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비전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와 지역운동
하승우1)
1. 들어가는 말
현재 한국사회는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그 위기의 여러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얘기를 해왔기 때문에 그 위기의 단면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사회 양극화와 비정규직 확대, 한미FTA, 토건국가, 삼성공화국, 보수언론2) 등의 단어들은 도저히 견디지 못할 무게감으로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사실 이런 큰 얘기들을 이해하지 않아도 얼마 전 EBS 지식채널e의 <2007,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가 이미 외딴 낭떠러지에 서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초딩’의 문제는 바로 우리 ‘미래’의 문제이고 그들의 고통과 자살은 미래의 고통과 그 파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위기를 극복해 가야할 소위 진보운동3)은 지나치게 권력화되고 대중과 분리되어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으며 과거의 관성과 경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합법주의에 매몰되고 있으며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진보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박래군 2007). 여기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진보운동은 과거의 낡은 이념적/정파적 대립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 대립구도는 내용적인 대립이 아니라 내용을 바라보는 기본틀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이고, 그 틀을 벗어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4)
그리고 사회가 암울해질수록 진보운동이 개입해야 할 이슈는 더욱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운동의 침체는 활동가의 감소, 활동연령의 고령화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활동가들에게 과중한 활동력을 요구해 지속적인 활동을 어렵게 하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또한 과거 군사독재 때는 국가/시장 대 시민사회/민중의 대립구도가 유지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시민사회 내부의 분화, 즉 뉴라이트나 보수세력들이 시민운동의 이름을 내걸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5) 즉 보수적 시민운동이라는 생뚱맞은 경향이 출현하기도 한다.6) 그리고 민중진영 내부도 정규직/비정규직/실업 간의 대립구도가 뚜렷해지고 있다.7) 따라서 과거에는 국가/시장을 대상으로 뚜렷한 대립선을 그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기가 어렵다. 더구나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말의 출현은 그런 대립선을 긋는 것을 마치 시대에 맞지 않는 케케묵은 행동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풀뿌리민주주의, 풀뿌리운동, 지역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내용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먼저 87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이런 관심이 높아지게 된 그 맥락을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예전에 없었던 운동도 아닌데, 왜 하필 지금 그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걸까?
2. 운동의 연속과 단절: 386을 거치면서 잃어버린 고리들
기존의 사회운동에서는 풀뿌리민주주의, 풀뿌리운동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듯하고 지역운동, 지역사회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듯하다. 그것은 사회운동이 여전히 조직중심이고 ‘풀뿌리’라는 말이 가진 가치지향을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사회운동은 지역사회를 운동을 펼치기 위한 장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김현우는 지역사회를 “자본의 포섭과 통제, 회유와 그에 대한 순응과 크고 작은 갈등, 저항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각축장”(김현우, 2005: 83)하면서, 지역노동시장에 대한 개입, 지역경제운영을 위한 지역파트너십, 지방자치체의 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개입, 사회공공성 담론에 기반한 지역이슈, 지역발전전략이나 성장기획, 지역주민과의 유대강화에서 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김현우, 2005: 86~90). 그런데 이런 관점은 정책이나 이미 존재하는 지역자원과의 연대를 강조하지만 정작 그런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즉 조직화 이전에 필요한 그런 조직을 구성하기 위한 과정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계를 가진다.
그리고 시민운동은 풀뿌리화를 위기극복의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역시 기존의 운동에 대한 치열한 반성의 결과라기보다는 시기적인 방편으로 논의되고 있는 듯하다.8) 왜냐하면 어떻게 풀뿌리화를 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인 전략이나 실천방향 없이 담론으로만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9) 풀뿌리화는 단지 운동의 폭을 더 확장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운동에 대한 관점변화를 요구한다.
사실 한국사회의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은 그 내용이나 지향이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중의 욕구나 의식을 인정하지 않고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소위 ‘과학적인 이론’의 틀에 운동의 방향을 맞추고자 한다는 점이다. 즉 민중이나 시민을 역사의 주체라 얘기하지만 정작 그들이 주체화되는 과정을 마련하지 않고 조직내 민주주의도 취약하다.
그런데 이런 경향을 한국사회 운동의 근본적인 성격이라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조직 중심의 운동관이 대두한 것은 맑스-레닌주의가 보급되고 과학적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중심적, 이론중심적 운동방향이 강화된 1980년대로 보여지기 때문이다.10) 그리고 그 이전의 운동 1970년대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톨릭 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크리스챤 아카데미, YMCA노동교육협회, 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 도시산업선교회, 야학협의회 등이 추구했던 운동은 1980년대와 다른 결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홍은광에 따르면, 1971년에 프레이리 교육사상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고 기독교 교육운동 활동가를 중심으로 프레이리 사상이 논의․실천되었다. 그리고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과 더불어 선교조직 방법론으로서의 알린스키의 조직 이론이 중요한 실천원리로 자리잡았고, 이는 ‘의식화․조직화 교육’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의식화․조직화’는 이후 민중교육운동의 중요한 지향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후반 활동하였던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는 알린스키의 조직화론과 프레이리의 의식화론에 기반하여 빈민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조력하는 활동을 진행하였다. 주민들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해 나감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인식해나가고, 사회문제에 대해서 의식화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홍은광, 2003: 119~158)
1970년대, 1980년대 초반까지 얘기되었던 의식화, 조직화는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맑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의식화, 조직화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의식화와 조직화라는 말은 동일하지만 그 기본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앞의 의식화와 조직화는 대중이 자신의 조건과 세계를 인식하고 조직화를 통해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강조했다면, 뒤의 의식화와 조직화는 전위조직이 대중을 계몽시키고 선도하는 정치세력화를 강조했다.11)
분명 사회운동의 흐름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지만 사회운동을 바라보고 이끄는 관점은 단절되었다.12) 그리고 이 단절은 기존에 진행되어 왔던 사회운동을 자유주의나 개량주의 등으로 단순화하고 폄하하는 경향을 낳았고, 사회변혁을 둘러싼 논쟁마저도 이 땅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특정 텍스트의 과학성이 쟁점의 수준과 논의의 진척에 따라서 검증되기보다는, 어떤 텍스트에 권위가 항구적으로 부여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허재영 2004: 193)가 발생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소위 386세대라 불리는 사람들 중 운동을 이끌었던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운동의 성과를 독점하고 이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는 기득권이든 운동권이든 그 방식이 동일했다. 즉 그 누구든 자신들의 입을 빌어, 또는 자신들을 통해서만 민중이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풀뿌리운동은 기존의 운동에 대한 반성이자 단절된 고리를 다시 이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과 풀뿌리민주주의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3. 풀뿌리운동과 풀뿌리민주주의
시민운동, 지역운동, 풀뿌리운동은 어떤 차이점을 가질까? 제주참여환경연대의 고유기 사무처장은 시민운동과 지역운동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고유기, 2006)
시민운동 |
지역운동 |
가치지향적 담론적 대변자, 감시자 갈등주체, 갈등중재 |
정책지향적 실용적 감시자, 제안자 갈등주체(관리), 갈등중재 |
그렇다면 풀뿌리운동의 위치는 어디일까? 일단 풀뿌리운동의 특징을 뽑아보자면,
- 풀뿌리운동은 주민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 가는 운동이다.13)
- 풀뿌리운동은 주민의 구체적인 조건에서 시작하고 주민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전제하지 않는다. 상식에서 시작해 주민이 전체적인 사회구조를 깨달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 풀뿌리운동은 활동가와 주민의 상호 이해와 신뢰관계 위에 구성된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들이다.
- 활동가는 주민을 끌어가는 지도자가 아니라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 활동가는 새로운 지도자를 기르는 역할을 해야지 스스로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
- 풀뿌리운동은 느린 운동이다.14)
이 특징에 따라 표를 다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시민운동 |
지역운동 |
풀뿌리운동 |
가치지향적 담론적 대변자, 감시자 갈등주체, 갈등중재 |
정책지향적 실용적 감시자, 제안자 갈등주체(관리), 갈등중재 |
구체적인 욕구를 정책화 경험적 지식과 실용성 제안자이자 변화추진자 갈등주체이자 갈등해결자 |
예컨대 풀뿌리운동은 ‘지역’보다 ‘삶의 공간’으로 정의되어 “폭넓은 의미의 지역운동과는 구분”되고 있다. 즉 운동공간을 지역으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전문가나 활동가 중심의 운동노선을 따르면서 사람들을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킨다면 풀뿌리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하승수, 2006). 즉 풀뿌리운동은 지역을 기반으로 삼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풀뿌리운동으로 정의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지역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만 풀뿌리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겠다.
주민운동의 관점에서 풀뿌리운동을 바라보는 이호는 주민을 “권력을 지닌 자나 전문가들로부터 대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이끌어 가야 할 주체”(이호, 2002: 47)라 명명한다. 그러면서 이호는 “주민자치운동은 특정한 이슈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해결하느냐를 통해 평가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기준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들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참여했는가, 그 과정을 통해 주민들이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민자치를 과정으로서 개념지웠듯이, 주민자치운동 역시 그 과정을 중요시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이호, 2002: 57)고 주장한다. 즉 주체는 ‘존재’의 관점이 아니라 ‘생성(becoming)’의 관점이다.
그리고 풀뿌리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풀뿌리운동이 실현하는 민주주의다. 사실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은 민중(demos)의 지배(kratia)였다. 그러니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에서는 같은 의미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동일한 의미가 반복되게 된 이유는 기존의 민주주의가 그 어원에 담긴 뜻을 실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의 대의민주주의에서는 민중이 아니라 민중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또는 그렇게 스스로 칭하는 사람들이 민중을 지배했다. 즉 언제나 이름 있는 대표자들이 ‘민중의 이름으로’ 이름 없는 민중들을 지배했다. 풀뿌리민주주의는 이런 ‘거짓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등장했다. 풀뿌리민주주의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거짓된 현실을 바꾸려는 ‘운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풀뿌리민주주의의 내용 역시 특정한 것으로 정해질 수 없고 현실의 변화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다만 풀뿌리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그 원칙은 풀뿌리운동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하지 않고 그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 과정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4. 풀뿌리민주주의가 기성담론에 맞설 힘은 있는가?
이런 풀뿌리운동과 풀뿌리민주주의가 기성의 보수화된 담론이나 잘못된 진보담론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있는가? 즉 기득권세력이 주장하는 선진화담론이나 신개발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담론을 제시할 수 있는가? 특히 한미FTA를 비롯한 자본의 세계화라는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사실 풀뿌리운동과 풀뿌리민주주의는 특정한 내용을 의식화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내용을 담론으로 제시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런 대안담론을 구성하지 않는다면 지역적인 실천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겠지만 국가적인 변화에서 한계에 부딪치고 그 변화의 파도에 휩쓸릴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이론화 방식과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즉 소수의 이론가들의 머리로 만든 대안이 아니라 대중(지식인도 대중이다)의 경험과 지식이 한데 어울려 미래의 대안을 구성해야 한다.
일단 현재 국가나 시장의 개발과 자본의 세계화를 막을 방안은 지역 차원에서의 변화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개발과 세계화가 빼앗아가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권한이 바로 ‘자치(自治)’와 자기결정권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자본은 우리 삶의 자기결정권을 지속적으로 박탈하고 있는데, 지역사회에서의 변화는 그런 자기결정권을 회복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이를 꼬뮨commune이라 부를 수도 있다). 어렵고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지역사회에서 전개되는 운동은 개인의 삶과 생활 자체를 변화시키며 능동적인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변화의 씨앗을 품고 있다.15) 만일 자치와 자기결정을 어떤 완성된 이상적인 단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현실에서 실천해야 하는 과정으로 해석한다면, 지역적인 변화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작은 지역적인 변화만으로 국가적인 변화를 이루기는 어렵지만 작은 지역의 실험들이 모여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낼 때 사회는 변할 수 있다.
실제로 지역사회의 비민주적인 권력구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험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 노동조합주의(community unionism)는 노동운동과 지역사회의 접합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비정규직 또는 이주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지역사회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에서도 개별 기업이나 해당 산업의 틀을 넘어서 지역적인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김현우 외, 2006: 26~30).16)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매개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도 이루어지고 있다. 사업장 급식을 하는 기업과 농민들이 물류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있고17), 이런 운동은 친환경학교급식운동과도 맞물리는 등 다양한 접합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희망무역, 공정무역으로 얘기되는 fair trade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를, 지역과 지역을 잇는 새로운 실험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특히 생협운동과 결합된 희망/공정무역은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고18), ‘레츠’(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s) 등도 대안경제의 가능성을 가진 지역적인 대안이다(호지/ISEC, 2002; 크롤, 2003; 하승우, 2007).
이런 구체적인 실험들을 묶을 수 있는, 생활과 세계화를 잇는 대안담론이 필요하다. ‘탈정치 생활운동’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된 말인데, 생활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강한 정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치라는 말은 선거나 정당같은 제도화된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을 나누고 조절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뜻한다.19)
그런 담론구성을 위해서는 일단 생활의제가 전국적 의제, 지구적 의제와 맞닿을 수 있는 연결고리를 계속 만들 필요가 있다. 희망무역/공정무역이라 불리는 fair trade가 생활과 지구를 잇는 단초를 마련하듯이, 학교급식과 WTO조약이 연관되듯이, 일상생활 속에서 세계화, 지구화와 연관된 구체적인 사안들을 계속 찾아내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슈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이 생활의 담론은 이론과 실천이 분리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20)
이런 이슈들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 이제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알린스키는 미국 빈민운동의 경험을 통해 모든 운동이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운동은 현실이 “직접적인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권력장치의 투기장이며 그 안에서의 도덕이란 한낱 자기 이익과 정략적인 행동을 위한 수사학적 원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이란 모순되고 이중적”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알린스키, 1983: 141).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자기이익의 중요성을 절대로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이익이 인간행위에 있어서 기본적인 추진력의 기능을 하고”, “자기이익의 중요성은 한 번도 의심되어 본 적이 없고, 인간 생활의 불가피한 요소로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알린스키, 1983: 155). 마찬가지로 지역사회의 변화는 추상적인 당위나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욕구(때론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 해도)로 가능하다. 구체적인 삶의 욕구가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고, 설령 사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되었더라도 그것이 기존의 제도적인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운동으로 전환된다면 주민의 능동성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띠라서 주민의 이해관계나 욕구를 부정하지 말고, 다만 그것이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출되고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21)
이런 이슈와 대안담론구성에서 중요한 원칙이 있다. 일단 그 이슈와 대안담론은 주민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알린스키는 지역조직화 전략에서 주민의 관습, 경험, 전통, 금기, 가치관 속으로 들어가 그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주민들의 전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편견과 믿음과 가치관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고 “그것은 민주적 행동을 방해하는 사회적 힘과 마찬가지로 건설적이며 민주적인 행동을 주장하는 사회적 힘을 확인하는 것”(알린스키, 1983: 119)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사물을 이해하고 의사소통도 그런 체험을 통해 가능하다. 따라서 운동은 주민들 속에서 주민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그들의 잠재된 능동성을 자극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담론은 사람들의 의식틀을 바꾸는 더 보편적인 언어로 구성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정치심리학자 레이코프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무실이나 교회 등에서 토론이 벌어졌는데 누군가 “나는 게이들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해. 안 그래?”라고 말했을 때 간단하게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나는 평등권을 믿어. 그게 다야. 주정부가 사람들한테 너는 누구랑 결혼하고 누구랑은 결혼하지 말라고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 결혼은 사랑과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결혼할 권리를 부인하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거야.”라고 응수하는 것이다.”(레이코프, 2005: 104~105) 풀뿌리운동이나 풀뿌리민주주의가 지역을 바꾸고 국가를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전략임을 확신시키려면 이런 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보육, 교육, 문화, 참여 등 풀뿌리운동의 화두를 ‘공공성’과 묶을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런 대안담론 구성을 위한 주민/대중/시민의 역량강화(empowerment) 프로그램이 중요하다. 장기적인 전망으로 볼 때, 주체를 성장시키고 역량을 강화하는 과제는 시민/지역/풀뿌리운동 모두의 몫이다. 싸우고 개입해야 할 영역이 넓어지고 많아질수록 그에 개입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어떤 회의 과정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고, 주민들이 직접 지역을 경험하고 지역의 현황을 이미지로 보여주게 하는 것도 좋은 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 오래된 미래가 귀환할 수 있을 것이다.
1)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2) 전규찬은 “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한국 민주주의 위기는 바로 이 선전 권력에 의한 언론 역능의 구속이 그 중대한 요인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전규찬, 2006: 266)
3) 무엇을 진정 진보적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조금 뒤에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진보운동이라 부르려 한다.
4) 이 틀은 조지 레이코프가 말한 프레임과 비슷한 말이다. “프레임(frame)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의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한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고자 수립하는 제도를 형성한다.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두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이다.”(레이코프, 2005)
5) 이들은 시민운동이 과거 민중운동과 동일하다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시민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연대>의 신지호는 “참여연대의 성공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북한의 식량난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기존 운동권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NL과 PD라는 핵심 콘텐츠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변화 없이 시민운동의 외피를 뒤집어쓰는 ‘민중운동의 시민운동화’ 현상이 본격화된 것”이라고 주장한다(<조선일보> 2006년 7월 10일자)
6) 이상돈은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데, “민노총과 전교조,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그리고 아름다운재단과 환경재단 등에 비한다면 보수단체의 조직과 능력은 미미하다. 다만 反좌파를 염원하는 국민 여론에 부응, 주요 보수 신문이 보수단체의 주장을 일정 부분 반영해 주고 있어 그런대로 국민들에게 활동상이 알려지고 있다.…보수시민운동에 있어 또 하나의 좌절은 운동을 정책으로 반영할 수 있는 우호적 정당이 없다는 현실이다. 한나라당이란 큰 야당이 있기는 하지만 보수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정체성이 희미하고 용기도 없는 현실안주형 정당일 뿐이다.”(<브레이크뉴스> 2006년 11월 22일자) 그 내용은 정반대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들이다. 진보운동은 이런 따라쟁이들에게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나?
7) 김원은 한국통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내부정치를 분석하면서 “정규 비정규 노동조합 내부정치라는 이슈가 가진 의미는 첫 번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형성된 노동조합 운동 내부의 균열 구도―민주 대 어용 혹은 정규직 내부의 실리주의를 둘러싼 균열―가 ‘정규-비정규’라는 새로운 사회균열로 변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두 번째, 산별체제를 지향하지만 ‘유사기업별 노조체제’로 유지된 한국 노동조합 운동의 ‘자기한계’를 드러내는 사례이다. 세 번째, 세계화 이후 확대된 비정규 노동의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가 지체됨으로 인해 ‘노동조합 운동의 위기’―‘대표성의 위기’―가 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라고 얘기한다(김원, 2007: 47).
8) “민주화운동세력들은 대중과 만나는데, 특히 대중을 교육하는데 등한시했다. 한국의 노조는 평조합원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으며, 시민운동은 풀뿌리 조직을 건설하는데 소홀했고, 진보정당은 평당원 교육에 진력하지 못했다. 결국 한국의 진보세력들은 사회운동의 뿌리는 간과했던 것이다.”(김정훈, 2006a: 76)
9) <희망제작소>의 김광식은 “공중전이 주민들의 생활에 미치는 아젠다를 선정해 풀뿌리운동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풀뿌리화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시민의신문> 인터넷판 2006년 7월 6일자). 이에 대해서는 곽형모의 글이 적절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직도 풀뿌리운동을 정치권력의 향방 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즉 부분과 부분, 전체의 상호작용을 통한 창발적 변화보다는 권력구조의 하부인 풀뿌리에서부터 포섭해 들어가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회변화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풀뿌리는 그야말로 창발적 변화의 중심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의 기반이요, 하부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시민운동 리더십도 창발성에 기초한 리더십이라기보다는 지역에 ‘민주주의 포스트’를 세우기 위한 리더십이 된다.”(<시민의신문> 인터넷판 2006년 4월 3일자)
10) “80년대 맑시즘의 유입으로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레닌주의 중심의 사회변혁론이 중점적으로 대두됨에 따라서 민중교육에서도 사회구조적 변혁 추동의 의미가 더욱 강해지게 된다. 이에 따라 민중교육의 개념도 보다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는 사회변혁운동의 측면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강해진다.”(홍은광, 2003: 24); “1980년대 초반, 야학 교사들은 각기 분산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야학교육의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일개 야학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교재 편찬 등을 위해 ‘야학협의회’를 결성하기도 하고, 1982년에서 1983년까지는 야학교사모임을 가지면서 야학의 성격과 방향, 교사훈련 프로그램, 교재편찬, 수업방법론, 야학운영방법, 야학노동자 의식구조 등에 대한 연구를 하기도 한다.…‘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야학에서 담당하였던 노동교육 기능이 민주노조운동의 소그룹 학습운동으로 상당부분 옮겨지면서, 노동야학으로서의 야학의 기능이 약화되기 시작한다.”(홍은광, 2003: 96); “의식화 교육론이 맑스-레닌주의적으로 해석되면서 기독교 교육운동은 전체 민중교육운동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며, 동시에 프레이리 교육사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홍은광, 2003: 135)
11) 유경순은 1985년 8월 25일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의 결성 이후의 운동관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서노련은 “‘변혁성과 계급성’을 관념적으로 인식했으며, ‘정치투쟁’을 우위에 두고 경제투쟁과 노동조합을 수단화시켰고 노동자 대중을 수동적 존재로 인식하는 대중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대중정치노선이란 ‘대중의 정치투쟁’이 아니라 ‘전위’로 자처하는 정치적 집단이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대중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켜 대중을 정치투쟁에 참여시키는 투쟁노선이다. 이들은 대중의 본질적 혁명성은 전위집단의 선도적 정치투쟁에 의해 표출된다고 생각한다.” “조직내 민주주의 부재 또는 상부에서 ‘내리꽂기’ 방식의 조직운영은 초기 모호한 성격의 조직정체성을 조직원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가는 것을 억압했다. 심지어 조직원을 대상화시키기까지 했다.” “하루는 공장활동을 하는 후배 조직원이 보자 하여 만났다... ‘언니, 난 우리 조직의 대표인 동지가 싫어. 학생출신인데 너무 어려운 말만 해.’...‘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해, 너의 단위에서 함께 얘기하고 함께 해결해야지’ ‘얘기해도 안 될 걸 뭐, 그 동지는 나보다 훨씬 말을 잘해서 다 받아칠 거야, 그러니 얘기할 자신도 없어.’...말에 자신이 없다...‘언니, 삼민이 뭐야?’”(유경순, 2006)
12) 이런 조직관은 기성의 다수자운동을 비판하며 소수자운동을 주장하는 이론가에게서도 여전히 낭만적으로 회상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민중혁명의 승리를 표시하는 1987년을 또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억하겠지만, 나는 1985년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한다. 구로동맹파업, 그것이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운동마저 금지된 상황에서 사업장 단위를 뛰어넘는 최초의 연대파업이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것을 통해 이제 운동은 양심에 기초한 자생적 투쟁에서 벗어나 정확하게 레닌이 말하는 “목적의식적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선언되었고, 노동운동은 계급적 노동운동, 계급투쟁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고 요구되었으며, 학생운동을 비롯한 다른 모든 운동이 그 혁명적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천명되었다. 그리고 운동이 ‘목적의식적 혁명운동’이 되어야 하는 만큼, 이론이나 이념 역시 혁명적 사회주의의 잣대에 따라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했다.”(이진경, 2006: 295)
13) “참된 교육은 ‘A’가 ‘B’를 위해, 또는 ‘A’가 ‘B’에 관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함께 행하는 것이다. 양측을 매개하는 세계는 양측에게 영향과 자극을 주며, 세계에 관한 개념과 견해를 형성하게 한다.”(프레이리, 2003: 119)
14) “조작의 상황에서 좌익은 거의 언제나 ‘신속한 권력 장악’의 유혹을 받는다. 그럴 경우 좌익은 피억압자와 더불어 조직을 형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잊고, 지배 엘리트와의 불가능한 ‘대화’에 주력하게 된다. 그 결과 좌익은 지배 엘리트에 의해 조작되어 제 발로 ‘현실적 사고’라는 이름의 엘리트 게임 속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프레이리, 2003: 192)
15) “세계화는 생활세계를 변화시킨다. 비록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생활세계를 파괴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러한 경향을 상쇄할 수 있는 반대경향 역시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아래로부터의 반세계화 운동이며, 또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김정훈, 2006b: 332)
16) 파인(J. Fine)은 “지역사회 노동조합이 노동관련 이슈들을 많이 강조하지만 주거와 보건, 교육 등 다양한 생활상의 측면들도 포함하는 폭넓은 의제를 추구한다”(Fine, 2005: 154)고 주장한다. 파인에 따르면, 미국사회에서 지역사회 노동조합운동의 한 부분인 이주노동자센터만 따져도 80개 이상 지역에 약 133개가 만들어졌고 그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17) “경북의 농촌 지역 생산자들이 식당을 갖고 있는 기업들과 협약을 맺어 지역 농산물 직거래를 위한 생산 및 지역 물류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학교 급식뿐만 아니라 기업 구내식당 급식․병원급식․공공기관 급식 등 사회적 수요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농민 운동과 노동운동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서, 민주노총 사업장 급식을 지역 농민회와 연대하여 지역 농산물로 수급하려는 지침을 마련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윤형근, 2006: 121)
18) “생협의 목표는 기존의 산업질서와 그 가치체계에 복종하지 않으며, 자립적이며 생태적인 자급사회라는 새로운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생협은 이런 점에서 반지구화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그러나 생협이 공정무역과 만나게 되면서 생협은 대안적인 지구화의 단서를 제시하는 운동으로 발전한다. 즉 제3세계의 민중/여성과 제1세계의 여성 소비자가 지구적인 호혜적 관계망을 구축함으로써 ‘안전 식수에 대한 밀레니엄 발전 목표’와 같이 유엔이 국가의 과제로 제시한 것을 민간의 힘으로 이루어내고 있음은 물론, 초국적 자본에 빼앗긴 식량주권을 초국적 수준에서 회복해 가고 있다.”(김정희, 2006: 132)
19) 한국사회는 과거 식민지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운동세력에서는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순수화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정치가 높은 선을 구현하고 악을 몰아내는 방법인양 사고되는데, 사실 정치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단계씩 발전하는 불순하고 잡종된 개념이다.
20) 진보정당이 이렇게 찾아낸 사안들을 정책화, 제도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면 풀뿌리운동과 풀뿌리민주주의가 힘을 받을 수 있을 터인데, 아직까지 그런 진보정당이 구성되지는 못한 듯하다.
21) 로젠버그(M. B. Rosenberg)는 비폭력대화(NVC: Non-Violence Communication)의 단계를 관찰, 느낌 표현, 욕구표현, 구체적인 행동부탁의 4가지로 제시하면서 그런 이해관계나 욕구의 비폭력적인 공감가능성을 제안한다. 로젠버그는 “공감이란 우리의 모든 관심을 상대방이 말하는 것 그 자체에 두는 것”이고 “상대방이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고, 이해받았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로젠버그, 2004: 140)이라고 주장한다.
참고문헌
Fine, Janice. 2005. “Community Unions and the Revival of the American Labor Movement”. Politics & Society, vol.33, no.1.
고유기. 2006. “지역운동의 현실과 과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책포럼 발표문.
김원. 2007. “신자유주의하에서 노동조합의 균열구조 변화: 한국통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동조합 내부 정치를 중심으로”. 손호철 엮음. 2007. 『세계화, 국가, 시민사회: 세계화 정보화 시대 국가-시민사회와 정체성』. 이매진.
김정훈. 2006a. “민주화세대는 어디에 있는가?”, 『황해문화』 2006년 겨울호.
김정훈. 2006b. “민주화․세계화 ‘이후’ 생활세계의 변화와 시민참여적 대안”. 신영복․조희연 편. 『민주화․세계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 체제모형을 찾아서』. 함께읽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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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 2005. “지역사회와 결합하는 노동운동을 위한 시론”. 『노동사회』 200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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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프, 조지. 유나영 옮김. 『꼬끼리는 생각하지 마』. 삼인.
로젠버그, 마셜 B. 캐서린 한 옮김. 2004. 『비폭력 대화: 일상에서 쓰는 평화의 언어, 삶의 언어』. 바오출판사.
알린스키, S.D. 조승혁 편역. 1983. 『S.D. 알린스키: 생애와 사상』. 현대사상사.
유경순. 2006. “서울노동운동연합의 등장과 정치적 노동운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논문.
윤형근. 2006. “먹을거리의 공공화와 새로운 지역자립운동”. 『환경과 생명』 제 49호.
이호. 2002. “주민자치․주민자치운동의 현황과 과제”. 시민자치정책센터 편.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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