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에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 교사들이 많지만, 가끔 생각나는 선생님도 계십니다. 매번 생각날 때면 한번 찾아뵙는다 하면서도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올해는 가능할까 모르겠네요. 예전에 좋은 교사운동에서 내는 '좋은 교사'에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이라는 코너에 썼던 글입니다.
강제야자에 관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갑자기 생각이 나서 올려 봅니다.
-------------------------------------------------------
지금부터 20여 년 전 부산의 어느 남자고등학교에는 학생들에게 존대말을 쓰시던 산업기술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당시 30대였던 그 남자선생님은 기업에 다니다 학교로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었다. 그 선생님은 그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존대말을 쓰던 거의 유일한 교사였고, 수업준비를 매우 열심히 하셨던 분이었다. 그래서 1학년 때에 그 선생님 수업을 들었던 아이들은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선생님 수업시간의 수업분위기가 조용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일상적인 기합과 폭력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기술수업 시간에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되었을 때에 기술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 되셨다. 우리 반 아이들은 무척 좋아했다. 매와 기합으로 아이들을 다스리지 않는 선생님이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이 직선(直選)으로 뽑게 한 반장을 내가 맡게 되었다.
반장이 된 이후에 나는 선생님의 고민을 다른 아이들보다는 많이 알게 되었다. 담임을 맡지 않았을 때와는 달리, 담임이 된 선생님에게는 학교 측의 주문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신설 사립학교였던 우리 학교의 분위기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야간자습과 보충수업은 당연히 강제사항이었다. 그런데 우리 반은 야간자습시간에 ‘농땡이’치고 도망가는 아이들이 가장 많은 반이었고, 수업시간에 가장 시끄러운 반이었다. 그러니 담임선생님이 학교측으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았을 지는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와 기합에 익숙한 아이들은 내가 보기에도 선생님의 선의(善意)를 나쁘게 이용하는 것 같았다. 자기들을 존중해 주려는 교사를 소위 ‘만만한 선생’으로 보고 행동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언제부터인지 선생님의 손에도 몽둥이가 들렸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투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럴 때면 선생님의 고뇌를 보는 것 같아서 내 마음도 무척 아팠다. 아마 당시에 선생님께 매를 맞았던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선생님의 인간적인 고민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선생님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학교에서는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모의고사를 보았는데, 그날도 야간자습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학년 반장들의 상당수는 모의고사를 본 날까지도 야간자습을 강제로 시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정규수업이 끝나면 2학년 전체가 야간자습을 거부하기로 하였다. 나도 이 음모를 주도한 주모자 중에 하나였다. 그 날 정규수업 종료 벨소리가 울려퍼졌을 때, 2학년 전체의 절반이 넘는 아이들이 가방을 들고 학교 밖으로 달려나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연히 학교는 뒤집어졌고, 주모자들은 학생부 교사에게 소집당했다. 그리고 일부 교사들은 도망친 아이들을 붙잡으려 학교 인근을 뒤지고 다녔다. 어느 정도 소란이 진정되었을 때에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날따라 감정이 격앙된 나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보였고, 선생님께서는 나를 질책하기보다는 내 맘을 이해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어린 너희들이 다칠 수 있으니까,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 데모를 하더라도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간 이후에 선생님께서는 그 경직된 사립학교에서 전교조에 가입하셨다가 해직을 당하셨다. 지금은 복직이 되셨지만, 선생님께서 해직 이후에 어떤 고생을 하셨을 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후 한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하다가, 결혼할 즈음에 아내가 될 사람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 때 뵌 선생님의 머리는 예전과는 달리 완전히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올해 스승의 날에는 꼭 연락드리고 찾아 뵈야겠다(좋은 교사 2005년 4월호).
'풀내음 팀블로그 > 하승수의 "두서없는삶과자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지역 활동가들과 나눈 고민들 (0) | 2008.05.07 |
---|---|
2010년 지방선거와 지역정치참여네트워크 (1) | 2008.04.27 |
미국의 풀뿌리 주민조직화 현황에 관한 짧은 글입니다. (0) | 2008.04.04 |
알린스키와 황주석 (3) | 2008.04.03 |
한국사회 시민운동의 흐름과 제주지역 시민운동의 방향에 관한 단상 : 제주참여환경연대 총회에 앞서 발제한 글입니다. (1) | 2008.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