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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16 부모님 댁에 신문 놔드려야겠네!!

이 글은 1월 12일자 시민사회신문에 쓴 글입니다.

김현(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새해 첫 주말, 맛있는 곶감을 사놨으니 가져가라는 엄마의 전화 소리에, 새해 인사도 드릴 겸 부모님 댁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제와 똑같은 해가 또 떴을 뿐이고, 어제의 삶을 오늘에 이어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새해에는 더 돈 많이 벌고 건강 하라는 부모님의 덕담에서 새해가 오긴 왔구나 싶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버지 옆에 놓여 있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D신문과 J신문. 아버지가 수십 년간 봐왔던 질긴 인연의 신문이다. 대충 훑어보고 있자니 저녁상이 들어온다. 반주가 빠질 수 없다. 술잔을 몇 번 기울이니 속이 얼큰하다. 때마침 아버지의 일설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방면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시다. 오늘도 정부 여당, 혹은 보수 언론의 논리를 그대로 좇아 자식들과 대화한다. 아니, 대화라기보다 당신의 생각을 의례적으로 전달하는 새해맞이 가족 시무 연설인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소위 ‘마봉춘’의 편향된 언론관을 질타하신다. 대학생 때부터 생각의 차이로 언쟁해왔으니 올해가 벌써 20년째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조용히 한 귀로 듣고만 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던 그 이야기를 되풀이 하시는 것 같다. 어디보자. 아버지 옆에 있던 신문을 다시 들쳐본다. 바로 그 J신문과 D신문의 기사 내용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읊조리신 거다. 순간 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언론의 세뇌 메커니즘을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낀다. 언론의 논점이 개개인의 뼛속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다. 누가 더 좋은 언론인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오만가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엔 오만가지 관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국방엔 보수적이되 문화엔 진보적이고, 교육엔 아나키적이나 경제엔 생태적인 관점이 존재할 만큼 미세한 스펙트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렇게 오만가지 관점이 각축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론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언론이 특정 집단의 목소리만을 대변한다면? 그 집단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이라면?


그래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은 사회의 공기인가? 이 명제가 정(正)이 되기 위해서는 언론은 사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공익적 도구, 즉 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뜻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공기라고 말한다. 그러하지 못한 언론이 사회의 공기를 운운하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재벌로부터 자유로운가? 사주로부터 자유로운가? 모든 정보가 소통된다는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진부한 이 물음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이러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밝힌 전직 대통령의 고백은 어쩌면 뒤늦은 고백일지 모른다. 시장은 이미 삶 속 깊은 곳까지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장에게 현 정부는 언론 관계법에 손을 대며 공영방송마저 맡기려 한다. 시장은 파워엔진을 달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이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언론의 공공성을 외치며 전단지를 돌리는 비장한 사람들의 모습과 특정 언론의 논조를 그대로 따라 읊는 내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지상파를 거머쥔 대기업이 과연 언론의 공공성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파에 실어 내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내 아버지와 같이 평범한 시민들이 자사의 논조를 그대로 따라 읊조리도록 재생산하는데 주력할까? 지난 1일 새벽, 제야의 타종 소리를 평화로운 노래와 박수로 화면 가득 채웠던 한 방송의 판타지를 보면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진실을 뒤로 숨길 수 있다는 것을 전 국민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방송의 사유화가 더욱 두렵게 느껴진다.


동질적인 이념을 지향하는 거대 언론이 종이 신문을 넘어 지상파까지 독점한다면 다양한 생각의 각축은 요원한 문제다. 마치, 박제된 이념의 칩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식되고 생각을 지배하는 것처럼, 더 이상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 것이다. 특정 신문과 인연을 맺으며 가치관을 형성해왔던 내 아버지의 경우가 이를 증명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도 내 아버지처럼 특정 언론의 논조에 지배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다양한 논조의 언론이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참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는 듯싶다.


부모님 댁을 나오니 꽤 쌀쌀한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조만간 부모님 댁에 신문 하나 넣어드려야겠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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