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재랑((사)관악사회복지 사무국장) 강내영(관악주민연대 정책기획팀장) 정 리: 하승우(운영위원)
1991년 6월 20일 시․도의회 의원선거 실시 이후 12년, 1995년 6월 27일 단체장 선거를 포함해 4대 지방선거가 실시된지 8년이 되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느리다 못해 지겨울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의 눈엔 그 속도의 변화가 빠르기만 하다. 눌려있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기발하고 새로운 욕구들이 분출하고 있다. 그런 변화의 중심에 관악구가 있다. 2002년 6월 13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관악구는 새로운 사고(?)를 쳤다.
(사)관악사회복지의 한재랑씨는 <모색> 3호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관악구를 소개하고 있다.
“관악구는 총 27개동으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4.9%, 인구의 5.5%(약 55만명)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들어 서울 도심부의 주택개량 재개발사업이 본격화되고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재정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대표적인 빈곤지역이다. 따라서 타 지역에 비해 사회복지 관련 시설과 기관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특히, 1970년대부터 빈곤층을 위한 탁아방, 공부방, 어머니학교,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 등 도시빈곤층의 기초생활과 복지의 욕구를 중심으로 주민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관악구의 새로운 실험은 이런 주민운동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실험이길래 이렇게 서론이 길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이번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관악구 시민사회단체는 '관악지방자치연대'라는 연대기구를 만들어서 후보를 지원했고 4명의 후보 중 2명을 당선시켰다. ‘시민후보를 내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이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그건 그렇게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관악지방자치연대는 ‘주민의 힘으로 관악을 바꾸자’라는 6․13지방자치선거 정책자료집을 만들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각각 5개 분야(주민자치, 사회복지, 환경, 교육, 통일)의 정책을 만들었고 그것을 하나의 자료집으로 묶어 냈다. 그리고 그 자료집을 묶어낸 비용과 창립대회 비용은 이런 정책에 동의하는 ‘유권자613인 위원회’의 회비로 충당되었다.
이제 좀 새로운 느낌이 들지 모르겠다. 그래도 양에 차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길...
관악지방자치연대가 제안된 것은 2001년 10월. 관악구에 있는 ‘건강한 도림천을 만드는 주민모임’, ‘관악사회복지’, ‘관악주민연대’, ‘전교조 관악동작지회’, ‘통일세상을 열어가는 관악청년회’가 참가단체로 참여했고(한국청년연합회(KYC) 관악지부는 참가단체이지만 결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노동당 관악을지구당이 참관단체로 활동했다. 준비위원회 7차례 모임을 포함해 총 15차례 대표자회의가 열렸고, 정책개발모임 12차례, 실무자 모임도 6차례 진행되었다고 한다. 4월 26일(서울대 입구역)과 5월 4일(관악산 호수공원) 두차례 정책캠페인을 진행했고, 4월 27일 창립대회, 5월 21일 주민자치후보 약속운동 선포식을 가졌다.
이런 긴 진행과정은 선거를 위해 급조된 모임이 아니라 자치를 고민하던 사람들의 노력을 모은 모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이 연대기구를 제안했던 (사)관악사회복지 한재랑 사무국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한 단체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정책을 내자, 그리고 선거 이후 후보의 당락과 관계없이 그 정책을 제안했던 단체가 그것을 책임지자, 그리고 당선된 후보자들이 그 정책을 실천하도록 계속 모니터하자라는 고민이 있었죠.”
그런 고민과 책임을 모아놓은 것이 6․13지방자치선거 정책자료집이다. 한 권의 자료집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그 속내를 간략히 살펴보자.
1. 주민자치정책: 풀뿌리 민주주의 꽃! 주민들의 참여입니다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정치를 만드는 빨간 신호등! 주민소환제도. •내라 바로 구청장! 지역살림도 나라살림도 ‘주민투표’로 결정하자. •주민자치센터 활성화! 민주주의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주민이 스스로 나서야 합니다! 내 아이들까지 살고 싶은 마을 만들기. •참여예산제 시행! 우리 지역의 알뜰한 살림을 보장하자.
2. 생태환경정책: 환경을 생각하는 관악구! 미래세대의 희망입니다. •관악산을 관통하는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건설 반대! •지역의 쉼터, 아이들의 자연학습장인 관악산 ‘서울생태특별공원’ 지정과 적극적인 관리정책! •도림천을 아이들과 버들치가 함께 뛰노는 자연형 하천으로 만들자!
3. 사회복지정책: 복지는 권리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의 생계와 일자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지방정부의 복지예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도록 제정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 탈락하는 억울한 이웃이 없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는 도시지역 보건지소를 운영해야 합니다. •좋은 보육시설 확대와 공공성 확보를 위해 보육조례를 제정해야 합니다. •신속하고 효과적인 자활사업을 위해 복지행정체계를 정비하고 주민들의 삶에 바탕한 복지 및 자활관련 계획을 수집하며 민간참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참여행정을 펼쳐야 합니다.
4. 교육문화정책: 청소년 문화와 교육을 살려야 합니다. •청소년 문화가 살아있는 관악구! 신림사거리를 청소년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고 문화까페를 설치 운영, 청소년․교육․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청소년 문화제’를 개최합니다. •지역특성에 맞는 교육을 활성화! 방과후 공부방에 지원을 확대하여 교육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지역교육센터 건립, 지역환경 및 역사 등 현장학습프로그램을 활성화합니다. •지역문화 활성화! 주민과 함께 하는 문화축제를 만들기 위해 관악구와 민간단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역문화정책단’을 구성합니다. •관악도서관, 문화관을 주민에게! 주민실정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민들이 도서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5. 통일정책: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관악구 •평양시 대성구역(강남군)과 자매결연! 관악산을 연계한 관광, 특산물 교환, 인도적 지원, 학교간 자매결연과 교환학습 추진. •단일기 달기 운동 전개! 6․15남북공동선언 기념일과 광복절 주간에 태극기와 더불어 단일기 달기 운동을 전개합니다.
이상이 관악지방자치연대가 만든 무시무시한(?) 지역정책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고민의 진지함이 숨을 막히게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그냥 대단할 뿐이다.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 과정은 순탄했을까? 같은 지역에 있지만 개별적으로 활동해 왔던 단체들이 같은 이름을 내걸고 일을 하자면 나름대로 갈등도 있었을 것 같다. 한재랑씨는 이런 어려운 질문에도 선뜻 대답을 해 주었다.
“선거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정책의 의미에 대한 관점은 각 조직의 위상에 따라 달랐어요. 중앙단체라서 지역정책을 내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고 정책을 단순히 도구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죠. 그러다보니 약속운동에 참여한 후보를 지원하는 틀도 애매모호했죠. 지방자치연대가 직접 후보를 내고 당선시키는 것과 정책을 약속하는 후보를 지원하는 작업이 섞여 있다보니 적절히 지원이 안 된 것 같아요.”
‘약속운동’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나왔다. 무엇일까? 그것은 지방자치연대에서 마련한 정책을 후보들이 성실히 지킬 것을 약속하는 것이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활동원칙: 나는 주민에 의한 참된 지방자치 실현이라는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당락에 관계없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관악주민의 목소리를 올곧게 대변하고자 하는 관악지방자치연대 등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우선적으로 활동에 반영한다.
2. 활동의 기본방향: 나는 주민참여의 제도화와 직접 민주주의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는 등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 실현을 활동의 기본방향으로 하며, 관악지방자치연대가 제시한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3. 선거운동: 나는 돈 안쓰는 선거, 올바른 정책이 경쟁하는 선거,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선거를 만들기 위해 선거법을 가장 모범적으로 지키는 것은 물론, 선거비용을 주민 앞에 공개하는 등 맑고 투명한 선거운동, 주민이 주인되는 선거운동을 펼친다.
4. 의정 활동: 나는 당선 후 의정활동을 수행함에 있어 주민들과 약속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의정활동을 펼친다. 나아가 관악지방자치연대 등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정례 협의해 공동의 지역과제와 정책을 개발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연 1회 이상 의정보고회를 개최해 주민들에게 의정활동을 보고한다.
실제로 후보들은 5월 21일 관악구 구민회관에서 약속운동 선포식을 가졌다.
주민들은 이런 새로운 실험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월드컵 또는 대통령 아들들 때문에 무관심하지 않았을까?
“주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좋았어요. 4월 26일 서울대 입구역에서 진행한 정책캠페인에서는 주민들이 줄을 서서 참여했어요.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주민들이 의견을 밝힐 틀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기회가 마련되면 의견을 표시하고 제안하는데. 그래서 일상적인 정책캠페인이 중요할 것 같아요.”
실제로 관악구의 주민 300명 가량이 ‘유권자 613인 위원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모금으로 선포식과 정책자료집을 준비했다. 이런 뜨거운 관심과 참여는 관악구를 일구는 새로운 힘이 될 것이다. 자연히 관악지방자치연대도 이런 관심과 참여를 받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지방선거에 만족하기보다 일상 속에 뿌리내릴 수 있는 틀을 만들자라는 평가가 나왔어요. 그래서 상설기구를 만들거나 포럼을 구성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어요.”
몇 년 전부터 일본 <가나가와 네트워크>의 ‘대리인 운동’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관악구의 실험은 이 운동과 많은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일본의 대리인 운동이 생활클럽 생협이라는 한 단체에서 진행되었다면, 관악지방자치연대는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 모여서 선거를 준비하고 후보들과 관계를 맺었다. 외국의 경험과 한국의 경험을 접목해서 독창적인 실험을 진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독창성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언제부턴가 소위 ‘시민후보’라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오고 있다. 시민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너도 나도 다 시민을 위해 일하겠다니 대한민국 만세다.
그런데 시민을 위하려면 꼭 선거를 나와서 당선되어야 하는 걸까? 꼭 자기가 후보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조폭들도 “친구야, 니 뒤에 내가 있다”며 눈물겨운 우정을 보이는데, 꼭 자기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걸까? 그냥 묵묵히 자기 영역을 지키며 일하는 것이 더 시민을 위하는 길이 아닐까? 물론 지역의 발전을 위해 직접 뛰어들고픈 욕심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욕심이 큰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그런 길을 걸어야 한다면 누가 발이 되어 지역을 뛰어다닐까? 독수리 오형제가 지킬까? 선거에 나오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지원하고 감시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래서 관악지방자치연대처럼 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가치가 더 돋보이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시민후보’라는 말이 내키지 않는다. 후보가 시민후보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것은 선거에서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의 ‘시민성’을 검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동안의 활동경력이 아니라 그가 지금부터 지역에서 실현하려 하는 구체적인 정책과 실천이다. 뛰어난 누구 한 사람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길 기대하는 것은 수동적인 시민을 전제한다. ‘시민후보’임을 백 번 강조하는 것보다 ‘시민정책’을 공약(空約이 아니라 公約이다)으로 내걸고 시민들이 그 과정을 감시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올바르다. 그래서 관악지방자치연대의 실험은 소중하다.
관악지방자치연대와 별도로 관악주민연대에서는 ‘관악구 구의원후보 토론잔치’라는 행사를 마련했다(관악지방자치연대와 합의없이 진행된 문제점이 있다). 보통 구의원후보들의 정책은 잘 논의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구의원이 지역과 제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정책의 중요성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의원 후보들을 위한 토론잔치를 마련했다 한다. 여건상 관악구 전체에서 진행하지 못하고 일단 봉천 11동과 신림 10동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토론회가 아니라 토론잔치라는 명칭을 쓴 이유는 뭘까? 강내영씨는 “마을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토론회보다는 잔치라는 형태가 더 적절할 것 같았다”고 얘기한다. 실제로 구의원후보들이 풍물패와 함께 시장을 돌며 토론잔치를 홍보했고 함께 손을 잡고 인사했다고 한다. 한 동네에 80~100명의 주민이 참여했다고 한다. 관악구 동규모가 큰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많은 참여이다.
후보들 사이에 갈등은 없었을까? “사전에 사무장회의를 진행해서 사전조율을 하고 과정을 공유했어요. 질문이나 진행방식도 합의해서 진행했죠. 놀라운 일도 있었어요. 봉천 11동의 경우 사무장회의에서 이동 중에 로고송을 틀지 않기로 자율적으로 합의했어요. 저희는 개입하지 않았는데. 토론진행과정도 공격이 아니라 때론 칭찬이나 감사도 하고, 분위기가 좋았죠.”
얘기를 듣고 있으니 참 새로운 시도인 것 같다. “이후에는 동네 주민들이 주도해서 혹은 주민자치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기존에 진행되던 합동유세나 선관위와 특별한 문제가 없고 잔치의 기운을 선거 이후에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좋은 시도일 것 같다.
그리고 관악구의 시민사회단체는 지방선거라는 당면사안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을 중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관악사회복지는 신림 6동과 10동에 거주하는 가난한 이웃들의 생활실태와 필요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3월 26일부터 4월 27일까지 한달 동안 23명의 자원봉사자들과 일일이 가정을 방문하는(총 192가정) ‘빈곤가정 지역사회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욕구조사’를 진행했다.
아마도 관악산의 정기가 활동가들에게 힘을 주는 것 같다. 그 정기를 갉아먹는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는 꼭 막아야 할 것 같다. 더불어 북한산도 꼭 지키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