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귀에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가 익숙하다. 하지만 브라질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자치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소가 차를 가로막고 종교적인 차이 때문에 도끼 들고 설치는 나라, 카스트라는 야만적인 신분제도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는 나라에서 류시화라는 한 인물이 철학과 명상의 나라로 인식을 바꾼 인도, 이제 그 속에서 ‘자치’라는 새로운 인식의 싹을, 로드맵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보자.
인도는 한편으로 뿌리깊은 의회주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계급적․신분적 차별의 역사를 가진 불평등의 나라이다. 게다가 한국처럼 관료들이 독자적인 하나의 사회계층을 형성하면서 중요한 자원을 국가가 독점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 1996년 케랄라 주에서 좌파민주전선이 집권하면서 중요한 자치실험이 시작된다. 이 실험이 바로 “지방분권적인 계획입안을 위한 대중 캠페인”(이후 캠페인)이다.
캠페인은 단순히 밑단위로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지방정부를 밑에서부터 강화하고, 실험과정에서 부딪치게 될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인 장치들(마을 단위의 회의와 개발 세미나, 임무수행팀 등)을 만들었으며, 이 제도들은 참가자들의 이성적인 토론에 바탕을 두고 프로젝트 선택과 구성을 실질적인 실행과 연계시켰다(자세한 내용은 자료실에 있는 번역글을 참고하길).
보통 먼저 행정적인 지원구조들을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재정 자원을 지방으로 넘기지만, 인도 케랄라 주정부는 이 방식을 뒤집었다. 즉 먼저 재정자원을 지방으로 이전한 다음 지방의 제도들을 구성했다. 그래서 지방정부가 예산을 재량껏 운영해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지역 정치가나 관료들의 개입을 막았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와 인도 케랄라의 캠페인은 몇 가지 비슷한 특성을 가진다.
첫째, 주민참여를 유도하는 핵심적인 방법으로 예산을 이용했다. 예산은 주민들의 삶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기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참여동기를 제공한다. 중립적인 공무원이 주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생각은 이미 착각임이 증명되었다.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 직접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드러내고 서로 갈등하고 조절하면서 참여를 활성화하고 있다.
둘째, 참여예산제와 캠페인은 주민들의 삶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부분에서 향상시켰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는 수도/하수처리시설비율, 도로포장비율을 높였고 주택과 공공자치학교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케랄라의 캠페인 또한 주택과 위생변소, 우물, 수도 공급 등에서 인상깊은 성과들을 낳았다. 이것은 참여가 주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구체적인 성과가 참여를 더욱더 촉진하는 ‘긍정의 순환고리’를 만든다.
셋째, 이 실험들은 그동안 배제되고 주변화되었던 사람들을 참여의 주체로 만들었다. 즉 전에는 지역사회에 참여할 수 없었던 여성,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빈민, 노동자들의 참여율을 높였다. 그리고 그런 참여를 통해 이 사람들이 이전에 가지지 못했던 자신들의 가치와 존엄을 인식하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도록 도왔다. 이것은 시민사회를 실질적으로 강화시킨다.
넷째, 주민참여에 의한 직접민주주의가 복잡한 현대사회에도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즉 구체적인 권한이 주어지고 참여가 활성화되면 직접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점차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시행착오는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역의 고유한 민주주의 방식(민주주의 이념이 아니다!)을 찾도록 돕는다.
다섯째, 실험의 구체적인 청사진은 미리 제시될 수 없다. 청사진이 없다는 사실은 불안보다 ‘실행에 의한 학습(learning-by-doing)’을 가져왔다. 참여예산제와 캠페인은 위에서 제시하는 계획이 아니라 위와 아래의 지속적이고 활발한 피드백과 세심한 조절이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역동적인 네트워크로부터, 사회운동의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논리가 제도를 구성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여섯째, 진보적인 정당이 권력을 잡아야 할 뿐 아니라 권력을 잡음과 동시에 진보적인 실험을 진행해야 한다. 브라질 노동자당(PT)이 포르투 알레그레 주정부를, 좌파민주전선이 인도 케랄라 주정부를 장악함으로써 새로운 자치실험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볼 때 권력은 부정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결과를 생성할 수 있다. 이것은 정치에 대한 냉소적인 반응을 사라지게 한다. 다만 그 정당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프로그램을 위로부터 진행하는 게 아니라 아래로부터 생성적인 힘을 모으도록 집권과 동시에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와 케랄라의 캠페인은 공통점만이 아니라 차이점도 가진다.
첫째, 케랄라의 캠페인은 주민들의 참여를 위해 기존 단체들을 활용할 뿐 아니라 새로운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었다. 참여예산제가 시민단체의 결성과 대중평의회(Popular Councils)의 활성화 같은 ‘운동의 방식’을 강조했다면, 캠페인은 훈련 프로그램과 개발 세미나같은 새로운 ‘제도적 장치들’을 강조했다. 캠페인은 투명성과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각각의 목표, 핵심활동과 연계된 정교한 훈련프로그램을 강조했다. 좀 길지만 인용하면, “첫해에 주와 구역, 지역 단위에서 7차례의 훈련 라운드를 통해 약 5천명의 선출직 의원과 2만 5천명의 공무원, 2만 7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훈련을 받았다. 6백 명에 달하는 주 단위 훈련을 받은 사람들핵심적인 인적 자원이라 부르는은 거의 20일간의 훈련을 받았다. 약 1만 2천명의 구역단위 훈련을 받은 사람들구역의 인적 자원은 십일간의 훈련을 받았고 지역단위에서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약 5일간의 훈련을 받았다. 모든 선출직 의원들은 한 단위나 다른 단위에서의 훈련프로그램에 참가했으리라 기대되었다. 각 훈련 라운드는 특정한 계획입안활동들에 초점을 맞췄다. 각각 약 4천 페이지에 달하는 핸드북과 가이드가 각 라운드를 위해 준비되고 배포되었다.” 이런 대규모 훈련프로그램이 캠페인 과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둘째, 참여예산제가 예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소극적인 형태라면, 캠페인은 예산에 따른 프로젝트의 계획과 실행, 평가를 직접 담당하는 능동적인 형태를 띤다. 물론 참여예산제도 우선순위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진행과정의 규칙을 정하고 여러 가지 의제를 설정하는 새로운 포럼으로 논의를 확장한다. 케랄라의 캠페인 역시 그라마 삽하(grama sabha)라 불리는 지역회의에서 개발 우선순위를 토론하고 결정한다. 그런데 캠페인은 예산순위나 규칙, 새로운 의제설정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프로젝트의 예산배정과 실행, 평가까지 시민들이 담당하도록 했다. 즉 시민들이 더 세부적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디자인했다.
셋째, 캠페인은 인도의 유동적인 정치환경에서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틀을 마련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그 과정에서 케랄라주의 계획입안국(the Kerala State Planning Board)은 캠페인의 구상, 디자인, 실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계획입안국은 캠페인 진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지침들을 만들었고, 이 지침은 지시나 명령의 형태가 아니라 구역에서 지역단체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와 인도의 케랄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자치실험들의 특징을 살펴봤다. 이제 우리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착각 하나를 지적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건강한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강화시킨다’는 상식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런데 그 ‘건강함’의 기준은 뭘까? 보통 그 건강함은 소득수준이나 교육수준이 높고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안정된 정당체계로 평가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런 논리는 미국식 정치발전 모델이 제3세계에 강요하는, 제3세계의 사람들을 스스로 작아지게끔 만들려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부시가 날뛰도록 내버려두는 미국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시민사회가 브라질이나 인도보다 건강함을 증명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스카치폴(Skocpol)과 피오리나(Fiorina)는 질서와 안정이 아니라 갈등이 민주적인 능력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즉 갈등하는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시민들의 적극적인 행동과 시민단체들의 확산이 민주주의를 강화시킨다. 인도의 역사, 즉 엄격한 카스트제도, 심각한 토지불평등과 노동억압이라는 역사를 가진 인도 사회에서 활기차고 효율적인 자치실험이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을 증명한다. 결국 갈등이 심한 곳에서 자치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역주의와 기형적인 경제구조, 그에 따른 노동과 자본의 대립, 불안정한 정당체계를 가진 한국에서도 자치실험이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으로 될 수 있다. 대통령 한 명 바꿨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내부에서의 결단’이 아니라 ‘과감하고 투명한 분권과 자치’만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 활기차고 효율적인 민주주의는 갈등과 사회적 동원의 역사를 통해 나타날 수 있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운동과 제도를 잇는 연결고리는 바로 ‘교육과 훈련’이다. 그런 대규모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인도 케랄라에서도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지역의 시민단체들에게 나눠주기식 프로젝트를 공모하는 게 아니라 자기 지역의 예산을 분석하는 방법과 과정을 훈련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어떨까? 그런 프로젝트는 설사 관변단체들이 진행한다해도 긍정적인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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