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고 있는 책은 한길사가 다시 만든 전집이 아니예요.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낡은 종이를 까만 하드카바 표지가 보호하고 있는 책이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옛날 책이 지금 책보다 훨씬 더 가벼운 이유는 뭘까요?

도서관에서 빌린 옛날 책을 읽는 즐거움은 그 책을 빌린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죠.
마치 영화<러브레터>처럼 책을 빌린 사람들과 그 일자가 적혀 있거든요.
살펴보니 84년도 5월에 들어온 책을 6월부터 학생들이 참 많이도 빌려 읽었네요. 정외, 신방, 기계, 화학, 국문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읽었구요.
84년에 가장 많이 빌려 읽었고 85년도에 뜸하다 1989년 5월 15일 반납이 마지막이네요.

그건 아마 그 시대가 함석헌의 목소리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85년도부터 활성화된, 맑스-레닌주의를 따르는 조직운동은 함석헌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터이니.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무한한 영감을 받고 있어요.
아니, 영감이라기보단 무엇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관한 목소리죠.
제가 최근에 종교를 가지게 된 건 '영성'의 부족이 사유의 빈곤을 가져온다는 판단 때문이었거든요.
내 사유를 풍부하게 하려면 세계와 생명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풀뿌리의 생명력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기 위해서였죠.
장일순과 함석헌의 글을 읽으며 그런 판단이 그르지 않다는 생각을 되풀이하게 되네요.

이 책에서 함석헌은 새 삶,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역설합니다.
생각하기를 멈춘 민중이, 씨알이 다시 생각해야 함을, 새 마음, 새 정신으로 혁명을 일으켜야 함을 역설합니다.
혁명의 命은 "숨이요, 말씀이다. 호흡이 새로와지고 말이 새로와짐이 혁명이다."
"네 가슴 속에 다시는 가정도 나라도 사회도 문화도 전쟁도 두지 말란 말이다. 이 낡아가는 세계를 무시해라! 모든 상대적인 유(有)를 봄이 혁명이다. 그것을 없는 것으로 봄, 그것에 의하지 않고 봄, 무(無)를 봄, 그것이 혁명이다. 무서운 파괴주의지! 그러나 그러면 텅빈 빈탕 속에 <말씀(命)>만이 울린다. 그것이 혁명이다. 혁명 정말 하면 영원의 임금이다."

한 권의 책 속에 많은 원리가 숨어 있네요.
아마도 그 원리를 하나씩 건져서 다시 복원하는 게 저의 과제일 듯.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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