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현재 일본에서 박사 논문을 거의 완료한 박희숙씨의 글입니다. 이 분은 이음의 전신인 시민자치정책센터 정챙위원으로 일하셨고, 석사 논문이 일본의 가나가와 네트워크와 동경생활자 네트워크 등을 분석한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가나가와 네트워크에 대한 정보도 실상은 몇 번의 방문과 관계자와의 대담 등 피상적인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지에서 관련 조직을 장기간 심층조사한 내용을 통해 분석한 자료를 접하는 것은 귀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생활정치의 확대와 장애요인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사례-
박희숙 (동경대학대학원 사회학 박사과정)
park.heesook@gmail.com
출전: 소시오로고스 편집위원회, “소시오로고스 29호” 2005년
개인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정치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정치를 생활정치라 한다면, 생활클럽생협을 모체로 한 ‘지역네트워크운동’은 생활정치를 실천하는 운동이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이 대리인운동으로부터 로칼파티(지역정당)으로, 나아가 전국정당을 지향하는 운동의 전개과정은 생활정치의 확대와 장애요인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은 1990년대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전국정당 설립에 주목하여 그 시도와 좌절의 과정을 분석한다. 그 결과, 첫째, 생활정치가 여성의 정치로 축소되었고, 둘째, 정치참여가 개인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단절되어 전개되었으며, 셋째, 생활정치의 조직적 형태인 네트워크형조직이 경직됨으로써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생활정치의 이념이 전국정당 설립의 과정에서 힘을 발휘되지 못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
1.들어가며
이 논문의 대상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이다. ‘지역네트워크운동’[1]은 1980년대에 생활클럽생협을 모체로 탄생한 여성중심의 정치네트워크조직이다. 1970년대후반 지방의회에 의원을 보내는 ‘대리인운동’에서 출발하여 의원의 로테이션(임기를 2기로 제한), 의원보수의 공동관리등을 특징으로 하는 로칼 파티이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활클럽생협’[2]이나 ‘대리인운동’[3]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생활클럽’은 1965년 동경도세타가야구에서 설립되어, 1968년 ‘생활클럽생협’으로 조직개편한다. 생활클럽생협은 ‘소비생활의 장으로부터 현대자본주의사회에 문제제기하여, 자신의 생활방식, 일하는 방식을 동료들과 함께 바꾸어나가는 주부를 중심으로 한 생활협동조합운동’(사토 요시유키 편저 1988:5-6)이다. 대리인운동은 생활클럽생협의 대리인(대표)를 정치적 의사결정의 장에 보내는 운동이다. 1977년 동경도의회선거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나 당선되지 못하고, 1979년 동경도네리마구의회 선거에서 의원이 처음으로 당선한다. 1983년에는 치바현, 사이타마현등 생활클럽생협이 있는 도도부현으로 확대된다[4]. 현재는 9개의 도도부현에 150명이상의 여성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대리인운동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운동주체가 ‘평범한 주부(일본어로 하면 보통의 주부)’라는 점에서 주목을 모았다(야자와∙쿠니히로∙이토우1992, 쿠니히로1993, 쿠니히로 2001). ‘평범한 주부’란 노동자, 조직활동가, 좌익운동가, 직업적 정치가, 남성에 대립하는 새로운 정치의 주체로서 ‘생활자∙시민’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주부’의 속성은 쿠니히로 요오코(1993)가 지적한 것처럼 ‘도시중산층의 고학력 전업주부 혹은 겸업주부’였다. 대리인운동에서 ‘평범한 주부’나 ‘생활자’는 운동의 의의이기도 하지만 운동의 한계로도 지적되었다(와타나베 1991, 1995a;쿠니히로 1993). 아마노 마사코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생활자의 개념은 ‘남녀의 성차를 희석화하면서 성에 의한 사회적 차별의 제도화를 (정치적) 주제로 할 계기를 배제했다(아마노마사코 1995:61)’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이나 지방자치에 있어서 대리인운동이 가진 의의는 적지 않다. 대리인운동은 사회운동∙시민운동과 의회활동을 병행하는 ‘운동정당’(후지이 1996)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한편, 대리인운동의 본래의 의의는 의회제민주주의를 시민참여에 의해 활성화하는 것이었으나 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의회활동과 시민활동과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활동의 중심이 의회에 이동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대리인운동은 ‘대리인’ 개념에서 상징되듯이, ‘강제적 위임’(후지이 1996)을 요구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1997년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대리인’ 개념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상당수의 대리인이 당선된 후 조직으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을 보았을 때, 강제적 위임의 원리가 얼마나 기능하고 있는지는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일본의 선행연구는 대리인운동을 전면적으로 여성의 운동으로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대리인운동이나 로칼파티는 생협의 남성 리더의 발상이며 운동의 전개과정에서도 그들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대리인 운동은 정치 참여의 영역을 지방정치에 국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국정와 연동하면서 로칼파티를 형성해왔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2절에서 대리인운동이 로칼파티로 확대해가는 과정을 검토하여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생활정치의 성과와 과제를 명확히 한다. 3절에서는 지역네트워크운동의 국정진출 과정속에서의 생활정치와 정당정치와의 대립을 분석한다. 4절에서는 2절과 3절의 분석결과를 기반으로 하여 생활정치의 이념이 지역네트워크운동의 국정진출과정에서 발휘되지 못한 원인을 고찰한다.
2. 생활정치의 확대: 대리인운동에서 로칼파티로
이 절에서는 생협남성에 의해 제기된 대리인운동과 로칼파티구상은 처음부터 국정참여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 그러나 활동주체들인 여성들은 지역을 가장 우선적인 활동영역으로 하는 정치를 지향했다는 점을 밝힌다. 그리고 지역네트워크운동에서의 생활정치의 정의를 확인하며, 생활정치가 대리인운동에서 로칼파티로 전개되어가는 가운데 제기되는 과제를 명확히 한다.
대리인운동은 1977년 생활클럽 생협을 모체로 하여 출현했다. 생활클럽생협의 설립자이며 대리인운동의 제안자인 이와네 쿠니오씨에 의하면, ‘생활클럽은 안보투쟁의 산물’(이와네 쿠니오 1979:13)이라고 한다. 이와네는 1960년 사회당에 가입하여 사회당의 지역활동을 거쳐서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운동을 지향하여 생활클럽생협을 설립했다. 대리인운동은 1977년 이와네의 사회당으로부터의 탈당과 동시에 제안되었다. 대리인운동은 ‘협동조합의 주장을 지방의회에 반영하기 위하여 ‘생활클럽’으로서 발언하는 대리인을 국회에도 보내고 지역에도 보내는(이와네 쿠니오 1979:214-215)’ 구상이었다. 대리인운동은 생활클럽생협의 이념을 지역이나 의회에 확대하여, 지역정치를 바꾸어감과 동시에 국가 체제의 변혁을 지향한 운동이다.
대리인운동과 마찬가지로 로칼파티구상도 지역에서 출발하지만 그 목표는 반드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로칼파티는 1984년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설립을 할 때, 생활클럽생협카나가와의 설립자인 요코타 카츠미씨에 의해 제안되었다. 요코타씨는 도큐(철도회사)노동조합 출신으로 1959년부터 1995년까지 사회당의 당원이었다. 로칼파티구상은 카나가와현을 가장 우선적인 정치활동의 단위로 하는 것을 명확히 했으나, 처음에는 지역정치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정치를 바꾸려는 단계적 구상이었다[5].
카나가와현의 대리인운동은 합성세제추방운동을 위한 직접청구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생활클럽생협은 1979년 ‘사가현비와호의 부영영화의 방지에 관한 조례’가 성립한 것을 계기로 1980년부터 합성세제추방을 위한 조례제정을 요구하는 직접청구를 시작했다. 카나가와현의 8시에서 22만명의 서명을 받았으나 조례는 모든 시에서 부결되었다. 직접청구는 생협의 남성리더가 이후의 대리인운동을 염두에 두고 제안한 것이다[6]. 조례가 부결된 후,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합성세제를 추방하고 비누를 사용하는 운동을 계속할 것과 직접청구에 의해 만들어진 합성세제심의회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실현할 것을 결의했다[7].
그러나 직접청구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1982년 생협남성리더들에 의해 대리인운동이 제안되었을 때 조합원 여성들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예를 들면, ‘생활클럽이 왜 정치에 손을 대는가?’ ‘정치같은 것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생협후보가 아닌)다른 사람에게 투표할 거니까’ ‘정치따위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직접청구운동을 계속하면서, 그리고 쓰레기나 자원의 문제등에 대해 토론하면서 ‘지금까지 투표하고 싶은 후보자가 없었다’ ‘선거 때 내가 투표한 사람은 당선하고 난 다음 25년간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깨끗한 소비재가 아니라 의원의 공동구입이구나’ ‘그러고 보니 여성의원은 정말 적구나’라는 의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대리인공동구입론’은 안전한 생협 물건을 공동구입하는 것처럼 깨끗한 의원을 공동구입한다는 발상으로서 합성세제추방 및 비누를 사용하자는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비누 대리인’ 운동은 이처럼 생협운동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이 여성들은 마을의 상황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면서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는 먹거리를 확보하고 싶다. 깨끗한 물을 먹었으면, 쓰레기가 없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으면, 문화시설이 있었으면, 공원이 너무 적다. 교통이 불편하다, 난개발을 중지하자 등등, 자신들의 생활에 관련된 정책을 직접 만들었다[8]. 이러한 과정은 이제까지의 ‘자기자신을 돌아봄과 동시에 지역을 돌아보는 과정’(1984년 12월6일 기관지 NET 6호)이었다고 M씨는 보고했다.
합성세제추방운동으로부터 대리인운동에 참여한 K씨는 자신의 정치참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지, 쓰레기, 환경, 물, 교육, 먹거리, 원자력발전 등등, 우리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는 전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뿌리에 있는 것은 우리들을 둘러싼 산업중심주의적인 사회 그 자체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생활의 질을 문제제기하면서 새로운 생활양식과 새로운 정치스타일을 지향하는 도전을 계속함과 동시에 그러한 시민을 지금보다 더 늘려가지 않는 한,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1990:61).
K씨와 같이 합성세제추방운동으로부터 대리인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과 정치의 스타일을 바꾸는 것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것이었다.
합성세제추방운동이외에도 대리인운동에는 또 하나의 경로가 있다. 그것은 주민운동에서 시작된 대리인운동이다. 니노미야마찌에서는 자치단체장의 아즈마산의 도시공원화계획에 반대하는 ‘아츠마산의 자연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즈시시에서는 미군의 주택을 짓기 위해 파괴직전에 있었던 이케고의 숲을 지키는 주민운동으로부터 대리인운동이 탄생했다. 각 지역이 안고 있는 고유한 과제로부터 ‘시민의 목소리’를 의회에 반영하기 위하여 대리인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주민운동으로부터 출발한 대리인운동은 기성정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참여자들 당사자가 정치참여로 인해 정치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즈시시의회의원을 3기 역임한 O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9].
이케고의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시장이나 의원들을 관심을 갖고 보니 그들이 얼마나 우리들 시민 감각과 다른가를 절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정치를 일부의 사람들에게 맡겨왔다는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장(시민운동으로부터 탄생한 시장)과 함께 우리들은 마을을 만들어 간다. 리콜 운동이나 선거를 통하여 나는 처음으로 내 자신이 즈시시민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시장은 당선시켰지만 다음 문제는 반대파가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민운동으로부터 의원을 배출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1990:23).
여기서 대리인운동이 추구하는 생활정치의 이념을 확인하여 보자. 생활정치는 개인의 생활양식과 정치의 스타일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또한 생활정치는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표에게 자신의 생활이나 지역의 운명을 전부 맡기지 않고, 스스로 참여하여 결정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생활정치란 직업적인 정치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민이 스스로가 살고 있는 지역에 책임을 가지고 자치해가는 것을 말한다.
생활정치의 이념을 기반으로 전개된 대리인운동의 성과는 크다. 대리인운동은 참여자인 여성들의 생활을 바꾸었고 의회나 자치단체를 바꾸어냈다. 여성들은 의회가 열릴때면 집단적으로 방청했고, 마을의 중요한 문제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는 것을 목격했다. 거기에서 여성들은 의원을 선택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 여성들은 조사나 시민활동을 통하여 눈에 띠는 과제들을 의회나 자치단체와의 논의를 통해 해결해가고, 자치단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요구에 대해서는 스스로 사업체[10]를 만들어 해결해갔다. 대리인이 있음으로 인해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여성들은 자치체와의 교섭력을 강화했고 자신들의 요구를 의회나 자치단체에 반영하는 것이 보다 쉬워졌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은 ‘지역문제발견→자율적인 조사→관계자들에 대한 문제제기→토론의 장 만들기→해결책 모색→문제해결’이라는 과정을 통해 의회와 시민활동을 횡단하면서, 지역의 문제해결을 모색했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눈길도 주지 않아 구석에 밀려나있던 생활과제인 쓰레기, 먹거리의 안전, 고령자 복지, 어린이, 환경 등의 과제를 의회의 과제로 만들어 갔다. 의원의 의회 질문이나 압력에 의해 자치단체도 이러한 과제를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회활동에서의 벽은 적지 않았다. 1인회파의원에게 질문시간이 주어지지 않거나, 다수파정당에 의해 의회의 결정이 좌우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교섭회파[11]에 속하지 않으면 대표질문도 할 수 없고, ‘무소속시민파’의원에게 가능한 것은 의원의 권한을 이용하여 자치단체의 정보를 시민에게 공개하고, 시민운동의 힘으로 자치단체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의회활동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 의원을 늘리는 것은 절실한 염원이었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은 의원복수화, 의원제안권확보를 적극적으로 모색해갔다.
이처럼 의회활동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가운데 의원와 지역네트워크운동 조직과의 의견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회원은 대리인에 대하여 ‘의원이 되면 반듯하게 운동하기 어려워진다. 도로건설에 대하여 지역주민은 반대하는데 대리인은 의회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의회와는 갈등이 생긴다. 표로 연결이 안되는 문제는 점점 안 하게 된다[12]’ 라고 비판한다. 한편, ‘의원은 네트의 과제만이 아니라 자치단체의 모든 문제에 입장 표명을 요구받는다. 의원을 배출한 사람들은 의원을 활용하려고 생각하지만, 처음에 제기한 문제가 해결되고, 자신들의 생활환경이 바뀌면, 의원을 뒷받침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13]’ 라고 대리인은 말한다. 이러한 발언 속에서 운동의 요구가 의회에 들어갈 때의 어려움과 의원에게 요구되는 것과 지역네트의 뒷받침하는 기능과는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네트워크운동은 단일쟁점운동으로부터 지역과제일반에 대처할 수 있는 포괄정당을 지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로칼파티 노선이다. 앞서서 언급했듯이 로칼파티는 카나가와 네트워크운동 설립과 동시에 제안되었지만 그것이 구체화된 것은 1990년대이후였다. 1991년통일지방선거를 전환점으로 하여 지역네트워크운동은 의원이나 지역네트워크 조직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90년대중반이 되면 지역네트워크운동은 ‘문제제기운동’으로부터 ‘정책제안형정치’로의 전환을 추진하며 지역네트별로 정책형성능력을 높임과 동시에 로칼파티로서의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전체의 통합기능도 강화된다[14]. 이처럼 지역네트워크운동은 지역정치에서 생활정치를 확대해가는 노력을 계속해간다.
3. 생활정치와 정당정치와의 대립
이 절에서는 1980년대로부터 1990년대까지의 지역네트워크운동의 국정참여의 흐름을 검토한다. 우선 대리인운동초기의 정치계약, 90년대전반의 ‘생활파국회의원’, 90년대중반의 네트워크형전국정당설립에 이르는 과정을 검토하여 생활정치와 정당정치와의 대립을 분석한다.
3-1 테마정치와 강령정치와의 대결:정치계약
지역네트워크운동의 국정방침은 ‘정치계약’이었다. ‘정치계약’이란 지역네트워크운동이 정당이 아닌 정치가 개인과 계약을 맺어 ‘아마추어의 손에 의해 국가를 통제하는 방법’(1986년6월30일 기관지NET15호) 으로서 정의된다. 원래 ‘정치계약’이란 정당의 ‘강령주의’에 시민운동의 ‘테마주의’가 대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즉 이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단체가 다양한 국면에서 정치계약을 맺을 수 있고, 기성정당의 경직화를 막는 동시에 각 단체의 정당회피현상도 극복하여 정당정치를 포섭한 다면적인 시민자치가 가능해지는 것을 기대한다(스다 하루미 1987)”는 것이다. 정치계약이란 ‘지지 정당이 없는’ 층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이 회원의 정당에 대한 알레르기를 최소화하면서, 정당정치에 자신들의 정치과제를 반영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그러한 정책과제 가운데서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원자력발전의 문제였다. 그 배경에는 1986년의 체르노빌사건을 계기로 원자력에 대한 대중적인 위기의식이 있다. 하세가와 코우이치에 의하면 ‘체르노빌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87년이후 많은 새로운 그룹들이 탄생하여 그 때까지 없었던 시민운동이 확대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대도시와 지방거점도시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풀뿌리 운동의 시민그룹이 탄생했다(하세가와 1991:47)’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네트워크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생활클럽생협이 제기해온 ‘먹거리의 안전’ 문제는 ‘탈 원자력’ 운동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카나가와현의 각 지역네트는 핵안전대책이나 수입식품의 방사능오염등에 대해 학습을 하기 시작했고 대리인은 자치단체에 압력을 넣었다. 1989년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탈원자력발전법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국정에서는 1989년 자민당이 리쿠르트 사건 및 소비제의 도입으로 국민적 신뢰를 잃고 지방의회도 소비세를 둘러싸고 이듬해로 예산심의가 지체되어 계속심의가 되는 등 혼란상태였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정국을 ‘자민당독재체제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고 있으나 야당이 약하기 때문에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없다’(1989년5월1일 기관지NET47호)고 진단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7월 참의원선거에서 카나가와 네트워크운동운영위원회는 사회당의 의뢰를 받아 코바야시 타다시 사회당의원을 추천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에 대하여 카와사키시타마구의 ‘네트 타마’는 반대를 표명했다. ‘네트 타마’는 참의원선거에서 원자력발전에 대하여 73개의 시민운동단체(지역네트 4개 포함)와, 한편 소비세에 대해서는 3개의 지역네트와 함께 지역구의 7후보에 대하여 앙케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 추천을 결정한 코바야시씨가 추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당시 ‘네트 타마’의 카와사키시의회의원이던 E씨는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사회당의 코바야시씨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결정한 뒤 지역네트에 응원을 요청했다. 지역네트는 지역별로 생활에 뿌리를 내린 정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결정되었다고 특정후보를 응원하고 투표하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게다가 체르노빌사건에 의해 반원자력발전에 대한 시민의식이 높아진 시기였는데, 사회당의 입장은 애매했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원자력발전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사이에 ‘상황에 따라 인정한다’는 입장으로 변했다[15]”고 비판한다.
사실 시민운동의 테마를 정당정치에 반영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정치계약의 효과는 확실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정치계약의 주체가 지역네트가 아니라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었기 때문에 지역네트는 정치계약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트타마’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과 지역네트와의 정치적 입장이 대립할 때 정치계약은 조직내에서도 집행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또한 지역네트워크운동이 정당이 아니라 개인과 정치계약을 맺는다고 하지만, 정치가 개인은 독립된 개인이라기보다는 정당에 구속될수 밖에 없기 때문에 소속정당의 입장보다 지역네트워크운동과의 정치계약을 우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우기 정치계약은 일회적 계약 머무는 한계가 있어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는 어려운 점도 있었다. 따라서 정치계약에 대해 ‘국회에 아는 의원이 한 명 있다’는 소박한 효과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3-2 생활정치와 정당정치와의 통합:생활파 국회의원
1989년은 세계적으로도 격동의 시대로서 동구사회주의권이 해체되고 일본에서도 참의원선거에서 여당과 야당의 의석비율이 역전되었다. 1990년 중의원선거에서도 야당과 여당의 역전을 기대하여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시민후보를 내어 사회당의 추천을 받을 방침을 세웠다. 소위 ‘생활파국회의원’ 구상이다. 사회당과 사민련의 추천을 받고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싸운 선거에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생활파국회의원후보는 낙선했다. 1993년에는 일본신당, 신당사키가케등 신당 결성과 함께, 시리우스, 자민당, 하네타파등 기성정당의 내부에서도 정계개편의 움직임이 격렬한 시기였다. 같은 해 6월, 자민당의 분열로 중의원에서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되어 미야자와내각이 총사퇴하고 호소카와 연립정권이 탄생했다. 정당재편속에서 세대교체와 지방분권의 확대가 정치적 테마로 부각되었다. 1993년 정국을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생활자정치가 국정에서도 역할을 해야한다’고 인식했다. 그러한 상황인식에 기반한 운동방침의 전환은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 1993년1월에 발표한 ‘중의원선거방침’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지역이 정치한다’는 실체를 만드는 것이 대리인운동이며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을 로칼파티로 만든 이유이다. 대리인운동을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한다면, 국정과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자치단체레벨의 선거와는 다소 형식이 다른 점도 있으나 국정레벨의 의원의 선거도 시야에 넣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리인운동을 단지 생활자의 대표를 지방의회에 보내는 운동으로 인식하여 자치단체레벨에 제한하는 활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16]
이러한 방침전환은 대리인운동을 국정까지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네트워크운동에서 ‘사회변혁’이란 ‘자기자신을 변혁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생활 방식, 노동의 방식, 정치의 방식을 바꾸어내는 운동’(1993년3월1일 기관지NET92호)을 의미했다. 그것이 정권획득과는 구별되는 생활정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권교체의 기대가 높아진 그 시기에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생활자정치와 정권교체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1990년 참의원 선거, 1993년 중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YS씨는 생활정치와 국정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YS씨는 2기째의 기초자치단체의 의원을 하고 있던 도중에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결정으로 국정선거의 후보자가 되었다.
먹거리의 안전문제만을 보아도 후생성의 문제 등 국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있다. 국회의원 개인과 정치계약을 맺어도 거의 효과가 없었다. 지역문제를 정책화하는 것이 국정에도 요구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국회의원과 지역의원과는 (정치활동 영역의) 규모는 다르지만 의원으로서의 역할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17].
인구2만의 기초자치단체의회의원과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대표를 역임했던 YS씨에게 지역네트워크운동의 국정참여에 대한 저항감은 없었다. YS씨는 국정에도 생활정치의 시점이 필요하며, 지역네트워크운동이 직면하는 한계를 국정참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YS씨가 속하고 있던 지역네트는 어렵게 기초자치단체의 의원을 만들었는데 임기도 끝나지 않고 국정에 빼앗기는 것에 납득할 수 없었다. 결국YS씨는 지역네트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국정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당시 국정후보자를 내지 않겠다는 결정한 지역네트의 회원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국정에 의원을 내는 방침이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으로부터 내려왔을 때, (내가 속한) 지역네트는 반대했다. 우리들이 대리인을 내어 지역네트워크운동에 참여한 것은 수원지 산업폐기물처분장 반대를 위한 주민운동을 통해서였다. 우리들이 대리인을 내보낸 것은 언젠가 국정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들은 시의회의원으로서 응원하고 있는데, 왜 국정에 보내야 하는가 하는 의견이 많았다. 왜 기존정당의 후보로 입후보하는가. 입후보해도 당선은 불가능하다. 내보내자, 못보낸다, 한참동안 갈등했으나 입후보직전에 내보내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겨우 쓰레기나 비누, 어린이등을 과제로 하고 있는 주부의 운동이다. 마을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라면 응원할 수 있지만 국정까지는 힘들다[18].
대다수의 회원에게는 국정에서 자신들의 후보자를 내는 것은 본래의 대리인운동의 취지와는 맞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주민운동의 요구를 자치단체에서 실현하기 위해 대리인을 배출하였지만, 국정참여까지는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국정참여를 포기하지 않았다. 1993년 중의원선거에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5명의 후보자(그 가운데 사회당 1명, 일본신당 1명)를 추천하였으나 일본신당후보자만 당선하고 전부 낙선하였다. 결국, ‘생활파국회의원’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국정참여에 대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조직적 입장에 대해 당시의 대표였던 UT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 우선은 기초자치단체의회에 의원을 내고 다음에 현의회의원을 내고, 결국 국회의원 후보를 내는 과정은 스스로의 조직적 역량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를 생활자의 정치로서 규정하여 가장 가까운 지방의회로부터 시작하여 범위를 확대해가는 과정은 많은 지역네트회원에게는 무리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칼파티’라는 이름으로부터 국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선거와 스스로의 조직역량을 재어 보고 논리로서는 타당하지만 지금은 무리라는 입장, 그런데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반응을 한 회원이 많았다.[19]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국정추진자인 생협의 남성리더,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운영위원회, 의원 경험자들에게는 생활정치와 정당정치와는 뗄레야 뗄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정치무대를 지역으로부터 국가차원으로 확대해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전대표인UT씨에게도 지역네트의 회원K씨에게도 ‘겨우 주부의 운동’ 이라든가, ‘국정에는 관여하지 않는 안도감’이라는 스스로의 운동을 제한해버리는 회원들의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그외에도 지역네트의 반대의 이유로는 스스로의 역량에 대한 판단과 함께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지역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생활정치가 정당정치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에 대한 저항이 강했다. 이와 같이 국정참여에 대한 회원과 지역네트와의 인식공유가 확보되지 않은 채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로칼파티의 전국적 확대를 내걸고 네트워크형국정정당 설립을 시도했다.
3-3 생활정치의 정당정치에의 포섭: 로칼파티의 국정정당 설립 시도
1995년 통일지방선거를 즈음해서 일본에서는 지역정당붐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시민그룹이 통일지방선거에 후보자를 내는 움직임이 있었다. 1996년2월 요코하마에서 전국 로칼네트워크 오브 쟈판(이하, J네트) 결성을 위한 집회가 열렸다. J네트는 요코미찌타카히로 중의원 의원등에 의한 리베랄 포럼의 주도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 집회에서 당시의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대표였던 마타키 쿄오코씨는 ‘내셔널 파티는 로칼파티의 전국적 네트워크형연합조직이며, 의원은 2중당적, 즉 로칼파티의 당적과 내셔널파티의 당적을 동시에 갖는 것은 당연하다’(J네트결성추진회사무국 1996:13)고 발언했다. 한편, 당시 신당사키가케의 대표간사로서 J네트결성에 참여한 하토야마유키오 중의원의원은 ‘네트워크사회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내셔널도 하나의 로칼에 지나지 않는다’(J네트결성준비사무국 1996”40)라고 응수했다.
이렇게 하여 J네트는 발족했지만 결국 로칼파티의 전국네트워크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 J네트의 흐름은 같은 해 7월, 8월에 하토야마유키오씨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결성으로 이어져, 나중에 하토야마유키오씨와 칸나오토씨의 2인대표체제의 민주당 결성의 길을 열게 된다. 1996년 10월의 총선거 이후에도 민주당은 네트워크형조직론이나 분권모델을 주창하기는 했다. 그러나 1996년 가을부터 1997년 3월에 걸쳐, 각지에서 민주당의 지부조직이 결성되었고 그것은 로칼파티의 원칙이나 네트워크형조직과는 한참 거리가 먼 종래의 정당형조직론에 기반해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J네트는 민주당에 이르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스미자와 1988:77-8)는 말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J네트가 민주당의 하부조직으로서 흡수되어가는 가운데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민주당의 설립에 깊숙이 참여했다. 1996년 9월 민주당 설립준비회는 11명의 간사회로 구성되어,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고문인 요코타카츠미씨가 들어갔다. 같은 해 10월에는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중의원선거를 위해 민주당과 정치계약을 맺었다[20]. 민주당으로서도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 5000명 정도의 회원과 생활클럽생협이나 복지시민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연계의 대상으로서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계약에 의한 선거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민주당 후보 12명, 무소속 후보 1명을 추천 혹은 정치계약으로서 지원했으나, 결과는 13인중 2명만 당선되고, 11명은 낙선했다.
이러한 가운데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1997년1월부터 의원이나 회원의 민주당 입당을 추진하는 방침을 결정한다. 그 목적은 ‘민주당을 통하여 네트의 정책이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한다’는 것이었고, ‘민주당은 국정과제, 네트는 지방과제라는 역할 분담을 상정하고 있다. 사실상의 2중당적이지만 그 역할분담은 가능하고 혼란은 없다’(카나가와신문 1997년 1월30일)고 당시 대표인 마타키 쿄오코씨는 말했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마타기쿄오코씨와 요코타카츠미고문이 민주당 설립에 깊이 관여하는 가운데 회원에 대한 민주당의 가입이 강력하게 권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민주당가입방침에 대한 일부의 회원이나 지역네트의 반발은 격렬한 것이었다. 지역네트의 반대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민주당은 자민당이나 신진당과의 입장이나 정책상의 차이가 애매하고, 소비세문제등에 대해서는 네트와는 다른 방침을 가지고 있다.(타카츠네트워크통신, 1997년2월8일)
대리인운동으로서 지역활동을 충실하게 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하며 활동해왔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으로서 ‘민주당카나가와(가칭)’의 설립에 참여하는 것은 지역네트가 만들어온 개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내셔널 파티에 깊이 관여하기 이전에 로칼 파티로서 지역네트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21]
우리들은 지역에서 시민이 자치하고 참여하는 정치는 만들어 로칼이든 내셔널이든 영향을 행사하려고 노력해왔다. 어딘가에 들어가 헤게모니를 잡고, 로칼파티에서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셔널파티에 들어가거나, 내셔널파티에 들어가도 과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존 정당과) 손을 잡고 권력을 잡자는 발상은 해오지 않았다.[22]
지역네트는 민주당과 지역네트워크운동과의 사이에는 정책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23]. 또한 민주당에의 참여는 지역네트워크운동의 ‘개성을 말살’ 하기 때문에 지역활동을 우선하는 입장을 고수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지역네트워크운동의 문제해결능력은 정당 가입에 의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문제제기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의 문제해결능력의 향상을 호소하며 민주당참여를 강행했다.
지역의원을 해오면서 국가의 법률에 구속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셔널과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거기서 로칼파티연합을 만들고자 J네트에 참여했다. 민주당은 J네트로부터 탄생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탄생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과 정치계약을 했다. 그것은 선거용이 아니라 일상활동으로서 함께 실현에 노력하여 점검해 간다. 민주당카나가와는 네트가 참여함으로써 참가형정치를 할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24]
이러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이나 지역네트는 민주당참여방침에 납득할수 없었다. 첫째, 참여의 방법이 문제이며 종래와 같이 가입이 아닌 정치계약으로 충분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의원이 민주당에 가입하면 그 당적은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 되는가, 아니면 민주당이 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둘째 참여의 정치적 유효성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 민주당에 참여하여 민주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이 많았다. 그것은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리더가 민주당의 리더를 겸무하지 않았고 발언권은 있으나 결정권은 없는 업저버로서의 참여였기에 충분한 영향력 행사는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민주당이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이념과는 동떨어진 정당이 되어버릴 것이 우려되었고 국정선거에서 민주당을 지지해도 지방선거에서는 서로 대립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1997년3월10일, 기관지 NET140호).
결국, 지역네트워크형국정정당 설립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997년 ‘타카츠네트’는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으로부터 이탈했다. 실제로 국정정당과 지역정당과의 역할분담은 실현되지 못했고 지역네트의 예상대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 의석을 다투어야 했다[25]. 민주당 카나가와에 대해 로칼 파티로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에 실패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다음과 같은 총괄을 했다. ‘민주당이 결성됨으로써 로칼파티연합에 의한 내셔널파티를 만드는데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대는 끝났다. 지방분권의 시대에 로칼파티는 로칼정부를 수립하여 로칼정권을 만드는 것에 전념해야 한다(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2002:2)’ 라고. ‘시민의 정부’노선이다.
4. 전국정당설립은 왜 실패했는가?: 생활정치의 이념이 발휘되지 못한 이유
지역네트워크운동에 의한 전국정당 설립이 실패로 끝난 것은 대리인운동으로부터 로칼파티에로 확대되어간 생활정치의 이념이 국정참여에서는 그 힘이 발휘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생활정치의 이념이 살려지지 못하고 지역네트워크운동에 의한 전국정당 설립은 좌절하고 말았는가? 이 절에서는 그 원인을 ‘여성의 정치’라는 카테고리의 효과,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가 개인의 생활양식의 변화로부터 이탈해버렸다는 점, 네트워크의 경직성으로부터 찾는다.
4-1 ‘여성의 정치’라는 카테고리의 효과
2절에서 대리인운동이나 로칼 파티가 안보투쟁이나 혁신정당의 활동을 경험한 생활클럽생협의 남성리더들의 구상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네는 말한다. ‘원래 나는 청년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보려고 생각했었다. 생활클럽과 같은 여성운동을 만들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결국은 여성운동이 되어버린 것은 일본사회구조 탓이다’(이와네 쿠니오 1993:14-17)라고. 이와네가 말하는 ‘일본사회구조’란 한 마디로 말하면 전후 일본사회의 성별역할분담구조속에서 형성된 지역의 ‘주부적 상황’(야자와 1993:55)이다. 생활정치는 지역에 남겨진 주부가 중심이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남성리더들이 존재했다.
와타나베에 의하면, 대리인운동에는 2가지의 요인이 있다(1995b:176-177). 하나는 ‘시민에게 정치를 되돌리는 정치의 시민화=시민의 정치화라는 방향성’이며, 또 하나의 요인은 ‘정치에 대한 여성참가라는 방향성’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여성으로 정치를 바꾸는 운동’이며, 동시에 ‘여성이 정치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이러한 견해는 대리인운동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첫째, 대리인운동에서 여성은 대상이면서 주체라는 점이다. 둘째, 대리인운동에서 생협남성리더들의 차지하는 위치는 운동의 주체가 아닌 지원자로서이다. 거기서 대리인운동의 두 주체 가운데 남성들이 사라져 버리고 ‘여성만의 운동’이 되어버린다.
생협남성리더들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들은 자신들이 안고 있는 과제를 정치적 테마로 부각시키며 의회에 진출했다. 지역네트워크운동에 대하여 ‘아마추어 주부의 정치’ ‘부엌에서 정치까지’ ‘주부감각’ ‘여성의 시점’ ‘마돈나 선풍’ 등등, 다양한 의미규정이 있으나 그것들은 한결같이 ‘여성의 정치 참여’라는 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인터뷰한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여성들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지역주민,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했다는 의식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긋난 의미규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지역네트워크운동의 두 주체의 운동에 대한 의미규정으로부터 생각해보자. 먼저, 생협의 남성들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을 자신들의 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기보다는 여성의 운동으로서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정당운동이나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지역네트워크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여성들을 ‘아무런 이데올로기에도 물들지 않은 백지상태[26]’의 존재로서 규정했다. 남성들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을 과거의 운동의 교훈을 계승하기보다, 전혀 새로운 주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운동이나 정치로서 의미부여했다. 그것이 기존정치와는 단절된 ‘아마추어 주부의 정치’라는 개념규정이다.
한편, 참여했던 여성들은 2절에서 언급한대로, 생협운동, 직접청구운동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다수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소위 ‘정치 알레르기’ ‘정당 알레르기’ 때문이다. 이 여성들은 기성정치와 구별하기 위해 ‘자치’ 혹은 정당정치와 구별되는 ‘생활정치’를 내걸었다. 또한 이 여성들은 기성정치나 기성정당과의 대립축을 여성과 남성과의 대립으로 전환시킨다. 그로부터 생활정치는 ‘여성의 정치’로서 의미규정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대리인운동 초기의 기초자치단체 의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의 대리인은 거의 기초자치단체 의회에서 첫번째의 여성의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의회에서 학교급식, 어린이, 합성세제 등에 대해 질문하면, 연배의 남성의원들은 ‘그 따위 문제는 PTA에서나 해라’ 고 비웃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는 가운데 여성들은 ‘주부’ 경험을 자신들의 정치적 자원으로 내세워 의회나 자치단체에 결여되어있는 정치적 과제를 ‘여성의 시점’이라는 틀을 통해 반영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의 두 주체의 운동에 대한 의미규정은 생활정치의 잠재성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리모토다카는 즈시의 시민운동에서 “<주부>의 운동이라는 자기규정은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 합의하여 모인 실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개인의 생활우선주의의 ‘표준형’을 제시하고 말았다”(모리 모토다카 1996:327)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지역네트워크운동이 제기한 생활문제는 여성에게 한정된 과제가 아닌 지역주민 일반의 정치과제였다. 스스로의 생활을 바꾸는 동시에 정치를 바꾼다는 생활정치의 이념은 반드시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부감각’ ‘여성의 시점’ 등의 의미규정에 의해 생활정치의 의미는 축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4-2 개인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동떨어진 정치참여
생활정치의 정의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생활정치는 개인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정치의 변혁을 동시에 추구하는 정치라고 했다. 의사결정의 장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개인이 스스로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것과 뗄레야 뗄수가 없다. 2절에서 언급한대로 생협운동으로부터 직접청구운동으로, 다시 대리인운동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참여주체가 자신의 생활을 문제제기하면서 동시에 정치를 바꾸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대리인을 만들어낸 다음이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이 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원을 복수화하고, 교섭회파를 구성하며 의원제안권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많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의 구성원들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치단체에서의 정책형성기능을 할 수 있는 로칼 파티를 지향하는 것도 지역네트워크운동 안에서는 공유되어 있다. 실제 의원을 늘리는 것은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과제가 운동 속에서 명확해지면서, 그러한 과제해결을 위해 의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의원이 늘어나는 것은 자신의 생활을 정치와 연결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역네트워크운동에서 의회활동의 강화가 반드시 시민활동의 확대와 연동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2절에서 의원경험자들과 회원이나 지역네트와의 인식의 차이를 언급했는데, 그것이 전면화된 것이 국정진출 시도에서였다. 즉,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취지는 ‘시민’이 지역정치에 참가하여 지역의 과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인데, 운동이 진전되는 가운데 ‘시민’은 분절화된다. 의원, 정책담당, 지역네트의 사무국장 등 비교적 많은 시간을 정치활동에 보내는 사람들은 프로화하고 보통의 회원은 개별의원이나 지역네트활동을 응원하는 지지자로 변해가는 것이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은 두터운 시민활동에 의한 문제해결의 향상과 더불어 의원제안권의 획득을 통해 의회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를 도모하지만, 그 시민운동과 의회활동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우며 어느 사이에 시민활동보다는 의회활동에 중점이 이동하는 경향이 보인다.
3절에서 검토한대로 정치계약으로부터 생활파국회의원, 다시 국정정당 설립이라는 흐름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이 추구한 생활정치의 프로세스와는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다. 생활정치가 확대되어가기보다는 정당정치에 수렴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의 국정 참여에 대해 주체인 여성들은 참여의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 여성들에게 필요한 의원은 자신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마을의 문제를 생각하고, 함께 해결해가는 사람이었다. 국회의원 배출이나 국정정당설립 시도는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여성들을 다시 한번 ‘응원하는 정치’ ‘맡기는 정치’로 후퇴하게 하는 것이었다. 후보자 선정에 대한 선택권이 회원과 지역네트에 주어지지 않고, 누구인지도 확실히 모르는 후보자에게 투표하라는 것은 단지 주어진 선택지가 하나 늘어나는 것뿐으로 정권획득이 가장 우선적인 목표인 국정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온 생활정치의 이념을 스스로 부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지역 문제에 집중하면서 생활정치의 주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전국정당을 만드는 것에 의해 비약적으로 생활정치를 확대하고자 하는 발상과는 대립한다. 생활정치는 이념만을 말하여 확대되는 것이 아니며 시대의 변화에 의해 순식간에 확대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을의 문화나 전통의 형성에서처럼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리라. 한편, 정당정치는 생활정치의 확대에 좋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생활정치를 근저에서부터 규정하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네트워크운동 여성들이 정권교체의 희망이 각지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던 시기에도 그것에 편승하지 않고 지역에 뿌리를 둔 활동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던 것은 중요하다.
4-3 생활정치의 네트워크의 경직성
생활정치의 형태로서 지역네트워크운동은 ‘의원과 후원회’라는 종래의 정당정치의 형식이 아니라 ‘대리인과 지역네트’라는 문제해결 시스템을 만들었다. 프로정치가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신탁, 위임하여 그 정치가를 응원하는 정치에 대한 자기반성으로부터였다. 그것은 정치가에게 지역이나 집단의 운명을 맡겨 분배정치나 이권정치로 귀결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대신에 지역네트워크운동은 눈에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성실한 활동을 통하여 발견되는 정치적 과제를 대리인이라는 파이프를 활용하여 해결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대리인은 어디까지나 역할분담이며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문제해결방식에서는 정치가가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생활, 정치적 요구가 선행한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국정정당가입방침을 비판하는 논리로서 지역네트가 주목한 것은 ‘네트워크형조직’ 이었다. 당사자의 개념에 의하면 네트워크란 ‘자발성에 기반하여 느슨하게 연결된 횡적인 관계’이며 상호부조와 정치적 과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네트워크형로칼파티에서는 다양한 생활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해결책이 모색될 수 있다. 그러나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국정진출 시도에서는 대등하고 수평적인 조직보다는 위로부터의 방침을 지역네트에 강제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강령에 기반한 정당조직의 중앙당과 지부와의 관계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역네트가 중앙당과 지부라는 조직형식이 아니라 지역네트간의 수평적인 네트워크조직을 지향하는 점은 중요하다. 단일 방침에 따라 설득과 동의를 요구하는 경직된 조직속에서는 다양한 생활의 요구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지역네트워크운동안에서는 생활정치가 정당정치에 포섭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 존재한다. 그러한 저항은 의회활동보다는 시민활동에 중점을 두거나 정당정치와 생활정치를 명확한 선에 의해 구분하여 정당정치에 포섭되지 않는 생활정치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서 나타난다. 물론 지역정치와 국정과의 구분이나 생활정치와 정당정치와의 구분은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선긋기라기보다는 정치적 전략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한 지역의 고유한 과제 해결을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하고 있는 지역네트의 구성원에게 생활정치의 다양한 요구를 정당정치안에서 해결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은 ‘지지정당 없는’ 층이 단지 정치적 무관심층이 아니라 정당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세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마추어나 발런티어 활동에 의존하는 생활정치가 정당정치와 같은 수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면 정당정치에 휩쓸려버릴 위험성이 높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네트워크형정당을 새롭게 만드는 것, 혹은 국정정당에 가입하여 국정정당을 ‘변혁한다’는 것은 로칼 파티의 야심찬 기획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지역에 꼭 필요한 활동을 지원하고 소수이기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정치에 연결해가는 것이야말로 생활정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이 그러한 이념으로부터 이탈하는 즉시 생활정치의 주역들은 정치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생활정치는 4년에 한번 있는 투표를 통해 정치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정당정치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활정치는 일상성에 기반한 정치이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의해 확대된다. 지역네트워크운동은 그 이념상 참여와 탈퇴의 자유도가 상당히 높다. 직업적 구속도 규제도 의무도 없다. 조직의 효율성 증가를 위해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일부의 활동가는 강한 연대를 가진 조직을 지향하기도 했으나 모든 회원을 강한연대구조에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3절에서 본 것처럼 생활정치의 형식인 네트워크가 경직되거나 네트워크안에서의 충분한 합의없이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추구했을 때 생활정치의 이념은 압살되고 마는 것이다.
5. 마무리
국정참여가 실패로 끝난 후 지역네트워크운동은 로칼파티노선으로 회귀하여 의원입법과 자치단체장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2000년 지방분권추진일괄법의 성립에 의해 의원입법에 필요한 의원수가 정원의 12분의 1에서 8분의 1로 줄어들어, 소수파라도 의원입법의 가능성이 생긴 것도 하나의 조건이 되고 있다. 한편, 의원입법의 추진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이 의회활동과 시민활동의 병행에 중점을 두어온 것으로부터 의회활동에로의 중심이동을 예고하는 측면도 있다. 또한 자치단체장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국정참여의 실패로부터의 방향전환으로서, 지역네트워크운동의 문제해결능력을 높이는 수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1998년 요코하마시장선거, 2001년 카와사키시장선거, 2003년 카나가와현지사 선거, 2003년 아츠키시장 선거등 모든 시장선거가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지역네트워크운동이 자신들의 후보를 내어 자치단체장 선거에 임했을 때 거의 승산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방침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주목된다.
한편 생활정치와 정당정치와의 새로운 접점의 모색이 선거와는 다른 국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시민사업으로서의 워커즈컬렉티브의 제도화를 위한 활동이다. 1998년에 NPO법이 성립하여 많은 워커즈 컬렉티브가 법인격을 획득했으나 NPO법인격과 워커즈 활동과는 다른 점이 많아서, 현재 워커즈는 독자적인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시민입법, 의원입법을 통한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생활정치와 정당정치와의 협력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글에서는 지역네트워크운동의 생활정치의 이념이 확대되는데 장애요인이 무엇인가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생활정치와 정당정치는 대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접합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도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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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지역네트워크운동’ 은 특정조직이라기보다는 기초자치단체별 네트워크조직과 그것들의 네트워크로서의 도도부현조직이 연계하여 전개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 글에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카나가와현단위의 연계조직을 나타내며, 기초자치단체별 네트조직은 각각 고유의 명칭이 있으나, 예를 들면 카와사키시 타카츠구의 네트워크조직의 이름은 ‘타카츠네트’로 표기한다. 단, 카와사키시타마구의 지역네트워크조직은 당사자들이 부르는대로 ‘네트타마’로 한다. 또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이라는 현단위의 조직에 대해 기초자치단체의 네트조직을 가리킬 때는 ‘지역네트’라고 부르기로 한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37개의 지역네트로 구성되어 있으나 2004년 요코하마네트의 이탈로 현재는 19지역네트, 34명의 의원을 가지고 있다. 독립한 요코하마네트워크는 16지역네트와 5인의 의원을 갖고 있다.
[2] 생활클럽생협에 대해서는 사토요시유키 편저(1988), 사토∙아마노∙나스편저(1995)를 참조할 것.
[3] 대리인운동에 관해서는 나스 외(1993)를 참조할 것.
[4] 후쿠오카 네트워크는 그린코프생협을 모체로 하고 있다.
[5] 2003년 11월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초대사무국장 시라이씨의 인터뷰. 생활클럽생협의 남성리더들의 운동참여동기에 대해서는 이와네(1978), 이와네(1993), 요코타(1989), 요코타(2002)를 참조할 것.
[6] 2004년9월, 생활클럽생협 카나가와의 전무이사(당시)였던 G씨 인터뷰
[7] 2003년8월, 카와사키시대리인운동선거대책본부장(당시)이었던 M씨 인터뷰
[8] 2003년8월, 카와사키시대리인운동선거대책본부장(당시)이었던 M씨 인터뷰
[9] 2기까지는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후보로서, 3기째는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을 이탈하여 의원에 당선되었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O씨는 자신의 역할로서 시민운동에 의해 만들어낸 즈시시장을 보좌하는 것이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조직의 임기제한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지역과제가 현단위의 조직적 규정보다 우선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이 사업체는 워커즈 컬렉티브 혹은 시민사업체라고 불린다. 육아, 가사, 개호 등 복지관계의 사업체를 공동출자, 공동운영, 공동노동하는 것이다. 영리가 목적이 아니라 커뮤니티에 필요한 서비스를 스스로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11] 교섭회파(交涉會派)에 필요한 의원의 수는 지방의회별로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당시 카와사키시의회에서는 3인 이상이 교섭회파가 될수 있었다. 각 회파의 대표자회의로서 의회운영을 담당하는 의회운영이사회의는 교섭회파로부터 1명씩 보내 구성한다. 본회에서의 각회파대표질문도 교섭회파에게만 자격이 주어진다. 교섭회파인가 아닌가에 의해 의회 전체에서의 영향력이 큰 차이가 난다. 비교섭회파는 일반적으로 외회활동을 제대로 하는 회파로는 간주되지 못하고 의회내에서는 영향력이 작다.
[12] 2002년11월, 요코하마네트 회원 K씨 인터뷰
[13] 2003년1월, 카나가와현의회의원 W씨 인터뷰
[14]이러한 견해는 지역네트워크운동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대체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예를 들면 현재의 지역네트체제가 확립된 것은 1991년 통일지방선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그 전에는 하나의 기초자치단체에 복수의 지역네트가 있는 경우도 있어, 기초자치단체별 네트라기 보다는 서클형네트에 가까웠다.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1991년통일지방선거를 준비하면서 행정구역단위로 지역네트를 재편성했다. 또한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대표도 5인공동대표로부터 2인공동대표 형식의 복수대표체제를 취하다가, 1991년부터 1인대표체제로 재편했다. 나아가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사무국장을 생협직원이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자신이 맡게된 것도 1994년부터였다. 한편으로는 중앙집중성이 강해졌다고 볼 수 있고 적어도 표면적으로 생협과 조직적으로 거리를 둠과 동시에 여성들이 조직적 리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생협의 남성리더는 정치고문으로서 정치활동에 대한 방침과 여성활동가들에 대한 ‘지도’를 계속했다.
[15] 2003년9월, 카와사키시의회의원(당시) E씨 인터뷰
[16] 1993년1월28일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운영위원회, ‘중의원선거방침’
[18] 2002년11월, 카나가와네트 회원 K씨 인터뷰
[19] 2004년1월,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전 대표UT씨 인터뷰
[20]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과 민주당과의 정치계약의 내용은 크게 3가지이다. 1.여성의원을 늘리며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정책, 제도의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 2.관주도에서 민주도로 정치를 전환하기 위해 NPO, NGO, 협동조합등의 시민섹터형성을 위해 정책,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한다. 3. 생활복지형사회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법과 제도의 정비를 위해 노력한다(1996년 10월5일,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과 민주당이 교환한 ‘정치계약’ 문서).
[21] 1997년2월6일, 미야마에네트, ‘민주당카나가와(가칭)설립에 대한 참가 및 민주당카나가와(가칭)참가의 원칙, 회파형성의 원칙(안)에 대하여’
[22] 2003년8월, 카와사키시의회의원 I씨 인터뷰. I씨는1997년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이탈 이후 현재 카와사키시의회의원 4기째이다.
[23] 실제 1997년1월의 기관지 NET138호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어린이들의 세대에 빚을 남겨주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서 소비세 인상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당시 지역네트와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은 서로 소비세에 관한 입장의 차이를 분명히 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24] 1997년2월14일, 미야마에네트와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과의 면담기록. 당시 타카츠네트의 회원들은 면담장에 업저버로서 출석하여 논의 내용을 전부 기록했다. 필자는 그 기록을 2003년8월 타카츠네트로부터 입수했다.
[25] 2004년9월 타나가와네트워크운동 대표 마타키 쿄오코씨 인터뷰. 마타키씨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있다’며, 민주당 설립 시도야말로 시대의 흐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민주당과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과의 파이프역할은 생협의 남성리더이자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의 고문인 요코타카츠미씨가 담당했고, 카나가와네트워크운동 출신의 후보자도 그 가운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26] 2003년7월, 이와네 쿠니오씨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