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면서 베란다를 가지게 되었다.
생명과 자급의 삶을 얘기하면서 정작 내 삶에는 자급의 여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는데, 베란다가 생기면서 이제 그 삶을 누리게 되었다.

플라스틱 화분이지만 그 속에 흙을 채우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아침 저녁으로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공기를 쐬여 주자 어느새 작은 싹들이 하나둘씩, 조금 지나니 무리를 지어 고개를 내밀었다.
저 가냘픈 것들이 어떻게 흙을 뚫고 나왔을까 신기했다.
그리고 이미 죽은 듯한 바싹 마른 씨앗에서 저리 푸른 싹이 자라다니...
새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진실되지 못한지를 깨닫는다.
이미 죽어버린 듯한 세상도 이렇게 작은 조건만 맞춰줘도 새로운 시작을 만드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니, 그 얼마나 오만한 말일까...
아침, 저녁으로 그 생명의 변화가 신기해서 베란다를 서성이곤 한다.

내친 김에 콩나물도 기르리라 맘 먹었다.
콩나물콩을 구해 물에 불렸다가 시루 속에 넣고 아침 저녁 시간 날때마다 물을 붓고 따르기를 반복했다.
가려줄 천이 없어 그냥 보자기를 접어 위에 가만히 덮어두었다.
정말 물 말고는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았건만 콩나물들은 정말 무럭무럭 자랐다.
일주일 지나니 먹을만치 길게 자랐고 어제 첫 수확을 했다.
첫 수확이니 나눠먹으려 친정집에 콩나물을 좀 보냈다.
남은 콩나물로 국을 끓여먹으니 왠지 마음이 다르다.
콩나물 대가리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생명은 조건만 맞춰지면 스스로 잘 자란다.
어떻게 클지는 그 자신만이 알겠지만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공부를 시킨다.
어느새 고추, 깻잎, 상추, 청경채, 쑥갓의 싹들이 베란다를 가득 메우면서, 얘들과 어떻게 더불어 잘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혹 비좁지는 않은까, 심을 곳과 흙을 더 구해 넓혀줄까, 남은 음식물로 퇴비를 만들어 볼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자라는 것들과 얘기를 나눈다.
쓰러진 작은 싹 하나라도 일으켜보려 신경을 쓰게 된다.

고맙다.
희망을 품게 해줘서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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