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칼럼에 쓴 글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데, 뭔가 계속 발목을 잡힌 듯한 요즘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 대한 제 나름의 판단입니다.
---------------------------
1987년 6월 항쟁이 민주주의의 도화선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도화선의 불꽃이 권위주의의 폭파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다. 1987년 7월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을 때 사회의 반응은 엇갈렸다. 파업이 계속되고 대우조선의 노동자 이석규씨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이렇다 할 대응을 않던 재야세력도 투쟁에 결합했다. 그러자 각종 언론들은 연달아 '이제 그만하자'라는 기사를 실었고, 정부는 '좌경세력 척결 국무총리 담화'를 발표했다. 더 이상 '노사분규'가 아니라며 정부가 연일 구속자를 만들고 9월부터 재야세력들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 즈음 파업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한여름 거리를 뜨겁게 달궜던 노동자들의 주장은 정치적 의제에서 사라졌다.
2008년 5월에 시작된 촛불집회가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가져왔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정치적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청소년의 집회 참여에 배후가 있다는 주장이나 시위참여 학생을 비웃으며 폭행하는 선생의 행동은 오랜 고정관념이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증명한다. 이제 언론들은 촛불시위로 인한 경제손실이 2조원에 달한다는 기사를 싣고 있고, 정부는 불법폭력시위를 엄중 처벌하겠다고 발표한다. 그 와중에 촛불집회의 장기화와 피로감을 얘기하며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거나 정당정치와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촛불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처음 촛불을 댕기고 불을 지폈던 청소년과 여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발적인 사건이 동일한 반복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가 반복되는 듯 보이는 건 그 우발적인 사건의 전개를 가로막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바로 정치과정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정치주체의 등장을 가로막는 기성세력들의 네트워크이다.
이 힘은 언제나 운동의 방향을 제도화로 유도한다. 왜냐하면 제도화는 자신들의 역할을 부각시킬 수 있고 이미 그 과정에 익숙한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제도화는 운동의 동력을 기존 정치세력들로 흡수시킨다. 그러면 기성 정치세력들의 문제점은 감춰지고, 실제 현장에서 부대끼며 정치주체로 성장했던 시민들은 기계적인 지지나 냉소, 기권 중에서 선택을 강요당한다.
물론 운동의 제도화를 주장하는 논의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살펴볼 때 당위적인 제도화 주장은 언제나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봉쇄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리고 제도화는 민주화의 성과를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집중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킨다(대학교 학번을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는 386세대를 보라!).
더구나 제도의 효과와 지속성은 주체의 역량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때에만 보장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논의의 초점은 청소년이나 여성처럼 성인 남성중심의 대의정치에서 배제되어온 주체들이 자유로이 정치성향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의 구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장은 주체의 성장에 발맞춰 언제나 변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은 대의민주주의 제도이건 직접민주주의 제도이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최근 정당이나 시민단체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그런 노력을 찾아볼 수 없다. 시민단체의 원로급 인사들이 청와대와 중재를 시도하거나 민주당을 촛불집회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면 과거의 오류는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촛불집회를 지켜달라거나 방향을 잡아달라고 부탁했을까? 요즘 불고 있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열풍에 동참하고픈 것일까?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이 때로는 위대한 결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남보다 강하거나 뛰어나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 우월감은 시민간의 동료의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정치주체의 등장을 가로막는 사회악이다. 아직도 지못미의 엘리트 정치는 한 걸음 나아가려는 역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데, 뭔가 계속 발목을 잡힌 듯한 요즘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 대한 제 나름의 판단입니다.
---------------------------
1987년 6월 항쟁이 민주주의의 도화선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도화선의 불꽃이 권위주의의 폭파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다. 1987년 7월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을 때 사회의 반응은 엇갈렸다. 파업이 계속되고 대우조선의 노동자 이석규씨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이렇다 할 대응을 않던 재야세력도 투쟁에 결합했다. 그러자 각종 언론들은 연달아 '이제 그만하자'라는 기사를 실었고, 정부는 '좌경세력 척결 국무총리 담화'를 발표했다. 더 이상 '노사분규'가 아니라며 정부가 연일 구속자를 만들고 9월부터 재야세력들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 즈음 파업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한여름 거리를 뜨겁게 달궜던 노동자들의 주장은 정치적 의제에서 사라졌다.
2008년 5월에 시작된 촛불집회가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가져왔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정치적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청소년의 집회 참여에 배후가 있다는 주장이나 시위참여 학생을 비웃으며 폭행하는 선생의 행동은 오랜 고정관념이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증명한다. 이제 언론들은 촛불시위로 인한 경제손실이 2조원에 달한다는 기사를 싣고 있고, 정부는 불법폭력시위를 엄중 처벌하겠다고 발표한다. 그 와중에 촛불집회의 장기화와 피로감을 얘기하며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거나 정당정치와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촛불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처음 촛불을 댕기고 불을 지폈던 청소년과 여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발적인 사건이 동일한 반복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가 반복되는 듯 보이는 건 그 우발적인 사건의 전개를 가로막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바로 정치과정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정치주체의 등장을 가로막는 기성세력들의 네트워크이다.
이 힘은 언제나 운동의 방향을 제도화로 유도한다. 왜냐하면 제도화는 자신들의 역할을 부각시킬 수 있고 이미 그 과정에 익숙한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제도화는 운동의 동력을 기존 정치세력들로 흡수시킨다. 그러면 기성 정치세력들의 문제점은 감춰지고, 실제 현장에서 부대끼며 정치주체로 성장했던 시민들은 기계적인 지지나 냉소, 기권 중에서 선택을 강요당한다.
물론 운동의 제도화를 주장하는 논의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살펴볼 때 당위적인 제도화 주장은 언제나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봉쇄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리고 제도화는 민주화의 성과를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집중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킨다(대학교 학번을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는 386세대를 보라!).
더구나 제도의 효과와 지속성은 주체의 역량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때에만 보장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논의의 초점은 청소년이나 여성처럼 성인 남성중심의 대의정치에서 배제되어온 주체들이 자유로이 정치성향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의 구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장은 주체의 성장에 발맞춰 언제나 변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은 대의민주주의 제도이건 직접민주주의 제도이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최근 정당이나 시민단체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그런 노력을 찾아볼 수 없다. 시민단체의 원로급 인사들이 청와대와 중재를 시도하거나 민주당을 촛불집회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면 과거의 오류는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촛불집회를 지켜달라거나 방향을 잡아달라고 부탁했을까? 요즘 불고 있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열풍에 동참하고픈 것일까?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이 때로는 위대한 결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남보다 강하거나 뛰어나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 우월감은 시민간의 동료의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정치주체의 등장을 가로막는 사회악이다. 아직도 지못미의 엘리트 정치는 한 걸음 나아가려는 역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
'풀내음 팀블로그 > 하승우의 "일상과 자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견과 망각의 정치 (1) | 2008.10.02 |
---|---|
가족,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의 교차로? (2) | 2008.10.02 |
지행 콜로키움: 시민운동의 상상력, 이분법을 넘어서 (0) | 2008.06.27 |
쇠고기를 넘어 삶의 변화로 (0) | 2008.06.23 |
프락치와 시민사회의 붕괴(경인일보) (2) | 2008.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