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입니다.

이미 몇 차례 공지를 해드린 바 있습니다만,
이매진 출판사에서 [모이고떠들고꿈꾸다-풀뿌리에서 시작하는 좋은정치]라는 제목으로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책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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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 왜 우리는 풀뿌리인가?
   1장 : 내가 경험한 대변형 운동과 풀뿌리운동
   2장 : 그래, 나는 풀뿌리를 믿는다
   3장 : 느리게 걷자 - 풀뿌리운동의 역동성과 상상력을 위해
   4장 : 우리는 나보다 현명하다 - 뉴미디어, 소통, 풀뿌리운동
2부 : 허울 좋은 분권과 주민참여제도, 어떻게 바꿀까?
   5장 : '스스로'의 시대 - 풀부리의 눈으로 본 분권과 자치
   6장 : 시민이 연출하는 종합예술, 직접참여제도
3부 : 선거를 넘어선 지역정치 판짜기
   7장 : 풀뿌리운동의 정치 참여, 필요성과 사례들
   8장 : 네트워킹하고 그라운드 워킹하자
   9장 : 지역 네트워크 운동의 미래 - 노원 지역을 중심으로
  10장 : '좋은정치'를 위한 풀뿌리 정치운동을 제안한다

연구소에 70여권의 책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직접 주문을 하시면 조금 저렴하게 발송해드리겠습니다. 서점에서는 14,000원에 판매합니다.

직접 주문시 판매가 : 12,000원(우편요금 포함)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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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구참여연대 회원소식지 '함께 꾸는 꿈'에 실은 글입니다.

지난 12월 15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한 편의 스펙터클한 코미디를 연출했다. 오랫동안 두 정당이 논의한 2010지방선거 제도적 틀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역시나, 두 정당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당공천제 유지’는 지방자치 현실을 생각하면 민망한 결정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한 발 더 나갔다. 불법으로 취득한 정치자금을 30일 이내로 반납할 경우, 형을 감면하거나 면제하고, 불법 향응 제공에 대해서도 처벌을 완화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합의사항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정치적 범죄행위에 대해서 관대하게 처리하겠다는 기득권자들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이폰과 트위터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에 그들은 구석기 시대로 퇴행한다. 한편의 블랙코미디이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현재 우리나라 대의정치는 한 마디로 ‘소수정당의 정치 독점’으로 표현될 수 있다. 정치의 주체는 시민이라는 이상(理想)을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대의정치를 구속하는 정당법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철저히 배제하고, 정당만의 정치로 협소화시키고 있는 것이 정당법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관객민주주의’를 부추기는 법이라고 한탄하며, 또 어떤 이들은 정치 무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이라고까지 말한다.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시민의 뜻은 아랑곳 않고 두 정당의 기득권 유지에만 야합할 수 있었던 것도 정당법의 그늘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기성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정치 개혁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선거 때마다 그들에게 또 다시 표를 던져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대의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퇴행은 고착화될 것이 뻔하다.

이렇듯, 제도를 등에 업고 중앙정치는 지역정치까지 잠식해버렸다. 마치 중앙의 정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모든 것을 기획하고 아래에서 맞추라고 한다. 부족하면 늘려야 하고 넘치면 잘라야 한다. 지역의 조건과 특수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지역주의를 타파하자고 말만 하지, 실제는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간다. 그래야 그들의 독점은 지속될 수 있다. 지역은 중앙의 선거판을 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게 지역 정치인들은 중앙당에 줄을 선다. 수 십 년 동안 이어져온 정치적 예속이다. 이러한 정치풍토는 비단 보수정당만의 행태는 아닐 것이다. 진보 정당이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풀뿌리적 가치를 이야기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정치공학적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향식 정치구조에 익숙한 것이다. 하향식은 효율성이라는 명분의 탈을 쓴 기득권 유지의 방편에 불과하다.

정치 영역이 사회변화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역할을 무시하고 사회변화를 바라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이미 한국의 정치지형의 혁명과도 같은 변화는 필연적인 시대의 요청이 돼버렸다. 그런 면에서 2010지방선거를 계기로 여러 풀뿌리 시민사회가 정치변화를 꾀하려는 움직임은 당연한 결과다. 정치질서의 ‘조정자’라는 이름으로 중립의 위치를 벗어나, 정치의 주체로 거듭나려는 풀뿌리의 움직임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속초, 대전, 여수, 관악, 구미, 노원, 과천, 도봉, 성미산, 동작, 부천 등등 주민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거듭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다. 이는 정치를 정치답게 복원하려는 운동이기도하다. 물론, 이러한 풀뿌리 정치운동은 일상성을 지녀야 하고 집단화를 이뤄야 한다. 일상성은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선거’시기에만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집단화는 몇 몇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풀뿌리의 주체인 주민들이 스스로 정치세력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성 정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풀뿌리 지역운동 차원에서 지방선거 참여전략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낡은 정치를 반면교사 삼을 필요가 있다. 일단, 정치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몇몇 엘리트가, 혹은 지방선거에 참여하고자 하는 특정한 조직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참여를 희망하는 모든 풀뿌리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촛불집회가 그랬듯이, 모든 이들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야 한다. 주민 스스로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지역운동단체가 그런 멍석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대변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대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정치기획의 주요한 컨셉이다. 예컨대, 정책은 책상머리에 앉아 만들어지는 페이퍼정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엮여져야 하며, 주민들의 입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사회사업운동가인 한덕연 씨는 ‘걸언(乞言)’할 것을 주문한다. 새로운 정치를 갈구하는 많은 이들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생생한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과 같은 정치구도에서 간혹, ‘한 방’에 무엇인가 해결해보려는 습성이 나타나곤 한다. 권력의 정점을 차지한다면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습성은 기본적으로 약한 자들의 프레임이다. 특히, 선거시기가 임박할수록 정치공학적인 프레임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민주대연합으로 현 정부를 심판해야 한다거나, 전국적인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거나, 지역적인 기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벌 좋은 엘리트만으로 인물교체를 이룰 수 있다는 발상은 새로운 풀뿌리 정치를 해나가는데 있어서 해악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이러한 낡은 도식화는 시민들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청을 담아낼 수 없다. 오히려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힘을 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힘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결국 사람이 희망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 1,000명을 모은다고 생각해보자. 500명도 좋다. 아니, 초기에는 200명도 좋다. 새로운 정치 씨앗들을 조직하는 일은 기초의회 과반수 당선보다 장기적으로 월등한 힘을 지닌다. 기초의원 몇 명을 당선시킬 것인가가 관성적 정치공학이라면, 좋은 정치 씨앗들 200명을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정치기획의 토대가 된다. 500명이면 더 좋고 1,000명이면 ‘지역정당’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정치기획’은 이전에 없었던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기획은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회운동이 추구해왔던 ‘사람을 만나고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정치기획에서도 뼈대가 되는 정치운동이다. 이러한 틀 속에서 자발적인 자원봉사가 이루어지고, 흥겨운 축제의 장이 만들어진다. 일본의 지역정당(Local Party)운동이 낡은 정치구조를 타파하고 아래로부터 변화를 꾀한 것처럼, 'for the people'이 아니라 ‘of the people’이 되어야 한다. ‘마을이 세상을 구한다’는 간디의 외침은 실현 불가능한 초현실적인가? 그렇지 않다. 이미 환경․생태가 온전하지 않고, 경제적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자본과 경쟁시스템은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고, 공동체가 급속도론 파괴되는 현시대의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으로써 ‘지역’은 희망이다. 대안적 정치세력의 희망도 지역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중앙정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풀뿌리가 일상의 정치로 탈선한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정치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2010지방선거는 중요한 좌표가 될 것이고, 일상의 정치로 내려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내년을 딛고, 더 큰 힘이 되어 우리 만나자!!!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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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은 꼭 '정치중립' 지켜야 하나
심판노릇 이제 그만, 정치주체로 나서야
[풀뿌리가 정치를 바꾼다③] 오마이뉴스 - '좋은정치씨앗들' 공동기획

하승창

최근 시민운동이 옛날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가령 지난해 촛불시위는 시민운동가들이 주도하지 않아도 훨씬 잘 조직되고 진행됐다. 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시민운동적 방식은 이젠 시민운동가의 것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시민운동이 낡은 소통방식과 운동방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예전 같은 위치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운동은 정치적으로 중립?


이 예전 같지 않은 시민운동을 정의하는 개념 가운데, 시민운동의 변화를 옥죄는 것이 '시민운동의 정치중립'이다. 이는 시민운동의 정체성처럼 돼 버렸다. 그 배경에는 한국 시민운동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창립이 있다. 경실련은 '시민운동은 기존의 민중운동과 달리 비정파적'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처음부터 시민단체들이 선거참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부패정치인에게 경고 카드를 보여주고 있는 총선연대 포스터.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1991년 지방자치선거 당시 시민단체 인사들이 '지방자치는 시민운동의 영역'이라며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하고 말았다. 시민운동가들은 이 때 직접 경험한 선거문화의 후진성이야말로 정치개혁의 주요 문제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공명선거캠페인, 정책선거캠페인 등 선거문화와 정치과정에서 공정한 룰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했다.


시민운동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은 이 때부터 일반화됐다.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은 1990년대 시민운동의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신뢰를 획득한 것도 사실이었다.


별다른 의심이 없던 이 문제가 논란이 된 것은 2000년 총선연대의 낙선운동 때문이었다. 서경석, 이석연 등 경실련의 전 사무총장들은 낙선운동에 대해 시민운동의 정체성인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총선연대는 어느 특정정당의 편에 있기보다 낡은 정치문화의 개혁이라는 대의 위에 있었고 그것은 어느 특정 정당에 대한 공격으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서경석, 이석연의 문제제기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시민운동이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면 모르지만(이런 문제제기를 할 리 없겠지만) 정치적 편향에 관한 것이라면 틀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시민운동은 낙선운동이 정치적 중립의 틀 내에서 이루어진 정치개혁이었다고 평가했고, 이후에도 정치적 중립은 변하지 않는 원칙인 것처럼 여겨졌다.


낙선운동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아래서 일부 시민운동가들이 정부의 성격과 개인적 결단에 의해 정관계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이는 10년 내내 정치편향 논란에 휩싸이는 단초를 제공했다. 지금도 시민운동은 그 언저리 어디에 있는 것처럼 각인되고 있다. 시민운동은 그간 일관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홍위병' 운운하는 한나라당과 우익인사, 그리고 우익언론의 무차별적으로 공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하지만 '시민운동 정치중립'의 주창자이기도 했던 서경석과 이석연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또 과거 '정치적 시민운동'을 격렬하게 성토했던 뉴라이트는 지금 현 정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낯빛을 180도 바꾼 이들의 모습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 의회 진출로 입지는 더 좁아지고...


  
▲ 2002년 노사모는 한국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켰다. 2002년 12월 19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전광판을 통해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는 노사모 회원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적 발언을 하기는 마찬가지인데, 2000년 이전에는 왜 이런 논란들이 없었을까? 그것은 우리의 정치지형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90년대까지 우리 정치는 지역과 보스에 기초한 보수정당들의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당시 노사모의 출현은 다른 변화를 보여주었다.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매개로 한 사회개혁에 시민단체들보다 대중이 먼저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시민단체의 출현 앞에 상대적으로 대선유권자연대로 모인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작아 보이기만 했다.


더구나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하면서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은 더욱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정책비교를 해보아도 민주노동당이 훨씬 시민운동에 가까웠지만, 실현가능성이라는 항목으로 다른 정당에 비해 낫지 않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다. 그러한 시민단체들의 결정 뒤에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족쇄가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정치·사회적 조건이 이미 가치를 중심으로 나뉘어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는 시기에는 사실 정치적 중립이 설 자리가 없다. 시민운동의 요구 자체가 이미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만큼 그 행위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에서 공정한 룰에 관한 것이니만큼 중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각종 제도적 요구와 개혁적 요구엔 이미 특정한 가치지향이 담겨 있다.


이제 시민운동은 하나가 아니다. 가치지향이 다양하며, 그에 기반한 행위들을 조직한다.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립적 위치에서 경쟁의 룰에 관한 주장과 요구로 운동하는 단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개혁에 관한 각종 요구를 내걸고 활동하는 경우, 이미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향해 움직이는 한 시민운동이 기계적인 정치적 중립을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시민운동의 가치지향을 온전하게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우리 사회에는 없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부분적으로 대변할 뿐이다.


46%의 투표율과 정치의 위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는 대의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를 보여주고 있다.
ⓒ 권우성
미국산 쇠고기

지금까지 시민운동은 정치적으로 심판 노릇을 하려 하거나 아예 관객의 위치에 불과했다. 그나마 지난 총선의 경우에는 늘 하던 심판 노릇도 하지 못했다. 낙선운동 이후 10여 년 가까이 시민운동은 정치개혁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지난 총선 투표율 46%가 말해주듯이 시민들은 정치의 관객으로 전락했고, 시민운동도 그다지 다른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러나 시민운동이나 시민이 정치를 외면할 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향한 주장과 목소리는 정치 영역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기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지상주의를 향한 각종 법률안이 이를 잘 보여준다.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 생태적 위기, 공동체성의 파괴 같은 것이 이처럼 시민들이 배제된 정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은 46%의 투표율이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낙선운동을 통해 사람을 바꾸어 봐도 공동체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정치적 시민단체를 만들어 '내가 권력을 잡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람을 당선시켜 보아도 변화하지 않는 삶의 현실을 보며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만 깊어 갔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촛불시위는 지금의 대의정치의 변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촛불에서 확인된 대의정치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다시 누구를 바꾸고 누구를 지지하면 될까로 움추러들지 않고, 시민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참여할 때만 사회를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시민운동은 더 이상 좋은 정치를 만드는 일을 '우리는 중립이니까' 하고 외면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해 있다. 좋은 정치세력을 만드는 일은 이제 우리 사회를 개혁하는 길이기도 하다. 시민운동이 곧 정당이 되고 정파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밑바닥에서 좋은 정치인을 뽑고 제대로 된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가를 만드는 일에 영향을 발휘하는 것은 가능하다. 또 그래야만 기존의 정당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정치적 중립을 넘어 제대로 된 정치를 만드는 일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민운동의 숙제다. 다가오는 지방선거는 아마도 그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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