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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3년 12월11일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학교 운영위원회의 한계 짚어보기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운영위원)

1988년부터 미국 시카고의 540개 공립학교(public school)에서 지방학교위원회(Local School Council)는 교장에 대한 임면권, 자유재량재정(discretionary funds), 교육향상방안(커리큘럼, 지침, 행정 등)을 실행하는 포괄적인 역할을 맡아 왔다. 학교위원회는 학부모 6명, 지역대표 2명, 교사 2명, 학교장과 투표권이 없는 고교생들로 구성되고 2년마다 선출된다. 시카고 지방정부의 교육부서는 학교위원회 구성원들의 훈련과 조정을 맡는다. 지방정부는 주민들에게 권한을 대폭 되돌려주고 추가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자치를 보장’하고, 주민들은 토의(deliberation)를 통해 집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진다. 이런 노력은 책임과 자치를 동시에 보장하는 ‘책임을 지는 자치(accountable autonomy)’를 만들고 있다.

한국도 학교운영위원회의 설치(법정기관, 필수기관)를 제도로 정하고 있다. 1999년에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제31조 1항은 “학교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고 지역의 실정과 특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을 창의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국․공립 및 사립의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및 특수학교에 학교운영위원회를 구성․운영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학교운영위원회의 구성원은 제31조 2항에 따라 “당해 학교의 교원대표․학부모대표 및 지역사회 인사로 구성”되고, 그 규모는 제31조 3항에 따라 “학교운영위원회의 위원정수는 5인 이상 15인 이내의 범위 안에서 학교의 규모 등을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해진다. 이렇게 구성된 학교운영위원회는 “학교헌장 및 학칙의 제정 또는 개정에 관한 사항, 학교의 예산안 및 결산에 관한 사항, 학교교육과정의 운영방법에 관한 사항, 교과용도서 및 교육자료의 선정에 관한 사항, 정규학습시간 종료후 또는 방학기간중의 교육활동 및 수련활동에 관한 사항, 교육공무원법 제31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한 초빙교원의 추천에 관한 사항, 학교운영지원비의 조성, 운용 및 사용에 관한 사항, 학교급식에 관한 사항, 대학입학 특별전형중 학교장 추천에 관한 사항, 학교운동부의 구성․운영에 관한 사항, 학교운영에 대한 제안 및 건의 사항” 등을 심의한다.

그 틀만 보면 한국의 학교운영위원회는 시카고의 학교위원회처럼 포괄적인 책임을 맡고 교육자치를 주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책임을 지는 자치가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불행히도 껍데기를 벗기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이없는 사실이 드러난다. 일단 그 법적인 근거를 보자. 초․중등교육법 제34조 1항은 “제31조의 규정에 의한 학교운영위원회 중 국립학교에 두는 학교운영위원회의 구성․운영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고, 공립학교에 두는 학교운영위원회의 구성․운영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시․도의 조례로 정한다”고 밝힌다. 이 법률에 따르면, 개별 학교에서 학교운영위원회의 구성과 역할을 바꾸려는 사람은 대통령을 면담해 새로운 법령을 부탁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제대로 교육자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학교운영위원회의 규모를 보자.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58조 1항은 학교운영위원회의 규모를 학생수에 따라 “학생수가 200명 미만인 학교: 5인 이상 8인 이내, 학생수가 200명 이상 1천명 미만인 학교: 9인 이상 12인 이내, 학생수가 1천명이상인 학교: 13인 이상 15인 이내”라고 밝힌다. 학생수가 많으면 운영위원이 더 필요하고 반대로 학생수가 적으면 덜 필요한 것일까? 교육의 질은 양에 맞춰질 수 있는 걸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또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위원, 교원위원, 지역위원으로 구성된다. 학부모위원이 학부모들의 대표고, 교원위원이 교사들의 대표라면, 지역위원은 누구일까?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58조 2항은 지역위원이 “당해 학교가 소재하는 지역을 생활근거지로 하는 자로서 교육행정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 당해 학교가 소재하는 지역을 사업활동의 근거지로 하는 사업자, 당해 학교를 졸업한 자 기타 학교운영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자”라고 밝힌다. 해당 학교의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조금 더 큰 지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겠다는 ‘좋은 취지’이지만, 현실에서는 현직, 퇴직 교장들과 장학사들이 지역위원을 나눠먹으면서 서로 뒤를 봐주는 ‘불량한 제도’로 변질되고 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공무원이 필요하다면 그 역할은 지역위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고 좋은 취지를 살리려면 지역위원을 ‘공무원’, ‘사업자’가 아니라 해당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추천하는 자’로 규정하는 게 올바르지 않을까?

이런 구성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학교운영위원회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교의 운영을 심의할 권한과 때론 의결권까지 가지지만 집행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학교장에게 있다. 예를 들어, 학교운영위원회는 체육복을 입을 것인지, 어떤 색상을 입을 것인지를 심의할 수 있지만 어떤 업체에 체육복을 맡길 것인지는 학교장의 권한이다. 마찬가지로 학교운영위원회는 교육과정을 심의할 수 있지만 그 과정 자체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교장은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받고 그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 결정을 그대로 따를 의무는 없다. 그래서 학교운영위원회는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기 쉽다.

마지막으로 학교운영위원회의 가장 큰 한계는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에서 얘기한 시카고의 학교위원회는 학생들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학생들은 결정에 관한 투표권이 없다 하더라도 토의과정과 심의과정에 개입하고 토론함으로써 자신들의 ‘생활터전’인 학교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토의할 수 있다. 게다가 독일이나 프랑스는 학생을 구성원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대표의 수를 늘리고 있다.

사실 학생들은 이런 결정에 직접 영향을 받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고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를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참여는 미래에 학생들이 시민으로서, 자기 지역의 주민으로서 살아가는데 중요한 ‘거름’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누에고치가 나비로 성장하듯이, 학생은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학교운영위원회는 ‘무슨 자치’를 지향하는 걸까? 그것이 ‘누구들의’ 교육자치란 말인가?

사실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한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참여가 활발해야 하는데 대학입시라는 거센 방벽이 그 흐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수학능력평가’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가진 대학입시는 학생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성장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학생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어 성장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는 입시는 철저한 ‘학벌중심의 사회’로, 경쟁논리로 자신을 은폐하고 있다. 그렇기에 참교육이 가야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전교조는 올해 초 “교육인적자원부가 마련하여 오는 13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고할 예정인 '민주당 대통령선거 공약 교육부문 실천방안'에는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 대표를 참석시켜 발언권을 부여하고, 교사회와 학부모회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는 방안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학교운영위원회 제도 개선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전교조는 “학부모회․교사회의 권한과 지위에 관한 문제”, “사립학교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을 뿐 학생들이나 학생회의 참여를 제도화하는 방안에 대해 추상적인 선언 외에는 침묵하고 있다. 전교조가 ‘교직원노동조합’에 머물지 않고 ‘참교육을 지향’한다면 분명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뿐 아니라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네이스 반대도 중요하지만 대학입시와 학벌중심 사회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전교조를 ‘이익집단’에서 ‘공익집단’으로 자리매김하게 해 줄 것이다.

프랑스의 이방인이자 한국에서 악역을 떠맡은 홍세화 선생은 이런 글을 남겼다. “한국과 프랑스의 교육현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비애감은,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이 더욱 나은 공교육 환경을 획득하기 위해 거리시위에 나섰을 때, “학생들 이래선 안 된다” 따위의 사설을 싣는 신문이 없는 반면에 “고등학생들의 시위는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예행 연습이다”라고 말하는 프랑스의 언론과 한국의 언론을 볼 때의 비애감과 같다”(홍세화, <빨간 신호등>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 미래의 주체를 빼놓고 자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학생들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를 보장하는 것만이, 그리고 참여를 돕는 새로운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만이 자치를 활성화할 수 있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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