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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초록정치연대의 부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초록정치연대 소식지에 실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리 여기에 싣습니다.



풀뿌리가 세상을 변화시켜왔다고 얘기한다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역사는 아래로부터의 변화의 역사다. 몇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주장은 온당치 않다. 풀뿌리의 피와 살이 흩뿌려져, 그 위에 발 딛고 섰기 때문에 영웅은 탄생할 수 있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도, 알프스를 넘나들며 위력을 떨쳤던 그 영웅도,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영웅도 민초들의 희생 위에 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파티스타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변화는 밑에서부터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식의 눈으로 영웅을 바라본다면, 우리들의 영웅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왔다면, 이 시대의 영웅은 단연 풀뿌리가 되어야 마땅하다.


요즘말로 하면 아줌마가 ‘캐무시’ 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햇살 이순임 씨의 말을 빌자면, 언제 어디든 몸빼 바지 하나로 출동하고 뽀글뽀글 파마머리로 1년을 너끈히 견딘다는 그 아줌마들이 희화되어 회자되곤 했다. 친숙한 표현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겠으나, 조롱과 냉소라는 부정성이 더 강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상황이 별반 나아져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그 아줌마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서서히 기지개를 편다. 아니, 이미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변화의 주체가 돼 버렸다. 남성이 다 빠져나간 휑한 도시에 홀로 남아, 놀이터 문화를 변화시키고 가난한 아이들을 보듬어 안고 왕따 없는 세상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사회의 곪은 부위를 치유하는 아줌마들. 발 딛고 선 삶의 터전에서부터 사람을 가꾸고 삶을 변화시키는 이런 아줌마들이 진정한 풀뿌리고 진정한 영웅이다.


‘치유와 키움, 기적의 풀뿌리 주민운동 체험기’(정보연, 김수경, 이순임 저, 이매진, 2007)는 이런 ‘영웅’들을 키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십중팔구 이 글의 저자들은 손사래를 치며 ‘우린 영웅을 키우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이 책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사람을 인큐베이팅(키우고) 하고 네트워킹(연결한)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들은, 사람을 바꾸는 일, 사람들이 더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일, 그 관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삶의 작은 영웅들, 주인공들을 떠받치는 조연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운동의 도구를 삼고 있는 것은 ‘치유와 키움’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을 스스로 드러내게 하고 그것을 가로막는 무언가를 치유하는 일, 그것이 바로 ‘치유와 키움’운동의 핵심이다. 어디서부터? 그건 나로부터 가능하다. 이 책은 한편의 자기 고백서와도 같다. 내가 어떻게 치유되었고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도봉시민회’를 통해 더 아름다워졌다는 유일한 청일점 도깨비, 지역운동이 깨달음의 과정이었다고 말하는 수피, 수다의 미학을 이야기하며 ‘왕 언니’로 통하는 햇살, 모두 정겨운 이웃 주민들이다. 이 책이 강조하는 ‘나로부터 즐거움’을 몸으로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반에 흐르고 있다.


책을 덮으면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역시 ‘사람과의 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없구나! 즐겁게 활동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수다를 떨고 용기를 얻고 개인의 느낌과 역사를 소통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들이다. 지역운동, 또는 풀뿌리운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실수해도 용기를 얻는 건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다름’을 이해하는 것도 사람을 통해서 가능하다. 80-90년대 시민운동이 정치적 정당성의 힘으로 움직였다면, 동네 이웃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작은 외침이다. 그렇다고 이 책은 당장 옆 집 문을 두드려 이웃과 소통하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당위적 활동은 쉽게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재미와 즐거운 일을 찾을 것을 권한다. 그리고 이웃들과 수다를 떨어라! 햇살 이순임 씨는 말한다. 주부가 자기 속에 담고 있는 창의적인 생각을 끌어내주는데 ‘집단수다’ 만큼 좋은 건 없다고. 수다 속에는 오랜 시간 삶과 가정을 관리한 경험들이 녹아 있다고 강조한다. 기실, 조명을 받는 풀뿌리운동 사례들을 보면 수다의 역할은 지대했다. 수다는 마음을 여는 열쇠고 소통의 도구다. 남편을 씹어보자! 시댁 흉도 바가지로 하자! 자녀 이야기로 꽃을 피우자! 그리고 조금씩 내가 사는 동네를 즐겁게 씹어보자!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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