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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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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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우
나는 <GO>라는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어느 한 편에 소속되어 그 집단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보호받는 삶을 거부하는 삐딱한 주인공들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 영화에 매력을 더하는 한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투를 통해 세상을 가르쳐주는 장면이다. 다소 폭력적이지만 아버지는 주먹을 뻗어 그리는 원 안의 세상에 머문다면 안정적이지만 그 원을 벗어나면 어려움에 부딪치고 그런 어려움을 이기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아들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강해져야 한다는 게 일방적인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 강해져야 한다는 이름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희생과 인내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쓰려는 폭력적인 합리성일 뿐이다. 그런데 <GO>는 그런 폭력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우정과 사랑이 타인과 더불어 살고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주기에 매력적인 영화이다.
사실 강해지는 방법은 몸을 단련하거나 집단을 만드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방법 중 하나로 나는 사상(思想)을 꼽고 싶다. 조금 엉성하고 세련되지 않더라도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돈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사상은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상은 그 뜻 그대로 마음과 눈으로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고 내다보며 삶을 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힘, 그것이 바로 사상이다.
그래서 사상은 단순한 언어를 모아놓은 관념일 수 없다. “여러분은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열망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것입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이나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체게바라의 말은 사상이 세계를 바꾸는 힘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는 삶과 세상의 변화를 꿈꿀 자유인 셈이다.
사상의 자유=변화를 꿈꿀 자유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런 소중한 자유를 무참히 짓밟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케케묵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잣대를 다시 들이대고 있고 사이버모욕죄라는 새로운 검열제도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 ‘국가경쟁력’을 내세워 집회나 시위를 금지하며 약자들의 저항수단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저들의 논리는 철저하게 힘에만 의존하기에 폭력적이고 그렇기에 그것에는 사상이 없다. 저들은 단지 폭력을 사용해서 우리에게서 변화와 꿈을 빼앗으려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민주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동안 사상의 숨통을 조여 왔다. 우리에게 사상은 언제나 어떤 ‘~주의(~ism)’만을 뜻했고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생각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얘기해 왔다. 규범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다양성은 언제나 ‘~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만 인정되었다. 즉 우리는 모두가 꿈을 꾸고 사상을 누릴 자유를 얘기하지 않고 모두가 같은 꿈을 꾸거나 같은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더 분명하게 얘기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도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되뇌는 것 외에 자기 사상을 만들지 못했다. 언제나 당면과제만을 생각했지 꿈을 꾸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누군가에게 아주 명쾌한 설명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상적이고 부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가 지금 위기를 맞이한 듯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 사상은 계속 위기를 경험해 왔다.
저들의 국가보안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비판해 왔지만, 그것을 넘어설 다른 틀을 만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 낡은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꿀 희망의 원리를 우리는 구성하지 못했다. 자기가 내밀 수 있는 주먹의 경계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그 경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았고, 그 경계는 사상간의 넘나듦과 꿈의 공유를 방해했다.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그 경계를 넘어설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비폭력이다. 비폭력의 의미는 경찰의 공권력같은 직접적인 폭력에 맞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쇠고기 수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우리 삶을 파괴하는 폭력에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이, 그리고 그런 폭력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직접적인 폭력의 구조는 비정규직의 양산이나 민영화라는 간접적인 폭력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자기 동료를 먹으며 살을 찌우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신세란 끝없는 경쟁 속에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신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간접적인 구조적 폭력에도 적극적으로 맞서는 비폭력이야말로 새로운 사상을 구현할 희망의 언어인 셈이다.
비폭력, 새로운 사상을 구현할 희망의 언어
그리고 그 비폭력의 언어는 단지 인간의 것으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오체투지순례단의 눈물겨운 발걸음이 절망만 주지 않고 희망도 주는 건 주위의 다른 사물과 생명을 서로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삼배일보와 오체투지는 단지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나 방식만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많은 희망의 언어들을 담고 있다(뉴라이트를 비롯한 케케묵은 집단들이나 정치인들이 80년대 운동권의 방식을 열심히 배워 써먹더라도 결코 베낄 수 없는 건 이런 행동 속에 담긴 마음과 사상이다). 이제 사상은 여러 가지 뜻 깊은 실천 속에 담긴 의미들로 새로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상의 자유는 단지 국가보안법 폐지로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상은 검열이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원래 자유로운 것이다). 사상은 국가보안이나 질서와 같은 기존의 논리를 넘어서 다른 새로운 무엇으로 나가려는 것이자 나와 세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개인의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상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다. 사상이 없는 감정적인 연대는 사회적인 조건이나 분위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언제나 약하다. 하지만 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우리를 세상에 내려앉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사상의 자유라 믿는다. 그것은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해져야 한다는 게 일방적인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 강해져야 한다는 이름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희생과 인내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쓰려는 폭력적인 합리성일 뿐이다. 그런데 <GO>는 그런 폭력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우정과 사랑이 타인과 더불어 살고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주기에 매력적인 영화이다.
사실 강해지는 방법은 몸을 단련하거나 집단을 만드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방법 중 하나로 나는 사상(思想)을 꼽고 싶다. 조금 엉성하고 세련되지 않더라도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돈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사상은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상은 그 뜻 그대로 마음과 눈으로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고 내다보며 삶을 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힘, 그것이 바로 사상이다.
그래서 사상은 단순한 언어를 모아놓은 관념일 수 없다. “여러분은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열망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것입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이나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체게바라의 말은 사상이 세계를 바꾸는 힘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는 삶과 세상의 변화를 꿈꿀 자유인 셈이다.
사상의 자유=변화를 꿈꿀 자유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런 소중한 자유를 무참히 짓밟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케케묵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잣대를 다시 들이대고 있고 사이버모욕죄라는 새로운 검열제도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 ‘국가경쟁력’을 내세워 집회나 시위를 금지하며 약자들의 저항수단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저들의 논리는 철저하게 힘에만 의존하기에 폭력적이고 그렇기에 그것에는 사상이 없다. 저들은 단지 폭력을 사용해서 우리에게서 변화와 꿈을 빼앗으려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민주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동안 사상의 숨통을 조여 왔다. 우리에게 사상은 언제나 어떤 ‘~주의(~ism)’만을 뜻했고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생각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얘기해 왔다. 규범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다양성은 언제나 ‘~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만 인정되었다. 즉 우리는 모두가 꿈을 꾸고 사상을 누릴 자유를 얘기하지 않고 모두가 같은 꿈을 꾸거나 같은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더 분명하게 얘기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도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되뇌는 것 외에 자기 사상을 만들지 못했다. 언제나 당면과제만을 생각했지 꿈을 꾸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누군가에게 아주 명쾌한 설명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상적이고 부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가 지금 위기를 맞이한 듯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 사상은 계속 위기를 경험해 왔다.
저들의 국가보안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비판해 왔지만, 그것을 넘어설 다른 틀을 만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 낡은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꿀 희망의 원리를 우리는 구성하지 못했다. 자기가 내밀 수 있는 주먹의 경계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그 경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았고, 그 경계는 사상간의 넘나듦과 꿈의 공유를 방해했다.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그 경계를 넘어설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비폭력이다. 비폭력의 의미는 경찰의 공권력같은 직접적인 폭력에 맞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쇠고기 수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우리 삶을 파괴하는 폭력에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이, 그리고 그런 폭력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직접적인 폭력의 구조는 비정규직의 양산이나 민영화라는 간접적인 폭력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자기 동료를 먹으며 살을 찌우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신세란 끝없는 경쟁 속에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신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간접적인 구조적 폭력에도 적극적으로 맞서는 비폭력이야말로 새로운 사상을 구현할 희망의 언어인 셈이다.
비폭력, 새로운 사상을 구현할 희망의 언어
그리고 그 비폭력의 언어는 단지 인간의 것으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오체투지순례단의 눈물겨운 발걸음이 절망만 주지 않고 희망도 주는 건 주위의 다른 사물과 생명을 서로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삼배일보와 오체투지는 단지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나 방식만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많은 희망의 언어들을 담고 있다(뉴라이트를 비롯한 케케묵은 집단들이나 정치인들이 80년대 운동권의 방식을 열심히 배워 써먹더라도 결코 베낄 수 없는 건 이런 행동 속에 담긴 마음과 사상이다). 이제 사상은 여러 가지 뜻 깊은 실천 속에 담긴 의미들로 새로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상의 자유는 단지 국가보안법 폐지로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상은 검열이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원래 자유로운 것이다). 사상은 국가보안이나 질서와 같은 기존의 논리를 넘어서 다른 새로운 무엇으로 나가려는 것이자 나와 세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개인의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상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다. 사상이 없는 감정적인 연대는 사회적인 조건이나 분위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언제나 약하다. 하지만 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우리를 세상에 내려앉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사상의 자유라 믿는다. 그것은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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