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전수경(상근 활동가)/스즈키 아키라(자원활동가)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우리나라 산업재해 중 6-70%는 50명 이하의 영세업체에서 발생한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의 경우 산업현장에서 평균 날마다 224명이 다치거나 업무와 연관된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매일 7명은 귀중한 생명을 잃고 있다. OECD 중에서도 최하위를 면치 못한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세업체의 환경개선과 산업재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매년 수백 억 원의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재해는 줄어들 기세가 안 보인다. 최근 미국의 산업안전보건청은 안전보건에 1달러를 투자하면 4달러의 편익이 발생한다는 분석결과를 내고 있는데, 이런 원리에 따르면 정부가 투자한 만큼 노동자의 편익이 발생해야 하는데, 사정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노동건강연대의 전수경 상근 활동가는 이렇게 진단한다.
“.......수백억의 돈이 다 어디로 가냐면, 대한산업보건협회와 같은 정부의 일을 대행하는 협회라든지 여러 가지 직능단체들이 예산 지원을 받아 집행합니다. 실제로 노동자들과 사업주들은 이 사업에 소외되어 있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는 거죠. 정부의 고민도 이런 것에 있습니다. 왜 쏟아 부었는데 개선은 안 되는가?, 불만은 많은데 나아지는 것이 없는가, 그래서 여기 저기 프로젝트도 주고 용역도 해마다 많이 줍니다. 그런데 그 중에 빠진 것은 뭐냐면, 노동자들과 노조가 주체라는 사실을 빼먹거든요. 노동자와 노조가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나의 안전을 남에게 맡기는 순간, 인간 소외를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생명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영세업체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산업재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면, 정부의 정책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노동안전 정책이 추진된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위 노동건강연대의 ‘성수동 사업’은 이런 원칙을 뼈대로 하고 있다. ‘성수동 사업’은 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노동안전 활동이다.
성수동은 구로, 문래 등과 같이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영세업종 밀집 지역이다. 제화, 금속, 인쇄가 주를 이룬다. 필자도 90년 대 초에 성수도 금형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어, 이 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많게는 10여 명이, 적게는 3-4명이 환기도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서 하루 14시간 동안 똑 같이 반복되는 일을 쉴 틈 없이 하고, 토요일, 일요일이란 개념도 잊은 채, 일이 있으면 나와야 하는 그런 작업환경이었다. 전수경 활동가의 얘기를 들으면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노동건강연대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 노동자들에겐 이런 교육도 사치였다. 좀처럼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 영세업체들의 산재문제는 한 지역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구체적인 영세업체 밀집지역 안에서 모범 사례를 하나 만들게 되면, 점차적으로 나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일방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경험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성수동 사업’은 시작된다.
“‘성수동 사업’이라는 사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일방적 강의방식을 폐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영세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토요일 오후에 일찍 퇴근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일요일도 일 있으면 나가고, 빨간 날이라면 쉰다는 개념이 없잖아요.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이나 강의를 하려 한다면 한 밤중에 하거나 토요일 밤에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다른 방식의 교육을 생각하다가, 일본에서 만든 프로그램 하나를 채택했는데, 약자로 포지티브(Posivive)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어감도 좋긴 하지만, 약자를 쭉 풀면 POSITIVE(Participation Oriented Safety Improvement by Trade Union Initiative)가 되거든요.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공장 안에서의 안전 개선활동이라고 풀 수 있는데, 이것은 지역 안에서 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편하게 할 수 있는 접근법, 훈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OSITIVE 프로그램’은 ‘도쿄 노동안전위생센터’라는 단체에서 고안하여 성공한 프로그램이다. 강의방식을 배제하고 노동자들이 직접 ‘작업장 체크리스트’를 들고 다니면서 자기 공장 안의 사소한 환경을 체크하는 방식이다. ‘작업장 체크리스트’만 있으면 별도의 예산이 필요 없다. 무엇보다 나타난 결과들은 사업주나 관리자들과 얘기할 수 있는 매개가 된다. 또 POSITIVE 프로그램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제안’할 수도 있고, 직접 내가 ‘바꿀’ 수도 있다. 이런 결과들을 작업장 노동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합의하면서 변화를 도출하는 ‘과정’이 POSITIVE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작업장 체크리스트’를 간단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를테면 ‘물건의 운반과 보관’이라는 주제를 보자.
▶ “통로를 확보하고 표시를 한다.” - 이 개선을 제안하시겠습니까? □ 필요 □ 불필요 □ 시급 ▶ “공구 스탠드, 용기, 작업대 등을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 - 이 개선을 제안하기겠습니까? □ 필요 □ 불필요 □ 시급
각 문항에는 이해하기 쉽게 그림이나 사진이 그려져 있다. 45개 정도의 문항을 체크하다 보면, 어떤 조치가 가장 필요하고 덜 필요한지, 사업주가 해야 할 일과 내가 해야 할 일 등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노동 안전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일순간에 모든 사업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작업장 체크리스트’는 우리 노동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일본에서 도입된 이 프로그램이 우리 상황과 딱 맞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노사관계가 우리보다 탄탄한 것이 현실이다. 작업장 환경 개선에 대한 노동자의 지적이 적대적인 노사관계의 우리나라 상황보다는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실제로 이 체크리스트가 일정한 성과를 가지려면 사업주들과 체크한 결과를 두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서로의 간극은 그리 좁지 않다.
“대부분의 사업주들은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특이하게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들도 있어요. 고용된 사람들과 뭔가를 만들어가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요. 대체적으로 정부 정책에 대한 냉소적인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사업주들이 노동자나 노조의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고, 이런 분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경우, 사업주와 노동자가 한 자리에 모여 작업환경의 안전에 대해 토론할 분위기는 아닌 듯싶다. 또한 사업주 스스로가 작업장 안전에 발 벗고 나설 여력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전수경 활동가는 ‘성수동 사업’을 ‘느리게 함께 가기’로 규정했다. 음식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듯, 서두르지 않고 아주 느리게 야금야금 걸어갈 방침이다. 활동가가 아무리 독촉해도 노동자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노동건강연대에는 일본인 자원활동가가 있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한데, 이름은 ‘스즈키 아키라’이다. 이 사업의 가능성을 일구는 데도 스즈키의 역할이 컸다. 한국어 실력도 꽤 유창했다. 97년부터 한국생활에 적응했으니, 벌써 6년째다. 스즈키는 이 프로그램이 절대로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개선되어야 사항이나 단점, 불편한 사항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지적함으로써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일은 전문가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공학적으로나 산업안전에 대한 대응에 대해서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이런 식의 방법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잘 몰랐던 거죠. 그래서 제가 ”이런 아이디어가 있으니까 검토해 달라“ 해서 채택된 겁니다. 우리가 현장 방문해서 찾는 것은 ‘좋은 점’을 찾습니다. 열악한 현장에서도 나름대로 노동의 장점을 살려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선 그런 것을 먼저 찾고, 다른 사업장과 이런 장점을 교류합니다. 이런 식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사진도 찍곤 하죠. 이런 식이라면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성됩니다.”
기본적으로 POSITIVE 프로그램은 협동의 사업이다. 서로 불신하고 적대적이라면 안전한 사업장의 실현은 요원하다. 노동자들의 안전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문제는 동료의 문제이고, 동료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께 고민하고 협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이 프로그램이 한 번에 그쳤지만,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안전문제는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을 때만이 보장받을 수 있다. 내년에 다시 계획될 POSITIVE 프로그램과 ‘건강수첩’ 사업 등이 나름의 성공을 거두길 기대하며, 이런 효과가 다른 사업장으로 확대되길 희망해본다.
※ 노동건강연대의 홈페이지는 www.laborhealth.or.kr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