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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에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정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옛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을 철거하고 박물관을 용산으로 이전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과 박물관을 이전하는 것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옛 건물을 헐고 새로 박물관을 짓는다고 해서 일제 식민지라는 과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박물관을 새로 짓는데 약 4,000억원이 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물음은 조금 더 진지해진다. 박물관은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일까?
재일 역사학자 이성시(李成市)에 따르면,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부터 왕궁이 박람회장이 되었고 박물관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 “총독부박물관 설립의 목적은 통감부시대부터 착수했던 국가사업으로서의 고적조사사업을 통해 수집, 정리한 확실한 자료를 진열하고 한반도의 문화를 밝히는 데 있었다.” 왜 일본은 자기 나라도 아닌 조선의 고적을 조사하고 박물관을 세웠을까?
이성시의 설명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제실박물관 형성 과정이 권력의 탈취를 정당화하고, 새로운 권위의 수립 과정이었던 데 비해, 한국에서는 왕조 권력의 해체와 권위 및 성성(聖性)의 박탈 과정 그 자체였다. 그것은 박물관에 진열된 고미술을 다루는 것에도 전적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면 일본 국내에서 도다이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 소장품이 어물(御物)로서 은닉된 것과 대조적으로 조선의 고대 미술품은 철저하게 개방되어 쇠퇴의 상징으로 간주된 조선 왕조의 미술품 및 근대 일본 미술과 대비되면서 전시되었다.”(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 기획. 임지현․이성시 엮음.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 즉 일본은 한민족의 정신적 단결을 가져올 수 있는 고적들에서 신성함을 제거하고 왕조의 낙후된 모습을 드러내서 조선왕조에 대한 민중의 미련을 줄이고 근대를 상징하는 일본에 대한 우호감을 늘리려 했다. 그러니 박물관의 설립과 유물의 진열은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의 평론가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미국에 흑인노예사 박물관이 없는 이유를 묻는다. 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도 자신의 역사를 가질 권리가 없다. “흑인 노예사 박물관은 미국 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흑인 노예를 둘러싼 기억은 사회의 안정에 지나치게 위험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자극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됐을 것이다.”(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타인의 고통』. 이후) 사실 흑인 노예사 박물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미국이 저질러온 악을 증명할 것이다.
이처럼 권력은 어떤 기록을 남기고 어떤 기록을 지워버릴지를 결정한다. 그러니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진짜지만 그 유물들을 어떻게 전시하고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역사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를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새로 들어선 지배계급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언제나 지배계급은 역사적인 앎을 조작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과거의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면서 현재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곳, 현재를 미래로 지속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근대의 국민국가는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며 많은 박물관들을 지었다. 한국의 독립기념관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했던 전두환 군사정권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1987년에 독립기념관을 완공했기 때문이다(그래서 2007년 4월 전두환 건립비가 철거되기도 했다). 각종 기념관이나 박물관은 그냥 지어지지 않고 언제나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박물관은 권력의 의도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에게 과거는 상품이기도 하다.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는 곳은 없고, 그 보존된 과거로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한다. 미국의 작가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는 그런 점에서 “유물이 우리 시대의 최대 성장산업”이라고 얘기한다. “오늘날 박물관의 95%가 2차대전 이후에 세워졌으며, 유적도시가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다. (기억의 형태를 마비시킨) 노스탤지어는 곳곳에 있다. 조상들은은유적으로‘파헤쳐지고’ 고대유물들은 뿌리뽑히고 추억들에는 인공향신료가 뿌려진다.…무엇보다도 상품화될 수 있는 인공역사는 보호되지만, 예를 들어 쉽게 상품화되지 않는 그 밖의 제의의 역사는 그만큼 보호받지 못한다(제이 그리피스 지음. 박은주 옮김. 『시계밖의 시간』. 당대). 상품성을 띤 역사는 보존되지만 그렇지 못한 역사는 지워진다.
돈이 되기 때문에 때로는 유물을 사고 파는 도둑들이 설치기도 한다.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나 ‘내셔널 트래져’같은 영화 시리즈를 보면 유물이 곧 돈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면 강대국들은 세계 각지의 유물들과 예술품들을 차지하기 위해 더러운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의 국립박물관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이 있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증명한다.
더구나 자본은 과거를 상품으로 만들 뿐 아니라 새로운 과거를 창조하기도 한다. 미국의 디즈니랜드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디즈니랜드는 과거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 과거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관람객들은 과거를 경험한다. 복제된 다양한 유물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선마저 흐릿하게 만든다. “모차르트를 보고 난 직후에 톰 소여를 보거나 예수가 열두제자와 함께 베푸는 산상수훈 장면을 관람하고 난 다음에 『원숭이 혹성』의 동굴에 들어간다면 실제 세계와 가능한 세계간의 논리적 구분선은 결정적으로 사라져 버린다.”(움베르토 에코 지음. 조형준 옮김. 『포스트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새물결) 이렇게 창조된 과거는 상품으로 소비되고, 그 과거의 실제 의미는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박물관이 언제나 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상품화되는 건 아니다. 독일의 사상가 칼 맑스(K. Marx)는 대영제국의 박물관에서 타락한 자본주의를 뒤엎을 이론을 완성했다. 그곳에서 맑스는 정치경제학의 체계를 잡았고 『자본론』의 기초를 세웠다. 이처럼 과거를 담은 박물관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박물관을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지 않는다. 박물관은 ‘관람료’를 요구하고 하루벌이를 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과정을 마련한 미국의 얼 쇼리스(Earl Shorris)는 감옥에서 만난 여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 여인은 “당신들은 왜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아이들이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같은 정신적인 삶을 누리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여유와 여가를 가진 사람들만이 빡빡한 현재의 일상에서 벗어나 인류의 과거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고민하는 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삐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박물관이나 음악회에 가고 책을 읽는 문화적 실천이 교육수준이나 출신계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 실천들이 다른 계급과 나를 구별하는 기준일 수 있기 때문에 “취향은 ‘계급’의 지표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삐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구별짓기』. 새물결).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인 여가가 특정한 계급에게 집중되면서 사회의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다른 삶을 꿈꿀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박물관은 권력과 자본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박물관에서 새로운 미래가 탄생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는가?
박물관학자 성혜영은 에코뮤지엄(eco-museum)에서 박물관의 대안적인 가능성을 본다. 1971년 국제 박물관학회 총회에서 프랑스의 푸자드(Robert Poujade)가 처음 사용한 말인 에코 뮤지엄은 “일정한 지리적 범주 내의 특정한 어느 지역을 규정하는, 자연, 역사, 문화 등 총체적인 환경을 기초로 하는 박물관”을 뜻한다. 에코뮤지엄은 그동안 국가나 자본이 전용해 왔던 문화유산을 지역사회가 재해석해서 박물관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관람객과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려 한다.
에코뮤지엄은 “마을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산업’의 성과만이 아니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에 주목하고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각자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 박물관 만들기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에코뮤지엄은 이처럼 특정 지역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역 차원의 새로운 해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주민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기도 했다.”
에코뮤지엄 운동에 이념적 토대를 마련한 리비에르(Georges Henri Rivière)는 에코뮤지엄이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고 “인간을 자연 그대로의 환경 속에서 파악하기도 하고, 전통 사회 또는 산업 사회를 통해 적응해온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한다”며 그 의미를 강조한다. 또한 에코뮤지엄은 “그 지역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보존기관”일 뿐 아니라 “그 지역 주민들이 그들의 보다 밝은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보호, 장려해야 하는 학교”의 의미도 가진다. 그런 점에서 에코뮤지엄은 “여러 가지로 폐쇄적인 선입견을 주는 기존의 ‘박물관’이라는 이름 대신에, ‘문화유산센터(Heritage Centre)’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성혜영 지음. 『박물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휴머니스트).
인류의 지혜는 언제나 대안의 가능성을 파고든다.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다. 박물관의 지식은 인류의 미래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다. 박물관은 과거와 미래로 향하는 길에서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드러내는 이정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