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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네 명의 사람이 서울대 학생들에게 잡혀 폭행과 고문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당시 여러 대학생들이 구속되기도 했던 이 사건은 소위 '서울대 프락치사건'이라 불린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학생운동을 감시하기 위해 수시로 학내에 프락치를 보내자,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실수로 사람들을 폭행했다. 그런데 경찰은 이 비극적인 사건조차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삼으려 했고,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경찰 간부는 "군사정권이 학생회 조직 결성을 기선 제압하기 위해 폭력사건으로 엮어 만든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요즘도 때 아닌 '프락치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촛불시위와 관련해 사복 경찰관들이 시위현장을 몰래 기록하는 일이 잦아지자, 시민들은 의심이 가는 사람들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쇠파이프를 사용,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이 전경이라는 주장이 언론에 기사화될 정도로 그 논란의 정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인터넷에는 '프락치 대처요령'까지 퍼지고 있고, 촛불행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며 경계하고 있다.

이 런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과거 권력이 실제로 프락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5공화국 때에 녹화사업이라는 명분으로 강제로 군대에 징집된 1천192명이 학원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7년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92년까지 정보과, 보안과 형사들이 대학가를 사찰하려 학생 등 프락치를 활용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4년에도 안전기획부 소속 직원이 "나는 2년 동안 안기부 프락치로 활동하며 남매간첩단 사건 조작을 도왔다"며 안기부의 프락치 공작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래서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1984년이나 CEO가 지배하는 지금이나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불상사가 벌어질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사 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사건을 조작하는 성향은 한국만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들의 공통된 속성이다. 최근 자본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시위가 강력하게 조직되자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경찰이 시위대를 폭도로 몰려고 사건을 조작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언제나 권력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려 든다.

그런데 프락치는 권력의 조작 중에서도 가장 비열한 것이다. 왜냐하면 프락치는 인간의 양심을 배반할 뿐 아니라 동료 시민들이 서로에게 주는 신뢰를 가로막고 우정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프락치는 그런 일을 한 사람과 그런 일에 희생을 당한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고해야 하는 사람이나 진급이나 출세를 위해 다른 사람을 팔아먹은 사람에게도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날이 언젠가는 찾아올 터인데, 누가 그 고통을 줄여줄 것인가?

그리고 동료 시민들을 의지하고 믿는 신뢰와 우정은 시민사회를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다. 만일 그런 신뢰가 사라진다면 과거처럼 서로를 믿지 못하고 프락치로 몰며 상처를 주는 비극적인 상황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 시민사회의 건강함을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소통이 되지 않아 문제인데, 소통은커녕 몰래 감시를 한다고 생각하면 누군들 불만을 가지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정부와 경찰은 문제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프락치와 관련된 논란은 시민들의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환상이 실감을 주고 대처요령까지 퍼지는 것은 그런 황당한 상황이 여전히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프락치는 비정상적인 시대의 산물이다. 여전히 프락치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상적이지 않음을 뜻한다.

2008. 6. 13
하승우
경인일보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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