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뒤면 대통령 선거일이다. 앞으로 5년 동안 한국사회가 나아갈 굵직한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날이다. 예전에는 그런 선거 때가 되면 괜스레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이번에는 뭔가 이변이 벌어지지 않을까,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이변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변이 벌어진들 세상이 변하는 것 같지도 않다.
얼마 전 <한겨레> 신문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참 아팠다. 자신의 친구를 어느 지하철역 출구에서 맞닥뜨린 의사의 이야기였다. 친구의 사업이 잘 될 때는 자주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눴지만 사업이 망하고 난 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그러다 그 얼굴을 어느 지하철역 인형을 파는 사람으로 다시 만났다는, 그렇게 만나고 난 뒤로 다시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그렇게 만나고 헤어진 두 사람은 서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나마 의사인 사람은 그렇게 칼럼도 쓰고 자기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씌어진 자기 얘기를 읽은 그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는 세상이 갑자기 확 바뀌어 평등한 세상이 오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소박하게 내가 내 삶을 지탱할 수 있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관계들이 ‘단지’ 돈 때문에 깨어지지 않는 세상을 바랄 뿐이다. 내게 소중한 공간이 재건축과 대형 마트에 밀려 사라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람들이 자연을 느끼며 그것과 동화될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사라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런 바람을 들어줄 대통령 후보가 있을까?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이 걸어놓은 펼침막을 볼 때마다 구토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살린다’, ‘바꾼다’라는 말은 인간이 쉽게 쓸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자신은 그럴 만큼 충분한 인간인가? 그리고 상대가 원하는 살림과 변화는 그 자신이 원하는 살림과 변화와 같을까? 모심 뒤에야 살림이 가능한 데 국민을 모시겠다는 후보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다.
하물며 듣고 배우고 난 다음에도 세상을 살리거나 바꾼다는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의 말이 아니다.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바꾼단 말인가?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한 사람을 살리고 바꾸기도 힘든데 나라를 살리고 바꾸겠다니...
한 사람의 몸과 양심으로 제국주의에 맞섰던 인도의 간디조차 자신이 세계를 살리거나 바꾼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 자신이 많은 과오를 범했으며 그것을 통해 배웠다고 말했다. 간디가 가진 그릇의 반도 안 되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리고 바꾸겠다고 하니, 도통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면 경제가 살아날까?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권력을 잡으면 세상을 내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발상 자체가 불순한 게 아닐까? 세상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영역을 지키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바꾸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주장하기 전에, 그들은 어떤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그 결정에 영향을 받을 사람들, 그 결정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정말 미안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정말 미안하다고 따뜻하게 손잡고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선거 때만 되면 그들은 시장통을 헤매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장갑을 끼고 일을 한다. 4년이든, 5년이든 그들은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그 기간에만 대중이 되고 서민이 되고 민중이 된다. 허나 그 기간이 지나가면 그들은 시장통이 아니라 국가경제를 생각할 것이고 버스나 전철이 아니라 기간산업과 물류체계를 얘기할 것이고 땀의 가치보다 권력자의 고뇌를 호소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지지할 수 없다.
내 한 표는 아주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 소중한 표를 줄 수가 없다.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 표를 줄 수 없다. 이런 선택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비난이야말로 이미 병든 세계를 더욱더 심각한 고통 속에 몰아넣는 무책임한 짓이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어떤 일을 해주길 바라는 그 마음부터가 나 자신을 소외시키고 세상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도 그들 중 누구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 자체가 그 무엇으로 정당화를 시키든 이미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런 선택을 무의미하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허나 선거로 의미를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헛된 의미이다. 내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면 그 증거가 남아 그것을 증거로 후보를 압박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누구를 지지한들 나는 그 후보가 받은 수십 만표, 수백만표의 한 표일 뿐이고, 내가 그 후보를 찍었다는 걸 증명할 방법도 없다. 그러니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됐다고 하는 건 '가상의 자기만족감'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찍는 무효표는 이 선거라는 것 자체를 무효로 만들기 위한 의미있는 첫걸음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런 선택이 수동적이라 비난할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꿀 능력은 없지만 나는 내가 나서고 물러서야 할 때를 안다. 내가 원하는 방향과 세상이 다를 땐, 내 힘이 세상과의 부대낌에 지칠 때, 조용히 힘을 모아 다음을 준비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도 안다. 그런 점에서 무효표는 정치활동의 중단이 아니라 정치활동의 시작을 뜻한다. 내가 원하는 정치의 시작을, 그 시작을 위한 능동적인 고민과 행동을...
그 고민과 행동을 위한 몇 가지 화두는 이렇다.
지리산에 더 이상 댐과 골프장을 짓지 말자. 더 이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터전을 파괴하지 말자. 그 속에 담긴 우리의 이야기를 지우지 말자. 주민들을 개발의 낭떠러지로 내몰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 자신이 살고자 하는 마을을 만들게 하자.
농업을 포기하고 농민을 버리지 말자. 농업은 자립을 위한 가장 밑거름이다. 농업은 다른 산업과 거래할 수 있는 선택사항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토대이자 자립의 기반이며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을 배워온 방식이다. 문명의 뿌리를 자르고도 문명이 지속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자. 농민들이야말로 그런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버리고 만든 경제와 정치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더 이상 교육에 경쟁력 강화 따위를 갖다 붙이지 말자. 헛된 기준에 맞춰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인간을 찍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교육적인 행위이고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짓거리이다. 교육은 내가 나의 자아를 찾고 타자를 받아들이며 소통하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이다. 진정한 경쟁력은 그런 인간이 되었을 때 갖춰질 것이다.
일 주일 뒤 나는 선거에서 무효표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5년 동안 내 무효표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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