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송영석(기획실장) 작 성 : 김현(상근 운영위원)
영국의 과학 다큐멘터리 PD로 활동했던 제임스 버크는 “우주가 바뀌던 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라는 책을 통해 의사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계급적 관계를 역사적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삶이 점점 더 의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수록 질병에서부터 감염, 생활조건, 정상에서의 일탈, 직업에 필요한 자격조건, 범죄에 이르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에 의학적 측면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이 심화되면서, 의학적 문제들은 의사들만이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 되었고, 따라서 의사는 국가의 권위를 더욱더 대표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20세기 들어 환자의 몸은 점점 비인격적인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환자는 이제 수동적인 존재로 떨어졌으며, 신체는 수와 통계 분석의 대상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더욱이 의학은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로 다가가면서 환자의 요구에 따라 치료를 하던 관행도 사라졌으며,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유기체를 규명해 내기 위한 노력이 집중적으로 행해지면서 그에 따라 환자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아무런 개인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도 어쩌면 이런 역사적 맥락을 고스란히 밟고 있는지 모른다. 의사들의 처방에 따라 환자들은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환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의약분업의 광풍을 보면서, ‘의사들만의 리그’에 환자들은 ‘들러리’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상식의 차원에서, 몸이 성하지 않는 사람을 돌봐주고 치료해주는 분야가 의학이라고 한다면 그 주체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여야 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의학은 의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을 위해 존재해야 마땅하다. 이런 상식의 차원에서 보건의료를 접근하는 이들이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개인의 건강을 넘어 건강한 지역사회를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의료생협은 건강한 삶을 위하여 지역주민 스스로가 자신의 생활과 지역사회의 모든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만든 주민자치 조직체입니다......조합원과 의료전문가가 힘을 합하여 자신 및 가족, 지역사회의 겅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건예방활동을 추진하는 주민의 자율적 협동조직체입니다.”
위는 ‘인천평화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인천의료생협’)에서 만든 홍보물의 일부이다. 명확하게 의료생협이 주민자치를 위한 조직체임을 밝히고 있다. 작년 초, 시민자치정책센터 월례포럼에서 의료생협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주민자치운동의 영역에서도 보건의료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터였다. 그 후 의료생협의 수가 늘어 서울, 원주, 대전 등에서 꽃을 피움으로써 준비하는 지역을 포함, 아홉 군데에 달하고 있다.
‘인천의료생협’은 1989년 만들어진 기독청년의료인회로부터 출발한다. ‘평화의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인천, 부평 지역에서 각종 산업 재해 및 직업병 상담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건강문제가 산업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강조하는 활동을 주로 해오다, 1996년 11월, 현재의 ‘인천의료생협’으로 태어나게 된다. 현재 조합원 수는 1,000여 명 정도이다. 양방의 2명, 한방의 1명을 포함 전체 직원이 15명이다. 연 매출액이 5억 원 정도라고 하니, 운동단체로 판단하면 재정은 꽤 넉넉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송영석 기획실장도 의료생협운동을 자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의료생협이라는 것이 의료진들이 만든 의료운동이 아니고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는 소비자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비자운동 차원에서 직접 그 분들이 출자를 하고 만든 과정에 참여를 하고 만들어진 후 운영에 참여를 하고, 스스로 자신이 만든 것을 운영을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 분들이 참여하는 구조를 열어놔야 한다고 봅니다. 원래는 일본 같은 경우는 반 모임이라고 해서 지역 세포 모임이 있구요, 그 모임을 통해 대의원 구조도 갖고 있고, 지부구조도 갖고 있어서 의견들을 수렴하고 의견을 조합 사업에 전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이라는 것은 건강을 주제로 몇 분이 모여 지역에서 같은 분들이 일정한 활동을 하는 모임이죠. 이를테면 반상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희의 경우는 반 모임이 잘 안되더군요. 시간적으로나 생활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좋은 의료상품을 선택하거나 또는 직접 참여함으로써 소비자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운동이 의료생협이다. 소비자들의 참여가 없으면 존재 근거도 없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인천의료생협’에는 여러 소모임이 있다. 우선, 자원봉사활동을 전개하는 ‘무지개 모임’이 있다. 보통 지역 내의 자원봉사자들의 흐름은 자원봉사센터라는 것을 매개로 사람을 모아서 필요한 곳에 배치를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무지개 모임’은 지역 내의 어려운 분들을 스스로 발굴하고 돕는, 지역의 자족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단위에서 스스로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고, 보건의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라도 지역봉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희망엄마 모임’은 이름에서 풍기듯이, 아이들의 교육문제, 건강문제를 중심으로 서로 교류하는 모임이다. ‘체조교실’은 소모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모임인데, 주로 어르신들이 중심이 되어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나아가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문화적 공간으로 활용된다. 6, 7년간 진행되면서 가장 탄탄한 모임으로 성장했다. 그밖에 ‘요가모임’, ‘발마사지 모임’, ‘일본어 모임’ 등의 작은 모임들이 활동 중이다.
아무래도 조합원이 중심이 된 각종 소모임 활동이 주가 되지만,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도 관심의 대상이다. 올해 4회 째를 맞고 있는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가 바로 그것인데, 조합원을 비롯한 주민들이 공동으로 지역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의료생협이 지역에 천착을 하기 위해서는 지역주민과 만남의 장이 있어야 됩니다. 기존의 마을 축제라는 것이 관 주도의 행사였고, 이런 부분을 바꿔 보자는 차원에서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라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 부녀회’를 포함해 흔히 관 조직, 또는 자생단체라고 불리는 여러 단체들과 공동으로 진행했는데, 처음 하는 행사라서 잡음이 많았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역에서의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그 동네의 갈등이 심하잖아요. 그런 부분들을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파에 상관없이 모아서,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고, 각 단체마다 일정하게 역할을 나눠서 했습니다. 찬조금으로 모아진 돈을 전액 불우이웃 돕기에 다 썼고, 밥값도 각자 해결하고, 뒤풀이도 없앴습니다. 처음에는 섭섭하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돈과 관련된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니까 이 행사를 바라보는 이들의 생각도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3회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던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 프로그램이 작년, 4회 째를 맞으면서 약간 주춤하게 된다.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가 어느 정도 지역사회에 알려지자 부평구에서 부개동으로 “한마음 축제”라는 명목으로 예산을 지원하게 되었다. 인천의료생협은 고민 끝에, 어차피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 프로그램이 인천의료생협만의 성과가 아니라 주민들이 가져가야 할 성과라면,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 “한마음 축제”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기존 관에서 주관하는 행사의 풍경과 다를 바 없이 내용 없는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산만 잔뜩 쏟아 부었을 뿐, 주민자치라는 관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한마음 축제”를 접고,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 행사를 조합원 중심으로 다시 준비할 계획이다.
“”한마음 축제“는 일반적으로 하는 마을 축제 형식으로 진행되다 보니까,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측면이 있었죠. 참여는 안 되고 동원만 되는 그런 상황이었죠. 기왕 진행되어 왔던 것들이 잘 이어져야 한다는 측면도 있고, 일신동과 부개동이 붙어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엮어서 모범적인 축제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 가을 정도에 마을만들기 행사를 다시 할 예정입니다.”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 행사는 예산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YMCA’나 ‘녹색소비자연대’ 등의 지역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참여하는 단체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나눔으로써 공동경비는 거의 없는 셈이다. 인천의료생협에서 부담하는 예산은 한 60만원 정도라고 하니, 주민들의 참여가 전체 예산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송실장의 설명이다. 행사는 단 하루가 진행된다. 지역의 여건 상 여러 날을 하기엔 무리가 있는 듯 하다. 초등학교 급식후원회에서 담당하는 바자회, 인천의료생협에서 하는 장애우 체험, 부녀회 중심의 아나바다, 지역의 태권도 학원에서 주관하는 태권도 시범, 그 외 줄다리기, 대동놀이, 풍물 등 지역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큼 시끌벅적 하진 않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참여를 해본다는 경험 자체가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의료생협의 입장을 본다면, 의료생협이 마을을 위해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주민들로부터 정서적 동질성을 느끼게 하는 측면이 있구요, 마을 축제가 함께 힘을 모아 조금씩 나누면 재미있는 마을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나바다의 경우처럼 마음만 먹으면 작은 일이라도 실제로 참여할 수 있다는 인식을 넓혔다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소소한 행사지만 지역을 위해 작은 봉사라도 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안성 의료생협 처음 생길 때, 주민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던 고충을 생각하면 인천의료생협은 많이 나은 편이다. 평화의료원에서부터 주민들을 만났으니,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주민들은 없었다. 그저 좋은 일 많이 하는 병원 정도의 인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바라보면서 의사들이 모든 일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에 의해 움직이는 병원이라는 인식을 넓히게 되고, 지금은 조합원으로 참여함으로써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화를 가져왔다고 송실장은 설명한다.
실제도 인천의료생협은 최대한 조합원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결정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조합 운영에 있어 이사회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역이사가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이사란 지역에서 나름대로 비중을 갖고 활동하시는 분들, 오래 사신 분 등 신뢰를 갖고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분들이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 지역이사의 비율을 더 높일 예정이다. 경영이나 이용에 관련된 위원회, 교육이나 홍보를 위한 위원회, 그리고 보건예방 관련된 활동을 하는 위원회 등 3개의 위원회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각 월 1회의 회의를 가진다. 이사회도 이와 비슷한 간격으로 회의를 가진다.
인천의료생협의 궁극적인 활동의 목적은 민주적 보건의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참여’와 ‘협력’을 통한 마을만들기에 있다. 그것이 생태마을이 될 수도 있고, 자치마을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이 지역의 특성이 잘 반영된 마을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그런 과정에 인천의료생협은 노인과 아동의 건강, 나아가 건강한 지역사회를 위해 일정하게 기여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소모임,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와 같은 공동체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려운 측면도 많이 있습니다. 마을 만들기 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고민이 마을에서 누가 움직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참여할 수 있는 분들이 주부잖아요. 경제활동을 공간 내에서 같이 하는 농촌이라면 남성들도 같이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부들이 대부분이고 이들의 참여가 관건이라고 보는데, 상대적으로 주부들의 참여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죠. 계속 참여의 동기를 주지 않으면 참여하기가 어려운 부류죠. 그러다보니까 노인 참여를 관심 있게 봅니다. 시간도 많고 참여율도 높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지죠. 아무튼 조합원들은 젊은 사람들이 많긴 한데, 상대적으로 참여율이 저조한 편입니다. 아무튼, 주부, 노인, 그리고 젊은 층의 참여를 이끌어내려 합니다.”
인천의료생협은 경험을 통해 지역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주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주부들과 노인, 그리고 젊은이들. 보건의료를 매개로 이들과 함께 주민자치의 실현, 바로 인천의료생협이 추구하는 운동의 방향이다.
※ 인천의료생협 홈페이지는 http://medcoop.x-y.net/inchon/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