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살인'이라니 그 이름부터가 섬뜩하다. '세상이 싫다'는 이유로 시청 민원실에서 칼을 휘두르고, '세상이 더러워서' 운동중인 여고생을 흉기로 찌르고, '세상이 나를 무시한다'며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사람들을 칼로 찔렀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낯선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니 그 행위가 놀라울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끔찍한 살인이 처음 벌어진 일은 아니다. 1982년 경남 의령에서는 현직 경찰인 우범곤이 마을주민 56명을 총으로 살해하기도 했고, 1993년에는 지존파 사건이, 1995년에는 막가파 사건이, 2003년에는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이 있었다. 그 때마다 한국사회는 한바탕 뒤집혔고 사회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떠들썩했다.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사회부적응자,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증)라고 부르며 따로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법을 강화시키고 엄격히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끊이지 않고 오히려 반복되어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끔찍한 사건은 더욱더 기괴한 모습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공포를 누적시킬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더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고 이방인을 범죄인처럼 바라보게 될 것이다. 또한 모순되지만 아마도 그럴수록 낯선 이들은 더욱 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 것이다. 공포가 범죄를 부르고 그 범죄가 더 큰 공포와 처벌을 강요하면서 우리 사회는 베트맨 영화의 배경 '고담시'로 변할 것이다.

윤리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얼마 전 중·고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감옥에서 10년을 살더라도 10억 원을 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응답이 17.7%나 나왔다. 남보다 강해질 수 있다면, 남보다 부유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는 욕망이 미래시민의 영혼을 이미 갉아먹고 있다. 그리고 목적만을 좇는 이 강한 욕망은 그것이 좌절되는 순간, 세상과 자신에 대한 '목적 없는' 파괴로 일탈할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기본적인 윤리조차 지켜질 수 없다. 제 아무리 법을 강화시켜도 이미 붕괴하기 시작한 윤리의 기반을 회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관계가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종은 이미 울리기 시작했다. 이웃사촌은 옛말이 됐고, 두레와 계같은 상부상조의 전통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일 뿐이다. 심지어 IMF 이후에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의 장인 가정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살아남기 위해 어떤 행위라도 할 수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는 심각한 사회적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석유자원의 고갈로 인한 에너지 위기,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 위기 등 심각한 사회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따라서 더 줄어든 자원을 놓고 생존경쟁은 더욱더 치열해질 것이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일탈 역시 잦아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지속 가능성'을 얘기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며 사회적 관계를 복원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 미래는 없다.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1995년 일본의 고베 대지진과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덮친 카트리나가 바로 그 사례이다. 엄청난 대재앙이 똑같이 두 지역을 덮쳤는데, 고베는 그 재앙을 순조롭게 극복했고 뉴올리언스는 무질서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 재앙이 덮치는 순간 뉴올리언스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반면에 고베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생활협동조합인 코프고베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이 존재하며 위기를 조절했다.

사람과 사람을 잇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수많은 관계의 다리들만이 우리 미래를 보장한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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