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주민자치센터 전국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주민자치 소식’에 실릴 글입니다. “조례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부탁받아 작성했습니다. 아직 발행되지는 않았으나, 미리 블로그를 통해 올립니다.
조례는 생활과 가장 가까운 법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사무를 제정할 수 있다.” 이 문구는 헌법 117조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헌법은 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법을 세울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국가에 법률이 있다면 지역엔 조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례는 ‘지방자치단체의 법’이라고 불린다. 조례는 헌법이나 법률에 비해 하위개념에 속하는 법체계지만 지방자치단체의 사무를 규정하는 법체계이므로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하루 동선을 상상해보자. 아침밥을 먹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어린이집 운영은 ‘보육조례’ 영향 아래에 있다. 일반 쓰레기를 쓰레기봉투에 담고 음식물쓰레기를 가까운 처리시설에 버린다. 이때에는 ‘폐기물 관련 조례’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장을 보러 밖을 나가게 되면, 많은 지역에서 제정되어 있는 ‘보행권 조례’의 영향을 받게 되고, 주민자치센터를 이용하게 되면 ‘주민자치센터 조례’의 규정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시(구)민회관을 이용할 때도, 동사무소를 이용할 때도, 체육 광장이나 공원을 이용할 때도, 건물을 짓거나 주차장을 이용할 때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례로부터 권한과 의무를 부여받는다. 이렇게 조례는 우리 생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인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지역의 조례를 제대로 이해하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조례는 정책의 방향과도 같은 기능을 지닌다. 지방자치단체가 업무처리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책프로그램을 일반화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러한 기능을 조례가 한다. 가령, 많은 주민들이 지방행정에 시민참여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고, 이 제안을 지방자치단체장이 받아들였다면, 한시적인 정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참여정책을 일정한 법체계 안에 두어야 한다. 누가 단체장이 되던,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적으로 시민참여정책을 수행하려 한다면 ‘시민참여기본조례’와 같은 조례를 제정하는 것이 시민참여를 확고하게 보장할 수 있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를 살펴본다면 그 지역의 정책 방향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례는 법률을 자극하고 선도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청주의 ‘정보공개조례’(92년 제정)의 경우, 지역에서부터 국민 알권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중앙 입법부를 자극하였고 결국 98년도에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이끌어 냈다. 비어 있는 법률의 공백을 생활 현장에서부터 선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청주와 같은 선도적 조례 제정 행위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편은 아니다. ‘주민자치센터 운영 조례’를 여러 지역에서 무작위로 취합해 비교해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엇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조례 준칙을 그대로 따르는 경향 때문이다. 우리 지역이 처한 조건과 특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을 통해 조례가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한 주민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관행적으로 행정부는 중앙정부의 준칙을 그대로 인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행정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입법 기관인 의회 의원들의 자질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의회가 시민의 의사에 맞게 필터링하는 절차를 제대로 갖춘다면 지역 특성에 맞는 조례가 얼마든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지금은 조례 제정에 있어서 행정부나 의회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지방자치법’은 주민에게도 일정한 조례 발의권을 부여하고 있다. 조례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주민 생활의 질도 달라질 수 있다면 누가 발의하느냐에 따라 조례의 내용도 차이가 날 수 있다. 생활자들의 이해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방법은 생활자들이 직접 조례 제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미 광명에서는 주민발의를 통해 ‘도시계획조례’를 개정한 바 있고, 과천도 ‘보육조례’를 개정한 바 있다. 여러 지역의 학교급식 조례도 이런 과정을 거쳐 제정되기도 했다. 주민발의는 주민들이 원하는 내용을 조례에 담을 수 있다는 것 이외에 그 과정에서 협동 정신을 발휘한다는 것이 큰 미덕이다. 조례를 이해하는 과정이면서 민주주의를 습득하는 훈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조례 제정 범위의 한계로 인해 다양성이 확보되지 못한다는 측면과 과다한 청구인명부의 수를 요구한다거나 절차상의 까다로움 등이 주민발의제도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민발의는 청원이나 탄원과는 달리 법에 의해 보장된 시민 권리의 행사이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주제로 주민발의 사례들이 경험될 필요가 있다, 경험만큼 좋은 민주주의 학습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조례는 모든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주민발의에 의해 제정된 조례라 하더라도 실행되는 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곧 주체의 문제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제도는 중립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활용할 주체의 역량과 자세에 따라 선하게 사용될 수도 있고 악하게 사용될 수도 있다. 예컨대,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참여조례’가 제정되었다고 해서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저절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시민참여를 폭넓게 보장하는 조례가 제정된 순간에 조례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참여가 활발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감시와 견제, 그리고 실제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때 ‘참여조례’는 완성되는 것이다. 조례가 가지고 있는 함정은 바로 이런 것이다. 조례가 좋게 제정되기만 하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떨쳐야 한다. 몇 해 전, 유엔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시민제도 중에는 브라질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제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제도는 제도화되지 않는 제도이다. 즉 조례로 작동하는 제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 제도를 극찬하는 이유는 그 제도를 운용하는 주체들의 역량에 있다. 제도를 잘 운용할 수 있는 시민적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제도는 공허하다. 주민자치센터 운영에 관한 조례도 마찬가지다. 공간으로서 센터의 기능 못지않게 주민들의 자치력 강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민자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스스로 통치하는 훈련들이 뒤따를 필요가 있다. 조례가 주민들의 자치력을 끌어내는 다양한 내용들을 지니고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제도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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