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대구참여연대 회원소식지 '함께 꾸는 꿈'에 실은 글입니다.
지난 12월 15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한 편의 스펙터클한 코미디를 연출했다. 오랫동안 두 정당이 논의한 2010지방선거 제도적 틀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역시나, 두 정당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당공천제 유지’는 지방자치 현실을 생각하면 민망한 결정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한 발 더 나갔다. 불법으로 취득한 정치자금을 30일 이내로 반납할 경우, 형을 감면하거나 면제하고, 불법 향응 제공에 대해서도 처벌을 완화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합의사항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정치적 범죄행위에 대해서 관대하게 처리하겠다는 기득권자들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이폰과 트위터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에 그들은 구석기 시대로 퇴행한다. 한편의 블랙코미디이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현재 우리나라 대의정치는 한 마디로 ‘소수정당의 정치 독점’으로 표현될 수 있다. 정치의 주체는 시민이라는 이상(理想)을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대의정치를 구속하는 정당법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철저히 배제하고, 정당만의 정치로 협소화시키고 있는 것이 정당법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관객민주주의’를 부추기는 법이라고 한탄하며, 또 어떤 이들은 정치 무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이라고까지 말한다.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시민의 뜻은 아랑곳 않고 두 정당의 기득권 유지에만 야합할 수 있었던 것도 정당법의 그늘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기성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정치 개혁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선거 때마다 그들에게 또 다시 표를 던져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대의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퇴행은 고착화될 것이 뻔하다.
이렇듯, 제도를 등에 업고 중앙정치는 지역정치까지 잠식해버렸다. 마치 중앙의 정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모든 것을 기획하고 아래에서 맞추라고 한다. 부족하면 늘려야 하고 넘치면 잘라야 한다. 지역의 조건과 특수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지역주의를 타파하자고 말만 하지, 실제는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간다. 그래야 그들의 독점은 지속될 수 있다. 지역은 중앙의 선거판을 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게 지역 정치인들은 중앙당에 줄을 선다. 수 십 년 동안 이어져온 정치적 예속이다. 이러한 정치풍토는 비단 보수정당만의 행태는 아닐 것이다. 진보 정당이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풀뿌리적 가치를 이야기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정치공학적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향식 정치구조에 익숙한 것이다. 하향식은 효율성이라는 명분의 탈을 쓴 기득권 유지의 방편에 불과하다.
정치 영역이 사회변화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역할을 무시하고 사회변화를 바라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이미 한국의 정치지형의 혁명과도 같은 변화는 필연적인 시대의 요청이 돼버렸다. 그런 면에서 2010지방선거를 계기로 여러 풀뿌리 시민사회가 정치변화를 꾀하려는 움직임은 당연한 결과다. 정치질서의 ‘조정자’라는 이름으로 중립의 위치를 벗어나, 정치의 주체로 거듭나려는 풀뿌리의 움직임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속초, 대전, 여수, 관악, 구미, 노원, 과천, 도봉, 성미산, 동작, 부천 등등 주민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거듭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다. 이는 정치를 정치답게 복원하려는 운동이기도하다. 물론, 이러한 풀뿌리 정치운동은 일상성을 지녀야 하고 집단화를 이뤄야 한다. 일상성은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선거’시기에만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집단화는 몇 몇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풀뿌리의 주체인 주민들이 스스로 정치세력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성 정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풀뿌리 지역운동 차원에서 지방선거 참여전략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낡은 정치를 반면교사 삼을 필요가 있다. 일단, 정치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몇몇 엘리트가, 혹은 지방선거에 참여하고자 하는 특정한 조직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참여를 희망하는 모든 풀뿌리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촛불집회가 그랬듯이, 모든 이들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야 한다. 주민 스스로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지역운동단체가 그런 멍석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대변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대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정치기획의 주요한 컨셉이다. 예컨대, 정책은 책상머리에 앉아 만들어지는 페이퍼정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엮여져야 하며, 주민들의 입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사회사업운동가인 한덕연 씨는 ‘걸언(乞言)’할 것을 주문한다. 새로운 정치를 갈구하는 많은 이들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생생한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과 같은 정치구도에서 간혹, ‘한 방’에 무엇인가 해결해보려는 습성이 나타나곤 한다. 권력의 정점을 차지한다면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습성은 기본적으로 약한 자들의 프레임이다. 특히, 선거시기가 임박할수록 정치공학적인 프레임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민주대연합으로 현 정부를 심판해야 한다거나, 전국적인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거나, 지역적인 기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벌 좋은 엘리트만으로 인물교체를 이룰 수 있다는 발상은 새로운 풀뿌리 정치를 해나가는데 있어서 해악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이러한 낡은 도식화는 시민들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청을 담아낼 수 없다. 오히려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힘을 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힘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결국 사람이 희망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 1,000명을 모은다고 생각해보자. 500명도 좋다. 아니, 초기에는 200명도 좋다. 새로운 정치 씨앗들을 조직하는 일은 기초의회 과반수 당선보다 장기적으로 월등한 힘을 지닌다. 기초의원 몇 명을 당선시킬 것인가가 관성적 정치공학이라면, 좋은 정치 씨앗들 200명을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정치기획의 토대가 된다. 500명이면 더 좋고 1,000명이면 ‘지역정당’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정치기획’은 이전에 없었던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기획은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회운동이 추구해왔던 ‘사람을 만나고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정치기획에서도 뼈대가 되는 정치운동이다. 이러한 틀 속에서 자발적인 자원봉사가 이루어지고, 흥겨운 축제의 장이 만들어진다. 일본의 지역정당(Local Party)운동이 낡은 정치구조를 타파하고 아래로부터 변화를 꾀한 것처럼, 'for the people'이 아니라 ‘of the people’이 되어야 한다. ‘마을이 세상을 구한다’는 간디의 외침은 실현 불가능한 초현실적인가? 그렇지 않다. 이미 환경․생태가 온전하지 않고, 경제적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자본과 경쟁시스템은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고, 공동체가 급속도론 파괴되는 현시대의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으로써 ‘지역’은 희망이다. 대안적 정치세력의 희망도 지역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중앙정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풀뿌리가 일상의 정치로 탈선한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정치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2010지방선거는 중요한 좌표가 될 것이고, 일상의 정치로 내려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내년을 딛고, 더 큰 힘이 되어 우리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