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에 쓴 글입니다. ------------------------ 생계형 범죄와 온도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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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형 범죄라는 말이 처음 우리 사회에 등장한 것은 IMF 이후이다. 1996년까지는 생계형 범죄라는 말이 없었고 공무원들의 비리를 일컫는 생계형 비리, 생계형 수뢰라는 말만 있었다. IMF체제로 인한 실업과 배고픔, 불안, 절망은 물건을 훔치거나 사람을 속이는 범죄를 증가시켰다. 가족의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현대판 장발장,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IMF 이후 이렇게 생계형 범죄가 늘어나자 1999년 2월 법무부는 벌금을 못내 노역장에 유치된 2천여명을 특별히 사면했다. 그리고 12월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생계형 범죄 수배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특별 조치를 실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단순한 임시방편일 뿐이고 그 원인을 없애지 못했다. 그런 적극적인 조치 이후 생계형 범죄가 잠시 고개를 숙이는 듯했지만 2002년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그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비율만 증가하지 않고 그 범위가 청년, 주부, 노인, 이주노동자 등 여러 층의 사람들로 넓어지고 있다. 범죄의 대상도 가게의 물건에서 맨홀 뚜껑, 길에 세운 차의 기름, 모금함 등 불특정한 대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행위가 아니라 범죄의 원인이 되는 불안요인을 생각하면 그 폭은 더 넓어진다.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을 내지 못하는 가구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최근 20년간 자살률 증가속도, 노년층과 여성 자살률은 세계 1위권을 달리고 있다. 이혼율도 세계 1위권을 달리고 있다.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는 아기 돌반지나 개인 수집품들이 팔리고 있다. 이런 불안정함은 지금 현재의 살아남기를 위해 미래의 삶을 '과감히' 포기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생계형 범죄만 일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죄보다 사람을 더 미워하게 만드는 범죄도 있으니, 그것은 바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범죄이다. 남들의 애달픈 생계는 나 몰라라 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이런 사람들은 이익을 위해 권력을 매수하고 갖은 비리를 저지른다. 더 심각한 점은 이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 돈을 이용해서 처벌을 피한다는 점이다.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언제나 권력층이나 재벌에 대한 수사는 '역시나'로 끝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되뇌고 죄의식을 망각한다. 생계형 범죄의 파렴치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사실 그 파렴치함에는 뭘 해도 되지 않는다는 자포자기의 심정과 나라고 뭘 못하겠냐는 공격적인 불만이 뒤섞여 있다. 일찍이 프란츠 파농은 사람들 사이의 폭력성 증가가 사람들 사이에 내면화된 감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밝힌 바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상류층의 범죄에 무관심해지는 반면, 자기 주변의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런 폭력은 아이나 여성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되고 더 잔인해진다. 최근에 발생하는 일련의 강력범죄를 보며 섬뜩함을 느끼는 건 그 때문이다. 그 섬뜩함은 특정 개인의 문제일 수 없다. 파농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거울이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것처럼 우리가 행사한 폭력이 반사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고 안전하다 여길 수 있다. 하지만 20대 80에서 1대 99로 향하는 사회에서 과연 1%가 안전할 수 있을까? 단순히 위험사회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담보할 수 없고, 좋은 삶을 위한 장기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이미 10년째 우리 사회에는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100도를 넘기 전에는 직접 손을 넣지 않는 이상 그 물의 온도를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100도를 향해 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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