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운동은 집회·시위를 ‘잘’ 하고 있는가?
- 소통과 연대·지지와 활력 넘치는 집회·시위를 고민하다 -

* 필자 : 안진걸, 성공회대에서 '엔지오와 사회운동'을 가르치고 있으며, 진보개혁을위한청년세대네트워크(cafe.daum.net/moldream)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 들어가며

○ 집회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 그런데 ‘비판과 성찰’이 담긴 글을 쓰려니 힘들게 집회·시위를 진행한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다. 또 수많은 집회에 참여하고 때로는 기획하기도 했던 필자가 쓰려니 쑥스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우리 시민·사회운동(이하 사회운동)의 소통과 연대의 활성화(설득력을 높이기)를 위해서도, 사회운동의 내면을 성찰하기 위해서도 사회운동의 주요 활동 수단인 ‘집회·시위’에 대해서 이제는 광범위한 성찰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하여 감히 글을 쓰게 됐다. 혹 반박을 받고 비판을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런 토론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운동이 소통과 연대가 넘치는 집회·시위를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 중학교 3학년 때인 87년에 고향인 전남 화순에서 처음으로 큰 집회에 참여해봤다. 그 후 고등학교 때는 광주에서 학교를 마치고 화순 집에 갈 때 ‘남총련(광주전남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시위로 차가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인지라 자연스럽게 내려서 걷다가 집회·시위에 참여했었다. 고등학생들이었지만, 그래도 좀 아는 것은 있어서 우리들은 80년 5월 광주시민 학살자인 노태우정권의 주구 파쇼경찰들을 향해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광주·전남에선 당시에 시위 때문에 차가 막힌다고 시위대를 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그러다 대학생이 된 91년부터 2007년 4월까지는 본격적으로 ‘직업적 집회·시위 기획자 또는 참여자’로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크고 작은, 이런 저런 내용의 온갖 집회에 참여해왔다. 노태우 군사독재정권과 싸웠던 폭투(물리력을 동반한 가두시위)에서부터 10여명 안팎이 참여해 진행한 시민단체의 작은 피켓팅, 그리고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내용의 1인 시위까지... 기억에 남는 집회도 참 많다. 2003년 이라크 1차 파병을 반대하기 위해 국회 본청 부근에서 기습시위를 했다 사지가 들려 닭장차에 끌려갔던 일, 2001년 핸드폰요금인하운동 도중 정보통신부 앞에서 기습 집회를 했는데 신고가 안됐다고 전경에 둘러싸일 뻔 했던 일, 더 거슬러 올라가 군복무 중 휴가기간에 참여했던 96년도의 연세대 집회(김영상 정권이 해산하려하는 학생들을 무리하게 가두고 강제진압하면서 벌어진 그 참상을 연세대 안에서 필자는 똑똑히 보았다), 95년 전두환·노태우 두 국민학살자·부정부패축재자를 구속시키기 위한 격렬 시위 등등

○ 집회·시위 참여인생 20년의 소회 속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시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집회·시위의 자유가 있었기에 언론을 소유하지 못한 민중, 시민사회단체, 소수자들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나마 한 구성원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그나마 그것이 공론화되어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고쳐올 수 있었다. 집회·시위의 역사는 한국 사회의 개혁과 진보,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 그 자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먼저, 집회·시위에게 절대 자유를 허하라.

○ 우리 사회운동의 집회·시위 문화를 성찰하고 비판하기에 앞서, 최근 당국이 반FTA 집회를 불허한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폭거이므로 강력히 비판받아야 한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원래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에 찬성하는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하지만 반대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보장되어야 한다. 집회·시위가 한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 사회에서 균형 잡힌 토론·논쟁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즉 경찰은 무언가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내용의 집회일수록 더더욱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지난날의 일부 폭력적 양상을 거론하며 무리하게 집회를 금지시켰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절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상태’라고 했다. 정부의 핵심 사업이다 해도 국민들이 반대하는 것이 자유롭게 보장되는 사회의 상태가 민주주의인데,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경찰이 이를 무력화 시킨다면, 민주주의의 상태는 매우 나빠지고야 마는 것이다.

○ 경찰들의 발표에도, 언론보도에도 보면 ‘불허(不許)’라고 표현하고 있다. 집회를 실제로는 허가제로 운영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처럼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집회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규정(헌법 21조 2항)은 현실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경찰과 언론들 스스로 ‘허가제’ 하에서의 용어인 ‘허용 또는 불허’라는 말을 서슴없이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집회·시위에 대한 허가제나 자의적 금지는 용납돼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민주적 기본권을 제한하면, 이미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권력이 자연법적·헌법적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리고 집회·시위는 주최자들이 맘대로 하는 것이 맞다. 집회에 대한 평가나 그 영향에 대한 토론은 차치하고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최근에 복면을 쓰는 행위 등을 금지한다는 집시법 개정안을 몇몇 국회의원들이 발의했는데, 이는 집회·시위의 기본도 모르는 자들의 폭거이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집회·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외치고 싶은 내용을 위해 자신들의 택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동원할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해골 분장을 하던(1인 시위 도중 해골 분장을 하던 시민이 연행돼 경범죄로 처벌받은 사례가 있다), 복면을 하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것은 집회·시위 참여자·기획자들과 이를 바라보고 보도하는 시민·언론간의 ‘소통과 연대’의 문제이지 권력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 자유의 범주에 이른바 폭력적 방법은 포함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 심지어는 폭력시위를 하더라도(이들이 실정법 위반에 대해 책임질 일인 것은 분명하고 필자도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그렇게 저항하면서 사회와 소통하고 연대하는 한 방식이 된 것이 ‘물리력을 동반한 시위’의 역사였다.  또 자연법적·헌법적 저항권에 의거한 저항의 폭력은 정당하다고 사법적으로도 인정된 바 있다. 다만, 그러한 특수한 저항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집회·시위의 자유에 ‘폭력적 시위’까지 포함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위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집회·시위 문제의 핵심은 더 많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쟁취해야 하는 문제임을 분명히 해둔다. 하지만 이글에서는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 사회운동의 주요 수단인 집회·시위에 대해 우리 스스로 성찰이나 검토할 점이 없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3. 시민사회운동의 집회·시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점에 대한 성찰과 대안

○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집회·시위의 어떤 점을 우리 스스로 성찰해야 할 것인가? 지금부터 필자가 만난 ‘평범한’ 시민들과 필자가 함께 수업(엔지오와 사회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학생들이 현장 수업(집회)에 참여한 후 들려준 이야기, 그리고 필자의 오랜 고민을 종합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 제일 큰 문제점은 현재 사회운동이 집회·시위를 통해서 집회·시위의 주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닐까 싶다. 집회를 통해 주장을 널리 홍보하고, 그 주장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시민을 많이 늘려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때로는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기도 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부분 수구언론의 왜곡보도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운동의 집회·시위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짜증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경찰 당국의 최근 강경하고 무리한 대응은 국민 일반의 사회운동 집회·시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은 것이라는 분석은 매우 시사적이다.

○ 집회·시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론·토론장을 형성하는 일종의 공적 의사소통행위이다. 그런데 공론을 제대로 형성하지도, 의사소통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형태로 집회가 진행되고 있다는 일군의 시민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시민사회운동의 집회·시위가 집회 고유의 목적보다는 집회 참가자들의 만족(자족)과 결의를 드높이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그것도 집회 이유 중의 하나로서 존중받을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집회에 감동이 없고 그 만큼 시민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는 지적을 유념해야 한다. 왜곡된 수구기득권 여론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집회·시위는 시민들을 만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며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겐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런데, 이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시민들에게 나눠줄 인쇄 선전물도 대폭 줄어들었다!) 이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보통의 시민들의 관점에서, 또는 객관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시 집회·시위에 대해서 거리감과 불만을 느끼는 요인들을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1) 집회·시위와 교통체증의 문제

○ 집회·시위의 역사와 현재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집회·시위로 인해서 길이 막히는 문제일 것이다. 도로 위를 행진하는 것은 바로 교통체증으로 연결된다. 집회의 경우도 넓은 공원이나 광장, 길(인도) 한쪽에서 진행 하는 방안이 있지만 아예 도로 위에서 진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수구보수 언론은 집회·시위의 내용과 의의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하지 않고 ‘길이 얼마나 막혔으며, 그로 인해 시민이 큰 불편을 겪었다’는 식으로만 보도함으로서 집회 참가자들과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혈안이 돼있다. 한편, 도로 위의 시위나 집회 때문에 차가 막히는 경우 당사자인 시민들 대부분은 매우 불편해하고 짜증스러워 한다. 시민들은 집회·시위를 하면서 꼭 도로 위에서 행사를 하고 도로 위를 행진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민주사회에서 누구나 집회·시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철학적’ 논리는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도로 사정(항시적인 교통체증과 우회 도로의 부족 등)이 안 좋아 집회·시위대가 비판을 덤터기로 쓰는(과도하게 혼나는) ‘억울한’ 측면도 없지 않다.

○ 원칙적으로 집회·시위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방안까지 우리 국민인 주최자·참여자들이 결정할 문제이기에, 길을 막고 행진하는 것 역시 자연법·헌법적으로 보장된 행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설령 타인이 좀 불편하고 사회적 비용이 든다 해도 절박한 누군가가 외치고, 그 내용을 널리 알리고, 때로는 위력을 보여줌으로서 사회에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영향을 끼치고 소통하게끔 하는 시위를 보장해주고 있는 것이 헌법과 집시법의 취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권리를 일부 침해할 소지가 있고 사회적 비용이 ‘많이’ 발생하는 도로 행진의 경우, 집시법에서 금지했을 텐데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민(民)이 하는 집회·시위 외에도 많은 행사가 도로 위에서 진행되기도 한다. 관(官)이 하는 행사는 도로 위에서도 보장하고 민이 하는 행사는 금지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수다스러우며, 또 비용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누구라도 자기 이야기를 편하고, 맘 놓게 할 수 있는 사회가 국민주권·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어떠한 법·제도·정책 등으로 인해서 불만이 있는 시민들에게 그것을 표출할 공간마저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 시민들은 결국 누적된 불만을 매우 파괴적으로 표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누구라도 자기의 이야기를 맘 놓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집회·시위로 이것이 그나마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길이 막혀서 고생하는 시민들도 이런 점은 깊이 헤아려주어야 한다. 또 언젠가 길 막힌 당사자도 길을 막고서라도 시위를 해야 할 일이 생긴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다른 대안이 있음에도 도로 위 행사나 행진을 ‘관성’처럼 진행한다면, 그래서 길이 막힌 당사자나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짜증이 민주사회의 수인한도(참을 수 있는 범위)나 연대 범위를 넘어설 정도까지 이르렀다면, 그것이 수구언론과 민주주의를 좀먹는 수구적 모략가들로 인한 인식일지라도 시민사회운동이 깊이 반성해볼 수밖에 없다. 사실 집회·시위 중에 가장 좋은 형태는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고 진행하는 것이다. 어떤 국민에게도 반감을 주지 않고, 맘껏 우리의 주장을 널리 홍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집회·시위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그렇게 배려하고 주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1-1) 이렇게 고민해보자.

○ 애초에 집회 신고를 할 때부터 가급적이면 도로 위를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보자. 예를 들어, 대학로 도로 위에서 집회·시위를 하는 것에 대해 그 일대 상인들의 반발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마로니에 공원에서 할 수 있는 집회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 이상의 인원이 모일 것 같은 집회는 더 큰 공원이나 광장을 찾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집회를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또 어떤 공원은 시민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문제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장충단 공원은 마로니에 공원이나 대학로 도로 위보다 시민들이 많지 않다. 이처럼 시민들의 인적이 많지 않은 집회 장소인 경우는, 집회 장소 부근 시민들이 많은 곳에 인쇄 선전물을 잘 배포하는 것을 병행해면 될 것이다.

○ 이것이 안착되기 위해서는 경찰 당국도 광장·공원에서의 집회 신고를 절대적으로 신고 수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위대가 애초부터 많거나 늘어난 경우라도(광장·공원의 경우는 웬만하면 다 포용한다) 도로를 사용하게 되는 일이 원천적으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찰 당국은 지금도 광장·공원에서의 집회마저도 종종 불허하는 만용과 권력 남용을 벌이고 있다. 그렇게 되면 좁은 인도 위나 상대적으로 좁은 장소에서 집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시위대의 숫자가 불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도로 위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발생하고야 만다. 이처럼 집회·시위에서 벌어지는 상당수 문제는 경찰 당국의 무리한 대응이 초래한 경우가 많다. 또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또는 집회에 과잉 대응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동원한 각종 진압 장비(닭장차, 물대포, 경찰차 등등)가 도로를 점거해 길을 막게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마저도 집회·시위대의 책임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현실은 분명 부당하다. 경찰 당국의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아예 진압장비나 차량이 출동하지 않으면 충돌도 벌어질 일이 없고 교통체증은 훨씬 더 줄어들 것이다.

○ 대규모 인원 참여가 예상되어 불가피하게 도로 위에 집회 신고를 한 경우도, 참여 인원이 예상보다 적을 때는 가능한 인도 상으로 이동하거나 한쪽 차선으로 최대한 좁혀서 집회를 진행할 수도 있다.(집회 주최자들의 유연하고 기민한 판단이 중요하다) 또 도로 위 행진도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 꼭 행진을 해야 해서 집회 후 두 개 차선으로 행진한다고 신고했다고 하더라도 참가자 규모에 맞게 탄력적으로 1개 차선으로만 행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인원이 너무 많아 두·세 개 이상의 차선을 행진할 수밖에 없더라도 길게 늘어뜨려 1차선으로만 행진하려는 노력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차량 막힘도 최소화하고 널리 늘어뜨려서 접촉·홍보할 수 있는 시민들도 늘어나는 1석2조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규모 인원이 아니라면 인도를 따라 행진하는 것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인도에서도 사람들의 통행에 불편을 줄 우려가 있다면, 때로는 한·두 줄로만 서서 길게 늘어뜨려서 걷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피켓을 들고(홍보도 많이 될 것이다) 쭉 행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진풍경으로 주변 시민들도 시위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이런 경우 인도로 행진할 때는 깃발을 내려 주변 시민들의 통행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깃발을 늘, 높이 드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리라.

2) 우리들의 집회·시위에 감동이 있는가?

○ 집회에 감동이 부족하다. 굉장히 천편일률적인 모습이다. 큰 단상이 있고 깃발이 있고 단체티를 입은 참가자들이 군데군데 있다. 주로 ‘*** 의장님’ ‘***대표님’이라는 분들이 연달아 목소리 높여 연설을 한다. 구호를 외친다. 집회 중간에 문화공연이 있긴 한데, 운동권 가수 중심의 공연이 펼쳐진다. 여기엔 보통의 시민들이 들어갈 틈이 없다. 평범한 시민들도 말할 공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공간은 없다. 미선·효순 추모 촛불시위처럼 보통의 시민들이 함께 할 만 한 무언가가 없다.

○ 예전에 집회를 준비하던 선배들은 집회를 막으러 온 경찰, 전경마저 감동시키려 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부여잡던 그 무엇이 있었다. 오죽하면 그때는 구호도 ‘민주시민 동참하라’였다. 그러나 지금 ‘민주시민 동참하라’는 구호는 거의 외치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심지어 집회 참가자들도 집회를 따분해 한다. 형식적으로 앉아있고, 참가자들끼리 사적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 집회장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산만하다. 참가자들마저도 지루해하고 따분해하는 집회에서 어떤 지나가는 시민이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 집회 시간이 너무 길다. 그만큼 길이 막히거나 통행이 번거러운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도 힘들어한다. 발언 내용도 비슷한데 연사가 너무 많이 나온다. 또 내빈 소개가 너무 많다. 그들도 한 시민으로 참여한 것인데,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소개할 필요가 꼭 있을까. 보통의 참가자들이나 시민들을 너무 객체화시키는 것 아닌가싶다.

○ 집회장의 언어가 너무 거칠고, 결의가 높은 사람들 위주의 발언 일색이다. 고민하고 잘 모르는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연설도 때로는 필요하다. 그리고 운동권 사투리(운동권 전문용어)가 남발된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얼굴을 고개를 갸우뚱 하거나 얼굴을 찌푸린다. 구호는 늘 ‘촉구·촉구·촉구한다’는 삼창 식이다. 구호도 좀 더 쉽고, 때로는 부드럽게 외칠 수도 있어야 한다. 또 일반 시민들도 함께 외치고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도 고민해야 한다.

2-1) 이렇게 고민해보자.

○ 집회 시간을 가능한 만큼 줄인다. 발언 연사들도 가급적이면 줄인다. 또한 발언자 중에 평범한 시민, 젊은이들을 많이 포함시킨다. 운동권식 고성 연설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일반 시민들의 평범한 호소가 더 큰 감동이나 울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자유발언대’를 두어 누구라도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간도 보장한다. 운동권들만 참여하는 집회가 집회의 참 목적은 아니지 않았던가. 운동권 노래가 아니어도 좋으니 문화공연을 잘 배치하자. 시 낭송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얼마 전 고 허세욱 선생 추모집회에서 있었던 송경동 시인의 ‘별나라로 간 택시 아저씨’ 시 낭송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고 평가들 한다.

○ 분노를 거친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서 분노가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제압하지 않는가. 운동권 사투리나 전문용어는 우리들끼리 있을 때나 사용해야지(그것도 문제지만) 대중 집회에서, 열린 공간에서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제발 쉬운 표현, 시민들의 언어로 집회를 진행하자. 결의를 드높이고, 결의를 보여주는 것도 좋다. 그것도 집회·시위의 목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이 사람들의 동의를 넓혀가는 것이라면, 지나가는 시민, 지켜보는 시민들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단 한사람의 동조자라도 넓혀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보통은 쓰지 않는 말, 살벌한 말들도(군사독재와 싸우다 보니 군사용어도 많이 남아 있다) 성찰해보자. 결의, 결사, 투쟁, 진군, 진영, 진지, 타도, 동지, 총화, 선전전, 조직화, 보위... 그 자체로 모두 의미 있는 단어들이지만 시민들에겐 생소하고 부담스러운 단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통의 시민들은 ‘동지’라는 말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지나가는 시민여러분, 저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입장이 서지 않은 시민들이나 참가자들의 경우 ‘동지’라는 말이 얼마나 생경하겠는가. 편하고 부담 없는 용어로 일부 맹렬 참가자들이 아닌 사람들과 주변 시민들을 배려했으면 한다.(필자도 투쟁이나 동지라는 말을 경우에 따라서는 쓴다. 다만, 그런 말마저도 시민들과의 소통에 장애가 될 소지는 없는지 검토해보자는 취지이다) 최대한 부드럽고 쉬운 용어를, 보통 시민들의 언어를 사용해보자. 구호도 평어·촉구형 구호만 있다. 때로는 호소·존대형 구호도 외칠 수 있고, 아예 구호를 말로 대신할 수도 있다. 소리 높여 연설하고 촉구 구호하고... 이런 전형도 깰 수 있어야 한다.

○ 극우단체들의 집회에서는 없는 품격을 갖추자. 최근 극우단체들의 집회 가보면 온갖 욕설과 극언이 난무한다. 사회운동은 이른바 ‘지배계급’을 비난할 때도 갖출 수 있는 예의나 품격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거칠고 극단적인 언어가 횡행하는 집회에서 분노가 일정하게 표출되고 전달되는 기능이 있겠지만 보통의 시민들과 경찰, 취재 기자들까지 감동시키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기 십상이다. 주변의 그들마저도 존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품격이나 예의 등도 고민해보자. 그렇게 투쟁해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 물론, 분노가 절망이 너무 큰 집회에서 점잖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때론 무리가 있겠지만.

3) 보통시민은 깃발에서 큰 거리감을 느낀다.

○ 집회장에 가보면 수십·수백 개의 깃발이 집회장을 ‘커버’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보통 시민들이 느끼는 거리감이 시작된다. 집회가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동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이 역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오랜 문제제기다. 그러나 깃발은 여전히 집회장을 뒤덮고 있다. 집회가 참가자들의 만족과 결의를 높이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의 또 다른 반증일 것이다. 어떤 대학, 어떤 노조, 어떤 진보정당이 참가했다거나 많이 왔다(조직력 과시)는 표현이고 시위인데, 그것이 전체 집회 대오에서 그리고 집회의 목적에서 어떤 큰 의미가 있을까.

○ 깃발 위주의 집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즉 조직 대중들만의 집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자기 고백이다. 깃발 때문에 집회에 거리감을 느끼는 시민들, 심지어 집회를 가고 싶어도 깃발들이 너무 부담스러워 못 갔다는 시민들(자신이 속한 단체가 없는 시민들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민망해서 자리를 빨리 떴다고도 한다)이 있음에도 깃발을 내리지 않는다.(이 황망한 시대, 좋은 가치를 지향하며 운동하는 단체로서의 긍지와 보람을 깃발로 표현하는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집회는 열린 공간이고 공론장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비조직 대중들도 편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책임을 ‘깃발’에만 돌릴 수는 없지만, ‘넘치는 깃발’이 ‘조직 대중들만’의 집회의 ‘상징’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요즘 집회에 가보면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대학생(한총련, 좌파), 사회당, 다함께, 청년단체 등등의 깃발이 완전 대세다. 어쩐지 그런 집회에 일반 시민들이 낄 자리가 없어 보인다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애써서 참여한 그분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일반 시민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집회의 정식으로 굳어져야 되겠는가.

3-1) 이렇게 고민해보자.

○ 깃발을 아예 안가지고 오면 어떨까. 그런 상상까지 해봐야 한다. 깃발이 대중의 분노를 높이고, 시민들의 동참을 높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우호·중립 대중의 참여마저도 가로 막는다면, 아예 안가지고 나오는 게 상책일 수 있다. 참가자들의 소속감을 높이고, 단체의 참가를 홍보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또 수많은 대중 중에 소속 회원들이 모여들기 편하게 하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단체 이름이 적힌 손 피켓이나 작은 손 깃발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손 피켓, 손 깃발, 그리고 단체 이름이 적힌 구호 피켓 정도여도 단체의 참가 여부를 널리 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오히려 집회장 부근에 단체의 간이부스를 만들어 참가자들과 시민들에게 단체 홍보물도 나누어주는 등 널리 단체를 홍보하는 방안도 많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작은책’ 출판사는 하나의 단체처럼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늘 부스를 차리고 홍보에 열심이다.

○ 언론 보도에서 집회장의 모습은 늘 깃발이 차지하고 있다. 국민들에겐 늘 조직대중의 집회로만 비춰진다. 그만큼 울림이 적다. “매번 하던 그놈들이 또 데모 한다”는 핀잔과 조롱을 듣기까지 한다. 깃발을 내린다고 해서 투쟁을 게을리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깃발과 비슷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단체 복장이다. 단결 투쟁이라고 적인 붉은 조끼를 집단적으로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참가자들의 유대감과 결의는 높아지겠지만) 지나가는 이들이 부담감을 느끼고, 조직대중이 아닌 시민들에겐 거리감을 유발한다. 사내나 특정 지역에서 하는 집회나 ‘*** 한마당’ 식의 단합대회형 집회가 아니고 열린 공간에서 시민들과 함께 하는 집회라면 굳이 ‘조직대중’의 상징인 단체조끼를 입고 나올 필요가 있을까. 물론 어떤 단위의 집단적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있다.

4) 전경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 집회에 참가하고 해산하는 과정, 집회 후 행진하는 과정에서 아직까지도 종종 크고 작은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실 이 경우 대부분은 경찰 측의 무리한 참가자 압박이나 행진 봉쇄가 그 이유이겠지만, 우리들이 성찰할 몫도 적지 않다. 집회 주최 측에서 충돌을 적극적으로 예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집회 참가자들이 거의 관성적으로 전경과 충돌하는 경우도 일부 발생한다.

○ 충돌이 빚어지면 다치는 것은 대부분 비무장한 시위대들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고 또 억울한 일인가. 피할 수만 있다면 모든 물리적 충돌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집회를 무리하게 봉쇄하고, 합법적인 행진을 방해해서 벌어지는 충돌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다만, 예를 들어 1차선으로 행진하기로 신고했는데, 인원이 좀 늘어났다고 2차선으로 행진을 시도한다든지 하면서 벌어지는 충돌 같은 경우는 시위대에서 사전에 통제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한 차선으로는 도저히 행진이 안 될 정도로 인원이 많다면, 그것은 길게 늘어뜨리는 행진으로 하면 된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전경을 밀어내고 한 차선 더 확보했다고 해서 승리감을 느끼고 환호성을 지르는 일이 있는데, 이 얼마나 허망한가. 그 과정에서 전경, 경찰, 차 막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많은 반감을 우리는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친 시위대의 아픔은 누가 책임지는가.

4-1) 이렇게 고민해보자.

○ 공권력의 집회 탄압으로 인한 ‘저항적 폭력’이 아니라면 모든 집회·시위에서 폭력은 철저히 방지되어야 한다. 경찰의 물리적 폭력에 맞선 저항적 폭투(폭력 투쟁)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가 너무 커 애초부터 폭투를 준비했다면... 이는 국민이 판단할 몫이리라. 집회 시작하기 전, 집회 도중, 집회 후 이 모든 과정에서 집회 주최 측과 경찰 간에 이른바 ‘핫라인’을 통해 모든 것을(특히, 폭력적 상황) 합리적으로 조정(통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또 대부분의 충돌이 경찰 당국의 무리한 집회 봉쇄나 참가자 통제, 합법 행진까지 가로막는 무리수에서 발생하므로 경찰 당국의 유연한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경찰을 배치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경찰이 배치되지 않으면 충돌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지 않겠는가.

○ 시위대 역시 충돌을 절대적으로 피하기 위한 인내와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전경과의 충돌처럼 슬픈 일이 없다. 군복무 중인 젊은 전투경찰(의무경찰)도 다치고, 시위대도 다치고... 이런 일을 피하는 것이 상책 중의 상책일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 이를 막기 위해 집회 주최 측의 의지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다만, 정책 당국에 더 가까이, 더 많은 항의를 전달하고 싶은 절박한 경우인데, 경찰이 이를 가로막아 벌어지는 충돌의 일정한 불가피성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경우마저도 최대한 몸싸움을 피하고 연좌·연와식의 비폭력적 항의를 진행한다면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 평화와 인권을 위해 실천하는 우리들이, 피할 수도 있는 폭력과 인권침해(전경에게 쓸 데 없이 욕을 해대고 분노를 전달하는)를 야기하다면 이는 우리 운동의 ‘수준’과 ‘철학’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폭력과 욕설이 터져 나오는 시위의 설득력은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도 곱씹어봐야 한다.

5) 소음(엄청난 소음)성 집회에 대하여

○ 일부 집회의 경우 도심 한복판, 주택가 주변, 심지어는 학교가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큰 음향으로 집회를 한다. 물론, 집회 참여자가 많아서 그러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집회 참여자에 비해 너무 큰 음향은 문제가 있다.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엄청나게 큰 음향으로 집회를 진행하고, 노래나 녹음된 육성을 틀어놓기도 한다. 홍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참가자에 비해 큰 음향, 그리고 장시간 음향 집회는 지지는커녕 반감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적어도 이런 점들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 물론, 집회의 상대방에게 타격과 고충을 줘 문제 해결을 앞당기기 위한 고육지책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주변 시민들의 입장도 고려해 유연하게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학교 주변에서는 삼가고, 노동탄압을 일삼는 한 회사 앞에서 종일 항의집회를 하는 경우라도 음성을 키우는 경우는 주변 사무실의 업무에 방해가 안 되게 점심 때 진행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5-1) 이렇게 고민해보자.

○ 소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짜증과 심지어 질병까지 야기한다. 이런 부분들을 철저히 주의해야 한다. 먼저, 집회참여자의 숫자와 어울리는 만큼의 음향 정도를 유지해야 한다. 집회를 시작하기 전 대열의 맨 끝 참여자가 무대 진행자의 음성이 들리는 지 여부를 확인해 안 들리지 않을 만큼 음향 크기를 조정(하향)하는 작업을 거칠 필요가 있다.

○ 참가자는 적은데, 음향만 엄청 틀어놓은 경우는 지양하자. 집회 상대방에게 타격과 고충을 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제한적으로만 그 방법을 사용하자. 소음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이 의외로 크다는 것을 각인하자.

6) 기타 집회·시위에서 문제가 되는 점

○ 화형식은 신중해야 한다.

화형식은 집회 말미에 집회의 목적과 참가자들의 분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종종 배치된다. 화형식 할 때는 해야 한다. 참가자들의 결의를 높이고, 참가자들의 분노를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퍼포먼스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불태운다는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폭발성’에 주목해 가급적이면 화형식을 신중하게 배치해야 한다. 특히 사람의 모형을 불태우는 경우가 있는데, 사회운동의 생명 존중과 평화, 인간해방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화형식 그 자체에 대한 신중한 접근과 함께 화형을 할 때 그 대상이 사람의 모형인 경우는 피하는 게 좋겠다.

○ 집회하면서 술은 안 먹었으면 좋겠다.

분노가 너무 크고, 절망이 깊어 집회 시작 전에 소주 한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로 농민·노동자대회 때, 특히 추운 겨울 집회 때 몸을 녹이기 위해 소주가 가끔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집회를 하기전이든, 하면서든 술을 먹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차라리 집회가 끝나고 기분 좋게 또는 뜨거운 분노로 술을 한잔 먹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술 먹고 하는 집회의 경우,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오히려 반감만 살 가능성이 높다. 아니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니라 무어라고 꾸중을 들을 일이다.

○ 집회 후 청소가 제대로 안 된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일 것이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행진 등의 이유로 떠난 후 집회장의 지저분한 모습을 수구 언론이 찍어 얼마나 공격을 해대는가. 시민들도 그것을 보고 실망하고 있다. 우리가 어지럽히고, 다른 민중들이 힘겹게 치우고... 이건 아니다. 집회 후 청소만큼은 제대로 해서 누구도 실망시키지 말자.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말자.

7) 집회·시위를 더 잘해보기 위한 고민 몇 가지

○ 집회를 축제처럼 할 수 없을까?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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