지역사회아동센터라 불리우는 민간 비영리 공부방과 어린이 집은 주로 빈민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애초 빈민지역에서 이러한 소위 ‘센터’들이 많이 만들어 진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민조직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주민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간과 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빈민지역은 그 지역적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 각종 개발사업의 첫 번째 먹이로서 그만한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민자치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대개 철거민들을 조직하고 철거투쟁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내 눈에 거슬린 한 가지 행태는 공부방이나 어린이 집 등의 소위 ‘센터’가 애초의 주민조직화의 목적에 충실하기보다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름대로 지역사회에서 쌓은 나름의 안정된 기반을 유지하려는 모습들이었다. 즉, 그러한 ‘센터’들은 수단에 불과하므로, 주민자치조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문을 닫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주장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듯 주절이 주절이 내 과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완전히 폐업신고(?)는 하는 봉천동의 자그만 어린이 집인 <씩씩이 어린이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이 곳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고, 그 곳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의 활동 역사 역시 길고 그 과정에 많은 우역곡절이 있어왔다. 지금의 <씩씩이 놀이방>은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인 꽃동네의 ‘꽃동네 놀이방’과 봉천9동의 ‘봉천동 애기방’, 그리고 봉천3동의 ‘씩씩이 놀이방’이 통합하여 만든 어린이 집이다. 나는 이들 세 개의 어린이 집이 통폐합된 이후에는 그 지역을 떠나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통합 이전의 세 개 놀이방이 어떤 어려움과 우여곡절 속에서 자신들의 ‘첫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는지는 잘 안다. 그 곳에서 일하는 실무자들과도 개인적으로 자주 교류를 해왔었고, 특히 통합 이전의 ‘씩씩이 놀이방’은 나와 같은 동네에서 활동을 해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몇 년 동안 이 ‘씩씩이 놀이방’에서 숙식을 해결했었다.

   각각 활동하던 이 세 개의 놀이방들은 각자의 사정과 지역사회의 상황변화 등으로 인해 하나로 통폐합되었는데, 그 과정 자체도 그리 예사롭지 않았다. 꽃동네에서 오랜 동안 운영되던 놀이방은 이 실무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주민지도자에 의해 거의 쫓겨나다시피 그 동네를 떠나야 했다. 이제 와서 그 과정에 대해 누구의 잘못이냐를 가리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젊은 처자 셋이서 청춘을 바친 그 곳에서 일부 주민지도자들의 악의적인 비난 등으로 그 마을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당시 심정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아픈 기억이다. 철거가 모두 끝날 때까지 주민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이들의 열망은 ‘배신감’으로 되돌아왔고, 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봉천9동의 ‘봉천동 애기방’은 그 지역이 재개발로 철거 되면서, 실무자들이 주로 철거에 대응하는 주민조직화 사업에 집중하였다. 주민들도 많이 떠났기 때문에 놀이방 사업 자체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씩씩이 놀이방’ 역시 한 곳은 재개발과 주민들의 대규모 이전 등으로해서 그 지역사회에서 놀이방의 필요성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지역사회탁아소연합>의 같은 지부 멤버였던 이들은 통 큰 합의를 하게 된다. 세 개의 놀이방을 통합하여 하나의 어린이 집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합의는 단지 이들 세 개 놀이방의 개별적 사정에만 근거하지 않았다. 당시 빈민지역들이 재개발로 철거되면서, 그 주민들 상당수가 산동네 아래의 일반 주거지 지하 등으로 이주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빈민지역 내에서의 놀이방 운영이라고 하는 것이 명분 이외의 실제 필요와는 괴리된 것이라 여겨졌다. 또한 가난한 아이들이라고 해서 항상 물리적 시설이 열악할 놀이방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들은 각자가 가진 자산들을 모두 합하여 산동네 밑에 번듯한(산동네 놀이방 공간과 비교해서는) 어린이 집을 설립한 것이다.

   사실, 너무도 당연하고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현장에서의 여러 사례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과정이 너무나 대견스러웠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각자가 지금까지 가진 일종의 기득권을 전혀 주장하지 않은 채, 필요한 방향으로 활동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얼마 전 봉천동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에게서 그 <씩씩 어린이 집>이 완전히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은 또 한 번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왜 문을 닫기로 했느냐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 결정의 동기와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의 그러한 결정이 또 한번 자랑스럽게 다가올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곳은 오랜 동안 어린이 집을 운영하면 지역운동을 해오던 이들에게는 물리적 기반이 되어왔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창 활동할 때처럼 가난한 맞벌이 부부들을 위한 어린이 집이 지역사회에 없는 것도 아니다. 이들보다 훨씬 더 좋은 공간과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어린이 집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에게는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자신들의 활동기반으로서 어린이 집을 유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

   서초동 꽃동네에서부터 일하던 실무자 한 명이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더니, 오늘이 <씩씩이 어린이 집> 마지막 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 곳에 전화를 걸어 오래도록 만났으면서도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그 곳 실무자들과 전화통화를 하였다. 그냥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들이 자랑스럽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였다.


   모두들 이제는 좀 쉬고 싶다고 한다. 그래, 당분간은 좀 푹 쉬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의 일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들은 여느 사회운동가들처럼 사회적으로 유명해 지지도 않았고, 사회운동을 한다는 훈장을 한 번도 가슴에 달아본 적이 없는, 아주 소박한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험하고 암울했던 시기에 열악한 지역사회에서 조그마한 희망을 나누기 위해 헌신했고 아파했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들의 가슴에 훈장을 남기는 일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 피땀 서린 <씩씩이 어린이 집>을 오늘 정리한다. 그리고 이들이 어린이 집을 운영하기 위해 사용했던 재산은 모두 지역사회에 환원했다. <관악주민연대>에 몽땅 넘기기로 한 것이다. 퇴직금이나 제대로 챙겨가는 건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오늘 이들과 전화통화를 한 후 뭔가 헛헛한 마음이 들어서이다. 이들과 관계된 과거의 추억이 솔솔 되살아나기도 하고, 이들의 이러한 결단의 정신을 주변에 알리고도 싶고... 뭐, 이러저러한 마음이 들어서이다.

  봉천3동 ‘씩씩이 놀이방’에서 살던 시절 그 젊고 풋풋한 20대 여성 실무자들은 시간이 늦으면 새벽에 일찍 올 자신이 없다고 나와 한 방에서 잔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 일을 두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호형은 고자임에 틀림이 없어”라며 키득키득 거렸던 적이 있다고 했다. ‘꽃동네 놀이방’ 실무자들은 자신들이 힘들어 할 때 몇 번 찾아간 것이 고마웠는지 예쁜 후배를 소개팅 시켜주기도 했었다. 내 또래의 동네 청년 몇과 ‘봉천동 애기방’ 수리를 해준다고 몰려가서 정작 일은 조금 하고 그 실무자들과 어울려 놀던 일 등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들에 대한 내 앞으로의 기억은 자신들의 애초 ‘첫 마음’에 끝까지 충실했던 사람들, 그래서 박수칠 때 떠난 멋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별로 무난하지 못한 내 성격에도 이들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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