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자치 연습, <책이랑 놀자>"
-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작성 : 하승우(운영위원)

가을을 채 느끼지도 못했는데 벌써 몸이 으슬으슬 떨려 온다. 유난히도 올해엔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겨울이 오면 제일 심심해지는 것은 아이들이다. 어른들이야 직장과 가정을 왔다갔다하는 일상을 반복하지만, 아이들은 ‘거리’라고 하는 놀이터를 잠시 비워줘야 한다. 여유있는 사람들이야 스키장이다 뭐다 해서 일상을 벗어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겨울은 열기를 느낄 수 없는 계절이다. 움츠려들기 쉽기에 내 한몸 신경쓰느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잃어버리기 쉬운 계절, 겨울이다.

그런 겨울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씻어줄 반가운 소식이 왔다. 항상 뭔가 특별함을 주는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이하 녹색삶)’에서 날라온 초대장이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부푼 기대감으로 초대장을 펴자 마을 골목에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 <책이랑 놀자>가 문을 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아이들은 언제든지 찾아와 실컷 책을 읽고, 친구들과 어울려 궁금한 것도 찾아보고, 독서지도를 도와주실 자원교사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신나는 독후활동도 해보고… 또 부모님과 이웃어른들께서 틈나시는 대로 들러 편안하게 책도 읽어주시고, 옛날 이야기와 함께 어릴 적 경험도 얘기해 주시고”

뉴스레터 준비 24호에 [지역운동탐방기]를 시작하며 그 첫 번째로 ‘녹색삶’을 소개했었다. 그 글에서 얘기했지만 ‘녹색삶’의 특징은 지역운동에서 아이들과 지역, 학교를 잇는 삼각 네트워크를 잘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문을 연 어린이 도서관 역시 <열린 숙제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준비되었다.

개소식이 있었던 2002년 10월 31일(목) 오후 부푼 마음으로 도서관을 향했다. 골목 어귀를 돌아서니 땅에 화살표가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만들었음직한 아기자기한 화살표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구불구불 돌아서자 풍선으로 만든 아치와 두 아이가 보였다. 아이들은 함박웃음으로 환영하며 이런 안내장을 주었다.

“우리 자라나는 꿈나무들이
● 유해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보호받으며 또래와 어울려 행복한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 가족, 친구, 이웃과 더불어 밝고 원만한 심성을 기르며 함께 사는 삶을 배울 수 있기를,
● 마음껏 좋은 책을 읽고 다양한 문화활동을 경험하며, 풍부한 상상력과 꿈을 키워갈 수 있기를,
●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며,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자율적인 학습 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기를 수 있기를...”

도서관은 <열린 공부방>의 한 켠을 차지하는 작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공간은 그 물리적인 규모보다 훨씬 더 큰 아이들의 꿈을 품고 있기에 결코 작지 않았다. 개소식에는 강북구 부구청장님이 참석해서 지역에서 녹색삶에 가지고 있는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책이랑 놀자>를 만들기 위해 여러 단체들이 힘을 모았다. 책을 소개하는 코너로 유명한 MBC 프로그램 '느낌표‘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도서관을 채울 책을 기증했다. 서울지역 10곳을 지원하는데 녹색삶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지난호 뉴스레터(준비 39호)에서 이현희 서울지역공부방연합회(이하 서공연) 사무국장님이 말씀하셨듯 어린이 공부방은 단순히 학습을 지도하는 공간이 아니라 “특별활동, 자치회 활동, 생활 지도, 상담 등을 통해서 아이들 개인에 대한 문제, 나아가 가정과 지역 그리고 사회문제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문제 현실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폭넓은 교육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마련된 <책이랑 놀자>의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책이랑 놀자>는 어떻게 운영될까? 녹색삶의 공동대표이신 정외영 선생님은 “따로 사서를 두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관리․운영할 겁니다. 이번에 책에다 일일이 도장을 찍은 친구가 있었는데, 원래 이 애가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책에 도장을 찍다 보니깐 글자에 관심이 생겨서 물어보는 거예요. 얼마나 기쁘던지. 이번에 개소식을 준비하는 것도 아이들 손에 맡겼어요. 앞으로 도서관을 관리하는 것 역시 아이들 손에 맡길 생각이예요. 그러면 아이들이 도서관에 애정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책에 관심을 가질 것 같아요.”

책을 읽는 것은 죽은 문자를 주워담는게 아니다. 책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보고 다른 세상을 꿈꾼다. 자기들만의 작은 세상을 스스로의 힘으로 관리하고 가꾸면서 자치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체화될 것이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치, 그 싹이 <책이랑 놀자> 속에 숨어 있다.

녹색삶은 어린이 도서관에 머물지 않고 마을문고로 관심을 확대할 예정이라 한다. 마을문고라는 것이 있지만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녹색삶은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 분들과 여러 회원들의 힘을 모아 유명무실화된 마을문고를 튼튼하게 만들 것이라 한다.

녹색삶에는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또 하나 있다. 녹색삶의 회원들이 자체적으로 꾸려온 주부환경극단 <만년대계>는 이제 지역의 자랑거리이다. 11월 20일(수)에는 쌍문초등학교 3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쌍문1동 주민자치센터 강당에서 10시, 11시 2회 공연을 가진다. 다음날인 21일(목)에는 번동초등학생 1/2/3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역시 2회 공연을, 11월 27, 28일에는 우이초등학교와 다른 학교를 대상으로 공연을 가진다. 어머니들이 직접 쓰고 몸으로 보여주는 연극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녹색과 생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치의 가장 기본적인 힘이 ‘자신감’이라고 한다면, 강북구에서는 어머니들과 아이들 모두가 그 힘을 가지고 키워가고 있다. 그렇기에 녹색삶의 미래는 밝다.
(2003년 시민자치정책센터 하승우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