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일본에 아주 독특한 청년이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친구들이랑 시위도 벌이고 지방선거도 출마하는 그저그런 '괴짜'리라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넘기려다 왠지 그 실체가 궁금해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마쓰모토 하지메라는 청년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그 친구가 쓴 책이 최근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구나 [공룡 둘리에 관한 슬픈 오마주]나 [습지생태보고서]처럼 일그러진 우리 현실을 독특하게 묘사하는 최규석 씨가 삽화를 맡았다는 사실을...
역시나...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패러디한 유쾌한 표지(중간의 푸른 깃발엔 '캐백수 연대'라고 적혀 있다.ㅎㅎ)에, [습지생태보고서]의 출연진들을 다시 감상할 수 있다. 글과 삽화가 이렇게 절묘하게 일치되는 책은 아마도 당분간 찾아보기 어려울 듯하다. 어쨌거나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 세대]가 우울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기껏해야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자라는 낡은 주장을 한다면, [가난뱅이의 역습]은 유쾌하고 혁명적인 반란을 외친다.
책을 펴니 제 1창의 제목은 '여차할 때 써봄직한 가난뱅이 생활기술'이다. 방세를 아끼는 법부터 노숙하는 법, 차를 얻어타는 법, 입을 옷을 구하는 법 등 다양한 생활의 지혜들이 펼쳐져 있다. 가난을 궁색하게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등을 치지 말고 공유하고 공생하며 살라는 교훈도 들어 있다. 이렇게 1장만 읽고 있으면 아이 찌질해라며 슬슬 짜증이 밀려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활의 지혜보다 하지메의 장기는 대학과 거리에서 펼친 반란에서 더 빛을 발한다. 하지메는 '호세 대학의 궁상스러움을 지키는 모임'에서 시작해 바가지를 씌우는 학생식당 분쇄 투쟁을 벌이고 궁상스러움을 없애려는 학교에 대항해 난로 투쟁, 찌개 투쟁, 술 투쟁, 갈고등어 암치 투쟁, 페인트 습격사건을 벌인다. 말이 투쟁이지 한잔 하면서 실컷 불평불만을 늘어놓다 취기를 빌려 총장실을 습격하는 막가파 학생들이다. 투쟁의 필수품은 쇠파이프나 화염병, 농성이 아니라 찌개나 고기와 술, 술판이다.
하지메의 이런 행동이 아주 엉뚱해 보이지만 내 눈에는 나름 진지하게 '판을 짜는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메는 멍석만 깔아놓고 주위의 가난뱅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유도하면서 자기 자신도 즐겁고 다른 이들도 즐거우니 이 얼마나 유쾌한 투쟁이냐. 그의 말을 들어보라.
당시는 저녁 시간 이후에 대학에 가면 언제나 누군가가 찌개를 끓이거나 고기를 굽고 있어서 곳곳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색다른 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도 바비큐를 굽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한잔 안 할래?”하고 말을 건네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으응, 이게 정말 바람직한 대학인 거다. 걸어다니기만 해도 친구가 생기니까!
이런 하지메의 투쟁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거리로 이어진다. 하지메는 이제 거리에서 노상 대연회나 찌개 집회를 열었다. 거리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거나 찌개를 끓이면 여기저기서 가난뱅이들이 나타나 이 축제에 동참한다. 따로 선동하거나 선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렇게 모여든 힘을 모아 중심가를 습격(?)하거나 크리스마스 분쇄 집회를 연다.
사람들이 상상만 했던 사건들이 하지메의 행동에선 실현된다. DJ가 시끄러운 음악을 틀며 시위를 벌이고, 집회 신고를 하고선 달랑 3명만 집회에 참여한다든지(3인 데모), 심지어 귀찮으면(?) 신고만 하고 집회를 열지 않는다(공포의 바람맞히기 데모). 생각해 보라, 집회장에서 열리지 않을 집회를 기다리는 경찰의 모습을...
대학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지메의 거리축제엔 음악과 춤이 빠지지 않는다.
소리를 중시하는 이유는 우선 우리가 즐겁게 하기 위해서지만 주변의 혼란을 가중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질서정연하게 데모를 해봐야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게 뭔 데모람. 모처럼 ‘데몬스트레이션’으로 쌓이고 쌓인 불만을 터뜨리려고 작정했다면 틈만 나면 음향을 꽝꽝 울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교통을 마비시켜 조금이라도 세상을 들썩거리게 해야 보람이 있다. 이게 바로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거다. 까불지 말라는 경고를 귀청이 떨어지게 알리려면 마냥 예의 바르게 굴 수가 없는 법이다. 대혼란 만만세!
이렇게 데모를 벌이다 하지메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길목 좋은 곳에서 때마다 사람들이 듣지도 않는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하지메는 구의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온 동네의 가난한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다 모여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얘기를 떠들어대며 축제를 연다. 놀랍게도 하지메는 이런 소란을 떨고도 1,061표나 얻어 공탁금을 회수(400표 이상)한다.
거리의 반란을 꿈꾸는 하지메가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곳은 '아마추어의 반란'이라 불리는 재활용가게이다. 재활용 가게라고 해서 한국의 '아름다운 가게'나 '녹색가게'를 떠올리지 마시라. 이들의 가게는 재활용 물품을 거래할 뿐 아니라 인터넷 라디오방송 기지(http://trio4.nobody.jp/keita/
)로, 술집으로, 무도회장으로, 다양한 반란의 공간으로 활용되니까.
의식적인 학습이든, 아니면 부모님의 영향이든 하지메는 가난뱅이들이 서로 연대해야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지역에서 연대하며 살아가자고 외친다. 용산 참사를 통해 드러났듯이 지역의 조그만 상점들은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뱅이로 전락할 신세이다. 술집, 식당으로 이어지는 대형 체인점과 대형 할인마트의 공격을 받으며 자영업자들은 몰락하고 있다. 하지메는 재활용 가게만이 아니라 이런 작은 상점들이 공동체를 꾸리고 공동의 공간을 마련하며 살아가자고 외친다.
개인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생활하는 것에 비해 가게를 통해 마을에서 공동체를 조직하면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세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선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면 공공의 재산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점, 신명이라도 나면 공공시설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두자.
하지메는 가난뱅이임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낭비를 줄이고, 가난뱅이들은 "공유할 수 있다면 공유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고, "중고품을 사거나 필요없는 물건을 파는 행동이 곧바로 바가지 씌우는 경제에 대한 저항이 된다는 말이다! 동네 할머니가 “어머, 이거 왜 이렇게 싸”하고 중고 주전자를 사 가는 것이 반체제 행동이 될 수도 있다!"고 외치는 새로운 반란가이다.
하지만 하지메라는 이 시대의 청년이 가진 새로움은 분명 있다. 그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을 궁상스럽게 외치지 않고 부자들을 긴장시키고 압박하는 공격적인 개념으로 바꾼다. 우린 더이상 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 당신들이 짜놓은 경쟁의 규칙을 더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그의 각오는 다분히 위협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따분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아이고, 이런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3년만 다니고 그만둬야지, 그때는 자유롭게 살아가야지”하는 놈치고 진짜 회사를 가믄두고 자유롭게 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안정감 위주로 무리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면 해방감 있는 세상을 맛볼 수 없다
나는 그가 계속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대학에서 거리로, 구의회선거로, 그의 반란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얼마전 마포 민중의 집에서는 그를 다룬 영화 [아마추어의 반란]이 상영되었고, 그 기세를 몰아 마쓰모토 하지메가 한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의 방문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가난뱅이들의 역습을 기대해 본다(설마, 재미 없게 강연회만 하고 돌아가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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