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운동사례'에 해당되는 글 63건

  1. 2007.06.25 광명 YMCA 생활협동조합 사례
  2. 2007.06.04 시리즈② : 광주북구 주민참여예산, 그것을 알려주마!! - 광주참여자치21/광주북구청을 찾아
  3. 2007.06.04 시리즈① : 광주북구 주민참여예산, 그것을 알려주마!! - 광주참여자치21/광주북구청을 찾아
  4. 2007.06.04 "어르신들을 조직가로 만든 사연" - 영광 "꽃마을 공부방"을 찾아
  5. 2007.06.04 나飛센터, 지역에서 펄럭이다! - 서울여성의 전화-를 찾아
  6. 2007.06.04 “지역운동, 한 템포 쉬기, 그리고 뛰어넘기” - ‘청주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의 최시영 국장을 만나다
  7. 2007.06.04 "‘복지운동’을 통해 주민과 만나다" - '위례시민연대'를 찾아
  8. 2007.06.04 "주부에 의한 재활용운동의 메카" - ‘푸른 내일을 여는 여성들’을 찾아
  9. 2007.06.04 시민자본, 지역사회 발전의 밑거름 - ‘군포환경자치시민회’를 찾아
  10. 2007.06.04 즐겁게 지역운동 하는 법!! - ‘대전여민회’를 찾아
  11. 2007.06.04 ‘참여의 시대’에서 ‘자치의 시대’로 - 인천참여자치연대를 찾아
  12. 2007.06.01 "스무고개. 서대문에 어떤 일이?" - 서대문구립어린이집의 경우
  13. 2007.06.01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변한다"-'푸른시민연대'를 찾아
  14. 2007.06.01 여주에서 무슨 일이?-"함께하는 보육을 위한 학부모모임"을 찾아
  15. 2007.06.01 시(市)와 싸울 일은 아직도 많다! - ‘성남시민모임’을 찾아
  16. 2007.06.01 "당위성을 벗어난 삶을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 ‘맑은 내 방과후 교실’을 찾아
  17. 2007.06.01 ‘광장문화’를 꿈꾸며 - ‘광진주민연대’를 찾아
  18. 2007.06.01 "우리는 '지역시민운동'을 한다" - 구로시민센터-를 찾아
  19. 2007.06.01 주민운동, 암중모색 중...-'관악주민연대'를 찾아
  20. 2007.06.01 여성 정책은 모두의 정책을 대변한다! - '남서여성민우회'를 찾아
  21. 2007.06.01 한 여성 지역단체 대표의 고민 - "동북여성민우회"를 찾아
  22. 2007.06.01 “수다의 철학, 삶의 철학” -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을 찾아
  23. 2007.06.01 "차(車)병원을 들어보셨나요?" -‘성미산 차병원’을 찾아-
  24. 2007.06.01 “주부, 잔뿌리의 역할” - 부천 그린 생협을 찾아
  25. 2007.06.01 “앞으로 10년과 주민참여가 최대의 화두” -관악사회복지-를 찾아
  26. 2007.06.01 대구에서 주민자치운동 하기! - “대구참여연대”를 찾아 -
  27. 2007.06.01 "주부의 힘! 한살림의 힘!" - 한살림을 찾아 -
  28. 2007.06.01 "소외받는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 - ‘남부교육센터’
  29. 2007.06.01 "오이도 국가사적 지정운동" - 시흥YMCA를 찾아
  30. 2007.06.01 "개발과 환경문화보존은 공존할 수 있는가?" - 청주 택지개발의 경우 - "생태교육연구소 터"를 찾아
- 민주시민교육 기초조사 사업“민주시민교육의 개념과 쟁점” 중 해당부분 발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마을 전체가 배움터이다

1.학습과 조직화의 실타래: 두 가지 사례

최근 민주시민교육은 대중강좌 등의 일방적 강의방식에서 벗어나 ‘민주시민교육방법론’을 도입한 소규모 워크숍 형태로 변모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에서 볼 때 교육의 양식과 과정에 대하여 매우 큰 변화를 촉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여전히 구조화된 교육 프로그램으로서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지역의 학습공동체를 중심으로 앎과 삶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그 메커니즘 안에서 학습과 조직화라는 두 가지 사회운동적 목적이 자연스럽게 얽혀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인다. 이 장에서는 광명 YMCA 및 녹색여성모임의 사례를 중심으로 주민학습소모임이 어떻게 성장해가고, 그것이 민주시민교육의 한 부분으로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본다.

1.1.광명 YMCA 생활협동조합 사례

우리나라에서 생협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80년대 중반이다. 1985년에 원주한살림과 안양소비자협동조합이 창립되었고 그후 경남 한살림, 서울한살림이 86년과 88년에 한국여성민우회생협과 안산소비자협동조합이 89년에 경실련 정농생협이 91년에 창립되었다. 현재 전국적으로는 43개 생협에 조합원 4만5천명(1996년 말, 지역조합의 수만 집계)의 규모로 발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생협은 1980년대 중반에 생겨났지만 YMCA안에서 생협운동을 시작한 것은 90년 부천YMCA였다. 부천은 전국적으로도 지역자치운동의 모델이 되기도 하여 YMCA 안팎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1993년도에는 대전의 신협연수원에서 전국YMCA 실무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생협활동에 관한 웍샵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가 아마도 YMCA안에서 생협운동이 가장 큰 주목을 받을 때였을 것이다. 89년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민중운동권이 쇠퇴해 지자 그 동안 지역에서 대중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몇몇 YMCA에서는 90년대에 맞는 운동방식을 고민하고 있었다. 지방자치 시대에 지역주민들이 참여민주주의를 해 나가기 위해서는 시민자치역량이 더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역운동을 대중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때 였다. 더군다나 부천YMCA생협이 조직적으로 체계를 잡아 갔으며 운영에 있어서도 상승세였기 때문에 생협운동은 그 대안으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담배자판기추방운동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부천YMCA의 생협활동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된 분위기 속에서 전국 대부분의 YMCA에서 생협운동 웍샵에 참여하였다. 의기충전했던 당시의 분위기는 곧장 모든 YMCA에서 생협운동을 출발할 기세였다. 그러나 그후 생협운동은 더이상 확장되지 못하였다. 이미 서울을 비롯하여 서울, 김천, 순천, 마산YMCA에서 생협을 시작했지만 94년이 지나면서부터는 하나 둘씩 생협을 포기하기 시작하여 YMCA안에서 생협활동을 하고 있는 지역은 부천, 안양, 광명 그리고 성남 정도이다.

(이후 생략 - 첨부파일 참조)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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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② : 광주북구 주민참여예산, 그것을 알려주마!!
- 광주참여자치21/광주북구청을 찾아
※ 아래는 시리즈②다. 인터뷰 내용이 많았거니와 심층적 접근을 해보고자 글 내용이 길었다. 시리즈②에 이어 짤막하게 공무원과의 인터뷰를 싣도록 한다.

인터뷰 : 박광우(광주참여자치21 사무처장)/이승래(광주북구청 기획감사실/참여예산 담당)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광주 북구가 참여예산제의 원조로서 참여 정신을 한국 사회에 의제화시킨 것은 박광우 처장과 같은 기획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인터뷰 내내 들었던 느낌이다. 그만큼 박광우 처장의 시선과 궁극적 목적은 날카로웠다. 문제점과 그에 따른 개선책, 앞으로의 지향성 등을 현실적 조건에서 풀어보려는 그의 시도는 광주 북구 참여예산제를 가늠하는 척도와도 같다. 아무튼,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실, 처음부터 박광우 처장이 쏟아낸 이야기 때문에, “왜 실시하게 되었는가”라는 배경에 대한 질문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물었다.

“주민참여 예산제가 어차피 시민단체에서 시작한 부분이잖아요. 저는 민주노동당이 시작했다고 하는 것보다 시민단체가 시작했다고 봐요. 민주노동당이 2002년도에 지방선거 앞두고 서울에서 시도를 하고 부산에서 시도했지만, 그 뿌리 자체가 어차피 시민단체가 예산감시운동을 하면서 경험적으로 투명예산, 참여예산을 정립하면서 나온 것이 참여예산제도이고 시민단체도 2002년도에 참여예산이라는 방향을 잡았고, 저는 그런 연장선에서 2002년도 하반기에 실질적으로 참여예산제를 구현하겠다는 취지로 광주시를 대상으로 예산 부분을 정보공개청구를 한 거죠. 결과는 비공개가 돼서 소송으로 간 건데, 2003년 3월3일이 납세자의 날인데, 우리가 납세자의 날 성명을 짧게 써서 참여예산제를 도입하라고 공문을 보냈거든요. 그런 흐름은 시민단체가 주도한 거죠. 광주시를 대상으로 한 정보공개운동은 저희가 기획사업으로 한 거예요. 예상대로 행정소송에 들어갔는데, 저는 2002년도에 행정소송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실제 소송은 3월3일엔가 했어요. 주민참여예산제가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 최소한 이 소송이 끝나면 그때나 결과를 가지고 지자체를 압박하고 그 전에는 기존에 해왔던 대로 예산분석하고 예산감시 활동을 하고 세력을 모아 기초에서 한 2년 동안 기간을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2003년 3월3일 한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압박용으로 한 건데, 2003년도가 노무현 정부 출범한 때잖아요. 그런 흐름도 영향으 준 것 같아요. 시민운동의 흐름과 기반에다가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노무현 정부의 출범 이후에 실시한 지방분권 정책, 노무현 정부가 자율과 책임의 분권의 철학인데, 자율권을 주되 그 책임을 주민과 함께 져라, 공유하라, 이런 거잖아요. 그래서 예산에 있어서도 그런 방침을 정해서, 당시에 예산편성 지침을 내년(2004년)부터 하달하지 않겠다, 그게 2003년이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단체장의 의지가 세 번째죠. 이것이 결합이 돼서 북구가 시행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시민운동이 그런 요구를 해왔고, 그런 기반을 닦아 온 것은 지역별로 상대적인 편차는 있겠지만 똑같은 조건이라고 보이고요, 광주도 물론 2002년도에 소송도 하고 조금 더 활성화됐지만, 서울에서도 했고, 부산이나 다른 곳에서도 한 곳이 있잖아요. 노무현 정부가 그런 지방분권 정책을 편 것도 똑같이 한 거죠. 그런데 왜 북구만 먼저 받아들였냐 하는 것은 그런 흐름에다가 구청장의 의지가 반영된 거다, 물론 의지가 반영되도록 한 것은 저희 같은 단체가 조금 더 광주시를 상대로 소송도 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했고, 또 그런 것이 작용을 했지만, 구청장의 의지 등 세 가지가 결합을 한 거다, 구청장이 받아들였던 배경에는 개인의 소신이라고 할까, 이것도 부정할 수가 없죠. 특히 지방선거 때 포괄적으로 주민참여 분야를 강조하고 주민자치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그런 여러 가지 시책을 펼쳐 온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 연장선에서 주민참여예산제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을 겁니다. 구청장은 우리와 연관 속에서 이 문제를 수용했다고 이야기하죠.”


종합해보면 크게 세 가지의 흐름이 있었다. 그 동안 시민운동진영은 예산감시운동의 경험 속에서 참여예산제도가 시민적 대안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런 연장에서 광주시를 대상으로 정보공개운동이라는 기획사업을 펼치던 중, 행정소송까지 번지게 된다. 이런 운동의 물결이 지방자치단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참여정부의 의지다. 여전히 분권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의 논란은 존재하지만 예산편성에서의 시민참여를 불을 댕긴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북구청장의 의지도 한 몫 했다. 사실 행정부가 시큰둥이면 참여예산제의 도입은 지난한 일이다. 그런 흐름들이 결실은 맺은 시기가 2003년 하반기부터였다.

“2003년 8월에 공청회를 주재를 했죠. 비사가 있는데, 구청장은 5월 달에 기획실에 지시를 했다는 거예요. 공무원들은 전혀 모르고 이걸 준비한 거죠. 공무원들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을 동안 2개월이 지났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공무원들이 시민단체를 알게 되고, 그러면서 ‘함께하는 시민행동’을 찾았고, 또 전남대 곽채기 교수가 지방재정 전공이거든요. 그 양반이 기초발제 하는 걸로 하고, 제가 토론자로 나가고 하면서 그때서 종합이 된 거죠. 공무원이 처음부터 저희한테 와서 이야기를 했으면 2개월을 앞당길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공청회를 통해서 시민단체가 이렇게 해 왔고, 곽채기 교수는 그야말로 학술적으로 검토해서 발표한 거고, 저의 경험이나 시민단체의 경험이 모아지면서 바로 참여예산 연구회가 공청회 이후에 만들어진 거죠. 이미 저희(시민단체)한테 참여예산 조례 초안이 있었잖아요. 그것을 북구에 맞게 적용해서 2003년 9월부터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그 경험을 가지고 2003년 말에 조례안을 만들고 2004년 3월 달에 조례를 제정한 거죠.”

박광우 처장이 얘기한 짤막한 비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구청장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지척에 있던 시민단체를 알아보지 못했던 점은 아쉽긴 하지만 서로의 욕구들이 맞아떨어졌던 시기가 2003년 하반기였고 주저 없이 연구회가 구성되어 발 빠르게 움직이게 된다.

“연구회는 자주 모이지는 않고요, 처음에 틀을 짤 때, 연구회가 역할을 했는데, 연구회를 실질적으로는, 저하고 곽채기 선생님이 다 했는데, 왜냐하면 교수님은 이론적인 근거를 가지고 제공하고 저는 시민단체가 해왔던 경험을 가지고 가서 북구에 적용시키는 그런 활동을 했고, 연구회가 하는 일은 몇 가지가 있지만, 시민위원들의 선발을 연구회에서 해요. 작년에는 안 했는데, 2004년도에 공모를 했을 때, 50여명을 뽑아야 했는데, 80명이 왔어요. 연구회에서 심의를 해서 위원을 선정하고, 제도를 한 번 운영한 다음에 연말에 평가한 모임을 하고 그 다음 년도에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지, 1년에 두세 번 연구회가 모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연구회가 2003년도 말에 구성돼서 조례를 만드는 작업을 했고, 2004년도에는 조례에 의해서 시민위원을 선발하는 과정을 했고, 2004년도 말에는 내년도 개선방안을 논의하는 것을 했고, 연구회가 주축이 돼서 2005년 상반기에는 주민 여론조사를 했죠. 연구회가 좀 형식적이긴 한데, 저와 곽채기 교수가 주로 하죠. 주민과 공무원과 시민위원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작년 연말에 토론회를 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지금 조례 개정 작업을 하고 있는 거죠.”

연구회는 참여예산제를 구상하는 기획 단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여예산의 내용을 박광우 처장과 곽채기 교수가 주도한다는 점에서 구성 멤버가 다양하진 않다. 박광우 처장의 ‘형식적’이라는 표현은 이런 이유에서 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물었다. 비사에 의하면 행정부가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면 중간에 결합한 처지에서 일정한 갈등이나 마찰은 없었는지........

“단체장은 포괄적인 의지였던 것이죠. 그러니까 공무원들이 참여예산제의 필요성을 스스로 인정했다기보다는 구청장의 지시기 때문에, 수용해서 마지못해 하는 것 같은, 그런 부분은 없지 않아 있죠. 그런 점에서 울산동구와 약간의 차별성이 있는 것 같아요. 울산 동구는 전체는 아니지만, 그나마 공무원들이 이에 대해 이해를 하고 적극적이었던 반면에 북구청은 상대적으로 공무원들의 소신에 의해 했다기보다는 구청장의 지시 때문에 했던 측면도 있죠.”

단체장의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실천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갈등은 없었다고 한다.

“갈등 같은 것은 없고요, 연구회에서 논의를 할 때, 공무원과 외부 민간인들과 이해가 대립하는 경우가 있었죠. 예를 들면 예산을 공개하는 데 있어서, 또는 참여의 범위에 있어서, 우리는 법정 경비든 국고보조금이든 다 대상으로 놓고, 설령 예산 제도상 반영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참여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범위를 확대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입장이었지만 공무원들은 원칙적으로, 의견수렴해도 반영 안 되는 것인데, 그거 해야 되겠는가? 이런 의견의 대립은 있었지만, 큰 갈등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지방자치제가 단체장의 의지에 따라서 공무원들이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단체장의 의지에 반해서 반발하고 그러지 못하는 거죠........”

역시 단체장의 마인드는 상당히 중요하다. 더욱이 미래가 보장된 단체장이라면 그에게 줄서는 것은 어찌 보면 공무원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제도만 놓고 보면 광주 북구의 참여예산제는 시민적 관점에서 참 잘 만들어진 제도다. 그래서 공무원들이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공무원은 수동적인 입장이었을 테고 확실한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시민단체의 입장을 전폭 수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겁니다. 공무원들은 자기의 안이 없었어요. 주민참여 예산제도에 대해서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구체적인 운영방안에 대한 상은 없었어요. 이것은 명백하게 시민단체에서 안을 가지고 있었고, 구청장은 포괄적으로 그 제도를 받겠다고 했고, 연구회가 구성됐을 때, 그 안을 제가 가지고 간 거죠. 이 안이 시민단체가 만든 안인데, 북구에 적용하자, 해서 공무원들이 자기들 안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 입장에서 이 정도 수용할 수 있는지 판단해서 수용한 것이죠. 그리고 이 안은 사실은 2003년도 1월에 예산감시네트워크에서 2003년은 참여예산제 조례 제정 원년을 만들자고 해서, 초안을 하승수 변호사가 만들었죠. 브라질 것을 가지고 초안을 만든 것을 우리가 갖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관철시킬 수 있었죠. 다만 하변호사가 만든 초안과는 몇 가지 달라진 것이 있어요. 그 초안을 보면, 시민위원회에 의원들도 참여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공모가 없었죠. 토론회, 설명회 등 구체적인 운영 방식은 연구회라든지, 이런 것은 차후에 보완이 된 거죠. 어쨌든 초안은 우리가 갖고 있었고, 시민단체가 예산감시운동의 경험에 입각해서 갖고 있었죠. 민주노동당청원한 안은 훨씬 더 간단한 내용이고, 그것보다 조금 진전된 것이 예산감시네트워크 안이고, 거기에 더 진전된 게 북구 조례였죠.”

이슈가 터졌을 때, 그 이슈에 대한 대안을 누가 손에 쥐고 있느냐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시민단체가 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으로 보면, 시민단체가 행정부를 담아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행정부와의 갈등보다 의회와의 갈등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산편성의 의결권을 최종적으로 의회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죠. 오히려 집행부와 의회와의 갈등은 있었죠. 처음부터 예상했던 거였어요. 사실은 광주시가 예산요구서를 비공개하는 논리 중에 하나도 의회 권한 침해를 들고 나왔어요. 그때부터 저희는 의회권한과 충동하지 않는다는 논리적인 준비를 했던 거죠. 광주시의 경험이 돼서 그런 건데, 그리고 2003년 공청회 할 때도 한 의원이 나왔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저는 그것을 관리했다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해요. 예견이 된 내용이기 때문에 관리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북구에서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회에 사전 간담회를 해서 사전 양해를 구하고, 시민단체나 참여정부의 참여제도를 도입하라는 법적 근거가 있었고, 또 여론에서 의회가 이것을 반발할 수 없었던 사회적 환경이 조성됐던 것 같아요. 의회가 속으로 반대하고 싶지만 그 당시의 여건이 반대할 수 없는, 반대해서는 안 되는 그런 여건이 있었던 거죠. 실질적으로 의회가 이것을 흔쾌하게 수용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물론 의원들 입장에서도 참여예산제가 필요한 제도라고 얘기는 하죠. 아무튼, 첫 번째는 권한에 있어서 침해하진 않는다, 편성권과 심의․의결권은 다른 것이다, 또 하나는 현실적으로도 의회 차원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 그 이유는 현재 의회가 참여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때는 집행부가 의회에 예산을 제출하기 전에는 예산에 접근할 수 없는데, 참여예산제가 되면 주민들에게도 공개되잖아요. 의원들도 운영 과정에 모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의원들이 예산 심의의 기간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그런 논리로 의회의 예산권 침해 논리가 이 제도의 반대 명분으로 이용될 수 없다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의회와의 갈등을 예견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논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갈등 봉합의 주요한 포인트다. 그래서 그 이후를 물었다. 시민위원회에서 합의된 예산편성안이 의회에 상정됐을 텐데, 의결율은 얼마나 되는지.

“토론회 자료가 있으니까, 그 통계는 북구청에서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하나의 논란거리 중에 하나인데, 아마 2004년도에 세건 정도를 의회가 삭감했죠. 그 중에 하나가 주민참여 예산제도 개선 방안 연구 500만원을 의회에서 삭감한 거예요. 그것은 의회가 참여예산제도에 대한 시각을 드러냈다고 보는 거죠. 2004년도에, 2005년 예산안을 짜면서 설문조사 예산안 500만원을 ‘예산에 개선방안 연구’라고 해서 반영을 시켜났는데, 의회에서 삭감해버린 거죠. 내막을 들어봤더니, 의회에서 참여예산제에 대해서 불쾌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드러냈다고 얘기하던데.........하여튼 실제로 삭감 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2건인가, 3건인가? 왜냐하면 참여예산제 과정에서 제시된 주민의견이 예산에 반영이 됐고 그것이 의회에 가서 삭감된 것인 2-3건 이 정도 밖에 안 되죠. 그런데 보다 더 문제의식을 갖고 보면, 주민의식 수렴된 의견 자체가 전체 예산안 중에서 많지 않다, 이런 것이 더 문제가 되겠죠.”

그렇다면 전체 예산 중에 시민위원회가 다룰 수 있는 예산의 범위는 얼마나 될까?

“전체 예산 중에는 한 3%인가? 이 부분이 작년 토론회 때 논란거리가 됐죠. 왜냐하면 전체 예산 중에서 3%밖에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참여예산제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 거죠. 이 정도로 하려고 참여예산제도 하는 게 행정적 낭비 아니냐?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반론은 이런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자체예산만, 그러니까,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예산 비율로만 놓고 보면 참여예산제를 통해서 제시된 액수는 거의 16%정도 되요, 아니 25%인가? 아무튼 그 정도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지 않느냐, 그런 반론이 가능하고, 또 하나 반론은 뭐냐면, 우리가 올해 4년째인데, 조례 제정 이전에 시범 운영을 한 번 했고, 조례에 의해서 2004년, 2005년을 했는데, 2005년 통계는 아직 제가 못 봤는데, 2003년과 2004년 통계를 보면, 사실은 저희가 제도 운영하면서 주민참여예산학교를 저희가 주관해서 직접 가서 교육을 하는 과정이라든지, 또는 시민위원회의 회의 과정에서 이게 처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의 반발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제도 정착에 주안점을 주고 운영을 하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어요. 그런 것이 실질적으로 반영된 것이 아니냐, 그런 평가도 합니다. 이 제도가 정착이 되고 정말로 예산에 대해서, 내용을 가지고 우리가 참여를 해보자는 식으로 접근하면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예산에 대한 의견이 표출돼서 실적도 이전보다 증가할 거다, 그렇게 보고요, 또 하나 반론은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시민들도 그렇고 시민위원회도 그렇고, 주민참여 예산제의 실효성이 뭐냐고 보냐, 이런 질문을 했었어요. 저는 그런 설문지를 만들 때, 원칙적으로 납세자 주권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가장 많이 나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의외로 시민참여행정 구현에 훨씬 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죠. 참여예산제도에 대해서 시민들의 시각은 이것을 통해서 예산을 얼마를 바꾸고 삭감하고, 이런 것보다는 이것을 통해서 행정에 참여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결국 이 제도 자체에 아직은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어찌 보면 일방적인 행정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런 것이 실적이 크게 나타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쌓이면 실제로 실적도 나아지고 주민참여 예산제도의 본질이 납세자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제도가 발전해갈 것이다, 이렇게 보고 있죠.”

예산편성 범위의 문제를 논할 때, 지방재정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체예산, 또는 가용재원이 전체 예산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참여예산제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범위와 대상을 확장시키는 것이 과제이다. 박광우 처장은 이 질문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공무원들은 그런 얘길 자주 해요. 참여예산제도가 근본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거죠. 뭐냐 하면, 지금 지방재정이 자치구 같은 경우는 가용재원 자체가 없다, 특히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 복지재정 분권화하면서 적자라는 얘기까지 하거든요. 본예산을 과거에 비해 대폭 늘리면서 지방비 분담도 해야 하기 때문에, 지방비 분담의 경우 작년 통계로 광주시 5개 자치구가 260억인가, 그렇거든요. 그건 사실 말이 안 되죠. 다른 예산을 줄여서 그걸 하면 되는데, 안 하거든요. 그래서 일부 공무원들의 여비를 줄여서 비용을 댄 것은 사실이에요. 어쨌든, 현실은 현실이에요. 현실적으로 공무원들이 복지재정이 늘어나서 그에 따른 지방비 분담을 메칭하지 못한 게 자치구별로 수십억, 다 합치면 260억까지 되는 정도로 자치구의 예산이 경직돼 있는 건 사실이고, 그러다보니까 참여예산제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공무원들이 해요. 그러나 저와 마찬가지로 곽채기 교수님도 그런 현실이기 때문에 참여예산제도를 해야 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거죠. 예산이 있고 없고가 참여예산제도를 도입하고 안 하고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납세자 주권 차원에서 하는 것이지, 어떤 예산의 양에 따라 하고 안 하고,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그게 문제긴 문제에요. 저는 오히려 그런 문제도 역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자치구 예산의 경직성, 지방재정의 열악한 문제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해법을 모색할 수 있는, 또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주요한 지지세력,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측면에서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운영하려는 인식의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렇다면 어느 범위까지 할 것인가에 있어서, 우리가 제도 설계하는 과정에 있어서 논란거리잖아요. 저는 원칙적으로 모든 예산에 대해서 시민들이 참여하고 의견 개진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공무원 인건비도 이제는 시민들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우리나라 법이 공무원 인건비는 그야말로 법정 경비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의견을 낼 수 없는데, 앞으로 총액인건비가 내년부터 전면적으로 된다고 하면 그럴 여지도 있고, 우리나라 공무원이 저는 지역의 수입에 따라, 재정의 여건에 따라서 공무원 수라든지 월급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봐요. 지방자치이기 때문이죠. 물론 국가가 수평적인 형평성을 맞춰줘야 한다고 보는데, 강남구 같은 경우는 역교부세제도가 도입이 돼서 수평적인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국가의 몫이라고 치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간의 소득의 차이는 엄존하고 여러 가지 생산적인 차이는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반영한 공무원의 직급이라든지 급여의 차등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고 했을 때, 주민들이 참여해서 그런 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하고, 그 외에 무슨 국고보조금 사업도 지방의회의 권한이 없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국고보조금이 실제로 일률적으로 내려오잖아요. 그래서 지역 실정에 안 맞는데, 내려온 돈은 써야 한다고 해서 그것을 써서 국가적으로 예산을 낭비한 사례가 많잖아요. 그래서 그런 문제도 과감하게 참여예산제를 통해 우리는 이 국고보조금이 우리 지역에는 필요 없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문화예술센터를 지으라고 왔는데, 구별로 지을 게 아니라, 광주시 통합해서 하나로 지어서 같이 이용하게 한다던지, 2개구가 통합한다던지, 이렇게 되면 훨씬 전체 예산의 효율성을 높일 수가 있는데, 그런 거라고 하면 참여예산제도를 해서 국고보조금을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상상은 못 하죠. 공무원들이 깜짝 놀라 자빠질 거 아니에요. 그리고 자체사업은 당연히, 지금은 자체사업 중에 가용예산에 한정해서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거죠. 북구를 놓고 보면 제도가 도입이 됐고, 지방재정법에도 임의조항이지만 전국적으로 제도화단계이기 때문에, 이제는 실제로 이 제도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을 해야 되고 그러려면 형식이 아니라 내용, 예산의 내용을 가지고 고민할 때라고 봅니다. 그러면 자체사업, 나아가서 목적형 사업 모두 공식적으로는 의견 반영에 참여 범위를 확대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참여예산제가 정착되면 공무원의 인건비를 포함한 모든 재정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게 박광우 처장의 지론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참여예산제도를 통한 시민의 결집은 중앙을 압박하는 카드로 작용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재정분권을 촉진시키는 직접적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게 박광우 처장의 판단이다. 물론 인식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행정부와 의회, 나아가 시민사회 속으로 점차 녹여내는 것이 운동적 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가지를 물었다. 아래로부터 힘을 키우기 위한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는지, 또 하나는 설문결과에 의하면, 참여예산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인지도가 상당히 낮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물었다.

“설문지부터 말씀드리면, 그것도 지난 번 토론회 때 논란거리였어요. 그 결과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였어요. 저나 곽채기 교수님뿐 아니라 구청장과 공무원 모두 놀랐죠. 16%가 나왔거든요. 광주 북구가 전국 최초로 실시했기 때문에 언론에 자주 나왔거든요. 그런데 광주 북구청이 이렇게 반론하더라고요. 참여예산제도 하나의 시책인데, 그 정도의 수치면 높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지금 광주시장이 누구인지, 북구청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라는 설문조사를 하면, 20%가 안 나온다는 거예요. 실제 이 사람들이 당선됐을 때, 35% 정도에서 40%로 당선된 사람들이에요. 예를 들어 시에서 무슨 화장실 청결운동을 한다면 그 시책을 아는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라고 하면, 참여예산제도도 하나의 시책이라고 한다면 16%면 많이 나온 거다, 이런 반론이 나오더라고요. 그것도 해석이 필요한 것 같고. 그런데 하여튼 저는 아래로부터 참여를 활성화시키는 문제는 주민의식, NGO의 역할인 것 같아요. 곽채기 교수님도 결론에서 NGO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매개기능, 교육기능, 모니터링 기능, 이런 것을 NGO의 기능으로 보고 있는데, 결국 저는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대의민주주의잖아요. 그리고 직접민주주의는 이를 보완하는 거고요.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직접 시민 개개인이 주민소송을 한다거나 주민투표를 한다거나, 이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결국에는 근본적으로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의 역할인 것 같고, 그래서 참여예산제도도 직접민주주의의 유형이기 때문에 이것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자본’, 즉 시민단체의 역할, 특히 풀뿌리단체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대변형 운동이 아니라 지역주민에 기반 한 풀뿌리단체들이 탄탄해야 한다는 거죠. 브라질도 그렇잖아요. 그런 역할을 하는 단체가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도 그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됐을 때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우리도 빨리 시민운동이 그렇게 전환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단체들을 인큐베이터 하는 활동이 필요할 것 같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내가 하고 싶고 여전히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과제죠. 우리가 예산감시센터가 창립 때부터 나름대로 예산 분야에서 활동을 해왔는데, 이 예산감시센터가 운영이 되려면 전문가들이 결합돼 있어야 하는 거죠. 그 다음에 이것을 상설적으로 지원하고 연계해서 활동을 하는 사무처에 전문역량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또 하나가 이것과 별도로 회원들 중에 예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활동하는, 옛날에 참여연대의 ‘곳간을 지키는 사람들’처럼, 이런 식의 제도가 이 세 개의 조직화 방향을 가지고 사람을 모아 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제가 그런 것을 하고 싶어요.”

참여예산제를 인지하고 있는 시민이 16%에 머물렀다는 결과에 시민단체는 물론 행정부도 꽤 놀랐던 것 같다. 지역언론뿐 아니라 중앙언론에도 큰 화제였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시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적은 수치가 아니라는 것이 공무원들의 인식이다. 설문조사 결과가 직접적 이유는 아니었지만, 박광우 처장도 풀뿌리 조직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앞으로 중요한 운동의 과제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시민위원회에 참여하는 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없는지 물었다.

“그런 개연성은 충분히 있고요, 처음부터 역기능 중에 하나로 그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죠. 그러나 표출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린 그런 과정일 겁니다. 운영 자체를 제도 정착에 주안점을 두고 서로간의 합의가 형성됐기 때문이죠. 그러나 본격적으로 내용으로 더 들어가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선순위 결정 기준이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설령 갈등이 존재하더라도 이 구조 내에서 자율통제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대표가 아니에요. 구의원들은 대의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사람들이 동별로 온다고 해서 이 사람들은 대표를 하진 않거든요. 다만 의지가 있는 사람이죠. 실제로 그런 사례는 있어요. 예를 들면, 이건 여담인데, 시민위원들이 동에 가서 술자리에서 구의원들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 예산은 우리가 다 한다, 이런 식으로 떠들고 다녀서 그게 해당 구의원 귀에 들어가서 그게 구의회 내에서 회자되고, 아까 말씀 드린 연구회 삭감이라든지, 참여예산제도에 대해서 구의원들이 견제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거든요. 실제로 개인적인 충돌이 있는 경우도 있고요. 또 참여하는 분들이 이번 지방선거 때 출마도 하고 이럼으로써 의원들과 대립을 하게 되고 충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 일부는 이해당사자들이 올 수도 있어요.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와서 그 예산을 늘려달라고 한다든지, 어르신들이 동네에 노인정을 내달라고 한다든지. 그러나 그게 수용이 안 되는 거죠. 왜냐하면 이것은 자체적으로 이 분들이 위원회에서 토론을 통해서 의견을 모아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거기서 다수를 설득시키지 않는다면 그 의견이 채택될 가능성이 없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재 제도적으로 회의록을 공개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물론 구에서 회의록을 공개 안하고 있긴 한데, 아무튼 이 사람들이 대표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기 의견을 상식적으로 수렴하는 매개자 역할이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분과라든지 위원회에서 합의가 되어야 하는 건데, 개인의 이익을 반영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점, 그리고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에 회의록이 공개되기 때문에 역시 그것은 통제될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의회 의원들이 자기들 이권을 추구하는 행위는 폐쇄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인데, 이 제도는 그렇게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이 관철될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갈등 요인은 여러 곳에 도사리고 있다. 시민단체와 행정부, 행정부와 의회는 물론 시민들 개개인의 갈등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선명하게 표출된 사례는 없다. 앞으로 그럴 개연성이 존재하지만, 제도적으로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박광우 처장의 생각이다. 그것은 곧 개방성과 연동된다. 참여하는 시민들은 동네를 대표하는 대리인이 아니며, 그들이 토론한 내용은 모두 공개되고, 일정한 선정기준에 의해 작동된다면 갈등이 불거질 염려는 크지 않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듯 하다. 여전히 갈등의 개연성은 존재한다. 박광우 처장은 시민위원회가 대표성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시민위원회가 또 하나의 대의제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물었다.

“그건 맞습니다. 어떤 교수님들이 논평을 하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대의제가 아닌데, 대의제의 충돌은 얼마든지 있는 거고 그 사람들이 정말 공익적으로 활동하느냐 하는 보장이 없는데, 그것은 근본적인 한계겠죠. 불가피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이것을 안 할 수는 없는 것이라서,(웃음) 그래서 그렇기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바꿔나가야 한다고 봐요. 브라질의 경우는 참여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잖아요. 일반 시민들 중에 대의원을 뽑고, 거기세 평의원을 뽑고, 이렇게 해서 나름대로 골고루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렇게 제도를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는 방법 외에는, 이 제도를 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문제는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고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박광우 처장의 생각이다. 브라질의 사례가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포르뚜알레그레와 우리나라의 여건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제도가 갖고 있는 차이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브라질은 주민조직의 질이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근본적으로 잘 되려면, 공무원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참여예산제도만 놓고 봐도 예산부서 공무원들과 그렇지 않은 공무원들과의 차이가 존재하거든요. 예산부서 공무원들은 피곤해 하면서도 업무니까 참여예산을 하거든요. 또 이 사람들은 내놓고 그런 얘기를 해요. 관련되지 않는 공무원들에게 항의를 받는다는 거죠. 이런 처지가 있는 거예요. 그것이 이 제도에 투영이 되면 결국 공무원들이 자료를 제출한다든지, 설명을 한다든지, 위원회에서 답변을 한다든지, 이런 과정에서 적극적일 수가 없다는 거죠. 그리고 근본적으로 참여예산제도는 단순히 예산의 참여가 아니라 결국엔 구 행정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잖아요. 예산이라는 것이 사업의 반영이기 때문에. 그러나 공무원들은 그렇게 접근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공무원들이 전반적인 행정의 틀 자체를 바꾸고 인식도 바꿔야 하는 과제를 동시에 진행시켜야 하는데, 지금은 엇박자죠. 물론 참여예산 과정에서 공무원 교육도 하거든요. 그러나 형식적이죠. 공무원들이 참여민주주의 시대에 맞게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가 과제인데, 저희가 내놓은 해법이 주민참여 예산학교를 공무원들과 함께하자, 또는 공무원과 시민위원들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해서 운영을 하자, 하여튼 그것도 하나의 과제입니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이라는 책을 보면, 포르투알레그레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무원들의 헌신성이다. 제도 자체가 그러하기도 하지만, 포르투알레그레 공무원들은 참여예산을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것과 비교한다면 예산편성권을 움켜쥔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변화, 특히 예산 업무와 관련 없는 공무원들의 인식의 변화가 중요한 과제다. 시민위원회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전문성 논란은 없는지.

“전문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죠. 예산 공무원들은 다른 부서 공무원들보다 수당을 더 받잖아요. 그만큼 행정에서도 예산부서는 전문부서로 인정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예산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봐요. 예산이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사업의 반영인데, 시민들이 알기 쉽게 바꾸도록 노력을 해야 하거든요. 이렇게 전문성이라는 울타리로 가둬놓고 일반 시민들이 예산편성을 어떻게 하느냐고 접근하는 것은 좀 어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는 그것이 있어요. 앞으로 복식부기제도가 도입이 되잖아요. 복식부기제도를 하면 참여예산제도가 난관에 부닥치게 됩니다. 복식부기제도는 시민사회가 요구했던 것이죠. 예산의 투명성, 예산운영의 효율성을 기하는 데는 복식부기제도가 바람직한데, 예산운영의 민주성을 확보하는 데는 오히려 저해가 된다,(웃음) 그 제도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어려운 제도이기 때문에 오히려 참여를 가로막는 기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마 복식부기제도의 도입 과정에서 해법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예산제도가 바뀌는 과정에서 참여예산제도가 여전히 운영될 수 있을 것인지, 해법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도 고민이죠.”

이렇게 놓고 보면 시민들과 대면하는 프로그램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토론회나 공청회, 교육프로그램 등이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짜여져 있느냐는 전문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참여의 질도 보장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해요........분야별 설명회는 분과별로 하고, 사전설명회, 총괄설명회는 일반 시민들 누구라도 올 수 있게 되어 있거든요. 대부분 시민위원들, 동 주민자치위원들, 공무원들, 이렇게 앉아서 하죠. 그래서 지역위원회, 지역회의가 꾸려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겁니다. 하여튼 저희가 16%가 나온 것도 그런 원인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체계적인 홍보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나 방안을 제시했어요. 어찌 보면 그것이 공무원들이 형식적으로 운영하는 단면이기도 하다, 설명회를 한다고 하면 그 즉시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홍보가 안 된 거고, 또 할 수 있는데도 안 한 거죠. 예를 들면 구보를 만들잖아요. 구보에 홍보를 한다든지, 반상회 할 때 한다든지, 동 차원에서 다른 시책을 하듯이 이렇게 한다든지, 이래야 하는데 안 하고 홈페이지에만 띄우는 거죠. 사실 행정력을 동원하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언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행정력을 총 동원해서 홍보를 해야 하는데 안 하는 거죠. 조례 내용을 보면 홍보 소위원회도 있어요. 그런 것을 가동을 하고 해야 하는데, 안 되는 거죠. 그런 것은 한편으로 위원회가 공무원들과 어정쩡하게 동거하는 그런 시스템이 갖는 문제점이죠. 브라질 같은 경우는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굴러가면서 주도를 하잖아요. 우리는 그게 아니죠. 공무원이 손 놔버리면 위원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구조가 돼 있는 거죠. 위원회가 훨씬 더 자기 활동력을 가져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물론 그러다보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을 수 있죠. 여하튼 그런 것과 행정력일 결합이 되면 조금 달라지겠죠.”

‘어정쩡한 동거’ 아마도 광주 북구청뿐 아니라 울산동구나 대전 대덕구의 경우도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진 못한 듯싶다. 토론회 하나만 보더라도 기존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참여예산제를 좀 더 미시적으로 보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가에 따라 질적 변화를 야기할 수도 있다. 홍보의 과정이나 방법, 사용하는 용어, 토론의 형식 등에 따라 참여자들을 긴장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참여의 동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좀 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박광우 처장은 지역회의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공무원들도 동의하는지 물었다.

“공무원들은 2차 지역회의는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어서 다시 조율해야 합니다. 예산 순기상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얘긴데, 대개 공무원들이 예산편성을 하면 날 새잖아요. 총괄설명회 자료 만들기도 복잡한데, 26개 동에서 지역회의를 하면 누가 운영할 것이며, 그 자료를 어떻게 하고, 그렇게 수렴된 것을 총괄설명회 때 어떻게 반영을 하고,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하고 있죠. 곽채기 교수는 예산 순기를 바꿔서라도 그것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거고. 저는 참여예산제도를 하려면 예산순기를 조정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봐요. 그렇게 될 조건이 되잖아요. 과거에 예산편성지침을 내려 보낼 때는 7월31일 내려 보내니까, 그때부터 할 수 있는데, 지금은 폐지됐기 때문에 얼마든지 앞당길 수 있고, 의회는 어차피 법적으로 50일, 40일 전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순기를 구청에서 조정할 수 있는 거죠. 하여튼 교수님이 원칙적으로 주장하는 거 하고, 저는 가운데서 피곤해요.(웃음) 공무원들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고, 저는 두 개를 짬뽕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하도록 해야 하니까.”

참여예산제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바꿔야 할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예산 순기만 하더라도 그렇다. 한 번 몸에 밴 관성을 깨기란 쉽지 않다. 지역회의를 통해 올라간 의견이 최종 편성 전 단계에서 다시 2차 지역회의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어찌 보면 참여예산의 취지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절차다. 그러나 행정부는 아직 난색을 표하고 있다.

박광우 처장이 구상하는 지역회의는 주민자치위원 3명과 일반 주민들 4명 이상으로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주민자치위원 1명과 일반 시민 2명을 시민위원회 대표로 선출할 예정이다. 지역회의를 주도할 그룹은 아무래도 주민자치위원회가 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남녀 비율은 연구회에서 맞추고 있다. 대략 6:4 정도라고 보면 된다. 긍정적인 방침이다. 광주 북구청의 참여예산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에 따라 지속될지, 중단될지도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지속되더라도 더 민주적 시스템을 갖춘다는 보장도 없다. 박광우 처장의 표현대로 ‘어정쩡한 동거’가 연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의 실험이 가져다준 자신감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생각보다 시행착오가 많지 않았고 주도하는 그룹이나 참여하는 시민들도 이 제도의 효용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참여예산이라는 대세가 쉽게 꺾이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넘어야 할 산도 많지만, 그 산을 넘고야 말겠다는 지역사회의 의지를 박광우 처장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끝으로, 이 제도를 통해 무엇이 좋아졌는지 물었다. 사실 “참여예산제도는 너에게 이런 이득을 가져다준다!”라는 말만큼 설득력 있는 홍보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에 대한 답을 끝으로 시리즈②를 마친다.

“글쎄요.........너무 포괄적이라서.(웃음).........저는 장롱 속에 넣었던 권리를 찾았다는 점인데, 사실은 당연한 것이죠. 그 동안에 예산이 원칙적으로 대표적인 밀실행정이었잖아요. 잘못된 것임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참여 예산에 대해서 납세자들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건데, 그런 의식을 가지고 시민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지방자치 10년을 보면서 단체장의 권한만 강화시켜줬잖아요. 단체장은 지역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의회는 약하고, 주민들은 참여할 게재가 없고, 그런 큰 틀에서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유용한 기재라고 생각해요. 또한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재다, 그러니까 4대 제도인 소송, 투표, 발의, 소환까지 모두 도입되더라도 이 제도들은 일정한 계기가 있어야 참여할 수 있는 거잖아요. 참여예산은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행정의 지방자치를 바꿀 수 있는 기재가 아닌가 싶어요. 아직 시민들이 예산을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조세저항이 구체화됐다거나 이런 것이 아직 없잖아요. 세금에 대해서 꼼꼼하게 따져본다는 인식이 아직은 없는 것 같아요.......시민들에게 이런 것이 좋다고 얘기하려면, 사례를 많이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브라질 같은 경우는 그런 사례가 있잖아요. 사실은 그런 점에서도 저희가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죠. 그 동안 저희가 광주시 예산을 분석을 해서 의견도 내고 그랬는데, 올해는 북구만 놓고 보면, 조직적으로 예산을 해서 한 번 바꿔보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죠. 어쨌든 이런 사례를 만들어서 접근을 하면, 바꿔지는 모습들을 시민들이 목격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2006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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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① : 광주북구 주민참여예산, 그것을 알려주마!! - 광주참여자치21/광주북구청을 찾아

인터뷰 : 박광우(광주참여자치21 사무처장)/이승래(광주북구청 기획감사실/참여예산 담당)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 아래는 시리즈①이다. 몇 편으로 나눈 것은 내용이 길어서이기도 하지만, 좀 더 심층적으로 다뤄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광주북구의 참여예산 실험이 어떤 좌표에 있는지를 확인한다면 ‘한국형 참여예산제도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점칠 수 있지 않을까? 주민참여예산제도에 관심이 있는 지역이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되는 시리즈가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기대하시길........


참여예산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다. 광주 북구를 필두로 울산 동구, 대전 대덕구, 청주시, 안산시 등은 이미 조례를 통해 입법화한 상태고, “한국형 참여예산제도”의 상을 그려나가고 있다. 조례로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인천광역시는 1999년부터 예산편성 전에 분야별 시민단체의 의견을 반영해왔으며 나주시는 2003년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시민예산설명회 등을 개최하면서 예산편성 과정의 주민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부천시나 광주시 등도 부분적으로 참여예산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서울 강남구의 경우는 2004년에 1억 이상 사업비를 동별로 배정하여 주민자치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하였다 시민자치정책센터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라와 있는 광주참여자치21 박광우 사무처장의 논문을 보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흐름은 그동안 시민사회단체의 예산편성 과정의 주민참여에 대한 부단한 요구와 개별 지방자치단체의 의지 등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참여정부의 의지와 맥을 같이 한다. 즉, 2005년 하반기, 정부는 ‘지방재정법’을 개정하면서 예산편성 과정의 주민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제39조 (지방예산편성과정에 주민참여)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지방예산편성과정에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여 시행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지방재정법시행령’도 개정되었는데, 시행령에서는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제46조 (지방예산 편성과정에의 주민참여 절차) ①법 제39조의 규정에 의한 지방예산 편성과정에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 각 호와 같다.
1. 주요사업에 대한 공청회 또는 간담회
2. 주요사업에 대한 서면 또는 인터넷 설문조사
3. 사업공모
4. 그 밖에 주민의견 수렴에 적합하다고 인정하여 조례로 정하는 방법
②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수렴된 주민의견을 검토하고 그 결과를 예산편성시 반영할 수 있다.
③그 밖에 주민참여 예산의 범위·주민의견수렴에 관한 절차·운영방법 등 구체적인 사항은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한다.


시행령 46조는 3항은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게 함으로써 참여예산제도 입법화를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하였다. 조례의 대표적인 기능 중에 하나인 입법선도성은 참여예산제도를 통해서도 잘 보여주었다. 예산편성 과정의 주민참여라는 시대적 요청이 구체적인 지역에서부터 자치입법화되면서 중앙정부 행정기관의 입법권 행사에 자극을 주었고, 결국 법령이 개정되는 효과를 발휘했다. 물론 강제조항은 아니지만, 참여정부는 광주 북구청의 참여예산제도를 ‘브랜드 사업’으로 선정하면서까지 참여예산제도의 도입을 부추기고 있다. 중앙정부가 이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지임에 분명하다. 여하튼 참여예산제도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입법화된 지방자치단체의 참여예산제도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 조례의 내용들을 비교해보았다.

<표1> 각 조례가 담고 있는 예산참여시(구)민위원회 구성 내용

지역 예산참여시(구)민위원회 관련 내용
광주북구 ②위원회의 구성은 80인 이내로 한다.
③위원회의 위원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 중에서 구청장이 위촉하되 제2호에 해당하는 자는 각 동별 1인 이상으로 하고 제3호에 해당하는 자는 총 위원의 2분의1 이상으로 한다.
1. 예산 및 행정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전문가로서 비영리 민간단체지원법에 의한 비영리민간단체의 추천을 받은 자
2. 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추천한 주민자치위원
3. 본 위원회의 참여를 희망하는 주민으로서 공개모집절차에 의해 선정된 자
④구청장이 위원을 위촉할 때는 미리 선정기준 및 지원일시를 공고하여야 하며, 비영리민간단체 및 동 주민자치위원회의 추천 또는 주민으로부터 신청을 받아 선정기준에 따라 심사하여 위촉한다.
울산동구 ②위원회의 구성은 100명 이내로 한다
③위원회의 위원은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자 중에서 구청장이 위촉하되 제1호에 해당하는 자는 총 위원의 1/2이상으로 하고, 제2호에 해당하는 자는 각 동별 1명 이상으로 한다.
1. 위원회의 참여를 희망하는 주민으로서 공개모집절차에 의해 선정된 자
2. 洞 주민자치위원회가 추천한 주민
3. 시민·사회·직능단체, 기관 등의 추천을 받은 자
④위원회의 위원중 타 지역에 거주하는 자는 총 위원의 15이하로 한다.
⑤제3항 각 호의 모집인원과 추천할 수 있는 시민·사회·직능단체, 기관 등의 기준은 규칙으로 정한다.
대전대덕 ②위원회의 구성은 100인 이내로 한다.
③위원회의 위원은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 중에서 구청장이 위촉하되 제2호에 해당하는 자는 각 동별 2인 이상으로 하고 제3호에 해당하는 자는 총 위원의 2분의1 이상으로 한다.
1. 예산 및 행정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전문가로서「비영리 민간단체 지원법」에 의한 대전지역에 소재하는 비영리민간단체의 추천을 받은 자
2. 동 지역회의에서 추천한 자
3. 본 위원회의 참여를 희망하는 주민으로서 공개모집절차에 의해 선정된 자
④구청장이 위원을 위촉할 때는 미리 선정기준 및 모집기간 등을 공고하여야 하며, 선정기준에 따라 심사하여 위촉한다.
청주 ④예산참여시민위원회 위원은 주민자치위원회가 추천한 자치위원, 주민공개 모집에 의해 선정된 자, 비영리민간단체의 추천을 받은 자 중 지역성, 전문성, 직능성, 공익성을 감안한 100인 이내로 구성하고 청주시 각 국별 분과위 원회를 둔다.
안산 ④위원회의 위원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 중에서 지역성, 전문성 등을 감안하여 80인 이내로 시장이 위촉한다.
1. 각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추천한 주민자치위원
2.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에 의거 설립된 민간단체의 추천을 받은자
3. 기타 위원회에 참여를 희망하는 주민으로서 공개모집 절차에 의해 선정된 자

<표1>에서 보듯이, 광구북구, 울산동구, 대전대덕, 청주시, 안산시 등의 ‘예산참여시(구)민위원회’ 구성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광주북구와 안산시는 위원회를 80명 이내로 구성토록 했고, 나머지 자치단체는 100명 이내로 규정하였다. 대체적으로 80명에서 100명 이내로 시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 인원 구성만으로 동네를 얼마나 대표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조항은 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나열했는데, 공통적으로 일반 주민들은 공개모집의 절차를 통해 선정됨을 알 수 있다. 매우 긍정적이다. 특이한 사항만 짚어보면, 광주북구, 울산동구, 대전대덕은 위원회 총 수의 2분의1 이상을 공개모집에 의한 일반 주민으로 채우고 있다. 청주나 안산은 이에 대해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위원회의 시민참여’라는 조항에 포괄적으로 공모, 또는 추천 등의 공개적인 절차로 위원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다. 광주북구, 울산동구, 대전대덕은 선정기준이나 모집기간을 공고함으로써 심사에 따라 위촉하고 있지만, 청주나 안산은 그런 조항은 없다. 가장 특이한 사항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울산동구의 경우 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도 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총 15명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왜 이러한 조항을 삽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외지인이라 하더라도 관심이 있고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둘째, 대전대덕의 경우, 각 동별 지역회의에서 추천자 2인 이상을 위원회에 참여시키고 있다. 여타의 지방자치단체와는 다르게 대전대덕은 ‘지역회의’라는 생소한 용어를 쓰고 있는데, 지역회의에 대한 규정은 아래와 같다.

지역 지역회의 구성 내용
광주북구 없음
울산동구 제19조 (구성 및 운영).......②지역회의는 해당 동에 거주하고 있는 위원회 위원 및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으로 구성하되, 다만 해당 동 주민 중 참여를 희망하는 경우 지역 회의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대상자 선정은 동장이 한다.
.......지역회의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위원회 위원을 제외한 회의참석 대상자에 대하여 별도의 설명회를 개최하여야 한다.
제20조 (회의소집 및 의결) ①위원장은 매년 구의 예산이 편성되기 이전에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지역회의를 개최한다.
②지역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으로 개의하고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21조 (기능) 지역회의는 다음 각 호의 기능을 수행한다.
1. 예산편성과 관련하여 중점투자분야 등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집약하는 활동
2. 기타 지역회의의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활동
대전대덕 제22조(구성 및 운영).......②지역회의 구성은 동별 10인 이내로 한다.
③지역회의 위원은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 중에서 동장이 위촉한다.
1. 해당 동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중 참여를 희망하는 주민
2. 주민자치위원회 등 동 단위 자생단체 회원
제23조(기능) 지역회의는 다음 각호의 기능을 수행한다.
1. 예산편성과 관련하여 중점투자분야 등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수렴 과 사업별 우선순위 결정 및 제출
2. 기타 지역회의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사항
제24조(회의) ①위원장은 매년 대덕구의 본예산이 편성되기 이전 또는 필요시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한다.
②지역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개의하고,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청주 없음
안산 없음

<표2>는 주민참여예산지역회의를 내용을 비교하고 있는데, 광주북구, 청주, 안산 등은 지역회의를 제도화하지 않았지만, 울산동구와 대전대덕은 지역회의를 둠으로써 상향식 예산참여를 지향하고 있다. 대체로 두 지역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미묘한 차이는 울산동구의 경우 구성인원을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대전대덕은 동별 10인 이내로 규정하고 있다. 시민위원회만 둔 여타의 지역에 비해 지역회의를 둔 것은 상당히 진일보한 제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대전대덕과 같이 동별 인원을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더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울산동구는 지역회의의 구성을 ‘주민자치위원’과 ‘희망하는 주민’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반해, 대전대덕은 이를 포함해 ‘동 단위 자생단체 회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두 지역 모두 예산편성 전에 회의를 개최하도록 하고 있는데, 대전대덕은 ‘필요 시 회의 개최’를 삽입함으로써 회의 개최 여지를 더 넓히고 있다. 대체로 광주북구나 울산동구에 비해 다소 늦게 만들어진 대전대덕의 조례가 좀 더 민주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내용은 비슷하다. 한편 시민위원회의 기능은 어떤지 확인해보자.

지역 예산참여시(구)민위원회의 기능
광주북구 제13조(위원회의 기능) 위원회는 다음 각호의 1의 기능을 수행한다.
1. 예산편성 지침에 대한 의견수렴
2. 예산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집약하는 활동 등 예산편성 과정에 참여하여 예산안에 대한 의견제출
3. 주민들을 대상으로 예산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활동
4. 예산정책토론회 개최 등에 관한 활동
5. 결산에 대한 설명회 참여 활동
6. 기타 위원회의 목적달성을 위해 필요한 활동
울산동구 제12조 (기능) 위원회는 다음 각 호의 기능을 수행한다.
1. 예산편성 지침에 대한 의견수렴
2. 예산편성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집약하는 활동
3. 총회·분과위원회 개최 등에 관한 활동
4. 기타 위원회의 목적달성을 위해 필요한 활동
대전대덕 제13조(기능) 위원회는 다음 각호의 기능을 수행한다.
1. 예산편성 매뉴얼에 대한 의견수렴 활동
2. 예산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집약 활동
3. 중점투자사업에 대한 우선순위 결정 및 제출
4. 주민들을 대상으로 예산에 대한 홍보 활동
5. 보고회 및 토론회 개최 등에 관한 활동
6. 기타 위원회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사항
청주 ③예산참여시민위원회 기능은 다음 각호와 같다.
1. 예산편성 지침에 대한 의견수렴
2. 예산에 대한 주민의견 수렴 집약활동 등 예산편성과정에 참여하여 예산안에 대한 의견제출
3. 예산에 대한 시민교육
4. 예산정책토론회 및 결산설명회 개최
안산 ③위원회는 의회의 예산 심의권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다음 각호와 같이 활동할 수 있다.
1. 예산편성에 관한 사항
2. 예산초안에 대한 주민의견 수렴과 검토의견 제시에 관한 사항
3. 예산공청회에 관한 사항

위원회의 기능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제도상으로 광주북구의 경우 ‘결산에 대한 설명회’를 명시하고 있으며, 울산동구의 경우 ‘총회와 분과위원회’ 활동을, 대전대덕의 경우 ‘중점투자사업에 대한 우선순위 결정’을 명문화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예산지침이나 편성 과정의 주민의견수렴, 주민에 대한 예산교육, 토론회/설명회/보고회 등 개최, 홍보 등을 담고 있었다. 다만 안산시의 경우 예산편성에 관한 주민의견수렴 과정만 담겨 있다. 아래는 정보공개에 관한 내용이다.

지역 회의 공개에 관한 내용
광주북구 제15조(회의록 공개의 원칙) 위원회의 회의는 공개하며,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법률 제7조제1항의 규정을 제외하고는 회의 종료후 7일 이내에 회의 개최 일시 및 장소, 심의안건, 출석위원 성명, 발언내용, 결의내용 등을 담은 회의록을 북구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여야 한다.
울산동구 제14조 (회의록 공개의 원칙) 회의는 공개하며,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법률 제7조 제1항의 비공개사유가 없는 한 회의종료 후 7일 이내에 회의개최 일시 및 장소, 심의안건, 결의내용 등을 담은 회의록을 동구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하여야 한다.
대전대덕 제15조(회의록 공개의 원칙) 위원회의 회의는 공개하며,「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제9조제1항의 규정을 제외하고는 회의종료 후 7일 이내에 회의개최 일시 및 장소, 심의안건, 출석위원 성명, 발언내용, 결의내용 등을 담은 회의록을 대덕구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여야 한다.
청주 제6조(회의공개의 원칙) 시에 설치된 각종 위원회의 회의는 법령 및 타 조례에 정해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극 공개하고 회의록 및 회의자료 등을 홈페이지 등에 공개하여야 한다.
안산 제6조 (위원회의 공개) ①시에 설치된 각종 위원회의 회의자료, 내용 및 결과 등은 위원회의 법령 및 다른 조례에서 공개하지 아니하도록 정하여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개한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회의자료 등을 공개하는 경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터넷 시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5개 지방자치단체 모두 위원회 회의에 관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공개하도록 하고 있었다. 광주북구, 울산동구, 대전대덕 등은 회의 종료 후 7일 이내에 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하고 있으며 청주와 안산은 일반적인 위원회 공개원칙을 따르고 있다. 다만 안산의 경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라는 규정이 비공개 사유의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우려가 있다. 대체로 회의 공개에 대한 의지는 뚜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반 시민들과 소통하는 방식, 즉 토론회, 설명회, 교육 등은 어떻게 제도화되었을까? 아래 표를 비교해보자.

지역 토론회/공청회/설명회/교육 등에 대한 내용
광주북구 - 예산정책토론회 : 사전설명회/분야별토론회/총괄토론회로 구분
- 사전설명회 : 매년 1회 개최. 전년도 결산결과에 대한 설명 및 다음연도 예산편성 방향에 대한 토론.
- 분야별 토론회 : 매년 9월 또는 10월 중에 개최. 관계공무원들이 출석하여 다음연도 예산편성의 분야별 방향과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이에 대해 토론.
- 총괄토론회 : 매년 9월 또는 10월 중에 개최. 분야별 토론회의 결과를 수렴하면서, 북구 전체의 예산편성의 우선순위와 대규모 신규사업의 타당성, 분야별 토론내용 중 상충되는 부분의 조정 등에 관하여 토론.
울산동구 - 예산학교 : 매년 위원회를 대상으로 예산참여 전에 실시.
※ 예산정책토론을 따로 명시하고 있지 않음.
대전대덕 - 예산학교는 : 매년 위원회 위원 및 지역회의 위원을 대상으로 예산참여 전에 실시.
- 보고회 : 위원회 위원 및 지역회의 위원을 대상으로 다음연도 본 예산안이 확정된 후 분과위원회 활동상황 및 성과 등에 대하여 필요시 개최.
※ 예산정책토론을 따로 명시하고 있지 않음.
청주 - 예산정책토론회 및 결산설명회 : 위원회 기능에서 명시
※ 예산정책토론을 따로 명시하고 있지 않음.
안산 따로 명시하고 있지 않음

<표5>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주북구만이 체계적인 예산정책토론회 과정을 두고 있었다. 크게 사전설명회, 분야별 토론회, 총괄토론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일정은 예산달력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에 비해 울산동구는 ‘예산학교’만을 명시하고 있으며, 대전대덕은 ‘예산학교’와 더불어 ‘보고회’를 두고 있다. 안산시는 따로 명시하고 있지 않았고, 청주시는 위원회 기능에서 명시하고 있다. 토론회/설명회/교육 등은 주민과 만나고 소통하는 직접적인 연결고리다. 주민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훌륭한 교육과 훈련의 장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민과의 밀착 프로그램은 주민참여예산제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식적인 토론회나 설명회를 탈피할 필요가 있고, 필요하다면 일상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조례상에는 그러한 구체성이 없다는 것이 큰 흠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특이사항들이 있는데, 아래 표를 보자.

지역
주민참여예산연구회
주민참여예산협의회
광주북구
O
X
울산동구
O
O
대전대덕
O
O
청주
X
X
안산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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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참여예산연구회’는 참여예산제도에 대한 운영방법, 정책수립, 연구개발 등을 목적으로 한다. 주로 전문가, 관련분야 종사자, 시민단체관계자, 위원회 대표 등 9인에서(광주북구/대전대덕) 15인(울산동구)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민참여예산협의회’는 구청장, 부구청장, 국장, 기획감사실장, 시민위원장, 분과위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예산편성의 심의와 조정을 담당한다.

조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대체로 참여예산제도의 취지나 민주성, 정보공개의 원칙 등이 잘 반영되어 있었다. 물론 청주나 안산은 시(주)민참여기본조례를 통해 참여예산의 내용을 간결하게 적고 있지만, 조례 전반을 흐르는 기조는 시민참여의 취지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지역이든 ‘주민이 참여하는 예산편성’을 실질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시민 누구에게나 참여의 기회는 개방적인가?’, ‘토론회, 설명회 등 주민과 접촉하는 프로그램은 일방성을 탈피했는가?’, ‘주민교육은 일상화되었는가?’, ‘모든 시민이 인지할 만큼 홍보는 충분한가?’, ‘상시적인 공론장, 또는 주민과의 접촉면을 얼마나 넓히고 있는가?’ 등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조례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부분을 파악하긴 힘들다. 그래서 면밀한 현장조사가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이번 ‘지역운동사례’는 광주북구를 선택했다. 운영되는 현장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광주참여자치21의 박광우 사무처장과 조우했다. 박광우 사무처장은 전남대 곽채기 교수와 함께 북구 참여예산제도의 산파 역할을 했다. 박광우 처장만큼 전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편, 공무원의 생각이 무엇인지 들어보기 위해 참여예산 담당하는 기획감사실의 이승래 씨를 만났다. 자, 그럼 이제부터 두 분이 전하는 광주북구 참여예산제도에 대해 들어보자.

찾아가던 날, 박광우 사무처장은 매우 분주했다. 광주북구 참여예산조례 개정안 때문이었는데, 행정부와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조례의 개정 내용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제가 이것(조례 개정안)에 대해 의견을 주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북구가 행자부에서 혁신 브랜드 사업의 하나로 선정이 됐어요. 원래 광주 북구청 처음으로 참여예산제를 시작했잖습니까? 북구청이 자랑할 것은 처음 시도했다는 것인데, 그 이후에 울산동구가 광주북구를 벤치마킹 했고, 울산동구를 대전대덕구가 벤치마킹을 했거든요. 북구보다는 동구가 조금 진전되어 있고, 그것보다는 대덕구가 조금 더 앞서 나가 있고, 그래서 북구가 기존의 것을 고수를 하면 처음 시작했다는 것만 남고, 최악의 경우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작년에 저희가 설문조사도 하고 토론회도 해서 개선안을 내놓은 게 있고, 이번에 조례 개정으로 입법 상태인데, 지금 입법된 것이 좀 부실해서 최근 연구회에서 대폭 수정하자, 그런 단계에요. 수정안을 저에게 어제 보내와서 보완을 하고 있는 중인데, 이것도 좀 부실합니다.”

박광우 처장은 광주북구가 ‘처음 시행’했다는 레테르만 달았을 뿐,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뒤쳐질 수 있다는 상황인식을 갖고 있었다. 실효성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더 주민친화적이어야 한다는 의지를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개선책을 가지고 있을까?

“울산 동구와 북구 것만 비교해보면, 울산 동구는 브라질의 뽀르투알레그레와 광주 북구를 결합시킨 형태에요. 주민참여 예산제의 핵심은 제가 볼 때는 실제로 주민들이 얼마나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가 설계가 됐느냐, 얼마나 주민친화적이냐,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울산 동구에 비해서 북구가 뒤처지죠. 북구는 런 점에서 대단히 형식적이고, 참여를 형식화할, 극단적으로 그럴 우려가 있어요. 그것을 보완해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물었다. 박광우 처장이 논문에서 썼던 ‘지역총회’를 말하는 것이냐고. 짧은 질문에 비해 대답은 길었다.

“뭐냐면, 울산동구는 광주북구에 없는 지역회의가 있어요. (이때, 자료를 가져 옴) 뽀르투알레그레는 지역총회를 하면 이때 대의원 선출을 하잖아요. 그리고 대의원 중에서 평의원을 뽑잖아요. 그 평의회가 광주북구 식으로 하면 시민위원회거든요. 여기는 8월부터 결정을 하는 구조인데, 브라질 사례를 보면 정말로 상향식으로 참여를 보장하고 있는 시스템이죠. 정말로 직접민주주의를 제도화한, 모범적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안 되어 있잖아요. 정말로 지역에서부터 자발적인 참여를 근거로 제대로 운영하고, 위원회가 참여 기재로 작동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와 브라질과의 몇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인 것 같아요. 주민의식이라든지, 그것을 조직화하는 NGO의 역할이라든지, 이런 것이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주민의식이나 그 과정을 매개할 수 있는 NGO가 없는 상태에서 주민참여를 보장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묘수를 찾는 게 최대 과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북구는 지역총회가 없이 시민위원회를 구성한 거고, 시민위원회를 구성할 때는 기존 제도와 달리, 공모라고 하는 절차를 만들어 놓은 건데, 울산 동구는 조금 진전돼서, 지역회의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동에서 먼저 논의를 하고 그것을 가지고 시민위원회에 와서 논의를 하는 구조죠. 이 부분이 광주북구와 가장 큰 차이점이고, 울산동구는 처음에 폐쇄형이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개방형으로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아마 브라질과 비슷하게 가는 것 같아요. 이에 비해 대전대덕구는 폐쇄형으로 가거든요. 아마 이 차이는 주민자치위원회의 차이인 것 같아요. 대덕구는 주민자치위원회도 하나의 자생단체로 취급을 하더라고요. 반면에 북구는 주민자치위원회가 나름대로 주민의 대의성을 보장하고 활성화됐거든요. 그런 차이점이 있는 거 같은데, 어쨌든, 첫 번째 차이는 주민들의 참여를 상향식으로 보장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느냐가 핵심적 차이고, 두 번째 차이는, 최종 결정기구, 그러니까, 예산편성권에 대해서 시민참여를 보장한다는 것이 주민참여예산제의 핵심이거든요. 실제로 그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느냐인데, 울산 동구는 이것을 공유하고 있어요. 구청장과 시민위원회가 공유하는 제도거든요. 광주북구는 지방재정계획심의위원회를 거쳐서 최종 결정을 구청장이 해요. 그러니까, 예산편성권에 대해서 납세자주권의 원칙에 입각해서 주민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은 논란거리에요. 그러니까, 그래도 결정권은 구청장이 가져야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법적으로 어쨌든 구청장이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공유할 수는 있어도, 아예 넘기는 것은 예산제도 자체의 문제, 즉 근본적인 제도의 변화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지방재정의 구조상, 시민들이 참여해서 지금 현재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요. 한 10%? 브라질도 25%라고 하는데, 나머지는 인건비라든지, 그런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주민들에게 넘기는 건 어려울 것 같고, 다만 결정 과정에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하면 되지 않겠나 싶은데, 어쨌든 그런 점에서 차이가 있고, 세 번째는 우선순위의 결정 기준이 울산동구는 있으나 광주북구는 없어요. 우선순위 기준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예산편성의 합리성이나 또 그것을 정하는 원칙을 주민들의 의견에 입각해서 시행한다는 점이거든요. 물론 실제 우선순위를 적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울산 동구만 봐도 그렇거든요. 왜냐하면 분야별로 우선순위를 동에서부터 교통분야냐, 행정분야냐, 환경분야냐, 복지분야냐 이렇게 해서 동별 우선순위를 정해 와서 가중치 두고, 이를 합해서 전체 우선순위가 나오면, 의견이 충돌했을 때 적용한다는 것이 우선순위의 취지거든요. 사실상 그런 일이 아직까지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을 뒀다는 것은 그만큼의 주민들의 의견에 입각해서 예산을 편성하겠다는 합리성을 갖췄다는 뜻이고, 우리가 참여 핵심이 우선순위의 결정이라고 했을 때, 기 기준을 두는 것이 바람직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회에 근본적으로 바꿔서 조금 더 북구가 다른 데에 뒤떨어진 것을 보완하자 하는 것이 개정안의 주요 골자입니다.”

박광우 처장이 말하는 조례 개정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① 지역회의를 둬서 상향식참여를 유도하겠다는 것 ② 예산편성권을 행정부와 공유하겠다는 것 ③ 우선순위의 기준을 세우겠다는 것 등이다. 세 가지 모두 쉽게 동의될 개선안은 아니었다. 행정부의 눈으로 보자면 달콤한 미끼보다는 쓴 독약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광우 처장은 이렇게 변하지 않으면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를 조례상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연구회에서 내놓은 안은 현재 시민위원은 NGO 추천 10명, 주민자치위원 26명, 공모해서 54명, 이렇게 해서 총 80명이거든요. 결국 시민위원회 중심으로 운영이 되는 구조에요. 인터넷에 공개해서 일반인들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동에서부터 이 논의를 할 수 있게 제도를 개선하자, 그러면 시민들의 참여를 훨씬 더 다양화하고 폭넓게 보장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핵심이죠. 그래서 지역회의를 구성하는데, 울산동구처럼 일반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자치위원회 중에서 3명, 일반시민은 공모를 해서 동별로 뽑도록 하는 거죠. 그래서 지역회의는 주민자치위원 3명, 동별로 공모를 통해서 인구 비례로 일반 주민 4명이상으로 해서 총 7명 이상으로 지역회의를 동별로 구성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현재 26개 동이기 때문에, 대략 10명으로 한다면 260명의 참여자가 확보가 되는 거죠. 시민위원회는 그 중에서 주민자치위원회에서 1명을 파견하고, 4명 이상의 지역위원 중에서 2명을 시민위원으로 파견해서 100명 정도의 시민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안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가 제안한 것 중에는 최종 결정을 하는 과정에 다시 한 번 지역회의를 소집해서 의견을 또 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아직 북구가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다. 북구가 물리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서, 최대한 그것을 협의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북구도 ‘주민참여예산협의회’를 만들고, 우선순위 기준을 만들어서 하는 것으로, 그런 정도로 개선안을 얘기하고 있어요. 그렇게만 되면 울산동구나 대덕구에 못지않은 주민친화적인 제도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박광우 처장이 제시하는 ‘지역회의’는 각 동마다 10명 정도로 구성하도록 하고, 이 중 주민자치위원은 3명, 그리고 일반 주민은 공모를 통해 뽑겠다는 방안이었다. 그렇게 되면 참여하는 인원이 260명으로 현재보다 3배 이상 증가된다. 다만 울산동구가 누구에게나 개방됐다면, 광주북구는 주민자치위원을 명문화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 지점에서 물었다. 동별 지역회의(10명) 이외의 주민 참여 통로는 무엇이 있는지.

“그것은........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시민이면 자료를 접할 수 있고 의견을 낼 수 있으니까,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지역회의 말고, 저희가 시민위원회에서 사전설명회, 분야별설명회, 총괄설명회를 하잖아요. 그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이 참여를 하니까, 보완이 된다고 생각해요.”

참여 통로 중 주민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예산정책토론회, 즉 박광우 처장이 말한 사전설명회, 분야별설명회, 그리고 총괄설명회가 그것인데, 이러한 프로그램이 형식이나 홍보 등이 매우 중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부분과 더불어 지역회의에 대해 조금 더 물었다.

“포르투알레그레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로 해서 운영되는 시스템 같고요, 포르투알레그레의 역사를 보면 참여자들이 점점 늘어나잖아요. 그런 기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고, 오히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참여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뽑아내야 되는 이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홍보만 하면 참여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하라고 자꾸 독려를 해서 그 중에서 뽑아내야 되거든요. 그런 점이 근본적으로 한계죠. 하여튼 저는 주민의식과 풀뿌리 단체의 역할이 필요한데, 저희(참여자치21)들도 사실은 구 단위를 기반으로 해서 풀뿌리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 점은 앞으로 개선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여튼 토론회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여전히 형식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어요. 참여예산 제도가 정보를 공개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 시스템이 시민참여위원회죠. 참여 과정을 보면, 예산편성지침 만들 때 의견 수렴 하는 것, 그 다음에 예산편성 지침에 의해서 각 실과 별로 예산안 편성을 할 때 분야별 토론회를 하는 거, 그리고 그것을 갖고 예산안 초안이 나오면 다시 총괄적으로 참여를 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거, 이런 과정이 핵심인데, 그 과정 자체가 사전설명회도 공청회 형식으로 되기 때문에, 형식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분과별설명회 같은 경우는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거든요. 각 분야별로 16명의 위원들이 들어가는데, 각각의 부서가 내년도에 우리는 어떤 예산을 요구하려고 한다, 그러면 여기 와서 토론을 하면 실효성 있게 도출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총괄설명회에 가면 전체 예산이 편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때문에 또 다시 형식화된 측면이 있고요, 그래서 보완하기 위해서 총괄설명회 전에 지역회의를 한 번 하면, 그나마 의견이 더 풍부하게 수렴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박광우 처장은 ‘지역회의’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지역회의’는 피라미드를 지탱하는 가장 밑바닥이다. 그것이 부실하면 피라미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풀뿌리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박광우 처장은 강조한다. 그러나 브라질과 한국적 토대는 매우 다르다. 풀뿌리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박광우 처장이 소속되어 있는 ‘참여자치21’의 활동 무대만 하더라도 풀뿌리보다는 광주시라는 광역에 머물러 있다. 좀 더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박광우 처장의 희망이기도 하다. 한편, 주민과 접촉하는 프로그램도 여전히 형식성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박광우 처장의 진단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질문하기로 하자.

(2006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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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을 조직가로 만든 사연" - 영광 "꽃마을 공부방"을 찾아
<본문 중에서>.........그 이유를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역으로, ‘꽃마을 여성공부방’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채봉정 팀장과 같은 동네 주민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인 것 같다. 외지인과의 소통이 익숙하지 않은 농촌여성들에게 삶의 터전에서 동고동락하는 한 여성 활동가가 도움을 주는 모양새는 상대적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데 쉬운 접근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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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채봉정(영광여성의 전화 농촌여성다지기 팀장)/한미경(자원활동가)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영광에 내려가던 날 눈발이 거셌다. 지난 12월, 전남을 중심으로 2m 가까운 ‘폭설의 추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무사히 영광행을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영광엔 눈이 없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하늘 구멍이 뚫린 양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고, 부리나케 표를 끊어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2시간 정도 영광 땅을 밟고 돌아와야 했고, 동행했던 이호 연구원은 ‘2시간만 있고 가자니 너무 아쉽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여러 지역을 묶어 ‘지역운동사례 투어’를 3-4차례 하자고 힘차게 결의했다.(한 군데라도 할 수 있을지........)

‘영광여성의 전화’ 내에는 여러 개 활동기구가 있다. 그 중에서 ‘농촌여성다지기’라는 활동기구가 있고, 이 곳에서 농촌에 거주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한글교실’이 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농촌여성들에게 한글을 깨치게 하는 활동, 즉 ‘문해교육’을 한다. ‘지역운동사례’는 그 동안 주로 도시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그래서 ‘농촌여성다지기’ 사례는 꽤 매력적이었다. 농촌에서 ‘문해교육’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더 넓게는 농촌에서 주민 밀착운동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농촌여성다지기’에서 바쁘신 중에도 두 분이 찾아주셨다. 채봉정 팀장과 한미경 자원활동가가 그들이다. 두 분 모두 농사일을 하고 있었고, 그야말로 농촌에 뿌리내린 농민들이다.

‘농촌여성다지기’는 작년과 올해, 영광군 법성면 월산리에서 ‘꽃마을 여성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이 활동은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의 ‘민들레 지역여성운동 사례’에 선정되기도 했다. 자, 우선 ‘꽃마을 여성공부방’이 시작하게 된 취지를 들어보자.

“특별한 취지는 없었어요. 원래, 저희 옆 마을에서 처음에 시작을 했었어요. 장자동이라는 마을에서 시작을 했는데, 그 때는 활동가가 그 마을에 있는 게 아니었고, 사무실에서 차량으로 운행하면서 관계를 맺었었어요.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가 없었기 때문에 활동이 약했었죠. 그때 같이 하셨던 마을 주민 한 분이, 그 동네와 연계하면서, 이 쪽 마을에서도 한 번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된 거죠. 보통 농촌마을에 있는 어른들이 자기 고민들을 드러내기 참 꺼려하시잖아요. 그래서 몇 번 권장해드렸는데, 남들한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어요. 옆에 계신 한미경 씨는 마을 활동가거든요. 저도 마을에 정착한 사람이고. 그런 계기라면 해도 되지 않겠나, 처음엔 저희가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무실에서 하면 저희는 부수적으로 해줄 수 있는 역할만 해주자 했는데, 하다보니까, 마을 주민들도 사무실에 오기가 쉽지 않고, 농한기 때문에 아무래도 날씨 관계로 못 들어올 수 있는 상황도 되고. 그러면 마을에서 마을 분들이 어렵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마을에서 마을 활동가가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된 계가기 됐죠.”

처음 옆 동네에서 시작한 활동이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채봉정 팀장은 그 이유를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역으로, ‘꽃마을 여성공부방’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채봉정 팀장과 같은 동네 주민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인 것 같다. 외지인과의 소통이 익숙하지 않은 농촌여성들에게 삶의 터전에서 동고동락하는 한 여성 활동가가 도움을 주는 모양새는 상대적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데 쉬운 접근법이다. 그렇게 2004년 11월부터 3월까지, 농한기를 이용해 처음 시작했고, 올해 2회 째를 맞는다.

“처음엔 한 반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다 올 겨울부터는 반을 나눴어요. 2004년에 할 때는 초급반들이어서 같이 하시다가, 나중에 배우시다보면 차이가 나잖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본인들한테 버거움도 있고, 잘 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뒤쳐진다는 느낌에 부족한 점이 있을 것 같아서 나눴어요. 그 분들한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깨반’ ‘나비반’ 이런 식으로 나눠서, 옆에 계신 한미경 씨는 ‘깨반’을 담당하시고, 저는 ‘나비반’을 담당하고 있어요........‘깨반은 4명이 있고, ’나비반‘은 12명이 있어요........그렇죠. 저희가 하는 것은 ’문해교육‘이죠. 기존엔 문해만 했었는데, 그것만 하면 단조롭지 않나 해서, 저희가 상시적으로 심리치료처럼 미술 과목도 넣었어요. 병행해서 매 주에 한번씩 들어와서 하세요........주로 농한기에 하는데, 처음이었던 2004년에 농번기에도 잠깐 넣었어요. 그런데 저녁 시간대라 약간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집중도 안 되고. 그래서 접고 농한기에만 하죠........일주일에 두 번 모여요. 매번 정확치는 않지만, 2시부터 4시까지 합니다.”

‘꽃마을 공부방’ 현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2개 반이 가동되고 있고, 학생은 16명 수준이다. 주로 한글 깨치기에 중점을 두지만 산수나 미술치료와 같이 다양하게 접근하려고 한다. 일주일에 2번 정도 모임을 갖는다고 하니 꽤 자주 모이는 편이다. 농사일 때문에 농한기 모임은 쉽지 않다고 채봉정 팀장은 말한다. 조금 더 공부방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모임은 공부방 회원 집에서 한다. 가장 편안한 공간이기도 하다. 참여하는 분들은 주로 전부 여성들이고 ‘영광여성의 전화’에서 약간의 운영비를 보조하고 공부방 회원들이 약간씩 부담한다. 마을 이장님도 교재비와 학용품비용 정도를 지원한다. 프로그램 중에는 생태기행이나 반핵평화 등과 같이 공동체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아이템도 들어 있다. 일반적인 현황을 듣고, 무엇이 변화되었는지 물었다.

“변화는 많이 있죠. 본인들이 상당히 당당해지시고 자존감 생성이 참 많이 되셨어요. 항상 한글 때문에 본인들이 어딜 나가도 너무 문자 해독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저하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당당하게 본인들의 의사도 말씀하시고, 농협 같은데 들어가시면 본인들 이름 한자 한자를 쓸 수 있는 기쁨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당함이 있는가 봐요. 그리고 자식들한테 가려져 있던 부분, 본인의 뜻을 잘 드러내지 못하시잖아요. 자식들도 부모한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부분으로 행복하다는 표현을 쓰세요. 감사하다고 하시고.”

문해교육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공통적인 보람은 바로 이런 부분인 것 같다. 문자를 터득한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당당함과 자존감이 생성됐다고 누차 강조한 채봉정 팀장은 그것이 본인 스스로의 보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부방 회원을 모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희 마을 같은 경우는 크거든요. 농촌 마을 치고 층이 다양하게 있어요. 저희 마을에는 친척 관계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저희 같은 경우는 그 분들과 같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그 분들의 성향 하나하나를 동고동락하면서 느끼게 되죠. 같은 입장이다 보니까, 편하게 얘기를 하시고 말씀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면 되세요.”

모집, 즉 조직은 자연스러웠다고 말한다. 지척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네 주민과의 소통은 생판 모르는 사람과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채봉정 팀장이나 한미경 활동가가 이런 영역의 활동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경험이 있었다기보다는 제가 잠깐 잠깐 장자동 처음 시작할 때 경험해보고,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잠깐 잠깐 봤던 것 정도죠. 제가 한글까지 가르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데 막상 그 분들의 환경이나 생활을 들어보니까, 내가 마음이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은 되겠구나, 해서 하게 됐어요.”

한미경 자원활동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는 이주여성 계기로 들어와서 했는데요, 작년에 제가 임신하는 바람에 이주여성보다는 가까운 농촌여성다지기로 들어가서 하게 된 거죠. ‘영광여성의 전화’ 회원 가입은 얼마 안 돼요.”

이 대목에서 물었다. 구체적으로 계기가 어떤 것인지.

“........저희 마을에 부녀회라고 있거든요. 거기에서 같이 부녀회뿐만 아니라 농협에 갈 때, 그 분들이 한글에 대한 문자 해독율이 낮기 때문에 굉장히 자존심이 저하되고, 뭔가를 글로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이 되지 않고, 그래서 그런 아픔들을 뭔가 글로 표현하고 싶은데, 같이 일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절절하게 해요. 그러면 저 분들도 많은 건 아니지만, 한글 몇 자라도, 기본적인 것을 알게 된다면, 정말 여자로서의 행복감, 삶에 대한 의미도 커질 텐데, 그런 것이 안타깝게 여겨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이 저에게 컸던 것 같아요.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다면 내 삶에서도 큰 기쁨을 얻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생각했던 대로, 거창한 무엇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의 앎을 조금 나누고 도와줌으로써 기쁨을 찾아보겠다는 것이 채봉정 팀장이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2회 째를 맞으면서 이런 보람은 이 활동에 대해 확신을 갖게 했다.

“그렇죠. 남자 분들은 학교는 안 다녔었어도 어느 정도 한글을 깨치고 있잖아요. 저희 친정 엄마 같은 경우도, 야학이 있었는데, 못 다니게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있으시더라고요. 이 쪽에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연령대는 차이는 안 나는데, 제일 나이 어리신 분이, 50대 중반 정도 되고, 나머지 분들은 60-70대죠.......참여율은 90%, 100%가 되요. 저희도 처음에 놀랐어요. 그렇게 열성으로 하시니까 어쩔 때는 종이에 글씨를 써서 주시기도 해요.”

아무래도 공부방에 참여하는 분들은 여성들이다.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쉽게 이해될 것 같지 않다. 황혼 무렵에 그 ‘한’을 풀었으니 참여율도 높을 수밖에 없다. 아무튼 어르신들은 새로운 세상과 접하고 있다.

“미술치료라고 하는 것은 그냥 미술시간인데요, 아이들이 갖고 노는 색채감각 있잖아요. 물감으로 그냥 그리거든요. 처음에는 연필로 본인들 얼굴을 그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본인들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잘 그렸는지 알거든요. 그런데 그리는 자체는 유치원들 수준으로 그리세요. 그래서 처음에는 굉장히 부끄러워하시고, 왜 이런 것을 우리한테 시키냐, 하면서 싫어하시더라고요. 나중에 그 그림을 보면서 본인들의 모습을 말씀해보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호응도가 있으시고, 색채에 물감으로 해서 그림을 그리는 여러 가지 도구가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일상에서 애들과 있으면 너무 무료하잖아요. 이럴 때, 이런 물감들을 아이들과 해보면 어때요? 했거든요. 그랬더니, 나도 내 손자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겠구나, 하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문화와 단절된 것에 뒤쳐질까봐, 걱정하셨는데, 이제는 재밌어 하세요........노래 배우기도 있죠. 아직은 노래배우는 입장에서 노래방 같은 곳을 제일 많이 가시잖아요. 그런데 본인들이 글을 잘 모르시니까, 선뜻 가시지 못하고 무료해하시는데, 노래를 네 가지를 배웠거든요. 트로트를 배웠죠.(웃음) 그것을 가족들끼리 적용을 하시죠. 트로트는 굉장히 간단하게 배울 수 있어서요.”

노래방 자막을 읽을 수 있을 때의 희열! 아마도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숙제도 내주냐고 물었다.

“간간히 내 줄 때도 있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걸 다 못 해오시더라고요. 어떤 때는 과제물을 내드리고 하는데, 처음에 시작할 때는 일주일에 두 번 해도 요일이 빠르기 때문에 버거워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하다가 없앴어요. 나중에 과제물을 없애도 그런 문제점이 생기니까, 중간에 한 번씩 과제물을 해오시라고 하니까, 그 때는 조금씩 해오시죠. 그리고 본인들이 서로 약하면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싫어하세요. 1년 동안은 못하겠다는 말만 하셨거든요.(웃음) 지금은 조금 열의가 붙으니까, 그때부터는 더 하자, 너무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세요.......받아쓰기는 매번 봐요.(웃음)........숫자 공부할 때,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요. 숫자를 읽는 방법이 두 가지 있잖아요. 예를 들면, 1이라고 하면, 일과 하나. 알고 계시는데도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읽어보세요, 하면, 잘 생각이 안 나시는 것 같아요.”

자신감이 붙으면 열의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미 공부방 학생들은 ‘공부하는’ 맛을 터득해가고 있다. ‘꽃마을 공부방’의 목적이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깨우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저희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희 마을에서만 머물지 않고, 인근 마을이나 농촌 마을의 어르신들이 문자 해독률이 너무 없으세요. 그런 사례들 때문에 본인들이 일상에서 필요한 불편함을 많이 겪거든요. 다른 타 단체에서도 많이 하고 있지만, 큰 단위에서 머물고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 같은 사람 이외에 기존의 농촌에서 젊은 사람들이 농사일에만 머무는 게 아니고 인력이 된다면, 말로 귀로 전달이 돼서, 그 사람들도 저희처럼 힘을 얻을 거 아니에요? 저희처럼. 그런 목적을 가지고 확장이 되고 확산돼서, 다른 사람들도 저희와 연계해서 점차적으로 늘려가는 것을 목적으로 해요.”

그렇다면 이런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자원활동가를 발굴하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로 남게 된다. 그런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현재로는 많이 준비를 못하고 있어요. 저희도 미약한 상태인데요, 정착이 된다면, 그런 계기가 돼서 확산이 된다면, 기존의 우리 단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법성면에서 이 모임 말고 다른 모임에도 활동하고 있거든요. 현재는 모임만 하는 것으로 머물고 있지만, 거기서 제가 그런 사례를 이야기 속에서 하게 된다면, 본인들도 필요하고, 마을 주민들도 필요하다고 많이 말씀하시거든요. 저희 같은 활동가들이 없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니까, 거기에 저희가 본보기가 되고, 저희가 여력이 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하고 싶어요. 그런 걸로 점차 늘려가고 싶은 게 저희 마음이에요.”

채봉정 팀장이 꿈꾸는 것은 매우 소박하다. 채봉정 팀장과 같이 젊은 여성들에게 공부방 활동의 필요성을 시나브로 알리면서 월산리 이외 지역으로 조금씩 확대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꽃마을 공부방’을 일종의 모델로 만들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옆에 있던 이호 연구원이 물었다. “내가 배운 후, 남을 가르치는 것에서 오는 보람을 통해 굉장한 변화를 겪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럴 계획은 없는지.........

“아직은 그런 단계는 아닌 것 같아요........옆 동네 장자동에서 배웠던 분이 계신데, 나처럼 배움을 갖는다면 얼마든지 당당해지고 생활에 많은 기쁨을 얻겠다는 그런 마음 때문에, 마을에 와서 변화된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처음에 그 분도 할아버지나 주변 분들이 나이 들어서 무슨 한글을 배우냐, 무덤까지 가져갈 거냐, 이런 핀잔을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본인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으니까, 자랑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당신에게 마음의 당당함과 여유가 높아질 것이라고 하죠. 이런 이야기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도 그런 분의 얘기를 해요.”

도미노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황혼에 한글을 깨치고, 그 배움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글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가르칠 수 있다는 삶의 구체적 목적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도미노. 인간 내적 욕구에 의해 일어나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는 100층짜리 건물이 지어지는 변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리라.

“지금은 1년 동안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많이 달라졌죠.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과제물을 간간히 내드리면 남 몰래 하시는 경향이 있어요.(웃음).......어떤 분은 아예 안 해오세요. 집에서 절대 공부 안 하세요.(웃음) 공부방에서 하죠. 어르신들은 창피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 주변에서 반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고 때문에, 오래된 사고죠.......인근 마을 분들이 부러워하시죠. 저희들한테 요청을 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여력이 안 되죠. 저희가 나중에 평가를 한 다음에 인력이 된다면 그 마을에 갈 생각은 있어요.”

가르치고 배우는 그간의 과정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미뤄 짐작할 수 있지만, 그간의 노력이 서서히 지역사회를 전염시키고 있는 모습에서 이야기만 들어도 신나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물었다. 요청하는 동네는 지역 활동가가 없어서 잘 안 되는 건지.

“예, 그러죠. 이번에 인근 마을에서 시작한 거 보니까, 저희 ‘여성의 전화’와 연계된 건 아니지만, 거기서 1주일에 몇 번의 프로그램을 하거든요. 그 마을에 사시는 분들도 문자 해독율이 낮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저희 얘기를 그 쪽에 말씀을 드렸나 봐요. 그래서 저희한테 요청을 했는데, 저희가 들어갈 수 있는 여력은 안 되겠다, 저희도 1주일에 두 번은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했죠. 그러다보니까, 그 마을에 있는 분이 맡아서 하게 됐는데, 거기도 저희와 같은 과정인 것 같아요. 저희는 처음에 시작할 때 모르신 상태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조금 어려움이 있긴 했는데, 거기는 야학을 오래 전에 조금 하신 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도 자원활동 하시는 분이 처음 단계에서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나 봐요. 선입견 같은 것이.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여성의 전화’에서 들어오는 활동가와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에게 대하는 차이의 어려움을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저희가 간간히 한 번씩 체크를 해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런 어려움이 있는 거죠.”

아마 채봉정 팀장은 두 가지를 지적하는 듯싶다. 하나는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라 하더라도 ‘야학’과 같은 경험이 있는 어르신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외지에서 찾아오는 활동가와 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를 분리해서 대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은 극복의 대상이긴 하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동네 활동가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동네를 변화시키려거든 이웃과 친해져라!’라는 말이 달리 나온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마을 활동가도 며느리이기도 하고, 아우이기도 하고, 친척이기도 하는 상황에서 가르치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을 법 했다.

“예, 그런 사례가 한 분 있었어요. 저희 활동가 중에 한 분이 그런 분이었는데, 시어머니가 있는 반을 담당했어요. 그렇다고 그게 특별나게 차이 나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저 같은 경우는 어떤 차이가 있냐면, 저는 같이 일을 하고 같이 동고동락하는 그런 생활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들의 힘든 모습을 잘 아는데, 그런데 분은 돈사 일을 하셨거든요. 축사죠. 그래서 마을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시어머니 같은 경우 저와 함께 같이 일하시는데, 며느리한테 당신 모습을 보이는 게 싫으셨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불편한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그리고 교사들이 오면 반가운 사람한테 박수를 보내는 성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올 때는 그게 없었던 거죠. 사례, 그런 것에 본인이 느끼기에 얘기를 해요. 왜 나는 박수도 안 줘? 그래요.(한미경 : 저 같은 경우는 멀리서 여기까지 왔다고 박수를 치는데, 그 분 같은 경우는 그런 게 없었나 봐요. 그런 모습이 보이니까 아무래도 같이 관계하는데 어려움이 따라서 그 친구가 접더라고요.)”

여기서도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마을 활동가라고 하더라도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사람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활동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반일시민(半日市民)인 남성보다 전일(全日市民)인 여성이 그 가능성이 더 높고, 큰 문제보다 작은 일에 참여하는 생활자가 조직가가 될 수 있는 여지가 더 크다. 끝으로 자원활동가를 모집할 계획, 어려운 점, 그리고 기타 이주여성의 문제 등에 대해 물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 이번 인터뷰 마무리를 갈음하고자 한다. 한 가지, 이번 지역운동사례를 조사하면서 이주여성의 문제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할 주요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농촌사회는 이주여성의 문제가 현재 진행형이고, 가정폭력, 인종차별, 문화적 소외 등 조금씩 속으로 곯아가고 있었다. 30-40대 젊은 농촌 총각들은 제3세계 여성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국가가 또는 지역사회가 이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차별과 소외의 계층’이 생산될 소지가 충분하다. 이런 차별을 감내하면서 국내로 들어오려는 많은 제3세계 여성들이 있고, 그 책임을 개별 가정으로 넘기는 한, 이주여성 문제는 확대․재생산 될 것이다.

“.........제 개인적으로는 올 3월까지 끝내고 기존의 분들한테 권하고 싶어요. 농가주부모임이라든지 이런 곳에요.......저희도 시간적 여력이 생각보다 없어요. 여기에 집중적으로 할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일상에 들어와 보면 나름대로 일과에 정신없거든요. 그렇다보니까 준비 못 해주는 점. 학업에 필요한 자료를 많이 준비 못해주는 점. 되도록이면 그 분들이 더 많이 알고 쉽게 알 수 있는 그런 자료를 준비해드려야 하는데, 저희들이 그런 것을 못 하고 있어요. 늘 부족한 점이라고 생각해요.......(한미경 : 저도 많이 준비를 못 해오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애가 몇 개월 안 돼요. 어머니한테 맡기도 오는데(웃음). 큰 애도 저기 데리고 왔죠.(뒤를 가리킴))........저희 주변에도 이주여성이 많거든요. 저희가 생각이 있어서 찾아간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상당히 경계를 하더라고요.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까지도. 평상시에는 친하게 지냈던 분들인데, 혹시나 여기와 접하면서 도망갈까봐...........그런 인식의 차이가 있죠........공부방 학생들이 저희를 조직가로 만들어주신 것 같아요. 저희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주변에 그 분들이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 제가 잘 하든 못 하든, 그 분들이 저를 이만큼 만들어 놓으신 거죠. 그 분들이 이 만큼 저를 성장시킨 것 같아요.”
(2006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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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飛센터, 지역에서 펄럭이다!"-서울여성의 전화-를 찾아


인터뷰 : 박신연숙(서울여성의 전화 나飛센터 지역조직국장)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이름이 참 예쁘다. ‘나飛센터’ ‘나로부터 비상하는 지역운동센터’라는 뜻이다. ‘서울여성의 전화’의 ‘나飛센터’는 ‘여성이 살고 싶은 마을’을 꿈꾼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의 전화’를 ‘상담을 통한 여성인권 보호’ 정도로 등치시킬지 모르겠다. 지역 속에서 여성운동을 전개한다는 상상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역조직이 의외로 탄탄하다. ‘서울여성의 전화’는 ‘한국여성의전화연합’ 25개 지부 중 하나이며 1개의 지회를 갖고 있다.(‘강서양천여성의 전화’가 그것) ‘서울여성의 전화’ 회원은 1,000여명 정도다. 꽤 큰 조직이다. 소모임도 활발한데, 성교육, 상담, 여성주의 등의 주제로 총 30여 개의 소모임이 있고, 그 중에서 지역모임은 8개다. 각 소모임은 5-10명 정도가 참여하고 1주일에 1회의 모임을 갖는다. 얼추 계산하면 소모임에서 활동하는 회원은 줄잡아 200명이 넘는다. 이 중에서 지역모임에서 활동하는 회원은 100명이 넘는다고 박신연숙 국장은 말한다.

‘지역운동이 유행이다’라는 말은 이젠 식상하다. 어쩌면 지역이 중심운동으로 이동 중인지도 모른다. 특히 여성운동세력에겐 더욱 그렇다. 물론, 어떤 지역운동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 인터뷰 대상은 ‘서울여성의 전화’의 박신연숙 국장이다. 서울에서 지역운동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 지역에서 여성운동은 어떤 것인지 박신연숙 국장에서 들어보도록 하자.

“‘나飛센터’는 ‘지역운동센터’를 말합니다. 예전에는 조직부와 함께 있어서 회원사업도 같이 했었어요. 그러다 지역운동 담당자를 배치하고 지역운동을 열심히 해보자는 취지에서 ‘지역운동센터’로 조직을 확대한 거죠. 센터장도 조직의 리더 중에서 세웠죠. 그렇게 지역운동센터는 올해로 4년째에요. 그런데 ‘지역운동센터’라는 이름이 딱딱하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상담이나 법 개정운동, 인권운동이나 피해자 보호를 하는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회원들이나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여성의 전화’와 지역운동이 매치가 안 된다, 지역운동이 뭐예요? 라는 질문을 하거든요.(웃음) 그래서 ‘나로부터 비상하는 지역운동센터’이라고 지으면서, 줄여서 ‘나飛센터’라고 한 거죠. 원래 저희 단체 로고가 나비에요.(명함을 보여줌) 로고를 활용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죠.......그런데 아직까진 사람들이 ‘나飛센터’라고 하면 더 몰라요.(웃음)”

잘 알다시피, ‘여성의 전화’ 심벌은 나비를 상징한다. 애벌레에서 자유, 꿈, 희망을 상징하는 나비로 새롭게 태어나 폭력 없는 사회로 자유롭게 날아가는 여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심벌의 의미를 ‘지역운동센터’와 접목시킨 것이 ‘나飛센터’다. ‘여성의 전화’는 2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과 ‘서울여성의 전화’가 분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지역조직 관리는 ‘한국여성의전화연합’가 담당한다. ‘서울여성의 전화’의 주요 사업은 ‘상담사업’과 ‘경제세력화 사업’(인권센터), 그리고 지역운동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앞서 얘기했듯, 각 사업에 소모임이 전체 30여 개가 있다. 그래서 소모임 활동에 대해 물었다.

“........지역모임만 해도 한 100명 정도 되죠........저희 같은 경우는 ‘여성의 전화 연합’이랑 ‘서울여성의 전화’를 분리하면서 회원조직사업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 때 이후로 더 많이 주력을 했고요. 처음에는 지역사업을 잘 몰랐어요. 지역사업도 회원조직화의 한 방법으로써 선택하게 됐든 측면도 있어요. 그게 다는 아니지만.......소모임 활동은 지역에서 우리의 의제들, 즉 폭력이나 가족이나 경제나, 이런 여성 이슈들을 지역에서 실천해 내는 활동을 한다고 볼 수 있고요, 그러다보니까, 상담소는 직접 지역모임을 관할하지 않지만, 지역모임과 함께 사업들을 하죠. 그러니까 캠페인 할 때도 어느 지역을 정해서 거기 있는 회원들과 함께 사업을 구상해서 사업을 하기도 하고.......소모임이 하는 일이 비슷해요. 여성주의, 상담, 폭력에 대한 예방, 이런 것들이거든요. 특성화된 소모임이라면 ‘성교육 강사모임’이라든가, ‘상담원 모임’이라든가, 이런 거 제외하고 그냥 세미나 하는 모임들의 성격이 다 비슷하죠. 오히려 지역별로 모여 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모니터링 하면 소모임에서 다 하는 곳도 있거든요.......아무래도 지역 소모임에서는 전업주부들이나 아니면 아이가 다 성장한 40-50대 분들이 많이 참여하시죠. 저희가 가족을 주제로 하다보니까 비혼이나 이혼 여성들의 모임도 한 9년 정도 하고 있거든요.......대체로 지역모임은 다양해요. 활동력 있는 건 아무래도 전업주부죠.”

각종 소모임은 지부 사업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이다. 영등포․구로․동작, 서대문․마포․은평, 송파․강남․서초, 노원․도봉 등의 소모임은 자체 의제를 설정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 어떤 사례가 있는지 물었다.

“동작구 모임이 잘 되는 것 같아요. 그 쪽에 ‘서울여성플라자’가 있어요. 지은 지 한 3년 정도 됐거든요.......사실 지역에서 모임 할 때 항상 공간이 문제였죠. 모일 곳이 없는 거예요. 주민자치센터 같은 경우는 비어 있는데도 안 빌려주더라고요.(웃음) 그러다보니까 ‘여성플라자’에서 많은 사업을 하게 됐죠. 인근 지역이 대방동, 흑석동이거든요. 그 쪽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작구에서 지역사업을 하게 됐어요. 작년에는 성에 관한 포럼도 했었죠. 사실, 동작구에서 사업을 한 것은 한 1년 정도 됐거든요.......처음에 동작구에서 지역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니까, 누구랑 해야 될지 같이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선 같이 할 사람을 만들어야겠다.........”

이 대목이 참 중요할 것 같았다. 주민조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주민들과 만났을까? 그래서 어떻게 조직했을까?

“그게, 대중교육을 열 때는 그 자체로도 효과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흰 대중교육을 할 때의 목표는 조직화였어요. 그런데 워낙에 대중강좌를 해도 하는 곳이 워낙 많기도 하고 무료로 하니까 잘 안 오잖아요. 그래서 직접 발로 뛰었죠. 아파트를 돌면서 홍보를 한 거죠. 저희는 과거에 그런 식으로 홍보하지 않았거든요. 항상 언론에 보도자료 내고 단신으로라도 홍보를 했거든요. 그런데 지역에 주민들을 조직한다고 목표를 세우니까, 지역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동작구엔 활동하는 회원들이 없었지만, 옆에 있는 영등포엔 젊고 활동력 있는 회원들이 있었거든요. 이 회원들 서너 명이서 지역을 돌면서 홍보를 했죠. 그리고 그 분들이 대중사업 강좌 중 사례 강좌를 기획했죠. 강좌 내용도 내용이지만, 거기 참여하는 사람들이 한 30여 명 정도 됐었는데, 그 사람들과 어떻게 친해져서,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남게 할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고, 그래서 한 10명 정도 남겼고, 그 사람들이 기반이 된 거죠.”

언론플레이를 탈피하고 아파트 속으로 들어간 홍보방식이 주요했다. 홍보방식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영등포 지역모임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박신연숙 국장은 강조한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자.

“.......여성의 전화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어요. 예를 들어, 지금 30-40대면 386이잖아요. 대학시절에 학생운동에 대한 향수가 있거나(웃음), 또는 결혼 전에 뭔가 자기실현 욕구가 강했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현실의 문제 때문에 전업주부로 남아 있는 분들이 찾아오는 경향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은 자기실현 욕구와 학습에 대한 욕구가 강해요. 그런 것을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저희는 지역의 주체를 형성하는 것, 또는 리더를 발굴해서 키워내는 것이 1차적 목표에요. 동네에서 여성운동을 같이 할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런 의지를 갖고 활동을 한 거고요. 작년 1년 동안 그렇게 한 거죠. 그리고 그걸 조력했던 영등포 모임은 3년 째 운영되고 있었어요. 그 분들은 그 분들 대로 영등포에서 사업을 하시면서 동작구에 도움을 주신 거죠. 키워낸 거죠. 그러다가 지금은 빠진 거죠. 지금은 자체적으로 동작구가 하니까. 그런 것이 작년에 모델케이스인 것 같아요.......조금 훈련된 조직가나 회원들이 동네 모임을 만들고, 모임이 형성되면 빠지는 식의 인큐베이터라고 할까........여성 관련해서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고 조금 영향력 있는 그룹들, 또는 여성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는 것 같아요. 학부모회, 아파트부녀회, 통반장, 그리고 교사집단들, 이렇게 네 가지 집단 분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 마다 각각 나눠서 두 차례씩 ‘리더십 워크숍’을 했어요. ‘성평등 워크숍’이라고 하면 안 올 것 같아서(웃음). 그래서 맨투맨 작전으로 회원들이 다 전화하고.........재밌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평소 그 분들에 대해서 고정관념이 있었거든요. 물론, 아주 그런 분들은 아니셨겠죠. 여성의 전화에서 하는 거니까. 그 행사를 서울시 후원을 받아서 했거든요. 보통 시나 구를 내세워 행사를 하는데,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올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까. 네트워크를 목표로도 하고 지역의 리더들 중에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 것이기 때문이죠.”

‘여성의 전화’라는 이름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성향은 대체로 이질적이지 않다는 게 박신연숙 국장의 설명이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공공기관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당당하게(?) ‘여성의 전화’라는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다. 어차피 올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까. 더 나아가 지역의 리더, 또는 여성들이 모여 있는 네 개의 그룹 즉, 학부모회, 아파트부녀회, 통반장, 그리고 교사 등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았다. 그런 전략이 주요했던 것이다. 노원구도 동작구와 비슷한 전철을 밟아 조직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구 단위는 너무 넓었다. 그래서 동단위로 시작한 것이 ‘공덕2동’모임이다.

“.......구 단위에서 하니까 너무 넓더라고요. 그래서 동단위로 해보자, 그래서 공덕2동에서 했죠........공덕2동에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거든요. 거기는 특성이 아제 막 아파트가 들어서서 다들 짧게 살았어요. 2년 살고, 1년 살고. 그래서 동네에 친구가 없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쭉 오셨더라고요. 거기도 동단위로 하나 만들었죠. 동작구에서 했던 식으로, 대중강좌를 열어서 회원들과 함께 한, 대여섯 명이 주체가 돼서 대중강좌를 열면 회원들이 오잖아요. 그러면 꼬셔서 모임을 만들고(웃음)........”

어쩌면 대중강좌를 통해 사람을 만나 조직화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핵심은 누가 하느냐이다. ‘서울여성의 전화’는 회원들이 직접 나서서 한다. 활동가와 주민이 아니라, 주민과 주민이 대면하는 방식이 키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소모임의 주체들이 성장해나갔다.

“.......작년에 여성플라자에서 대중교육과 소모임을 해보니까, 그것 역시 불러 내오는 방식이더라고요. 사실 지역 속으로 들어간다는 게 상대적이잖아요. 저희는 조직에서 구 단위 회원들의 모임을 만들고, 그걸 근거로 동 단위, 아파트, 골목 단위로 들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여성플라자로 불러내오는 방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에 그 사업 하면서, 방향으로 잡았던 게, 올해는 학교나 아파트, 또는 더 지역 속으로 들어가자, 이래서 중간 다리를 만든 거죠. 오신 분들 중에 같이 할 수 있겠다고 판단되는 분들이 몇 분 있었어요. 또 특별히 통반장, 부녀회, 학부모 분들과 만날 수 있는 동네가 있겠더라고요. 올해 사업 계획은 대중교육보다는 학교로 들어가서 학부모나 학생이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고, 아파트 부녀회와 함께 할 계획이에요. 저희 지부들이 아파트 부녀회와 함께한 사례들이 몇 개 있어요. 그런 것을 참고해서 저희도 아파트부녀회에 가서, 부녀회와 공동으로 하는 거죠. 어쩌면 부녀회만 내세워서 할 수도 있어요.”

올해는 더 지역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른 것은 첫 번째, ‘공간’의 문제는 참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서울여성플라자’라는 공간이 주민들과 만나고 접촉하는 공간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박신연숙 국장은 동네마다 있는 ‘주민자치센터’의 개방을 주문하고 있다. 여성 동아리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지척의 공간으로 ‘주민자치센터’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강사진’의 문제다. ‘여성의 전화’가 추구하는 이상과 맥을 같이하는 강사 인력 풀이 오랜 경험을 통해 구축됐다는 것이 박신연숙 국장의 설명이다. 98년부터 2001년에는 제도를 집행하는 사람들, 즉 경찰, 의료계, 법조인, 사회복지사 등에게 교육시키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서울시 파출소 500여 군데를 다 돌았다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훌륭한 강사진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공간’과 ‘강사진’은 훌륭한 무기였다.

박신연숙 국장에게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지역에서 여성운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웃음) 그게 사실은 대게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리도 98년, 99년, 2000년에 지역운동 워크숍 했을 때 보면, 늘상 지역이 뭐냐, 지역은 어디까지냐, 이런 토론을 많이 했거든요. 지역여성운동이라고 할 때도, 워낙 지역운동이나 지역의 여성운동 자체도 중앙의 이슈를 지역에서 그냥 함께 해나가는 식으로 해왔잖아요. 그리고 지역운동 자체는 어떻게 보면, 여성이 주변화되는 방식으로, 설사 여성들이 주로 한다하더라도 의제라든지 방식에 있어서 그렇지 않기 때문에.........혼란이 많이 있는 게 사실이죠. 제가 생각하는 것은, 사실 넓게 봐서 어떤 이슈를 갖고 하든지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것을 지역 여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 같은 경우, 우리가 하는 지역여성운동은 여성의 폭력의 문제나 다양한 가족과 평등한 가족의 이슈들, 이런 것을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죠. 예를 들어 지역여성들과 운동을 같이 하다보면 ‘여성의 전화’에서 보육이나 이런 것을 많이 해야 하지 않냐, 그런 의견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는 그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 운동을 전개하는 곳도 있고요. 그래서 연대는 할 수 있는데, 우리 단체가 중심으로 하진 않거든요. 그런 문제라든지. 그리고 지역에서 지역 이슈들이 있잖아요. 개발 저지하는 일들, 그런 것도 마찬가지죠. 우리 역량도 안 되고, 조금 전문화되고 특화된 단체와 네트워크로 할 수 있는 일들이죠. 저희가 지역운동의 경험이 많지 않아서, 동작구만 하더라도 저희가 여성정책 간담회를 했을 때, 지역 단체들을 조사를 해봤더니 없더라고요. 서울이 다 그렇더라고요. 경기도와 또 달라요. 경기도는 지역단체가 많은 반면에, 서울은 서울시 차원에 서울시 정책을 갖고 운동하는 단체도 없지만, 구 단위로 들어가면 더 없죠.......지역 소모임을 하다보니까, 정책이 처음 수립이 되고 집행돼서, 평가가 되고 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사실은 구 단위잖아요. 그런데 그런 정책이 풀뿌리 작은 조직들, 그리고 주민 개개인, 특히 여성과 무관하지 않잖아요. 여성정책 같은 경우는 도봉구가 잘 하고 있거든요. 거기엔 민우회라고 하는 조직이 있어서 그렇다고 봐요. 단체가 하나 있어서 정책을 제안하고 감시하는 활동이 지역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가를 최근 3-4년의 활동을 통해서 여실히 보고 있는 거거든요. 저희가 작년에 여성주간 행사로 25개 구 모니터링을 해서 다 보니까, 그게 확연하더라고요. 결국 구 단위로 지역여성운동을 한다면, 그런 게 만나야 되는 것 같아요. 골목모임, 놀이터 모임과 그것을 묶어주는, 그래서 저희가 작은 모임들을 만들어내지만, 이 모임들이 하나의 의제로 결속해서 힘을 발휘한다거나 정책대안을 만들어낸다거나, 서로 모델을 확산시킨다거나, 이런 것을 하는 게, 그것을 결합시키려고 하는 거죠. 하나의 예를 들면, 저희가 강좌를 해서 소모임을 만들었는데, 거기 어떤 사람이 왔냐면, 아이가 유치원에 다녔던 계기로 엄마 모임이 있는데, 그걸 5년째 운영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온 가족이 다 모여서 뭔가를 하고, 1주일에 한 번씩은 돌아가면서 모이더라고요. 정말 자생적으로 학부모 엄마들의 모임이었는데, 그런 모임에서 2명이 왔어요. 그건 풀뿌리모임이거든요. 그 분들 입장에서 보면 막 풀뿌리 모임을 갖다가 이런 여성조직을 만난 거예요. 저희는 아래로 조직을 해나가다가 그런 풀뿌리조직을 만난 거고. 그래서 이런 만남과 네트워크와 교류가 많이 일어나고 그런 것을 시도해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분들이 자녀를 위해 뭔가를 해왔는데, 여성 자신으로서의 자시 삶의 실현이나 남편을 바꾸고 싶은데, 그런 것은 한계가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 단체와 만나니까 조금 정기적으로 그런 프로그램들을 하면서 가정에서의 성평등과 민주화, 이런 부분들을 해나가고,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고, 이렇게 변화가 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지역운동과 여성운동, 또 지역에서의 여성운동을 정의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박신연숙 국장의 고민도 깊어 보였다. 어떤 이슈를 갖고 하던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지역여성운동’이라고 생각한다는 박신연숙 국장은 지역의 작은 풀뿌리조직들과 그것을 지원하는 지역운동 조직이 만나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은 지역의 작은 모임이 많아요. 자녀 유치원 엄마들끼리의 모임, 이런 모임은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결혼할 때까지 유지되더라고요. 그런데 여성의 전화 회원들은 어쨌냐면, 그 모임을 지역에서 많이 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식을 키우면 아이에 대한 정보를 나눠야 하니까, 필요에 의해서 하거든요. 그런데 이 분들은 그 모임이 싫은 거예요. 가서 하는 대화들이 너무 시시껄렁한 거예요. 그래서 뭔가 더 의미 있는 하려고 여성의 전화 오다보니까, 여성의 전화 활동을 하면 할수록 지역과 더 멀어지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저희가 지역운동이라는 개념을 가져와서 운동을 하다보니까, 오히려 그 조직과 멀어지면서 여성의 전화 활동을 하는 게 아니고, 그런 지역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이 사람들을 바꿔나가는 방식으로 가는 것 같아요.”

‘여성의 전화’ 지역모임이 지역과 멀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지역모임이 지역을 토대로 활동하지 않고 단체 활동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젠 회원들 스스로 지역을 바꾸려 한다. 지역운동이 테마로 잡힌 이후다. 그러면서 박신연숙 국장은

“지금까지 저희는 상담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운동을 했어요.......전화상담을 통해서 이슈도 뽑아내고 또 제도화해냈던 거죠. 이제는 조직화 방식이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을 할 때도 회원들과 함께 해서 참여하는 회원들을 리더로 키워내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생활정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저희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단체들도 이런 식으로 회원 조직화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 같아요.......또 하나는 90년대에 여러 여성의 문제를 법, 제도화했다면 그걸 모니터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역에서 정책, 예산 모니터링 사업 같은 게 될 수가 있는 거죠. 그게 한 4년째 했으니까. 하여튼 그런 경향성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의제 자체도 조금 생활밀착형으로, 생활정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아파트공동체문화 같은 경우도 생활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2000년대 이후 지역운동의 경향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과 밀착된 운동으로 전개한다는 점, 법․제도를 감시하고 모니터링 한다는 점, 그리고 생활밀착형, 생활정치가 활성화된다는 점 등이 최근 여성단체의 지역운동 경향이다. 이런 경향성에 비춰 박신연숙 국장은 자신의 경험을 살짝 말한다.

“저는 활동가잖아요.......저는 조직가로서의 역할에 대해 많이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상근 활동가로서 조직가 역할이라는 게 한계가 있더라고요. 아무리 내가 그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해도 저는 여전히 ‘여성의 전화’의 지역조직국장이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저는 회원리더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선은 발굴하고 키워내는 게 관건이더라고요. 제가 직접 들어가서는 안 되더라고요.(웃음) 저희 단체의 경우, 상담으로 훈련된 여성 회원들이 지역 마다 계세요. 이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우리가 지역운동을 왜 해야 하며 뭘 하려고 하는지, 다른 지역에서 뭘 했는지를 많이 얘기했죠. 이 분들로 하여금 지역의 정치조직화 사업을 하시도록 추동하는 역할을 활동가로서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잘 하는 동네는 사업이 성공적으로 되고요, 저희 리더십워크숍 같은 경우도 네 분야(학부모회, 아파트부녀회, 통반장, 교사)의 지도자를 모시고 한 것도 회원들이 다 했어요. 기획하고 사회보고 진행하고 조직화하는 것을 다 한 거죠. 이 회원은 대부분 30-40대고, 이제 아이들 학교 보내고 학부모 활동하는 부모들인데, 40-50대 중에는 왕년에 학부모회장도 하고 아파트부녀회도 했던 분들이 있어요. 맥락을 잘 하시는 거죠.......그리고 ‘여성의 전화’가 갖는 장점 중에 하나는 상담이라는 것이 상당히 대중적인 방식이에요. 현장성도 있죠. 그것을 지역사업에 활용하는 거예요. 저희는 강사 뱅크가 풍부한 편이거든요. 자체 조력이 다 돼요. 성교육을 하려고 해도 저희 강사들이 지역사업을 한다면 자원 활동으로 다 해주시고, 학교 들어가서 하는 것도 그런 인력풀이 있어서 하는 거죠. 이런 분들이 회원으로서 단련된 분들이거든요. 그런 자원들이 활용되죠.”

상근 활동가로서 주민을 조직한다는 건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주민을 조직할 수 있는 리더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일이었다. 그것 또한 활동가의 몫이라기보다는 회원들의 역할로 부여했다. 그리고 잘 갖춰진 강사뱅크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코디네이터가 조직국장의 몫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 와중에 박신연숙 국장은 ‘여성의 경제세력화’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얘기를 잠깐 들어보자.

“........저희의 주요 사업 중에 ‘여성의 경제 세력화 운동’이라는 것이 있어요. 아이들 대상으로 경제캠프를 많이 하는데, 그 관점이 어떻게 하면 부자로 만들까? 이런 것이 아니라 성별화된 경제교육 속에서 여성들에게 어떻게 경제주체가 되고, 내가 돈의 주인이 되며, 나의 인생 설계와 경제라는 문제를 어떻게 결합되는가, 이런 것을 소녀 때부터 쭉 하고 있죠. 저희가 맨 처음 하게 된 것도 상담을 통해서예요. 왜냐면 상담을 하다보면 여성들이 자기가 결혼할 때, 결혼 전에 모은 돈을 다 갖고 가는데 대부분 남편 명의로 집을 사는 거예요. 자기는 살림을 하고. 그러니까 자기 돈이 없어지고, 그러다 폭력 당해서 이혼하게 될 때, 손에 아무 것도 쥐지 못하고 나오는 거죠. 경제적으로 다 뺏긴 상태죠. 그래서 여성의 경제세력화가 중요하다,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경제적 주체로 선다는 의미에서 경제문제는 여성문제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분야임에 틀림없다.

“........여성 경제인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이 경제 주체가 된다는 의미죠. 여성들이 어려서부터 받는 교육은 네가 돈 많은 남자만 잡으면 돼!(웃음)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가 꿈이 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올해, 내년, 10년을 어떤 이력을 갖춰 가야 하는지, 이런 것을 교육시키고 그런 속에서 관계에 대한 교육을 하죠.......저희가 동작구에 여성들의 경제활동 현황을 보게 되거든요. 구에서 여성경제활성화에 대한 여성발전기본계획 항목이 있는데, 그러면 여성업종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서 청소년 때부터, 아니면 취업시기에 그런 교육을 해야 되는 거잖아요. 인센티브를 준다든지. 역시 정치진출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경제세력화와 지역경제를 연결할 수도 있죠.”

이 대목에서 예민한 질문을 던졌다. 자칫 그런 교육이 성별분업화를 고착화시키지 않을지........

“글쎄요, 그런 것을 어떻게 해야 하죠?(웃음) 그 부분은 논쟁거리죠. 특히 여성운동진영에서. 그리고 나름대로 그 분들이 피해의식이 있을 거예요. 워낙에 여성운동 내부에서도 비판이 많으니까. 이런 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저희가 주로 전업주부 대상으로 활동하다보니까, 더 주변화된 소외된 계층에 대해서 감수성을 가져야 되는데, 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러기가 힘들잖아요. 그랬을 때 비판 논쟁지점과 비슷한 거 같은데..........좀 어려운 것 같아요. 저희 학부모회 쪽 분들 만나서 얘기했을 때, 이를 테면 ‘녹색 어머니’ 활동을 하시는데, 겨울엔 너무 힘들데요. 바쁘게 아이들을 학교 보내도록 준비시키는 그 시간이잖아요. 급식도 마찬가지고. 그런 지점에서 갈등을 많이 겪더라고요. 모르겠어요. 고민이 많이 되는 지점이에요.......결국 그런 것을 해체하려면 우리 경제구조가 바뀌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이를테면 성별분업이 사실상 고착화가 되어 있는데, 요즘에는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남성 실업률도 많잖아요. 그런데 남성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요. 그런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남자가 직장에 안 가면 집에 콕 박혀 있어야 하는 거죠.(웃음) 여성들은 사실, 아이 키우면서 직장을 갖기 어렵거나, 혹은 원하지 않거나 했을 때, 같은 의미와 같은 비중을 갖고, 사회참여를 하는 거거든요. 경제적 보상이 아닐 뿐이지,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보상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남자들은 하지 않잖아요. 사실 집에 있는 남자들이 많거든요. 안 나와서 그러지. 그 남자가 개인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 나가면 바보 되니까.......그런 것 같아요. 여성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는데, 사회에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 돌봄활동이라고 얘기하는 그런 역할을 많이 하는데, 그런 자체가 갖는 의미를 대게 큰 것 같아요. 활동 자체도 의미가 있죠. 그런데 그런 활동을 두고 성별역할을 고착화시킨다는 비판은 너무 화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비판을 해왔거든요. 그리고 또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잖아요. 그게 나쁜 거지.(웃음) 끊임없이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환원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국가 차원에서 그런 정책을 펼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이 부분은 여성단체 내부에서도 논쟁거리인 듯싶다. 기실, 경제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돌봄 활동’들이 현실적으로 여성의 몫이 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여성의 활동이 ‘성별분업 고착화’로 비판받는 것에 대해 박신연숙 국장은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사회적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변화, 내지 사회적 상식의 해체가 필요하다는 것이 박신연숙 국장의 생각이다. 남성도 보육교사가 되고 횡단보도를 지키고 녹색가게에서 활동하는 그런 모습이 하나도 낯설지 않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필요하다면 정책적으로 인센티브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단면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끝으로 박신연숙 국장에서 ‘여성의 전화’가 추구하는 지역운동의 궁극적인 목적과 올해 지역운동의 계획은 무엇인지 물었다. 아직은 ‘서울여성의 전화’가 지역사회 전체 비전을 만드는 데까지 운동을 확장시키지 못하지만 지난 4년간의 경험은 그리 간단치는 않아 보였다. ‘서울여성의 전화’의 활동은 사람들 간의 소통, 그 소통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주체화, 그리고 시나브로 지역사회로 뿌리내리려는 모습이 돋보였다. 앞으로 더 많은 사례가 나오길 기대해본다.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인가, 자기 자신의 계발이라든지 역량강화인가, 그걸 딱 분리해서 말하기는 어렵긴 해요. 현실은 여성들은 지역사회에 관심이 없어요........우리 단체가 지역운동을 하려고 하는 게 우리 단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더 확산시키기 위해서냐, 아니면 지역사회를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서냐, 물론 둘 다인데, 풀뿌리운동이라는 기본 이념이나 원칙들을 충실히 하다보면 지역사회를 바꿔나가는데 더 중점을 두게 되는 것 같아요. 저희 같은 경우도 옛날에는 지역에서 어떤 사업을 할 때, 그 사람들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여성의 전화’의 사람으로 만들고, 이런 것에 더 많이 목표를 두었다면,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이 사람들이 지역에서 문 닫고 모른 척 하고 사는 게 아니라, 소통하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나가고, 소통의 공간을 바꾸는 방향으로 가도록 하거든요. 그 속에서 여성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성평등의 문제라든지, 이런 문화가 지역에 생활문화가 되지 않으면 지역사회 전체가 불편하거든요. 그러니까, 내 집 문을 왜 안 여냐면, 그런 것 때문에 안 여는 거거든요. 비혼 여성이 소통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거든요. 지역사회 자체가 너무나 가부장적이고, 그래서 지역사회 자체가 성평등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죠.......작년에 여성주간 행사 모니터링을 해보니까, 저희가 동단위, 구단위 활동도 하지만, 또 서울 전체에 대한 사업들도 있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저희 전문성 살려서, 여성주간 행사 모니터링도 젠더 의식이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그런 모니터링과 여성폭력 정책과 관련된 법이 만들어진 지 10년이 넘었거든요. 그래서 지자체가 그런 것을 해야 돼요. 이를 테면, 남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교육도 하고, 그런데 안 하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구별로 모니터를 해보려고 해요. 그런 사업이 있고, 풀뿌리사업으로는 동작구 같은 경우는 작년 가을에 했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서 하는, 내용이 뭐가 될지는 몰라요. 교사와 학부모가 만나서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어쨌든 성평등 의식 교육은 해야 하고요, 아파트사업을 해나가려고 하고요........아파트 사업은 그것도 아직 뭐가 될지 몰라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걸로 보면, 여성의 전화 역량을 강화하기보다는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는 거죠. 조력을 하는 거죠. 우리 전문성을 좀 나눠주는 거죠. 아파트부녀회도 사례발표회 같은 것을 했었는데, 잘 되고 있는 아파트에서 하고 있는 사례가 도서관 사례라든가, 아파트 동대표 권한에 있어서 우리의 가치를 포함시켜서 할 수 있는 것들. 새로 건설된 아파트 경우, 아파트부녀회가 굉장히 의욕적이더라고요. 잘 모르니까, 처음에 잘 하고 싶은데, 잘 모르니까. 그래서 우리가 직접 한다기보다는 우리가 네트워크를 해주는 거예요.......아무튼 도서관 사업이 많이 확산되면 좋잖아요. 우리의 의제를 할 수 있도록 찌르는 것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발전할 수 있는 것도 만들고 그러는 거죠.”

※ ‘서울여성의 전화’ 홈페이지는 http://www.womanrights.org/입니다.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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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운동, 한 템포 쉬기 그리고 뛰어넘기"

- 인터뷰 : 최시영(청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국장)
- 만난 날짜 : 2005년 7월 25일

- 작 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지난 7월, 충남 연기군에서 지방의제21 정책포럼이 개최된 바 있다. “지방자치 10년, 그리고 지방의제21 10년”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 날 포럼은 크게 세 가지 세션으로 이루어졌는데, 1) 거버넌스와 지속가능성의 진단 2) 2006년 지방선거 대응전략 3) 지방의제21 제도화 실현전략 등이 그것이다. 세션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번 포럼을 요약하면 “지방 의제21사업 10년 간 지방의제21이 추구해왔던 거버넌스와 지속가능성을 평가하고, 2006년 지방선거 속에 지방의제21의 정책아젠다 및 제도화 방안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였고, 100여 명이 넘는 활동가와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높은 관심도를 보였다.

지방의제21사업은 본격적인 지방자치 재시행 역사와 일치한다. 지방의제21사업의 작동원리가 민관협력 또는 민관파트너십, 거버넌스임을 감안하면 지방자치 10년을 평가하는데 있어서도 지방의제21사업이 중요하게 위치하고 있다는 것에 부정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지역에 따라 태생 배경이나 구성원들의 지향성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지역 시민운동단체가 지방의제21사업에 깊숙하게 개입해왔고, 지역운동의 보조적인 역할을 넘어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는 지역도 상당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간 활동에 대한 평가와 이후 활동 방향을 심도 있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포럼이 지방의제21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법하다.

오늘은 ‘청주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의 최시영 국장을 만났다. 앞서 제시한 지방의제21사업의 평가와 처방전은 무엇인지 물어보기 위해 만난 자리는 아니다. 청주는 ‘지방의제21’이라는 기구 이름을 접고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로 일찌감치 전환하였다. 그 과정을 지켜본 최시영 사무국장은 만 5년 6개월 동안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평가와 전환의 시점이라는 공통된 인식 속에, 지방의제21 사업의 중견 활동가로서 최시영 국장의 생각과 청주라는 지역에서의 시민운동에 대한 고민을 확인해보자.

최시영 사무국장은 2000년 1월부터 의제기구에서 일했다. 90년대 초․중반까지 전농 충북도연맹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그 후 약 6개월간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다시 90년대 중․후반은 가톨릭 농민회에서 몸담았고, 그 후 약 1년 동안은 민주노동당 충북지역본부에 적을 두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청주를 기반으로 충북 시민사회를 두루두루 섭렵한 케이스다. 15년간 지역을 묵묵히 지킨 토박이 활동가인 셈이다. ‘푸른청주21’에서 ‘청주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로 바뀐 시점이 지난 2003년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위원회’(PCSD)가 2기로 넘어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조례화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의제 추진기구가 출발한 지역으로 부산, 서울, 순천, 안산, 청주, 이런 순서로 됩니다. 96년 전후해서, 97년도에 작성되는데, 대부분 환경기본조례 내에 민관협력으로 해서 되어 있고, 청주 같은 경우도 ‘푸른청주21’을 둘 수 있다, 정도만 되어 있죠. 2003년도에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로 되면서 조례 문제가 계속 거론이 됐었어요. 작년에 PCSD에서 제도화 연구를 하는 걸 봤을 때, 촉진법 형태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청주 같은 경우, 주무부서가 환경과에서 기획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시 위원회가 될지, 논의가 있었는데, 사회경제위원회 소속이었다가 주무부서가 바뀌면서 운영총무위원회에서 의제추진기구와 관련된 조례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리고 관련법이 만들어지게 되면 지금은 환경관련 법상에 ‘청주시환경기본조례’가 있고, 이 조례 안에 ‘푸른청주21’을 둘 수 있다, 정도를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를 둘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지금은 자체 정관으로만 되어 있어요. 조례는 한 번 만들어지면 다시 바꾸기 어려우니까, 추이를 보고 관망하는 중이고, 2006년도에 선거가 있으니까, 그 즈음에서 하자는 생각들이 많아요.”

제도화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은 정치적 고려에 의해 부침이 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로 최 국장이 몸담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예산 배정과 관련해 굴곡이 심했던 것 같다.

“2000년에 처음 왔을 때는 환경봉사원 교육사업 예산만 5천만 원이 있었어요. 그 당시 후배랑 같이 일했었는데요, 공공근로 형태로 2002년도까지 일 했고, 2003년에 들어와서 정식 예산으로는 처음 생겼어요. 관리운영비 내에 인건비가 있었고, 딱 2003년 1년만 2명의 인건비가 책정된 거죠. 2004년도에는 삭감됐었고, 올해는 1명 정도의 인건비가 사업비에 반영 되었죠.(현재 최국장을 포함해 2명의 상근자가 있다) 나머지 한 명의 인건비는 오버헤드 형태로 충당해요. 사업의 종류가 한 3가지가 있다면, 금액 대비 비중으로 한 사람의 인건비를 충당하고 있는 거죠. 위원들에게는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있어요..........안정화되어 있지 못하죠. 기본적으로 일을 하다보면 일 욕심이 생기잖아요. 잘 하는 곳 있으면 욕심이 생기는데, 단체가 하고 있는 일과 저희가 하고 있는 일이 많이 공유되어야 하는데, 하다보면 그 영역을 저희가 넘어가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뭐라고 할까요, 알력, 견제, 이런 것도 있고 해서, 사실은 이 인원에 맞게 이를 해야 하는데........그래서 어려운 점이 있죠.”

청주도 여타 지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지난 포럼의 핵심 토론 주제였던 ‘제도화 방안’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약 10년의 역사를 지닌 청주의 의제사업을 염두 하면서 지역사회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기구로 자리매김했는지 물어보았다.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의 위상이라고 할까?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환경과가 주무 부서이었을 때는 환경과가 관리하고, 개발부서의 협의회 성격을 가지고 사업들을 진행하는 형태다보니까, 우선순위에서도 밀리고, 과에서 국으로 보고가 될 때도 잘 보고 되지 않고 단지 환경과 차원에서 일이 진행됐다고 보면, 기획부로 옮기면서부터 위상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죠. 기획부서로 옮기게 된 배경이 의제의 업무가 시 전반의 사업을 총괄하는 업무다, 그런 공감대 때문에 옮기게 됐고, 직접 과장급 이상, 국장님이나 부시장님, 시장님께 제가 직접 업무보고라든지 결재를 드려요. 제가 직접하다보니까 훨씬 이해의 폭들은 넓어졌고, 그래서 이 사업과 관련해서 해당 부서에게 협조를 받아야 되는 일이라든지 그러면, 그 쪽으로 안내를 해요. 그렇게 만 3년 하면서,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 역할이 어느 정도 인식이 되는 단계인 것 같아요. 로테이션이 돼서 공무원이 바뀌더라도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해주죠. 1주일에 2-3차례 들어가서 저희가 무슨 회의를 하고 어떻게 진행이 되고 결과가 어땠는지 정리해서 올리죠.”

대부분의 의제사업이 그렇지만,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이해하는 수준도 큰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최시영 국장의 경우도 민․관․학 세 개의 파트너마다 서로 다른 회의 자료를 작성해서 만나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제는 간단한 개조식의 자료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을 만큼 의제사업에 대한 괴리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의 위상을 대변하기도 한다. 특히 청주는 주무부서가 기획과라는 것은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주무부서가 기획과인 것은 청주가 유일하죠. 기획부서에서 주관하는 것은 우리가 처음이죠. 이런 얘기까지 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 지방의제가 처음 생길 때는 자민련 시장님이셨고, 그리고 막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로 옮겨가게 되는 계기가 벌어질 때는 민주당 시장님이었고, 그리고 딱 그런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조직형태나 주무부서가 바뀔 때는 현재 한나라당 시장님이었기 때문에, 매 시기에 단체장의 마인드가 의제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아요. 사실 조례가 없는 상태에서 단체장의 의지를 갖지 않으면 예산 등이 쉽지 않은 거죠. 물론 그렇게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시민사회를 앞장서서 리드해 오신 시민단체 대표 분들이 큰 역할을 한 거죠. 시장님이 바뀔 때마다 의제사업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앞장서서 설명했으니까요.”

단지 지방의제21사업의 선도성만이 아니라, 그간 지방자치의 역사적 맹아를 싹틔워 왔던 단서들을 곰곰 되짚어보면 청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을 법 했다.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제 견해는, 하나는 ‘정보공개조례’ 제정할 때는 제가 밖에서 농민회 활동을 했던 때라 잘 모르겠지만, ‘시민참여기본조례’를 만들 때는, 쭉 지켜봤거든요.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하는 짧은 소견을 말씀드리면, 시민단체들 간의 연대가 크지 않았을까 합니다. 과거에 총선시민연대 활동이라든지 이후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활동이라든지 할 때, 참여연대나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메이저 단체들이 중심이 돼서 하는 활동들이 파괴력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게 1차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몇 몇 시의원들의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것 같고요.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특정 의원들이 이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시민단체 활동의 영향이라고 하더라도 ‘시민의 참여’ 부분을 봐야 하잖아요? 정말로 그런 힘들로 인해서, 시민이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이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를 해봐야겠지만........”

최시영 국장은 말끝을 흐렸다. 시민단체의 영향력과 뛰어난 정치인들의 포진, 이 두 가지 요인은 부정할 수 없다며 못을 박았지만, 전반적인 시민사회의 역량이 청주에서 각종 모델케이스를 만들어냈는지에 대해서는 곱씹어봐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시영 국장은 다음 말을 잇는다.

“..........아무튼, 시민단체의 활동이 시민들 속에 자꾸 회자되고 토론되고, 그로 인해 후속활동들이 이어져야 하는데, 그런 것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자부심은 매우 강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안에 있을 때는 잘 모르는데, 단체마다 다양한 활동들이 있으니까, 이를테면 원흥이 살리기 운동을 했다면 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거죠.”

어쩌면 그런 자부심이 청주 시민사회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진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 영역이든, 사회 영역이든 말이다. 곧이어, 그렇다면 청주의 시민단체들이 추구하는 ‘거버넌스’의 상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다른 지역의 상황은 모르겠지만, 상호 신뢰가 구축되어야 할 것이 있고요, 그리고 상호신뢰가 구축되는 것에 있어서 필요한 세분화된 영역이 있는 것 같아요. 도시기본계획 같은 것을 수행했다면, 관련 공무원이나 참여했던 전문가 같은 경우에는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이 있어요. 그리고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에 멤버로 활동하시는 분들과는 좀 다른 점이 있다는 거죠. 청주의 경우, 더 큰 차원에서 실질적이고 특정 부분에 있어서는 훈련되어지고 경험들이 쌓여지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만, 도시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대다수의 청주시 산하 위원회 활동이라든지 여타의 영역에 있어서는 다른 자치단체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거버넌스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기보다는 그와 같은 논의 틀이 어떻게 기획되고 운영되어지면서 상호 신뢰를 쌓을 것인가가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아직 바뀌어야 하는 점이 많죠.”

서로 신뢰를 획득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최국장은 보고 있었다. 아직 한국 사회는 이런 훈련이 부족하다는데 공감이 갔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실현가능한 거버넌스의 모양새는 어떤 모습일까?

“제가 보기엔, 일차적으로 지방자치단체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한다면,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의견수렴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 수렴된 의견들이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나름대로 협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수준은 매우 제한적이죠. 그 다음, 어느 정도 최종 확정되기 전 단계, 즉 단체장에게 올라가기 전에 보다 많은 공람 과정들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절차나 방법의 문제가 선행되어야 하고요, 화두는 ‘혁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지역발전’이라는 것이 뭔지, 이런 것에 대한 담론들이 시정책과는 무관하게 민간 영역에서 활발하게 모색되어지고 논의되면서, 여기서 축적된 성과들이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들이 입안되는 과정에서 수렴되고 고려되어질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까지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상황이죠.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복지예산이나 일자리 창출과 관련된 부분에 예산을 책정하고 그 사업의 성과들을 무엇으로 측정할 것인지를 확인하는 실험들을 해보고, 그 상태에서 새로운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서 논의할 수 있도록 하는 모양새라면 다른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정도가 모양새가 아닐까 싶네요.”

그러면서 최국장은 현재 수준에서 점수를 매긴다면 100점 만점에 20-30점이 아니겠냐고 답한다. 거버넌스 현장에서 활동하는 한 활동가의 진단이 이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그 정도의 점수라면, 현재 수준에서 ‘거버넌스’운동은 좀 비관적인 것이 아니냐고.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전제로 말씀드리면, 행정부는 민간의 참여를 끌어들일 때, 그 분야에 전문가들을 구성해요. 그 사람들이 사업적 파트너인 거고, 이 쪽 같은 경우는 시민단체나 소위 말하는 관변단체가 참여를 하죠.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전문가의 역할을 보면, 전문가는 자기가 공부한 영역에 있어서 가설이 있거든요. 그걸 함수를 쓰던 써베이를 하든, 논거들을 쓸 때 대체로 제한적이에요. 그 분야에 있어서 자기 생각은 이렇다, 라는 것을 말할 뿐, 정작 정책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를 그것을 입안한 공무원들이 더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충분하게 얘기를 안 해요. 전문가와 시행정과의 관계는 이 정도입니다. 그런데 시민단체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해온 영역들이 있거든요. 지역단체나 중앙의 단체, 혹은 국내외의 단체들의 활동까지를 벤치마킹해서 이미 한 번 시행을 했거나, 아니면 그런 것들에 있어서 검증과정을 거쳐서 도태되는 프로그램도 있고 살아남는 프로그램도 있고, 정책화하는 과제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한 가지 정책에 개입해서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이런 경험들이 있는 분들이 안식년을 통해서든 다른 형태로든 자신이 그 동안 애정과 열정을 쏟고 해왔던 일들을 정리해보는 것, 그랬을 때, 이후에 이러한 일들이 지역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전문가들보다 포괄적 제안을, 풍부한 제안 속에서 고려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전문가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거고, 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다 알지만, 예산을 집행해야 하거나 위임된 사무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유연하면서도 전문가가 갖지 못하고, 행정이 갖지 못하는 영역들을 잘 정리해서 공식적인 자료화를 하는 건 중요할 것 같고, 그리고 그게 설사 쌈빡한 것으로 정리를 못한다하더라도 그렇게 해놔야 다음 사람들이 들어가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속에 추가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정리는 한다면, 시 전체를 보더라도 대단한 투자일 거라고 생각하고요, 개인의 경험이 사장되면 그만큼 축적되거나 정리될 수 있는 것들이 멀어진다고 생각해요.”

즉답은 피했지만, 시민단체와 전문가, 그리고 행정부가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최국장의 생각이다. 지금은 균형 잡힌 거버넌스의 관계는 아니지만 민간이 쌓아온 경험을 정리하고 유연성을 발휘하면 행정부와 전문가의 약한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개인과 조직의 경험을 축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최국장의 진단이다. 거버넌스를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경험을 축적하고 정리하는 일은 지역운동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주제를 넘겨, 최근 청주시의 주요 사안이 무엇인지 물었다. 최국장은 제주도의 행정구조 개편 주민투표 열기가 청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운을 뗀 후, 청주시와 청원구의 통합을 묻는 찬․반 주민투표가 9월경에 실시될 거라고 말했다. 마침,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지역신문 1면에도 이 사안이 탑 기사로 올라와 있었다.

“주민들의 동의를 위해서 주민투표가 9월14일 날 예정되어 있어요. 사실은 이게 2002년도 선거 때도 얘기가 됐었어요. 이 때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단체가 청주참여연대였어요. 환경연합은 한 발 빠져 있으면서도 환경관리의 측면에서 무분별한 난개발 때문에 통합하는 것에 조건부였고, 청주참여연대는 적극적으로 ‘하나 되기 운동본부’를 만들었었고, 올해 들어서는 ‘청원참여연대’도 만들어서 주도적으로 이런 일을 해왔죠. 청주참여연대가 사실은 시민참여기본조례를 만들어 내는데 산파역을 했던 거고, 2002년도까지만 하더라도 청주참여연대는 물 위에서 토론을 해보자는 입장이었어요. 그러면서 흐지부지 됐거든요. 올해 연초만 하더라도 청원군은 절대 통합 불과론이었어요. 그런데 청원군수와 청주시장이 미국을 다녀온 후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해서 합동 기자회견도 하고, 통합시장선거로 간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통합론이 가시화된 거죠. 오늘 신문을 보니까, 도에서도 실무추진반이 만들어졌더군요.”

시민단체들 간에도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는 듯 했다. 외부 사람의 입장에서 쉽게 판단할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통합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무엇이냐고.

“원래는 ‘하나였다’라는 것이 가장 큰데, 대체적으로 통합의 논리들을 보면, 버스요금 이원화, 택시요금 이원화, 이런 부분에 있어서 주민 생활에 영향이 크다는 것, 그리고 그 반대 논리로 세금 부담이 더 크다, 이런 논리도 있는 것 같고. 사실은 군이었다가 시에 편입된 지역에 쌀 생산 농가들인 경우에는 수매량 할당을 받지 못하는 불이익이 있거든요. 농가들은 농민단체나 이장단협의회나 이런 곳에서 반대집회를 7월5일 날 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어요.......공무원들 생각은 통합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왜 통합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논리적으로 취약한 것 같고. 대세다, 흐름이다, 이런 분위기인데, 사실 ‘군’ 단위의 사무는 도에서 집행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시로 승격될 경우에는 위임사무가 대부분 시가 받아 안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인 것 같아요. 이 지점에서 반대 흐름이 약화되었죠.”

두 단체장이 미국을 다녀온 후 통합 분위기가 급물살을 탔다는 것만 보더라도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 논의는 정치적 의도가 농후하게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원군수 한 자리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청원군을 정치적 토대로 삼고 있는 정치인들에겐 쉽지 않은 선택임에 틀림없지만, 두 단체장간 모종의 거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출발부터 공개되지 않는 흑막으로 인해 통합의 결과가 정치적으로 휘둘리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넌지시 최국장의 입장은 무엇인지 물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휘둘리고 있다고 봐요...........그 문제에 있어서 저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죠. 저희 조직의 지원이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웃음) 통합과 관련해서는 오송분기역과 오송의 바이오단지 유치에 대해 충북도가 신경을 많이 썼어요. 이미 내년도 구상이 오창산업단지, LG단지 청주공장이라든지 청주대학교 공주캠퍼라든지 밖에서부터 입주가 시작이 되면 오창도 5만 규모의 도시가 돼요. 그 밖의 여러 지역들이 이미 시 규모로 들어서는 곳들이 광역화 된다고 했을 때, 행정의 효율성들은 결성될 수 있지만, 아무래도 큰 도시보다는 작은 조직에서의 일들을 풀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이 우려스럽죠.”

통합의 조건으로 농민 관련 기금을 급하게 마련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청주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의 지원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우려스러운 최국장의 걱정이었다. 또한 지방자치의 원리대로라면 통합은 시대에 역행하는 모순이라는 생각도 지니고 있지만, 민관기구에 몸담고 있는 처지에서 통합의 긍정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이런 상황에서 최국장은 통합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2가지 사업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올해 두 가지 사업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쓰레기 사업과 관련해서는 통합 이후에도 문제가 될 것이고 나름대로 조사하고 실험해봤던 일들이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이를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을까,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을까, 이런 류의 정책들을 생산할만한 조직이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라는 것을 의원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필요하고, 어쨌든 통합이 되던 안 되던, ‘지속가능발전실천협의회’가 뭘 가지고 갈 것인가, 또는 시의 지속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데, 저희도 이에 대해 공부도 하고 준비도 해야겠죠. 기초지역은 세세한 데이터가 부족하잖아요. 지속가능한 데이터들을 뭐로 할지 고민이 됩니다. 그렇게 두 가지 사업, 즉 지속가능성 평가지표개발 사업은 내년 말까지 완성하고, 쓰레기 사업과 관련해서 통합 이후에도 지속가능발전 활동 속에서 재활용 사업으로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이렇게 두 가지 축에서 제 역할과 임무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쪼록 지방자치의 새로운 장을 열어왔던 청주시가 주민들이 원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통합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길 기대해본다. 끝으로 최국장에게 던진 화두는 지역운동이었다. 먼저 청주의 지역운동의 분위기는 어떤지 물었다.

“청주도 많이 침체되어 있죠. 일단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의 평균수명이 짧죠. 생애주기를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단체 활동주기를 말하는 건데, 활동가 층이 폭넓게 위치하지 못하는 한계들이 있는 것 같고요, 마찬가지로 단체의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고유한 단체의 활동들이 자리매김하는 과정들이 좀 소홀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체의 역량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연대활동들을 통한 이슈화이팅이 중심이 되다보니까 이후, 단체로 돌아갔을 때, 산적한 문제들이 그 활동을 통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되는 거죠. 그런 점이 어려움을 가중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당연히 개별 회원들의 활동들도 떨어지게 되죠. 회비 납부율도 낮아지고. 또 중심활동가인 경우에는 향후 전망과 관련해서 고민들이 이어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청주 지역의 중견 활동가 몇 명이 안식년에 들어가 있고, 환경운동연합의 활동도 동력이 많이 약화됐죠.......지나 온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전망들을 세우는 모색기간인 것 같아요. 외화되는 활동보다는 내부를 추스르고 갈무리 하면서 규모에 맞는 활동의 질과 내용들을 확보하는 시점인 것 같아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지역운동은 숨고르기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활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단편적인 생각인데요,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지역정치운동의 영역으로 활발하게 모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활동가 수준에서의 고민들은, 사실 일반 시민, 회원들과 차원이 조금 다르잖아요. 시민들과 회원들에게 네가티브적인 운동의 영역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던져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이 정치영역으로 간다거나, 시민단체가 후보전술로 간다거나, 조직 전체가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개 단체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면, 정치에 대한 의식들을 바꿔내고, 기존의 정치조직과는 무관하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진단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기존 정치조직을 어떻게 볼 것인가도 논의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을 통해 개인의 전망과 관련된 것도 새롭게 모색해 보는 거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묻지 않았을 때에는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직접 대화의 장을 통해 확인해보고, 그런 요구들을 적극 받아 안을 수 있는 개인도 있고 조직도 있지 않을까, 그런 정도의 생각이 들어요.”

최국장은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정치영역도.........’로 요약하고 있다. 분명 지역운동은 정치영역과 얽혀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없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자기 조직 내에서 아직 그런 공론화 과정을 거치기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고, 사실 그런 고민들이 있을 법한 활동가들은 많지 않잖아요. 그렇게 고민하는 활동가 중심의 토론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고민들을 솔직히 얘기하고 자기 조직이 처한 한계와 상황들에 대해서 서로 공유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내 조직의 문제를 내가 풀어가는 데에는 일정하게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 즉 다른 조직의 사람들은 훈수는 둘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런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을 모셔서 나를 대신할 얘기들을 하고, 예를 들어 나는 방어하는 입장에서 의견들을 피지만 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는 과정들을 밟을 수 있을 것 같고, 일차적인 것은 그런 고민의 수준, 지역운동에 대해서 복무했고, 지역운동의 향배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얘기를 나누면 공식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좀 더 확대된 영역들의 사람들이 모이면 더 많은 아이디어를 모을 수도 있고요.”

정치영역을 고민하는 활동가들이 많진 않겠지만, 허심탄회하게 만나 서로의 생각을 터놓는 것부터 출발하고, 그럴 때 지역운동과 정치운동은 상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최국장은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배경이 최국장에게 이런 고민을 던져주었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7월에 연기군에서 있었던 지방의제21 정책포럼을 다녀와서 고민이 좀 많았어요. 고민이 됐던 부분은 지속가능발전협의회 활동이 저한테 최우선이거든요. 동시에 내년 선거를 적극적으로 개입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었어요. 그러면 어떠해야 할까, 3일 정도 쭉 정리를 해봤거든요. 저와 연계되어 있는 것을 정리를 해보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배경은, 사실 외부로부터 이러 저러한 얘기들이 있었어요. 최종적인 결론은 내 호흡대로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조급하거나 서둘러서 혼자 뛰쳐나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공동운명선을 타고 가는 데 있어서 제 역할을 찾아나가는 것이 현재 수준의 고민이고요, 그렇다고 제가 다른 것을 고민하는 것은 아니고, 제 운동의 선택폭들은 향후에 많지 않는 것은 분명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정치운동에 대해서 조금씩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서문에서 간략하게 밝힌 바 있지만, 지난 지방의제21 정책포럼의 화두는 지방선거를 통한 의제사업의 제도화였다. 그런 논의 과정에서 활발하진 않았지만, 정치참여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최국장의 고민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현재 수준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음으로써 정치운동에 발판을 삼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최국장이 말하는 정치운동이란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의미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얘기지만,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도 민노당 활동을 쭉 이어오면서, 현재 나타난 문제들이 지역 차원에서 해소되는 과정들을 적극적으로 받아갈 수도 있지만, 현재 민노당은 계속 갈등도 있고, 정파간의 대립도 있고, 시민사회 간의 갈등도 있는데, 이런 모습이 계속 될 것이라고 하는 비관적인 생각들이 많이 들었어요. 제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향후의 정치지향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서 그 외의 영역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 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이렇다할만한 고민들을 해보진 않았지만,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지속가능발전이라고 하는 신념과 다양한 고민들이 이어질만한 형태의 정치활동들이 무엇인지가 중심인 거죠. 이것을 다시 민노당으로 가져갈 들어갈 경우에는 그 동안 활동의 경험들은 유효할지 모르지만, 계속 밀고 왔었던 지역의 지속가능발전과 관련된 영역의 고민들은 사장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죠. 이것이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정치활동 공간, 영역에 대한 고민이 있는 거죠.”

실제, 최국장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활동가들이 존재하고, 조만간 그런 활동가들과의 모임을 가질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년 선거를 가시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최국장의 판단이다.

“지난 5년의 활동들을 새롭게 재인식하고 재해석하고, 나의 성과와 나름대로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 다른 영역에서 비교해보고 그간의 활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를 중심에 놓고 고민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제가 도시계획 대학원을 다닌 것도 지속가능발전과 관련된 지표나 계획들이 사회 어느 한 영역에서 수립된다고 하더라도 도시계획과 관련된 것들이 아직까지 사업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와 지속가능발전을 연계할 방안은 무엇인가, 혹은 기존의 도시기본계획 내에서 우리 시민들의 문화나 역사와 관계된 부분들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은 무엇인가 등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는데, 역시 다시 정리하면서 긴 템포로 가자는 것이 결론이었어요. 그래서 민노당의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정치영역의 활동들을 어떻게 준비할 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있어요.”

최국장의 운동 방향은 어느 정도 잡혀 있는 듯 했다. 그 때를 위해 역량을 축적하는 단계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최국장은 ‘초록정치연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다. ‘초록정치연대’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직은 지역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 가장 코드가 잘 맞는 정치모델이라고 덧붙이면서, 청주지역에도 그런 네트워크가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최시영 사무국장은 전문성을 갖춘 활동가다. 게다가 다양한 운동영역을 경험함으로써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성까지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고스톱을 칠 때 외에는 밤을 지새운 적은 없지만, 의제사업 하면서 밤을 지새운 적이 많았다며, 이 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것 같다고 스스로 말한다. 마침, 인터뷰한 날이 중복이었고, 삼계탕을 대접받으며 그의 입담을 더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겐 좋은 배움의 시간이었다. 최시영 사무국장의 꿈이 싹트고 개화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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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운동’을 통해 주민과 만나다" - '위례시민연대'를 찾아
인터뷰 : 최영선 사무국장

활동가들에게도 각자 독특한 기풍이 있는 것 같다. 조직가적 기풍의 활동가가 있는 반면, 정책생산형 활동가, 아이디어가 풍부한 활동가, 달변가형 활동가, 글쓰기가 탁월한 활동가 등등 각 기풍에 따라 호탕하거나 섬세하거나 사교적이거나 치밀하거나 성실한 성격이 가미되어 나름의 방식, 또는 개성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자기 특성을 잘 파악하고 그에 따른 역할을 부여받는다면 활동가적 역량은 충분히 발휘되지 않을까 싶다. 반대로, 자신의 역량에 비해 과한 일을 맡거나 역량과 동떨어진 위치에서 일한다면 조직이나 개인의 발전 속도가 좀 더딜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후배들의 개성을 눈여겨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리더가 있다면 좋은 리더라고 평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인터뷰 대상인 위례지역복지센터의 최영선 사무국장은 자신의 개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활동가였다. 민감한 이슈에 대한 선점 능력이나 정책생산에는 그리 민감하지 않지만,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사교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조직력은 최대의 강점이라고 최영선 사무국장은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었다. 실제 그를 만나고 든 느낌도 그러했다. 세련된 위스키나 시원한 맥주보다는 정이 넘치는 컬컬한 소주가 잘 어울릴 것 같은 활동가였다. 그래서 최영선 사무국장은 이슈 파이팅의 ‘위례시민연대’보다는 조직사업이 핵심인 ‘위례지역복지센터’의 사무국장으로 불리는 것이 부담 없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위례시민연대’와 ‘위례지역복지센터’의 활동 맥락을 들어보기로 하자.

“지역단체들이 발생 초기의 구성인원이나 역사가 다 다른데, 저희 같은 경우는 활동가 중심의 모임이었어요. 89년이었나? 전교조 합법화를 위해서 활동을 할 때, 이 지역에 사는 몇 몇 활동가들이 모임의 이름도 없이 사안에 따라 대응을 하는 작은 모임으로 시작했어요. 그 때 모여서 전교조 합법화운동을 전개했고요, 경륜장 반대운동을 하기도 했죠. 그러다가 96년도에 들어서서 386으로 대표되는 활동가들이 상설화시키자는 제안이 있었고, ‘강동송파시민단체협의회’라는 협의체를 상설화해서 지역을 근거로 운동을 하는 상설기구가 만들어진 거죠. 그렇게 모인 후 첫 번째 사업이 97년도에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을 했어요........‘강동송파시민단체협의회’는 단체 협의체였지만, 개인도 참여하는 구조였어요. 우리 지역에는 노조가 활성화되었었어요. 아산병원 노조(예전 중앙병원), 가락시장 노조, 그리고 노점상연합회, 그리고 강남향린교회, 그리고 강동송파열린사회시민연합, 그리고 마천동에 있는 다산야학, 이렇게 대략 14개 단체가 모인 협의체였죠. 여서 협의체를 꾸려서 활동을 하게 됐죠. 그 이후에 실업운동도 하게 되고, 그 때 그 때마다 사안에 대처하면서 활동을 하다가, 소위 공공의 적이 사라지는 시점이 되는 90년대 말에 노조는 노조 나름대로 그 안에서 운동을 하면 되는 거고, 노점상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 그래서 해체를 논의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001년도에 ‘강동송파시민단체협의체’를 계승한 회원단체 형식으로 2001년에 ‘위례시민연대’로 태어나게 된 거죠.”

‘위례시민연대’의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89년 전교조 합법화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활동가 모임’이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 ‘위례시민연대’의 기풍은 이슈 파이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영선 국장은 98년부터 인연을 맺었고, 현재 부설기관으로 있는 ‘위례지역복지센터’의 사무국장이기도 하다. ‘위례지역복지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위례시민연대’의 주요 활동 영역은 복지였어요. 그런데 복지 영역은 일상사업으로 접근해야 됨으로 상근자가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복지 파트를 전문화하자, 주민과 만나기 위한 기재로써 우리는 복지 영역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어요. 그래서 2003년도에 ‘위례지역복지센터’가 설립된 거죠. ‘복지센터’가 부설기관이죠. ‘위례시민연대’는 회비를 내는 진성회원이 92명이고요, 그리고 지역복지센터는 80명 쯤 되는 것 같아요. 회원은 ‘시민연대’와 ‘복지센터’가 따로 관리해요. ‘복지센터’ 회원은 후원회원의 성격이고요, ‘위례시민연대’ 회원은 참여하는 회원이라고 보시면 되요. ‘시민연대’는 총회구조가 있고 ‘복지센터’는 총회구조가 없어요. 그냥 운영위원회에서 다 해요. 그리고 위원회로는 ‘지방자치위원회’가 있어요. 작년 한 10월부터 시작했어요.”

두 개의 기구 중, ‘지방자치위원회’는 지역 사안을 대응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고, ‘복지센터’는 일상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현재 ‘복지센터’는 두 명의 상근자가 있다. 여기서 최영선 씨가 사무국장은 맡고 있다. ‘위례시민연대’의 상근자는 없다. 황기룡 사무국장이 작년에 그만두었기 때문에 공석이다. 어쩔 수 없이 최영선 사무국장이 겸직하고 있는 셈이다. 활동가라고 보기엔 어렵지만 ‘실버택배’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이 10여 분 정도 일상사업을 전개하고, ‘주거지킴이’에서 1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사업의 비중이나 상근자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아무래도 ‘복지’ 영역이 주요한 활동 내용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에 대해 더 물어보았다.

“‘복지센터’는 2002년부터 준비를 했어요. 기획단을 모아서 새로운 운영진을 구성한 건데, 그 당시 장애인치과진료를 건치와 같이 하면서 이 지역에 있는 의료 관련 분들을 만나게 된 거죠. 진료는 2000년부터 했죠. 그 때 관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부설기관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약 13개월 준비회의를 해서 설립을 한 거죠. 지역은 그런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중앙조직은 뜻 맞는 사람이나 활동가들 몇 명이 모여서 시작하자, 그러면 깃발을 세워 하면 되지만, 지역은 활동가 구조가 취약하기 때문에, 어쨌거나 주민들로부터 출발을 해야 되잖아요. 주민들 속에 그런 소양이 있거나, 또는 주민들 가운데 참여의식이 있는 사람을 발굴하는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발굴해서 뜻을 같이 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뜻을 같이 해서 설립하는 데까지 기간이 많이 걸리죠. 그렇지만 의미는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설립을 하면 뿌리가 튼튼하니까 쉽게 휘둘리거나 쉽게 무너지거나 이런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 지역의 특성상 무언가 하나를 만들더라도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다. 주민들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만들어지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을 지닌다. 다행스럽게도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소속의 치과의사들이 ‘위례시민연대’ 주변에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시도했던 것이 장애인치과진료였다. 매년 3-4월경에 이벤트 형식으로 장애인치과진료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위례지역복지센터’를 지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작년부터는 저소득층까지 대상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보건의료 영역에서는 나름대로 내공이 있을 것 같았다. 지역차원에서 보건의료 문제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면 될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같은 경우, 보건의료는 직접사업으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그 분야에서 나오는 답들은 뻔할 거예요. 도시형 보건지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인데, 현재 보건소의 기능이라는 게, 꼭 해야 할 일을 다 하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일들이 아무 것도 없고, 예산도 적고, 그리고 구청에서도 보건소 예산을 편성하는 데도 소극적이고, 보건소 소장 자체도 의지를 갖고 하는 곳이 거의 없고. 그래서 꼭 해야 할 일들 중에서 예방 정도를 좀 신경 쓸 뿐, 그 외 다른 업무는 빈약하니까, 실질적으로 구민들의 건강향상이나 이런 부분들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그래서 ‘가건연네트워크’(가난한 이들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연대회의)가 생기면서 공동 대응이나 공동 사업, 이런 것들을 하게 됐죠. 한편 힘을 덜었죠........이 곳에서 어떤 일을 했냐면, 도시형 보건지소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실태조사를 했었어요. 각 단체마다 구를 나눠서 실태조사를 하고 그 보고서가 나왔죠. 그런데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되면서, 도시형 보건지소가 공약사항이었거든요. 그런데 보건복지부 관계자가 말에 의하면 예산이 잡히지 않아 이행되지 못하고 있대요. 그 공약이 흐지부지 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싸울 힘도 되고 능력도 있었으면 강하게 밀어붙였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사실, 현 정부의 공약은 쉽게 되는 사업이라고 봤거든요. 그래서 실태조사 하고 발표하고 그랬는데.......물 건너간 것 같아요.”

도시형 보건지소에 대해 더 물었다.

“도시형 보건지소라는 것은 보건소 분소를 의미하는 거죠. 예를 들어, 이 근처 강일동 지역은 독거노인 집중 지역이거든요. 그런데 이 어르신들이 의료기관을 방문할 때, 멀고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보건소의 분소를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 둔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반론이 있어요. 요즘 개인의원도 많고 할머니들이 오시면 누구든지 친절하게 대하는데, 굳이 예산을 들여서 보건소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 하거든요. 그런데 보건소라는 것은 진료를 잘 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주치의 개념으로, 어르신들의 건강데이터, 그리고 저소득 가정의 건강데이터를 관리해주면서 그나마 예방의 기능을 확대하고, 진료까지를 포함시키는 개념이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게 도시형 보건지소거든요. 그게 필요하겠다는 거죠.”

의사들의 논리에 막혔는지, 애초에 정부의 의지가 없었는지 알 수 없으나, 보건지소에 대한 정책은 희미하다. ‘위례시민연대’가 지역복지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특별한 계기 때문이었다. 길지만 그 얘기를 들어보자.

“송파 지역에 비닐하우스 촌이 있거든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에 가락동에도 있었고, 통일촌이라고 있었고, 가락동은 재작년에 없어지고, 나머지는 다 현존하고 있죠. 화훼마을 하고, 장지마을, 해서 한 2천 세대가 있었어요. 송파구에서 대단위 지역이었죠. 주거환경이 어땠냐면, 물도 나오지 않아 지하수를 먹어야 했고, 전기도 송전이 안 돼 농업용으로 이용해야 했고, 전화도 안 되는 아주 열악한 지역이었죠. 더구나 화재가 발생하면 아무도 대처할 수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99년 1월 달인가, 화훼마을 화재사건이 나서 117가정이 다 전소가 돼버렸어요. 그 때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죠. 그래서 우리가 지원활동을 하기도 했죠. 구재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제도적으로 뭔가 보완할 필요성이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그 분들이 ‘긴급구호비’ 정도만 받았거든요.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한 가정당, 14만 원인가? 한 달을 받고 두 달까지 연장할 수 있는 그런 긴급구호비가 전부였어요. 그래서 그 때 우리가 계속 생각했던 것이, 이 분들을 수급자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런 시도를 해보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주소지 중심으로 생보자를 선정하기 때문에 맨날 퇴자를 맞았잖아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 ‘참여연대’가 제안해서 소송을 했죠. 참여연대는 소송할 변호사를 만들어주고, 우리는 원고를 모집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2001년도에 그 분들이 주소지를 찾게 됐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송파구청은 3심 항소를 포기하고 만다. 왜 그럴까?

“그런데 웃긴 것은, 저희가 소송을 해서 2심까지 승소를 했어요. 3승까지 송파구청이 항소를 하면, 대법원까지 갈 거고, 대법원에 가면 당연히 이길 싸움이었는데, 송파구청이 2심까지 가고 3심 항소를 포기했어요. 대법원에 가면 행정처리를 다 해줘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송파구청이 대법원에서 패소하면, 전국의 비닐하우스에 다 주소지를 줘야 한대요. 그래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행자부와 건교부의 제동으로 항소를 포기하는 바람에 송파구만 주소지가 인정이 된 거죠. 송파구 비닐하우스 촌만 수급자로 인정이 되고, 학교도 주소지랑 가까운 곳으로 배정받게 되고, 옛날에는 예비군 통지서가 다른 주소로 나오는 바람에 벌금도 많이 물으셨는데, 그런 문제가 다 해결이 된 거죠. 주소지가 생긴다는 것은 투표권을 갖는다는 의미기도 하잖아요? 이 사람들이 투표권이 생기다보니까 뭐가 달라졌냐면, 그 동안 주민들의 민원을 제기했던 이 마을 앞의 큰 도로에 횡단보도를 설치해달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구청에서 횡당보도 절대로 설치를 안 해줬죠. 그런데 주소지 찾자마다 횡단보도 만들어주고, 그리고 마을 올라가는 언덕을 시멘트로 다 만들어주고, 진입로 만들어주고, 소화전을 설치해주고, 우체통 해주고, 하여튼 여러 가지 여건들이 달라졌죠.”

표를 먹고 사는 게 정치인이고, 그래서 투표권을 쟁취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이주노동자에게도 투표권이 있다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정책은 상당히 다른 모양일거다.

“그런데 우리 같은 지역운동단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주민의 삶이 얼마나 변화되는지를 그 비닐하우스 촌이 대표적으로 알려주는데, 왜냐하면, ‘구룡마을’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비닐하우스 주소지는 승소 판례가 있기 때문에 떼 놓은 당상이잖아요. 그래서 ‘구룡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소송을 진행하려고 시민단체 도움 없이 돈을 걷었어요. 우리는 공익소송이니까 돈이 안 들었잖아요. 그런데 소송비용을 걷은 사람이 도망쳐버렸대요. 돈도 잃고 주소지도 못 찾고, 지금 그런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지역운동단체가 왜 필요한가는 여기서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운동단체의 공익성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아무튼 비닐하우스 주소지 찾기 운동은 ‘위례시민연대’에게 기쁨을 맛보게 한 소중한 케이스였고 운동의 중심 테마도 ‘복지’로 옮기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복지’라는 영역에서 어떤 직접사업을 하고 있을까?

“‘SK실버택배’가 있는데요,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의 일자리 알선을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사업을 아이디어로 낸 이유는, 지역사회 내에서 보수 세력인 어르신들을 조직하고 싶었어요. 단체 활동을 하면서, 젊은 활동가들이 만나면 아주 재밌어요. 그런데 변하지 않아요. 이상하게. 의식이 전혀 안 변해요. 그것은 우리끼리는 굉장히 많이 변했고, 고무되어 있고 똑똑해졌는데, 정작 같이 가야 할 주민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여전히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보수성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죠. 그렇다면 만나서 얘기도 해보고, 새로운 삶의 태도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해야 될 것 아니에요. 아주 긴 과정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아이디어를 낸 거죠. 지금은 10여분이 계세요. 그리고 ‘주거지킴이’ 사업이라고 해서, 저희가 예전에 실업사업을 할 때, 도배학교를 했었어요. 주거연합 대표님이 저희 회원이시거든요. 그래서 그 분을 강사로 모셔서, 그 분의 본직이 도배하는 거예요. 그래서 실업자를 모셔서 도배학교를 했어요. 그런데 이 분들이 수료를 하고 나니까 갈 데가 없어요.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지물포로 가더라고요. 그런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고스란히 집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노동부 사회적 일자리 창출사업이 있어서, 어려운 사람들의 집을 찾아 도배해 주는 일을 하게 된 거죠. 네 분이었는데, 올해는 열분이 하게 됐죠. 이 사업은 주부 중심이고 30대 이상입니다. 도배 훈련을 받으신 분들을 채용해서 하게 됐죠. 그리고 보건사업의 경우 매년 장애인 치과사업을 해요. 전에는 시설에 있는 장애인, 재가 장애인 등을 주로 했어요. 그런데 올해부터는 장애여성 공간이이라고 있는데, 거기 활동가들, 그리고 강동장애인자립센터를 준비하는 활동가들, 그 분들이 활동가라고 하지만, 정말 힘든 분이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그 분들을 진료하기로 했고요. 그리고 ‘건강도우미’ 사업이라고 해서, 보건소에 방문간호사가 있긴 한데, 간호사 한 분이 몇 백 명을 책임져야 하는 구조잖아요. 책임지지도 못하는 구조예요. 그런데 저희는 그야말로 지역공동체의 관점에서 전업주부 아줌마들을 봉사자로 조직해서 그 분들에게 간단한 건강상식이나 협압계 등의 방문 체크기 등을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서 이 지역의 어르신들을 돕고자 하는 자원봉사 활동이에요. 그리고 방금 전에 말씀드린, ‘가건연’과 함께 보건소 예산을 분석하는 일이 주된 활동이죠.”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하는 택배사업, ‘주거지킴이’에서 하는 도배사업,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장애인치과진료’사업, 동네 아줌마들의 ‘건강도우미’ 사업, 그리고 복지예산분석 등이 위례지역복지센터의 주된 사업이다. 이 중에서 ‘실버택배’와 ‘주거지킴이’는 독립채산제의 성격을 띠고 있어 센터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굴러간다. 이 대목에서 물었다. 조직화의 성격이 강했던 복지사업이 어느 정도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아직은.......잘 모르겠어요. 물론 것은 있어요. 처음에 어르신들이 올 때는 어땠냐면, 여기 오시는 분들이 교사, 군인, 이런 분들이 제일 많았고, 건강하고 지금도 활동할 수 있는 분들, 그리고 학력수준이 높은 분들이 많았어요. 주로 기득권이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아주 어려운 분들은 못 오세요. 용돈벌이 밖에 안 되니까. 집에 돈은 있지만, 운동을 하고 싶다, 사회활동을 하고 싶다는 분들, 중상 계층에 있는 분들이 많이 오시기 때문에, 당연히 시민단체라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죠. 이를테면, 실제로 어르신들은 우리 같은 시민단체가 노무현 정부를 지지한다고 오해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대화 하시다가, 요즘엔 “시민단체가 어려운데, 우리가 아껴서 하지 뭐” 이런 말씀을 하실 때,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편견을 없애는 정도예요. 크게 변화된다기보다는 아마 이 분들이 그런 편견이 없어진다면, 가족들도 편견이 없어질 것이고, 그래서 저는 그런 것에 의미를 뒀어요. 이 분들이 기득권이지만, 사회나 정부나 쓸모 있을 때, 마음껏 써먹고, 그러지 못할 때 다 버렸고, 책임을 지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시민단체는 그것을 거뒀다고 막 표현을 했거든요.(웃음)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런 데 약간 공감을 하시는 것 같아요.......그런 것 같아요. 지역운동하면서 느낀 것은, 예를 들어 방금, 비닐하우스 소송이 성공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절반의 실패거든요. 왜냐하면 함께 가지 못했어요. 소송에서 이긴 거 이외에 뭐가 있느냐, 이 분들의 생존권에 대한 권리의식이 높아졌다? 이런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 때 반성이 그거였어요. 함께 가지 않으면 정말 성공이 아니구나, 그리고 중앙단체에서는 건수 하나를 성공해서 한 줄 더 올라가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지역은 사람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빨리 뭔가 이루고자 하면 지역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의 운동 사례가 겉으로 드러난 성과만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다각도로 평가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회자되고 있는 운동의 ‘모범사례’가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질적으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허점들을 면밀히 훑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닐하우스 촌 주민들이 이전보다 더 나은 주거환경에서 생활한다는 것에 멈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더 많은 권리를 위해 한 발짝 더 나갈 수 있도록 임파워먼트 되는 과정은 꼭 필요할 것이다. 스스로의 몫이고도 하지만, 운동단체의 몫이기도 하다. 최영선 국장은 비닐하우스 사례 이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뇌리에 오래 남는 하나의 사례를 더 소개해주었다. 다른 지역에도 참고할만한 사례인 것 같다.

“........하나 더 의미 있는 사례를 말씀드리자면, 학교 시설물 안전조례를 만든 일인데요, 우리 동네에 고일초등학교에서 축구골대가 넘어져서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어요. 한 3년 정도 된 일이에요. 학교에서 학교운동장을 외부에 빌려주잖아요.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서 축구 같은 것을 하잖아요. 보통 초등학교는 축구골대가 이동식이에요. 조기축구회가 공 찰 때는 축구골대를 뒤로 밀었다가 아이들이 사용할 때에는 앞으로 빼내고, 그런데 원칙은 그것을 고정시켜놔야 하거든요. 그런데 고정이 안 된 상태에서 아이들이 축구골대를 옮기다가 넘어져서 머리를 다쳐서 사망했어요. 그 때 시설물에 대한 안전이 조례로 제정될 필요가 있더라, 그런데 그런 조례가 없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조례가 없을 수 있나? 그리고 학교장이 5시에 퇴근했기 때문에 학교장 책임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시설물에 그런 문제가 있을 때에는 책임이 학교장에게 있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조례안을 우리 단체가 만들고, 우리 공동대표 중에 한 분이 서울시 교육위원이세요. 그래서 서울시 학교시설물 안전 조례가 제정됐어요. 그래서 학교장 책임이 강화됐죠. 그게 2003년 7월에 제정됐어요. 서울시 조례로 제정된 거죠. 이게 굉장히 의미 있는 활동인데, 우리가 그 때 너무 긴박했고, 부모들이 상처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게 소문이 안 났어요. 이 조례가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제정되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지금은 축구골대를 대부분 고정을 안 해놓거든요. 그런 변화는 큰 거였죠. 그리고 미끄럼틀 보세요. 애들 떨어지면 바로 바닥이잖아요. 책상 모서리도 그렇고. 철봉도 얼마나 위험해요. 그 대책위가 2002년 10월에 구성됐고요. 이 아이의 엄마, 아빠가 시민단체의 ‘시’자도 몰랐어요.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에 추모행사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이 엄마와 아빠가 시민단체 왕팬이 됐어요. ‘위례시민연대’는 그 부모들과 함께 고통을 끝까지 나눴어요. 우리 집 근처에 사시는 분들이기도 해서. 만나고 아픔을 같이 하고 이러다보니까, 왕팬이 된 거죠.”

어이없게도 한 아이의 죽음으로 운동장 시설이 안전하게 변했지만, 아이들이 몸 비비며 생활하는 시설들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할 때마다 ‘분노’보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축구골대 사건 이 외에도 ‘위례시민연대’ 하면 떠오르는 주민감사청구 사례가 있다.

“2001년도였죠. 송파구 구청장이 뉴질랜드에 구의원들과 가서 카지노 했다는 얘긴데, 그래서 우리가 대책위를 구성해서 활동을 했어요. 결국 큰 뭐 징계나 이런 것 없이, 그냥 끝났죠. 그 때 우리가 운동다운 운동을 했죠. 주민을 조직해서 매일 1인 시위를 했거든요. 이 운동으로 해서 어떤 지방자치단체는 미국으로 외유를 떠나려 했다가 취소됐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요구했던 것이 심의위원회를 제대로 구성하는 거였어요. 이 사건 때문에 우리 지역에서는 굉장히 조심을 해요. 그런데도,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이 문제가 지역 현안으로는 상당히 컸죠.”

자성의 목소리는 들렸겠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송파구의 외유 사건은 주민감사청구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이런 ‘위례시민연대’의 비판 운동은 공직사회에겐 많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지금도 행정부와의 긴장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최영선 국장은 공무원노조로 인해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란 기대를 내비친다. 공무원노조가 완충 역할을 한다면 어느 정도 건강한 파트너십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양으로 공무원노조 활동을 도와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은 공무원노조가 더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최영선 국장의 생각이다. 주제를 바꿔, 서울이라는 지역에서 운동한다는 것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지역적 파워가 없다는 거죠. 예를 들어 중앙의 큰 단체가 보도자료를 내면 보도해주잖아요. 미디어의 힘이 워낙 막강하다보니까, 그 기사가 나가면 바뀌거나 움츠리기라도 하잖아요. 그런데 지역단체는 보도자료를 뿌려도 움찔할 일이 없고, 별로 보도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많이 모르고 있어요. 그렇다면 어떤 힘을 가져야 하나? 미디어의 힘에 기댈 수 없고 실질적인 주민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거든요. 저희 단체는 50만이나 되는 주민 중에 92명의 회원 밖에 없어요. 거의 동호회 수준이에요. 이 동호회 수준이 뭐 하나 주장한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겠어요? 너희들 떠들어봤자, 안 나오는데 뭐, 이런 식이거든요. 뭔가 변화시킬 수 있는 파워가 없다는 거, 그래서 우리 단체도 결국 정치권 진출에 대 해 올해 구체적으로 고민들을 하실 거예요. 2006년 지방선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빠른 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고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예전의 학출이 아니기 때문에, 시민단체의 정치적 활동, 정치활동을 굉장히 안 좋게 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몇 년의 활동을 하면서 쉽게 변화할 수 있는 부분들이 변하지 않으니까 정치적 파워를 가져야 하겠구나, 그래서 정치적 진출이나 이런 것도 지역에서 만들어내야겠다, 그런데 웃긴 것은 대통령 바꾸는 것은 쉬울 수가 있어요. 하지만 구청장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렵죠. 무관심 때문에 더 힘들죠. 지방선거 투표율이 굉장히 낮잖아요. 그 낮은 투표율에 투표를 하러 가는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결국 우리가 지역에서 파워를 갖기 위해서는 조직력을 갖는 거예요. 물론 정치 진출도 있겠지만.”

글로 표현할 수 없지만, 최영선 국장은 정말로 애절하게 얘기했다. ‘한 줌도 안 되는 동호회 수준’을 극복하는 것, 그래서 주민들의 무섭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 위례뿐 아니라 모든 지역의 고민이 그런 것이리라. 그래서 ‘위례시민연대’는 2006년 지방선거를 주시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조직적인 분위기는 무르익은 것 같았다.

“지방의원 진출이 주민 조직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활동에는 크게 도움이 되겠죠. 예를 들어 정보를 입수하는 것부터 해서 그런 것에 도움이 되겠고, 물론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 사람이 가서 잘 하면 어쩜 주민조직에 있어서 긍정적인 힘을 미칠 것이고.......물론 주민들을 어떻게 임파워먼트 시킬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죠. 어떻게 해야 잘 하고 제대로 조직할 것인가, 그래서 그것은 저는 어떤 것이 잘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런 관점에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위례시민연대’ 운영위원들은 내년 선거가 아니면 좀 늦지 않느냐는 입장인 것 같다. 그래서 운영위원 중 몇 분이 출마를 고려 중이다. 다시 한번, 지방선거에 참여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다. 효과적인 정보제공만으로는 약해보였기 때문이다.

“음........어떤 결정, 제도권에 가면 그런 거 있잖아요. 제도권에 가면 제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파워가 있고, 그것은 이면적인 것 같고요, 실질적으로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행정정보였었어요. 정보, 자료, 어떤 제도를 개선하는데 있어서 파트너십. 그런데 현재는 파트너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그런데, 그런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예전에 출마하셨던 분들을 보면, 재개발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빈민의 대부 격으로 출마해서 나가겠다고 하는 이런 것들 있잖아요. 같이 활동했던 조직 안에서 누가 나간다, 그럼 주민들이 굉장한 성공의 기쁨과 기대, 그리고 임파워먼트를 갖는 것에 대한 자부심, 이런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과 다르잖아요. 주민들 어떤 모임에서 나가거나 어떤 사안을 해결하면서 지도자 격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서 임파워먼트와의 관계를 지금 상황에서 설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현재 지방정치의 문제점을 극복할 차원에서 개혁적이고 진보적이 세력들이 진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합의 정도죠. 우리는 서로 안 나가려고 해서 문제죠. 개인의 결정이 중요해요. 오히려 개인의 결정이 너무 강해서도 문제겠지만, 우리는 조직이 내보내려고 하는데, 서로 자신이 없는 거예요. 부담이 되는 거예요. 어떤 분은 주소까지 옮겼거든요. 그런데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데 직장도 그만두셔야 하니까, 어려움이 있죠.......우리는 서약서 같은 것을 쓸 거거든요. 원칙도 공유해야 하고, 그리고 거기서 받는 활동비의 일부분을 시민단체에서 받을 거예요. 저희가 한 다섯 명까지는 진출시키고 싶지만, 잘 해야 두 명 정도 나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현실이에요.”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분들이 몇 명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조직적인 논의가 활발하지는 않다.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조만간 지방선거에 대한 전략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여전히 최영선 국장에겐 ‘주민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가 최대의 화두이다. 앞서 얘기했듯, 최영선 국장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주민과의 친화력이고, 이를 잘 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 중이다. 최영선 국장은 에너지가 넘친다. 그런 분을 만나면 나도 신이 난다. 조직에서 중책을 맡은 것에 대한 부담감을 엿볼 수 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명확히 알고 있기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매우 즐겁다고 최영선 국장은 말한다. 그렇게 즐거운 모습에서 나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끝으로 두 가지를 질문했다. 조직 활동을 하면서 얻은 노하우나 경험을 이야기해줄 것, 그리고 ‘위례시민연대’의 앞으로 계획이 무엇인지가 그것이다. ‘위례시민연대’의 조직사업이 잘 될 수 있도록 기원해본다.

“저희가 제일 못하는 것이 사실은 주민조직이었어요. 빈민운동에서 시작된 단체 같은 경우는 기존의 빈민들의 조직이 있었고, 굉장히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조직 활동에 대해서 노하우도 있고, 구로 같은 경우는 노조운동가 출신들이 활발히 활동했지만, 우리는 정말 맨 땅에 헤딩하는 격이거든요. 활동가 몇 명이서 활동가 중심으로 운동해 오다가 결국 느낀 게 그런 조직에 대한 부분, 그래서 우리한테 가장 큰 숙제는 조직이고요, 그런 조직을 잘 해 낼 수 있거나, 잘 한 경험은 별로 없고 단지 일을 할 때 어떤 사업이든 간에 조직적 관점에서 본다는 거예요. 아마 다른 단체가 볼 때는 쟤네들 너무 ‘조직, 조직 한다’ 그럴 텐데, 예를 들면 장애인치과진료를 하면, 장애인들의 이빨을 잘 치료해서 건강하게 살도록 하자가 목표가 아니거든요. 장애인치과진료를 통해 우리 동네의 자원들을 어떻게 모을 것인지, 그래서 의료자원을 모집했잖아요. 그건 성공적인 조직이었죠. 의료자원을 모집할 뿐만 아니라 봉사자가 아닌 운영의 주체로 참여하게끔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거죠. 물론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분들이 조직으로 참여하고, 이동봉사에 참여했던 분들이 조직에 참여하게 되고. 실버택배 같은 경우도, 예를 들어서 종로나 다른 곳에는 기능적으로 하시죠. 주문 받아서 나가는 게 중심인데, 저희는 실버택배 운영이나 이런 것을 같이 논의하죠. 사무국도 같이 논의하고. 주체적으로 참여하시게 되고, 팀장님은 사무국 직원이나 다름없어요. 그 대신에 문제는 많아요. 우리 맘대로 안 돼요. 의견도 너무 많고.......의견이 다를 때 그런 합의 과정을 거치기가 쉽지 않죠. 시간이 오래 걸리죠. 그래서 욕심을 버려야 돼요. 잠깐 불편하더라고 바람직한 형태인 것 같아요. 어떤 주체로 참여하게끔 하려는 노력, 시각, 모든 사업이, 건강도우미 사업을 한다하더라도 독거노인 분들을 만나고, 그 분들의 건강 향상 차원이 아니라 주부들을 조직을 하되, 주부들에게 건강상식을 교육을 하지만, 이 분들을, 예들 들어 하반기에 예산감시 모니터링을 할 수 있는 요원으로 키울 수 있는, 그런 조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늘 그런 관점으로 이 분들을 대하고 얘기하고 모임을 만들고 이러는 거죠. 그래서 올해는 그 사업을 주력할 예정이에요.......작년 황기룡 운영위원께서 사무국장을 그만 두시면서, 사실 단체의 큰 기둥이 사라진 건데,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했어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워야죠. 저는 황기룡 씨처럼 그럼 정책적인 마인드는 약하다, 운영위원들한테 못 하겠다 그랬어요. 생각해보니까 어떻게 운영위원을 활용할까, 그것은 우리 조직사업과 똑같은 이치였어요. 그래서 지방자치위원회를 결성해달라고 요청을 했고 지금은 매우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요.......앞으로의 계획은........예산감시단을 구성을 할 거예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주민조직을 통해서 몇 분 소양이 있는 분들 발굴해서 같이 할 거고, 주민자치운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이고 ‘지방자치학교’는 올해 시작을 하려고 해요. 지방자치학교를 통해서 그 동안 갖고 싶었던 지식, 지방자치에 대한 지식을 같이 하면 좋은데, 아주 어려움은 일반 주민들의 조직이잖아요.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게 파워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약간은 별개로 접근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회원조직도 그 동안 못 했어요. 회원들에게도 미안한 일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아까 제가 단점을 말했는데요, 제가 정책적으로 약하다, 그렇지만, 저의 강점은 사람 조직하는 게 강점이기 때문에 올해 회원 대상으로 그런 모임들도 ‘지방자치학교’를 시작으로 할 거예요. 그러면 아마 거기다 연락을 많이 하겠죠. 그래서 저희가 옆 사무실도 얻을 계획을 하고 있어요. 사무실이 비어 있거든요.”

※ 위례시민연대의 홈페이지는 http://www.skngo.or.kr/입니다.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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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에 의한 재활용운동의 메카"
- ‘푸른 내일을 여는 여성들’을 찾아
인터뷰 : 남미정 회장

인구 7만의 작은 도시 과천은 한국 시민운동사에도 적지 않은 이정표를 남겼다. 90년대 초, 소위 ‘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현장에서 ‘시민운동’의 물꼬를 틔웠고, 탁아소 설립운동을 통해 보육문제를 지역에서부터 풀어보려는 노력이 처음으로 시도되기도 했으며, 과천에서 벌어진 송전탑 반대운동은 근본적인 전력구조문제의 핵심을 짚으며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파되기도 했다. ‘불소화사업’의 경우, 시민운동에 의해 보건의료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저항에 부닥쳐 ‘불소화사업’이 중단된 곳도 과천이다. 공동육아부터 대안교육운동까지 그 과정을 논할 때도 과천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 중에서도, 오늘 이야기 하려고 하는, 잔잔한 파동이 거대한 물결로 승화된 ‘녹색가게’운동은 10여년이 흐른 지금도 여성운동의 중요한 소재로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 ‘과천생협․녹색가게’는 알뜰시장 개최 10주년을 맞아, 단체 이름을 ‘푸른 내일을 여는 여성들’로 개칭했다. 소재나 형식으로서의 정체성은 구(舊) 명칭이 잘 드러내지만, 이념으로서의 정체성은 현재의 명칭이 잘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 곳에서 15년 가까이 몸담고 있는 남미정 회장을 만난 건, 봄소식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지난 2월 말이었다. 비좁은 사무실을 꽉 채우고 있는 재활용 물품들 속에 10여 명이 넘는 이용자들이 북적댔고, 그 곳을 지나 한 모퉁이에 마련된 좁다란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녹색가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의 정외영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남미정 회장도 청산유수와 같이 거침없이 말을 토해냈다. 일목요연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빼놓지 않는 그의 언변은 오랫동안 몸에 밴 리더로서의 기풍이 아닌가 싶었다. 소주잔을 벗 삼아 동창이 밝을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야기를 해낼 수 있는 그런 활동가였다. 지금부터 그가 전하는 과천 ‘녹색가게’운동을 들어보자. 한 가지! 인터뷰 내용이 무지 길다. 인내를 갖고 읽는다면, 생활운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먼저, 빠지지 않는 질문. 과천 녹색가게의 역사에 대해 물었다.

“우리 과천 녹색가게는 91년도 서울 YMCA에서 개최한 생활협동운동을 위한 공동체 교육에 참여했던 분들이 과천에서 공동체를 만듦으로 해서 91년 6월에 시작됐어요.(이 때, 최근에 제작한 홍보 리플랫을 보여준다) 그 교육을 계기로 공동체가 만들어졌는데, 과천 1단지에만 회원이 10명 정도 참여했죠. 그 회원들이 생협운동을 하면서 우리가 얻은 환경 지식들을 지역에서 실천을 하자, 그런 차원에서 1단지 자원재활용 캠페인을 92년 11월에 시작을 했습니다. 재활용품들을 모아오면 재생휴지와 재활용 세탁비누로 나눠주는 작업이었어요. 그것이 최초의 지역 환경활동이었어요. 그런데 캠페인을 통해 나온 물건들이 재활용 처리하기엔 아까운 물품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모이는 저희 회원들이 각자 집에서 따로 보관했다가, 94년 6월에 정기 알뜰시장을 중앙공원에서 열기로 하고, 매달 한 번씩 알뜰시장을 개최해왔어요. 그래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재활용 캠페인과 알뜰시장을 월 1회 개최하고 있죠. 그리고 당시만 하더라도 각 단지별로 회원들이 한 60여 명이 흩어져 살았었는데, 사무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모여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에 어려움이 많아서 소식지를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모아가고 의사소통도 하자, 이런 차원에서 소식지 창간을 94년 말에 했죠. 그리고 95년에는 지방선거가 있었잖아요. 저희가 1단지에 있다보니까, 중앙동으로 출마하는 분들이 굉장히 부정선거, 불법선거 하는 유형을 많이 보게 됐어요. 그래서 1단지에 있던 회원들이 우리가 선거와 관련해서 가만있을 것이 아니라, 이런 선거들을 고발하고 부정선거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활동을 해보자, 그래서 즉각적으로 결의를 해서, 선거가 6월이었으니까, 5월 1일부터 공선협 활동을 시작했어요. 좀 뒤늦은 활동이었죠. 96년에는 95년 말 쯤에 알뜰시장이 거의 2년 동안 진행해 오면서 상설매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주민들과 회원들에게 나와서 과천시에 장소 신청을 했었고, 96년 시민회관이 오픈됨과 동시에 지하 2층에 5평의 공간에 알뜰매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하게 돼서 오늘의 시민회관 내 25평짜리 녹색가게가 운영되고 있는 거죠.”

정리하자면, 91년 서울YMCA가 개최한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한 일군의 주부들이 1단지에서 ‘자원재활용 캠페인’을 시작한 때가 92년 11월이었고, 거기서 나온 물품들을 가지고 94년 6월에 정기 ‘알뜰시장’을 개최하게 된다. 95년 지방선거에는 잠시 공선협 활동을 경험하게 되고 96년에는 시민회관 내 매장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매장활동은 96년부터지만, 토대가 된 역사적 뿌리를 찾아가 보면 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횟수로 15년의 역사를 지닌 것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있었다. 흔히 ‘녹색가게’하면 YMCA가 떠오르는데, YMCA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그 전까지 서울YMCA와 깊은 관계는 없었고요, 97년을 맞이해서 IMF 때, 저희 알뜰매장이 매우 성황리에 되는 것을 서울YMCA가 알고, 서울Y에서 ‘녹색가게’라는 이름으로 연대활동을 제안했죠. 저희도 OK를 했고요. 그래서 그 연대활동으로 저희가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운영 시스템과 자원봉사자들의 수칙, 이용자 수칙, 모든 내용과 정보를 서울Y에 넘겼습니다. 그래서 그게 전국적인 확산에 이르러서 올해 녹색가게가 전국에 52개가 되는 것 같아요.”

서울YMCA와 과천 녹색가게는 직접적인 관계는 아니다. 연대운동으로써 ‘녹색가게’ 사무국은 서울Y에 있고, 하나의 연대 단체로 과천 ‘녹색가게’가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녹색가게’의 모델을 과천에서 제공했다는 데 있다. 매장 개장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 더 물었다. 본문이 길어 중요한 내용만 정리했다.

“저희가 그 동안 재사용 운동 관련해서 여러 가지 행사를 해왔어요. 98년 12월에 ‘장바구니 들기 캠페인’과 전시회를 했고요.......99년에는 거의 1년에 한 번씩 가게에 나왔던 옷들을 고쳐서 입는 ‘이야기가 있는 재활용 패션쇼’를 했고요.......2000년 10월에는 ‘추억이 담긴 생활 물품전’을 이 자리에서 개최했어요. 이 행사는 15년 이상, 집에서 아껴 쓰던 물건, 아직도 쓰고 있던 물건들을 전시했는데, 물건을 아껴서 오래 쓰는 것이 곧 환경운동의 기본이 된다는 차원에서 진행했는데,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참여해서 물품이 약 250개 정도 나왔어요. 6.25 전쟁 당시 쓰던 모포, 담요 같은 것, 선풍기, 재봉틀도 옛날 수동식 재봉틀, 축음기 이런 거 있잖아요. 이 시대에 보기 어려웠던 물품들을 주민들이 많이 내주셔서 이것도 상당히 성황리에 개최됐죠. 이 행사로 경기도의 자원봉사단체 경기도지사 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우연치 않게 그 당시에 조선일보와 환경부가 주최하는 환경운동 부문에 있어서 환경대상을 2001에 수상하기도 했고요. 2002년, 2003년에는 ‘손이 부지런하면’, ‘다시 한번 써 봐요, 이렇게’라는 제목으로 작품 전시회를 열게 됐고요.......재활용 강좌도 쭉 열고 있는데, 이 사업은 앞으로 지속사업으로 갈 거예요.......2004년 작년의 특징으로 얘기드릴 수 있는 것은 재사용운동에 늘 연구를 하다보니까, 여러 단체들도 현수막 만들 때 고민을 하면서도, 필요하니까 만들어 쓰잖아요. 그런데 만들어 쓰고는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래서 과천시 조사를 해보니까 전량 소각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소각량을 줄이고 재사용에 현수막도 가능하다는 취지에서 현수막 재활용 사업을 추진한 거죠.”

남미정 회장은 최근의 활동까지 세세하게 소개했다. 98년 개최한 ‘장바구니 들기 캠페인 및 전시회’는 ‘녹색가게’ 브랜드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업이기도 하다. 남미정 회장이 특별히 강조한 사업은 2002년과 2003년에 진행된 ‘손이 부지런하면?’과 ‘다시 한 번 써봐요! 이렇게’였다. 이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들어보자.

“.......우리가 녹색가게 운동과 매장을 운영하다보면, 사람들이 물건을 사 놓고 금방 싫증을 내서 가게로 가져오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가 가게를 하는 취지는 집에서 오래 썼지만 이제 작아져서, 아니면 그것 말고 다른 게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그 물건을 이웃과 나눠 쓰자는 취지거든요. 그런데 새 물건을 너무 많이 사서, 어떤 것은 딱지도 떼지 않고, 소비 심리에 의해 샀다고 그냥 녹색가게에 갖다 놓는 경우도 더러 있더라고요. 일종의 소비에서도 소비자로서의 책임이 따르는데, 그 생각을 전혀 느끼지 못한 상황에서 그저 다른 사람과 바꿔 씀으로 해서 자기의 소비 패턴을 바꾸거나 즐기려는 식의 양상들이 나타나더라고요. 이렇게, 우리가 판단하기엔 단순히 물건을 바꿔 쓰는 문제는 상당히 개인적인 문제가 따른다, 그리고 여기 와서 욕심을 내서 많은 물건을 골라가서는 입으려면, 한 번 세탁을 다 하잖아요. 거기서 에너지와 물 낭비가 있는데, 그것을 며칠 내에 또 와서 다른 것을 교환한다면 이것은 자원의 순환이 약간 겉도는, 환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순환이 아니라, 약간의 겉돌면서 오히려 환경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산 물건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지고 이 물건에 애정을 듬뿍 받아서 그 물건이 내 손에 폐기될 때까지 써보자, 가능하면 가게를 거치지 않더라도, 그런 취지에서 나온 게 ‘손이 부지런하면?’과 ‘다시 한 번 써봐요! 이렇게’입니다.”

과천 ‘녹색가게’는 근본적인 환경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녹색가게’의 근본 취지는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 이전에 ‘아껴 쓰는’데 있다. 아껴서 오래오래 쓰다 더 이상 자신에게 맞지 않는 물건일 때, 이웃과 나눠 쓰는 것이 ‘녹색가게’가 생각하는 최고의 소비패턴이다. 그러나 ‘녹색가게’가 과천에서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릴 즈음, ‘녹색가게’ 취지에 어긋나는 소비행태를 발견하게 됐고, 다양한 강좌와 행사를 통해 이러한 소비행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소비자에게도 책임이 따른다’는 남미정 회장의 일침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현수막도 재활용한다는 남미정 회장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았다. 현수막을 어떻게 재활용하지?

“광고를 내면 현수막이 많이 들어와요. 그것을 우리가 빨아요. 특히 밖에 오래 걸린 것은 아무리 빨아도 잘 안 지워져요. 처음엔 우리 회원들이 집에서 목욕탕 통에 다 빨았어요. 그 안에 넣어서 발로 밟고 그랬는데, 그 찌든 때가 그 통에 끼어서 나중에는 그게 안 빠지더래요.(웃음) 그래서 몇 번 해보고는, 아주 오래 된 것은 아예 안 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이 들었고, 실내 사용한 것이나 밖에 나가서 너무 오래 하지 않는 것들만 모아서 각 분과가 나눠 가졌죠. 대부분은 재활용 분과장이 집에서 세탁기로 돌려서 빨아 오세요.......작년 같은 경우는 쓰시협 사업으로 폐현수막 재활용 사업을 했기 때문에 재봉틀을 일괄 대여해서 사용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하면 약간의 사업비가 있는데, 우리들끼리 하는 사업보다 지역주민과 결합하는 게 좋겠다, 그래서 복지관을 통해 광고를 했어요. 연세 되신 분들, 용돈이 필요하신 분, 재봉틀을 할 수 있는 분, 그 분들에게 한 장에 500원이나 1,000원의 수고비를 드리고 이것을 맡겼어요. 빨고 재단하는 것은 우리 재활용 분과에서 하는 것으로 하고, 지역복지차원에서 용돈이 필요한 분에게는 재봉 1,000원씩에 박아오도록 맡겨서 그 분들과 사업을 같이 해서 만들었어요.......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마트용 장바구니죠. 그리고 과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실험했던 것은 아이들 보조가방, 아이들 신주머니를 만들었죠. 이 사업은 많은 환경단체에서 취재해 갔고요, 작년에는 쓰시협 우수 재활용 사업으로 뽑히기도 했어요. 요즘 보니까, 복지과나 지역에 있는 복지관들, 그리고 자활사업을 위해서 아이템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많이 하시는데, 그런 데서도 저희를 많이 방문하셔서 노인 분들에게 일을 맡길 수 있고, 그리고 지역마다 항상 생활 문제로 되고 있었으니까, 작년에는 많은 단체가 여러 가지 내용을 배워서 가기도 했고, 봉천동의 자활후견기관 같은 경우는 이 아이템으로 사업비를 2,000만원을 받기도 했어요.”

폐현수막 재활용 사업은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귀가 솔깃한 아이디어다. 현수막을 많이 사용하는데다, 폐현수막 처리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봤기 때문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재활용운동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함으로써 환경산업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생활을 통해 터득한 주부들의 아이디어는 실로 대단했다. 이렇게 과천 녹색가게는 재활용 운동에 있어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것에 대한 회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남미정 회장은 말한다. 이 대목에서 단체 명을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물었다. 결정적 계기는 사무국과의 마찰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사무국과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어요.......사무국은 우리가 한 내용을 가져가서 사업을 벌이길 원했어요. 그런데 다른 지역의 녹색가게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잖아요. 그런 것을 키워주고 지원해 주는 역할을 사무국이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봤거든요. 그런데 사무국은, 이를테면, 장바구니 캠페인 같은 것을 벌였을 때도 우리 물품 다 가지고 가서 개최했으면서도 과천 녹색가게 물품이라는 얘기를 안 하고 사무국의 것처럼 한 적이 있거든요. 저희 회원들이 반발하는 거죠.......그런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우리가 거기 그냥 수긍을 하고 따라가면 좋은데,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어서, 오히려 우리 독창적인 단체로, 우리가 독자적이면서 계속적으로 우리 활동을 특화시켜 나가는 단체로 좀 더 노력을 하자, 그런 차원에서 사실은 이름을 바꾸었죠. 어떻게 보면 이게 자원봉사운동이었고, 여성들이 굉장히 노력하면서 여성들의 능력을 한껏 발휘해내는, 그리고 여성들이 가정에서 늘 옷 정리 하고, 쓰던 물품을 정리하고, 살림하고, 그런 경험이 그대로 녹아나는 운동이었거든요. 여성들의 생활의 관점이 녹아나는 운동이었던 것을 좀 더 알리는 차원에서 그리고 그건 또 YMCA 운동 차원과는 조금 안 맞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건 우리의 판단인데,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독자적인 모습으로 가자는 그런 의도가 있었던 거죠.”

모든 중앙단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역단체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명칭 바꾼 결정적 계기도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아무튼 과천 ‘녹색가게’의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내부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한 마디로 ‘푸른 내일을 여는 여성들’의 정체성을 말한다면 “재활용을 주제로 한 주부들의 자원봉사 단체”인 것이다. 과천 ‘녹색가게’의 이력 중, 독특한 것 중에 하나는 ‘공선협’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활동이 거의 없었던 것에 비춰보면 꽤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물었다.

“그 때 제가 회장을 하고 있을 때여서 공선협 위원장을 했었어요.......공선협 활동을 한 계기는 그 당시 여당의 후보 쪽에서 부정선거의 움직임이 많았었어요.......결정적으로 그 후보가 사는 단지에 10만 원짜리 음악회 티켓을 상당히 뿌려서 우리가 수거해오기도 했어요.......공선협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 남는 것은 소방서 강당을 빌려서 시장 후보 초청 토론회를 가졌거든요. 후보자 7명이 다 참석했죠.......주민들에게 정책적인 측면에서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정책선거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봐요.......그 당시 여당의 후보자가 시장이 되셨는데.......우리 단체에 대해서 늘 껄끄럽게 생각한다는 얘기를 늘 들어왔어요.......그런데 우리 회원 10명이 공선협 활동을 하는데요, 공선협 활동이라는 게 저녁 10시까지는 보통 열고 하게 됐어요. 그래서 밤늦게까지 남아서 이걸 지킨다는 것이 참 어려웠고, 그리고 수시로 고발이 들어오면 현장에 나가야 되잖아요. 그 때 저희들도 녹음기 들고 다녔고요, 열성적인 회원의 경우, 갈비 집에 어떤 의원이 초대를 해서 거기 후보가 밥 먹으로 간다면, 같이 가면서 몸속에 녹음기를 숨겨가서 녹음을 해오기도 하고 그런 일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우리가 당위적으로 해야 된다, 등을 떠밀어서, 회장부터 나서는, 이런 식으로 했지만, 하고 나서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했나, 너무 과했다, 우리에게 맞지 않는 과한 활동이었다, 완전히 리더들 몇 명이 하자니까, 휩쓸려 했다, 이런 평가가 회원들에게 나온 거죠. 다시는 우리한테 맞지 않게끔, 무리하게 활동을 하지 말자, 그게 평가에서 주된 내용이었어요. 그 다음부터 공선협 얘기가 나오지 않았죠.(웃음) 힘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공선협 활동은 과천 ‘녹색가게’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였던 것 같다. 조직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을 냉정하게 평가했던 것이다. 관찰자 입장에서 보면, 과천 ‘녹색가게’가 외부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확장된 활동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공선협’활동 경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회원들은 당위적 운동이라고 해서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위적이면서, 내 색깔에 맞고, 나를 발견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꾸준히 해왔던 재활용운동이고, 청계산 살리는 생태운동이고, 불소화와 같은 생활의 문제였다. 회원들을 힘에 부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생활운동을 선택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는 초창기 멤버에요.......우리가 본격적으로 지역활동을 전개할 당시에는 회원이 65명 정도 됐거든요........지금도 그 정도의 회원이 있죠........제 기억에는 초창기 멤버가 한 여덟 분 정도 남아 있는 것 같아요.......10년이 넘었네요. 굉장한 동지들이죠. 애들 다 초등학교 다녔는데, 요즘엔 다 대학생들이죠.”

이 대목에서도 과천 ‘녹색가게’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60여명의 회원 규모가 큰 변동 없이 이어져오고 있고, 그 중에서도 한솥밥을 먹으며 뜻을 같이했던 10여명의 동지들이 지금도 조직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경험적 관계’는 조직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과천 ‘녹색가게’ 규모를 요약해보면, 자원봉사자 겸 회원이 약 50여명, 활동분과는 6개, 하루 이용자 수는 100-120명, 교환하거나 접수되는 물품은 하루 약 600여점, 현금 수익금은 하루 5-6만원, 그리고 98년부터 지금까지 1명의 상근 실무자를 두고 있다. 주제를 바꿔, 과천 지역에서의 활동 내용을 듣고 싶었다. 특히 분과를 중심으로 해서.

“저희는 ‘알뜰시장분과’, ‘교육분과’, ‘재활용 연구분과’, ‘후원분과’, ‘홍보출판분과’, ‘마을분과’, ‘녹색가게 분과’, 이렇게 있는 것 같고요.......‘교육분과’ 같은 경우는 전반적인 우리 단체의 내용, 운영 등 한 달 쯤 지나서 봉사를 하시다가 2회 교육을 하면서 본인 느낀 점들 듣기도 하고, 그런 교육을 주로 하고 있죠.......그리고 청소년들을 방학 때 받아서 가게 일도 돕게 하면서, 또 청계산에 가서 야생화 가꾸는 일, 나무 이름 조사하는 일, 생태기행 체험도 하고 또 알뜰시장 나가서 청소도 하고 시장에 참여도 해보고, 뭐 이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참여하는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에게 교육하는 ‘교육분과’ 활동이 있어요.......그런데 이 ‘교육분과’는 자원봉사 교육 관련해서는 상당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어요.......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현수막 사업을 하는 ‘재활용 연구분과’가 있고요.......그리고 ‘후원회 분과’ 같은 경우 여기에 있는 분들이 대단한 분들인데, 제일 회원도 많은데, 소년, 소녀 가장도 돕고, 복지관에 후원금을 내기도 하고, 안양 지역에 있는 한 복지단체에 가서 버려진 아이들을 씻겨 주고 우유 먹여주는 노동봉사, 현장봉사를 계속 하고 계세요.......‘마을분과’에서는 청계산 지킴이를 하는데요, 청계산 약수터 주변으로 나무 이름표도 달고 월 한 번씩 쓰레기 줍기를 하고, 작년(2004년)에는 1년 내내 야생화를 시장님과 쭉 심고 가꾸는 일을 했죠. 그 다음에 ‘녹색가게’는 하나의 분과로 있어요. ‘녹색가게분과’에서 지역 행사를 하고요.......그리고 과천의 NGO와 연대활동을 하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의제와 결합해서 활동하고 있고요, 자원봉사센터에서도 개별적으로 자문위원을 하고 있고요.......한살림과 저희 단체가 재작년인가 불소화 반대운동을 했는데, 이것은 저희 단체 활동으로 같이 했죠.”

매장운영(‘녹색가게분과’)을 포함한 7개 분과에서 50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는 ‘전원 회원, 전원 활동가’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 또한 과천 ‘녹색가게’의 특징을 대변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구조이다 보니 새롭게 보충되는 회원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1년에 5-6명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한 한 번 결합하면, 어떤 조직보다 깊은 유대관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새로 회원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보충될까?

“교육을 통해서 보충되는 것은 거의 없어요. 가장 흔한 경우는 친구를 데려오는 경우가 있고, 교회 다락방을 하면서 공부를 같이 하는 친구를 데려오는 경우도 있어요. 최근에는 청계사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두 분이 오셨고요.......그리고 다른 케이스로는, 여기 이용하던 분들이, 내가 애를 어느 정도 키웠고, 내가 여기 매일 이용해서 아이를 잘 키웠기 때문에 이제 봉사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오시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그 다음에 지역 홍보를 보거나 자원봉사센터에서 홍보하는 것을 보고 오시는 분들도 있죠.”

역시, 가장 좋은 조직 방법은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과천 ‘녹색가게’는 유행에 신경 쓰지 않고(사실, 시민운동 판에도 유행, 또는 당위라는 것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묵묵히 정예부대만으로 조직을 탄탄히 이끌어 왔다. 과천 ‘녹색가게’는 첫째, 회원의 의견, 둘째, 재사용․재활용운동과 연관된 운동 셋째 아이디어 연구와 실천, 이렇게 활동 방향 설정이 되어 있다고 남미정 회장은 말한다. 젊은 사람 입장에서는 한 가지 주제로 15년 가까이 활동한 것만으로도 고리타분할 것도 같아서 물어보았다. 지겹지 않았습니까?

“저는 만족하고 있어요.......그런데 좋은 거는요, 동지들이, 10년씩 온 아주 친한 친구들이 되는 거죠. 우리 단체 성격이, 제가 보기에 일반 주부들 중에서 생각이 있는 분들이 많이 들어오세요. 그 분들과 만나서 나누고 생각을 교환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책 읽기 모임을 늘 하면서 토론들을 하다보니까, fresh한 면이라고 할까, 그런 면을 많이 접하면서, 사람들 간의 서로 좋은 점을 주고받는 그런 즐거움도 크고요, 저 같은 경우는, 그러니까 오래 된 분들은 약간의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도 인정해요. 어떤 면인가 하면, 저는 제가 외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것은, 물론 과천 지역 말고요, 한 3년, 2년, 얼마 안 됐어요. 서울의 여성환경연대나, 녹색소비자연대, 서울Y 본부 등인데, 이렇게 나가게 되면, 사실 이 지역에서 보지 못했던 중앙운동의 차원에서, 아니면 좀 더 넓은 시야에서 풀뿌리 진영 운동들과 관련해서 다른 단체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죠. 푸른경기21을 가도, 도 전체 내용을 보니까. 그게 상당히 fresh해요. 그런 면에서는 많이 충전이 되면서, 또 우리 내용은 내용대로 가니까, 지루함이 최소화되면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회원들과 학습과 교육, 그리고 토론이 주요한 매개였던 것 같다. 그것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십년지우(十年知友)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주제를 더 좁혀, 과천의 지역운동에 대해 물었다. 일단, 지역에서 과천 ‘녹색가게’활동의 성과는 어떤 것인지 물었다.

“.......외부의 녹색가게처럼 전국적으로 추진됐다, 정책을 완전히 바꾸었다, 하는 면은 지역 내에서는 적죠. 그런데 굳이 저희는 재사용 운동을 하나의 생활운동이라고 보니까요, 굳이 얘기를 하자면, 알뜰시장 같은 경우 저희가 10년을 했잖아요. 초기에는, 사실 중앙공원의 알뜰시장을 우리가 세웠지만, 좀 어색하다, 이렇게 참여하는 사람도 없고, 재사용하는 인식도 없는데, 어디 쓰다 남은 물건을 모아 놓고 서 있기가 좀 민망하다 싶을 정도의 참여 의식이 약했죠. 그러나 최근의 모습을 보시면, 우리가 마지막 토요일만 알뜰시장을 하지만, 이미 그 알뜰시장의 의식이 늘 중앙공원에 오면 장이 선다, 그러면서 매주 장이 서요. 저희가 있거나 없거나 주민들 스스로 장을 서는 것만큼 생활화가 된 거예요. 물론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렇게 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과천에서 10년 동안 장을 지켜온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굉장한 파급효과가 아닌가, 이렇게 보거든요.”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실시했던 과천 ‘녹색가게’의 알뜰시장이 이제는 그것과 무관하게 매주 ‘주민들에 의한 알뜰시장’이 서고 있다. 처음 시작했던 단체 입장에서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천 지역의 시민운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싶은지 물었다.

“제가 먼저 지역운동을 적극적으로 못 펼쳐서, 그런 말 할 자격은 별로 없어요.(웃음)”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느끼시는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진 것 같아요. 시대적 흐름에서 NGO의 특징으로 짚어지는 부분이 예전에는 좀 더 이슈 중심이라고 할까, 이슈 파이팅을 강하게 했고, 생활운동은 예전엔 별로 인정을 못 받았죠. 그런 분위기에서 저희가 참여하기 시작했잖아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 재사용 운동은 보조를 받아야 되지만, 시의 보조를 받는 유일한 단체라는 인식으로 되다보니까, 사실 NGO 활동에 있어서 초기에, 93년 이 때에, 지역연대에 결합을 했는데, 우리와 다른 일을 하는 NGO가 정말 많구나, 이렇게 느껴졌었어요. 그 분위기와 우리들의 성격이 그랬기 때문에. 그러다, 공선협 활동을 한 번 겪고요, 그 다음에 불소화 사업 반대운동을 한살림과 함께 했고, 또 하나 기억 남는 사업으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섰던 게, 청계산 서울대공원 쪽에 산을 파괴하면서 놀이동산을 좀 더 늘린다고 개발하려고 했을 때, 반대운동을 몇 몇 단체와 했거든요.......그런 걸 하면서, 조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생활운동을 하고 매장을 운영하면, 사실 지역의 NGO나 지역의 다른 활동에 결합할 여력이 상당히 약하다, 그런 것을 많이 느꼈고, 그리고 이슈 파이팅을 하는 단체의 회원들 의식과 생활운동을 하는 단체의 의식이 똑 같을 수는 없다, 활동 내용도 다를뿐더러, 시간적이 투입이 다르고, 그러면서 예전에 내가 NGO에 자신 없고 너무 내용이 다르니까 모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미안한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몇 번 연대활동을 같이 해오면서 요즘 느끼는 것은, 약간 나름대로 정체성에 기인한 우리 활동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게 당연하다.......우리도 NGO니까 무조건 합해서 한 길로 가야 되고, 모든 것에 결합해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은 항상 부담으로 왔어요.......사실은 그 단체들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선택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좀 더 열린 NGO의 모습이 이 시대에는 더 맞지 않는가, 왜냐하면 NGO라는, 이제는 예전에 이슈 파이팅의 모습에서 이미 생활 운동을 하는 NGO들이 많아졌고요, 그런 내용이 우리 지역사회에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제 느끼는 것은 NGO라는 영역도 넓어지면서 결합의 형태도 매우 다양하게 가는 것이 맞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우리가 변명을 하자면, 굳이 지역에 의제에 결합한다거나 불소문제, 청계산 지키기, 공선협 이런 것들을 보면, 최소한의 역할은, NGO로서 우리도 하려고 노력은 했다(웃음)는 식으로 평가를 해요. 그러니까 NGO가 아니다, 그것은 아닌 것 같고요,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또 이슈 파이팅이나 좀 더 강성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분들은 조금 제가 바라기는 생활환경운동을 하는 측의 입장과 여건들을 조금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남미정 회장의 요지는 이렇다. 다양한 NGO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생활운동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나 차이를 인정할 때 ‘열린 자세의 연대’는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일견 공감이 간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보는 이에 따라 쟁점이 되는 지점도 있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조직의 내적 토대와 지역의 정치적 사안의 균형감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펄럭이는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변화를 어떻게 사회로 확장할 것인가’/‘탈정치화의 막기 위한 조직적 견제 장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생활운동이 성별분업을 고착화시키는 특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시간적 제약도 있지만, 나도 정리가 안 됐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는 물었다. 생활운동을 전개하는 단체가 너무 빨리 탈정치화된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크리스찬 아카데미라든가 나름대로 다른 교육을 받고 토론회 참석하고 느낀 것은, 운동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정치다,(웃음) 일종의 그런... 사실은 처음에 그것을 어색하게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얘기를 자꾸 생각하면서 우리 회원들과 얘길 하다보면, 이론가들은 다 그렇잖아요. 그런 얘기 속에 우리 의식들이 충분히 녹아 남아서 이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내용들을 담아나간다는, 그런 얘기들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우린 또 주부들에게 토론의 의식을 키우자, 이런 시도들도 사실은 많이 하잖아요. 소그룹에서도 하고. 그래서 저는 단체들에서 하는 것이 탈정치다,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우리가 밑바닥의 씨앗들, 우리가 이렇게 한 얘기, 소모임에서 하는 시도들이 다 씨앗이 돼서 결국은 위에서 정말 정치적 활동을 내놓고 하는 분들에게 힘을 실어 가는, 다 같이 정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개인의 정치적 의식은 내부적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고 나름대로 정치적 고리를 연결하고 있다고 남미정 회장은 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행동으로써 드러나지는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과천 ‘녹색가게’의 특이점 중에 하나는 남성들의 참여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어.......후원 정도의 참여는 하는데, 사무실 나와서 컴퓨터 관련이나 사무적인 일들을 돕겠다는 남자 자원봉사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회원들이 별로 싫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웃음) 저는 회원 의견에 따르는데, 여자들끼리만 있으면 편한 세상인데, 사무실에 나왔을 때 남자가 옆에 있으면(웃음).......이게 전업주부의 특성이에요. 전업주부들이 하다보니까, 저는 남자 분들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불편한 것 같아요.”

이것은 확실히 남자들과 다른 점인 것 같다. 남미정 회장도 남성이 참여함으로써 의식을 변화시키고 생활의 문제를 더불어 고민하는 토대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녹색가게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 과천 ‘녹색가게’의 한계와 문제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전략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도 초기에는 의식이 여러 가지 면에서 없었거든요. 제 과제라면 우리 회원들이 어떻게 좀 더 의식적으로 활동을 하는 운동가들로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과제에요. 그래서 좀 더 효과적인 의식 교육이 뭘까, 그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이 단체 전체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지면 쉬운데, 순수 자원봉사로 들어왔던 분이, 그것도 이슈 파이팅으로 결합한 것도 아니고 생활 환경운동으로 해서, 그냥 매장운동으로 결합해 있고, 우리의 내용이 굉장히 많은 내용을 담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한 내용들을 담아가다보니까 한계들을 느끼는데, 의식화 작업을 효율적으로, 눈에 띄게 바꿔나가고 싶다, 그런 욕심이 있긴 해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서서히, 저희 10년 된 동기들에겐 그런 것을 발견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장기적으로 가야 하는 그런 한계가 있고요. 그래도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상당히 고심을 하고 최선을 다 해요. 어떻게 하면 의식 있는 주부들로 키워낼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이슈가 되거나 좋은 책들을 읽게도 하고, 그러거든요.......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재사용 운동의 한계는, 단체 활동이 폭을 넓혀 가려면 매장이 좀 커야 되요. 왜인가 하면, 크면서 더 다양한 물건도 담고, 한 쪽 구석에는 교육장도 있고, 재활용 작품이 수십 점이 있는데, 다 집으로 갖다 놓았다가 무슨 전시회에서 빌려달라고 하면, 또 가져와서 모아서 쌓아 보내거든요. 전시 공간도 없고. 내용에 비해서는 하드웨어가 상당히 부족해요. 그런데 이것을 아무도, 물론 노력부족이고 역량 부족이긴 하지만, 우리처럼 하는 곳이 없는데.......(웃음) 공간 확보가 쉽지 않네요.”

생활운동은 장기적인 목표를 두고 갈 수밖에 없다고 남미정 회장은 말한다. 그래서 의식을 변화시키고 리더를 길러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작은 일이라도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비록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하더라도. 한 단체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 한번 배운 계기였다. 내부적으로 이해하는 수준과 외부적인 이해의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둘을 올바로 이해하는 선에서, 차이를 인정하는 정신과 연대의 정신이 합리적으로 작동될 때 가능하다. 경제발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달려온 시민운동의 과정은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는 반성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느리게 전개되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시민운동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이 정말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남미정 회장과 더 많이 대화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시간을 뺏을 수가 없었다. 기회가 닿으면 또 만나고 싶은 분 중에 한 분이다. 끝으로 과천에서 재활용운동이 발전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물었다. 이 답으로 오늘의 인터뷰를 마치고자 한다.

“저는 가능하다면, 시민회관이나, 중앙로 같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시는데, 환경교육센터처럼, 재활용교육센터가 들어서서 좀 더 큰 물건을 다룰 수 있게, 소각장에 들어가 있는 저런 물건들이 다 시내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것을 우리 단체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 전문 파트가 있으니까, 그 쪽은 그 쪽대로 나와서 결합을 하고, 교육은 NGO연대나 시민단체들이 자기 내용들을 연결해서 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환경센터, 교육센터의 개념을 가진 재활용센터, 이런 게 사실 중앙로에 세워지면 좋겠다, NGO적인 마인드와 환경적인 마인드, 자원봉사적인 마인드를 다 엮어서 할 수 있는, 그건 연대체로 내용의 결합만 하면 되잖아요. 항시적으로 굴러가면서, 청소년이 오면 청소년 단체도 결합하고, 그런 종합적인 재사용운동, 재사용센터, 아니면 그냥 환경센터라고 하든지, 이런 게 하나 생기는 게 꿈이죠.”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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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자본, 지역사회 발전의 밑거름
- ‘군포환경자치시민회’를 찾아
인터뷰 : 이대수 대표

대중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시민운동의 명망가 중에는 대개 중앙운동 판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 많다. 90년대 이후, 이들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사회의 이슈를 주도함으로써 시민사회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데 별다른 이견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상대적으로 지역의 소소한 단체들이 중앙단체의 그늘에 가려 마땅한 평가를 받지 못한 점은 되새겨볼만 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명망가 중에도 지역을 토대로 활동하고, 중앙을 넘나들며, 지금도 에너제틱하게 생활이라는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명망가가 제법 있다. 이들에 의해 지역운동이 한층 성숙되었다고 해도 과한 평가는 아닐 것이다. 물론, 모든 활동이 노출되어 있는 운동의 리더들에겐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때론, 그런 평가가 부풀려 과도하게 해석되거나, 때론 오해와 편견으로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우리 사회가 합리적 평가의 작동이 부재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그런 앞선 활동가들이 이룩해 놓은 운동의 토대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오늘 인터뷰 주인공인 군포환경자치시민회의 이대수 대표는 군포라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역운동을 주도해오며 새로운 운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지역운동 리더 중에 한 분이다. 이대수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명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사고는 높고 넓으며, 발 딛고 선 그곳에서부터 실천에 앞장선다.

이대수 대표는 목회 활동을 하는 목사이기도 하다. 80년대 중반, 민중교회 목회를 위해 군포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90년대 초반, 군포 소각장반대 운동을 계기로 군포 지역운동의 역사를 써오고 있다. 시민주주 형태의 ‘군포시민신문’, 군포환경자치시민회, 쓰레기연대회의, 군포시민협, 경기시민사회포럼, 경기지역사회연구회 등이 그의 애정과 땀으로 만들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강산이 두 번 바뀐 20년 동안 군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사실, 시민자치정책센터 사무실과 지척에 ‘환경자치시민회’가 있음에도 그를 너무 늦게 찾은 감이 있다. 지금부터 이대수 대표가 생각하는 지역운동의 상을 들어보도록 하자.

먼저, 그의 궤적을 들어보고 싶었다.

“저는 85년도에 민중교회 목회를 할 생각으로 군포에 오게 됐습니다. 목회하는 과정에 주민들과 만나는 일을 쭉 해왔고, 한 10년간 목회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 후반부인 90년대 초반부터 군포의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죠. 당시에는 지역에서 시민운동이 없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다 군포소각장 반대운동이 93년도에 시작이 됐는데, 그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죠. 개인적으로 소각장 반대운동을 통해 환경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됐고, 주민자치운동을 좀더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죠. 그래서 소각장반대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많은 곡절을 겪고, 주민운동이 가지고 있는 성과와 한계들, 이를테면, 폭발적인 운동이라는 강점도 있지만,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한계도 봤기 때문에,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대안적인 활동을 하는 단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역의 몇 몇 전문가와 작은 모임을 꾸리기도 했습니다. 94년도에는 ‘군포시민신문’을 만들게 됩니다. 아무래도 지역에 언론매체의 필요성을 느꼈고, 한겨레처럼 시민주주 방식의 ‘군포시민신문’을 만들게 됐죠. 95년 5월에 창간을 해서 현재까지 진행을 하고 있죠. 제가 한 6년 동안 발행인, 편집인을 맡아서 했고, 시민사회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한계도 있고요. 신문 활동을 정리하는 과정 속에 환경자치시민회가 창립하게 되는데, 아까 말했듯이, 배경은 소각장 반대운동을 통해 만났던 분들과 ‘군포시민신문’하면서 만났던 분들, 그 다음에 학교 운영위와 관련돼서 활동하셨던 분들, 이런 여러 부류의 분들을 만나게 되죠. 그래서 97년부터 준비모임을 시작을 해서 한 1년 정도 준비를 하고 창립을 하게 됐죠. 저희가 내건 목표는 네 가지였어요. 환경보전운동을 한다, 주민자치를 실현하자, 수리산을 지키자, 그 다음에 아름다운 생활공동체를 만들자, 이렇게 네 가지를 표방하고 출범을 하게 되죠. ‘환경자치시민회’는 독자적인 단체죠. 환경운동과 주민자치운동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형태의 단체의 상을 그린 거죠. ‘군포환경자치시민회’에 참여하는 분들은 매우 다양했어요. 전문가 연구자들, 사업하는 분들, 활동할 수 있는 주부들, 그 다음에 활동가, 이렇게 크게 네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죠. 이 분들이 합의해서 활동하게 된 거죠.”

군포 시민사회의 지형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은 역시 소각장 반대운동이었다. 이대수 대표가 표현한 대로 소각장 반대운동은 그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폭발적인 운동’이었고, 의식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인적 자원을 토대로 언론을 만들고 운동단체를 만들었다. 소각장 반대운동에 대해 좀 더 물어보았다.

“소각장 반대운동은 군포에 큰 영향을 주었죠. 그 때 참여했던 분들이 군포 시민운동의 큰 원류라고 생각해요. ‘환경자치시민회’라는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한 거죠.......소각장 반대운동이 남긴 성과라고 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소각장 문제를 님비에서 주민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 하고, 소각장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제기했다는 것, 그 다음은 소각장을 통해서 주민들의 쓰레기 문제에 대한 인식능력과 해결능력을 높이는 것, 대안을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성과라고 볼 수 있죠.......군포의 소각장 반대운동에 앞서 목동, 상계동, 부천 등이 먼지 시작됐었죠. 소각장 착공 자체가 늦었기 때문에 군포는 조금 늦게 시작한 셈이죠. 그게 한 1-3년 사이에 다 일어난 거죠. 그것을 하나의 지속적인 시민운동으로, 주민들의 반대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군포였죠. 다른 지역은 주민운동으로 그치게 된 거죠. 다른 운동으로 승화․발전되는 그런 과정을 못 거쳤다고 봐요. 우리가 꼭 우리를 모델로 표현하기도 뭐하지만, 하여간 성과는 그래요.......저는 기본적으론 군포의 소각장 반대운동이 지역주민조직과 지역 단체, 그리고 중앙환경단체, 그 다음에 전문가가 결합을 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군포에서 ‘쓰레기연대회의’를 구성을 했어요. 그것을 확대해서 96년 1월에 ‘수도권쓰레기연대회의’를 구성한 거죠. 군포를 모체로 해서. 그렇게 해서 주민들의 반대운동, 저항운동에서 시민들의 환경운동 ,주민자치운동으로 발전시킨 그런 성과가 있는 거죠.”

여러 차원으로 평가된 것과 같이, 소각장을 주제로 벌어졌던 폭발적인 '즉자적 운동'이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뿌리고 영양분을 공급함으로써 대중적이고 지속적인 시민들의 환경운동의 모체로 새롭게 재탄생시킨 것은 지역운동의 역사에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학술적 가치로 해석되는 것을 넘어 방법론적 운동론으로도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계기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아마 그런 것들이겠죠. 반대운동의 한계를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고, 제가 신문을 만들어보니까, 신문이 갖는 힘과 장점이 있는 반면, 약점이 있거든요. 주민교육운동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 것을 맛본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저는 여러 활동을 통해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죠. 제 주변에 인적 자원들이 많이 확보된 거였죠. 그래서 인력풀을 흩어지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죠. 저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마치 밀물 때 밀려온 바닷물에 둑을 쌓아서 염전을 만들 듯이, 물은 흘러가버리지만, 염전에 가둬둔 물은 증발이 돼서 정말로 필요한 소금이 되잖아요. 언제든지 쓰일 수 있는 소금. 그 생각을 했고,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논의를 시작한 거죠. 그 사람들이 발의하면서 만들어진 거죠.”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흩어진 사람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운동을 지속화시키는 핵심 고리인 것 같다. 그런 리더로서의 에너지가 이대수 대표에겐 있었던 것 같다. 현재 ‘군포환경자치시민회’는 ‘수리산자연학교’, ‘군포생협’, ‘자치학교’, ‘시민정책센터’ 이렇게 크게 네 단위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다. ‘자연학교’와 ‘생협’은 워낙 공고하게 뿌리내린 독립적인 조직이고, ‘자치학교’는 비상설조직이지만, 6년간 사람들을 발굴하고 교육하고 또 리더십들을 향상시키면서 많은 기여를 해왔다.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적 훈련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책센터’는 일종의 전문가 그룹으로 출범함으로써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개별 팀 단위로 활동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렇게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어요. 그것이 꽤 큰 장점이죠. 물론, 중간 한 때는 독자성과 함께 전체적인 운동의 조화와 긴장이 필요했었는데, 그것은 정리가 됐어요. 표현하자면 “따로 함께”가 된 거죠. ‘환경자치시민회라’는 큰 틀에서 주민운동을 끌어가고, 각 단위들은 자기 과제에 충실하면서 시민적 자원의 호환, 리더십의 공동육성, 이런 일들을 하게 되죠.......회원은 경계가 모호한 부분이 있긴 해요. ‘환경자치시민회’만의 회원이 있고, ‘자연학교’에 회원이 있고, ‘생협’의 조합원이 있고, 각 팀 단위로 정회원부터 프로그램 회원 등이 있는 거죠. 이렇게 치면 꽤 되죠. 이에 상응하는 만큼 재정규모도 꽤 되는데, 작년 결산한 걸 보니까 한 2억 정도 됐어요.”

상근자는 4명, 반상근자는 2명, 이 정도면 지역단체로서는 꽤 큰 규모다. 더구나 상근자에게 활동비 지급이 끊긴 적이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재정 기반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사무실 한 켠에는 ‘경기시민사회포럼’과 ‘경기지역사회연구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그 두개 조직은 단순히 사무실을 빌려 쓰는 겁니다. ‘환경자치시민회’와 직접적인 조직 관계는 아니죠. 그것은 경기지역 내에 시민사회 중진 원로와 전문가, 그리고 지역 발전에 관심이 있는 주민들이 모여서 만든 NGO입니다. 일종의 액션 NGO라기보다는 정책을 개발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공론화시키는 일들을 하죠.......‘경기지역사회연구회’는 현재 참여정부가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서 각 지역별로 광역 단위로 지역혁신연구회를 조직하도록 요청을 했었습니다. 물론 직접적인 산하조직은 아니고, 독자적인 조직으로서, 지역혁신과 관련된 연구, 지방분권과 관련된 연구, 그와 관련 사업 등을 하기 위한 모임이죠. 전문가들이 많죠. ‘경기시민사회포럼’은 독자적인데, 시민사회 정책개발과 공론장으로 역할을 하려고 하는 거죠. 저는 이 두 조직에 상근하는 실무 책임자죠. 다른 활동가도 1명 있어요. 1명 더 찾고 있는 중이고요. 포럼은 기본 회비가 있고, 연구사업들이 있죠. 포럼과 연구회는 단체연합이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죠. 포럼은 2003년도 9월에 창립했고요, 연구회는 작년 2004년 2월에 했고. 포럼은 사단법인화까지 만들었어요. 거기서 여러 가지 생각하는 것들이 많이 있죠.”

활동에 대한 욕심이 남달라 보였다. 경기도 시민사회 전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 헷갈리지 않냐고 물었더니, 살포시 미소만 띄웠다. 10년 이상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을만한 성과들이 꽤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성공한 사례를 소개한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물었다.

“제가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학교’ 같은 경우가 대표적으로 잘 한 사례죠. 그리고 ‘생협’도 모범적으로 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책팀’도 마찬가지고. 다 자랑스럽죠. ‘자연학교’ 같은 경우는 자생력이 있죠. 지역의 주부들을 교사로 길러내고, 그 다음에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는데, 크게는 학교 교사들 동아리로서 ‘참자연교사회’가 있고요, 주부들 동아리로는 ‘들꽃을 공부하는 주부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줄여서 ‘들꽃공주’라고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길러내고 그 사람들이 교사 역할을 하고, 또 다양한 활동을 하고, 이렇게 기본적인 틀과 자생력을 갖췄어요. 생태교육 전문가로서 내․외부적으로 많은 교육을 합니다.......‘자연학교’는 소각장 반대운동을 하면서 지역에 생태영향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만들어졌어요. 군포에서는 독보적이죠. ‘생협’은 현재 4년째고요, 아름다운 생활공동체를 만들자는 취지의 실현이죠. 그런 점에서 ‘생협’은 지역에서 주부들을 참여시키고 공동체를 마을 단위로 만들고, 또 교육을 하고, 각종 동아리 활동을 하죠. 주부들이 만나고 하는 그런 장점들이 있는 거죠. 그 다음에 ‘자치사랑방’이라고, ‘생협’에 참여하는 주부들의 남편들 모임인데, 독자적인 모임으로 전환한 거예요. 직장 다니는 분들, 사업하는 분들, 이런 분들의 모임이죠. 지역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남자들이 함께 모여서 공부도 하고, 친교도 하고 등산도 가고, 이러면서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 부인들의 활동에 대한 이해, 양성평등 사회를 향한 작은 노력들을 하고 있죠. 한 2년 됐는데, 이번에 총회를 해서 남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자연학교’는 생태지도자를 육성하는 아이템으로 이미 전국에 잘 알려진 모델케이스다. 이 또한 소각장 반대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생협’, ‘정책센터’ 역시 이대수 대표의 애정이 묻어 있는 자랑스러운 사례다. 물론 지금도 실험 중인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왔고,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이대수 대표는 과연 어떤 군포를 꿈꿀까?

“저는 통상적인 얘기를 하면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역사회에서 만들겠다는 뜻이고, ‘생협’적으로 표현하면, 협동과 자치가 실현되는 지역사회고, ‘자연학교’에서 볼 때는 생태적인 도시, 자연친화적인 도시로 가는 싶은 거고, 하여튼 이런 의미를 담고 있어서, 포괄적으로는 지속가능한 도시라고 표현을 하는 거죠. 그리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표현할 수도 있죠. 그런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도 그렇고, 도시도 그렇고 워낙 소비조작과 관료지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고, 더욱이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의 쌍끌이에 의해서 이 사회가 유지되고 그로 인해 많은 폐해들, 한계들이 드러나고 있고, 환경파괴, 공동체 해체 등 여러 가지가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겠고, 지역적 차원에서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지역 사회에 건강한 리더십이 발전적으로 활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이 지역(군포)이 특별한 자원이 있어서 생산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이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보죠. 좋은 분들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과 능력을 쏟아서, 마치 아파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를 거둬내고 나무를 심고 하천을 만들고 함께 공간을 만들고, 공동체를 만들고, 이런 것들이 중요한 활동들이죠. 그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좋은 사람들을 확인하게 되고, 그런 거죠."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해서 ‘건강한 리더십’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처럼 보인다. 자치도 사람이 하는 거고, 공동체도 사람이 만드는 거고, 지속가능한 도시도 사람이 만들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지역에서 건강한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토대가 있어야 되거든요. 단체라는 거점과 근거가 있어야 되고, 캠프 같은 것이 전제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지역적 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참여와 재정확보, 이런 것들이 일단 이루어져야 하는 거죠. 그리고 이런 비전들을 만들어 가고 공유하는 과정들, 이런 것들이 맞물려서 간다고 봐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NGO들만의 노력이 아니라 가장 많은 재정과 정보와 인력을 가지고 있는 지방자치단체, 지방정부, 공공 영역들도 함께 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관료중심사회에서 시민사회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가장 많은 자산과 인․물적 자산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역정치, 풀뿌리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재화와 용역을 분배하는 과정에 대한 결정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정치의 영향력을 갖는 것,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런 영향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풀뿌리정치운동을 조직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죠. 그것의 핵심은 그래요. 시민에게 권력을 돌아가게 하는 것, 그것을 바꿔 말하면, 평범한 말 같지만, 시민이 주권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잘 적응하도록 해 가는 것, 다른 말로 하면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되는 것, 그 자체가 실현되는 것, 이 정도로 표방할 수 있겠죠. 2003년도 7월에 소각장 반대운동 10주년 기념식을 하면서 내걸었던 것이 그런 것이 있어요. ‘녹색자치도시’를 만들자, 이것은 20년 프로젝트다, 소각장 같은 경우 한 20년 정도 대안운동을 전개하면, 그 때가 되면 소각장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올 것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우리가 충분히 구축할 수 있을 거다, 이런 NGO적 전망을 냈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또 나름대로 시민들의 운동만이 아니라 행정의 변화가 필요한데, 아직은 우리 역량 밖이죠. 그런 역량을 갖추자는 취지에서 정치에 주역으로 나서보자, 시민들이 나서게 하자, 이런 거죠.”

거점으로서 단체, 참여 공간, 재정 등의 물적․인적 토대의 구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시민 영역 이외에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것을 실천전략으로 보고 있었다. ‘풀뿌리정치연대’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온다는 평범한 헌법정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치로부터 소외된 주민들을 정치의 주역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이기도 하다. 그런 것이 맞물릴 때, ‘지속가능한 도시’의 상은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구체적 주민’이 없이는 추상적 개념으로 공중에 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민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물었다.

“저는 여러 가지 단위 조직들이 사람을 만나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책센터’라고 한다면, 소수라 하더라도 이런 문제에 관심 있고 자기 고민을 가지고 있거나 자기 전문성을 가지고 주민들을 만나는 것이고, 또 ‘자연학교’ 같은 경우는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자기실현을 하고 싶은 주부들, 생태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주부들, 학교 교사들을 만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생협’도 마찬가지로 먹거리를 통해서, 협동운동을 통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리더십으로 변환시키느냐, 그것은 활동의 전망이 서야 하는 문제와도 같은데, 한편으로 그런 전망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주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일상적으로 회비를 만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저는 한편으로 ‘시민자본’을 축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민섹터의 강화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데, 이를 테면, 우리가 유기농 식당 등을 운영하면 그 돈은 우리 시민사회 내에 수익이 돌아간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공동생산을 하는 이른바 ‘워커즈 컬렉티브’라고 하는 것을 지역에서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생협’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있죠. 자본이 공적 자본과 기업의 자본만이 아니라 ‘시민자본’이 축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담보로 해서 활동들이 가능해진다, 복지, 환경, 교육, 여러 영역들에서 그런 ‘시민자본’들이 돈으로서의 자본은 기본이지만, 인적 자본까지 포함해서 형성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속성과 질을 담보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해야 질이 높아지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토대가 있어야 하니까, 그것을 갖추겠다는 뜻이죠.”

‘어떻게 주민을 만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뾰족하지 않다. 이대수 대표의 이야기대로 여러 활동을 통해 주민들을 만나고 변화시키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를 위해 이대수 대표는 ‘시민자본’의 축적을 역설하고 있다. 일본의 생활클럽 생협운동에서 전개하고 있는 ‘워커즈 컬렉티브’를 내부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물이 좋으면 물고기들이 모이듯, ‘시민자본’이 축적되면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 이대수 대표의 생각이다. 구체적으로, ‘워커즈 컬렉티브’는 ‘환경자치시민회’의 생협을 비롯해 군포 내의 네 개의 생협이 ‘군포지역생협네트워크’로 연대해서, 우선은 학교급식의 재료를 공급하는 일에서부터 공동사업을 진행하기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를 위해 강좌를 개최하는 등 공부가 한창 진행 중이고, 군포 인근 지역에서 유기농을 하는 농가와 연대의 고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대수 대표의 생각을 더 들어보자.

“저는 마포의 사례를 유심히 봐요. 동네부엌, 카센터, 라디오 방송까지 해보고 있는데, 우리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어요. 아직 워커즈 형태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공동출자해서 하는 걸 보면 그것과 유사하게 가고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고유 모델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봐요. 원주 쪽도 협동조합이 묶여서 활동을 많이 하죠. 협동조합 관련해서 연구 모임도 만들어내고 의료까지 포함해서 생산자, 의료, 소비자 다 묶여서 지역 나름대로 대안적인 지역사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죠. 거기는 중심적인 뿌리가 있으니까.......마포 같은 경우는 성미산 싸움 이전에 전 단계로써 공동육아조합 활동이 있었던 거죠. 그것이 커서 생협을 만들고 학교도 만들고 그 과정에 성미산 싸움에 끼어든 거죠. 그렇게 확대가 된 건데, 그 이유를 보면 성미산 싸움을 승리했다는 것이 중요한 동력이었고, 그 결과를 운동적으로 남겼다는 것, 그것이 군포보다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인 거죠.......또 중요한 요인은 거기도 좋은 리더십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리더십이 중요해요. 리더들의 비전과 추진력과 개인적 친화력 등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는 거죠. 지역사회가 너무 폐쇄적이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개방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개방적이면 너무 일들이 많으니까 어렵죠. 그리고 너무 풍족한 동네는 그런 운동이 안 돼요. 개별적으로 해결해버리니까. 너무 어려워서 자신의 문제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도 안 되지만, 너무 풍족해서 함께 뭘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도 안 되죠. 적절한 자기의 재산이 나갈 수 있고, 힘을 모을 수 있는, 또 무언가 버틸 수 있는 게 있고, 그런 것들이 가능해야 하는 거죠.”

겉으로 드러난 마포 성미산의 빛나는 활동은 지역운동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하고 지역운동단체들 간에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델케이스 운동은 피드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운동론이다. 군포의 고민도 일정한 열매를 맺길 기대해본다. 이젠 지역정치를 이야기할 차례다. 물적․인적 토대로서의 ‘시민자본’을 이야기했다면, 정치적 영향력으로서의 ‘지역정치 참여’를 좀 더 자세히 물었다.

“98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환경자치시민회’ 집행위원장장이었던 송재영(현재 민주노동당 군포위원장)씨가 선거에 출마했고 당선된 적이 있었죠. ‘환경자치시민회’가 결정해서 출마하게 한 것은 아니고, 본인의 의지가 있었고, ‘환경자치시민회’가 내부 논의를 해서 지지를 한 거죠. 저희가 창립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굉장히 논란이 많았어요. 적어도 지지는 해야 한다고 결론이 났죠.......그 다음에 2002년도에는 조금숙 대표가 출마를 했었고, 그 과정도 개인의 결단보다는 나가야 한다는 집단적인 당위, 합의를 만드는 과정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죠. 그래서 합의를 하고 본인이 결단을 한 거죠. 앞에 선거는 송재영 씨가 나가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형태라면, 조금숙 씨는 나갈 필요가 있다고 해서 후보를 설득해서 나가게 한 형태죠. 그리고 이번 ‘풀뿌리정치연대’ 같은 경우는 시민단체 내에서 정치를 전담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정치NGO로서 정치와 시민운동의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이 필요하겠다고 해서 논의를 해서 지금은 준비모임을 하고 있는 중이죠. 경기도 차원에서도 네트워크를 해서 준비모임을 진행하고 있죠.”

98년과 2002년의 정치참여는 양태는 조금 다르지만, 조직적인 합의를 전제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연장에서 ‘풀뿌리정치연대’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고 내년 선거에도 적극적인 행보가 예상된다. 그래서 물었다. 지난 선거 과정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지.

“98년도 선거를 통해서 의원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활동하는 데에는 시의 중요한 정보들을 일상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가능했죠. 우리가 시와 관련해서 싸움이나 협동할 때 굉장히 유리해진다는 것, 의원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보시면 되고, 2002년 같은 경우는 낙선했으니까, 그런 경험은 없었죠. 일종의 교훈을 얻은 거죠.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구나, 그리고 진입장벽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느꼈지만, 생각보다 잘 준비하면 할 수 있겠다, 라는 판단이 들었고, 두 분의 한계는 후보 개인의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판단이 들었는데, 그래서 풀뿌리정치의 상설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게 ‘풀뿌리정치연대’의 핵심이에요. 선거 때 반짝 조직이 아니라, 일상적인 정치 활동을 하는 그런 조직과 단체로 발전시키자는 것이 기본이에요. 거기에는 개인적인 후보를 중심에 놓고 있지 않거든요. 시민들이 이 문제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주권자적 권리를 행사하고, 책임을 지고, 이런 일들에 초점이 가 있는 거죠. 상설적인 활동을 하고 모이고, 이렇게 가려고 하는 거죠. 정책을 개발하고 사람을 교육하고 시민들에게 알리고 홍보하고 설득하고, 합의를 만들어가고 이렇게 하는 거죠.”

깊은 곳까지 얘기하진 않았지만, 의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굉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그런 차이가 협동과 자치, 자연친화적인 도시,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드는데 있어, 몇 명의 지방의원을 당선시킴으로써 가능해질까? 그래서 물었다.

“훨씬 낫죠. 없는 것과 있는 것과의 차이만큼 낫고 그리고 조금 있는 것과 많이 있는 것과의 차이, 그리고 단체장 같은 경우는 주도할 수 있는 차이.”

짧은 대답이었다. 욕심 같아선, 그 ‘굉장한 차이’가 무엇인지 더 명쾌하게 제시될 수 있다면, 지역운동단체가 지역정치를 바라보는 관점도 좀 더 명쾌해지지 않을까 싶다. ‘풀뿌리정치연대’는 단체 연대체가 아니다. 관심 있는 개인이 참여하고 있는 독립적인 '정치NGO'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시민사회단체와의 관계도 독립적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 관계를 어떻게 놓고 있는지 궁금했다.

“토론할 때에는 시민사회단체와 같이 하곤 하죠. 그리고 구성 멤버가 중복이 돼서 모호하다는 것은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은 준비 단계니까, 논의 과정에서 풀뿌리정치운동은 자기 단체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민단체와의 관계 등을 이야기할 텐데, 우리 내부적 결론은 시민사회단체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단지 시민사회단체와의 역할을 나누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정치NGO로서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죠.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로컬파티로 갈 수 있겠지만, 아직은 구체적인 상으로 제시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우선은 시민들의 정치적 각성, 그리고 정책의 개발, 이런 것들을 활동 목표로 삼고 있죠.......현재 시민사회단체들은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우호적인 감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과거보다는 정치에 대해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분위기인 것 같아요.”

‘정치NGO'라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한 이유도, 시민사회단체의 여러 가지 과제 중에 하나인 ‘제도정치’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래서 ‘풀뿌리정치연대’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단체장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이 당장 내년 선거에서 시도되든, 다음 선거든, 문은 열려 있다. 시민사회적 마인드로 지방정부를 집행하고 싶은 이대수 대표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저는 시민단체와 정치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일반 주민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풀뿌리민주주의라는 게 당신이 권력자다, 당신이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 그 중에 나도 일원이고, 당신도 일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권력을 돌아가게 하는 것, 그것의 중간 역할을 한다, 이렇게 표방하죠. ‘시민에게 권력을’이죠. ‘우리가 권력을’이 아니라.......저 개인의 정치참여는.......가능성으로 남겨 놓고 있어요. 왜냐하면 풀뿌리 정치를 하자고 제안한 사람인데, 나는 빼고 가자,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하자, 이것도 아니고. 그냥 객관적인 가능성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있는 거죠. 왜냐하면 시민에게 권력을 주겠다는 것은 시민 누구에게나 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 놓겠다는 것 아니에요? 그거에요.”

정치적인 부담은 있을 수 있지만, 이대수 대표 스스로도 정치의 일원으로서 정치 참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책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더 많은 권력을 주민에게 주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로서 ‘풀뿌리정치연대’는 작동될 것이라는데 있다. 앞으로, 그렇게 가야 하는 리더로서의 고민이 점점 더 깊어질 것 같다. 끝으로 두 가지를 물었다. 운동하면서 무엇이 가장 힘든지, 그리고 선배 시민운동가로서 후배 운동가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가 그것이다. 이대수 대표의 대답으로 오늘의 인터뷰를 마치고자 한다.

“사람들의 변화 속도가 늦다는 거죠. 닥쳐올 여러 가지 상황이 있는데, 크게는 지구환경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회에 닥쳐올 위기상황과 이것을 넘어서서 대안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시차의 문제죠. 타이밍이 잘 맞느냐, 계속 위기적 사인이 오는데,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위기로까지 이어져서 사인은 계속 오게 되는데, 과연 우리가 그런 사인을 심각하게 받고 전환하고 하는 속도를 맞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죠. 그리고 이런 운동을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역에서부터. 지금 단계는 우리가 가나가와 네트워크를 방문한 것도 그렇고, 제가 어디 가면 그런 얘기 자꾸 하는 이유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겠다, 풀뿌리를 글로벌 네트워크로 만들겠다, 적어도 동아시아 정도는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올해는 국제교류의 방점을 하나 찍고 있어요. 예산의 0.5%를 모으기로 하고, 그런 결정을 이미 해놨어요. 그게 올해는 조금 더 가시화될 거예요.......나는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좀 더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다고 봐요. 그래서 사실 그런 것을 통해서 아까 얘기한 시민자본을 축적한다든지, 기반을 구축하는 것, 이런 것을 통해서 지속성을 담보하는 거거든요.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경기도까지는 내가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토론을 하는 거도 그런 일환으로 하는 거죠. 그런 기반을 구축하자, 구축해서 물적 토대와 지역의 리더십들을 기르고 좋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적으로, 또는 반직업적으로 일할 수 있는 그런 조건들을 갖추자는 거죠. 몇 년 하다보면 갖춰지겠죠.”


※ 환경자치시민회의 홈페이지는 http://www.ecofamily.net/입니다.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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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지역운동 하는 법!! - ‘대전여민회’를 찾아
인터뷰 : 김최진연(사무국장)

요즘 들어 몇 몇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참여 활성화를 위한 참신한 제도들을 도입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여전히 흡족하진 않지만 이런 소식들을 접하면 흐뭇해진다. 서대문구립보육시설의 시설운영위원회 설치라든지 청주의 시민참여기본조례, 그리고 군포의 자전거 이용활성화 조례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주민소환을 제외하고 주민발의나 주민투표 제도가 도입되었고, 주민소송은 얼마 후면 입법될 예정이다. 법․제도적 장치의 마련은 정책프로그램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측면에서 주민참여를 위한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도의 도입이 곧바로 주민참여 활성화와 등치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도는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주체들의 의식과 의지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질 수 있다. 아니면 그 제도의 가치를 전혀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제도는 부차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과정이 생략된 결과는 공허할 수가 있다. 원탁에서, 밀폐된 공간에서 합의된 하나의 정책이 내용적으로 훌륭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 또한 훌륭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조례 제․개정운동을 통해 혁신적인 조례를 만들고 참예예산을 통해 주민들이 직접 필요한 영역에 예산을 편성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학습과 교육, 소통과 공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주민참여제도를 만드는 것만큼 실제로 주민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게끔 주민들 간의 공론의 장이 마련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지역운동이 간과하지 말아할 할 것은 이런 대목이 아닌가 싶다.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을 처음 만났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런 운동이 일상을 변화시키고 지역을 변화시킨다는 뒤늦은 깨달음. 그와 똑같이, 이번 인터뷰 대상인 ‘대전여민회’도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대전여민회’라는 단체의 활약상을 가끔씩 듣곤 했었는데, 그 때마다 대전 여성민우회를 지칭한다고 생각해왔다. ‘대전여민회’가 하나의 고유명사임을 이번 기회로 알게 되면서, 죄송한 마음 한편으로 ‘대전여민회’가 도대체 어떤 단체인지 더욱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두말없이 대전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KTX는 정말 빨랐다. 대전까지 채 1시간이 안 걸리다니.

먼저 거쳐야 할 코스. 대전여민회의 역사는?

“87년 이후 비슷한 이름의 여성단체들이 많이 생겼는데, 87년 민주화 항쟁이 끝나고 박종철 사건 전에 권인숙 씨 사건이 있었잖아요.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어야 하고 군부독재가 사라져야 하지만, 여성의 문제는 역시 여성의 문제로 또 한 편으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 전국적으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현재 민우회 같은 경우는 87년부터 ‘평우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87년에 민우회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각자 지역에서 87년 6월 항쟁이 끝나고, 아니면 그 직전에 각자 서로 모르는 사이에 단체를 만든 거예요. 그 당시에는 단체 이름에 ‘민’자가 많이 들어갔어요.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백성을 뜻하기도 하죠. 그 당시 대전은 광역시로 되어 있지 않아서 ‘충남여민회’라는 이름으로 창립을 했죠. 87년 12월이었죠. 창립하고 나서 보니까, 제주도는 제주여민회가 충북은 충북 여성민우회, 대구는 대구여성회, 전주는 그 당시 전주여민회, 이런 식으로 이름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 거죠. 87년 전후로 해서.......저희 같은 경우는 87년 12월에 대전에 있는 학생운동 출신의 여학생들과 기독교 여성들, 그리고 일반 진보적인 주부들 100여 명이 출발했더라고요. 그래서 여민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은 민주주의 실현, 성평등 사회 구현, 평화통일, 이런 것이 저희 정관에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설립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90년대 초반까지의 활동은 여전히 민주주의 연대활동이 주였었죠. 90년대 중반쯤이 돼서 비슷한 연배들이 모인 까닭에 결혼문제, 육아문제 등으로 2-3년간의 정체기가 있었어요. 상근자가 없던 시절이었죠. 이런 시기를 거쳐서 애를 조금 키워 놓고 보니 이미 사회가 시민운동으로 전환한 시기였고, 그래서 지역에서도 여럿 시민단체의 창립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죠. 그 때 저희도 다시 모여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는데, 대중조직으로 한 번 고민해보자, 그 동안 앞장서서 선도적인 운동을 주로 해왔다면 이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자, 이런 얘기들이 자연스럽게 합의가 된 것 같아요. 현재 부회장으로 있는 김경희 씨가 사무국을 다시 구성하게 되었는데, 당시 자치부녀회 회장 출신이었어요. 그 분이 대중조직으로서 생활운동, 여성운동을 주도한 거죠.”

87년에 창립. 90년 중반에 정체기. 그리고 90년 후반부터 재창립의 시기를 겪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남여민회’에서 ‘대전여민회’로 바뀌게 된 시기는 대전이 광역시로 바뀐 90년대 초반이었다. 풀뿌리운동과 여성의 과제를 대변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전략이기도 하다. 사무실은 현재 중구에 위치하고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규모의 사무실이었는데, ‘대전여민회’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시는 분이 건물주이기 때문에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사무실을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단다. ‘대전여민회’는 어떤 활동을 하는지 물었다.

“여성운동과 관련된 전반적인 것을 다 해요. 대부분 광역에서 여성단체들이 여럿 있는데, 대전 지역은 특이하게도 여성단체가 저희밖에 없어요. 저희가 분화를 못한 측면이 있고, 대전이 갖고 있는 운동의 고유한 역사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대전이 운동을 주도하거나 앞서가는 그런 곳이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니 저희 단체가 모든 영역의 일을 다 하게 되요. 노동상담이나 가정사담도 하고 최근에는 성매매 관련해서도 하게 되고, 약하지만 평화통일 관련된 일도 하고 있고요, 그 다음에 정치세력화 관련된 일도 하게 되고요. 여성정치 이슈들, 연대활동은 당연하게 하는 거고, 교육사업도 하고요, 안 하는 것이 없죠. 저희만의 개성이라면 문화 영역도 다룬다는 겁니다. 연극모임, 영화, 문학모임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시도 짓고, 연극은 올린 지 한 7년 정도 됐고요, 나름대로 아마추어지만 전문극단 못지않게 실력을 쌓았어요. 영화도 1-20분 정도의 분량을 직접 찍기도 했어요. 여성문화제도 개최하고, 아무튼 다양하게 합니다.”

활동의 반경은 매우 넓었다. 이런 일상적인 활동 이외에도 3.8여성대회, 풀뿌리주민운동, 여성문화제, 각종 캠프 등 한 해가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상근자는 4명이다. 12월에 1명, 내년 1월에 1명이 더 결합하면 6명이 된다. 단체에 등록된 회원은 900명. 이 중 회비를 내는 회원은 500명. 여기까지 여타의 단체와 큰 차이가 없었는데, 실제로 활동하는 회원, 즉 정기적으로 찾아오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의 수가 130명이라고 했을 때에는 만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30여 명의 활동 회원들이 12개의 소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분기별로 새로 가입된 회원들을 위한 신입회원 교육이 있어요. 그 교육을 막 마치고 오신 분들은 뭔가 여민회의 색깔에 조금 감이 온다고 하면서, 아직은 소극적인 분들 같은 경우, 그러니까 6개월이나 1년 미만의 분들은 그냥 주변에 누가 좋아서, 아니면 주변에서 누가 권해서 나오는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고요, 3년 이상 된 분들, 내지는 조금 더 빠른 분들, 그러니까 시민의식이 높은 분들 같은 경우는 연차와 관계없이 굶주렸다는 듯이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긴 해요. 대체적으로 활동하시는 회원들은 개혁적이라고 볼 수 있고요, 아주 여민회의 이념에 일치해서, 모든 것에 동의를 하냐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우리도 다양성의 시대가 열려서, 옛날에는 생각이 정말 동일했거든요. 너무 동일해도 좀 문제가 있지만, 국가보안법 문제도 거의 대부분이 폐지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한 두 분 정도는 개정을 통한 절차를 밝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견을 내시기도 해요.......소모임은 12개 정도 되요. 각 소모임에 팀장님이 있는데, 팀장님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중간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실무자는 굉장히 강력하고 전업적으로 하니까 앞서 있고요, 회원들은 구성원에 따라, 몇 년에 들어왔느냐, 어떤 위치의 활동을 할 것이냐에 따라 편차가 있죠. 이런 조건에서 팀장들은 소모임을 이끌면서 중간역할을 하고, 대중성도 띄어야 하고, 진보성도 견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팀장님이나 위원장님들의 고민을 제일 많이 알고 있어요. 이끌어내고 정보를 제공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개혁적으로 변화되는 것 같아요.”

중간지도로서 팀장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일반회원과 실무자들 간의 다리 역할은 물론이고 개별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최진연 국장은 연거푸 팀장들이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전여민회’는 사단법인이다. 그래서 최고의사결정 단위로 이사회가 있다. 팀장은 선택적으로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사회에 참여하려면 2년 이상의 활동과 추천이 있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팀장이나 각종 위원장의 선택적 몫이다. ‘대전여민회’는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할까?

“저희는 서구 지역과 중구 지역 활동을 주로 했는데, 서구 지역 같은 경우에는 98년부터 주민프로그램이 대표적이에요. 주민결합형, 밀착형 사업이 활동의 방향이고, 이를 위해서 아파트 만들기를 위한 시민학교, 대전여민회 사랑방, 등의 프로그램을 하면서 아파트를 어떻게 주민들이 참여해서 잘 운영할 것인가, 아파트 전문가나 법률가를 부르기도 했고요, 또 주민들이 주체가 되서 할 수 있는 도서관 만들기, 아파트 회보를 만들기도 하고 주민잔치도 해보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연극 교실, 만화교실도 열어보고, 그리고 각자 그린 그림이나 주제를 가지고 행사도 해보고, 이런 활동을 꼼꼼히 해왔어요. 이런 활동과 별개로 저희 여민회 내에는 주민자치위원회라고 하는 위원회가 있어요. 여기에서 98년부터 99년, 2000년, 2001년까지 계속 서구의회 방청을 해서 모니터 자료를 내기도 했어요. 2002년에는 서구의 탄방동에서 우리 단체 부회장이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기도 했죠.”

주민 밀착형 운동의 효과는 서구의 탄방동의 러브호텔 건립저지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주민들의 스스로 결합하고 반대운동의 주체로 나섰다는 것이다. 주민과 평상시에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김최진연 사무국장은 말한다. 아무튼 긴 시간 동안 김최진연 국장은 서구와 중구에서 진행했던 풀뿌리운동을 설명해주었다. 중구에서도 정기적으로 진행했던 나눔장터, 각종 문화행사, 어린이 관련 연극/만화교실/캠프/경제교실/벼룩장터 등 매우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 풀뿌리 운동 과정에 현 서구의회 의원이 장현자 의원을 배출하기도 한 것이다. ‘대전여민회’는 생활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서구와 중구는 경제적인 상황이 좀 달라요. 서구는 프로그램의 특성만 가져가면 일정한 회비나 참가비를 내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요, 프로그램의 질과 내용을 충분히 갖고만 있다면 만나기 쉽죠. 그러나 조직하기는 더 어려워요. 쉽지가 않더라고요. 어린이 프로그램을 많이 앞세우는 이유가 엄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데, 엄마를 만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엄마를 직접 만나지 않는 한 쉽지 않은데, 보통 한 사람이 오기에 한 3년이 걸리니까, 어린이를 충분히 만나서 그 어린이를 통해서 여민회에 대한 거부감도 없애고 한 번, 두 번 오게 되고 그러다보면 꾸준히 오게 되는데, 조직률은 중구와 서구가 아주 큰 차이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중구에서 저희를 늘 보고 가까이 오는 분들이 더 빠르다고 할까요, 그런 차이가 있어요. 중구 같은 경우에는 돈을 내서 하는 프로그램은 잘 안 되죠. 프로그램의 질이나 내용보다는 아무래도 생활형편이 더 어려우니까 무료라면 보내고, 그런 차이가 있죠.”

지역의 상황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도 다르다고 말한다.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한 지혜였다.

“서구에서 소모임은 아직 시작해보지 않았죠. 그 동안은 프로그램 위주로 진행했는데, 선택해서 와서 그 프로그램이 끝나면 아이들을 다시 보내지 않고 엄마들도 나타나지 않는 형태였다면, 올해 처음으로 서구에서 시도한 것은 어린이 경제교실과 어린이 벼룩장터를 하면서 한 쪽 코너에서는 엄마들이 떡볶이와 어묵을 팔게 했어요. 처음부터 같이 준비한 거죠. 그 프로그램을 하고 나서 모든 참여자들의 평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다, 다음에도 또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서구는 아주 낮은 수위의 참여부터 시작해서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는 거고요, 중구 같은 경우는 주민 분들이 직접 찾아오기도 하는데, 동화 읽는 엄마 모임 같은 경우, 저희에게 와서 지켜봤더니, 처음에는 종교단체인줄 알았데요. 장터 열고 봉사하면서 전도하려고 하는 것 같고.......(웃음) 그런데 그런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동네 분들을 모아 오시더라고요. 그런 분들이 모이면서 소모임 활동을 하게 되고, 여기에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겠다, 그렇게 활동을 하게 된 거죠. 처음에 지켜보던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스스로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이 되었죠. 경제교실 팀도 마찬가지에요. 경제교실을 저희가 처음 했는데, 그 공부를 열심히 하시더니 이제는 엄마들이 강사가 됐어요. 그 강사진을 가지고 서구에서 한 거죠. 그런 주체형 운동을 하고 있는 거죠.”

‘대전여민회’ 사무실 바로 옆에는 놀이터가 있다.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를 벌인 모양이다. 주민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종교단체 행사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주민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성을 주체로 세우는 방법은 뾰족한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분은 우리의 프로그램을 우연히 알게 돼서, 또는 교육프로그램을 우연히 알게 돼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제도권 교육은 강제 교육적 성향이 있으니까 무조건 참여토록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주민들이 선택하는 거고, 또 많은 것이 열려 있고, 해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를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 그리고 이후의 조직화 과정까지 고민할 지점이 많이 있죠. 한 분을 만나기 위해서 열 번 스무 번 고민해야 되니까요.......그래서 어려운 일이죠.”

한 명의 주민을 참여시키기 위해 삼고초려 이상의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다. 그러나 일단 참여의 통로로 들어온 주민들은 ‘참여’ 이상의 경험을 갖게 된다. 정치적 의식화의 과정이기도 하고, 리더십의 창출이기도 하며, 동네를 변화시키는 주체로서 자기 몫을 찾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조직이나 개인, 그리고 동네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하여튼 더 많은 어떤 프로그램이든 뭐든, 주민과 밀착하려는 계획이 필요하고, 그 과정 속에서 어느 정도의 속도와 내용으로 주민이 그것을 주체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시민단체는 시키고 주민은 구경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런 관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죠. 이렇게 말하기엔 좀 뭐하지만, 위에서 주고 밑에서 받고 하는 모습은 초기에는 없을 수 없다고 봐요. 전술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더 소수의 엘리트의 전문가 집단이 기획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결국은 그것이 뒤집혀서 주민 참여형, 밀착형의 모습으로 주민들이 주체로 형성될 때, 그것이 조금 원하는 바가 낮아지더라도, 그렇게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고, 그런 것에 많은 시민단체든, 풀뿌리 단체든 생겨나서 가야 될 것 같고요, 먼저 그런 것을 깨달은 집단이나 개인이 시작할 수밖에 없죠. 과거에는 그것조차도 영웅형 스타일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민주적 지도자가 민주적 수렴과정을 거쳐서 같이 하고 그리고 내 것을 빨리 나눠서 같이 참여하게 하고, 기획부터 마무리, 평가에 이르고 다시 기획하기까지 전부 주체를 넓히고 바꿔주는 형태로 가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지 않을까(웃음). 역시 사회 분위기와 연관도 많이 있고요. 사회적으로 참여형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렇게 바뀌면, 주민들 스스로도 뭔가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가질 수 있겠죠. 이런 큰 사회 구조라는 분위기와 같이 가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풀뿌리가 풀뿌리로만 존재할 수가 없어요. 풀뿌리가 잘 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개혁적으로 가야하고 참여형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시민단체는 이런 맥락에서 같이 수행을 해야 되는 거겠죠.”

그렇다. 풀뿌리는 작은 영웅들이 많아질 때 더욱 힘이 커진다. 한 명의 영웅이 동네를 바꾸는 것보다 작은 영웅들이 더디더라도 동네를 바꾸는 일에 무게 중심이 옮겨있다. 김최진연 사무국장은 세 가지 요소를 주문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참여’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풀뿌리 세력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시민사회운동진영이 참여형 사회로 갈 수 있도록 부채질을 하면서 동시에 풀뿌리로 가야 한다. 두 번째는 지역운동단체가 ‘마중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주체가 되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긴 힘들다. 누군가 독려해야 하고 멍석을 깔아줘야 한다. 물이 잘 넘쳐나도록 ‘마중물’을 붓듯, 지역운동이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모든 활동이 주민을 주체화시키려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기, 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쳐다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하는 것이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주민자치의 정형화된 상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저희끼리 많이 토론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런 것인데, 그게 모임의 형태는 소모임일지 모르겠는데, 일단은 예를 들어서 이런 문제에 실제로 많이 접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정말 회사 내에서 완전하게 풀 수 있을까? 풀어야 되는데, 회사가 민주화되고 거기도 노동자 참여형으로 변하면서 서로의 간극이 없어져야 하고, 남녀의 대립, 노소의 갈등 등이 없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현장에서 원칙만 세운다고 가능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것을 실현하는 곳의 하나가 지역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만남, 이렇게 만나지 않잖아요? 직장이 아니니까. 그리고 남과 여의 심한 대립, 이렇게 만나지 않잖아요. 주민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동등하게 만나는 측면이 있어요.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비정규직 다르고 남자라고 다르고 그런 것이 아닌 것처럼, 현장과 지역이라고 하는 곳에서 동시에 그런 과제가 수행되면,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빨리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저희끼리 여러 번 나누었어요. 여민회는 이런 원칙을 늘 확인하면서 가죠. 그랬을 때, 나중에 단체가 빠지고 자율적인, 정말 스스로가 동네에서 작은 모임이든 큰 모임이든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봐요. 그러나 지금 현재 시점에서 우리 같은 단체가 개입을 많이 해서 동네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그들 스스로가 주민자치적 성격을 가질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조금 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으로 의식화되는 것도 필요하겠죠. 그러다보니까 저희가 밖에 소모임을 두지 않고, 일단 아직은 저희 여민회 내부로 끌어주면서 소모임 활동을 유도하면서 단체가 좀 더 개입하고 있는데, 지금으로써는 이런 모습이 주민자치의 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한 동네에 거주한다고 곧바로 정주의식이 발동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정한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겐 작지만 공동체의식이 싹트기 마련이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노동자든 사업주든 갈등이 대립되어 나타나진 않는다. 이익에 대한 갈등도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동네는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작은 해우소가 될 수 있다. 대립과 갈등을 묻어두는 곳. 주민자치는 이렇게 공동체성이 희미하지만 존재하는 작은 단위에서 출발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정형화된 상은 제시할 수는 없지만.

“동네의 리더십 문제도 저희가 고민을 많이 해요. 저희의 중요한 사업 중에 하나는 묻혀 있는 좋은 리더십을 개발하는 것, 또 하나는 기존에 있는 리더십을 드러내는 것. 올해 한 번 시도했거든요. 주민자치위원회들이나 부녀회장, 지역에서 나름대로 유명하고 필요한 역할을 하는 일꾼들을 모셔서 리더십 캠프를 열어봤어요. 그런데 이 분들의 특성이 지역에서 온갖 굳은 일을 다 해요. 부녀회장이든 누구이든, 쓸고 닦고 무슨 사고 생기면 달려가서 굳은 일 하고, 김장 담그는 이런 일을 다 하시는데, 정작 리더십 교육을 받은 분들이 없으시니까, 정말 교육을 열심히 받으셨어요. 그런 것을 시도하면서 조금씩, 한발씩 다가갈 수 있고, 이 분들이 지역에서 봉사하시는 그 이면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봐요. 그냥은 소박하지만 동네에 묻혀 있는, 그리고 저희는 누구나 리더십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리더십을 깨우쳐 주는 프로그램을 해보자, 그래서 내년에는 그런 사업이 구상되어 있어요. 더 남들보다 헌신적이고 나서길 좋아하는 분들이 동네에 상당히 많다는 것을 깨달아요.”

여성의 리더십을 일깨워주고, 또 드러난 리더십을 발현하게 하는 일. ‘대전여민회’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인 것 같다. 그것은 주민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성 안에 리더십 있다!!

‘대전여민회’의 이름으로 진출한 지방의원이 있다. 대전 서구의 장현자 의원. 정치참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저희가 2002년 지방선거에 참여한 것은 사회적 분위기가 큰 이유였죠. 그 전에 민우회가 여러 차례 당선이 됐어요. 그래서 그런 것도 있고, 더 큰 것은 지방자치가 두 번, 세 번, 이렇게 오면서 전체적인 운동의 흐름 하나가 생활운동 영역으로 가는 것, 그리고 사회도 주민자치, 지방자치에 시민, 주민이 나서는 것, 이런 큰 흐름이 역시 저희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모델 단체, 민우회가 보여준 모델, 그리고 다른 각 시민사회단체가 보여준 모델, 우리도 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세 번째가 개인의 결단, 한 번 나가보겠다, 그리고 지역에서는 김용분 의원의 모델이 있었고요, 그것이 결합돼서 우리도 한 번 해보자,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물론 그 전에 치열한 논의를 한 것은 아니죠, 그런 대체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한 번 해보자, 이렇게 한 거죠.”

지역정치 참여를 두고 단체 내부적으로 약간의 마찰음은 있었지만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한다. 소모임에서 활동하는 회원들과 주민자치위원들이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물론 장현자 의원이 지역 내에서 꾸준히 풀뿌리운동을 전개해 오면서 헌신적인 리더십을 발현한 것이 당선의 요인이기도 했다. 밑에서부터 바닥을 다져온 것이 신뢰를 얻은 것이다. 의원과 단체의 지향성이 일치했기 때문에 서로간의 불협화음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지방정치는 중앙정치와 다르다고 생각해요.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지만, 저희 대전여민회는 우리의 후보라고 하는 개념 안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진보성, 이념이라든지 그것을 포함하는, 그 이념을 반영한 정책이라든지, 활동이라든지 이후에 이런 것들이 실천으로써 보여주는 것이거든요.......당선 이후에 갈등보다는 저희가 지원을 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이미 다 아시겠지만, 갈 때는 대전여민회 단체 후보로 나왔지만, 가서는 모든 영역,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모든 분야를 다 다루기 때문에, 환경 사안은 저희가 접근을 해도 잘 못한다든지, 그래서 환경단체와 함께 한다든지, 그리고 다른 법, 제도의 문제는 참여자치랑 함께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저희는 여성적 사안만 같이 하기 때문에, 사실은 의원이 되고 난 이후는 우리의 의원이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라는 것이 확 넓혀져서 우리의 후보일 때는 대전여민회 후보였지만, ‘우리의’ 의원일 때의 ‘우리’는 모든 시민사회단체, 내지는 진보성을 갖고 있는 개인까지 포함한 우리의 정치인, 이렇게 넓혀지더라고요. 그런 것이 있어서, 저희가 이론적으로 논쟁을 하거나 쌓여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수 있다는 점은 지역정치의 가장 우려스런 점이겠죠. 그런데 역으로 기존 정당을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써 당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있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들의 당이 필요하다고 봐요. 기성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아니라,(웃음) 그런 당이 있어야지 개인의 변절, 변질, 내지는 서운함, 이런 것이 조직적으로 극복될 수 있잖아요? 저희는 아직은 그런 것을 깊이 고민해서 마찰을 일으킬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의 고민까지 나가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런 것이 있어요.”

김최진연 사무국장은 장현자 의원을 ‘우리의 의원’이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서 ‘우리’는 ‘대전여민회’를 뜻하지 않았다. 그를 지지하고 지원했던, 그리고 그와 이념을 같이 하는 모든 이들의 의원인 것이다. ‘대전여민회’ 스스로 ‘나만의 의원’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독자적 후보 전술의 ‘폐쇄성’은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한 명이 진출한 것은 물로 미약하다. 그러나 그 한명의 의원이 가져다 준 성과는 엄청났다고 김최진연 국장은 말한다. 대전 구 단위에서 최초로 보육조례를 제정했고, 서구 지역의 난개발을 번번이 좌절시켰으며, 크고 작은 각종 정보를 쉽게 얻어 볼 수 있었다. 지방의원은 동등한 협력자였다. 김최진연 국장은 다가올 2006년 지방선거도 착실히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회원들 간에 분위기는 고조되었지만, 한편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는 일이다. 결국 주민의 힘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지와 저력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착실한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이번 인터뷰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루어졌다. 바쁘게 갔다가 바쁘게 돌아와야 했다. 다음에 기회다 닿으면 다시 한번 ‘대전여민회’를 찾고 싶다. 내게 매력적인 단체였다. 끝으로, 그 동안 지역정치 참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그의 답으로 인터뷰를 마치고자 한다.

“글쎄요, 어렵네요.(웃음) 시민사회단체가 한편으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더욱 더 세밀하게, 더 고민해서, 정말 주민을 주체로 세워서, 이렇게 뿅 하고 한두 명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을 과감하게 전환하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풀뿌리가 풀뿌리로 설 수 없거든요. 법이 바뀌어야 하고 제도가 바뀌어야 하고, 그리고 누군가 앞장서서 민주사회를 위해서 외쳐주어야 하고, 이런 큰 역할분담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요, 그래서 시민사회운동진영이 더 분화되고, 회원 중심형으로 바뀌어야 하고, 이런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는 시험단계였던 것 같아요. 개별적으로 해보기도 하고, 당으로도 넣어보기도 하고, 지방의원도 해보고, 중앙도 해보고, 민주노동당은 10명이 진입했고.......시험단계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 과정이었다면 이런 것을 잘 평가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잘 논의해서, 잘 준비해서 해야겠죠.”

※대전여민회의 홈페이지는 http://www.tjwomen.or.kr/입니다.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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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의 시대’에서 ‘자치의 시대’로 - 인천참여자치연대를 찾아
인터뷰 : 박인규(사무처장)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시민운동가 순환제 같은 거 말이다. 환경운동가가 자치운동을 경험해보고 중앙형 운동에 몸담았다 저 밑바닥의 풀뿌리운동까지 두루두루 섭력하는 그런 순환제. 사회복지 영역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고 정치운동의 과정에 제도권 정치에도 참여해보면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시민운동가의 상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시민운동가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에 비해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의심하진 않는다. 또한 순환제를 통해 단순히 각각의 영역을 잘 이해하자는 취지로 얘기하고픈 생각은 없다. 각각의 작동 매카니즘을 경험하게 되면 아무래도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수준도 깊어지겠지만 ‘상상력의 나래’가 훨씬 자유롭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간혹 영역에 따라 미묘한 입장의 차이를 발견할 때가 있는데, 노동 분야와 환경 분야가 대표적일 것이다. 또는 하나의 사안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있다. ‘교육’을 중심에 놓고 보면 대안학교 운동 그룹이나 학부모 운동 그룹, 또는 당사자인 교사 그룹, 자치운동 그룹 등이 입장 차가 좁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 반핵운동의 폭력성만 놓고 판단하다보면 ‘핵’이라는 본질을 놓칠 수도 있고, 결과만 놓고 판단하다보면 절차, 또는 그 과정을 쉽게 관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칙을 지키면서 현실에 부흥하는 합리적인 선택은 참 어려운 것 같다. 공통분모 찾기란 자신의 입장을 조금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이럴 때 ‘상상력의 나래’가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 인터뷰는 시민운동 판에 신참이면서 노동운동에 잔뼈가 굵은 중견 활동가를 만났다. 인천참여자치연대의 박인규 처장이 그 주인공이다. 솔직히 나는 박인규 처장이 시민운동과 인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낌새조차 채지 못했다. 간혹 기회가 닿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내공이 잔뜩 쌓인 중견 지역운동가라는 확신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박인규 처장은 2000년 총선 전후로 시민운동에 발을 들인 이후, 2002년 3월 ‘인천참여자치연대’를 창립하게 된다. 만 4년을 갓 넘긴 신참 시민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박인규 처장 스스로도 ‘후배들보다 못한 시민운동가’라며 살포시 웃는다. 그런데 그런 내공, 또는 풍채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처음에 와서 고민이 많이 되죠. 생소하기도 하고. 우리가 노동운동을 할 때 소위 시민운동을 계량주의자라고 생각을 했었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그런데 제가 막상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아이러니 하죠.(웃음) 처음에 정체성에 대한 혼란도 있었고, 경험을 하다보니까 어떻게 보면 사회가 변화하고 그러는 만큼 운동의 영역이 다양화됐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따로 또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거든요. 그런 것이 자연스러운 거고.......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여기서 열심히 활동하는 게 그래도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 지역이 발전하는데 보탬이 되는 활동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노동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의 단절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연결’이 박인규 처장의 내공의 비밀일지 모르겠다. 여하튼 박인규 처장과의 인터뷰를 시작해보자. 우선, 단골메뉴. 인천참여자치연대의 간략한 역사는?

“저희가 정식으로 창립을 한 것은 2002년도 3월 29일이에요. 대략 1년 정도 준비를 해서 창립을 했는데, 2001년도에 저희가 준비하게 됐던 출발은 2000년도 총선 지나고 나서 지역에서 시민운동다운 시민운동을, 종합적 시민운동을 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어보자고 하는 지역의 요구들이 있었어요. 저희가 만들 당시의 고민은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일상적인 지역의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일과 또 하나는 2000년도를 정점으로 해서 보여주었던 대변형 시민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최대점에 도달했는데, 그 이후, 이런 운동이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좀 더 지역주민들을 주체로 내세울 수 있는 풀뿌리운동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고민이 한 편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두 가지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 단체가 만들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저희 단체 활동을 보면 내부적으로 행정이나 의정감시를 할 수 있는 활동 파트가 있고요, 그 다음에 주민자치나 아파트공동체운동을 하는 활동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저희 단체가 두 가지를 결합하고 있죠.”

인천참여자치연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만 2년 반을 지나온 셈이다. 크게 두 가지 키워드가 있었던 것 같다. ‘지역’과 ‘주민주체운동’이 그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은 시민운동 역사의 백미였다. 앞으로 그런 거대한 운동이 또 있겠는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오르막길에 올라 정점에 도달하면 내리막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질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고민이 인천참여자치연대를 태동시켰다. 현재 상근자는 4명, 반상근자가 1명, 4.5명이 상근 중이다. 대부분의 시민단체 회원 규모는 어느 정도 거품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박인규 처장도 전체 회원 수를 밝히지 않았다. 대신 적극적인 회원의 수가 어느 정도냐고 물었더니 200명 정도의 규모라고 말한다. 이 정도면 그리 만만한 조직은 아닌 듯싶다.

“저희는 크게 네 영역으로 활동합니다. 하나는 인천시의 시정이나 의정을 감시, 비판, 견제하는 활동이 있고요, 그 다음은 말 그대로 지역시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주민자치운동인데, 그 내용은 대체로 주민자치센터를 중심으로 한 운동입니다. 인천은 상대적으로 보면 아파트 거주민들이 한 40% 정도가 됩니다. 많은 편이죠. 그래서 아파트 공동체운동에 주목하면서 출발을 하긴 했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때문에 지금은 출발하지 못한 상태고, 내년에는 복구를 할 생각이에요. 세 번째는 지역복지 관련한 복지활동인데, 복지정책 관련된 것이나 복지 제도개선과 같은 정책제시운동을 합니다. 요즘에는 조그맣게나마 지역주민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복지서비스 활동을 조금씩 개발해나가고 있어요. 네 번째는 전통적으로 해왔던 다른 단체와 연대 활동입니다. 연대활동 같은 경우는 저희 단체가 그래도 중심이 돼서 일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시정․의정 감시, 주민자치, 복지운동, 연대활동 등 네 가지가 주요 활동 목록이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이 네 가시 영역 중에서 어느 분야가 가장 마음에 끌리는지. 그랬더니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의도된 질문 같은데요.”라고. 순간 뜨끔했지만, 사실 그런 의도성은 전혀 없었다.

“사실 두 가지인데, 제 개인적 관심사이기도 해요. 하나는 요즘 많이 얘기되고 있지만, 지역의 입장에서 보면 지방화시대, 분권화 시대를 맞이해서 말 그대로 지방자치가 발전해야 되고, 시민들의 권리의식도 높아져야 하고, 거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지역주민 스스로가 바꿔나갈 수 있는, 그러니까 주민들이 지역운동과 지역발전의 주체가 되어야 되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시민단체들이 지역주민들을 주체로 내보낼 수 있는 자치운동, 풀뿌리운동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되어야 하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저희 단체도 그 분야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연대운동적 측면인데, 지금까지 연대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안에 대해서 그냥 여러 단체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도와주는 식의 연대운동이었잖아요. 지금의 운동은 개별단체들이 하는 활동이나 산술적으로 모으는 연대활동이라기보다는, 개념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메타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다시 말하면, 이런 개별 단체들이 산술적 합이 아니라 지역운동 자체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측면에서의 다양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라든가 물적 토대의 마련이라든가, 개별 단체가 못하는 지역의 시민운동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한 이런 것들을 만들어나가는 측면에서의 연대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지역이 갖고 있는 자산이나 인력이나 또는 경험이나 이런 것들이 연대의 힘으로 작용해서 시민사회단체가 보다 폭넓게 발전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무처장으로서 전체 활동을 조망해야 한다는 책임도 있지만, 특별히 주민자치운동의 강화와 연대활동의 새로운 모색이 박인규 처장의 관심 분야인 것 같다. 우선, 연대활동의 구체화된 상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예를 들면, 보다 원활한 파트너십의 형성이라든가, 시민사회 활동들을 잘 할 수 있거나 시민사회운동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 지원 장치와 토대의 마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개별 단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특정 사안을 가지고 연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역적 관심을 갖고 시민사회 활성화를 위한 나름대로의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래서 현재 존재하는 ‘인천시민연대’가 내부적으로 연대활동을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르면 내년 초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수 있고, 이는 곧 연대활동의 로드맵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대활동의 주요 내용 중에 파트너십은 어떤 형태로 구현될 수 있는지 물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꽤 깊었다.

“사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지역운동의 관점 때문일 수도 있고 사업 방식일 수도 있는데, 여전히 한 측면에 남아 있는 것은 지역운동진영이 행정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거든요. 그것을 깨야 하는데, 사실 그것도 선언한다고 깨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쩌면 접점을 만들려는 노력과 함께 사업을 만들어 나가면서 극복해나가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제가 보기에는, 지역의 입장에서 행정과 파트너십의 문제에 있어서는 중앙정부로 갈수록 훨씬 더 폭이 넓고 중앙정부의 공무원들의 마인드는 지역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중앙에서부터 광역 기초로 갈수록 덜 깨어 있거든요. 반비례해서. 지역에서 보더라도 광역시에 있는 공무원들은 깨어 있는데 구청 공무원들은 덜 깨어 있고, 동으로 내려가면 더 갑갑하고. 그런 것이 있어요. 아무래도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몇 년 전보다 공무원들도 더 많이 변했고 파트너십을 바라보는 시민단체의 입장도 유연해졌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을 하는 편이죠. 그런데 여기서 어려움이 있는 건 뭐냐면, 시민단체가 그런 부분을 잘 잡고 가야 한다고 보거든요. 어떻게 보면 시민단체의 불가피한 측면도 있긴 하지만, 시민단체가 행정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활동을 하잖아요. 사실 이게 과도해져서 공무원들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갔을 때 접점 찾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느끼거든요. 실제로 파트너십이라고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좀 더 깊어지고 신뢰가 생기고 이렇게 해서 마음이 터지는 건데, 제가 보기에는 아직은 행정과의 신뢰가 기초한 파트너십은 안 돼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중앙도 마찬가지고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측면에서 보게 되면 상대에 대한 이해와 이해에 기초한 협력, 시민운동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행정을 활용하거나, 뭔가를 획득하려고 하는,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마음에 안 들면 공격하고 마음에 들면 손 내밀고 하는 방식은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시민운동의 자기 표현방식도 파트너십을 놓고 보면 좀 더 유연하고 좀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해서 안 되면 물리력을 동원하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런 문제제기 방식도 단계를 밟아서 해나가고 합리적으로 출발해서 대안을 제시하고 하는 방식이 필요할 거라고 봐요. 파트너십이라고 하는 건 불가피한 시대 추세잖아요. 그런 시대적 추세를 슬기롭게 발맞춰야 하는데, 그냥 마지못해 하는 파트너십이라면 큰 발전이 없겠죠.”

그래서 박인규 처장은 이런 파트너십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보공개조례의 개정이나 시민참여조례 제정 등이 일상적이면서 능동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 지적한다. 두 번째 주민자치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사실 인천 지역은 주민자치센터 활동이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편이다. 모범적인 사례도 많이 나왔다. 이는 그 동안 인천참여자치연대가 공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그래서 현재 주민자치센터는 어디쯤에 있나요?

“처음에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하고 출발했던 것에 비해서는 평가는 만족스럽지 않죠. 그래서 한 측면에서는 주민자치센터가 실패했다, 그래서 무용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계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들이 직접 지역 현장에서 뛰시는 분들의 얘기를 듣고 보면, 그 분들이 한 가지 놓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지역 일에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고 관심을 갖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노력을 들인 만큼 성과가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4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조금씩 씨를 뿌린 것이 싹을 띄우고 있는 단계에 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발전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시기에 와 있다고 보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주 더디고 부족하고 생각만큼 즉시 발전하지 않지만 그런 사례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그래서 저희들도 매년 전국적으로 하는 박람회에 참여하곤 하는데,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많이 발굴되죠. 그런 면에서 지역운동의 위치가 폭넓게 넓어지고 있구나 하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죠. 그런데 그런 발전과 가능성이라고 하는 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발전된다고 보지 않아요. 예를 들면 그런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벽이라든가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보는 거죠.”

주민자치센터가 시민단체들이 생각하는 기대만큼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 자리 자리를 찾고 있다는 게 박인규 처장의 진단이다. 그 동안 씨앗을 뿌렸다면 이제는 조금씩 싹이 트는 과정이기 때문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민자치센터와 관련해서 인천참여자치연대의 중점 사업은 교육이다.

“저희가 주민자치센터와 관련해서 대표적으로 중점을 두고 하는 것은 교육사업이에요. 그리고 저희 주민자치운동본부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들은 대부분 주민자치센터 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시고요, 그래서 현장과 교육을 직접 연결해서 실제의 생생한 현장에서의 경험을 교육으로 실현을 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저희가 그 동안 활동 속에서 몇 군데 좋은 사례들을 만들어봤고, 그래서 이 분들이 지명도가 상당히 있어요. 전국적에서도 사례발표 요청이 많이 들어오죠. 구청과도 협력이 잘 되는 편이라서 작년부터 각 구 단위로, 동 단위로 순회 교육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성과는 많이 나오고 있다고 보고요, 교육의 내용을 좀 더 심화시켜서 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겠죠.”

교육은 강의 위주로 진행되지 않는다. 주민자치위원들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워크숍이 주요 교육의 방식이다. 크게는 주민자치위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주민자치센터의 실무자와 자원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으로 나뉜다. 어느 것이든 교육을 통한 네트워킹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교육의 노하우가 쌓여 있다. 이 분야에 있어서는 여타의 지역과 비교해도 월등하다고 박인규 처장은 말한다.
대화의 주제를 좀 더 근원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일전(서울여성플라자에서 진행되었던 “지역운동의 새로운 전략 찾기” 워크숍 때)에 잠시 동안 대화를 주고받았던 시민운동의 문제와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글쎄요.......우리 사회가 아직은 역동적인 것 같아요. 사실은 정치권의 흐름과 우리 사회는 반비례한다고 보는데, 이번에 총선 지나고 나서도 정치권에 대한 기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가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서잖아요. 그렇게 보면 사실 시민운동의 자기 역할은 많은 건데, 시민운동이 사회가 부패하지 않게 만드는 통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지속될 것이다, 다만 그런 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나갈 것이냐가 문제인데, 지난 번 워크숍에서 나왔지만 ‘대변형운동’이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결국 그런 통로 같은 역할을 정책적으로 잘 하는 역할은 상당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작년에 어느 워크숍에 갔더니 한 분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제는 참여의 시대에서 자치의 시대로 가야 한다”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저는 그 의미가 뭘까 생각을 해봤어요. 시민단체가 ‘참여’라는 말을 쓸 때, 시민들을 참여시켜야 된다고 하는 그런 목적의식성과 당위성이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잘 들여다보면 여전히 시민들을 대상화시키는 그런 사고와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시대에서 말 그대로 이제는 지역시민들이 스스로 주체가 돼서 자기 지역의 문제나 자기 마을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이런 시대로 가는 거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시민운동이나 지역운동이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지금 시기에서 시민운동이 발전해 가야할 방향이라고 생각하고요, 지금은 중심축이 조금씩 그 쪽으로 이동해 가고 있는 시점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지역운동의 입지가 커져야겠죠. 가능성이란 바로 이런 부분을 말하는 거고요, 또 하나는 알게 모르게 지역운동과 중앙운동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중앙운동은 패권성, 지역운동은 의존성이 있는 것 같아요.(이 대목에서 박인규 처장은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며, 적절한 표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싣는다. 단어 자체의 뜻보다는 그 단어가 내포한 의미를 이해하시길 바라며.) 그런 관계는 원칙적으로 파괴되어야 한다고 봐요. 이미 제가 보기엔 운동의 흐름 자체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 흐름에 놓여 있다고 보거든요. 또 한 가지. 우리 그런 표현 쓰잖아요. 사고는 세계적으로 하고 실천은 지역적으로 하라, 이미 지역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중앙이나 서울을 거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직접 더 넓은 세계를 보는 눈이 되어야 하는 거고, 세계적 흐름 같은 것들이 지역에서 자기 특성과 조건에 맞게 자기 사업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봐요. 그것은 시각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그렇게 변화해 가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지역운동의 자주성이 강조되어야 하고 준비되어야 하고, 실제로 운동하셔야 하는 분들이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역에서 풀뿌리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전국적인, 또는 세계적인 흐름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역의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생각하고 지역운동 하시는 분들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역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지역운동에서 그런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거죠.”

박인규 처장은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었다. ‘참여의 시대’에서 ‘자치의 시대’로 가야 한다는 것과 중앙운동과 지역운동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고, 이미 시민사회운동이 그러한 흐름에 놓여 있다고 본다. 중앙운동과 지역운동이 우열의 문제가 아니며, 각자 고유한 역할 속에서의 소통, 그리고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연대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자치의 시대’로 가야 한다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참여의 시대’가 왔는가? 그래서 물었다.

“참여하는 시대가 지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받아들이면 되고요, 즉 시민단체의 중점이 ‘자치’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시민단체 입장에서 본다면 ‘시민 없는 시민운동’을 많이 얘기하잖아요. 그것은 시민운동 활동에 시민들을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가, 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참여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중심으로 주민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잖아요. 대상으로 보는 거죠. 그런 것 보다는 이제는 시민단체들이 다가가서 그들이 주체화되고 주인공으로 서는데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라고 하는 관점으로 돌아가야 하나는 의미죠.”

주민이든 시민이든 그들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운동이든 사회든 주체로 서야 하고 그 일이 시민운동단체의 역할이라고 박인규 처장은 조심스럽게 얘기한다. 그래서 주민과 밀착된 프로그램을 더 정교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아이템을 어떻게 찾느냐가 저희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역시 주민들이 관심이 있는 것은 어느 특정 지역에서의 지역적 사안과 관련해서 본인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은 언제든지 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 사안을 떠나서 포괄적인 것으로 보면, 제일 관심이 있는 것은 역시 환경문제와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그것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역의 시민단체를 가만히 보면, 활동이 짜임새 있고 그래도 그나마 다른 단체들에 비해서 주민들이 재미있게 참여하고 잘 하는 걸 보면 교육과 환경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가 그런 것까지 접근하게 좀 그렇고........저희가 하는 활동 중에 지역복지운동이 그런 운동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아직은 너무 작은 일이라 소개해드리기엔 어렵고, 예를 들면 사회적 약자와 관련해서, 그 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봉사 활동이라든가, 이런 부분과 어떻게 매개시키고 소통할 것인가도 중요한 영역이거든요. 그런데 워낙 전통적으로 자원봉사 관련된 사업을 해온 곳이 있어서 저희가 주도적으로 하기엔 좀 그렇긴 한데, 여전히 사각지대는 있다고 봐요.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생각이에요.”

이 부분에 대해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지역운동의 새로운 전략을 찾는다면, 그것은 방식이 될 수도, 내용이 될 수도 있고, 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떤 전략이 고민될 수 있을까요?

“저는 지역운동, 특히 풀뿌리운동은 조금 세분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훨씬 더 밀착하는 수준이 높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영역을 크게 놓고 접근하게 되면 그만큼 그물코가 넓은 것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많은데, 바싹 조여서 갈 필요가 있겠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많이 나오고 있죠. 그 동안 지역운동이 시(市)로 접근하기도 하고 구로 접근했다가 동으로 접근하면서 점점 세분화되는 과정이라고 보거든요. 지금 발전의 수준은 동까지는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행정단위와도 연결되어 있기도 한데, 주민자치가 사실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세분화되어 접근되는 것은 중요할 것 같고요, 그 다음에 결국 지역운동이 발전되려면 지역주민들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가지일 것이라고 보는데, 하나는 직접 지역의 사안에 결합돼 들어가는 방식이 있을 것 같고, 아니면 좀 더 목적의식적으로 지역의 문제를 청산해 나가는 이런 것인데, 저희가 사실 교육사업에 주목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소규모 지역, 동 단위, 더 세분화해서 지역의 구체적인 문제나 이런 것들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그 분들이 자기 문제로 풀어가면서 주체의식을 느끼는, 그런 주체의식을 형성시켜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지역 밀착형 교육사업 등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첫 번째 얘기했던 지역의 사안이라고 하는 것이 발생하거나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분들이 제기하시면 결합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저희 단체도 별도로 ‘시민교육센터’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거든요. 주민들에게 밀착해 들어갈 수 있는 내용들을 만들고 교육방식도 고민하고 있어요. 구 단위에 순회하는 교육도 주민자치위원들이 대상이 되지만, 실제로 발굴되지 않은 지역의 인재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런 분들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를 주민자치는 일상적으로 고민해야 되겠죠. 제가 보기에는 주민자치위원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관료화되어 있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래서 자꾸 세대교체를 해줘야 하죠. 새로운 사람이 충원되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잖아요. 그런 분들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런 분들을 발굴하는 매개로서의 주민자치센터, 그리고 그와 연계해서 새로운 인자를 발굴하는 교육프로그램들을 많이 고민할 필요가 있겠죠.”

‘주민자치센터’ 활동은 인천참여자치연대의 이론․경험적 토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단견일지 모르겠지만, ‘자치’, ‘주민주체화’, ‘주민교육’ 등의 키워드가 ‘주민자치센터’ 활동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면 ‘주민자치센터’라는 구체적 공간에서의 활동은 인천참여자치연대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었다. 작은 지역에서 사례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엔 지역정치로 주제를 넘겼다. 2002년 지방선거에 참여한 적이 있다던데.......

“실은 2002년에 지역에서는 지방 선거과 관련해서 실험을 한 번 했어요. 지역에 있는 여러 단체가 중심이 돼서 시민후보를 발굴하고 지지하는, 그런 운동을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성공하지 못했죠. 대표적인 이유는 아무리 후보를 내고 뭘 한다하더라도, 지역시민들의 지지와 지역 활동 속에서 발굴된 지역 시민들과 끈끈하신 분들을 후보를 내놓지 않으면, 그 곳에 아무리 시민후보라고 하는 간판을 갖다 붙여도 그것은 냉정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희가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래서 2006년 선거는 그런 경험을 삼아서 잘 준비를 해볼 생각인데, 저희는 단체 내부적으로 후보 전술과 관련해서는 정해진 것은 없고요, 다만 지역적 공감대라고 하는 것이, 예전에는 선거 임박해서 갑작스럽게, 준비되지는 않았으면서도, 또 안 하면 뭔가 이상한 것 같고, 당위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말 그대로 잘 준비되는 것, 물론 후보 수가 적고 하더라도 확실하게 당선시킬 수 있는 후보를 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어요.”

아직 구체적인 단체 내부의 계획은 없지만 지역 차원에서 2002년을 반면교사로 삼자는 공감대는 있는 것 같다. 사실 인천의 지역운동단체들은 1대 때부터 지금까지 지역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늘 평가하는 자리에서는 반복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시민후보를 배출 시킨 이후가 문제였다.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것일까?

“근본적으로는 시민사회 쪽이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갖고 있는 지방자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거꾸로 얘기하면 지방의회나 지방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 것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치 않았던 것 않아요. 그것은 어쩌면 시민운동단체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물론 지역마다 편차는 있겠죠. 그러나 이 편차만 넘고 보면, 사실은 많은 단체들이 자기 단체 꾸려나가기 급급하거든요. 지방의회에 진출하고 지방자치단체로 진출하는 문제가 자기 단체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라고 하는 문제로 접근했을 때, 나 먹고 살기 바쁘고 우리 챙기기 바쁜데, 그것은 아직 내가 고민할 단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이런 인식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이게 정말 필요하고, 지역에서 내가 아는 내 단체 발전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발전이나 지방자치의 발전을 위해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하면서 힘을 다 모아보자, 이런 공감대가 확실하게 형성되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람을 발굴하고 그래서 선거 때도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할 텐데, 그런데 그런 필요성은 머리 속에서만 있고 구체적인 자기 운동이나 자기 단체의 실질적인 운동으로 와 닿지 않는 거죠. 그래서 조금 관심 있는 단체가 나서서 뛰는데, 굉장히 제한적이고 역량이 부치죠. 힘이 안 실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그런 부분에 대한 확실한 공감대가 필요하고, 그렇게만 되면 어느 단체나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설득해서 진출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과 계획이 필요한 거고, 그런 사람을 발굴해서 지방자치학교 같은 것을 시키고 그 다음에 지역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이런 현실에서의 지역주민들과 접촉면을 만들어주고 그 분이 성장할 수 있는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역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렇게 해서 나왔을 때, 당선 가능성도 높은 거죠. 또 그렇게 해서 진출시켜야 만이 그 분이 됐을 때도 자기 고향을 시민사회 쪽으로 생각을 하고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이런 관계가 형성이 되는 거고, 그런 관계가 형성되어야 만이 건강하고 올바른 관계가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런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그냥 나가니까 밀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식으로 당위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나가면 관계가 멀어지고 실패 가능성이 높은 거죠.”

박인규 처장은 현재가 그 정도의 수준과 위치에 있다고 판단한다. 일상적인 소통과 논의의 틀이 없다는 것이 많은 한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출발 단계에서부터 마음을 다잡는 것, 그리고 필요하다면 공유하고 조율하는 틀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좀 더 깊은 정치세력화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얘기한다.

“그 부분은 고민이 많이 되죠. 시민단체가 정치 세력화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재 두 가지 유형이 현재 있다고 봐요. 일단 민주노동당은 빼 놓고요. 그리고 지금 시도되고 있는 초록정치연대의 흐름이 있는 거고, 그리고 일본과 같은 지역정당의 흐름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시민사회운동진영이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고 봐요. 하나는 시민운동과 시민사회가 직접적으로 정치를 개입해서, 그것은 지역이든 중앙이든, 시민사회 요구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그런 전국적으로 시도가 있을 수 있겠죠. 또 하나는 지역적 요구인데, 상당 부분 정치색이 탈색되어 있는, 말 그대로 지역 시민들의 생활적 요구를 지역 차원에서 대변하고 해결할 수 있는 건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중앙정치와는 무관한 방식이 있다고 보는데, 지역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봐요. 그래서 시민운동이 여전히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고 하는 입장인데, 그런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성과 중앙정치 개입의 문제에 있어서는 제가 보기에는 애매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시각 자체는 중요하다고 보고요. 또 다른 측면에서, 시민운동적 가치와 담론, 그리고 그런 요구를 일정하게 대변하자는 요구가 있는데, 그것은 시민단체의 요구를 대변한다기 보다는 시민단체들이 표방하거다 적어도 시민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평균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 이 분들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 그래서 초록정치연대가 시민단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 부분은 구분되어야 하는 거고. 그래서 그런 정당적 요구나 그런 지향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의미로서의 그런 정치영역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게 제가 보기엔 녹색정당, 이런 거 아닙니까, 그래야 대중정당이 되는 거고. 거기에 시민단체들이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봐요. 그러나 시민단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은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거고, 그리고 지역으로 왔을 때는 워낙에 중앙정치의 폐해가 심하잖아요. 우리 같은 경우는 정당, 정파적으로 이리저리 찢어지고 선거 때마다 중앙정치 바라보다 선거를 싹쓸이 해버리고 이런 식으로 굉장히 과도적이거나 성숙하지 않은 이런 정치문화 때문에 생기는 지역적 문제는 그런 측면에서는 풀려야 되는데, 그래서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런 중앙 정치적 의미를 탈색한 지역 차원의 지역정당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부분도 필요하다고 보긴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떤 방향이 맞는지. 그런데 그런 요구가 있는 것 같고, 유효성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죠.......그런데 저희 지역은 아직은 초록정치연대와 관련된 지역정당적 고민보다는 민주노동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는 게 이런 부분들이 아직 남아 있죠.(웃음)”

이 부분은 사실, 이야기하기 쉽지 않은 부분일 것이다. ‘아직 잘 모르겠다.’라는 지적이 정확할지 모른다. 지역정당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충분히 공유하면서도, 인천참여자치연대가 선택하기엔 아직은 먼 거리에 있어 보인다. 결국 어떤 논의든, 또는 어떤 결정이든 지역적 상황을 고려한 전제에서 나와야 하며 그런 전제를 무시한 ‘개구리 도약’은 좀 공허해질 수 있다는 것이 박인규 처장의 생각인 듯싶다.

인천참여자치연대는 3년이 되기도 전에 인천지역에서 상당히 큰 비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인규 처장도 “실력은 없지만 자부심은 있다.”고 말할 정도로 단체의 조직력은 꽤 탄탄해 보인다. 언제나 그렇지만 활동 횟수가 늘어나고 규모가 커지면서 초심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후발주자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앞으로의 활약상을 기대해본다. 끝으로 단체 일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 또는 고민하는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에 대한 답으로 인터뷰를 마친다.

“주관적인 말씀을 드리면, 지역운동을 통해 지역사회를 활성화시키는 측면에서의 제 역할이 있다면 그런 것을 하고 싶고요, 개인적으로 몇 가지 아이템을 갖고 있긴 합니다만, 정리되지 않아서 여기서 얘기하는 좀 그렇고요, 다만 지역에서 논의하면서 실현시키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또 하나는 지역운동이 보다 세계적인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운동으로 발전해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 통로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를테면, 국제연대와 같이 지역에서 네트워킹 하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지역운동이 서울을 거쳐서 국제연대로 나가는 측면에서 지역은 소외되어 있다고 보거든요. 그 소외는 차이가 있는 건데, 전국조직을 가지고 있는 지역조직은 그런 소통의 망이 있는데, 말 그대로 지역에서 홀로 풀뿌리운동 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거든요. 그런 소통의 공간이 지역에도 필요하다고 보고, 그런 것은 저희 지역의 문제만은 아니겠죠. 어떻게 보면 그런 것을 잘 해줄 수 있는 전국 차원의 지원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죠. 그렇다고 남이 해준다고 기다릴 수 없는 거니까, 자기가 목마른 것을 자기가 물을 찾아야 하니까. 뭐, 그런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죠.”

※ 인천참여자치연대 홈페이지는 http://www.inspa.org/입니다.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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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고개. 서대문에 어떤 일이?" - 서대문구립어린이집의 경우
인터뷰 : 서정순(서대문구 고은어린이집 운영위원)

※ 이번 지역운동사례는 서대문구 구립어린이집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을 집약했습니다.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서정순 씨와의 긴 대화 내용을 이 짧은 지면에 다 실을 수 없을 것이나, 현재 보육문제가 이슈화된 지역이나 보육을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워낙에 필력이 일천한지라 훌륭한 내용을 제대로 글로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혹여 더 자세한 내용을 필요로 하는 분이 있다면 연락을 주십시오. 서정순 씨의 연락처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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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의 계절이다. 평소 접하기 힘든 자료를 쉽게 구해볼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이 보내준 ‘국공립 보육시설 관리․지도감독 내용’을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1년에 한 두 차례 국공립시설의 운영실태를 조사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003년, 전국 770여 개의 시설을 조사한 자료였다. 눈으로 대충 훑어보면서 느낀 점은 ‘아, 이래서 보육시설에 대한 불신은 없어지지 않는구나!’였다. 회계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례는 수두룩하고, 정원초과는 이미 관례화 된 것처럼 보인다. 인건비 과다 신청, 안전관리 불감증, 잡부금 과다 수납 등등은 만연된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서대문구의 한 국공립 시설장이 개인명의 휴대폰 이용료를 공과금으로 114만원을 처리한 대목에서는 허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유통기간이 지난 부식을 냉장고에 그대로 보관한 사례나 식단과 부식구매내역이 일치 하지 않는 사례 등을 보면서 도대체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까지 고려한다면 그 뿌리의 깊이가 어디까지 뻗혀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불신이 더 깊은 민간시설의 경우는?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는 부모가 있다면, 이 글을 읽어보시라. 그리고 내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건강하게 운영되는지 판단해보시라. ‘보육’이라는 얘기만 꺼내도 한 숨부터 나오는 것이 우리나라 보육의 현실이다. 보육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지 오래고, 덩달아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위탁하면서 자연스레 부모의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보육시설 운영에 불만이 있어도 관계자에게 불만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다. 내 아이에게만 부당한 처우가 돌아갈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시간 쪼개기 버거운 맞벌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최근, 출산율 저하와 맞물려 보육예산 확충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다양한 보육정책이 정부기관을 중심으로 제시되고 있는 현상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봇물처럼 터지는 보육정책과 현장에서 느끼는 부모들의 체감온도와의 간극을 좁힐지는 미지수다. 여전히 예산과 담당 공무원은 한정되어 있고 시설 관계자와 부모와의 소통구조가 부재하며 시민들의 참여가 배제됨으로써 보육의 공공성은 전근대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 국공립시설의 썩은 부위부터 도려냄으로써 보육의 공공성을 새롭게 재편성해야 한다는 부모들의 목소리가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의 그런 목소리가 실천이 되어 잔잔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있다. 서대문구 구립시설의 경우가 그러하다. 서대문구에는 16개의 구립시설이 있다. 16개의 시설에는 모두 시설운영위원이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운영위원회 연대체도 꾸려져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운영위원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전 정보가 필요하다. 지난 2000년 말. 서대문구 홍제2동구립어린이집의 한 교사가 이 시설에서 벌어졌던 각종 비리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제보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게 된다. 시설장의 공금 횡령과 유용은 물론이고 지하 식당 모퉁이에 설치된 열악한 영아 방, 개인적이 용무까지 교사에게 시키는 일은 다반사고 과다한 잡부금 징수, 회계관리 부정 등 온갖 비리를 총망라한 서글픈 현실이 그 제보 속에 실려 있었다. 부모들이 동요한 건 당연지사. 그러나 시설장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꿈쩍도 하지 않았고 2년여 동안 갈등은 지속되었다. 행정부도 뒤늦게 진화하기 위해 부랴부랴 해결책을 모색하다, 결국 2003년 9월, 서대문구 보유조례를 손을 보게 된다. 이 조례 제14조는 구립보육시설에 운영위원회를 설치하게 하고, 학부모(3인 이상), 교사, 시설장 등 7인 이내로 구성토록 하였다. 월간 회계보고 및 심의, 예․결산 보고 및 심의, 주요사업 계획 심의 및 평가 등을 운영위원회가 심의․의결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16개의 구립시설은 어찌할 도리 없이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형식적으로는 시민참여를 보장하게 된다. 여기까지 사전정보. 자, 그럼 스무고개를 넘어보자.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서정순 씨다. 서정순 씨는 고은구립어린이집 운영위원이면서 ‘서대문구립어린이집운영위원연대’의 공동대표이기도 하고 서대문 보육위원회 부모대표이기도 하다. 물론 본업은 따로 있다. 이화여대 여성학 석사를 수료했고, 지금은 논문을 쓰는 학생이다. 서정순 씨는 현재 서대문구 구립 어린이집 운영위원회를 활성화시킨 장본인이다. 홍제2동 사건이 한참 불거졌을 당시, 아이를 출산한 서정순 씨는 남동생 내외가 살고 있는 서대문구로 이사를 오게 된다. 아이가 돌이 되었을 즈음, 조카가 다니는 고은구립어린이집을 선택, 아이를 위탁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정순 씨의 험란한 여정은 시작된다. 그 동안 서대문구 구립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의 입을 통해 들어보도록 하자.

“.......아이를 어디에 맡길까 고민하다 고은어린이집을 선택해서 갔어요. 아이를 맡기면서 사소한 문제가 눈에 띄긴 했었는데 워낙 저도 바쁘고 해서 미루고 있었다가, 대학교를 수료하고 나서 2002년 12월, 어린이집에서 다음 해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한 거예요. 학부모에게 어린이집의 운영방식에 대한 설명하는 자리였어요. 어린이집을 홍보하는 것도 있었고.......그런데 제가 의아해했던 것은, 사실 어린이집에서 특별활동비나 이런 일채의 잡부금을 못 받게 되어 있어요. 보육위원회에서 승인한 것이 8만원이에요. 승인 한도 내에서만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현실하고 맞지 않으니까, 부모님들의 동의나 승인이 있으면 묵인을 해주는 그런 관행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오리엔테이션 자리가 부모들의 동의나 승인을 얻기 위한 자리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설장이 이야기하길, 과학 과목이 지금까지 10,000원을 받았는데, 물가도 많이 올랐고, 내년부터는 20,000원 하죠,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딱 제안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학부형들이 아무도 문제제기를 못해요. 한 30명 정도 모였을 거예요. 질문이라든지 건의라든지, 완전히 침묵한 상태였죠. 그리고 원장과 주임 교사가 일방적으로 얘기하고. 그리고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현장학습을 굉장히 자주 갔어요. 그 이유는, 물론 아이들은 좋아하는데, 굉장히 돈을 많이 받는 거예요. 그런 내역을 공개한 적도 없고. 가장 쉽게 돈을 빼돌리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그러더라고요. 현장학습 가면 전문 사진사가 따라 붙어서 무조건 사진을 찍어요. 그래서 사진 값을 장당 2-3,000원씩 받아요. 제가 생각할 때, 아이들 숫자가 많아서 돈이 많이 남을 것 같아요.......이런 부당한 사례는 어느 어린이집에서 지금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래요.......그런데 정말 형편없이 찍은 사진도 일방적으로 구매해야 하니까 부모들은 기분 나쁜 일이거든요.......제가 시설장들을 인터뷰해봤는데, 원장들의 말은 워낙 운영이 어렵다보니까 남는 돈 가지고 교사들 회식 시켜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것이 부모와 합의가 되어 있다면 사실 부모들이 자기 아이 위하는 마음에서 이런 것이 합의가 되어 있다면 더 해 줄 수 있는 건데, 방식이 문제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① 오리엔테이션은 부모와 소통하기 위한 행사가 아니라 잡부금을 더 많이 징수하기 위한 합리화의 과정이 될 수 있다 ② 시설장의 입장에서 부수입을 더 올리기 위해서는 현장학습을 자주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③ 어린이집에서 구입한 사진 인화비가 과다하다고 생각된다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시설장이 그러더라고요. ‘현장학습만 되면 빠지는 아이들이 있나본데, 자꾸 빠질 경우 내가 그 아이들을 퇴원 시키겠다’라며 엄포를 놓더라고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현장학습이 부담이 되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에 안 보낼 거 아니에요? 그런데 시설장은 현장학습을 안 보내는 부모들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더라고요. 아무튼 제가 그것 때문에 크게 충격을 받았어요.......아무튼 그 동안 저는 간식 때문에 불만이 있었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영아에 대해서 910원의 간식비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간식을 매일 싸오라고 하는 거예요. 매일매일. 한번쯤 안 싸오면 왜 안 싸오냐, 싸와라, 그래서 가보면 그 간식을, 안 싸오는 아이들과 나눠먹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별도의 간식이 나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우유는 기본이고, 빵과 치즈라든지, 요플레, 이런 것을 매일매일 싸서 보내야 되고, 그리고 물휴지 한 달에 두 개, 사각 티슈 3개, 이런 게 정해져 있어요. 기저귀는 기본이고. 그런데 영아는 보육료도 비싸잖아요. 그리고 유아에 비해서 국가의 지원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영아 교사는 인건비 90% 지원이고 유아는 45% 지원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매우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 거죠.......우리는 두 남매가 한 동에 살면서 아이를 데리러 가는데, 저나 남동생 부부, 그리고 할머니가 있거든요. 이렇게 번갈아 돌아가면서 데려오니까 목격을 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시간대도 달리하면서. 그러니까 많이 보게 되고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고. 그리고 이것을 공유하게 되고. 그래서 유일하게 제가 손을 들고 급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어요. 될 수 있으면 제 철 음식을 먹였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인스턴트식품보다는, 감자나 고구마 등을 먹였으면 좋겠다 등등.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너무 딴 판이었어요. ‘우리는 다 먹이고 있다’ 이미 답이 다 준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④ 시설장의 힘은 막강하므로 눈 밖에 나는 행동은 자제 하시라. 강제 퇴원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⑤ 아이에게 매일 간식을 요구하는 보육시설이 있다면 한번쯤 의심해 보라. 910원의 간식비가 도대체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지.

“제가 질문한 다음 바로 호출 당했습니다. 시설장이 부르더라고요. 그리고 아주 많은 훈계를 했어요. 그 때 받은 모멸감을 생각하면.......그래서 그 시점에 그 동안에 느꼈던 불합리와 저 개인적인 분노가 결합된 거죠. 이런 것이 없었으면 제가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았을지 모르는데.(웃음) 그때부터 이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막연하게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들을 다 확인하니까 이건 너무 크게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민원을 넣었죠. 그리고 부모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그 당시에 제가 명함이 있었는데, 명함을 다 뿌리면서, 부모들의 연락처를 다 받아 적었어요. 그 때 힘들더라고요. 길거리에 서가지고. 눈치도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몇 몇 사람이 1-2주 후에 바로 호응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집에서 첫 모임을 가졌어요. 일단 이 문제는 해결해보자 하는 취지에서.”

⑥ 시설장에게 함부로 덤비지 마라. 바로 호출당할 우려가 있다 ⑦ 그리고 엄청난 모멸감을 줄 수도 있다. 인내심을 길러라.

부모들이 회동한다는 소문이 시설장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다. 시설장과 주임교사가 음료수를 사들고 한 밤 중에 서정순 씨 집을 찾아왔다. 모든 건의사항을 수용하겠다며 읍소를 했다고 한다. 시설장은 서정순 씨가 구청에 민원을 제기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설장의 남편이 서대문구 사회복지과장을 지낸 공무원이었다. 정말 웃기는 짬뽕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이런 식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 ⑧ 지방자치단체에 민원을 제기할 때 지방자치단체는 개인의 정보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버려라. 보호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⑨ 지역의 기득권 세력은 이미 노른자위를 다 그런 식으로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저희가 모임을 갖고 운영위원회를 새로 꾸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바로 그 주에 전체 부모가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어요. 그때부터 시설장은 직장, 집 다 찾아다니면서 자기 도와달라면서 부모들에게 하소연 한 거예요. 부모들은 대부분이 모르고 있던 상태였죠. 대여섯 밖에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는데.......그런데 거기서 우리의 목적이 끝장났어요.......”

그 날의 정황을 간략히 추리면 이렇다. 전체 학부모 모임에 70명 이상의 부모가 찾아왔다. 정원이 89명인 점을 감안하면 역사상 학부모들이 가장 많이 모인 자리였다. 시설장은 미리 정지작업을 통해 자신을 지원사격해 줄 수 있는 부모들을 모았고, 그 사람들에 의해 모임 분위기는 일방적으로 흘렀다. 어려운 사정에서도 시설장은 얼마나 훌륭하게 운영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불만이 있으면 당장 나가라!! 이런 시시콜콜한 문제로 왜 바쁜 부모들을 오라고 했냐? 빨리 결정하고 끝내자!! 시설장의 완승이었다. 모든 결정 사항을 거수로 결정했고, 한 두 표를 제외하고 시설장이 몰표를 받았다. 친절하게도 시설장은 이런 장면을 비디오로 담아 놓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그런 분위기에서 논리정연하게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무튼 서정순 씨와 몇 몇 모임에 참여했던 부모들의 목적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배울 점. ⑩ 보육시설에 문제가 있다면 섣불리 나서지 마라. 철저하고 정교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⑪ 전체 학부모 모임을 갖는다면 자유롭게 의견을 교류할 수 있는 제3의 장소를 선택하라. 보육시설은 학부모를 주눅들게 한다.

“.......그 이후로도 여러 통로는 통해 보육과 관련된 자료를 수소문했어요. 종로, 영등포, 성북, 이런 데를 연락 닿는 데로 다 알아봤어요. 우리 구에서 문제 되는 것이 여덟 가지 항목 중에 재원비라는 것을 매년 연초에 3만 원씩 받았어요. 아무 법적 근거가 없는 건데. 재원비란 계속 다니기 때문에 내는 돈이에요. 부모가 부담해야 하는 것은 상해보험료, 그게 한 7,000원 내지 많아봤자 10,000이내거든요. 그리고 입학금이 있어요. 50,000원, 거기에 가방이라든지 이런 게 포함되어 있는 거고. 제기 기가 막혔던 것은 매달 10,000원씩 재료비를 받더라고요. 그게 한 학기 60,000원이죠. 재료비의 명목이 뭐냐면, 풀, 가위, 색종이 이런 거를 산다는 거예요.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학기 초에 받는 게 정상이죠. 6개월에 10,000원이면 떡을 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학기가 끝나면 다시 돌려주고요. 그런데 여기는 만 2세부터 매월 10,000원씩 받는 거예요. 그것도 다 투표에 부쳤다는 거 아닙니까.(웃음)......어쨌든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는 일단 끝까지 버티겠다는 결심으로 시작을 했는데, 일단 나가면 문제제기를 못 하잖아요. 그래서 얼마나 바뀌는지 두고 보겠다고 2월을 버티다가 결국 2003년 2월까지 있다가 퇴원해버렸어요.(웃음)”

시설장의 눈 밖에 난 것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 시설에서 퇴원했고 아이를 맡아서 돌보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 순간에도 서정순 씨는 계속 관심의 끈은 놓지 않았고 보육시설을 중심으로 여러 정황이 변화되고 있었다. 참, 여기서도 명심해야 할 대목. ⑫ 아이를 위탁하는 시설에서 재원비를 받는다면 이 비용의 사용처를 의심해봐라. ⑬ 마찬가지로 매달 납부하는 재료비가 있다면 의심해볼지어다.

“......그 이후에도 엄마들이 저에게 연락은 했어요. 그래도 간식은 좀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재원비의 경우도 구에서 부모에게 돌려주라는 시행을 내렸는데, 흐지부지 됐고.......그러니까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가 됐던 거죠. 우리 조카가 계속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다 알고 있었던 거죠.......그렇게 지내다 연락이 왔어요. 올 2월 달에. 다른 곳으로 위탁체가 바뀌었다고.......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원장이 바뀌고 과정에 횡령이 인정돼서 700만원을 환수했다고 하더라고요. 드러난 것만 700만원이죠.......아무튼 저는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아 이제는 기회가 왔다(웃음), 나는 아이가 안 다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만, 당시 학부모 모임을 가질 때 제게 공격했던 한 엄마가 마음을 바꿔 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더라고요. 그 사람이 생각이 바뀐 거죠.”

위탁체가 바뀌고 3월 달에 서정순 씨는 아이를 다시 맡길 수 있었다. 딱 1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꼬일 대로 꼬인 실타래를 풀어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매듭은 워낙 복잡해서 쉽게 풀리지 않았다. 위탁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났고, 새로운 위탁체 총무와 기존 교사들 간의 갈등이 첨예화되었고, 부모들 사이에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부모들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총무와 주임을 비롯해 교사, 구의원, 전 시설장 등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완전히 정치축소판이었다. 아무튼 서정순 씨는 다시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면서 부모 모임 활동을 재개하였다. 물론 여기서도 교훈이 있다. ⑭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하지 말지어다. ‘시민’의 자격은 그냥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참여, 그리고 실천이 뒤따를 때 가능한 것이다. 그것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그 때 저는 다른 주제를 가지고 한참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학교는 매일 왔지만 마음은 그 쪽에 있었어요. 우선 행동했던 것은 카페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기본적인 정보교류와 부모들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죠.......카페를 만든 다음에 계속 부모들에게 알려나가는 작업, 오고가는 사람들 붙잡고, 연락처 주고받고, 메일 주고받으면서 모이기 시작했어요. 20명, 30명, 이런 식으로. 저는 학교는 나왔으나 거의 공부는 못하고 거기에만 온 신경을 다 쏟았죠. 그리고 밤에는 인터넷을 뒤지고. 그래서 그 때 모였던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위원 다섯 명을 뽑았어요. 그리고 그 전에 잘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도 자원을 하기도 해서 구성원들이 잘 뽑혔어요.......서대문구 조례상에는 구성원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7인 이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율적인 구성을 하면 되요.”

⑮ 부모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통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⑯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구조는 시설운영위원회이다. 시설운영위원회를 제대로 뽑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게 하다가 총회를 개최했어요. 우리가 이미 겪은 바가 있기 때문에 준비를 철저히 했어요.......이번에는 반드시 부모들만의 모임을 보장해라, 교사들은 내려가 있고, 하여튼 얼마나 이거 하나를 짜려고 머리를 썼는지 몰라요. 거의 잠을 못 잤어요.(웃음) 그리고 총무가 자기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저희에게 부모들의 연락처를 줬어요. 제일 큰 문제가 연락처를 못 받는 거거든요. 그 동안 사생활 침해다, 개인정보 공개위반이다 운운하면서 연락처를 안 줬거든요. 그렇게 해서 20-30분씩 전화 붙들고 설득하고 해서 총회를 개최했죠. 그런데 그 때 교사들이 유통기간이 지난 사과를 보여주면서 급식구매 과정의 문제점을 폭로한 거예요. 거의 사료용 낙과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엄마들, 할머니들이 분노했죠.”

그 과정도 복잡하므로 짧게 요약하면, 재위탁 과정에서 문제점이 들어나면서 운영위에서는 다시 위탁의 절차를 밝기로 결정하고 위탁체 모집 공고를 내보낸다. 그렇게 해서 바뀐 곳이 지금의 은초롱사회복지법인이다. 그 시점이 올 4월이다.

“......그런 와중에 부모 대표 보육위원은 없는 상태였어요.......구청장 면담을 하면서 두 가지를 요구했어요. 보육위원회에 학부모 대표를 3인 이상 또는 5인 이상으로 제안했고, 그리고 구립운영위원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니 만들어달라, 했더니 이런 것을 구청장이 흔쾌히 받아들였어요.......그렇게 답변은 했는데, 이 공무원들은 맨날 바쁘다고 하면서 매일 미루는 거예요. 보육위원 재위촉 하는 문제도 그렇고, 연대체를 꾸리고 싶어도 연락처도 없고. 어느 정도 시설장의 도움이 있다거나 장보가 있으면 되는데, 전화를 몇 번을 해도 말을 안 들어요. 연락처 받는 것이 그렇게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보육위원회의 교사대표와 학부모 대표를 시설연합회 회장한테 위임을 한 것예요. 시설장을 견제하기 위해 부모가 들어가는 건데, 시설장의 추천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거죠. 이건 말도 안 된다고 강력하게 항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이 그렇게 한 거에요. 그래서 각 시설에 다 보냈겠죠. 보육위원 신청을 하라고. 그런데 우리 어린이집만 빼놓고 다 돌린 거예요. 참 웃기는 거죠.(웃음)”

이런 과정이 알려지자 부모들이 항의하게 된다. 그랬더니 바로 추천서가 왔고, 올 4월26일 자로 서정순 씨가 서대문구 보육위원으로 위촉된 것이다. 평번한 주부가 보육위원이 된다는 건 정말 힘든 과정인 것 같다. 그를 지지해줄 조직이 없다면 말이다. ⑰ 보육위원 위촉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⑱ 시설운영위원회 연대체는 많은 정보를 교류할 수 있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각 지역에서 고민해보시길.

“......지금은 정말로 많이 바뀌었죠. 저희가 국공립시설 평가하면서 봤더니 시설 면에서 없던 시설, 가전제품이 다 들어왔죠. 엄청 바뀌었죠. 그리고 우리 어린이집 시설장의 경우는 마인드도 많이 바뀌었어요. 교사들 보수교육을 계속 보내고, 그리고 별도의 특별활동비 없이 자체 내에서 해결하고, 정원 지켜주고, 재원비 같은 것도 시정됐죠.”

학부모, 구체적으로 엄마들의 고된 투쟁은 단순히 시설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보육 제도, 보육에 대한 인식 변화를 복합적으로 이끌어내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좌절했더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느 때보다 보람 있는 일이다. 내 삶의 문제를 내가 해결했다는 것만큼 보람찬 일이 또 있을까? ⑲ 참여는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런 것이 진짜 운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것이 풀뿌리운동이구나 생활정치구나 하는 것을 몸소 체험을 한 거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평범한 아줌마들도 그런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교육을 시키면 배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그걸 해줄 마땅한 곳이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시설운영위원회에 대한 교육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요.......부모들에게 참여 공간을 만들어주면 대부분 관심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근처 신촌에 한 어린이집이 있는데, 여기는 진짜 장사하시는 분이 많거든요. 그런데, 부모 총회에 90% 이상이 참여한대요. 그렇게 강제력을 부여하면 월차라도 내서 오는 거예요. 저는 시설장의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해요.......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교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부모참여에 대한 프로그램은 계속 만들어서 부모들끼리 서로 교류하게 하고, 이런 기반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들려는 어떤 마인드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이 전혀 없고 무조건 운영위원회 시키려고 하면 부모들은 당연히 운영위원회는 돈 있고 시간 있는 사람만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존의 관념대로. 그럼 부담스러워하니까 안 하려고 하고 입장이 사실 난처할 수 있잖아요.”

장시간의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현재, 이전에 야기됐던 서대문구 구립시설의 문제점들은 상당 부분 해결된 상태다. 무엇보다 시설운영에 대한 주도권이 운영위원회, 즉 학부모들에게 주어져 있다. 복잡하게 엉킨 매듭이 풀리면서, 건강하고 튼튼하게 새로운 매듭을 지어야 할 시점이다. 이전의 소중한 경험들-투쟁의 경험들이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들과의 유대관계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16개의 구립시설 운영위원들이 뭉쳐 있다. 행정부든, 시설장 연합회든 구립시설을 쥐락펴락 하진 못한다. 상황이 그렇게 바뀌었다. 건강한 보육환경을 만드는데 있어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원점이기에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그것이 서정순 씨를 비롯한 운영위원들의 고민일 것이다. 보육문제가 나라를 들쑤시고 있는 이 때, 그들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보육환경을, 시설장과 교사가 제시하지 못한 보육의 대안을, 최후의 보루 학부모들이 나서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제도보다, 시설 관계자의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라는 것을 서대문구 구립시설의 학부모들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서대문구의 경험이 더욱 발전되길 희망해본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서대문구의 경험이 스며들었으면 한다. 끝으로, 이런 경험이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물었고, 그의 대답으로 오늘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저의 잠재력을 발견한 거죠. 그리고 어떤 변화가 눈에 바로 바로 보이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었죠. 특히 엄마들과의 교류가 소중했어요. 거의 한 달에 두세 번까지 주말이나 쉬는 날 놀러 가거든요. 각종 여성단체 행사라든지 보육행사 이런 거 있잖아요. 무료로 참석하고 프로그램 질은 굉장히 좋은, 그런 내용을 계속 카페에 올리는 일들. 그러니까 이런 생활정치에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전제가 친하게 지내는 거잖아요.......그런데 그게 뭐, 저희 희생이 아니라 우리 아이가 좋아하고 나한테도 즐거운 경험이기 때문에 좋은 거죠.”

⑳ 참여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고 즐거움을 선사한다.
(2005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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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변한다"-'푸른시민연대'를 찾아
인터뷰 : 서화진 사무국장/ 문종석 대표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다고들 한다. 지난 96년, 한 세기 동안 최대의 산불로 기록된 강원도 고성 산불. 8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새로운 생명의 잉태로 산불의 자취도, 산불의 기억도 서서히 잊혀질 만큼, 세월은 그 날의 상처를 아련한 기억 속으로 덮어버렸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그뿐인가? 인간의 포크레인도 변화를 이끈다.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만들고, 콘크리트를 우뚝 세우고, 하천을 덮어버린다. 그래서 5년이면 강산 하나가 없어진다. 자연적인 변화든, 인위적인 변하든 그렇게 강산은 변해간다.

10만 명의 사람들이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목이 터져라 외친다. “북한 김정일이 원자폭탄과 미사일을 내세워 어느 순간 대한민국을 불바다”로 날려버린다며, 한 손에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행정수도 이전 반대’라는 피켓과 미국의 ‘성조기’를 들고 “존경하는 부시 대통령과 미합중국의 하나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길 기도하자”며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의 마음을 온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그 날의 어르신들은 냉전시대의 사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뫼비우스 띠를 돌고 있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10년이면 모두 변하는데 왜 인간의 사고는 변하지 않을까?

동대문구 이문동에는 ‘푸른시민연대’라는 단체가 있다. 지난 94년, ‘진보정치연합’이라는 정치조직 내에서 ‘어머니 학교’를 처음 시작했으니, 올해가 벌써 만 10년이 지나는 시점이다. 10년 간 묵묵히 지역운동을 지켜온 것이다. 문종석 대표, 서화진 사무국장 모두 ‘푸른시민연대’의 태생에서부터 지금까지 동고동락을 해왔던 푸른시민연대의 파수꾼이다. 강산이 변했다는 10년. 그러나 사람의 변화는 더딘 10년. 그들을 만나 10년의 지역운동에 대해 들어보자.

먼저 ‘푸른시민연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물었다.

“그 전에는 진보정치연합이라는 단체로 있었어요. 94년도에 지역 대중 사업의 일환으로 ‘어머니 학교’사업을 했었는데, 그 때 당시에는 ‘어머니 학교’ 사업을 별도의 독립기관으로 특화해서 ‘주민문화센터’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죠. 그렇게 사업을 진행하다가 97년도에 서로 분리가 됐어요. 기존의 정당운동 했던 분들과 지역이나 시민운동을 방향으로 잡았던 분들이 분리가 됐는데 그 때부터 ‘푸른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됐죠.......정당운동을 선택했던 분들은 민주노동당으로 바뀌어간 거고, 저희는 ‘푸른시민연대’로 활동해왔어요. 94년도부터 ‘어머니 학교’를 쭉 운영했고, 98년도부터 이주노동자 사업을, 그리고 2000년도에 들어와서 ‘작은권리찾기운동’을 시작했어요, 2000년에 구청장의 판공비 공개운동을 시작하면서 참여연대가 서울 지역의 구청장을 대상으로, 저희가 동대문구청을 대상으로 소송을 벌였는데, 그게 바탕이 돼 지금의 ‘작은권리찾기운동’이란 사업의 형태로 남아 있게 된 거죠.”

‘진보정치연합’이라는 정치조직 내에서 ‘어머니 학교’라는 지역사업을 진행했던 팀들이 97년 조직이 분리되면서 그 때부터 ‘푸른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 서화진 국장의 요지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얘기해서, ‘푸른시민연대’만을 놓고 본다면 만 7년을 넘긴 셈이고, 사업의 성격을 놓고 봤을 때는 10년을 넘긴 셈이다. 서화진 국장이나 문종석 대표의 경우가 ‘진보정치연합’ 시절부터 ‘어머니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을 토대로 한 시민운동을 해왔다고 보면, ‘푸른시민연대’의 역사를 10년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서화진 국장에게 분리될 당시의 배경에 대해 다시 물었다.

“저는 그 때 제일 막내였어요. 그러니까 정당운동이나 이런 것에 동의하지만 오히려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지역주민을 직접적으로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일이 필요하다, 그런 일이 사회 전체운동이나 시민사회가 성장해나가는 부분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어머니 학교’사업이 영향을 미쳤죠. ‘어머니 학교’에 나오시는 분들은 비문해자 주민들이죠. 사실은 교육 혜택을 가장 받지 못하신 분들이고 교육의 측면에서 봤을 때 소외받는 분들이죠. 그리고 애초에 지역운동을 시작했을 때 지역주민 중에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분들이 여성이라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소외 받고 있는 사람들에 포커스를 맞추다보니까 ‘어머니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지역에 여러 가지 활동이나 사업을 만들어내려고 했었고 지금까지 쭉 활동을 하고 있죠.”

‘어머니 학교’가 ‘푸른시민연대’의 대표 활동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머니 학교’를 거쳐 가신 분들은 1년에 60에서 70명 선. 지난 10년 동안 총수를 합치면 800명가량 된다.

“교육 과정이 있긴 있어요. 어머니들한테도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긴 한데, 지속적이라고 보시면 되요. 교육과정은 초급, 중급, 고급 등으로 나눠요. 어머니들은 고급과정이 끝나도 학생들처럼 단계가 끝나면 완전히 습득한다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오시기도 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탈락하시는 분들도 계시죠.......수업은 한글, 산수, 영어기초, 이렇게 진행을 하고요,
그 외에 주목할 것은 저희 어머니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기관에 자원봉사를 나가세요. 최근에 만들어진 활동들인데, 애초에 저희들이 목표로 했던 것도 나중에 어머니들이 여기서 한글을 배우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들이 또 다른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이곳에서 사회적 약자 분들과 관련해서도 어머니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선거 있을 당시에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어떻게 훌륭하게 일을 진행하는가, 이런 것들도 토론하기도 하죠.”

민간단체나 연구기관에서는 성인 인구의 약 25% 정도가 비문해자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한 자리 수치라고 발표하기도 하지만, 그 통계가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설문조사 자체가 매우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간 ‘어머니 학교’를 꾸준히 찾는 주민들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교육으로부터 소외받아왔던, 또는 여전히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운동의 경험이라고 서화진 국장은 말한다.

“‘어머니 학교’를 처음에 시작할 단계에는 포부가 상당히 컸어요. 그 때에는 한글교육 자체에 목표를 두었다기보다 주민조직화라는 부분, 실제로 지역에서 요즘 많이 하고 있는 생협이나 의정감시단처럼 지역 주민들 중에 활동이 활발한 주부들,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연계하는 것까지가 목표였어요. 그런데 일단 글을 잘 모르시고, 그 단계까지 나아가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 인식의 차원에서도 정치의식이 높지 않고, 실제로 어떤 기능적인 차원에서도 그것을 수행하는 게 어려운 거죠. 그게 사실은 아쉽고 어렵고, 왜냐하면 처음 시작할 때는 그 정도까지 목표를 세웠으니까. 그런 안타까움이 있죠.......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사실은 50년, 60년을 나와 가족만 알고 사셨거든요. 더군다나 당당하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 위축돼서 살아오셨거든요. 가족들한테도 한글을 모른다는 것을 숨기고 오신 분들도 많이 있고, 그래서 그런 삶 자체가 남 앞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거죠. 그래서 그것 자체가 한계라는 생각을 들고 그리고 일정정도 포기한 부분도 있고, 오히려 이 분들과는 지역에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본다면 아주 작은 부분, 이를테면 어머니 학교 내에서 어머니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몇 가지 시도는 앞으로도 더 해봐야죠”

10년간 키워온 ‘어머니 학교’에 대한 애정은 남다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움도 있다고 서화진 국장은 솔직히 말한다. 애초의 목표한 바가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어머니들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던 점은 매우 큰 소득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들의 조건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조직화라는 목표는 공허할 뿐이다. 그래서 조금씩 변하는 것에 커다란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푸른시민연대’가 희망하는 목표는 더불어 살아가는 지역공동체 만들기다. 그것을 위한 전략이 어떤 것이 있는지 물었다.

“전략이라기보다는 일단 저희들 생각은 그런 거거든요. 어쨌든 어머니들도 지역주민이고 소외 받고 있는 분들도 계시고 그 외에도 지역복지 차원에서 주민 복지나 삶의 질의 문제 등을 통해 우리가 개입할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지역주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까지는 많이 존재하고 있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다른 단체에서는 방과후 교실 등을 하고 있잖아요. 그게 조금 더 발전을 하면 생협이나 또 다른 활동으로 진행될 수도 있죠, 아니면 최근에 각 구청에서 운영하는 자원봉사센터가 있는데, 잘 되는 곳에는 민간위탁을 받아서 하기도 해요, 그런 것처럼 지역에서 참여라고 하는 것이 일상화될 수 있고, 그렇게 해야지 만이 네트워크도 상시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지 권력관계도 작용할 수 있고요. 물론 그 분야에서 특별하게 기울이는 노력들도 있어야 되고 지속적으로 관심 갖고 해야 되겠지요. 저희가 앞으로 어떤 활동들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방향을 잡고 있고요, 지금까지 해왔던 사업들이 확장되는 것도 필요하죠. 이주노동자 문제 같은 경우도 사실 그 분들도 어쨌든 큰 틀에서 보면 공동체 일원이 되는 거고요. 서로 나누고 지지하고 지원해주고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되는 것 같아요.”

지역주민과 만날 수 있는 과제들을 찾아내고 그 과제들을 실천하면서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 그리하여 일상화된 참여와 연대가 이루어지는 것. ‘푸른시민연대’가 바라보는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의 그림이기도 하고 전략이기도 하다. ‘어머니 학교’에 나오시는 주민들과 이주노동자센터를 찾는 외국인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상근 활동가의 입장에서 불협화음을 초래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대화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고 서화진 국장은 말한다.

‘푸른시민연대’가 다른 지역운동단체와 비교해서 특이한 점은 젊은 자원활동가들이 넘친다는 거다. 매월 평균 40명이 넘는 자원활동가가 움직인다. 상근자 3명이서 이들과 호흡하는 것도 큰 숙제처럼 보였다.

“지역이 옆에 외국어대, 경희대, 조금 더 가면 시립대 등이 있어서 학생들은 끊이지 않고 오고 있죠. 그리고 요즘엔 각 대학마다 사회봉사를 학점으로 인정해주니까 한양대, 서울여대 등에서도 많이 오죠.......이들은 어머니 교실의 교사라든지, 이주노동자, 작은권리찾기 등 각 팀에 다 분배가 됩니다. 학생들이 나눠지고 자기 관심사나 푸른의 요구에 따라서 자기 역할을 해요........요즘 학생들은 예전처럼 이런 운동에 생각을 가지고 투신하겠다는 생각은 아니고, 약간은 그런 관심들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자기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지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다가, 활동하면서 그런 것들이 넓어지고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조금 한계는 있지만 학생들도 성장해나가는 것 같아요. 저희가 학생들의 의식에 도움을 주고자 세미나도 하고 그래요.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자기 삶에서 이런 운동이나 활동들이 계속해서 함께 맞춰나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죠.”

젊은 학생들이 찾아와서 ‘푸른시민연대’ 활동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학생들 스스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어 궁극적으로는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매월 40여 명의 학생들은 각각 ‘어머니 학교’, ‘이주노동자센터’, ‘작은권리찾기운동’ 등에 배치되어 자원봉사 이상의 활동력을 펼치고 있다. 매우 부러운 대목이다.

서화진 국장은 94년부터 이 곳에 뿌리박고 있다. ‘어머니 학교’와 역사를 같이 한다. 10년이면 지겨울 법도 한데, 어떠냐고 물었더니 “항상 부족한 마음에.(웃음) 저만큼 가야 하는데 이만큼밖에 못 왔다는 생각에.......”라고 겸손하게 답한다. 그래서 달리 물어봤다. 10년 동안 활동하면서 어떤 점이 매력적인지.

“활동 자체는 사실.......어떻게 보면 변화가 거의 없죠. 이슈가 계속해서 터진다거나 이슈를 잡아서 당장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는 활동인 것 같고, 그런 게 있는 반면에, 오랫동안 하다보면 작은 어떤 보람들을 느끼는 것 같아요. 지역에서 우리 같은 단체가 없다면 주민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볼 수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

서화진 국장에서 연달아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활동, 단체의 과제, 그리고 얼마 전 토론회에서 열띤 논쟁이 되었던 상근자 중심의 활동과 대변형 중심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제 생각은 자원봉사센터 활동 같은 것, 어머니 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확장될 수 있는 방법, 물론 한계는 있지만, 생협 같은 것, 지금 사실은 이 근처에 ‘아름다운 가게’가 생겨버렸어요. 저희가 애초에 그것을 목표로 했지만 못했거든요. 지금은 ‘아름다운 가게’와 함께 뭔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작은 과제이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 이주노동자 분들과 지역에서 교류할 수 있는 방법, 작은권리찾기운동 같은 경우도 사실 무궁무진하잖아요. 문제는 인력과 재정, 이 부분이 항상 따라다니니까 그 부분을 얼마나 해소하느냐에 따라서 사업의 내용도 바뀔 수 있겠죠.......사실은 작은권리찾기 같은 경우도 안정적으로 상근 활동가가 있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자원활동가가 결합이 되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고민을 해야 하는데, 아직 그 부분이 미약하죠. 그 부분이 시급한 과제이죠.......그런데 그게 그렇잖아요. 적정 비율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저희 같은 경우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자원활동가는 40명 정도 충분한 인원인데, 이 인원들을 가지고 더 많은 깊이 있는 활동들을 끌어나가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상근활동가가 필요하거든요.......대변형 운동의 경우, 그런 사업들에 직접적으로 주민이 참여하는 것은 지금은 어렵잖아요.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물꼬를 틔워주는 역할들을 지역의 단체들이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 학교든, 아니며 방과후 학교든 지역주민들과 만날 수 있는 매개물이 항상 열려 있다는 생각은 들거든요. 근접하게는 그렇게 해서 홍보가 되고 나눠지는 거겠죠 아마 그런 얘기도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지역의 여론, 이 지역에도 ‘동대문신문’이라고 있지만 제대로 역할을 안 하고 있거든요. 이런 것들이 활성화되는,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져야 만이 제 기능을 찾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대변형 운동이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서화진 국장의 이미지가 그런지, ‘푸른시민연대’는 조용하고 잔잔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0년 해보니 별 것 아니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 서두른다는 기색을 엿볼 수는 없었다. 운동의 경험이 가져온 풍토가 아닌가 싶다. ‘긴 호흡의 운동’이라는 말만큼 모호한 표현도 없지만, 정말로 그들은 ‘긴 호흡’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 풀뿌리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변화의 응축된 에너지가 가져올 사회적 위력을 믿는 ‘푸른시민연대’가 무궁한 발전을 할 수 있도록 기원해본다.
서화진 국장과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문종석 대표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와 많은 얘기는 못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푸른시민연대’의 10년을 대답한 것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10년 딱 지났는데, 우리가 예전에 말했던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잖아요. 노무현과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나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밑에서부터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옛날에는 미래의 비전이나 전략을 가지고 토론을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얘기를 거의 안 하거든요. 왜냐하면 지금 10년 정도 됐는데, 이제는 우리가 하는 액션 자체대로 가고 있다고 봐요. 그 과정이. 절망으로 느꼈던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지역운동이라는 것이 훨씬 더 지루하고 길다, 이런 것을 느낀 것이었고, 희망을 본 것은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변하더라.......저희가 얘기하고 있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그런 겁니다.......지난 수십 년 간 익숙해져버린 생활의 풍토를 바꿔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만나서 바꿔내는 수밖에 없어요. 훈련해야 되죠. 그 작은 훈련이 실제로 저희 어머니 교실에서도 하는데 저희가 800분 정도를 얘기했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몇 가지가 있는데, 선거 때만 되면 머리를 싸맸어요. 왜냐하면 명색이 저희가 정치조직으로 시작했는데, 이것이 당장 돈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선거 국면에서. 그런데 현금이 됩니까? 안 되죠? 이번 선거 때 뭘 해야 하나, 결국은 말 잘못 꺼냈다가 한 번 혼나기도 했었고, 논쟁이 막 붙었어요. 그래서 몇 번 시도했다가 아예 포기를 했어요. 그래서 뭘 했냐면, 가장 기본적인 것들, 정책을 가져와서 읽어보고, 이런 기본적인 것을 시작했는데, 문제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그 동안 함께 나누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어머니들에게 이렇게 조심스럽게 얘기했던 것이 어머니들 바탕에 깔려 있었던 거예요. 특별히 의식화 교육을 하지 않더라도 어머니들이 선거가 되면, 이번에 누구를 찍어야 되요? 젊은 사람 찍으면 돼? 깨끗한 사람 찍으면 돼? 이렇게 생활속에서 학습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번 같은 경우는 탄핵국면이나 총선 때, 어머니들이 중에 보수적인 사람이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다른 어머니들한테 크게 당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저희들이 희망을 느끼는 거죠. 생활에서 더불어 산다는 것이 심어지니까 결국은, 상부구조라고 하는 의식의 부분이 따라서 바뀌는 것이죠. 10년을 평가하고 앞을 내다보면서 아까 공부방 같은 얘기를 꺼낸 것 같은데, 저희는 순환을 생각하는 거예요. 인적인 측면에서의 사업의 순환, 어머니들이 연세가 다 60대, 50대인데, 사업에 참여시키는 것은 부담이거든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직접적 참여는 아니지만 옳은 일, 좋은 일, 나누는 일의 사업은 참여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어머니들이 다니는 이 곳을 도와주십시오, 하면 잘 안 통해요. 왜냐하면 여기니까, 나니까, 제 3의 기관은 도와줄 수 있다는 거죠. 공부방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원래는 어머니들이 지역의 필요한 공부방에 보내드려서 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하는데, 아직 우리 사회가 다른 단체가 온다고 환영하지도 않고, 우리가 직접 할 수밖에 없죠. 공부방 같은 것을 열어서 어머니들이 그 쪽에 참여해서 활동도 하시고, 어머니들이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만나서 자연스럽게 국경 없는 사람들이 되는 거죠. 인적인 순환문제가 우리의 첫 번째 과제죠. 지역커뮤니티라고 하는 그런 문제.......장기적 발전계획? 뭐 우리도 이런 일에 크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해보니 10년 별것 아니더라는 거죠. 해보니 10년 갖고 택도 없더라 이겁니다. 아마 옛날 같으면, 장기발전계획이라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워서 시작했을 거예요. 물론 지금도 장기발전계획은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계획이 마음 먹은대로 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계획이 아니라 신념과 꾸준한 실천이고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동력이 핵심이지요. 여력이 되면 사업을 순환시키는,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을 파악하고 도와줄 수 있는 손을 모집해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거죠.......대학생 같은 경우도 정착되지는 못하지만 거쳐 가는 것만으로 훈련된다고 보는 거죠. 욕심 같으면 다들 남아서 여기서 활동하면 좋은데, 여건이 그렇게 안 되는 거죠. 그런 시민들이 흩어져서 세상이 좀 더 밝아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겠다는 생각이고, 10년을 돌아보니 약간 느낄 수 있는 정도로 느껴지고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훨씬 더 느껴질 수 있겠죠.”

※ 푸른시민연대 홈페이지는 http://www.epurun.org/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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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무슨 일이?-"함께하는 보육을 위한 학부모모임"을 찾아
인터뷰 : 김금자(함께 하는 보육을 위한 학부모모임 대표
이은희(함께 하는 보육을 위한 학부모모임 총무)

인구 10만 정도의 여주군에는 작년 3월 전까지 2개의 군립어린이집이 있었다. 10만이라는 적지 않은 인구에 군립어린이집이 2개 밖에 없다는 것은 좀 가혹한 것이다. 읍면 당 최소 하나씩을 고려한다면 10개가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리라.(현재 여주읍을 포함해 모두 10개의 읍면이 있음) 이렇게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주군은 그나마 두 군데의 군립어린이집 중 하나를 폐쇄하는 과감한(?) 행정력을 보여주었다. 군립 여흥어린이집이 작년 3월에 폐쇄된 것이다. ‘달랑 하나’만이 여주군의 공보육을 버티고 있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주군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여주 보건소가 자리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보건소는 여주군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부서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여주군민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므로 예산을 집중 투자한다고 해서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몇 해 전, 여주군은 보건소 주차장이 비좁아 확장 공사를 계획했다. 여기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주차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보건소 바로 옆에 있던 군립 여흥어린이집을 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계획은 여흥어린이집을 위탁 운영하고 있던 시설장은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위탁하는 학부모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한 학부모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늦었지만 대책위를 구성, 여러 통로로 폐원되는 것만은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좀체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손 써볼 틈도 없이 여흥어린이집은 작년 3월 폐원되고 만다. 이리하여 여주군에는 군립어린이집이 ‘달랑 하나’라는 자랑스러운 영광(?)을 안은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보육사무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굉장히 슬픈 일이다. 단순히 보건소 사무에 보육사무가 밀렸다고 평가할 그런 사안이 전혀 아닌 것이다. 보육행정을 바라보는 지방자치단체의 태도나 수준이 후진적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알고도 묵인한 시설장의 태도를 보면서 분노보다는 차라리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학부모들의 대책위 활동은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몇 몇 주부들은 여흥어린이집 폐원 이후에도 소소하게 모임을 꾸려왔다. “함께 하는 보육을 위한 학부모모임”이라는 작은 모임이 그것이다. 10여명의 아줌마들이 모여 오순도순 보육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면서 보육조례를 주민발의를 통해 제정해보자고 결정한 시기가 올 초였다. 금명간 청구서를 제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이 아줌마들은 벌써 수임인(주민발의 서명 시, 서명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130여명을 받은 상태다. 오늘은 이 모임의 대표와 총무로 활동하는 김금자 씨와 이은희 씨를 만나봤다.

먼저 여흥어린이집 폐쇄 이후 활동에 대해 물었다.

“2003년 3월에 여흥어린이집이 폐쇄가 됐죠. 이 문제에 참여했던 몇 몇 분들이 군수한테 질의서를 보낸다거나 이런 정도로만 활동ㅇ하다가, 저희 모임이 뜻하지 않게 만들어졌어요. 보육조례를 개정하자고 모였던 것은 아니고, 사실은 그 전에 급식조례제정운동을 한 경험이 있는데, 그러고 나서 여흥어린이집이 없어졌는데, 그 이후에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조례를 만들어서 운동을 하는 것이 어떠냐 라는 제안을 받았죠. 어떤 단체에게 받은 것은 아니고 아시는 분이 전화해서 예전부터 알고 있던 몇 명을 불러 놓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듣고 보니까 좋은 것 같고, 그리고 그 바로 전에 제가 아이를 낳고 같이 있던 아주머니가 아이를 낳고 해서 여흥어린이집이 끝난 다음에 못 움직이는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아이들 돌도 지나서 움직여보자 해서 사람들을 모았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저런 활동을 하겠다고 전화를 하고 했죠. 그 때가 작년 말 정도였어요. 그래서 연락 닿는 사람들에게 연락 하고, 또 아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을 모으고 해서 몇 명이 모인 거죠. 경기여성연대의 이선화 국장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죠. 우리가 그런 것을 하려고 한다 했더니 설명을 해주셨죠. 다른 지역에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고, 전국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갖고 있고, 여기도 해봐라, 여흥어린이집이 없어진 것은 여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가 됐었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가졌고, 저희가 그 힘 받고 출발을 했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여흥어린이집 대책위 활동을 제대로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여흥어린이집이 폐쇄되자 적잖게 당황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몇 몇 주부들이 제대로 타보지도 못하고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함께 하는 보육을 위한 학부모모임”음 만들게 됐고, 올 초에 주민발의를 통해 보육조례를 제정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양한 활동의 방식 중, 왜 하필 주민발의를 선택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저희 같은 경우는 여흥어린이집 대책위가 싸우면서 결과적으로 진 거잖아요. 그런 싸움의 과정에 여주군의 입장이라는 것이 보육에 대해서는 정말 무지하다는 것을 느꼈죠. 주민들의 의견이나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이 전혀 없었거든요. 정말로 무식한 행동을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얘기했던 것은, 보건소를 넓혀야 하는데, 그럼 어린이집을 없애지 뭐, 또 대책위가 반대하니까, 우리가 하겠다는데 웬 고집이야, 하는 거예요. 주민들의 의견이 왜 정당한지, 뭘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주시하지 않았던 거죠. 공무원들은 그렇게 얘기해요. 여흥어린이집 없애면서 그 예산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 예산을 어떻게 하냐면, 3세 이상 어린이한테 한 달에 2만4천 원씩 지원을 했어요. 공무원들은 우리가 이렇게 지원을 하는데, 그럼 끝이지.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사교육이 문제가 있으면 공교육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럼 내가 사교육비를 일부를 지원해줄게, 하는 식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거죠. 공보육의 필요성은 사보육과는 다르잖아요. 지원하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리고 그 지원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아이들 엄마들이 2만4천 원 덜 내게 되었지만 시설장들한테는 일률적으로 그 돈이 다 들어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주군은 돈을 좀 준다는 것만으로 모든 명분을 여기에 맞추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과정에서 의원 몇 명이 필요에 의해서 보육조례를 만드는 것과 주민들이 원해서 필요한 내용으로 보육조례를 만드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봐요. 주민의 힘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주민발의를 시작하려 하는 거죠.”

예산의 분배는 곧 정책의 내용과 방향을 반영하기도 한다. 여주군은 어차피 정해져 있는 보육예산을 손쉽게 해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2만4천 원씩 일괄 지원. 그 외 보육정책을 고민한 흔적은 없다. 보육정책의 내용과 방향이 어떠한지를 가늠할 수 대목이다. 이런 행정력에 창의성과 상상력을 가지라는 주문은 ‘쇠귀에 경 읽기’일까? 아무튼 주부들의 불신은 컸던 것 같고, 스스로 조례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도 어려웠을 것 같았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요,(웃음) 저희가 무식하게 달라붙었죠. 저희 같은 경우, 모이는 아줌마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아줌마로 살고 있는 분들인데, 그러다보니까 무조건 다른 곳 보육조례 자료를 얻어서 그냥 문구 하나 하나 보면서 공부를 했었어요. 어떤 한 사람이 맡아서 이 장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이건 어떠냐, 이건 왜 그렇게 해야 되냐, 이런 식으로 우리가 답을 알고 있지 못하지만 서로 답을 찾아가고 공부를 했죠. 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런 식으로 공부를 했고요, 다음에는 그냥 무식하게 했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는 너무 못 한다 라는 얘기도 있었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 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분들조차도, 차라리 아는 의원 소개시켜 줄테니까 그렇게 해라, 물론 나쁜 뜻은 아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그냥 꾸준히 모였어요. 밤에 서로 체크하면서 지금까지 왔는데, 쉬운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서로 사람을 모을 때 각 단체들에게 공문을 띄었었어요. 관 쪽에 있는 단체들에게도 형식적이지만 띄우고, 진보 쪽 단체들도 띄어서 우리가 이런 거 하니까 같이 하자고 했는데, 처음에는 다 무시를 했죠. 관변 쪽 사람들은 여흥어린이집과 관련된 것은 너무 싫다, 그 쪽과 꼭 연관이 있는 건 아니더라도 대책위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있으니까 연관이 되어 있다고 봐서 자기들은 너무 싫다, 이런 식의 대답이었죠. 진보 쪽 사람들은 도움을 주겠다는 정도의 답변을 받았고, 민주노동당 같은 경우는 당 사업으로 가져가서 여성분과 사업으로 하자고도 했었어요. 그 쪽은 힘을 실어주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니까, 아줌마들끼리만 하는 것보다 당원들도 있으니까 힘을 받겠죠. 그렇게 고민하다가 저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처음에 모임을 갖고 그 다음에 설명회를 가지면서 아줌마들 몇 분이서 계셨는데, 그 분들은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게 단지 아이들을 잘 키워보자는 순수한 의미에서 참여를 하셨고, 약간은 정치적인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어요. 어쩌면 전체적인 주민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고, 꼭 단체를 끼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살림을 하고 있는 아줌마들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실험해보고 싶어서 그럼 모임을 갖자, 그렇게 해서 진행한 거죠.”

활동 경험이 전무한 아줌마들의 순탄치 않은 과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발성과 순수성 그리고 성실성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동력이었다. ‘왜 어려운 길을 가려느냐?’라는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믿으며 묵묵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노력이 통했는지, 지금은 많은 단체에서 참여를 희망하고 있고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지난 7월에 주민결의대회 때 공개적인 자리에서 군의원들도 도와주겠다고 했고, 여성단체들도 같이 하자는 말도 했었고, 시민사회운동단체들도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에 큰 틀에서 이 운동을 해보자, 지금까지는 ”함께 하는 보육을 위한 학부모모임“으로 이끌어 왔지만, 이걸 ‘보육조례개정을 위한 운동본부’와 같은 형식으로 다시 한번 거듭날 필요가 있겠다, 사람들도 좀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주부터 다시 만나볼 생각이에요. 이런 흐름이라면 8월 말에는 아마 운동본부를 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9월 초까지는 청구서를 제출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받아 놓은 수임인은 130명. 청구서를 제출하고 서명을 시작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보인다. 예의주시하고 있던 여러 단체들도 참여의사의 밝힌 이상 이전보다 탄력 있는 활동이 기대된다. 이미 조례안도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례안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저희 조례가 제일 좋은데요.(웃음) 왜냐하면 다 좋은 것만 짬뽕해서.......(웃음) 저희가 조례를 만들기 위해서 워크숍을 했었어요. 아이들이랑 남편이라 다 같이 가서 남편들은 다른 교실에서 아이들 보고, 아줌마들은 아줌마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하고 그랬거든요. 저희 같은 경우는 보육위원회 강화하는 것과 방과후 교실, 그리고 다른 지역과 다른 내용이 하나 있다면 폐원에 대한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국공립시설을 최소한 읍면 단위에 하나씩 설치하는 것을 넣었는데, 만약에 이것이 군에서 여타의 사정에 의해서 폐쇄할 경우에, 공청회를 몇 차례 해야 하고 어떤 절차를 가져야 하고 등등을 넣었어요. 폐쇄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웃음)”

과천 보육조례를 비롯해 최근 보육조례 제․개정운동을 위해 만들어 놓은 각 단체들의 조례안을 참고해서 가장 좋은 내용만 취합했다는 여주 보육조례안. 내용만으로 여주가 가장 훌륭할 것 같았다. 특히 읍면 별로 군립어린이집을 설치한다는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여주 같은 경우, 면 중에 북내면이 있고 강천면이 있고 산북면이 있는데, 강천면에서 여주읍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기가 쉬운 것이 아니거든요. 물론 요즘에는 어린이 셔틀버스가 운영이 되고 있긴 하지만, 시골 같은 경우에 농사짓는 곳에 직접 들어가 보면 집이 떨어져 있고 그래서 그 쪽까지는 안 가요. 그래서 사실은 읍면별로 있어야 하고 시골 같은 경우는 예전에는 아이들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아이들이 꽤 있어요. 왜냐하면 결손가정, 한 부모 가정이라고도 하는데, 부모가 같이 도외지로 가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경제적인 문제나 무슨 문제로 헤어진다거나 해서 시골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노인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 분들 같은 경우는 정말 어린이집이 꼭 필요한데, 돈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어차피 돈 때문에 밀려 밀려 시골까지 온 아이들을 또 노인들이 농사지어야 하니까 일하시는데 방해가 되고, 그렇다고 해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늘었다고 하지만 집집마다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울 수 있는 집도 없고. 그래서 아이들이 노인분들 따라다니면서 화투를 치면서 배우고 이런 일도 있다고 해요........아무튼 예산에 대한 고민은 있어요. 그러나 저희가 말하는 예산에 대한 부분도 뭐 하나 짓고, 뭐 시설 투자 하고 그런 예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주군에 얼마 쓸 수 있는 예산이 있다면 그 부분을 우리가 운영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다, 이러게 내놓을 수 있는 예산을 말하는 거예요.”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와 달리 농촌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시설을 이용한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르신들이 책임지고 있는 보육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농촌 지역이야말로 정말로 국공립시설이 필요한 지역이다. 문제는 주민발의가 성공하더라도 이런 파격적인 내용을 여주군과 의회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다. 지금까지는 공무원들이 무반응을 보이고 있다. 무시하듯이. 군의원들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몇 가지 묘책도 세우고 있다. 지역주민들과 그 지역 군의원과의 간담회를 11개 지역에서 할 계획이다. 기회가 닿으면 공무원과의 간담회도 준비할 계획이란다. 아무튼 그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이해를 넓혀나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다. 일단 주민들에게는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거부감을 표시하는 주민들은 거의 없고 오히려 맞장구를 쳐주며 아는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는 주민들도 많다. 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주부들이 보람을 느끼는 대목도 이런 부분이다.

“저 같은 경우는 여흥어린이집 문제까지만 하더라도 보육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제가 안 썼다는 것은 그만큼 들리지도 않았다는 거죠. 교육에 대한 것은 많이 들었지만, 보육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가 의식 수준이 떨어지고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막상 제가 모임을 갖게 되고 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우리 아이들의 보육문제가 중요성을 함께 보면서, 아, 내 아이만 키우는 게 아니구나,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막연하게나마 더불어 사는 아이들을 키우자거나,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아이로 키우자거나 하는 말은 했지만, 그게 보육이라는 말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회와 지역주민과 국가가 다 함께 보육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 방향 설정을 못했던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어요. 지금 모임을 갖고 있는 분들이 한 분 두 분 다 모아서 10명이라고 하지만, 일반 아줌마들이 회원 가입도 하고, 밥 하고 아이 키우는 정도로 했던 아줌마들이 그것을 한다고 오셔서 함께 하시면서 이런 것을 주민의 힘으로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서 좋았어요. 모임은 10명이지만, 저희가 행사를 할 때는 그 아줌마들이 동네 아줌마들을 데리고 와서, 이것은 설문조사를 해야 하는데, 이런 것을 하고 있다고 그러면 동네 아줌마들이 와서 해주시고,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것이 좋더라고요. 어쨌거나 아줌마, 엄마들도 같이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다들 목말라 했던 부분인데, 어떻게 풀지 몰랐던 것뿐이더라고요. 같이 고민했던 것은 좋았어요. 또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적 성향이나 이런 것을 떠나서도 올바른 일, 옳은 일을 하는 데는 다 같이 모여서 할 수 있었던 것이 참 좋았어요.”

모임에 참여하는 분들 중 부녀회장이 몇 분 있다고 한다. 부녀회장 왈(曰), “걱정하지만, 나 혼자 1층부터 10층까지 표쓸이를 할게”라며 웃으신단다. 보육문제에 관한 한, 평범한 주부들에서 활동가로 성장하는 모습이 좋았다는 말이 빈말이 아는 듯싶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동네는 조금씩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부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로 인해 모임의 과정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아이도 키워야 하고 직장도 다녀야 하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그러다보니까, 낮에는 출근을 해서 저녁까지 모임을 가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죠. 아이를 데리고 모임을 가고 사람 만나고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사실 대화라고 하는 것이 둘이 만나서, 혹은 셋이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하는데, 옆에서 아이들이 엄마 뭐 해주세요, 이거 해주세요, 울고 그럴 때, 아이가 너무 아파서 병원을 가야 하는 상황도 있었고, 이러니까 힘들더라고요. 아이들을 데리고 뭘 한다는 게 다들 그것에 대해 힘들어했어요.......처음에는 적극적으로 남편이 도왔죠. 아이를 맡겨라, 이랬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고요. 그런데 남편들의 일정과 부딪치는 거예요. 어제 같은 경우도 회의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침에까지는 오늘은 내가 아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알았다고 했는데, 낮에 갑자기 남편에게 일이 생긴 거예요.......그런 경우가 힘들죠. 편하게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하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되고 하는 상황인데, 행사 한번 해야 하는 상황에도 그게 제일 문제죠.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이번 행사에 아이를 어디에 맡기고 행사를 하지?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맡길 공간이 있을까? 공간 하나를 빌려서 아파트에 아이들을 맡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좀 어려운 상황이죠.”

내가 아는 한 선배가 그런 애길 한 적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날은 비가 올 때였어. 내 짐 어깨에 메고, 아이 들쳐 메고, 우산 들고.......정말 힘들었지.” 보통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주부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지만, 여전히 여성에겐 가혹한 일이다. 그렇게 여주의 아줌마들은 한 보 한 보 전진하고 있다. 소박한 아줌마들의 몸부림이 여주에서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 것은 우연의 일이 아니라 노력의 산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 해야 할 과제가 더 많다. 운동본부를 꾸리고, 청구서를 제출하고, 서명을 받아야 하고, 군의원과 공무원을 만나는 작업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앞으로가 더 어려운 여정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열정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아이들을 사랑하는 여주 주부들의 눈부신 성공을 기대해본다. 끝으로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느낀 소감이 어떤지 물었다. 그 대답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없어질 뻔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큰 성과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흥어린이집에 대한 부분도 끝난 다음에 한 번씩 여러 가지 문제제기가 있었긴 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은 끝난 문제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육조례라는 것이 등장하고 그러면서 이것이 끝난 문제가 아니다, 관에서 한 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없다, 주민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고 대응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성과라고 한다면 성과라고 볼 수 있죠.......지금 모임을 갖고 있는 10명 정도가, 열심히 뛰면 저희 생각에는 무모할 수 있지만, 서명은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 거예요. 문제는 그 이후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보육조례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감시 체계도 만들어야 하고 보유위원회에도 들어가야 되는 상황도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 아줌마 10명으로는 힘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단체들이 같이 모여서 하게 되면 그 이후 부분에 대해서도 가능하겠다고 싶어서 운동본부가 만들어지면 지속성을 유지할 생각이에요.......저희는 처음에 여성모임이라고 국한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모임이 되더라고요.......그런 것은 재미있었어요. 아줌마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쉬운 단어로 얘기를 풀어가면서 그렇게 모임을 가졌는데, 다른 모임에 가면 어려운 말 써가며, 어렵게 얘기해가며, 자기 지식을 과시해가며, 이렇게 많이 회의들 하는데, 저희들 같은 경우는 편하게, 모르는 것 물어가며, 모르는 것 같이 공부하면서 모임을 가졌어요.......남성들은 지역 유지들도 만나고, 누구도 만나고, 공무원 누구는 내가 알고 내가 어느 단체 짱을 알고, 소개 해줄까,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사회적 관계에 남성들은 더 민감한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굴 기분 안 상하게 풀어나가려고 하는 것도 있고, 아니면 그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싫은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는 보유조례를 제대로 만들어서 제대로 운영하는 것 밖에 안 보는 것 같더라고요.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유롭죠. 그래서 편하죠. 그래서 저희는 여성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웃으면서 말을 해요. 어쨌든 이 운동이 공식화되고, 운동본부를 꾸리려고 사람들을 만나다보니까, 그런 느낌들을 많이 들어요. 앞으로 잘 되겠죠.”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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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市)와 싸울 일은 아직도 많다! - ‘성남시민모임’을 찾아
인터뷰 : 김현지 사무국장

성남시민모임은 지난 95년 3월에 발족되었다. 내년이면 만 10년을 맞이하게 된다. 90년대 중반이라면 여러 지역에 소위 ‘시민모임’들이 많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고, 지역운동이 다양하게 분화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 속에 성남시민모임도 만들어진 것 같았다. 연혁을 보면 성남시민모임은 강산이 한 번 바뀌는 것만큼이나 굵직한 사건들 속에 묻혀 있었다. 장지동 쓰레기 소각장 문제, 판공비 비공개에 대한 소송 문제, 백궁․정자지구 부당 용도변경 문제, 그와 관련한 성남시장 소환운동, 성남시민모임 사무실 압수수색 사건, 미군기지 성남 이전 반대운동, 그리고 최근에는 시립병원설립을 위한 주민발의운동 등 성남시민모임 활동은 성남 시민사회의 역사를 대변하기도 한다. 성남시민모임의 전투성은 이런 사회적 맥락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성남시민모임은 최근 한 명이 보강되어 세 명의 상근자가 있다. 6-700명의 회원 중 회비를 납부하는 정회원은 400여명 정도 된다고 한다. 지역단체치고는 작은 규모는 아니다. 회비만 400백여만 원이 입금된단다. 사무국장은 여타의 지역에도 몇 안 되는 여성이다. 김현지 사무국장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성남시민모임에 몸담았고(98년), 2001년부터 사무국장을 맡았다. 고속승진(?)의 경로를 겪었다. 김현지 국장과의 인터뷰 속으로 들어가자.

먼저, 최근 초미의 이슈가 되고 있는 시립병원설립 문제에 대해 물었다.

“제가 시립병원추진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어요. 워낙 큰 이슈라서. 성남 구시가지에 종합병원 2개가 갑자기 폐원을 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노조와의 연대 정도로 생각을 하고 시작을 했던 거거든요. 그래서 폐업철회 내지는 고용승계 등의 문제로 접근했다가, 폐업을 철회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잖아요.......그런 와중에 저희가 성남 구시가지 인구가 55만인데, 그렇게 되면 종합병원이 1개밖에 없게 되는 거고, 응급의료센터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것과 관련해서 공청회를 하게 되었고, 공청회를 하는 과정에 공공병원만이 사실은 의료문제를 풀 수 있는 대안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폐업검진과는 별도로 공공병원설립추진위원회를 만든 거죠. 국립병원도 있고 구립병원도 있지만 저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시립병원 아니겠냐, 그리고 현 시장이 시립병원을 공약으로 선거 때 걸었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수월하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거고요. 한국사회의 의료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공공병원이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시립병원추진위를 작년에 만들게 되었죠. 처음에는 시장의 공약이니까 공약을 지키라고 했던 건데, 시장이 공약을 지킬 마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시의회가 발의해서 지방공사의료원조례를 만들라고 시의원들을 설득했었는데, 시의원들은 계속 시장 눈치를 보거나 위탁 관계가 많은 그런 분들이 많아서 어려움이 있어서 결국 주민발의까지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작년 12월, 채 한달을 넘기지 않고 주민발의를 통해 18,500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처음엔 주민발의안이 시의회 상정이 돼서 당연히 통과될 것이라고 믿었다. 시민단체들도 적대적 대응보다는 시의원들에게 힘을 실어주며 격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웬걸? 상임위원회는 주민발의안을 심의 자체를 보류해버렸고, 본회의는 날치기 폐회를 해버리고 만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었다. 의회 방청석에 대기하고 있던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고, 그 과정에 50여명 구속, 12명이 입건된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시립병원설립’을 주제로 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일 텐데, 어떻게 하다 이 정도의 사태까지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시민단체들이 주장했던 내용들이 무엇인지 물었다.

“물론 구체적인 방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시립병원 설립을 하는데, 시유지에다가 새로 세울 수도 있고요, 시유지에 다시 세우는 동안 폐업한 인하병원의 부지나 인력이나 건물을 임대해서 하다가 시립병원을 세우는데 3년이나 5년은 걸리잖아요. 그러면 그 때 옮겨간다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거든요. 성남시가 땅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방법까지는 거론이 안 되었어요. 그러니까 다양한 방법은 받아들일 수 있다, 성남시가 괜찮은 대안을 마련해봐라,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데, 문제는 시에서 받지 않겠다고 나오기 때문에 어떻게 시립병원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대화 자체가 안 되는 거죠.”

기본적으로 시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김현지 국장의 생각이다. 시장의 공약이 있었다 하더라도 주민발의에 의해 떠밀려 하는 모양새는 싫지 않았겠냐며 김현지 국장은 나름대로 분석한다. 거기에 시의회는 시장 눈치 보기 바쁘고.......

“어제 모임에서도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우리가 시장을 내서 시립병원 설립하는 것이 제일 빠르겠다.(웃음), 물론, 현 시장이 재선을 목적으로 생색내기를 한다면 내년 정도에는 주민발의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판단도 듭니다만, 그것이 아니라면 이 문제는 뾰족한 해법이 아직 없는 상태에요.”

인터뷰 중에도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해법 찾기가 쉽지 않은 싸움처럼 보였다. 그래도 1년 정도 끈 이 싸움에서 얻은 것도 많지 않느냐고 물었다.

“백궁․정자 싸움 할 때는 분당 쪽에서 했기 때문에 아파트를 조직하기는 좀 편했어요. 처음엔 구시가지를 조직화해서 주민발의를 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가가호호를 다니면서 하니까 또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역운동을 하면서 구시가지도 할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을 얻은 것도 있고, 주민발의를 하면서 저희가 동별로 노인회 같은 곳을 들러서 설명회를 가졌어요. 매일 저녁에. 그래서 주민들 만나고, 함께 지역현안 가지고 발의하게 됐고, 시의원도 불러서 시의원들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지는 시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민들과 상의를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과정이 중요했던 것 같고. 지금 고민은 7월 말부터 주민투표가 시행이 되잖아요. 시립병원 추진위 내부에서는 주민투표를 시도해볼까, 성남시민들의 분위기를 봤을 때는 주민투표도 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추진위 단체 관계자들이 너무 지쳐 있는 상황이라서 그 이야기만은 하지 말자, 그런 분위기 있잖아요.(웃음) 그런데 해보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있어요.”

아파트를 중심으로 펼쳐진 시민운동을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졌던 구시가지에서도 주민발의를 성공시킨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물론 ‘병원’이라는 생활의 주제, 주민발의가 가지고 있는 운동론적 방법 등이 짧은 시간에 효과를 보긴 했지만, 매일 밤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대화와 토론을 나눈 경험은 성남시민모임이나 시민사회에 적잖은 가능성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김 국장 자신도 몸은 힘들었지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아직 처리되지 않은 고소문제, 조례안 본회의 상정 문제 등 거쳐야 할 산이 많이 남았다.

성남시민모임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지원하는 사업, 즉 프로젝트를 하지 않는 단체로 유명하다. 회원들의 회비가 다른 단체에 비해 넉넉하지만, 그래도 부족분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일주점이나 달력판매와 같은 재정사업, 연말에 특별회비를 걷는 등 나름대로 자구책이 있었다. 이런 자구책에도 늘 재정은 쪼달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왜 프로젝트 사업을 배제하는지 물었다.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이죠. 현재는 참여연대나 경실련 등만 간접지원을 해주고 있잖아요. 이름 없는 지역단체들도 그런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직접 지원 형태의 프로젝트는 좀.......저희가 예전에 의정지기 시민활동 하면서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가짜 영수증 만들게 되더라고요. 자부담 문제도 있고. 재원이 남아도 못 돌려주고, 그런 시스템이 현실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단체들은 어렵죠. 현실적으로 프로젝트 자체의 허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간접 지원 형태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간접지원은 회원이 회비를 내거나 기부금을 주면 법인이 아닐 경우 민간단체도 세금 혜택을 주어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안 되어 있으니까, 그러면서 하겠다는 것이 자기들이 보기에는 유명한데 한두 군데 골라서 원칙 없이 지원하는 것도 문제고, 그래서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에서는 그 당시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었어요. 하려면 우리도 다 해줘라, 검증을 어떻게 한 것이며, 어떻게 선택한 것이냐, 이렇게 얘기했었죠.”

지역단체들이 프로젝트 사업을 하다보면 초발심에서 벗어나 프로젝트를 위해 단체가 유지되는 기현상을 김현지 국장은 많이 목격했다고 한다. 특히나 (지방)정부에서 지원을 받게 되면 비판 활동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김 국장의 지론이다. 지원사업제도의 민주성과 투명성, 그리고 시민단체들의 성찰과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성남시민모임은 주민과 밀착한 자치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동별 모임을 시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았다.

“저희가 대략 2000년도까지 네 개의 동별 모임(‘지회’라고 불린다)이 그럭저럭 잘 운영되었던 것 같아요. 동별로 회원들의 모여서 별자리 보는 행사도 하고 동네 영화제도 하고 그랬거든요. 동별 지회 구성원의 성격에 따라 하는 일이나 특성이 달랐던 것 같아요.......그냥 일단 그 동네에 사는 회원들은 모여라, 하면 잘 안되더라고요. 어려워요. 뭔가 모일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사무국에서 서포트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냥 회원들에게 맡겨진 상황이다보니까 그냥 만나는 자체가 좋아서 술 한잔 먹고 계모임 정도는 지속이 되는데 그것으로는 4-5년이 지나서 회원들이 뭔가 허한 느낌을 받는 거죠. 그것을 임원들이 서포트를 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까 흐지부지 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현재는 동별 지회모임보다는 취미 소모임으로 엮고 있는 상황이에요. 등산, 축구, 이런 식으로 모임을 갖고 있고, 동별 모임 갖는 것 같은 경우는 하자는 이야기는 계속 나오는데, 사실 그것을 할 수 있는 한두 명의 임원이 있어줘야 하는데 그것이 없으니까, 일단 어렵죠.”

김현지 국장은 동별 모임의 형태가 지역운동의 정체성을 잘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임을 유지시키는 것 자체가 지난한 일이었다. 절대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사람과 내용이 부족했다고 김 국장은 말한다. 또한 주민을 만나는 일 자체가 정말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저희 경험에 있어서 보면, 지역 현안 발굴을 사무국에서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동네 시의원이 동네 현안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지방의회가 워낙에 주민자치에 관심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이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하고 마는 정도로 끝나버린 경우도 있었거든요. 뭔가 보람을 느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거고, 그래서 한 번은 지역주민들의 뭘 원하는지 주민들이 스스로 찾아서 시의원에게 전달을 했어요. 그런데 시의원이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느끼는 건, 내가 시의원 하고 말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웃음) 것 말고는 느끼는 것이 없는 그런 상황도 있었는데, 그런데 꼭 그런 것 말고도요, 좀 뭔가를 할 수 있는 어떤 프로그램이 개발되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단체의 동별 모임을 보면 잘 하는 곳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인천 같은 경우, 모임을 잘 하긴 하는데, 전체 단체가 하는 걸 주로 홍보하고, 예를 들면 파병반대 집회를 한다던가 하면 동별모임이 그것을 서포트 하는 조그마한 조직체인 것이지, 그것이 자발적으로 운영이 되는 느낌은 아닌 것 같고요, 울산 같은 경우는 주로 시민소모임 정도로 운영이 되는 것 같고요. 자체적으로 동네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못 봤어요.”

동네일을 주 목표로 활동하는 자잘한 소모임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지역운동단체가 이런 소모임들을 조직하고 지원하고 내용을 생산하는 것을 주사업으로 실천하는 곳도 드문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김현지 국장은 이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는 당분간 동네 지회 모임을 신경 안 쓰고 있어요. 몇 년 해보니까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당분간 신경 쓰지 말자. 오히려 시민모임 특성 상, 의정지기단이나 예산감시단 등으로 신경 쓰고 있는데, 의정지기단 같은 경우도 시민모임 회원들이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지역 사례 발제도 많이 다니고 그랬는데, 그런데 그것도 어려운 게, 여기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돈 벌러 나가기 시작하고, 놀던 주부도 나가기 시작하고, (웃음) 이사도 많이 하고, 이러다보니까, 당장 모니터링 하려면 자영업자들이나 내지는 퇴직한 교사라든가, 이렇게 했으면 좋은데, 주부들이 했었거든요. 주부들이 일 하기 시작하니까, 그것도 어렵더라고요. 갈수록 그 분들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일하러 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일하는 여성들이 많아질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라는 생각도 들어요.”

성남시민모임이 의정감시활동이나 예산감시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그 자체로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성남시민모임의 전투성은 바로 지역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일단은 그렇게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왜냐하면 오성수 시장 때도 그랬고요, 김병량 시장 때도 그렇고, 저희가 시장 두 명을 다 구속을 시켰거든요. 그런데 잘못을 알고 그냥 봐줄 수 없는 상황이니까 끝까지 가는 거예요. 지역에서도 시민모임이 투사적 이미지로 봐주고 있어서, 요즘에는 그것을 어떻게 벗어볼까 고민을 하는데, 뻔히 보이는데 그것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지자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뻔히 아는데, 문제제기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고, 일정 정도 다른 단체들 중에서는 대다수의 자기들의 고유의 사업과 영역에 매진하면서 그런 것을 외면한다기보다는 자기 사업을 집중하다보니까 못하는 것 같은데, 시민모임의 멤버들의 특성인 것 같기도 하고요, 시민모임의 지역사회의 위치도 그런 것 같아요. 시나 시의회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주로 껄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은 시민모임의 몫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를테면, 분당환경시민의 모임이 시와 싸워야 하는데, 그것을 혼자 독자적으로 못한다는 거죠. 그럼 시민모임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면 같이 해도 시민모임이 튀게 된다는 거죠. 주로 껄끄러운 이야기들, 그런 사안을 다루는 것이 시민모임의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간다는 이야기는 성남시민모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김현지 국장은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성남시민모임 구성원들의 특성에도 기인된 현상이다. 일단 책임을 져야할 사안이 있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시민모임의 특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무원과 관계가 껄끄럽다.

“공무원과 관계가 껄끄럽죠. 그런데 다행인 것은요, 저희가 참여연대나 환경연합과 같이 그런 파워를 가지고 압박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주민들 힘으로 압박을 하니까, 그런 것이 차이가 있어서, 저희가 아까 말씀하신 지회나 이런 형태의 주민운동을 하고 있지 못한데, 아무튼 현안에서 싸움을 하더라도 방식을 시민참여형 운동으로 계속 해나가려고 하는 노력은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거기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 거죠. 그런데 너무 힘들죠.”

언론플레이보다는 주민의 직접적 압박이 지역운동단체의 장점이기도 하다. 주민참여형 운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주민들이 백그라운드가 되어 준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시립병원 문제만 하더라도 주민을 조직하는 일이 핵심이었다.

“저희가 시립병원 관련해서도 걷기 대회를 하는데 한 7,000명인가 모였어요. 87년 항쟁 이후로 많이 모인 거래요. 고민은, 시민모임의 활동 방식이 맞나?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보는데, 너무 무대뽀 정신이 강한 거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좀 더 효율적이면서도 좋은 방법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 번 사안이 터지면 온 동네를 훑고 다니는 거죠. 지난번에도 시의원들이 기겁했던 건, 구시가지만해도 24개동인데, 한 달 동안 일요일만 빼고 내내 노인정을 잡아가지고 설명회를 다니는 거예요. 설명을 하는 동안은 즐겁긴 한데, 너무 힘들고 그렇잖아요.”

힘들도 더디지만 주민에게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고 공론의 장을 만드는 것만큼 가장 빠른 조직화의 길은 없는 것 같다. 시립병원 문제에 일정한 성과를 남긴 것도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사안별 대응보다는 계획성 있는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계획성 있는 운영을 하고 싶은데요, 시민모임 자체의 준비는 안 되더라도, 주민 현안을 풀어 갈 때, 주민참여형운동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저희가 가장 큰 문제는 연초에 올해 우리 기조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계획을 잡잖아요. 그런데 동네에서 일하다보면 그 계획이 하등에 필요가 없어요.(웃음) 그냥 그 때 그 때 즉자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이 생기고, 정말 올해는 개혁조례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는데, 시립병원 문제 때문에 치고 박고 싸우다보니까, 조례를 청원을 하고 시의원 통해서 뭘 하고 이러지 못하는 거예요. 올해는 의정지기단도 잘 해가지고 시의원들과 정기적인 간담회를 자기면서 우리가 지역 현안과 관련해 의정도우미 형태의 역할을 하자,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었는데, 시립병원 때문에 못하게 되는 거고요, 그래서 장기적이나 중단기적 전략이나 지역사회의 변화로 인한 그런 전략을 가지고 사업도 하고 운동도 배치가 되면 좋은데, 정말 그것이 안 되더라고요. 정말 내 능력의 한계인 것인지, 지역에서 일하는 것이 그런 것인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사안에 민감한 성남시민모임으로서는 즉자적인 반응을 완전히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5분 대기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성남시민모임의 역할과 정체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남에서의 주민자치’가 가능한지에 대한 회의도 든다.

“저희는 시민모임 임원들의 고민은 과연 이 성남이라는 도시에서 그것이 가능한 거냐, 거기에 회의를 느끼는 분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인구 이동이 많아요. 고향으로 살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고, 구시가지는 없어서 이사 오고, 있으면 서울로 옮겨간다든가, 더 가난해지면 광주나 근교로 빠지게 되고, 잘 살게 되면 분당으로 이사하고, 이런 수도권의 특성, 그리고 익히 다른 동네도 마찬가지지만 잠만 자는 동네도 많고, 그래서 회의에서 주민이라는 단어, 이런 것이 한국사회에서 접점이 되는 거냐, 이런 식의 회의적인 것이 많이 있고, 예전의 생각은 시민 두레라는 형태로 그런 거 많이 하잖아요. 회원 가게와 연계 프로그램 이런 거 많이 하는데, 먹거리 생협은 많이 있는데, 그래서 요즘엔 오히려 주민자치보다는 생활자체의 변화를 시도하고 함께 사는 삶을 경험해보고 이런 형태의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시립병원 문제도 한편으로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냐면, 정 안되면, 500평 이상 종합병원이 안 되더라도 이 참에 의료생협을 시도해보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요, 그것이 어떻게 주민자치와 관련된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의 쉬어가는 프로그램이나 경험, 사업들을 통해서 성남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킨다고 할까? 오히려 그런 것에 관심을 갖고 있죠.”

그래서 김현지 국장은 주민자치를 할 수 있는 토대, 즉 큰 틀에서의 지방자체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성남 시민사회단체가 한창 논의 중인 2006년 지방선거 참여도 그와 맥을 같이 한다.

“지역의 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그런 논의들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이구요, 초동준비모임들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한 쪽에서는 요즘 준비하고 있는 풀뿌리정치연대에도 결합을 하고, 지역정당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것을 목표로 한 성남지역 차원에서 지역모임을 준비를 하자, 논의들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지금까지는 시민사회단체가 지지하는 후보 정도의 참여만 했었고, 직접적으로 후보를 낸 선거는 없었거든요. 직접적으로 후보를 낼 수 있는 것은 2006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왜 2006년이 마지막이냐고 물었다. 대답은 짧았다.

“진보정당들도 있고, 앞으로 그런 정당이 많이 나올 테니까........”

대답만으론, 전체 주민운동의 전망 속에서 지방정치를 바라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다하더라도, 시민사회를 대변해줄 수 있는 제대로 된 지방정치인의 선출이 경험적으로 절실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논의대로라면 여러 군데의 지방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까지도 후보를 낼 계획이다. 이미 초동준비모임을 시작했고, 성남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도 중요한 의제도 잡고 한창 토론 중이다. 급박하게 준비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 있지만, 장기적인 전략 없이 시민단체의 독자적인 후보론이 가져올 위험요소와 암초는 도처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심을 잃지 않는 항해가 되길 희망해본다. 이런 논의의 지점은 비단 성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2006년의 광범위한 지방정치 참여가 ‘찻잔 속의 태풍’이 되질 않길 기대해본다.

끝으로, 현재 가지고 있는 김현지 국장의 고민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으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저는 개인적인 고민은요, 시민모임이 10년 이후에 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우리 몫을 다 하고 시민모임이 없어지는 상황이 되어야겠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데(웃음), 그래서 향후 10년 어떻게 할지는 고민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시민모임이 정체성이 좀 불분명하죠. 지금은 많이 잡아가고 있는 상황이긴 한데, 그런 거잖아요. 쉽게 표현해도 환경단체, 여성단체, 이렇게 명확하게 자기 정체성이나 이슈를 갖는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름에도 나타나잖아요. 성남시민모임..(웃음)......그러다보니까 온갖 궂은일을 동네에서 해야 할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맡게 되는 상황도 많은데, 그러다가 지역에서 점점 다양한 이슈의 단체들이 생기다보니까, 이제는 의정, 시정감시활동을 하게 되는데, 의정, 시정활동 중에서도 좀 더 정치적인 영역, 지방자치 제도에 관한 부분을 저희가 담당하게 되는데요, 원래 그렇게 가는 것이 맞는 것이냐, 이런 생각도 들고.......지금도 센터의 기능을 갖고 있는데, 제 개인적인 고민인데, 성남사회단체연대회의가 연대회의 센터를 두고, 성남시민모임의 멤버들도 정말 자기가 그것만큼은 해보고 싶은 주제나 이슈를 찾아서 그 영역의 일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성남시민모임이 아닌 형태로 만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과연 그렇게 될까? 사람들이 기왕이면 떨어져 있기보다는 같이 많이 모여 있어 하고 싶으니까. 그게 좀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민모임 10년 동안 시민모임 임원들도 벌써 10년씩 집행위원하고 있는 와중에 사람들도 시민모임 회의 나오고 상근들 일하고 이 사람들은 주로 논의하고 결정하고 이런 시스템이 아니고, 이 사람들도 자기 생활영역에서 자기 주제를 찾아서 그것을 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임원들도 주민이고 생활자들인데 이 사람들이 자기 동네에서 일하고.......오히려 주민 분들 같은 경우는 그렇게 발굴이 많이 되거든요. 그런데 운동 경험이 있는 임원들 같은 경우는 그게 안 되더라고요. 결국 보면 그 사람들이 정작 하는 일이 없는 상황이죠.......임원들이 그런 일이 겁나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시민모임 임원회의 나와서 일하고 하는 것이 쉽지, 그게 어렵고 겁나기 때문에 안 하는 거죠. 이야기해보면 다들 알아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얼추 살고 싶은, 제가 그런 얘기를 가끔 하면, 야 그냥 쉬면서 하면 안 될까, 이런 분위기 있잖아요.......시민모임 10년 이야기하는 것보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제가 7년인데, 내 고민을 푸는 것이 시민모임의 고민을 푸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제가 앞으로 시민모임 10년 지속되는데, 그렇다면 시민모임 10년 상근하고 있을 거냐, 예를 들면 제가 성남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해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 거냐, 내가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뭐가 있을까, 아니면 성남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뭘까, 이런 식으로 정리가 되면 시민모임의 방향이나 하는 일이, 시민모임 10주년 준비도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아요.......그래서 내 개인의 비전을 찾는 것이 시민모임의 비전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민모임 10년 준비 모임을 연초부터 해야 되는데 못했던 것이 제가 고민이 너무 돼서 이 모임을 활용을 못하겠는 거예요. 모이면 이벤트 행사는 준비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내용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다가 지역사회에서 다른 단체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데, 시민모임이 10년을 정리하는 건 한 단체를 정리하는 그 이상의 역할이 있다, 지역사회를 운동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잘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죠. 예를 들면 그런 것도 해보면 좋겠다, 다양한 상상을 해보는데, 수정구민모임, 중원구민모임, 분당구민모임 등으로 쪼갤까, 바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누가누가 잘 하나도 보고(웃음). 그게 잘 되면 구마다 사무실과 상근자가 생기면 더 좋잖아요. 저 혼자 생각만 하고 있어요.(웃음) 아무튼 시민모임 10년, 20년 가는 것은 안 좋은 것 같아요.......그리고 개인적으로 공부도 더 하고 싶어요........개인의 비전이나 조직의 비전을 지금 푸는데 있어서는 주로 주민자치나 주민과 관련된 것도 그런데, 체계적으로 공부가 필요한 것 같아요.......하는 일은 재미는 있어요. 가장 재미있는 것이 그런 거예요. 주민들 만나고 이런 것이 재미있어요. 그나마 그것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지회모임도 하고, 현안을 할 때도 항상 기본적으로 주민들 만나면서 일을 풀어가는 스타일이니까. 주민설명회 다니고 그러면 재미있어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주민들을 만날 일이 생기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다행이다 싶어요. 그리고 시민모임이 상근자가 이제 겨우 세 명이 됐는데, 지역에서 하는 일에 비하면 상근자가 적은 편이거든요. 그런데 임원 분들이 반상근 이상의 몫을 해요. 그래서 다행이죠. 상근자들에게 의존하는 부분이 조금 생기고 있긴 한데, 어쨌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니까. 총회에도 사람은 많이 와요. 100명 이상 오니까. 그 무서운 파워를 어떻게 활용할까가 고민이죠.(웃음)”

※성남시민모임 홈페이지는 http://snpd.net/new/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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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성을 벗어난 삶을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 과천의 ‘맑은 내 방과후 교실’을 찾아
인터뷰 : 이해정(과천 '풀뿌리 모임')

지난 달 말, 과천시청 지하 식당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숙연하거나 엄숙한 분위기와는 정 반대로 시끌버끌 왁자지껄 아이들의 목소리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벌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밤 9시를 넘긴 시간에도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대충 100평 남짓한 공간에 앉을 곳 찾기가 힘들 정도였고, 서빙을 하는 봉사자들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분주해보였다. 과천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공부방을 준비하려는 일군의 사람들이 마련한 일일주점의 풍경이다. 행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8백 명의 사람들이 찾아왔고 순이익만 1천만 원을 넘겼단다. 8백 명이라 함은 과천시 인구(7만1천명)의 1%를 훨씬 넘긴 수치다. 일단 일일주점의 소귀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고 수입도 짭짤한 편이다. 과천 역사상(?) 가장 성황리에 끝난 일일주점이라고 하니, 준비한 사람으로서는 신날만 했다.

혹시, 독자 제위들 중, 과천에서 웬 공부방?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저소득층 아동들이라니? 가장 살기 좋다는 과천에서 저소득층 아동들을 위한 방과후 공부방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과연 어떤 사정들이 있기에 시민들의 전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이를 위해 준비모임에 처음부터 참여하고 있는 이해정 씨를 만나, ‘맑은 내 방과후 교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맑은 내’는 청계의 순 우리말이라고 한다. 현재 ‘맑은 내 방과후 교실’은 8월에 오픈 예정이며 이미 전세로 아파트를 구입해 복음자리를 마련한 상태다. 지금은 상근 교사를 모집하고 있단다.

먼저, 어떤 계기로 만들었는지 물었다.

“처음 모임이 시작된 계기는 여러 곳에서 아마 동시적으로 된 것 같은데, 지역 안에서 어떤 일을 할까? 생각했던 ‘풀뿌리 모임’ 사람들과, ‘학교평화’(이 단체는 지난 2001년 11월, 아이들의 따돌림에 못 이겨 자기 방 창문으로 투신, 사망한 故신정현 군 사건을 계기로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과천의 시민단체)에서는 예전부터 고민해오던 상담 역할이나 아니면 방과후 방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때 저희가 자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한국도시연구소에서 했던 ‘과천 저소득층 실태조사’가 같이 맞물려서 추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풀뿌리 모임’에서 그 보고서를 먼저 봤는데, ‘풀뿌리 모임’에서 의제를 잡아나가다가, 급식문제라든가 여성문제나, 이런 문제들이 얘기되기는 했었는데, 구체적인 데이터가 나온 것은 바로 한국도시연구소의 보고서였죠. 보고서는 한 올해 2월 정도에 나왔구요.”

‘풀뿌리 모임’과 ‘학교평화’가 지역 활동에 대한 방향과 의제를 설정하던 중, 한국도시연구소의 보고서를 접하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 보고서는 과천에 국기법에 의한 수급권자가 약 1000가구 정도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속에 해당 아동들은 한 200여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이 아동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로 집약된 것이다. 여기서 ‘풀뿌리 모임’이 어떤 모임인지 궁금했다.

“‘풀뿌리 모임’은 지난해까지 세 번 정도 과천시민자치학교를 열었었는데, 주로 예산에 대한 교육이었어요. 작년 같은 경우 평가를 하면서, 우리가 열심히 했지만 제안하는 방법이 좀 틀린 것 아니냐, 예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제안서 하나만 내는 식으로는 시에서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 이런 판단을 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따내고 싶은 예산, 이런 부분들을 갖고 그것을 성사시키는 것까지, 여기까지 활동을 해보자, 이렇게 논의를 했었는데, 예전에는 전체 예산서 보는 법, 이런 식으로 공부를 했었어요. 그런 부분들이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공부만 하다보니 아무래도 동력이 떨어지고, 우리가 문제점을 반복해서 지적을 하는데도 전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오히려 우리가 시에서 찾아내지 못한 예산을 써야 할 곳을 찾아내자 라고 해서, 올해 1월 정도부터 작년과 달리 모임을 약간 긴장감 있게 한 달에 2번 정도를 해왔었죠.”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필요한 예산을 찾아내자는 것이 ‘풀뿌리 모임’의 취지인 것 같았다. 형식적인 활동이 아닌, 실질적인 활동의 고민이 방과후 공부방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예, 딱 맞아 떨어졌어요. 우리가 고민했던 부분들이 결국은 지역을 잘 알아야 가능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우리가 여기서 지역 활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지역에서 어떤 의제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잡아야 할 때, 상당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다들 지역에 대한 평가가 주관적인 거잖아요. 여성문제로 갈 것인가, 아동의 문제인가, 교육의 문제인가,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 지역 사회 안에 같이 살고 있는 구성원들, 과천 안에도 저소득층이 있고, 그 사람들의 실태 조사가 있었다고 하면서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 같아요.”

애초 ‘풀뿌리 모임’이 의도했던 ‘필요한 곳에 필요한 예산을’이라는 모토와 달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방과후 공부방은 관심 있는 개개인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준비되고 있었다. 처음 출발한 의도와 좀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원래 계획은 빈 공간이 워낙 많고, 아니, 많아 보이고(웃음), 간판만 걸고 있고,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활동을 안 하는 곳인데, 너무 버젓하게 자기들 공간들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방과후라고 했을 때는 아이들 이동 경로가 짧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 구상은 마을 마다 있는 것이 올바르겠다,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또 한 가지는 마을 안에서 녹아나는, 마을 분위기와 마을 주민들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같이 돌봐주려는 목적으로 처음에는 마을회관을 알아봤죠. 마을회관을 접촉해보고, 처음에는 문원동을 우리가 생각했던 공간이니까, 마을회관을 알아보았는데, 현재 비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 지역의 특정적 사정이나 시와의 관계나, 그리고 어떤 특혜를 본다고 판단하는 분들도 있고. 그래서 이제 공간 문제 때문에 진행이 정체되었었는데, 그러다가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물론 우리가 예산을 따내고 이러기 위해서 제안을 했지만, 이것이 꼭 우리 지역에서 필요한 것이라면 초기에 적당한 희생을 준비한 사람들이 감수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거고, 그 당시에 사람들의 열기나 바람들이 많이 모아지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간을 못 구해서 마냥 유보한다는 것은 너무 아까운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시와 얘기할 때도 너희가 유형의 뭔가를 보여야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어차피 예산이 상정되는 것도 내년 예산을 바라보는 거고, 일단 그러면 우리가 공간을 얻어서 시작을 하자고 한 거죠.”

과천 시내에 빈 공간이 많겠다는 순진한 생각(?)에서 출발하여 다리품을 팔고 보니, 방과후를 위한 공간은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므로 준비했던 사람들이 힘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 이해정 씨의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쉽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공간문제가 더디게 진행됐기 때문에 준비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켰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죠. 만약에 스텝들의 의지는 충분한데 공간까지 수월하게 구해졌으면 특별히 어려움 없이 왔을 것 같아요. 그런데 공간을 알아보면서 저희가 저희 위치와 한계를 다시 느끼는 거죠. 저희 딴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다 같이 원하는 일인데, 우리가 뭐 모르겠어요, 기술적으로 부족할 수도 있고, 시나 시장 얘기하는 것과 코드가 안 맞아서 우리 얘기를 어떻게 관철시켜야 될지 잘 모르겠다고 할 수도 있었고, 그 나름대로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고, 또 일면은 초반에는 아마 그런 결과였을 것이라고 예상도 했었고, 그렇게 쉽게 공간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시작해서 결과물과 경과들을 추적한다, 라고 결론을 내렸었죠.”

공간문제로 인해 준비하는 사람들의 한계와 현재적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성과였던 것 같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을 미리 겼었으니까. 이해정 씨가 이야기하듯, 지역 안에 여러 개의 공부방을 만들 계획이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해 더 물었다.

“그렇죠. 실태조사 결과에서 해당 아동이 많았던 지역이 주택가와 농촌 지역이었는데, 문원동과 과천동, 별양동 이런 순서에요. 과천동 아동 같은 경우는 접근하기 힘들잖아요. 그리고 마을에서 알아봤을 때는 마을회관 같이 공간 확보가 쉬운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일단 접근성이나 이런 것을 봐서도 그 마을 안에 만들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정말 마을마다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닌가, 과천시 예산을 보니까, 청소년 공부방이 마을마다 만들어지는 것으로 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거기서 예산을 월 한 600만원을 지원하는 것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이 사업은 계속 있어 왔었어요. 물론 저희가 원하는 그런 방과후 방을 꾸리기에는 조금 불편한 구조이긴 하지만, 예산이 나가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그냥 독서실처럼 꾸려져서 아이들 이용도가 아주 낮아요. 아주 낮은데도 새마을부녀회나 이런 곳에서 위탁을 받아서 운영을 하기 때문에 예산이 나온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식으로 예산을 낭비하고 제대로 관리를 안 하고 이런 실정인데, 발상 자체는 마을 안에 가장 가까운 곳에 아이들 돌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내년에 지금 시작한 ‘맑은 내’가 지원을 받게 되면 초기 자본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빼서 다른 것을 만들든지, 아니면 이사를 가든지, 아니면 위탁을 받든지 이렇게 해서라도 더 만들었으면 해요.”

제대로 운영되는지는 의심스럽지만, 현재도 과천시는 청소년 공부방의 명목으로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예산이 저소득층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제대로 활용만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이 접근하기 쉽게 각 마을마다 공부방을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현재 방과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을 물었다. 방과후 교실을 열면 그곳에 다니는 아동들이 빈민 아동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아닌가?

“고민을 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아이들 비율을 정할 때에도 아직까지 그 부분을 명확하게 하지 말고 계속 얘기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살을 붙이고 붙여서, 우리가 먼저 그 내용에 대해서 풍부해지자, 이런 얘기를 했었죠. 처음에 이 곳에 저소득층 아동만 받을 것이냐, 아니면 일반 아동과 비율을 둬서 받을 것이냐, 아니면 받아 보다가 안 되면 일반 아동도 받을 것이냐 이런 세 가지 안이 있었는데, 현재까지의 결론은 저소득층 아동만 받는 것으로 결정을 했어요. 그게 또 어떤 부분이 있냐면, 처음에 마을회관을 빌리면 30명 정도를 예상을 했거든요. 그 때는 문원동을 생각했었고. 그러다보면 그 마을 안에 분위기가 잘 녹아들 수 있도록 일반 아동과 같이 받아서 자연스럽게 계속 해보자는 제안들이 많았었는데, 저희가 얻은 공간이 7단지 아파트였고, 여기가 좁아서 현재 계획하고 있는 아동이 15명밖에 안 돼요. 그러다보니까 적은 숫자에서 아이들 한 명 한 명 케어가 들어가고 그럴 텐데, 그 속에서 많이 섞었을 경우에 마을에서보다는 내부적으로 아이들 간에 어떤 격차나 이런 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돼요. 사실 준비하는 사람들 자녀들도 마땅한 방과후 계획이 없거든요. 처음에는 그런 것을 같이 고민했죠. 그런데 이 부분은 따로 컨셉을 잡자고 얘기가 됐어요. 저희가 기대하는 바는 이런 거예요. 준비모임 하시는 분들 중에 7단지에 사시는 분들고 있는데, 7단지라는 동네 안에서 아이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추진할 생각이고요, 준비모임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어요. 만약에 아이가 하교 길에 친구들은 딴 데로 가고 이 애만 혼자 가면서 친구들이 놀리면 어떻게 하냐, 했을 때, 정말 우리가 엄마가 된 심정으로 쫓아 뛰어가서 혼내주고 싶다고 하면서(웃음) 마을에서 인정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자리 잡게 하고, 7단지에 사시는 분들이 가끔 와서 청소를 계속 해주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고, 반응들이 나쁘지는 않아요. 준비하는 분들 뿐만 아니라 7단지에 사는 분들도 돌보겠다고 했고, 사실 우리가 후원의 밤이나 후원자들을 모집했을 때 아름아름 해가지고 우리가 정말 알만한 사람들은 인식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따돌리기보다는 아마 참가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방과후를 준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을 속에 자리한 방과후 교실을 마을 전체 주민들이 관심을 갖고 ‘내 자식처럼’ 돌봐주는 컨셉으로 추진할 계획이란다. 그야말로 한 마을이 ‘맑은 내 방과후 교실’의 선생님이 되겠다는 발상이다. 동네 주민들이 관심만 갖는다면 아이들 사이의 따돌림 현상은 상당 부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따돌림의 문제는 아이들 당사자들의 문제나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책임져야 할 공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방과후 교실은 아직 준비 단계고,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 어려움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다. 성공 여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그러나 준비모임이 구상하는 방향성은 옳아 보인다. 꿈이 아닌 현실로 실현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방과후 교실 얘기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지난 2월 달이었다. 3월25일, 포럼을 시작으로 6월 25일 후원의 밤까지 석 달만의 성과였다. 그 동안 거의 한 2주에 한 번 꼴로 준비회의를 가졌고 놀랄 정도로 일이 착착 진행됐다. 이 대목에서 물었다. 어떻게 해서 짧은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는지.

“글쎄요, 정말 우리도 내부적으로 얘기도 많이 했었는데, 일단 과천이라는 곳에 그렇게 모일만한 동기부여가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모이고 싶어 했던 것 같고, 뭔가 공통의 과제를 가지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다른 부분들은 이렇게 걸리고, 저렇게 걸리고 이견들이 많을 수 있는 부분들인데, 저소득층 방과후라고 얘기했을 경우에는 상당히 다방면에서 관계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공동육아 같은 경우에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이런 것들과 공동체들을 사회화시키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고, 학교평화 같은 경우는 그 안에서 상담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 같고, 그 다음에 한살림 같은 경우도 지역에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을 찾고, 우리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주부들이다 보니까 그 아이들이 좋았던 거고, 그 다음에 학교 관계된 사람들은 그 일이 학교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하니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결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품앗이도 그렇고요.”

방과후 교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동기부여로 충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신들린 사람처럼 일하는 걸 보고 서로가 놀랬다고 이해정 씨는 말한다. ‘자발성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단다. 그러나 동기부여가 성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또 물었다.

“.......서로 자극이 되어서 그런 것 같고,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사람이 많이 모이고 그러니까 오히려 책임감을 각자가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일을 이렇게까지 벌려 놓고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있고, 처음부터 실패를 했으면 대충 정리하고 이랬을 텐데, 기대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책임도 많이 느끼고 있죠.......오히려 보통 우리가 모임을 갖고 다음 모임을 잡고 다음 모임 때까지 뭘 진행하자고 하잖아요. 정말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것은 처음 봤어요. 막 서로 확인하고, 또 하나의 큰 축이자 중요한 존재가 우리 모임 속에서 공무원 노조 분들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시에서 어떻게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처음에 참가했어요. 그래서 우리한테 정보를 많이 주고 했었는데, 가다보니까 공무원노조 분들이 상당히 저희가 중심을 잡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희가 너무 교육에 치우쳐서 얘기를 한다든지, 시와의 관계에서 상당히 소극적으로 된다고 할 때, 이런 부분들을 바로 일으켜주는 것 같고,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하고 후원의 밤 할 때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제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대게 많이 역할들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비록 일반 시민들이 준비하지만, 공무원 노조 속에서 많은 분들이 동참을 하셨기 때문에 그야말로 공무원들이 같이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다보니까 우리도 빨리 자리 잡고, 사회복지과 만날 때, 시장 만날 때, 정말 시청 식당 빌려서 행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정보들을 빨리 빨리 제공을 받으니까 우리가 우리끼리 너무 토론에 빠져서 가지 않도록 상당히 많이 역할을 하신 것 같아요.”

방과후라는 주제가 생활과 밀접한 주제였기 때문에 관심이 꽤 높았다고 추측해볼 수 있었다. 책임감 있는 일처리와 공무원 노조의 참여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정 씨는 부정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은, 참여했던 사람들의 개인적 역량도 무시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각 분야별로 날고 기는 사람들이 다 있었으니까. 그러나 성공요인을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기는 어딘가 좀 부족해보였다. 어떤 일이든 모두 책임감을 갖고 일하기 마련이고, 공무원노조가 참여하는 일들도 많을 테고, 생활 관련 주제들도 많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이 주제만 폭발적인 관심을 가졌을까? 그 해답을, 아니 해답이라기보다 그 해답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은 이해정 씨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생각이 드냐면, 실제로 공동육아를 고민했던 집단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교류하고 있고 그 사람들이 공동육아가 지역사회와 교통해야 한다는 당위성들을 가지고 이 일에 접근했기 때문에 스며들어왔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부분들, 교육의 내용을 결정하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얘기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우리가 흔히 일반 주부로서 원하는 것이 있잖아요. 원하는 교육의 양이라는 것이 있는데, 만약 내 아이를 방과후 교실에 보낸다면 안전하게 보살펴 주고, 또 잘 먹여주고 깨끗하게 씻어주고, 또 숙제 했는지 확인도 해주고, 거기까지. 그런데 만약에 너무 실험적인 교육을 한다면 나도 붙어야 하고 차도 운전해줘야 하고, 그러면 부담스러워지는 거죠. 그냥 아이들이 편하게 갔다 오고 그러면 좋은데, 그래서 한 편으로는 좀 수월하게 가자, 부모들도 접근하기 쉽고, 마을 사람들도 지나가다 들러서 청소기나 한 번 돌려주고 가는 식으로, 이렇게 접근성이 쉬운 것으로 가자, 또 한편으로 교육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사람들은 여기 오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니까 어떤 방식으로, 어떤 학습 위주로, 어떻게 가자고 하는데, 이런 부분들이 좀 걸려요. 그래서 많이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고, 저는 또 지금까지 같이 굴러온 멤버십이라는 자체가 상당히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 부분들이 잘 갈 수 있도록 서로 간에 그런 문제로 관계가 틀어지지 않게 바라고 있어요.”

공동육아를 고민했던 사람들. 지금도 지역운동의 모델로 회자되고 있는 곳이 마포의 사례다. 천막농성을 통해 성미산을 지켰고, 카센터 조합을 만들어 실험 중이고, 대안학교, 두레 생협과 동네부엌(밑반찬 조합), 그리고 참여자치 마포연대 등을 만들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지역. 이렇게 생활을 주제로 마을 속으로 운동이 확장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마포의 지역운동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공동육아의 경험을 가진 수백 명의 조합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문제에서 동네의 문제로 확장시킨 주목할 만한 사례인 것이다. 물론 과천의 사례는 공동육아의 경험을 지닌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넓은 의미로써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고, 더 넓게는 정서적 공감대만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천이라는 좁은 동네에 공동육아조합이 세 군데나 있고, 이를 발전시켜 대안학교를 실제로 운영하는 곳도 있다. 방과후 교실에 참여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공동육아를 경험했다는 사실에서 공동육아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는 실체인 것이다.

“네, 참여하고 있는 분들 중에 준비모임에 들어온 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무지개학교도 있고, 튼튼어린이집, 어깨동무가 있고. 무지개 같은 경우는 실제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음으로 양으로 무지개 분들이 여기에 후원을 하고 일을 돋고 많이 하고 있는데, 이곳의 관계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많이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공동육아, 넓게는 대안교육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이 지역사회로 확장되고 있었다. ‘학교평화’도 거기에 맞닿아 있다. 과천 방과후 교실의 사례도 이런 지역적 정서와 맞물렸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무튼 평가의 시기는 이르므로 더 두고 볼 일이다. 주제를 바꿔, 이해정 씨는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에서 진행하는 ‘열린 숙제방’이 인상에 많이 남았다고 한다. 결굴 지역 네트워크가 아이들을 돌보는 시스템. 소박하게 아이들 숙제를 해주면서 하나의 모델을 만들어나간 경로가 많은 시사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해정 씨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과천에시 진행하고 있는 방과후 공부방이 ‘녹색삶.......’의 숙제방과 이전부터 해왔던 빈민지역의 공부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차이가 있죠. 그러지 않아도 저희가 뜻은 좋은데 경험도 없고. 그런 점이 혼란스럽고 했었는데, 뭐 이 지역에서 주민운동의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결국 시작은 이렇게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교회나 복지관이나 독지가가 혼자 나서서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 때문에 같이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중심을 갖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어떤 부분이냐면, 아이들을 어떻게 돌보고 가르치고 할 것인가, 실제 내용을 만들어낼 때 그런 고민이 드는데, 우리는 지역 안에서 다른 곳에 비해 교육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 공동육아나, 대안의 교육을 실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과천 지역에서는. 그래서 지역방과후의 교사나 이런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문제제기를 했었는데, 조금 중심을 잡고 가야할 것 같아요. 공부방연합회나 다른 지역의 방과후와 연대해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게 올바르지 않겠는가 생각하거든요. 자칫 잘못하면, 공동육아에 맞는 교육법이 있는 거고, 공부방에 맞는 교육법이 있기 때문에 섣불리 우리가 뭐 아이들의 어떤 공동육아 식으로 교육을 해서 괜히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부분보다는 일단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곳이 학교와 가정이니까, 그 중에서도 학교생활에 충실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원해주고 도와주고, 그리고 가정에 돌아가서 조건이 너무 힘들다면 너무 지치지 않게 충분히 잘 먹고, 여기서 잘 쉬고, 그 다음에 가능하면 이거는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공부방이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그런데 주체가 되어서 많은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랬을 경우에 이런 사람들이 개인 후원을 해준다든지, 토요일 같은 경우는 급식지원이 안 되고 그러면 도시락 배달도 해주고 아이들의 이웃이 되어서 돌보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다시 한번 삐딱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전 빈민 지역과는 다르게, 녹록치 않은 수천만 원의 전세자금을 짧은 시간에 모았고, 공부방의 환경도 그리 나쁘지 않고, 준비하는 주체들도 지식인들이 대부분이고.......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가지는 그거였어요. 방을 구하면서 너무 비싼 거예요. 시와 접촉하다가, 에이, 우리끼리 해야겠다. 그 마음까지는 난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먼저 시작을 하자고 하고, 집을 구하려고 했더니 너무 비싼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쉽지 않았다 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고, 그렇지만 그런 의미는 있는 것 같아요. 잘 사는 동네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더 힘든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막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같이 섞이겠다고 작심을 한 거고, 사실 뚜껑을 열고 진행을 하다보면 저희가 생각한 것과 아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많이 깨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과천에서의 의미라고 한다면 저는 어떤 부분들을 생각을 하냐면, 과천 같은 경우가 지금까지 지역의 과제를 받아낼 때 주로 환경문제였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실제로 예산공부에서의 가장 큰 소득은 정말로 도시경영에 있어서 찾아가는 예산이어야 하고 찾아가는 복지여야 하고 찾아내서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런 정치여야 한다는 것이 저희가 배운 가장 최고의 가치라는 거죠. 과천 같이 환경이 좋은 곳에서 계속 환경문제를 얘기하고 이러면서 저는 상당히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못 받았었다고 생각을 해요. 저 같은 경우 한살림 활동을 하기 때문에 어쩔 때는 지나치게 생활로부터 출발한 과제들을 잡아내는 싸움은 더디고 힘들고 하지만 거기서 훈련된 그런 감각으로는 지금 잡아내오는 커다란 과제들이 일반 시민들의 삶과는 못 느끼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정말 이 도시에서 살면서 제일 급박한 것이 뭐냐, 라고 한다면 1, 2학년들 급식이 안 되니까 정말 주부들이 일정한 활동을 하고 싶어도 그냥 문화센터를 가는 그 정도 밖에 할 수는 없다는 거죠. 아이들 먹이러 다시 돌아와야 되고. 그렇다고 하면 살기 좋다고 하는데, 보육시설은 얼마나 좋냐 라고 했을 때, 그도 그렇게 썩 믿을만하지 못하고, 믿을만한 곳으로 가려면 부모가 아주 많이 써포트 해야 하는 공동육아로 가야하는 거고, 아이들이 돌아와서는 어떠냐면, 썩 그렇게 일반 사설학원들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고, 그리고 일반 아동들을 마음 놓고 싸게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것은 저소득층 아동뿐 아니라 일반 아동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점심만 어디서 먹여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게 여기서 살고 있는 주부들이 너무 절실한 문제인데, 그 문제를 꺼내놨을 때 우리보다 더 힘든 아동들, 우리는 내가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어서 밥을 못 먹이지만, 밥이 없어서 못 먹이는 아이들도 있다더라, 그렇다면 그 아이들 먼저 해야 한다, 우리 욕구를 잠시 죽이고 그렇게 일의 순서를 잡아나가서 그 다음에 정말 우리가 또, 맞벌이 부부를 위한 밥 먹고 조금 싸게 보육을 하고 하는 이런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방과후 학교라는 것이 상당히 시민들 삶에서 밀접하게 접근해서 나온 주제라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할 때 기무사가 터져서 기무사 열심히 안 나온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나갈 이유가 있어야 나가는데, 그것이 안 되는 거죠. 머리로는 반대하지만 나가서 뭘 할 수 있을까? 시에서도 반대하는데.(웃음) 오히려 그런 부분, 실천 과제들로 접근하는 것이 좋은 것 같고, 그리고 준비모임 안에서 개인적인 욕구들, 내 아이가 갈 곳이 당장 필요하다, 이런 것을 한 풀 접은 거죠.”

우문현답이었다. ‘시민들 삶에서 밀접하게 나온 주제’라는 것이 방과후 교실의 핵심 요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했음직한 과제들이 제기되었고, 그것을 상대적으로 더 박탈감을 느끼는 저소득층 아동들에게 눈을 돌렸을 때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해정 씨는 한 마디 덧붙인다.

“저는 진짜 활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해 자기 행복까지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대의명분으로 하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해요. 당위성만 가지고 가기에는 호응을 받을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운동이라는 개념 자체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삶의 조건들을 바꿔나간다, 하는 식으로 변해야 할 것 같고, 그야말로 최근에는 자치라는 개념 자체가 저는 상당히 매력적이더라고요. ‘나의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라는, 내가 어디서 봤더라.......사파티스타에서 봤나?.......어디서 봤는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그 말이 그렇게 기억에 남았어요. 자치라는 것이 나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 자체가 힘들고 당위적이기만 하고 거대하기만 하고 위대하기는 할 텐데, 내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의 조건들을 바꿔나가는 것이 첫 번째로 우선 되어야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거시적인 것을 봐가는 것, 그렇게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나 자신부터 행복해지는 운동,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조건을 바꿔나가는 운동. 내 삶과 밀접한 운동. 거기서부터 운동은 시작된다. 과천 ‘맑은 내 방과후 교실’의 성공요인이라고 한다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운동의 당위성만으로 지역민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부안의 주민들이 치열하게 투쟁했던 이유가 ‘국가에너지체계에 대한 반기’라기 보다는 ‘삶의 터전이 황폐화됨’을 막기 위해서였고, 사파티스타가 총을 든 이유도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작은 문제에 큰 문제가 녹아 있듯, 지역에서부터 생활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운동은 메아리에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지역운동이 어떤 주제를 잡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물론, 앞서 얘기했듯, 과천의 방과후 교실운동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좋은 취지만큼이나 이 곳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그렇게 느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준비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진정성이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끝으로 ‘맑은 내 방과후 교실’을 통해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났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답으로 오늘의 인터뷰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지금 현재는 좀 두렵고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좀 그렇긴 한데, 내 아이가 학교에 가서 지내고 이러는 것을 보면서 그 주변의 아이들을 만나는 거니까, 아이들이 실제로 자신감을 얻어가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게 속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쩌면 학교생활에서 하나씩 자기가 취득해 가고 얻어 나가고 칭찬도 받고 이런 식으로 되면서 아이들이 성취감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너무 무리하게 어떤 인성교육이나 이런 부분들로 집중이 되면서 오히려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단지 저의 생각이고요, 그리고 아이들이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들이 힘들고 싫고 이러기 보다는 자기가 가진 조건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내가 사회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내가 다른 아이들과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서 나중에 결과에 승복하더라도 다른 아이들과 적어도 엇비슷한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 다음에 그렇게 건강하게 시민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 적어도 너무 상처나 세상에 대한 불신을 안 받았으면 좋겠어요"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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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문화’를 꿈꾸며 - ‘광진주민연대’를 찾아
인터뷰 : 민동세 사무처장

내가 잘 아는 한 소설가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소위 위대한 예술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가 쓴 그리스로마 신화 편역 작품들을 한 때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뭔 놈의 신들이 그리도 많이 나오는지. 아직도 머리 속에 빙빙 돌기만 할 뿐, 나에겐 낯선 존재들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지역운동 판에도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기상천외하고 환타스틱한 이야기나 허구 같은 현실적 느낌이 아니더라도, 일종의 지역운동의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지역의 운동단체가 있다면, 우리가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단체는 어디일까? 운동은, 특히 주민자치운동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는 성립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신화와 같은 조직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퍼뜩 머리 속에 떠오르는 단체는 ‘녹색삶을 위한 여설들의 모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나의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또 하나, 조심스럽게 얹을 수 있다면 ‘광진주민연대’도 후보에 오르지 않을까?

위대한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어야 하듯(꼭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하나의 지역운동단체를 이해하려면, 그 단체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지역운동단체의 활동 방식이 엇비슷해 보이지만 지역적 특성, 구성원의 성격, 역사적 경로 등에 따라 판이한 성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의 지역운동단체를 이해하려면 그 역사를 차근히 살펴볼 필요가 있고, 꽤 오랜 역사를 지닌 단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아니, 짧은 역사라 할지라도 매우 복잡하고 독특한 태생 과정을 경험한 단체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창립 이후의 활동만으로 그 단체를 이해한다면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 있다. ‘광진주민연대’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3월에 창립한 ‘광진주민연대’는 횟수로만 치면 3년을 갓 넘긴 신생단체다. 그러나 그 단체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뭘 모르는 소리!’라며 야유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 광림세미나하우스에서 개최된 [풀뿌리 주민활동가 워크숍]에서 ‘광진주민연대’를 간략하게 소개받은 적이 있었는데, 만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러 단체들이 ‘광진주민연대’로 통합하는 과정이 꽤 흥미진진했다. 직접 민동세 사무처장의 입을 통해 ‘광진주민연대’의 역사에서부터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지점을 들어보자.

일단, ‘광진주민연대’의 복잡한 태생 과정에 대해 물었다.

“굉장히 어려운 얘기인데.(웃음) 거꾸로 설명하는 게 아마 쉽게 이해될 겁니다. ‘광진주민연대’ 라고 하는 이름을 쓴 것은 2001년 3월24일입니다. 그 전에는 주민연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 잘 아시겠지만, 지역에 ‘광진시민모임’과 ‘광진복지센터’라고 하는 두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광진시민모임’은 지자체 선거가 끝난 96년도에 지역에 있는 젊은 활동가들이 지방자치에 관심을 갖는 활동이 필요하지 않느냐, 그래서 한 1년 정도 가칭 ‘젊은 이웃’인가 이런 이름으로 모임을 하다가, 96년 10월에 ‘광진시민모임’을 출범을 했죠. ‘광진복지센터’는 그보다 조금 뒤에 98년도에 새로 만들어진 단체예요. 차이가 ‘광진시민모임’은 아까 말씀드린 지방자치 영역이었고, ‘광진복지센터’는 소지역에서의 주민조직화를 목표로 했어요. 그 소지역이 어디였냐면, 광진구 안에서도 화양동, 노유동, 자양동 이라고 하는 세 개 동 정도, 단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인데, 그 세 지역에서의 주민지도자를 발굴해 내고 성장시키자는 취지였고, 주민조직을 기반으로 해서 활동은 주로 지역복지와 환경이라는 것으로 활동을 했죠.
그런데 98년도 ‘광진복지센터’가 또 어떻게 만들어졌냐 하면, 그 전에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동주민의원’과 ‘내일을 위한 지역환경연구소’라고 하는 단체가 재통합하는 과정을 겪었죠. 그 중에 하나인 ‘성동주민의원’은 지금까지 주민연대 부설기관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민의원은 91년도에 만들어졌어요. 주민의원 자체도 처음에 만들어질 때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동부지역보건의료인회’가 있었어요. ‘동부지역보건의료인회’가 뭐냐면 성수 지역에 작은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건강진료 했던 의료인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입니다.......‘동부지역보건의료인회’ 사람들이 공동출자를 해서 ‘동부지역보건의료인회’의 부설기구 ‘성동주민의원’을 92년 5월 달에 만듭니다. 그런데 주민의원 활동이 커지면서 보건의료인회는 해소가 됐고, 주민의원 활동만 지역에서 활동하는 과정이 있었고요, 또 하나는 ‘내일을 위한 지역환경연구소’가 있었는데, 저는 이 곳에서 93년 7월에 상근하기 시작했고, 그 지역환경연구소가 지역 연대활동을 나오면서 민주단체협의회에 가입을 합니다. 거기서 주민의원을 만난 거죠. 주민의원도 그 당시에는 의료기관이라기보다는 의료단체로 해서 민협에 가입을 했죠. 거기서 고민이 맞춰지다가 98년도에 서로의 필요성이 있었던 건데, 주민의원은 적극적이 활동의 필요성이 있었고, 제가 있었던 연구소는 재정에 대한 부분들이 상당부분 어려웠었고. 그러면서 두 개의 활동을 총화시키면서 소지역의 주민들에게 의료와 환경이라는 주제로 접근하자, 이렇게 된 거죠. 그런 과정들이 쭉 흘러온 거죠.

길게 보면 저는 계속 91년이라고 고집하는 거고(웃음), 지난 워크숍 때 대표님 하고 역사를 짜면서 합의를 했죠. 91년 5월이라고. 그리고 크게는 98년 4월에 ‘광진복지센터’, ‘광진시민연대’, 실제로는 97년도 10월인데,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2001년도 약 1년간 통합 논의를 합니다. 그 때는 내용이 맞은 거죠. 왜냐면, ‘광진복지센터’는 소지역에서의 주민조직화라고 얘기했는데, 활동가 입장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죠. 양적으로 팽창을 했는데, 지역운동에 대한 고민들이 기본 행정단위 속에서 고민이 된 거죠. 결국은 의정감시나 의정모니터링도 결국은 해야 할 일이 소지역이 아니라 단위조직이 필요한 거니까, 그런 고민이 있었던 거고, 그리고 시민모임은 2000년도에 총선이 끝나면서 활동성이 떨어지는 시기였고, 실제 사람까지 겹쳐 있었으니까요, 대표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시민모임 회원이면서 운영위원을 했으니까. 그런 논의들 중에서 지역운동에서의 비전을 어떻게 보냐면, 활동성들에 대한 도전, 예를 들면, 지역환경연구소의 역할로 주민조직화 활동, 지역보건 활동, 그리고 시민모임의 지방정치 운동 등 이 세 개를 저희 활동의 주 방향으로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연대를 해서 풀자, 그런데 지금은 하나가 추가가 됐어요. 문화적인 활동, 회원활동을 하다보니까. 지금 주민연대 성격이 그렇게 규정되어 있는 거죠. 참여자치, 지역복지, 지역환경, 그리고 문화, 이렇게 네 영역들이 주민연대의 주요 활동 영역이죠. 짧게 하니까 복잡하네.(웃음)”

정말로 복잡했다. 주요한 키워드의 단체로는 ‘성동주민의원’(91년), ‘내일을 위한 지역환경연구소’(92년), ‘광진시민모임’(96년), 그리고 ‘광진복지센터’(98년)가 그것이다. ‘광진복지센터’는 ‘성동주민의원’과 ‘내일을 위한 지역환경연구소’가 통합되어 만들어졌고, 다시 ‘광진시민모임’과 통합하여 현재의 ‘광진주민연대’(2001년)가 탄생하게 된다. ‘광진주민연대’만으로는 이제 갓 3년을 넘긴 꼴이지만, 그 전 역사를 열거한다면 13년이라는 긴 터널을 거친 중년의 단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동세 처장은 이렇게 덧붙인다.

“내용에 대한 부분은 안고 갔기 때문에 오히려 그간 개별 활동의 분야가 아니라, 어떻게 회원조직으로 할 것이냐에 대해서 고민들, 즉 ‘광진시민모임’의 활동방식과 ‘광진복지센터’의 활동방식이 다르니까 별로 문제가 됐던 것 같지 않아요. 왜냐하면 저희는 소지역에서의 주민조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주민들을 만났고, ‘광진시민모임’은 지방자치의 연관된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소수 회원의 정예화는 되어 있지만 대중 주민에 대한 사업들이 없었던 거죠.......‘광진복지센터’의 경우는 성장하는 고민들 속에서의 내용이 있었던 거고, ‘광진시민모임’은 성장하다가 정체되는 고민 속에 있었기 때문에 통합하는 시기가 맞았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개별 단체의 고민의 지점이 맞아떨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 1년 정도, 통합과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한 날 한 시, 해단식과 창립식이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91년 ‘성동주민의원’ 설립부터 치면, 녹록치 않은 역사를 지닌 셈이다. 통합되고 난 다음, 어떤 평가들이 있었는지 물었다.

“.......아직 주민연대라고 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이제 한 2년 정도, 3년, 4년 차로 접어들었는데, 다시 평가해봐야죠. 1기 2년이 끝나고 나서 과거 각각의 활동들에 대해 평가하지는 않았어요. 자체 조직 진단 들어가고, 회원 설문조사 하고 운영위원회에 운동적 조직전망들을 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올해 끝나서 실제 2기 4년이라고 하는 시간을 갖고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을 좀 고민을 해봐야 하는 거죠.......저희의 정체성이라는 부분은 1기 과정 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를 했어요. 다 의견을 모아서 우리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운동조직이다, 주민대중조직이다, 이런 몇 가지에 대한 평가, 정리를 내린 거죠. 거기에 맞춰서. 그 조직 진단에 맞춰서 8가지의 활동방향의 과제를 잡았는데, 그것을 잘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다른 평가라는 거죠. 뭐냐면, 우리는 공통으로 해서 지방자치 영역, 지역복지 영역, 지역 환경 영역, 그리고 문화가 한 축으로 생겼다고 했는데, 그 활동의 영역이 우리 조직이 운동조직화 해야 되는 일곱 가지 정도의 과제를 놓고 평가하는 것은 좀 다르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런 단순한 활동 영역들과 그 활동에 대한 계획, 기획, 그리고 결과, 이런 것들인데, 사실 운영위원회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런 영역들의 부분보다는 사실 다른 내용이죠. 보다 많이 대중조직을 했는가, 재정자립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들이 사실 과제로 나와 있는 거죠.”

1기 2년의 활동은 ‘광진주민연대’의 정체성을 형성한 기간이라면, 앞으로 2년은 진정한 평가의 시기가 될 것이라고 민 처장은 말한다. 평가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 활동에 대한 평가와 조직이 안고 있는 평가 목록은 다른 차원이라고 말한다. 칼로 물 베듯 명확할 수는 없지만, 냉정하게 자기 진단을 위해서는 세부적인 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접고, 새로운 주제로 들어갔다. ‘광진주민연대’의정체성을 ‘시민운동조직’이라고 못 박은 이유를 물었다. 지역운동단체나 주민운동단체가 아닌, 왜 시민운동단체인지.

“그것은 구성인자들의 스펙트럼 때문이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예를 들면 ‘광진주민연대’라고 하는 이름이 된 과정 속에는 몇 가지 명칭에 대한 얘기가 나왔어요. ‘주민’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은 저였어요. 지역운동이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데,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안에는 상근자는 아니지만 회원들 간에, 그리고 주민연대를 꾸려나가는 운영위원들 간에.......생각과 내용들과 전체를 다 아우를 수 있는 용어를 선택하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 실제 아주 명확하게 갑론을박을 해가지고 정하지는 않았어요. 보편적인 의견을 수렴하면서 거기에 중용하는 그런, 잠깐만요.(총회자료집을 가져옴)........여기 보시면.....(자료집 페이지를 넘김) 여기부터가 운영위원회의 조직진단의 과정을 통해서 정의를 내린 거예요. 어떻게 보면 막 풀어냈는데, 그것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명확하게 정체성을 명료화하는 작업을 하자, 이런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안으로 수 있는 것이 뭐냐, 이런 거였고, 올해도 여전히 기조는 지난 번에 이 평가에 근거를 해서 잡을 수밖에 없는 거죠.”

2003년 정기총회 자료집에는 조직평가를 언급하면서 ‘광진주민연대’의 중심 기조(철학 가치)와 지역적 위상을 적고 있다. 철학 가치는 “정의, 평등, 사랑의 정신을 토대로 참여자치, 나눔, 환경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지역사회를 지향”함을 명시하고 있고, 지역적 위상은 “광진주민연대는 지역사회에 ① 시민운동단체로 보여야 한다. 아울러 ② 주민자치조직으로, ③지역대중조직으로 보이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언어로서 시민운동단체가 가지는 의미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시민운동단체의 정의가 다를 수 있다(공동작업에 나타난 지역사회 이미지의 구체적 내용). 따라서 이후 지역사회에서의 시민운동단체라는 규정과 역할에 대해 의제로 정하여 더 깊은 토론과 정리가 필요하다.......”라고 되어 있다. 나름대로 위상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조직의 위상은 더 깊은 토론과 정리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이기도 하다.
‘광진주민연대’ 상근자는 4명. 부설기관으로 ‘성동주민의원’과 ‘자활후견기관’이 있다. 부설기구로 ‘아기사랑후원회’가 있고, 문화교실, 복지위원회, 환경위원회, 문화위원회 등에 여러 소모임들이 있다. 지역 단체 치고는 꽤 큰 규모다. 회비를 내는 회원은 150여 명 정도, 독립채산으로 운영하는 자활후견기관이나 아기사랑후원회 등에 이름을 걸친 사람들을 합치면 그 수는 상당한 수준이다. 재정 규모도 만만치 않은데, 2003년 결산서를 보니 한 해 수입이 2억원을 넘었다. 물론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보증금 5,000만원 정도는 제외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지역운동단체로서는 꽤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주제를 넘겨, 몇 해 전부터 준비해오던 의료생협에 대해 물었다. 부설기관으로 있는 주민의원이 든든한 토대가 되었을 텐데, 왜 추진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의료생협을 몇 번 준비를 했었어요. 작년에 주민의원 공공화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1년간 운영을 했어요. 1년간 매달, 정리를 했는데, 내부․외부적으로. 결론은 의료생협이 공공성 확보의 정답은 아니다, 서울이라고 하는 특이성이라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의료생협을 추진하려고 했던 전망을 접고, 다른 쪽에서 공공성 확보를 한다, 일차적으로 직원의 경영참여, 그 다음에 주민연대 운영과 주민연대 외부로부터 운영참여, 그 다음에 나름대로의 재정의 투명성, 지역사업 확대, 이런 것을 안아 가자, 이렇게 결론이 났었죠.......어쨌든, 지금 서울에서 의료생협을 하는 곳이 영등포 사업선교회, 장애인센터인데, 장애인센터 같은 경우는 특화된 곳이고, 영등포 사업선교회 같은 경우는 교회와 같이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는 거고요, 일반적으로 기존의 안성이나 평화나 그 쪽을 놓고 봤을 때, 지역에서 조합으로 묶을 수 있는 메리트가 없다는 거죠. 내가 아프고 둘러보면 주민의원 옆에만 해도 굉장히 많거든요. 선택적 폭이 넓은 상태에서 여기 조합자에게 줄 수 있는 인센티브가 안성이나 이런 곳에서 주는 것처럼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느냐, 시골은 그게 가능하죠. 시골은 어쨌든 상시적 관리체계와 내용을 만들 수 있고, 또 하나는 기존의 의료생협의 상이 뭐냐, 지역 의료생협이라는 지역사업이 뭐냐, 했을 때 주민들 모임이 자유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주민들 하고 있는 거잖아요. 더 필요하다면 주민 요구에 의해 또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그 안에서 주민의원의 역할을 만들면 되죠. 그러나 의료생협은 그런 모임이 없으니까, 자기가 해야 하니까 생협공동체 관점이 필요한 거죠. 우리는 오히려 활동의 내용보다 다른 것 때문에 의료생협을 고민한 거예요. 소유의 문제 때문에 그런 거죠. 저희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던 거죠. 활동은 똑같이 했던 거기 때문에, 일도 그렇게 하고 있는 거고, 그러나 소유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 그걸 장기적으로 보자, 했던 거죠. 공공성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었죠.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현재의 주민의원을 지역재산이라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냐, 원래 말은 계속 그렇게 말하거든요. 이건 개인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실제 그렇게 되고 있지 않잖아요.......어쨌든 그것을 생협으로 한다고 해도 아까 얘기했던 부분을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기존의 활동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담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오래전부터 ‘광진주민연대’가 의료생협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왜 설립을 하지 않았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꽤 깊은 고민이 묻어 있었다. 민동세 처장은 현재의 의료생협운동을 이렇게 보고 있었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얘기하면, 의료생협이 협동조합으로 공식화되면서, 제가 보기에는 활동의 내용이 위축되었다고 봐요.......저 개인적으로 보는 평가는 오히려 제도가 안정화되면서 의료생협을 준비했던 의료인들이 그토록 꿈꾸거나 열정적으로 가졌던 신념대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뭐, 그거야 제 평가를 기분 나쁘게 들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그냥 제 생각이고, 우리 내에서는 그런 얘기보다는 실제 가능성이나 비전, 전망, 그리고 아까 얘기한 공공성 의료를 얘기하면서 여러 생협을 만나서 얘기도 했어요. 또 그 전에 우리 쪽에서 의료생협법 개정되기 전에 양쪽 생협 준비하는 쪽과 우리 쪽 실무 준비하는 사람들과 같이 했었거든요. 우리의 지역적 특성이나 활동의 습성이나 조직의 내용들을 봤을 때, 이런 정도의 활동이 맞겠다, 라고 정리를 해가고 있는데, 여전히 확정적 답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방향을 잡고 지금 한 1년 정도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의료생협이 좋은 모델이긴 하지만, 결국 지역적 특성대로 활동의 내용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민 처장의 얘기다. 물론 여전히 확정된 답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얼마 전 ‘광진주민연대’는 구의원들의 관광성 외유로 인해 장기간 1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광진 뿐 아니겠지만 지방의회는 개혁의 주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에게 지방자치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물었다.

“어려운데요.(웃음) 분명히, 저는 어쨌든 사람들이 개혁의 대상이라거나 아니면 쓸어야 할 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전히 의회나 아니면 지방정부를 개혁해야 된다거나 아니면 변화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뭐냐,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한다고 해서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삶이나 삶의 질적인 부분들에, 아니면 그 지역사회의 장기적 비전이라고 하는 부분들이 추진될 때에 중요한 역할이 바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에 있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역할이 안 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인제 그 역할은 몇 가지 과정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희 단체도 저희 단체에 기본적인 본질적 존재의 가치는 뭐냐면, 아까 얘기한 그런 영역들 있죠. 주민자치와 주민복지와 환경과 문화라는 것을 통해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만들어간다는 거거든요. 똑 같은 목표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활동들 속에서 여기에 참여하는 회원들이 직접적으로 자기 활동을 통해서 찾아가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죠. 분명히. 왜냐하면 지역사회라는 것이 그 지역사회에 아무런 조직이 없고, 주민 조직 하나만 있어서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그 말이 맞지만, 이미 지역사회에 의결하고 집행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것은 인간의 역사, 사회정치적인 역사 속에서 하나의 모델로 만들어 진거죠. 대의정치적인 부분이라던가, 아니면 국가권력의 집행이라던가, 이런 것이 나와 있는 거거든요. 결국은 같이 가야 하는 건데, 그렇게 출발하는 것이 맞다, 그 얘기는 뭐냐면, 지방정부나 지방의회를 지역사회가 공동체성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의회나 지방정부를 적 개념이나 개혁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원래의 기능을 찾아가야 할 것이냐, 이것이 먼저 해야 할 고민이어야 하고 보고요. 역시 그 방법도 주민 조직의 요구들이 강하고 그것이 대다수 주민들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되는 거겠죠. 그런 시선의 필요성에 의해 가는 것과, 그 다음에 그 중요한 조직, 그 변화발전이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방정부나 의회가 어떠한 과정으로 구성되느냐, 당연히 선거로 반영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참여 공간은 열려 있는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요 근래의 주민운동과 우선적으로는 주민조직의 요구와 힘들과 활동들로 견인해 가는 모습들이 있는 거고, 방법상 안으로, 그 안에 선거라고 하는 과정들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본래 역할을 찾아가도록 만들어줘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핵심은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의 제 역할 찾아주기다. 그것이 개혁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운동단체는 동등한 파트너로 여길지 모르지만, 지방정부나 지방의회는 운동단체를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전히 이런 세력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뿌리 내린 관변조직들과 끈끈한 정을 쌓고 있다. 그래서 물었다.

“.......다만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 존재하는 것과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 존재하는 건데, 지금까지는 어땠냐면,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조직들의 힘들이 지역사회에 반 이상은 차지하고 있었는데, 반 이상이 뭡니까, 4분의3 이상을 차지했다고 봐야 되는데, 그리고 주민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운동조직이나 이런 조직들은 사실은 적은 수인데, 다만 우리의 명분은 뭐냐, 공공성이라는 거죠. 그런데 아까 얘기했듯이, 중요한 조직기관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조직들인데, 당연히 같이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아까 얘기했듯이, 전체적인 부분은 그런 주민운동조직이 확산돼서 실제 그러한 관변조직보다 양적, 질적으로 성장을 한다면 당연히 변화가 된다고 보는 거죠. 다만 우리가 명분상 공공성을 얘기하고 있는데,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들 속에서는 상대가 안된다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뭐냐면, 선거라고 하는 흐름을 얘기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것의 변화들 속에서 이 기득권이 성장한 이유는 두 축의 기관이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가 그 기득권을 키운 거거든요. 엄청난 재정과 엄청난 조직을 넣어서 키우다보니까 성장한 거죠. 그렇게 성장시켜 놓고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조직화된 것뿐이죠. 마찬가지로 여기를 변화시키려면 전략적으로 선택을 하는 거죠.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이 전략이 적중을 해서, 전략적으로 후보를 내고 전략적으로 들어가서 나름대로의 각 지방의원과 지방정부가 자기네 집을 찾아가면 당연히 기득권에 대한 부분들이 분쇄된다는 거죠. 그러면 제대로 된 관계가 되겠죠. 그만큼 주민조직들이 성장들 해가고, 그러면 다시 누군가가 선택을 할 때 평가라는 것을 하겠죠. 둘 다 자기에게 영향을 주는 조직이 있는데, 공공선을 선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기득권을 선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런 선택을 좌우하는 시대가 도래하지 않겠느냐, 내가 원칙을 얘기하는 이유는 이후에 우리가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은 전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의회를 장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부분이 전제되지 않고 이 전략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나중에 반대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거죠. 또 다른 기득권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 부분을 강조한 거고, 여전히 그 방법이 원칙이지만, 현재 각 조직이, 우리 단체도 그렇고,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이제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대중화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올바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역사회 조직이라는 것은 다양하게, 그리고 대등하게, 가치 싸움은 해볼만한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상당히 억울한 경기를 하고 있는 거죠.”

민동세 처장은 이런 논리로 선거라는 공간의 활용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권력을 획득하려는 목표가 아니라 공공성을 추구하는 세력이 대등하게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사실 ‘광진주민연대’ 입장에서는 지방정치 참여가 민감한 부분이다. 이전까지는 직접적인 참여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현재 어떤 논의들이 오가는지 물었다.

“그 동안에도 개입을 해왔죠. 그런데 개입의 종류가 언제나 우리는 도도한 조직으로 있으면서(웃음), 그러니까 정말 악한 것에 대해서는 칼을 대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낮은 차원에, 이런 접근들이지 않았었나, 이런 것이고, 여전히 아직 우리 단체는 그게 더 커요. 물론 활동가들 안에서는 10년 계획이 있었어요. 98년도에 10년 계획을 세웠었죠. 그런데 이것은 활동가들의 생각인 거고. 조직적 생각은 아닌 것이니까. 그 논의가 주민연대는 올해 총선 전후로 깊이 논의를 구성하고 가면서 논의가 풍성해지고 있죠.......기본적인 목표는 2006년 선거에 후보를 내는 거죠. 논의 주체를 세웠고, 어쨌든 관심 있는 사람들 안에서 어느 선까지냐, 라는 얘기들은 부수적으로 가고 있죠.......저희 같은 경우는 (지방선거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 출혈 같은 부분들은 없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기존의 방식들은 기성정당과의 관계 속에서 제도권 진출을 얘기했는데, 아까 얘기했듯이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합의목표로 정리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주민연대 후보로서의 선거 진출을 기본적인 목표로 삼고 있고, 정당들에 대한 부분은 사그라들고 있죠. 그렇게 반발이나 이런 부분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 우리가 목표를 크게 잡고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제가 운영위원회나 특위에서 추진하는 것은 단체장을 포함한 선거를 얘기하고 있고,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수준은 한 명이라도 내는 거 아니냐, 이런 이견들이 있지만, 2년 간 그것을 잡아가는 과정이 있을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구로시민센터가 부러워요, 거기는 굉장히 명쾌하잖아요.......개인적으로는 의원보다 조직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조직 안에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어요. 우리 사무처 안에서는 사실 그 논의에 대해 답을 못했어요.......지역단체와 의원은 다르다는 입장이 있죠. 의회 진출에서의 조직의 활동과 의원의 역할은 다르다, 그래서 관계 자체도 다르게 잡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저는 개인적으로 어쨌든, 그런 목표로 간다면, 전략적 방법도 바꿔야 한다, 우리 전략으로 놓지 말고 우리는 원칙적인 부분 속에서 가능한 하부전략을 다뤄야 하고 후보에 대한 것은 다른 쪽에서, 또는 그 안에서 바람직한 부분을 찾아가면 되는 거고, 그렇게 얘기를 하죠.”

이야기를 종합하면 2006년 선거에는 ‘광진주민연대’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지방 정치인이 있을 것 같다. 어느 선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단체장도 경우의 수에 포함된다. 민 처장이 이야기하고 있듯, ‘도도한 운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략과 전술이 실험되고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 실험이 정말로 성공하길 기대해본다.
‘광진주민연대’는 완성된 신화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신화이다. 조직의 비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지역운동단체의 힘겨움이 눈에 보이지만, 그들의 지향점과 건강성이 버티는 한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을 것 같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득권 세력과 공공성을 추구하는 건전한 세력과의 대등한 경쟁관계가 형성되길 기대해본다. 끝으로, 민동세 처장에게 ‘광진주민연대’가 표방하는 참여와 자치, 공동체의 상이 어떤 것인지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오늘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얘기하는, 주민연대가 얘기하는 자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나름대로 우리 조직의 자치 정도고, 질문 내용을 그대로 받아야 얘기하면, 저는 주민연대가 지향하는 것이 지역 공동체라고 얘기하지만, 굳이 거기에 토를 달면 공동체성의 회복이라고 저는 봐요. 그래서 우리 지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즉 대도시에서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을 문화적으로 풀어서 본다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광장문화’입니다. 열려 있는 공간 속에서 대화가 되고 논의가 되고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건데, 현재 지역사회는 광장문화가 아니라 폐쇄적인 사랑방문화라고 생각해요. 물론 우리가 좋은 표현을 쓸 때, 사랑방이라고 했을 땐, 자잘한 모임들로 표현을 하지만, 지역 운영이라고 했을 때는 사랑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랑방이 나오고, 광장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지역사회의 정치적 결정들은 광장이 아니죠. 지역 자체도 광장이 아니죠. 아까 얘기했듯, 자치라고 하는 부분들을 명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광장문화의 다른 말이 아닌가 생각해요.......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전제되어야 할 것은 시민의식의 성숙함이 있어야겠다, 그것은 여태까지 저를 포함해서 정말 건전한 문화라는 것들이 아니라 아까 얘기했듯이 폐쇄되고 음모론적인 것들에 의해서 훈련돼 왔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훈련 과정을 제대로 바꿔야 한다는 거고, 이런 것을 활동의 내용 속에서 만들어가야 하는 거고, 또 하나는 제도로서의 부분들이 있는 거죠. 제도로서의 부분들은 주민들의 삶 속에서의 선거라고 하는 부분들에 확장되듯이, 제도라고 하는 부분도 이런 부분과 맞물려 제도로서의 광장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복합적으로 이런 문제가 서서히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광진주민연대 홈페이지는 http://www.gjngo.org/index.htm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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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역시민운동'을 한다" - 구로시민센터-를 찾아
인터뷰 : 장인홍(지방자치위원장)

인텔사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었던 무어는 18개월마다 컴퓨터의 성능이 두 배로 상승한다고 말한다. 소위 ‘무어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이 법칙은 이론적 토대라기보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법칙이다. 그 과정이 어떠하든 최근 50년간의 상황은 ‘무어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그만큼 컴퓨터 성능은 다른 어떤 것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한국사회도 ‘무어의 법칙’만큼 빠르게 변해왔다. 인터넷이 은폐된 정보를 드러내고 교류함으로써 유수한 거대 기업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고, 급기야 정권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10년 전에 상상이나 했겠는가? 금강산으로 관광을 가고, 남, 북 정상들이 뜨겁게 포옹한 한 컷의 사진은 더 이상 ‘북한’이라는 금기시 된 동토의 땅을 더 이상 낯설게 만들지 않는다. 손에 꼽을 만큼만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련한 과거의 향수처럼 느껴지는 것은 빠른 템포의 변화를 체제내화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아니 5년 후의 한국사회를 전망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이 미래예측보다 더 빠르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시민사회운동의 형태도 조금씩 변해왔다. 공중에서 지상으로 연착륙하고 있고, 다루는 주제도 넓고 깊어졌다. 중앙정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방정치 참여에 대해서는 운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도 운동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떠올리면 녹록치 않은 과제로 떠오른다. 29만 원이 전 재산이라던 전두환이 저렇게 떵떵거리며 호화 골프장을 들랑대고, 친일세력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분단된 조국의 민족문제, 통일문제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이기도 하다.

구로시민센터는 본질적인 문제로 야기되는 민족문제의 실마리를 지역에서부터 풀어보려 한다. 스스로를 ‘지역시민운동’으로 규정하면서 회원들과 단단한 일치성과 결합력을 바탕으로 통일의 과제에 천착하고 있다. 지역에서 통일이라는 과제를 정서적이고 문화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인홍 지방자치위원장의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통일의 과제, 민족의 과제, 정치세력화의 과제를 좀 더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지역운동단체로서 민족문제를 중심에 놓지 않고 주민지도력, 공동체, 주민자치 논의만으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가 고민하는 지점들이 무엇인지, 또 구로시민센터의 전망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들어보기 위해 그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먼저, 구로시민센터의 역사를 간략하게 물었다.

“저희는 97년 6월에 문을 열었으니까, 만 7년 됐나요? 만 7년 저도 됐죠. 물론 정식으로 구로시민세터 개소하기 전에 한 몇 년간, 한 2년인가, 모색기간이 있었어요. 그 때, 구로지역에 있는 여러 단체들에 구로시민센터를 만들었던 창립멤버들이 여러 곳에서 나눠 있었죠.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있었고, 노동운동 외각 단체도 있었고, 통일운동 하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뭔가 사회변화 고민들을 하시면서 한 1년 반, 2년 가까이 모색기간을 거치면서 지역운동, 이런 화두를 붙잡고, 그 때 또 고민했던 것이 뭐라고 할까요, 운동의 대중 토대 강화, 상근자들만 있거나, 이런 것이 아니라 광범한 주민들 속에 튼튼하게 뿌리 내리고, 이런 것과 또 사회운동 세력들의 표현하면 정치세력화라고 할까요, 이렇게 두 가지 정도 화두를 붙여서 지역운동을 하자, 이렇게 해서 문을 열었는데, 사실 우리가 이렇게 나가봐야겠다고 하는 장기적인, 구체적인 플랜을 가지고 도전했다기보다는 지역운동이라는 화두만을 붙잡고 한 7년 정도 오면서 많은 성과도 있었고, 한계도 있었고, 그래서 저희 스스로가 저희를 규정한다고 하면, ‘지역시민운동’, 그렇게 개념화돼 있는지 모르겠어요. 보통 시민운동, 지역운동은 있지만, 지역시민운동이란 개념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그런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죠.”

장인홍 위원장은 구로시민센터의 창립멤버다. 창립 전 모색기간까지 치면 10여 년을 달려온 것이다. 구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 곳을 떠나지 않았으니, 거의 토박이 수준이다. 장인홍 위원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회원들, 활동가들, 간부들 중 한두 명을 빼고 모두 구로에서 살고 있다. 지역에서 운동을 하려면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는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추가로 조직의 모양새에 대해 물었다.

“일단 회원단체죠. 회원단체인데, 저희가 정회원이 있고, 자료회원이라고 있어요. 정회원은 일주일에 1회 이상씩 자기 소속 모임이 있고, 거기서 활동을 하는 분들, 이런 분들을 정회원이라고 하고, 자료회원은 저희가 각종 강좌를 할 때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이라거나 기타 저희와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관계를 맺고 있는, 정기적으로 소식지나 행사 있을 때 안내하고 소식지를 발송해주는 분들. 정회원은 현재 120여 분, 자료회원은 한 1400-1500명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렇고, 저희 내부에 사업 단위들이 있죠. 제가 책임자로 있는 지방자치위원장, 백해영의원과 공동위원장이고, 그리고 교육환경위원장이라고 해서 주로 자녀 교육, 그 다음에 생협, 이런 쪽과 관련해서 주부들 모임이죠. 그 사업 단위가 회원도 제일 많죠. 그리고 사회복지위원회라고 해서 자원봉사라든가, 그 다음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수급권자들 대상으로, 대표적인 것은 자활후견기관을 사회복지위원회에서 관할해서 하고, 그것이 사업체계고, 물론 거기에 문화위원회가 있어서 각종 동호회들, 기타 동호회라든가, 산악회, 미술반 이렇게 동호회들이 있고, 부설기관으로 어린이집이 두 개 있고요, 서점이 있고, 아이들 전문서점이고요, 자활후견기관이 있고, 그리고 구로 시민생협이라고 해서 있고, 그것이 현재 구로시민센터의 모양이라고 할까요.”

지역운동 단체 중에서 120명 정도가 일주일에 1회 이상씩 소속 모임을 갖고 있는 곳은 그리 흔치 않다. 그뿐 아니라 각종 위원회와 부설기관 등 조직체계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7년간, 활동가들의 땀방울이 눈에 선했다. 회원들의 회비납부 체계도 매우 독특했다. 회원의 회비는 월 4,000원이다. 각 분과에서 회비를 걷어 조직으로 납부하는 의무금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의무금 제도이므로 납부율이 100%를 자랑한다. 회비 액수에 대한 부담을 줄이면서 납부율을 높이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조직이 유지될 수 있는 비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상근자는 6-7명, 어린이집 등 부설기관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합치면 26명 정도 된다고 한다. 웬만한 중소기업 수준이다. 장인홍 위원장은 구로시민센터의 역사를 말하면서 ‘지역시민운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 개념에 대해 자세히 물어봤다.

“글쎄요. 용어상의 차이만큼 저희가 스스로 표현한 ‘지역시민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별다른 분석적 내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일단, 그런 것 같아요. 지역시민이라는 개념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존에는 주민,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었고, 그리고 계급계층적 성격, 여성, 청년, 그 다음에 노동자, 이렇게 있는데, 지역시민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그것은 저희가 해보니까 조직화가 가능하다, 그런 생각을 가졌고, 굳이 기존의 다른 단위와 차별성이나 구별정립에 있어서 말씀을 드리면 참여연대나 경실련이나 소위 말하는 중앙적 시민운동 단체들은 그야말로 지역적 토대들이 취약한 측면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저희가 생각할 땐, 그 분들은 그 분들의 역할이라고 보는데, 어떤 사회운동을 하던 간에 한국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민족문제와 통일문제를 벗어날 수 없다 라는 거고, 시민운동도 끊임없이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접근하고 해야 한다. 참여연대에서 통일 관련된 사업단이 있긴 합니다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기존의 시민운동에 대해서 지역적 토대 부분과 한국사회의 근본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다가가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거고, 그런 차원에서 지역차원의 지역시민운동에 그런 부분을 녹여내서 총체적으로 성장하고 특히나 한국사회의 변화를 위해서 지역적으로 풀어나가지 않으면, 21세기적 여러 가지 과제들이 있잖아요. 환경, 교육, 이런 모든 부분들이 이제는 정치적으로 풀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그런 내용들을 좀 모아서 이런 것들을 지역시민운동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단순히 지민운동 얘기하고, 주민지도력 얘기하고 공동체 얘기하고,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제한되어 있다고 보는 거죠. 지역시민운동이 크게 보면 한국사회에 아직까지는 미약하다고 봐요. 한국 사회운동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기타 다른 사회운동들이 있고, 그렇지만 지역을 근거지로 한 지역시민운동이 정착되고, 그러한 단위들이 좀 서로 전국화 되기도 하고, 그랬을 때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정치세력화의 과제, 통일의 과제, 민족문제 해결의 과제, 이런 것들이 좀 더 확장되고, 그런데 대부분 보면 지역운동 단위들이 전국에 많이 있는데, 지방 같은 경우는 다르지만 서울 같은 경우는 빈민운동에서 출발한 단체들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주민지도력, 이런 쪽에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희가 봤을 때 부족하고 제한적이라는 느낌이 있고, 물론 당하고 연결돼서 하고 있는 관악 같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장인홍 위원장은 지역에도 조직화할 수 있는 ‘지역시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중앙 시민운동단체의 취약한 지역적 토대를 탄탄히 함으로써 한국사회의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의 시민운동적 성격을 띠면서 지역을 토대로 주민과 밀착한 운동을 전개한다고 이해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어쨌든 저희가 해마다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시민운동단체가 약화되었고 약한 측면인데, 저희가 1년에 한 번씩 통일잔치를 하는데, 이번에도 그것을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6.15공동선언을 기념하는 행사를 구청 광장의 차들을 다 치우고 열린음악회 형식으로 하는 거죠. 주민들 한 5,6000명씩 오고 그러는데요, 뭐라고 할까, 통일이라고 하는 것이 지역에서 정서적이고 문화적으로 접근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으레 주민들은 그 때 되면 구로구청 광장에서 통일을 기리는 열린음악회가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민족문제, 통일문제를 얘기하고, 이번에 룡천 돕기 이런 문제가 접근되기도 하는데, 그런 행사를 꾸리기 위해 추진위원들을 저희가 만드는데 추진위원들이 성금을 만원씩 내도록 하는데, 추진위원들을 1,000명씩 조직해서 성금으로 그 행사를 치루기도 하고, 이런 사업들이 가능하더라고요. 그런데 관악, 동북여성민우회 등의 단체들이 한국사회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도 많은 성과들을 내고 잘 되고 있지만, 그런데 뭔가 한국사회 운동에서 그런 부분을 뺀 사회운동, 시민운동이 됐든 무슨 운동이 됐든 제한적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죠. 어차피 우리가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잖아요. 끊임없이 그러면서도 지역활동가들이 자기의 방향을 어디로 위치지어야 하는 것이냐 했을 때에는 주민자치도 좋고 뭐도 좋고 다 좋은데, 그런 것들이 전체적으로 겨냥해야 할 방향, 분단된 사회의 통일문제에 접근하고 노력하지 않는 한, 저희가 봤을 때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장인홍 위원장은 운동의 중심을 놓친 ‘공동체’나 ‘주민지도력’ 논의는 많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범주로 인식될 수는 있으나 ‘전부 다’라거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에게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왜 ‘주민’이라는 용어 대신 ‘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글쎄요. 저희가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주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봐요.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객관적으로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실체가 존재한다 라는 거죠. 그런 개념이나, 그런 운동들이 존재하는 거고, 따라서 우리는 그런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하는 거죠. 주민운동이라고도 쓰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좀 일반 주민에게 잘 이해되지 못하지 않느냐, 시민운동이라고 하면 잘 이해되는데, 그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각인된 시민운동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 이것을 지역 차원에서 그런 과제들을 실현해 내고, 21세적 사회에서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지역시민운동의 시민이라는 것이 지역단위를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죠. 계급계층적 성격을 떠나가지고. 그 대표적 집단이 주부들, 또 저희가 최근에 해보니까, 아버지들도 조직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아동들, 청년들은 조금은 좀 세력의 특성도 있고 그래서 지역과 연관된, 특히 대도시에서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어쨌든 스스로 운동의 개념을 규정한 것은 애매함보다는 나은 것 같다. 일반 주민들이 ‘시민운동’에 더 친근하고 더 잘 이해하고 있다면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히 경험을 통해 객관적인 ‘시민’이 존재하고, 시민운동도 존재한다면 말이다. 주제를 바꿔 구로시민센터는 어떤 장점이 있는지 물었다. 조직의 성격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을지 듣고 싶었다.

“글쎄요. 장점이라고 한다면, 저희가 인제 뭐라고 할까, 일단은 저희 회원들이 거의 100%로 활동가를 다 포함해서 이 지역 주민이라는 거죠. 주요 활동가들은 대부분 노동운동을 했거나 학생운동도 하고 이런 저런 사회활동을 거의 15년, 10년 했던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이 지역에 살면서 지역주민으로 통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지역과의 결합력이나 지역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그런 것이 하나 있고요, 그다음에 일치성들이 높은 것 같아요. 처음에 시작했던 분들이 만들 때는 30여명 정도가 상당히 정서적 일치감이 높은 상태에서 출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있고, 사업적으로 지역에서 시민운동하면서 통일을 생각한다는 것, 그런 것을 끊임없이 접근하려고 한다는 것, 물로 지역시민운동을 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정치세력화라든가 이런 것에 대해 늘 같이 고민을 하고 실제로 시도들도 하고, 성과도 냈고, 한 것 같아요.”

예상했던 대로, 회원들의 일치성은 부러워할만 했다. 그런 일치성이 구로시민센터만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규정하고 있었고, 구로시민센터의 자신감의 발원이기도 했다. 주제를 또 바꿔, 장인홍 위원장이 맡고 있는 지방자치위원회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다.

“그 전에는 ‘지방자치위원회’였다가 ‘참여자치위원회’로 이름이 몇 번 왔다 갔다 했는데, 지금은 좀 그런 기능이 분리되어 있지만, 사회 참여적 기능과 지방자치 기능, 예를 들면 전국적 사안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뭐, 총선시민연대라든가, 이런 것들, 또 요즘 같은 경우는 용천 돕기 사업이라든가, 탄핵 같은, 사회 참여적인 사업이라든가, 그리고 구로 지역의 권력 기관들, 정당, 구로구청, 구의회, 이런 것에 대한 감시 견제 활동, 이런 것을 포괄해서 사업단에서 하고 있는데, 지금은 사회 참여적 기능은 좀 분화되고, 지방자치적 기능들, 가장 큰 것은 의정감시활동, 지역 현안 해결 사업들, 그 다음 신문 발행, ‘구로 사람들’이라고 월 1회 신문 발행하는 것도 있고요.”

주로 의정감시와 지역 현안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주민자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주민자치라는 것이 있는데, 그야말로 지역의 문제를 지역의 변화 발전을 주민들이 참여해서 자신들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솔직하게 몇 년간 그런 활동을 해보면서 저희가 빈민운동적인 활동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고, 최근에 주민자치센터를 보면 상당히 어렵다 라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거나 또는 그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개념들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대단히 제한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일 거다, 하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그런 풍토들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필요한 시간에 우리의 노력이 더해질 텐데, 뭔가 그런 개념들을 잡고 지역에서 잘 그려지지 않는 상태, 저희가 주민자치위원회에 여러 개 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 모임도 있거든요. 대부분 한 명 두 명, 다 관변인사들이 차지하는데, 실효적으로 접근하자, 그래도 주민자치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목적들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순간 앞이 깜깜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실효적으로 접근하자,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이 한 두 가지는 있다, 이런 정도로 접근하고 있고, 저는 주민자치라고 하는 것이 행정적인 측면, 이런 것과 결부되면 지금 시점에서는 대단히 허구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고, 저희는 생협이라든가, 우리와 연관된 적어도 우리와 관계된 주민조직들이 더러 만들어지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구로 3동, 4동에 마을문고가 만들어지고 있거든요. 물론 외형적 틀은 3동 같은 경우는 주민자치센터에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것을 만들고 이끌어나가는 것은 저희가 하고 있거든요. 4동도 마찬가지고요, 이 속에 자원봉사들이 다 저희 회원들이고요, 다 동네 안에 있거든요. 여러 가지 교유도 하고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현 단계에서 우리가 그리는 주민자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정도일 거라는 거고, 동네 문제를 다 모여서 해결하는, 현재에도 행정체계가 있잖아요. 통장, 반장, 이 체계를 대체하거나 이것을 능가하는 뭔가를 지역에 따라서 특수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을 일반화하기엔 현 단계에서는 주민자치를 구체적으로 논하기에는, 모르겠어요, 저희 경험으로서는 상당히 좀 그렇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저희 생협 마을모임, 마을 문고, 학교에도 명예교사로 다 들어갔는데, 또 학교 운영위원회 이런 곳에 다 들어가 있죠. 그 단위 단위들끼리, 학교의 문제, 마을문고 운영하면서 이렇게 접근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오히려 저희한테는 구체적이고 실효적이고 사업적으로 다가오지, 주민자치 이렇게 했을 때, 공동체 그러면 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모르겠어요, 성과를 내고 있는 곳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경험상 그렇게 생각해요.”

주민자치를 표방하고 지역활동을 전개하는 활동가들의 고민은 장인홍 위원장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주민자치 개념에서 어디에 포지션을 두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도시 속에서, 농촌 속에서, 도농복합 지역에서 어떤 상으로 그려져야 할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인홍 위원장은 실효성에 방점을 둔다. 의도적인 ‘주민자치’의 표방보다는 각각의 영역에서 시나브로 참여하고 바꿔내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활동일 수 있다. 특히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주민자치’의 상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장인홍 위원장은 말한다. 그래서 구로시민센터의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대도시라는 생활양식이 참, 어려운 조건인 것 같아요. 문제라기보다는 그런 양태 때문에 대도시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 저희가 어떻게 보면 그런 지역사회 속에 주요한 모임들에 접근하는 방식이죠. 운영위원들 한명 배출했다가, 이제는 많아졌는데, 저도 초등학교 운영위원장이에요. 그런 식으로 접근하죠. 어쨌든 참여해서 변화시키는 거죠. 구로가 아직까지 많은 분들한테 살고 싶은 곳보다 떠나고 싶은 곳으로 인식되거든요. 지역 이미지라는 것도 있고, 교육문제, 그래서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명문 고등학교를 유치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선거 때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방식보다는 그렇게 해서 될 일도 아니고, 학부모 참여, 학교 참여, 등을 통해 학교의 작은 변화들, 예를 들면 한 학교의 학급 준비물 예산을 구로에서 전국에서 최고도 대주고 있거든요. 40만 원 받고 했는데, 이제는 그 학교는 아이들 아침마다 색종이 사고 이런 것 다 없앴죠. 학교에서 다 예산을 한단 말이죠. 이 쪽이 강남과 비교해서 아이들 학력수준이 떨어지는 이유가 딴 게 아니라, 예를 들면 강남 부모의 관심으로 사교육이 발달했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부모들이 맞벌이 하니까 자주 못 가요. 그래서 아침에 준비물을 못 챙겨 와요. 색종이도 한 반에 35명인데, 10명이 못 챙겨 오며, 정상적으로 수업이 안돼요. 한 두 번은 괜찮은데, 6년 동안 쌓이면, 이런 것들을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이런 것을 지원해 주는 곳이 없잖아요. 그러한 노력들, 그렇게 학교를 변화시키고, 그리고 도서관 살리기 운동, 이런 거, 학부모가 참여해서 자원봉사도 하면서 아이들 책을 많이 읽게 한다거나, 각종 프로그램을 한다거나 이런 노력을 통해서 실제로 교육을 변화시키기 위한 학부모 참여운동을 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주민자치센터 같은 경우도 각 동마다 수많은 관변 인사가 한 두 명씩 밖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들어가서 싸우기도 하고 일 열심히 하기도 하지만 잘 안 되잖아요. 시민단체가 하니까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이런 얘기를 들으려고 하는 거죠. 그러면서 우리의 입지를 높여가는 거죠.”

구로시민센터는 구로시민센터 나름의 방식으로 주민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정답은 없을 것이다. 아니, 모든 것이 정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지역적 특성, 조직의 특성, 멤버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접근되고 있었다. 구로시민센터도 하나의 모델이다.

장인홍 위원장의 인터뷰 중, 정치세력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있었다. 실제로 구로시민센터는 지방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현재도 지방의원 1명 배출되어 장인홍 위원장과 함께 공동 지방자치위원장을 맡고 있다. 왜 지역정치에 관심을 보이는지 물었다.

“저희 시민단체들이 지역에서 여러 가지 비판세력, 견제세력들로써 있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한계가 있죠. 저희가 지역정치에 참여하려고 하는 것은 시민운동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보다 더 제도적으로 실효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서 참여하는 것인데, 98년도에 백해영 의원이 나왔다가,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인 결과로 앞서가다가 투표율이 50%가 안 되니까 45표 차이로 떨어졌어요. 그리고 2002년에 구로3동에 제가 나갔었고, 구로4동에는 백해영의원이 나가서 당선되시고, 저는 12표 차이로 떨어지고요.(웃음) 가슴이 쓰라리죠.(웃음)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알게 되고, 오히려 이후 시민운동을 하면서 손해도 입히기도 하고, 그렇죠.”

장인홍 위원장도 지난 선거에 출마해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12표 차이. 단체의 입장에서 지역정치 참여가 어떻게(긍정적, 또는 부정적) 작용했는지 물었다.

“물론 선거라고 하는 것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거기 때문에 후유증도 있죠. 하지만, 제가 동북여성민우회 글 보니까, 배출한 의원과의 관계에 많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저희는 상대적으로 중심을 여기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고, 그렇지만 실제로 의정활동과 여기 활동가 매치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의정활동의 바쁜 것을 여기서 대행해줄 수 없는 것도 있긴 하지만 중심을 구로시민센터도 박고 있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점은 없는 것 같아요.......외부에서 정치집단으로 보는 부분도 있긴 해요. 특히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집단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쟤네들은 뭐 무엇을 위해 정치하려 하지”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만 회원들한테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장인홍 위원장에 따르면 지역정치에 거부반응이 있는 회원들은 없다고 한다. 조직의 일치성은 대단했다. 의원과 단체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물었다.

“백해영 의원은 일주일에 한 번 운영위원회에 참여하고 그 다음에 지방자치위원회 모임에 참여해서 본인이 한 일을 보고하고 같이 공유하고, 이렇게 하고 있죠.......지금까지 트러블은 없었지만 어려움은 있어요. 암만해도 의회에서의 활동이 거의 혼자한테 맡겨지다시피한 측면에서 본인이 움직이기 어려운 한계가 있죠. 하나는 구의회 내에서 숫자적인 측면에서 뭘 해보려고 해도 항상 깨지니까, 그런 것이 하나 있지만, 그러나 군계일학이에요. 활동 내용이나 모두 인정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내용으로 승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만만하게 보지 못하는 그런 측면은 있죠.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러한 일상적인 활동을 우리가, 예산 분석을 같이 하거나 그렇지는 못하죠. 그런데 서로 매치되는 가치들, 연말에 다루는 의제들, 의회방청을 하니까 저희가 분석을 같이하는 경우는 있는데, 일상적으로는 같이 한다기보다는 보고하고 어려운 점이 있으면 같이 고민하는, 이런 정도의 공유를 나누는 정도지, 이 구조에서 그것을 실현한다 라고 보면, 그것은 좀........많은 부분은 개인한테 맡겨져 있다고 봐야죠.”

단체와 의원의 관계가 끈끈한 이유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의원 스스로가 자기 뿌리를 단체에 두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상근 활동가처럼 전업으로 상근 활동을 하고 있었다. 회의 구조에 당연히 참여함으로써 의정활동을 자연스럽게 회원과 교류하고 있었다. 철저히 의정활동과 운동을 연계하고 있는 것이다.

“정식 평가의 자리가 매번 회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런 부분들은 생겨요. 서로 약간 뭐라 그럴까, 따로 논다 그럴까, 항상 이런 점은 고민이 돼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 고민이 돼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인 것 같고, 그런 조건에서 많은 부분들이 개인의 활동에 놓여져 있고, 또 하나는 개인이 끊임없이 센터 운동에 대한 일치성을 갖고 경각심을 갖고, 자각심을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고민하는 거죠.”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최대한 탄탄한 멤버십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비밀이었다. 말은 쉽지만, 구로시민센터만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을 던졌다. 정치세력화를 얘기하면서 운동의 연장이라고 한 부분에 대해 무게중심은 어느 쪽인지, 정치세력화의 개념은 무엇인지 물었다.

“무게중심이라고 보다는, 간단하게 보면 정치를 하는 거죠. 정치라고 하는 것이 정당을 끼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정치, 평화정치 다 포함되는 건데, 그런 영역들이 특히나 지역 권력에 접근하는 문제들이 선거라는 공식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제는 가능해졌다는 거죠. 그래서 시민운동, 지역시민운동 집단들이 그런 것을 제외한, 이런 것을 고민하는 집단도 있죠. 시민운동이 정치참여에 대해서. 저는 뭐 그것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 않고, 그것이 다 연결되어 있고,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된다, 라고 하는 거죠. 방식은 기성정당을 끼고 하는 것은 아니고........그런데 그런 것은 있어요. 그게 전부다, 라고 하는 것은 과한 거고, 우리 활동의 주요한 한 측면인 것이지, 그것 전체가 목적을 위해서 한 사람 의원 만들기 위해서 한다는 것은 아니죠....... 광진의 민동세 처장 같은 경우는 그런 고민을 하더라고요, 단체의 역사성이나 고민의 축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고,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런 것이다,,라는 결론을 제시하기엔 좀 그렇죠.......저희는 한 7년 오다보니까, 봉착 됐다기 보다는, 우리 회원 중에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던데, Level Up, Upgrade 지금까지 1단계라고 한다면 2단계의 구로시민센터의 전망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런 고민들이 돼요.”

그렇다면 Upgrade의 과제는 무엇인지 물었다.

“글쎄요, 우리가 초창기에 했던 근본적인 과제에 있어서의 변화라기보다는, 현재적 수준에서 했던 사업 수준을 한 단계 올리기 위해서 그런 것인데, 단체가 몇 년 열심히 하다보면 정체되기도 하잖아요. 그런 지점에 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을 넘기도 하고, 2기 구로시민센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기본적인 과제는 있다고 보는데, 고민 중이에요.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이 앞으로도 될 거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고민이 없으면 단체 문 닫는 것은 금방이에요.”

2기 구로시민센터의 상은 어떤 것인지 자못 궁금했다. 다른 지역의 고민처럼 구로시민센터도 한 단계 도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지역정치적인 과제만은 아닐 것이다.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이 장인홍 위원장이 꿈꾸는 미래의 상이다. 왠지 구로시민센터는 그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끝으로 앞으로 지역시민운동을 어떻게 전망하는지 물었다. 그의 답변으로 이번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제가 얼마 전에 오마이뉴스 대안 칼럼을 보니까, 어디야 누가 썼던데, 최근에 총선 이후의 시민운동의 방향, 이렇게 썼는데, 기존 정당들이 상당히 개혁적으로 와 있거든요. 그런 조건에서 기존의 시민운동 단체들, 참여연대나 경실련이나 이런 단위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수많은 이슈들이 체제내화 될 가능성이 있고, 제도를 통해서 해결 가능성이 있을 때 시민운동의 전망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보다 더 주민 속으로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더 부문화될 것이라는 요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대체로 그런 방향으로 갈 것 같긴 한데, 그런데 그런 것들이 지역 단위는 조금 달라요. 제가 봤을 때는. 나날이 생활이고 이런 것이기 때문에 뭐 제도적인 것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들이 지역 차원에서 나올 수 있다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저희도 고민이에요. 변화된 시대에서 과연 뭐가 변화된 것이냐, 어떻게 변해가야 하느냐, 이런 고민들을 막연하게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공론화시키지는 않았는데, 아마 그런, 저런 평가들이 학자들 차원에서 자꾸 제기될 것 같아요. 연구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다르긴 하지만.......어쨌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이런 변화되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하고 한 발 앞서 나갈 것인가, 이런 식의 고민들을 해야 할 것 같아요.”

※ 구로시민센터 홈페이지는 http://www.kurongo.org/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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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운동, 암중모색 중...-'관악주민연대'를 찾아
인터뷰 : 이명애(사무국장)

주민운동은 목하 변화의 길을 모색 중이다. 분권과 자치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와중에 정부는 미흡한 대로 지방자치 활성화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고, 지역을 토대로 한 시민운동진영도 주민자치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통로들을 만들려는 시도가 돋보이는 시점이다. 그 동안 (중앙)시민운동단체의 담론 수준이 국가시스템 개혁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했다면, 최근의 담론 수준은 구체적인 지역에서부터 개혁의 예각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로 집약될 수 있다. 이는 미완성이긴 하나, 한국사회가 민주화로 통하는 접속이 로그인된 상태에서 밑에서부터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적 합의라는 평가를 간과하지 않는다면, 지역적 시스템의 변화에 민감한 측면은 결코 질적 수준의 하락을 얘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최근 몇 차례의 총선과 대선, 지방선거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할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하는 시점이라고 한다면, 보수기득권세력이 거점하고 있는 구체적 지역에서부터 변화는 필수불가결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변화, 개혁은 요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물론 미완의 민주주의 완성을 위한 국가적 과제와 지역적 실천은 별개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역은 더 이상 중앙의 하부단위가 아니며, 오히려 변화를 주도할 새로운 주체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묵묵히 지역에서 운동을 주도했던 시민사회운동세력이 기회이자 도전인 것은 바로 이런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래서 고민의 무게는 더 깊을 수밖에 없다.

모든 시민단체가 그렇지만, 주민운동단체의 전통적인 과제를 꼽는다면 ‘안정적인 재정의 뒷받침’이다. 해체되지 않고 근근이 맥을 잇는 자체가 커다란 성과라는 자조 섞인 말에서 드러나듯, 재정문제는 언제나 주민운동을 가위 눌러왔다. 재정문제는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하드웨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프트웨어로서 주민운동단체의 전통적인 과제는 무엇일까? 관악주민연대의 이명애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지역운동을 하는 단체에게 영원히 남는 숙제는 어떻게 주민들에게 다가갈 것인가”로 표현한다. 주민들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밀착할 것인가? 이 대목에서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을 지긋이 감을 것이다.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주민운동은 암중모색이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관악주민연대 사무국장이다. 관악주민연대는 꽤 오래 전부터 주민운동에 천착해왔다. 이명애 사무국장을 만나 그의 속마음을 들어보자. 먼저 관악주민연대의 역사를 간략히 물었다.

“관악주민연대는 95년 3월 11일에 만들어졌는데요, 주민연대를 만들기 위한 논의는 94년 겨울쯤부터 시작을 했던 것 같아요. 다른 단체와 다르게 주민연대는 특수한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데, 80년 중,후반에 지역에서 지역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그 때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이 달동네 지역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주민들 가까이 가서 주민들 생활에 도움이 되는 뭔가 함께 같이 하고 같이 살면서 주민들을 주체로 세울 수 있는 그런 조직운동을 하자, 이런 결의를 가지고 지역에 들어가서 시작하셨고, 그래서 공부방이나 탁아소도 만들고 교회도 만들고, 여러 가지 야학도 하고, 그런 활동들을 지역에서 해오셨는데, 90년대 들어와서 다른 지역과는 뒤늦게 관악구 내 재개발이 시작됐어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95년 봄에 광역과 지역의 단체장까지 뽑는 본격적인 지방선거가 시작되었지요. 그러면서 지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끼리 실제로 주민들은 지역에서 당장 생존권의 위협의 시달리고 있기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그냥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뭔가 조직적인 연대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쉽게 이루어졌고요. 더구나 이게 동단위에서 활동만이 아니라 관악구라는 차원에서 재개발 문제와 관련된 대응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겠다, 이런 공감대가 굉장히 쉽고 넓게 이루어지고, 그리고 당시의 세대위(세입자대책위원회)라고 하는 주민들이 몇 개 지역에서 있었어요. 이름은 나름대로 주거대책위원회도 있고 약간 다르긴 했지만, 그런 주민조직들이 있었고, 또 크게 도움이 된 것은 그런 세대위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들,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활동가들, 그리고 학생들, 주로 서울대생들이었는데요, 당시에 지역에서 그런 재개발 상황이나 이런 것이 대학교에서 지원한 학생그룹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그룹들이 다시 공감대를 만들어서 주민연대를 결성하게 되었고요, 그러다보니까 초창기 주민연대 활동은 철거투쟁을 지원하는데 많은 역량을 투여하자, 이러게 하다가 한 98년, 99년 이렇게 넘어가면서는 지역들이 대부분 철거싸움을 정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는 그 다음부터는 실업극복 관련한 활동들을 많이 했고요, IMF 때였죠. 그 이후에 2001년, 2002년 접어들면서부터는 다양한 활동들을 많이 시도를 하고 있어요. 저희가 1999년 한 해 동안을 저희 조직에 대한 심각한 논의를 같이 하는 그런 기간으로 잡았었거든요. 1년 동안 지역의 활동가들이나 회원들이 토론회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하면서 주민연대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의를 거쳐서 2000년에 단체 멤버십이 아니라 개인 멤버십으로 가자, 이렇게 정리를 하고 활동의 변화가 생겼고, 이런 활동의 변화가 본격화된 것은 2002년 정도라고 생각해요.”

관악주민연대는 빈민운동부터 출발했다는 독특한 태생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멤버십의 성격과 활동의 내용에 대해 내부 논의 기간을 두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관악주민연대는 주민이 없으면 성립하기 힘든 조직이었다. 그야말로 주민운동의 전통을 밟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관악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전환을 위한 내부 논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조직 논의 기간 동안에, 사실 저희 같은 경우는 계속 관악주민연대라고 하는 단체에 대해서 어쨌든 지역의 센터들, 그러니까 지역의 단체들의 협의체냐, 개인 멤버십이냐, 이런 것도 굉장히 문제가 되었고, 그리고 지역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저희는 여전히 그 동안 단체가 만들어진 역사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저소득층 이런 사람들을 기반으로 해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관악구라고 하는 지역, 더군다나 재개발이 끝난 이후에 관악구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한편으로는 좀 더 광범위한 사람들을 구 단위에서 조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약간의 시민운동의 방법들로 가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반면에 여전히 우리가 해왔던 전통적인 주민운동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그것이 서로가 상반되는 입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립각처럼 여겨졌던 것 같아요.”

운동의 성격을 두고 조직 내부의 열띤 토론이 있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명애 국장이 말하는 전통적인 주민운동의 방식은 CO(Community Organizing)를 뜻한다. 주로 동단위의 주민조직이나 그런 것을 지향하는 운동을 뜻하며, 그 중에서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악주민연대에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소위 대변형 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주민이자 곧 활동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과 활동가를 분리하거나 ‘다른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다고 이명애 국장은 말한다. 그러나 주변 환경은 많이 변했고, 의도와 무관하게 대변적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명애 국장도 잘 알고 있었다. 10여 명의 상근 활동가가 여전히 전통적인 주민운동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활동방식들을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다. 이명애 국장에게 회원 규모와 활동 내용은 어떤지 물었다.

“우선, 이런 걸 물어볼 때 곤혹스러운데, 내가 주민연대에 돈을 내는 회원, 멤버십을 명확히 갖기 보다는 주민연대 회원이야, 이렇게 하는 사람은 사실 100명도 안돼요. 그게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주민연대가 가진 존재의미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애초에 우리가 2000년을 지나면서 멤버십을 개인멤버십으로 가자라고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에서 활동하는 센터와 센터에서 일하는 분들, 그리고 센터를 통해서 만나는 분들, 이런 분들이 저희 조직으로서는 상당히 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희가 가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조직적인 힘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어쩔 때는 대게 맥 빠져 하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저희는 활동가들이 많은 만큼 딱 중점사업은 별로 없는데요, 5가지의 중요한 사업을 해요. 하나는 임대아파트 사업을 해요. 임대아파트 사업은 저희가 예전에 어쨌든 계속 해왔던 철거싸움에 그런 맥락을 잇는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하면, 철거싸움이 임대아파트 사업이고요, 두 번째는 실업사업이에요. 그것은 98년 이후에 계속 해왔던 실업자 조직과 실업운동을 위해서 하는데, 사실 사업을 진행하면서 고민이 굉장히 많고요, 또 하나는 녹색가게를 중심으로 하는 녹색소비와 녹색 생활환경 만들기 운동을 하고요, 또 네 번째는 보육운동이에요. 저희가 올해 초에 얼마 전에 보육문제에 관심이 있는 엄마들과 함께 저학년을 전담으로 하는 방과후 교실을 만들기도 했거든요. 앞으로 보육문제는 굉장히 주민들 생활에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인 것 같고 사업의 가능성도 대게 많다고 생각이 되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가 맡아서 하고 있는 주민자치와 관련한 사업이에요. 이렇게 다섯 가지 사업이 저는 어떤 것들은 예전에 우리가 만났었던 저소득 주민들을 조직할 수 있는 사업이고요, 또 어떤 것들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터에 사시는 분들을 조직하는 운동이고, 또 어떤 것들은 공히 여러 사람이 관심만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이라고 생각을 하고, 가능성을 보고 계속 해가는 측면도 있어요.”

다섯 가지 주요 사업에도 빈민운동의 맥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에 제시한 주민자치 사업은 그 상이 뚜렷하지 않아 다시 물었다. ‘주민자치’ 활동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모든 활동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같이 모임 하는 회원들한테도 얼마 전에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주민자치라고 하는 것이 그 폭이나 그런 것이 넓은 것 같아요. 말로 하자면 자치 아닌 것이 없는 거죠. 각각의 사업들을 우리는 또 주민자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치라고 하는 고유한 영역의 역점, 이런 것들을 어떻게 찾을지 상당히 고민이에요. 제가 맡고 나니까 고민이고, 그렇게 되면서 예를 들면, 사회단체보조금 관련한 활동이나, 또 제가 알기로 저희 지역에서 한 번도 판공비 공개에 관한 그런 운동을 한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거라든가, 주민자치센터 활성화를 위한 활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런 관심과 동시에 저는 한편으로는 각각의 우리가 하고 있는 4개 사업 속에 이 주민자치라고 하는, 주민참여라고 하는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녹여내면서 같이 묶여 갈 수 있을까, 그런 측면이 고민이 되죠.”

그렇다. 이명애 국장이 지적했듯, 각각의 활동은 모두 주민자치를 위한 것이고, 그 활동 속에 ‘주민자치’의 정신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주민자치’는 구체적 활동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가치지향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구현되는 활동의 상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인 것이다. 그래서 이에 덧붙여 원론적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주민자치를 지향하는 단체로서, 지역운동이나 풀뿌리운동이 가지고 있는 과제는 무엇일까? 아니면 주민연대의 과제는?

“지역운동의 과제라.(웃음) 그렇게 큰 얘기들은 고민을 안 해봤는데........지역운동의 과제는 지역운동을 하는 단체에게 영원히 남는 숙제는 어떻게 주민들에게 다가갈 것인가, 그것인 것 같아요. 어떻게 다가가서 어떻게 주민들을 참여시킬 것인가, 그게 어떤 활동이든지 간에. 저희가 하는 활동 자체가 나쁜 일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지역주민들이 지역의 문제들, 전국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자기의 얘기를 한다든지, 그런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합리적인 제안이나 그런 것들을 어떻게 마련하고, 마련하지 못하더라도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는 그런 얘기들을 할 수 있게 할 것인가, 그것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도 지역에서 다양한 주민들을 만났지만,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에요. 주민들은 도대체 뭐에 관심이 있을까, 어떤 문제로 뭘 하면 주민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을까, 이런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을 하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쉽지 않은 게 갈수록 더 해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요즘 다들 살기 어렵다고 하잖아요. 그냥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문제들, 이런 것을 위해 투여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갈수록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것 같고, 또 전국적인 사안이나 이슈 같은 경우도 예전에 비해 많이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지역 안에서 만들어낼 것인가가 고민이죠.”

‘주민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지역운동의 영원한, 그리고 쉽지 않은 과제다. 그래서 주제를 바꿔, 그렇다면 그 동안 관악주민연대가 활동한 사례 중, 주민자치의 상을 발견할 수 있는 모델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갈수록 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음.......저는 주민연대가 굉장히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제가 일한 지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을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대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데, 저희가 보육에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활동한 어린이집을 운영 팀이 있었어요. 그 어린이집이 끝가지 놓지 않고 갔던 것은 부모들에 대한 교육, 부모들의 모임이었어요. 물론 굉장히 좋은 마인드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그 부모들 사이에 굉장히 실력을 쌓았죠. 예를 들면 아주 사소한 것, 저희들에게 가능하면 유기농산물을 사용하다거나, 아무리 선생님들이 바빠도 아이들에게 TV를 켜 놓고 그것을 보게 하지 않는다거나, 아이들 건강을 위해서 주에 한번씩 또는 자주, 밖에 나가서 동네 한바퀴라도 돈다거나, 이런 식으로 남다른 교육들이 부모들의 관심, 또 부모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모임 자체를 먼저 제안한 것은 주민연대였지만, 주민연대와 그 어린이집과 그 어린이집 엄마들이 모여서 한 2-3년 동안 계속 모임을 해왔어요. 해오다가 올해 초에 방과후 교실을 만들게 됐거든요. 그런데 방과후 교실을 만드는 기간 동안 어쨌든 부모님들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셨어요. 그 나이 또래에 있는 아이들이 막 초등학교 가거나 아니면 초등학교 가기 직전의 엄마들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 모임에 결합해서 같이 해주셨고, 그래서 캠페인 나가기도 하고, 어린이집 만들기 위해서 하루주점을 하기도 하고, 또 엄마들 스스로가 우리가 만드는 방과후 교실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는지 같이 워크숍도 하고 이러면서 방과후 교실을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현재 방과후 교실은 아직 아이들도 많지 않고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엄마들이 하나의 고비를 넘기셔서 또 새로운 도전에 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준비한 엄마들 중에 일부만이 아이들 방과후 교실에 보냈어요. 그러면 방과후 교실에 간 그 엄마들이 또 새로 오는 부모의 아이들, 또 부모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서 그런 보육운동이라는 넓은 차원으로 발전해 나갈 것인가, 이런 것은 새로운 과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쨌든 제가 볼 때는 그 기간에 엄마들이 보여주었던 자세나 참여의지나 아이들 문제를 내가 나서서 적극 해결하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작은 사례가 될 수 있다면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계속 노력을 하는 거죠.”

스스로 보육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엄마들의 노력. 그 속에서 함께 토론하고 행동하고 훈련되면서 희미한 자치의 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명애 국장의 얘기. 그러나 자치는 끝이 없듯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고 보육운동이라는 넓은 차원으로 발전해 가야 하는 또 다를 과제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자치의 경험을 쌓이게 된다. 어떤 동력이 그들을 움직였을까?

“저는 신뢰라고 생각해요. 애초에 저희가 어머니들이랑 만나고 일을 하고 그랬을 때는 사실 주민연대라고 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지 못했어요. 지금도 주민연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인식도 없으시고 잘 모르세요. 단지 주민연대와 그 어린이집이 엄마들의 얘기로 하자면, 그냥 그렇고 그런 관계인가 보다, 그렇게만 알고 계시는 거고, 그런데 워낙에 어린이집에 대해서 신뢰가 크시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민연대 사람들과 같이 하는 데니까, 나쁜 곳은 아니려니, 하는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저희 주민연대에서는 그게 주민연대에서 하는 일이야, 우리 거야, 하는 욕심을 내지 않았던 것, 그리고 어쨌든 주민들과 한 약속을 우리가 책임지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하겠습니다, 하는 약속을 했던 것,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끝까지 같이 하려는 그런 마음들과 자세들을 보여줬었죠. 그런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활동가, 또는 주민운동단체와 주민들 간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같은 지향을 꿈꾸는 동일한 존재임을 인식시키는 것, 즉 신뢰를 부여하는 만큼 확실한 관계 쌓기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보육이라는 생활의 절박한 과제와 여성이라는 활동의 주체가 맞물렸다는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나,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믿음을 주는 신뢰는 가장 든든한 무형의 자산이다. 방과후 시설을 준비하는 과정은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소박한 쌈지 돈 때문에 집구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비됐고, 교사 구하기도 힘들고 아이들 모집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현재는 소수의 아이들만 다닌다고 한다. 이제 차차 안정화되고 있는 추세라며, 아이들의 숫자는 더 늘어날 거라고 전망한다. 이명애 국장에게 스스로 관악주민연대 활동을 평가하면서, 가장 잘 했던 일과 가장 아쉬웠던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잘했던 것은 잘 모르겠고, 저는 솔직히 말하면 단체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자체가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웃음) 문 닫지 않았다는 것.(웃음) 어쨌건 이런 사회단체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서 활동가들의 헌신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거죠. 그런 것에 많이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계속 단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대게 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요. 아쉬운 것은, 모르겠어요. 저도 주민연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주민연대가 물과 같아서,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만약 큰 대야 같은 곳에 담기면 그만큼 폭이 넓어질 수 있는 거고, 만약 밥그릇 같은 곳에 담기면 밥그릇 밖에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그렇게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단체 운영을 위한 조건들이 있는 거잖아요. 그 조건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회원이든 후원회원들이 늘어나서 그것을 채워줘야 하고 또 단체는 그만큼 열심히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 우리는 진짜 열심히 지역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열심히 맨날 밤늦게까지 일하고 그러면서 일을 하는데, 그런 성과들이 주민연대를 지역에 알릴 수는 있을지언정, 주민연대라고 하는 틀 안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 그런 것에 대해서 저는 제가 맡은 역할이 있으니까, 초조하게 생각이 들죠. 그래서 안정되지 않는 것, 그것이 아쉽죠. 어쨌건 제가 사무국이라는 실무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니까, 하여튼 그것이 저한테는 제일 큰 프레셔(pressure)인 것 같아요.”

이명애 국장의 얘기를 듣고 보니, 작년이었던가? 시민자치정책센터를 평가하면서 한 운영위원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며 위안을 삼았던 일이 떠올랐다. 동병상련. 관악주민연대는 지방정치에도 남다를 관심과 참여를 보였다. 빈민운동 하던 시절부터 2002년까지 소극적인 지지, 또는 적극적인 후보전술을 펴왔다. 그래서 몇 몇 의원을 배출했고, 지금도 몇 몇 의원과는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지금도 단체 차원에서 지방정치 참여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다.

“저는 가능하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91년 지방선거를 할 때, 민노당 현재는 부대표님이죠. 김혜경 대표님이 난곡 지역에서 나오신 특별한 이유가 마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전 가지고 나오셨는데, 그 때는 더 밑에 있었기 때문에 더 잘 조절되지 않고 그런 게 있었을 수 있지만, 95년 주민연대가 만들어질 때부터는 주민연대 차원에서 지원해서 다른 그룹에 있는 구의원들이 있었고, 98년에도 3명이 나와서 2명이 됐죠. 2002년 선거에는 공식적으로 후보를 내지는 않았어요. 저는 물론 어떻게 되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뭐 일본에 있는 가나가와네트워크를 예를 들면서 지역정당을 얘기하시는 분들도 있고, 실제로 의회 진출해서 의원이 되신 분이나 사회단체들 간의 약간의 삐끄덕거림이 산술적으로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가능하면 우리가 만난 주민들이 더 성장하고 더 참여해서 바꿀 수 있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회에 진출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지방의회 같은 경우는요. 그런데 그게 대게 도식적으로 딱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각자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합의라고 할까, 그런 게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무국장 개인의 생각이긴 하지만 관악주민연대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간 관악주민연대의 지방정치 참여 평가를 물었다.

“그 때 당시는 제가 중요한 위치가 아니고, 주민연대라는 조직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때였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무슨 성과지? 라고 물어보면 대답을 정확히 못할 것 같고, 단지 아쉬운 것은 단체에서 지지하고 동원하고 뽑아줬는데, 실제로 단체가 요구하는 것과 후보가 된 사람이 의회라고 하는 어떤 구조화된 틀 속에서 역할이나 할 수 있는 일들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그런데 단체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런 것에 대해서 상세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고, 또 의원이 되신 분들은 그것을 산술적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또 그런 어려움들을 어떻게 단체와 함께 해결할 것인지, 이런 것에 대해서, 또 허심탄회하게 심도 있게 터놓고 얘기한 것이 실제로는 지역 안에서 작은 것을 바꿔내는 데 있어서 큰 기여를 했을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런 성과들이 제대로 평가되고 성과를 차곡차곡 쌓이는 그런 것은 좀 안이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약간의 어긋남들이 처음에 작은 것 같지만, 자꾸 시간이 가면 커지잖아요. 커지는 것처럼 서로에 대해서 의원으로서 내가 얼마나 힘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변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서 단체가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 섭섭함이 쌓이는 것 같고요, 그리고 단체에서는 의원이 변했네, 다르네, 이렇게 의원에 대해 불신이 쌓이는 이유가 그런 것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과정들을 저희도 똑같이 겪었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명확하게 어떤 것이 단체의 역할이고 어떤 것이 의원이 역할인지 이런 것이 공유가 되거나, 아니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딱 약속을 하는 거죠. 의원은 절대적으로 단체의 명령에 따른다거나.(웃음)”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단체와 의원 간의 어긋남을 어떻게든 메워야 하다는 과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을 연달아 던졌다. 그러면 앞으로는 다른 형태로 준비를 하나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제가 준비를 한다고 말씀을 못 드릴 것 같고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는 생각이 들어요. 2006년에 선거가 있잖아요. 딱 2년이 남았는데, 그 기간이 별로 길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저희 단체에서도 또 후보를 내서 지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지만 서로 간의 명확한 관계가 필요하겠죠. 또 이제는 어쩌면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사회적인 기반이나 분위기들이 전보다 나아진 것 같거든요.”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현실적으로 모르겠어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의원을 되려고 했는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가정하는 건데, 만약 의원이 되고 나서, 내가 해서 의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다음 선거를 염두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사회단체 입장에서만 서서 대변하고 일을 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나는 단지 내게 주어진 임기 4년 동안 그냥 이 단체를 대변하거나 이 단체가 원하는 어떤 정책이나 목표를 위해서 의원이 된 것 뿐이다, 라고 설정을 한다면 그것을 충분히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얕은 생각인가?(웃음)”

단체의 상황에 따라 달리 갈 수도.......

“또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의원에게 너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의원도 어쨌건 사람이니까. 적당한 거리라고 하잖아요. 그 전에 선배님들이 그러더라고요. ‘그 사이에서 넘지 않아야 할 인간적인 관계의 거리가 있다’ 그렇게 얘기하셨는데, 그 관계의 거리를 우리가 만약 단체와 의원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몇 미터 간격 안에서 서로 공존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합의를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럼 어떤 관계를 가장 바람직하게 보시는지.......

“저는 서로 협력하고 협조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해요. 지역단체가 지역정당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 단체의 명령은, 우리 단체에서 하는 일은 우리가 다 지지를 해야 돼, 또는 우리가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회 안에서 이렇게 발언을 해야 돼, 이런 것은 좀..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고유한 판단이 있을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의원을 의원으로서 그 사람이 건강하고 믿을 수 있는 신뢰만 있다면 그리고 그 신뢰를 견제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네가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할 땐 우리가 언제든 너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이런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지만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거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이런 쿨한 합의만 있다면 저는 의원은 의원으로서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단체는 단체로서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이 어떨 때는 맞아 떨어져서 잘 할 수 있고, 또 어떨 때는 서로 상충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녹음 끊김).......주민이랑 가까이 가면서 우리랑 뜻을 같이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사람을 나름대로 건강하다고 생각을 해서 의원이 되신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런 주민들 같은 경우는 어쨌건, 그런 선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 물었다. 그럼 협력과 협조는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지방의원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서로 공유하는 시스템을 갖는다거나, 의원이 시민단체의 액션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요구해서 액션을 명분으로 의회 활동을 진행한다거나 등등. 그런 거랑, 또 뭐가 있을까.......그런 것 이외에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거죠. 그래서 뭐 예를 들면 어떤 한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잖아요. 저는 공식적이고 일상적으로 제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에 보면,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예전에 경험에서 보면 의원은 의원으로 단체에 요구하는 것이 또 있어요. 만약 자기가 법안을 발의하려고 하는데, 뭘 해 달라 이런 것을 요구할 수 있지만, 단체로서는 현실적으로 그것을 못 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를 해야 되는 게, 그 이해를 하려면 평상시에 이런 틀이 있어서, 서로의 정보를 유지되고, 소통되고 이래야 되거든요. 그런데 뜬금없이 나 이거 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한다거나, 단체는 나 이거 관심 있는데 이것 좀 해줘,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다 공감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일상적인 틀이 있어야 된다고 보는 거죠.”

이명애 국장은 매우 쿨한 관계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의원의 고유 역할과 단체의 고유 역할이 다르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삐거덕거림이 심각하거나 과도하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이다. 다만, 일상적인 소통의 틀만 존재한다면 쿨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듯 보인다. 지방정치에 대한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지방정치에 참여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애초에 내보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의회에 가서 그런 얘기들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91년이나 95년도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가 계속 활동을 한 지역은 빈민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잘 알고 스스로 경험하고 이런 사람들의 얘기를 대변해야 하고, 그걸 지역 안에서 정책화활 수 있다면 하는 거고. 음.......지금도 사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게 꼭 경제적인 가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얘기하는 건데요, 그런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데, 제 개인적인 생각은, 저는 좀 합리적이고 건강한 사람이 의원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해요. 사실, 동네에서 의원들을 만나서 별로 많이 만나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자질이나 이런 것들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의회라고 하는 게 어쨌든 지역의 사람들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데, 대변하는 거라면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낼 수 있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토론을 통해서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이 당연히 의회 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목소리 큰 사람들, 또 지역에서 돈 좀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의원이 돼서 그냥 그걸 하나의 감투로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개혁의 대상으로서 지방정치 논의 중, ‘자질론’은 여전히 우리나라 지방의회의 객관적 수준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이 ‘합리적 사고’인지 명확한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함량미달의 의원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그래서 진부하긴 하지만, 개혁세력들이 ‘자질론’을 외치는 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다가올 선거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명애 국장이 이야기하고 있듯, 운동단체와 의원간의 사회적인 기반이나 분위기가 이전의 그것보다 나아졌다는 판단에 근거한다면, 지방정치도 변화의 길목에 들어섰다는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시민자치정책센터에서 개최한 지방정치 평가 토론회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2006년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통적 방식의 주민운동의 맥을 이어왔고, 지금도 그런 정신을 놓지 않으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몇 차례 변화의 진통을 겪었던 관악주민연대. 어쩌면 전체 주민운동의 진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활동과 행보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명맥을 유지했다는 성과에 그치지 말고, 주민운동의 새로운 비전을 꾸준히 던져주는 그런 단체가 되길 기대해본다. 끝으로 주민과 어떻게 만날 생각인지, 그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할 계획인지 마지막 질문과 대답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저희가 주민들을 만나는 방법은요, 주민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제가 사무국장 하기 전에 오랫동안 사무국장을 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물론 그 친구가 사무국장을 할 때에는 철거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이 있기도 할 때였지만, 그 친구는 어떻게 일을 했냐면, 그 때만 하더라도 저희가 사무실이 없었어요. 그 친구는 동네에 들어가서 세대위가 있으면 세대위 사무실에서도 자고, 그 동네에 있는 활동가 집에서도 자고, 주민들 집에서도 자고, 그러면서 그 동네에 가서 그냥 항상 같이 있고, 그러면서 일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무실이 필요가 없었죠. 그가 가는 곳이 사무실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임대아파트 활동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쨌건 임대아파트 같은 경우는 공간적인 제약, 특수성 이런 것들로 인해서 그냥 무작정 자주 가요, 자주 만나고 얘기하고, 그렇게 하고 있고요. 그것은 이슈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예를 들면 녹색가게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올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런 것도 굉장히 주민들을 많이 만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하고요. 실업 같은 경우는 저희는 그것 역시 사람들의 욕구가 있거든요. 스스로 찾아오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묶을 것인가, 조직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는 대게 고민이 많죠. 주민들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그냥 안녕하세요, 하는 얼굴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이상으로 +α가 있는 거죠. 그렇게 되는 것이 대게 어렵고 힘들어요. 그리고 제가 생각할 때 저희 주민연대는 어쨌든 주민들이 있는 곳에 가서 만나는 것밖에 잘 몰라요. 그런 방법, 예를 들면 큰 토론회를 한다거나 공청회를 한다거나 기자회견을 한다거나 이런 것을 통해서 주민들에게 여론을 형성하고, 그래서 관심을 갖게 한다거나, 이런 방식들은 잘 안 쓰기도 하고, 또 그 동안 잘 못했어요. 저희가 제일 취약하고 못하는 것 중에 하나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도 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 관악주민연대 홈페이지는 http://www.pska21.or.kr/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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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책은 모두의 정책을 대변한다! - '남서여성민우회'를 찾아
인터뷰 : 이미숙(대표)/김경자(지역자치위원장)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자치운동하기? ‘서울’과 ‘자치운동’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배열이다. ‘중앙’이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는 서울, 아나키적 요소의 자치, 마치 타워팰리스와 같은 초호화고층아파트와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과의 괴리만큼, 둘은 낯선 풍경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구체적 삶의 현장이 있는 곳에 자치운동은 유용하다. 뒤틀리고 뒤집혀진 왜곡된 운동의 과정이 아니라면 - 마치 유나보머처럼 - 자치운동은 어디든 가능하다. ‘자치’라는 보편적 개념을 뭉개지 않고 현장의 특수성을 고려한 다양한 자치의 형식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서울과 같은 엔트로피가 극대화된 도시에서 말이다.

현대 도시사회에서 자치는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그 내용도 다양할 것이다. 정형화된 자치, 또는 자치운동의 모범 답안지를 제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내용의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통분모는 있을 것이다. 구체적 현장과 작은 단위에서, 거대담론이 아닌 생활의 주제를 다루고자 하는 생활자들의 연대. 그것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교급식 문제를 개선하려는 학교운영위원들의 모습에서, 유기농산물의 공동구매를 통해 먹거리 문화를 개선하려는 주부들의 생협 활동을 통해서도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소중한 자치(운동)의 경험들이다.

지하철 5호선 오목교역에서 내려, 남서여성민우회를 찾아가는 길은 부자동네 강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즘말로 하면, 오히려 더 럭셔리한 풍경이었다. 이런 곳에 민우회가? 그러나 남서여성민우회의 둥지는 5평 남짓한 한 백화점 건물 지하 창고 모퉁이에 있었다.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민우회 멤버들의 수완을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이다. 남서여성민우회가 지난 95년 창립했으니까 1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생협 매장이 들어선 것은 만 5년이 돼간다. 이 곳에서 이미숙 대표와 김경자 지역자치위원장을 만났다. 어떤 계기로 만들어졌고 현재의 규모를 물었다.

“처음에는 어떤 소속 활동가가 아닌, 지역에 뜻을 두고 생협운동과 같이 소모임 형태로 시작을 했어요. 그 전에 민우회 본부 활동들이 기반이 되었겠죠. 인지도는 있었으니까. 민우회 여성학교 같은 것을 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모임 같은 활동을 하다가 활동 영역을 넓혀갔죠. 처음 제가 참여한 소모임은 수지침이었는데, 그 때 수지침이라는 것이 처음 보급되었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에 정식으로 민우 여성학교를 다녔죠.......저희는 회원이 이원화되어 있어요. 정회원은 100여 명이라고 할 수 있고요. 생협 회원은 1,800명 정도라고 볼 수 있죠. 정회원은 매달 돈을 내고 활동을 위해서 돈을 내거나 평생회원으로 목돈은 내주셨거나. 그 중에서 활동가로 분류될 수 있는 분은 대략 30명 정도 될까 싶어요.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찬동한다 하지만 사무실에 자주 얼굴을 뵌다거나 하지는 않죠. 30명 정도가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시죠. 우리 활동 특성상 생협 회원이라고 해서 우리 모임에 꼭 정회원만 나오는 것은 아니고요, 생협 회원들도 다 문이 다 열려서 함께 다 교육이라든지 강좌에 참석을 하시고 함께 하세요.”

단체의 성격에 따라 적극적인 회원들을 부르는 명칭도 다른데, 민우회의 경우는 ‘활동가’란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단체는 중간지도자, 변화추진자 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아무튼, 동북도 그렇지만 남서여성민우회의 활동가 규모도 30명 정도라고 한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30명이라는 것은 그리 작은 규모다. 사무실 상근자는 3명, 매장 책임자 1명과 파트타임 3명 정도. 상근 규모도 작은 편은 아니다. 생협 매장의 월 매출액은 8천-9천만 원 정도 된다고 한다. 일반 가게에 비해 마진율이 낮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매출액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다. 남서여성민우회는 11개의 민우회 지부 중 하나이다. 다른 지부와 비교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글쎄요.......일단 민우회 활동으로만 하면, 대체로 활동가들끼리도 그렇고, 밖에서 볼 때도 그렇고, 지역 안에 있는 여성들 중에 있어서는 자신 있고 당당해 보이고 개성들도 강한 편인 것 같아요. 또 나름대로 서로를 그렇게 평가하더라고요. 어떤 소신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이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 여성단체의 활동가로서 밖에서 일반 여성이 볼 때 굉장히 소신 있어 보인다, 멋있어 보인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실 우리 안에서는 멋을 추구하지는 않는데, 일반 주부들이 보면 그렇게 보나 봐요. 물론.......민우회 회원을 단일하게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많은 개성들이 있고요, 관심 분야도 각기 다 틀려요. 그래서 우리 특징이 이렇다고 말하기엔 못할 것 같아요. 우리가 생협 회원이 많다보니까, 그리고 정회원도 많다보니까, 어떻게 보면 관심 분야도 다 틀리고 그렇긴 한데, 전반적으로 어우러져서 그런 모양새로 평가하지 않나 싶어요.”

꼭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동북여성민우회가 짜임새 있는 팀워크를, 남서여성민우회는 개인의 독특한 활동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차이는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남서여성민우회는 지난 95년부터 '바른 의정을 위한 모임‘을 만들어 의정감시활동을 했었고, 지금까지 의정감시활동은 주요 사업 중 하나다.

“.......맨 처음 의회 감시 활동이나 예산감시, 때때로 예산을 보다보니까, 지역 안에 정책이라든지 많이 보게 되더라고요. 딱 여성에 대한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기 전부터도 여기 대표님이 지역자치위원장을 하시면서 95년부터 바른의정을 위한 모임이라고 해서 의회의 속기록을 분석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횟수로는 95년부터 따지면 10년이잖아요. 10년 동안 꾸준히 해왔던 거죠. 얼마 전에 구의회 의장을 봤는데, 우리 웬만한 의원들보다 우리들이 더 많이 구의회에 드나든 사람들이다,(웃음) 이런 얘기를 하면서 구의회 의장이 다른 사람들을 소개를 하더라고요. 물론 그 분들이 전문성이 있지만 의회를 더 많이 드나든 사람들이다, 이렇게 인식을 하시죠.”

여성 관련 예산이나 정책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구정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고 활동의 폭도 넓어졌다.

“우리가 2002년에 6.13선거에서 이현주 의원을 내면서 더 많이 깊이 들어가게 된 것 같아요. 의정에 대해서 어떤 정보에 접근하기 쉬우니까, 그리고 의원이 필요로 하는 서포터가 요하는 부분도 있고, 옛날에 우리가 접근하는 것보다 더 많이, 더 넓게 접근하게 되고, 예산만 하더라도 맨 처음에는 여성 예산만 봤는데, 예산서를 넘기다 보면 여성예산만이 아니라 각 부처 예산을 보다보니까, 각 부처 예산을 보게 되고, 그리고 지역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주부로서 보이는 여러 가지 지역 환경이라든지 교육문제라든지 이런 것들도 갈수록 넓게 보이게 되더라고요. 그런 과정에서 작년에 지역급식운동이 잘 되었던 것 같아요.......우리가 지역에 있는 월촌중학교의 운영위원으로 들어갔어요. 학교급식이 처음 도입된 단계에서부터 토론회를 통해 다른 시민단체, 농민단체, 여성단체들의 의견들을 수렴한 다음, 바람직한 학교급식을 생각해보니까, 지역급식이 가장 바람직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첫 사례를 만들고 그 사례를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서울교육청의 문제점에 대해 청원은 내고, 청와대에, 국회의원들에 대해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서울시 급식정책이나 교육부의 급식정책이 바뀌게 되었죠. 그 분들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월촌중학교의 그런 운동 안에서 실마리들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첫 사례 속에서 아이들 학교급식이 바뀌게 된 사례를 만들게 된 거거든요. 왜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지 설득해 내는 과정, 교육청이라든지 해당 부서라든지 서울시라든지와 얘기하는 과정에서 바뀌게 되었다고 봐요.”

그렇게 해서 남서여성민우회는 대중운동 여성단체로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작년, 지역운동사례로 많이 회자되었던 학교급식운동의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양천구 월촌중학교에서 진행된 학교급식운동을 조금만 더 들어보자.

“처음 시작한 것이 2002년 가을부터였어요. 학교급식 관련해서 여러 곳을 알아보고 토론회도 다니고, 민우회 자체 내에서도 포럼을 다섯 번이가 여섯 번을 했어요. 주로 농민단체, 영양사단체, 조리사, 그리고 급식업자, 교육청 등, 이런 분들을 모시고 민우회 토론회를 했고, 저희들 스스로도 민우회 생협에서 바른 식생활이 뭔지에 대해 바른 식생활지도사 과정들을 공부를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청소년들이 어떻게 급식을 먹어야 하는지 바른 식생활이 되어야 하는지를 다방면으로 토론을 하고 교육을 받으면서 어느 것이 바람직한 학교급식 정책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다른 시민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것들이 힘이 돼서 사례를 만들었다고 봐요. 지금은 직영을 하고 우리 농산물을 사용하고 있죠. 수입은 우리나라에서 생산이 안 돼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 농산물을 사용하고 있죠.......교육경기보조금이 지방세 수입의 3%를 확보하라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교육경비보조에 관한 조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보하려는 노력을 안했어요. 조례만 만들어 놓고. 이런 것을 저희가 건의를 했어요. 지방자치단체에 건의를 했는데, 11억 원을 확보를 했어요. 처음에 그 예산을 삭감하려고 했지만, 저희가 부단한 설득작업을 했었죠. 그래서 학교급식을 도입할 때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받았죠.”

행자부 지침에도 교육경비조금의 사용처에 대해 학교급식 개조에 보조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명시하고 있다. 민우회 활동가들이 공무원들 코앞에 이런 명시조항을 들이대고서야 공무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월촌중학교 사례는 완벽한 모델케이스다. 이런 성공 경험은 조직과 개인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부여한다. 그것도 커다란 하나의 시스템을 바꾸었으니 그 경험의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에는 민우회 활동가 중 6-7명이 각 학교로 흩어져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 설득하고 싸우기 위해서다.

“학교 운영위원으로 들어가신 분들이 그 학교에 가서 다른 학교의 움직임을 전달하기만 하더라고 도움이 되죠. 지금 민우회가 여성조직이고 생협이기도 하면서 방대한 조직이다보니까 생각의 진도도 다르고 정치적이 취향도 다르고 의견도 다르기 때문에 전부 그것이다, 이렇게 공감을 하면서 주제를 발굴하기 힘든데, 이런 주제는 공감 얻기가 쉬워서 주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서 주는 시사점. 역시 지역운동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생활의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과 작은 일이라도 성공할 때만이 부흥을 할 수 있다는 점. 남서여성민우회가 한 단계 성숙한 시점을 이야기한다면, 바로 월촌중학교에서의 학교급식 개선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역구도의 역학구도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작년 같은 경우에 여성발전기본조례를 양천구에 만들라고 요구했는데, 입법예고안을 냈어요. 하승수 변호사님이 모범 안을 만들어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지역에서 운동을 했는데, 최근에 해당 상임위가 부결시켰어요.......구청이 입법 예고를 하고, 구의회에 발의를 하는 데까지 4-5개월이 걸렸거든요.......우리가 요구한 것이 투명성 요구라든지, 보다 더 세밀하게 양성평등을 위한, 예를 들어 직장 내 성희롱이 있었으면 그것에 대해 처벌까지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자고 했는데, 대체로 지방자치단체는 두루뭉술해서 그림은 그럴 듯하지만 책임 질 일은 없는 그런 조례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우리가 완강히 설득해서 4-5개월 만에 발의했는데, 해당 상임위가 ‘위원회 회의록을 공개’라는 부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면 부결시켰어요. 우리 양천구 같은 경우에 한나라당 의원이 16명이에요. 그리고 상임위원회에도 대부분 한나라당 의원이에요. 그것을 표결로 해가지고 부결을 시켰더라고요.”

어느 지역이든 회의록 공개를 부담스러워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다. 국가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닐 텐데,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대체로 지방의원이 한나라당이 대다수를 점유하고 있고, 각 위원회에 한나라당 의원들도 많이 들아 가 있고, 가까운 인맥들도 위원회에 들어가잖아요. 일종의 회의비 나눠먹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의원 구성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회의 공개를 부담스러워서 못한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책임성 없는 회의를 할 사람이라면 의원 선정부터 문제가 있었던 거죠. 보통 회의록이 공개가 되면 의원1, 또는 XX의원, 이렇게 공개가 되는데, 그것조차도 못하겠다는 거죠.......지금 우리가 여러 가지 조례 입법 과정에서 여성발전기본조례 뿐만 아니라 사회단체보조금 조례도 가장 걸리는 부분이 의원 선정의 투명성을 제고해서 공개모집한다든지 회의록을 공개하라는 것에 다른 모든 것들에 보다 그런 부분이 딱 걸려요. 오히려 의회 쪽에서 더 거부하는 거죠. 자기들이 의원으로 들어가니까요. 사회단체보조금 같은 경우도 시민자치정책센터에 안이 바로 올라왔더라고요. 다운 받아서 행자부에서 지침이 내려오자마자 우리가 먼저 하승수 변호사님이 만든 것을 다운 받아서 양천구에 맞게 조정을 해서 우리가 먼저 제안을 했어요. 이렇게 만들어달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입법예고안이 나와서 자치행정과죠. 과장이 간담회를 하자고, 우리가 먼저 제안을 했었으니까. 그래서 간담회를 하고 거기서 입법예고안이 나왔는데, 입법예고안이 완전히 행자부 것을 그대로 베껴놨더라고요. 단체 이름만 바꿔서. 그래서 우리가 그랬거든요. 위원선정 부분과 투명성만 하자고. 그랬는데, 그 부분도 이번에 그냥 받아 줄 것처럼 얘기하다가 내부에서 협의하는 과정에서 부결이 된 건지, 어디서 된 건지, 자기들 원하는 대로 통과되고 위원 선정까지 다 되고, 사회단체 보조금까지 다 나눠놨더라고요.......제가 볼 때는 조례를 만드는데, 다른 부분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더라도, 위원 선정에 공정성 문제라든지 회의록 공개라는 부분은 원칙이라고 보는데, 이런 부분이 걸려서 절망스러운 상황인 것 같아요. 다른 부분보다. 이런 부분은 원칙적인 문제인데, 기본이 안 된 것 같아요.”

‘절망스러운 상황’이라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위원회 위원을 공개모집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구청장이 다 뽑거나 지방의원들의 나눠 먹기식으로 한 자리 차지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회의록 공개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보가 공개될 때만이 합리적 토론이 가능하고 시민참여도 활성화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절망할 수밖에. 참고로 양천구 의원은 모두 20명, 그 중 한나라당 의원은 16명이다. 남서여성민우회 활동은 어느 한 부서가 독점하지는 않지만 지역자치위원회에서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하다.

“의회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기본으로 하고, 지역 안에서 생활정치를 건강하게 하는 모임을 이끌거든요. ‘생강모임’이라고 우리가 부르는데, 거기서 해마다 양천구 여성정책과 예산분석을 하고 그것에 대해 지역토론회를 하는데, 그것을 하는 과정에서 횟수가 넘어가니까, 딱 여성정책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보게 되는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나 행정에 대해서 그런 시각이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 같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행자부 지침이라든지 예산편성기본원칙이라든지 몇 년을 보다 보니까, 지금은 어설프지만 보이더라고요. 이것은 이렇게 써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편성해 놓고 자의적으로 전용을 했구나, 그런 것들도 보이고, 그러다보니까, 지역 여성으로서 아이들 교통문제 통학로 문제라든지, 환경문제라든지, 교육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보이게 되고, 올해 같은 경우는 보육 같은 것을 보자고 해서, 본부에서 보육실태 설문이 나올 거예요. 그러면 보육에 관한 지역 욕구라든지 현황조사를 해서 예산관련 정책을 볼 계획이에요.”

이런 일들을 대부분 지역자치위원회에서 기획한다. 남서여성민우회의 별동대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엔 좀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양천구와 같이 넉넉한 지역에서 자치운동은 어떤 모습일까? 그에 따른 남서여성민우회의 역할은?

“이 지역은 80% 이상 공동주택이고, 중심 상업지구가 옛날에 5층 이하 상업지구였는데, 지금은 초고층으로 들어서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교육, 교통, 환경인 것 같아요. 보통 지방자치단체는 개발하고 땅만 있으면 뭔가 지으려 하고 길을 더 뚫으려고 하는데, 그런 것 보다는 보다 쾌적한 도시 생활을 위한 기반 여건에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교육이라든지, 교통이라든지, 환경 부분에서. 그런 면에서 여기 안양천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거의 방치됐었어요. 서울시가 한강을 살리기 위해서 개발을 하고 양재천에 예산을 쏟아 붓고 하면서도 안양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책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왜 안양천에만 아무런 정책이 없는가, 이슈 제기도 꾸준히 하고, 그래서 지금은 안양천에 주민들이 접근하기 쉽고 운동도 많이 나가고 다시 살아 있는, 다시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는, 5년 전만 하더라도 내려가면 손으로 코를 막도 지나갔는데, 지금은 노인 부부가 유모차 들고 산책을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새롭게 돌아왔거든요. 그렇게 도시 생활 속에서 가능화시킬 수 있는, 생태적인 삶은 어렵겠지만, 보다 어떻게 하면 교통이 번잡하지 않고, 시민단체로서는 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고 갈수록 집약되는 인구에 따른 교육환경, 그런 것들이 교육정책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어떻게 세우고 학교를 어떻게 더 지어주고 그런 것들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주민의견을 대변하고 정책을 고민하는 그런 역할인 것 같아요.......양천구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주민자치를 논할 수 있을만한 단체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서로 연대해서 지역에서 파급효과를 낼만한 이런 단체가 너무 없는 것 같아요. 동북 이야기를 듣다보면, 탄핵 같은 경우,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는 단체가 몇 군데는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는 그런 것을 같이 논의할만한 단체를 찾아보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생적인 단체들이 나오면 더 좋고, 의도적으로 어떤 뜻을 가진 사람들이 노력을 해서 만들려고 씨를 뿌리는 것이 필요한 것 같고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주민자치센터 같은 기능도 이것 하고는 너무 빗나가게 운영을 하는데, 그것도 약간 수정을 해서 실질적으로 주민자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단위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기존에 있는 각 아파트 어머니회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자기네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시민사회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단체로 성장해 나가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에요.”

지역의 특성이 운동의 성격을 규정지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 교통, 교육 이런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진부하게 ‘부르주아 운동’이니 ‘중산층 운동’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삶의 형태나 제도를 바꾸려는 시도는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생협 활동이나 녹색가게 활동, 민주시민교육 사업, 지방자치학교, 기타 여성주간에 진행하는 여성영화제 등은 주민과 더 밀착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숙 대표는 무엇이 바람직한 지역운동인지 늘 고민된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지역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런 식의 사회적인 생각들이 안 떠오르고, 스스로 나면 나, 개인이면 개인, 단체면 단체가 너무 단일화되는 것 아닌가, 운동의 역동성이 떨어지지 않나, 이런 것이 개인적인 갈등인 거죠. 한다고는 하고 있지만.......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 민우회가 백화점식 활동이라는 말을 많이 하니까, 역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운동의 본류로 가지고 가야 할 것인지 이런 것을 끊임없이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원들 욕구도 각각 다 틀리고, 그런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단체도 그렇고 지역도 그렇고, 약간 보수 성향이 있다보니까, 우리가 하는 활동이 어떤 면에서는 앞서간다고 볼 수 있거든요. 어떨 때는 내부적으로 어떤 때는 주변적으로 그런 것들이 버겁다는 반응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시민단체의 정체성을 감추고 하기에 그렇고.......아무튼 그런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사이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보니까, 공감대를 끌어내고 어떤 일을 하고 이럴 때, 사람들의 약간 눈치를 봐야 한다는, 그런 것들이 어쩔 때는 내부 안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웃음) 왜냐하면 너무 동떨어지면 눈치를 봐야 하니까, 그러다보면 우리가 지금 뭘 해야 하는가, 시민단체가 뭘 해야 하나, 이런 고민도 해요.”

그 버거움의 무게를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다양한 생각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천천히 조금씩 앞으로 전진시키는 것이야말로 지역운동의 최대 목표일 수도 있다.
주제를 바꿔, 남서민우회의 대리인으로 나온 지방의원에 대해 물었다. 단체와 의원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서로 정보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긴 해요. 어떤 사안에 의견이 꼭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100%로 행동을 같이 보조를 한다거나 그러지는 못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의원 배출하면 의원 따로 놀고, 그런 경우도 예전에 있었다고 그러는데, 그런 것은 없기 때문에 바람직한 관계라고 생각해요. 서로 정보 공유하고, 서로 의견 틀린 것 얘기하고 그렇죠. 바람직한 것 같아요.”

이미숙 대표나 김경자 위원장은 남서민우회와 의원간의 관계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도 둘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 의도와 지금의 상황을 평가한다면 어떤지 물었다.

“저희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주요 목적으로 했죠. 예산이나 정책을 보다보니까, 정책 쪽에서 여성의 위치가 너무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해야 한다고 해서 내보냈는데, 여성의 정치세력화 면에서 보면, 물론 양천구 의회에 한 명이기 때문에 힘이 미약하기는 해요. 그런데 지역 안에서 우리 단체가 일정 부분만큼 세력화 된 것이 진전되었다고 보거든요. 다른 단체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우리가 내 놓는 제안 등이, 물론 다른 단체와 연대해서 정보도 많이 받을 수 있고 이현주 의원을 통해서 구청 안에서 지방자치단체 행정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는 훨씬 좋거든요. 그런 부분에서는 이현주 의원도 그렇고 상생관계라고 봐요. 단체도 지역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보면 ‘민우당’(민우회 당)이라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구청 가고 그러면. 그럴 정도로 목소리가 예전에 비해 완전하게 갖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로 자리 잡는데 의원을 내고 그 분이 활동하는데 서로 보탬이 되었다고 봐요.......이현주 의원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의원 입장에서는 시민단체로서 기대가 클지 모르겠지만, 여기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가 인력풀이 많다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갖지 못해요. 그 때 그 때 어떤 사안은 홈페이지에서 알아보기도 하고, 급식에 대해서 어디 가서 알아보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우리도 연대하고 하다보니까, 원하는 것만큼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이현주 의원도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저희도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후보를 냄으로써 이현주 의원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우리 목소리를 내는데 서로 힘을 받는 상생관계가 아닌가 생각해요.”

김경자 위원장은 민우회가 후보를 내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 놓으면 단체가 운신의 폭이 좁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원이 당선되고 공생관계가 유지되는 과정에서 많은 장점을 보았다고 한다. 제대로 시스템만 갖춘다면 서로 상승할 수 있는 좋은 관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지금은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혹시, 2년 여 동안 같이 활동하면서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 물었다.

“개인적으로 기대 이상으로 잘 하는 것 같아요. 소신이 흔들리거나, 그런 부분이 없어서 시민단체 후보로서 자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의회 구성이 한 당에 편중되어 있다 보니까, 그런 상황과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본인과의 간극이 클 거 아닙니까? 본인은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데 상황이 그러다보니까, 쌓아 놓은 과정은 너무나 훌륭한데, 결과론적으로 얻는 것이 많이 없다는 것이 좀 아쉬운 점이긴 하죠. 조례가 우리 마음대로 통과된다거나 이런 것들이 안 되니까, 그런 것들이 의회 내에서 초심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게 하면서 얻어 낼 것을 얻어내면서, 당연히 통과될 조례 같은 것도 안 되니까, 그런 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과 같은 왜곡된 지방정치 구도 하에서는 유연성을 잘 발휘하고, 타협을 잘 이끌어내는 것이 정치를 잘 하는 비결일지 모르겠다. 긍정적인 의미로서 말이다. 그러나 개혁적 마인드를 지닌 의원의 입장에서는, 아니, 개혁적 마인드가 아니더라도 상식이 있는 의원의 입장에서 소신을 꺾고 유연성을 발휘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의원의 입장과 의회의 구도, 그리고 시민단체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갈등의 무게는 가볍게 감당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싶다. 의원의 입장이든, 단체의 입장이든, 이 대목은 시민운동세력의 지역정치 참여를 통해 축적된 과제이기도 하다.

끝으로 인터뷰할 때, 공통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지역운동의 주체로서 주부들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끝으로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들이 지역의회의 정책을 보면 기초지방자치단체 같은 경우는 생활정치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보통 남성 같은 경우는 출퇴근하고 뭔가 직업이 있고, 우리 사회가 아직 구조적으로 그러잖아요. 그런 것에 비해서 주부들은 실제로 그 속에서 생활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일상을 다 보내거든요. 그래서 지역행정 속에서 뭐가 필요하고 뭐가 더 되어야 하고 뭐가 불편한지를 낱낱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요구를 할 수 있고, 그런 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활동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 동참을 하라고 했을 때 많이 하지는 않아도 공감대를 해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들도 할 때 보면 그런 강좌 같은 것, 생협을 통해서 아토피 모임이라든지 이런 것으로 주부들을 끌어내기도 하기도 하고 이러는 게 주부이기 때문에 지역 속에서 같이 활동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육아교육, 이런 것을 통해서 지역자치 속에, 그러니까 큰 정책은 별로 없잖아요. 기초지방자치단체는. 동네 정치잖아요. 아무래도 생활에서 가장 밀접한 사람은 주부이고, 주부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많죠. 남성과 다르게.......그런 문제는 예전에도 똑같은 문제의식인데, 왜 최근에 여성들의 참여가 늘어나느냐 하면 그것은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예전보다 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생각해요. 좌절감 같은 것이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극복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왜 그런 것을 느끼냐면, 우리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보통 아파트에서 어머니들 부녀회 모임이나 동 대표 출마할 때 이야기를 할 때, 불합리한 이야기를 하면서 언뜻 지나가는 말로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이제는 여자들이 몇 년 전 동 대표 선출할 때 당시하고는 여성들의 지위가 많이 틀려졌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게 사회 전반적인 여성들의 의식이 높아진 것 같아요. 그러나 여전히 낮기 때문에 생활과 밀착한 이 부분부터 시작하는 거죠.”


※ 남서여성민우회 홈페이지는 http://home.freechal.com/minoo/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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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지역단체 대표의 고민 - "동북여성민우회"를 찾아
인터뷰 : 김인숙(대표)

어떻게 하다보니 최근 인터뷰 대상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다소 의도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지역자치운동을 얘기할 때 여성을 제외하면, 사실 할 말이 없다. 한 마디로 여성, 특히 주부만큼 지역 살림을 잘 아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일상을 돌아보면 삶의 언어는 곧 주부의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시스템 속에 매몰되어 있는 남성들보다는 주부들의 시야와 언어는 더 자유롭다. 집 앞 슈퍼에서, 빨래터에서, 응접실의 찻잔 앞에서 주부들의 수다는 삶을 대변하고 생활을 대변한다. 그렇게 삶의 현장은 주부들의 놀이터다.

오늘 만난 인터뷰 대상자도 여성이다. 민우회 지부 중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다는(그렇다고 다른 지부가 왕성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동북여성민우회’를 찾아 김인숙 대표를 만났다. 사실 이번 인터뷰는 바로 앞에 만난 관악의 김금희 의원과 대립되는 인터뷰다. 김금희 의원이 의원의 입장에서 시민단체를 바라봤다면, 김인숙 대표는 시민단체 입장에서 의원을 이야기한다. 자치운동의 하나의 영역으로써 지역정치를 본다면 이 두 그룹은 악어와 악어새 관계다. 지난 지방선거 과정에서 많은 지역운동단체들은 적극적인 후보전술을 펴왔다. 이 모양새를 대리인운동이라고 정립한 틀은 없지만, 느슨한 대리인운동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리인운동의 요체는 후보자와 조직간의 관계에 있다. 대리인운동은 단순히 후보에게 ‘시민후보’라는 명함만 달랑 매달아준 행위가 아니라, 후보가 ‘조직은 나의 모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 없이, 2002년 이후 지금까지 이 두 그룹의 관계는 안녕한가?

김금희 의원과의 인터뷰에서 느낀 것이긴 하지만, 이 둘의 관계가 끈끈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느꼈다. 그 길을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면 충분한 위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공들인 만큼 현재의 모습은 다소 실망스럽다는 것이 필자의 느낌이다. 실용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지역운동단체이든 지방의원이든 지역정치를 잘 개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풀뿌리 세력의 지역정치 참여는 ‘흑묘백묘론’으로 등치시킬 수 없는 것 같다. 운동세력이 힘겹게 후보전술을 전개할 필요 없이 뛰어난 인물을 그 자리에 앉히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가? 이 질문이 다음 선거의 화두가 되지 않을까?

인터뷰로 들어가자. 동북여성민우회의 간략한 역사와 김 대표와의 인연을 물었다.

“동부여성민우회가 만들어진 게 92년도였어요. 지역 여성운동을 할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여성운동을 대중화시키기로 했는데, 대중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생활협동조합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생협을 하려면 지역에 내려와서 회원들을 만나야 된다, 그래서 이 쪽으로 오게 된 것 같아요. 처음에 와서는 설문작업부터 했다고 그래요. 이것은 제가 전해들은 얘기에요. 일반 대중 여성을 통해서 설문조사를 해봤더니, 지역의 문제 거리가 있다는 것, 누군가 해결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데, 이것은 자기가 아니고 또 다른 누가 해야 된다고, 이율배반적으로 생각한 거죠. 일반 여성들이 관심 가질만한 일이 뭘까 하면서 교육사업부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당시 초창기 보면, 개혁적인 여성단체가 할 것 같지 않은 프로그램들, 메이크업이니, 수지침이니, 뭐 이런 것들, 이런 다양한 교육부터 시작을 했더라고요. 그리고 저희가 작년에 핵심활동가들을 교육 같이 하면서 옛날 얘기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민우회 같지 않게 생각했던 소소한 일들을 통해서 들어왔던 사람들이 핵심 일꾼으로 남은 경우가 꽤 있더라고요. 그래서 지역의 어떤 단체로서 일반 여성에게 문턱을 낮추게 할 때, 그 처음에 시작했던 그 교육사업, 그리고 생협 등이 주요했구나 라고 느낄 기회가 됐었어요.
저가 인연을 맺은 것은 93년도 정도 됐을 거예요. 그 당시 여성학 소모임을 만들었는데.......그 모임에 제가 결합하게 되었어요.......보통 소모임이 1년 가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고 가다가 저절로 소멸화가 되죠. 그 그룹이 다시 동화읽기 모임이 되었어요. 어머니들이 아이의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떤 것들을 권할 것인가, 그 당시 이오덕 선생님이니 이런 분들이 책 읽는 모임을 했다가 또 수그러진 시기가 있었죠. 그런데 그러면서 저는 잠시 취업을 했죠. 그러다가 95년도에 다시 합류했어요. 지금은 상담소가 본부에만 있는데, 그 당시에는 지부에도 상담소를 만들 계획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성폭력 상담원 교육을 시켰었는데, 그 것을 제가 들었고, 그 인연으로 상담소 간사로 합류를 해서 한 10개월 근무를 했어요. 그래서 상담소를 만드는 작업을 해 놓고 그리고 남편 때문에 외국을 갔어요. 그래서 99년도 11월에 왔으니까, 다시 합류한 것은 2000년이죠. 그래서 제가 했던 것은 2000년부터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동북여성민우회의 역사는 10년을 훌쩍 넘었다. 생협을 토대로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뿌리내린 몇 안 되는 조직인 듯싶었다. 김 대표도 초창기부터 인연을 맺었고 중간에 직장생활과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떠나면서, 귀국하면 민우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2000년에 복귀했으니 벌써 4년이 돼간다. 동북여성민우회가 좋은 모델로 꼽히고 있다는 말과 함께 왜 그런 평가를 듣고 있는지 물었다.

“저도 잘 모르죠.(웃음) 그러나 제가 느끼는 것은 11개 민우회 지부들과 만날 기회가 있으면 조금 다른 분위기가 있는데, 여기 동북여성민우회는 하나 하나의 인물을 보면 빼어난 인물이 적어요. 그렇지만 뭔가 굉장히 즐겁고 재밌고, 그리고 서로 격려하고 칭찬해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될 때, 격려하고 칭찬하고 지지해주고 이런 분위기가 정착되기까지 우리 선배들이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지금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요. 그리고 그것이 제가 여기 있는 보람이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이 아홉 가지가 부족하더라도 한 가지 잘 하는 일이 있으면 그걸 충분히 칭찬을 해주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발견해주는 역할,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게 특히 여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정말 없었잖아요. 굉장히 주눅 들어 있고, 자기 가치들을 못 봐요. 그런데 그 사람이 잘 하는 하나의 점을 보고, 저도 어떤 일을 할 때, 이 사람에게 맡겨요. 그러면 약간 저 사람이 부담이 되겠다 싶어도 맡겨버리면, 정말 더 큰 일을 해 내고, 그러면서 본인들이 기뻐하고 자기가 스스로 발견하는 것을 볼 때, 저도 기쁘고, 그런 역할을 해내는 것이 저희가 하는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그것은 발견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지만, 정말 능력 있는 여자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것은 우수한 여자들이 지역에 있다는 것, 그것은 사회가 키워낸 일이죠. 그런데 저희는 그것을 이리로 오게 만들고 스스로 찾게끔 만드는 기회 제공을 하는 것, 민우회가 하는 활동의 쪽들이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죠.”

동북여성민우회라는 조직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 동생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자신의 단점보다 장점을 북돋아주는 조직이라면 누구라도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긴 역사 동안 쌓은 조직운영방식의 노하우일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사례를 물었다.

“예를 들자면, 활동가로 현재의 사무국장은 월등하게 우수해요. 사무국장이 개입을 해서 어떤 일을 할 때 완결성이 굉장히 높아져요. 일의 완성도가 좋은 거예요.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업, 어떤 사업이 얼마나 완성도 있게 마무리되느냐가 아니고, 제가 볼 때는 이 사업을 어떤 주체들이 하느냐, 어떤 회원들이 주체가 될 때 핵심적으로 이끌어가는, 그런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한 회원이 어떤 일을 통해서 얼마나 자기 완결감을 느끼느냐, 완성도를 느끼고 자기 역량 체험을 하고 결과물로 성과를 가져갈 수 있느냐, 그러면서 이 사람이 바뀌느냐, 그런 곳으로 저는 초점을 맞추고 싶거든요. 어떤 일로 너무 일이 결과에,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사람 중심으로 가라고 얘기를 하거든요.......그런데 제가 이런 것을 머리로 안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었는데, 제가 처음 2000년도에 와가지고 지역자치위원회를 맡으라고 해서 맡았어요. 그럴 때 제가 일련의 중요한 몇 가지 사업을 했었어요.......이 일을 할 때, 실질적으로 이것과 연관된 어떤 실무적인 일을 사무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잖아요. 서류를 꾸민다거나 설문 안을 대충 만들어 놓으면 손 보고 문서화한다거나, 이런 것들을 사무국에서 서포터를 쭉 해주더라고요. 그러니까 저 개인이 할 수 없는데, 저 개인 플러스 사무국이 붙어 있었죠. 그것을 통해서 제가 재밌고, 나도 할 수 있네, 하면 자기 발견을 하게 된 기회가 있었고 옆에서 서포터해주면서 같이 일이 되더라고요. 저는 우리 회원을 다 할 수 없지만, 최근에 지역자치위원회에서 사회단체보조금 건이 발생하잖아요. 여기서 주 책임을 누가 맡을래, 홍은정 씨라는 인물이 딱 맡았어요. 홍은정이라는 사람이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서포터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이 사람이 가져가거든요. 그리고 성과도 이 사람이 가져가거든요. 이럴 때 자기 계발도 되고 성과를 느끼고 기쁘고 하는 것을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모든 인터뷰는 내 활동의 귀감이 된다. 영감을 주는 김 대표의 한 마디. “활동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또는 “그 사업을 누가 했는가?” 중앙단체든 지역단체든 상근 활동가들은 일당백의 역할을 한다. 아무리 적극적인 회원이라 해도 직업적 활동가만큼 일을 잘 처리할 재간은 없다. 그래서 웬만한 단체들은 상근 활동가 중심의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북여성민우회는 최소한 그런 정서는 아니다. 믿고 맡기고 그 성과를 개인이 가져간다. 개인의 발전은 조직의 발전이고 조직의 발전은 개인의 발전 아닌가? 동북여성민우회가 잘 나가는(?) 비결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마디 덧붙인다.

“그렇지만 회원에 따라 많이 다른 것 같아요.......어떤 회원에게 일을 맡길 경우, 그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 분에게 끊임없이 책임을 맡기지만, 일이 진행이 안 되니까 자꾸 참견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사무국의 욕심만큼 일이 잘 안 되면 자꾸 개입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 수위 조절하는 것이 정말 힘들더라고요. 맡은 사람이 일도 잘 하고 그 성과를 가져야는 것이 좋은데, 썩 만족스럽지는 않은 경우도 있어요.......저는 농담이 아니고, 다행히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 많지 않고, 이대로 보고 넘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능력 있는 출중한 사람이 그것을 기다려주고 참고 하면 참 힘들지만, 저는 그래야 된다고 생각해요.”

동북여성민우회 회원은 대략 1,900명 정도 된다. 대부분 생협 회원이다. 그 중 150명 정도가 정회원인데, 여기서 정회원이란 꾸준히 회비를 내고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회원을 말한다. 그 정회원 중에서도 정예부대로 분류할 수 있는 수가 약 30명 정도다. 그러니까 동북여성민우회의 활동가는 30명 정도로 보면 된다.(동북여성민우회에서는 이들을 ‘핵심활동가’라 부른다) 다른 단체에 비하면 많은 편이라 할 수 있다. 동북여성민우회에서 운영하는 생협의 월 매출액은 대략 7-8천만 원 정도다. 그리 적지 않은 매출액이지만, 생협의 특성상 마진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 연간 순이익은 2천 정도의 규모라 한다. 상근자는 1명, 반상근자는 5명, 그리고 파트타임이 3명 정도다.
김 대표에게 동북여성민우회의 꿈꾸는 그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 5년, 또는 10년 후?

“우선 저는, 여성이 살기 편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제도 마련이 기본적으로 되어야 하는데, 국회를 통해서 마련되어야 할 것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도봉구청, 노원구청에서 만들어지는 조례나 이런 제도들이 정말 주민의 입장에서 만들어지는, 주민의 입장에서 행정이 행해질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는 것, 그렇게 잘 만들어지면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겠지요. 그리고.......도봉구, 노원구만이라도 2년 후의 지자체나 선거 때 적극적으로 여성들이, 특히 민우회 출신 여성들이 의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으면 제일 좋겠어요. 지금 현재로는. 단기적으로. 그랬으면 좋겠고. 그리고 제가 주민자치센터에 의원으로도 나가보고 하지만, 요즘에 제가 느끼는 한계는 굉장히 우리가 활동을 잘 하고 지역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게 정말 새 발의 피구나, 우리 삶 속의 갇혀 내 집 밖을 못 본다는 그런 답답한 느낌이 들어요. 여기 있을 때에는 행복하고 누구나 말이 통하는 선생님 같은 분을 다 만나요. 그래서 칭찬 받고. 그러나 몇 걸음 차이로 주민자치센터의 회의에만 나가도 벽에 부딪혀요. 그러면서 내가 살고 거주하고 있는 이 지역의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꿔내야 할까. 주민자치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어쩜 저렇게 비자발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회의에 나가면 너무나 화가 날 때가 많아요. 그래서 그런 민도가 좀 올라가야 되는데, 고민이죠.”

우리에겐 민주주의를 삶의 현장에서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장 우리에게 그런 제도가 뚝 떨어져도 그리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행정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주민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내몰았던 것도 행정이고, 자발적 참여보다는 동원에 의한 강제적 참여를 이끈 것도 행정이다. 예산도 짜고 조례도 만들고 복지도 하고 개발도 혼자 다 했다. 주민은 단지 민원인이다. 그러니 밀려드는 민원 때문에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공무원들을 보면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민주주의 경험의 부재는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가로막아 왔고, 한 발짝 나가면 우리의 사고체계와 이질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화의를 느끼기도 한다. 여기서는 짧게 적었지만, 김 대표가 사례로 든 주민자치위원회는 우리가 뚫어야 할 두꺼운 벽임에 틀림없다. 화제를 지역정치 참여로 돌렸다. 동북여성민우회는 지난 95년부터 후보를 배출할 만큼 지역정치 참여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 민우회와 민우회를 대변해서 나온 의원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아(한숨!) 골치 아파요. 어.......저는 그 전 상황은 잘 몰라요. 전임 대표에게 많이 들었는데, 항상 저희가 후보를 냈을 때는 전임 대표 같으면 자기 가정 다 팽개치고 간난아이 어디다 놔두고 가서 선거운동을 밤낮으로 했고, 지난 선거 때도 마찬가지였는데.......그 전 의원들을 보면 배출해 냈지만 우리의 대변인 역할을 해주길 공식적으로 요구를 했건 안 했건, 심리적으로 그런 요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의원들 측에서는 너희가 배출했기 때문에 끝까지 의정활동을 책임지기를 또 기대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이 서로 안 맞았죠. 그래서 서운한 관계가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의원이었거나. 그러면서 그 의원의 활동이 개인의 역량에 다 맡겨져 있었어요. 다행히 제가 초창기 했던 모 여성 의원은 너무 훌륭하게 활동했죠. 그리고 너무 열심히 했대요.......그 의원 같은 경우 개인이 똑똑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노력과 연구를 너무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데 민우회가 뒷받침 못했기 때문에 섭섭했을 것 같아요. 또 민우회 측에서는 제가 전해 듣기로는 지역에서 환경 관련 사항이 있을 때 그 의원이 시민단체를 대놓고 문제 있다고 지적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의원의 역할과 배출시킨 모태가 되는 시민단체와 일정부분 역할에서 차이가 나는 거구나, 이런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연결고리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그것이 고민인데.......저는 무엇보다 의원과 조직과의 관계에서 준비된 후발 주자를 만들어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현재 의원은, 그 배경을 잘 아시겠지만, 급박하게 우리 후보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현재의 의원과 결합해서 활동하는 과정 속에서 그래서 우리 회원들이 알게 모르게 교육이 되면서 또 다른 주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제가 기대를 했어요. 그런데 현 시점에서는 아니에요.(웃음) 그래서 이 구도로는 사람이 키워지는 것이 아닌가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고민 중이죠. 갈등이 많았어요.”

조직과 의원 간의 관계가 뜻대로 전개되는 것 같진 않아 보인다. 후보를 배출한지 2년이 채 안 된 시점인데도 매우 회의적이었다. 내부적인 어려움을 진솔하게 내뱉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김 대표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그렇다면 김 대표는 어떤 관계를 희망하고 있는가?

“시민자치정책센터에서 답을 주세요.(웃음) 제가 생각했던 것은 아까 그거예요. 그러니까 서포터의 역할이어야 할 것 같고, 그렇게 해서 의원과 플러스, 우리는 세 명을 마련해 놨었거든요. 딱 붙어가지고 행정사무 감사가 있다면, 몇 달 공부를 하고, 의회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고, 의원에는 어떤 의원이 들어가 있는데, 이들의 성향이 어떻고, 그 다음에 올해 주요하게 다뤄질 의안들이 이런 것이다, 라는 서로 간의 기본 교육이 있고, 그리고 행정사무감사 하면 구체적인 문건을 가지고 같이 공부도 하고, 이럴 때 개인의 서포터가 아니라 민우회라는 조직 속에 있는 서포터니까 얼마나 활동력이 클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같이 공부를 한다고요. 그래서 예를 들어 의원이 A라는 안건을 다루는데, 내가 볼 때, A라는 것으로 처리를 해야 할지, B라는 것으로 처리해야 할지, 그러면 A쪽도 검토해 보는 사람, B를 검토하는 사람, 나는 C를 검토해보겠다 하면, 얼마나 힘을 받겠어요. 이 과정 속에서 몇 사람이 일을 나눠서 교육이 되잖아요. 제가 생각했던 것은 그거예요. 민우회 내에서 11명이 예산분석 팀과 의정감시, 의정연구모임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눴어요. 그런데 의원이 자꾸 마찰을 빚어요.......원인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답답하고.......”

그래서 다시 물었다. 애초에 그런 관계 정립이 잘못 된 것이 아닐까요?

“예, 그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작년에 지역당, 일본의 가나가와네트워크 같은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는데, 저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 것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는데, 현재로는 예를 들어 사회단체보조금 건으로 해도 민우회가 풀려고 하는 방향성이 있다고요. 그런데 의원과 많이 달라요. 매번 달랐어요. 그리고 정확한 사실은 저희가 100% 서포터도 못하고, 또 의원도 우리의 의사를 100% 대변도 못하고, 이런 관계인데, 그래서 소원한 것이 당연하죠. 그래서 어떻게 의원과 우리와 협조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 제가 의원한테 말 한 것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달라, 이를 테면, 계도지 예산을 깎으려고 하다면, 의원들이 문제제기를 했을 때는 통반장들이 워낙 반발하니까 감당하기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저희 같은 시민단체가 예산 분석을 해서 시민단체 이름으로 항의서를 냈죠. 그러면 의원이 가서 이 항의서를 명분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하면 반이라도 깎을 수 있거든요. 이런 협조관계를 적절하게 잘 만들어가야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우리의 민의를 대변하지 못한다면, 또 활용을 하는 형식으로써 조금 우리와 시각을 맞출 수 있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역할을 잘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것을 서로 협조하며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늘 느끼는 거지만, 조직과 후보와의 관계가 명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애매할 경우, 어떤 식으로든 양자가 섭섭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서로의 기대치가 다르거나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헛바퀴는 개별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두 지역이 겪고 있는 진통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가나가와네트워크>의 모델이 우리에게 던지는 신선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나가와네트워크>를 보면서 ‘빙고!’라고 외칠 수만은 없다. 그대로 적용시키기엔 환경적 차이가 매우 크다. 후보전술에서 어떤 원칙을 가질 것인가, 소통의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한국식 협동작업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등등 이런 고민들이 선거 전부터, 오랜 기간 동안 논의되고 고민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김 대표는 한 가지를 덧붙인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의원만큼 정보력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그럴 때 개인적인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그런 것은 있는 것 같아요. 무소속이 갖는 한계. 지난 회기 때 당선된 정보연 의원이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리고 지역을 잘 몰랐다는 한계. 그리고 시민단체가 문제제기 하는 방식과 의원들이 일을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 그런 차이점이 있는 것 같아서 아직 좋은 결합 모델을 못 만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음 선거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까 말씀대로 제가 기대했던 것이 그런 것이었는데, 현재는 그것이 무너졌다고 봐야죠. 정말 무너진 건가?(웃음) 지금으로는 현재 지역자치위원회의 활동들이 굉장히 구청 행정 감시 쪽으로 밀착하게 감시 비판하면서 다루기 때문에 그 자체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아직 없는 형편이죠.......도봉 같은 경우는 도봉포럼도 만들고 있고요, 저희는 핵심적인 단체 중심으로, 도봉시민회, 민우회, 한살림 등 단체들 대표, 의원, 몇 명해서 그 때 그 때 이렇게 서로 현안을 의논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었어요. 그 안을 내기 전에 저희가 의정 평가회를 못 했거든요. 저희 단체 내에서는 의원을 배출했는데,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정리하고, 이 기회로 잘 했던 활동들을 비교하고 정리하게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지역자치위원회가 도와야겠다, 의정 보고회를 하자고 결정을 딱 했어요. 그래서 방학3동과 중랑천사람들도 같이 하려고 했는데, 이게 법적으로 서로 다른 동이 모여서 보고회를 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평가회로 가자, 그래서 졸지에 평가회가 됐어요.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던 평가회가 되면서 뒤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아까 말했듯이 의원은 의원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좋은 접점을 잘 찾지 못한 것, 이런 문제 지점이 있어서 서포터 그룹을 우리 민우회는 있으니까 민우회가 제안을 하는 식으로 했어요. 그래서 각 단체에서 2-3명씩 만들어서 의정도우미라는 서포터 그룹을 짜자, 이렇게 됐어요. 제안을 해놨는데, 다른 단체에서 아무 답이 없는 상태에요. 의원들도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한 것 같고.......그런 상태에서 저는 저대로, 아이구, 이거 어떻게 하나, 이러고 있었어요. 의원 입장에서도 우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어쨌든 단체 대표나 의원 몇 명 주요한 현안을 의논할 수 있는 논의단위가 필요할 것 같고, 일단 몇 개 단체의 대표들과 몇 몇 의원들을 중심으로 꾸려질 것 같아요.”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지역운동단체의 정치 참여는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따지고 보면 양자가 애초부터 관계의 틀을 정리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한계에 부딪친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다시 주제를 바꿔,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을 했다. 왜 지역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중요한가?

“그 얘기는 이론적으로 다 나와 있지 않나요?(웃음) 저는 그런 이론보다, 개인 경험을 말한다면, 우선 우수한 사람이 여자가 많아요. 남자들은 일단, 남편한테도 말해보면, 지역에 관심이 없어요. 지역을 잘 몰라요. 뭐 거대 담론으로 떠드는지 모르지만, 각론으로 들어오면 사고 체계가 틀려서 그런지 잘 몰라요. 한국 사람이 그런 것 같아요. 학문을 해도, 우리는 오버럴(overall) 하고 묵직하게 주제를 정하고 논문을 쓰는데, 여성 같은 경우는 아주 좁은 영역을 아주 깊숙이 연구를 하고, 이게 하나 하나가 깊이 있는 연구가 되는 거 같거든요. 그런데 남자는 오버럴하게 다 아는 것 같으면서 다 모르는 것. 남자들 사고 체계가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잘 몰라요. 그런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가면 여자들이.......왜 그런 건가? 저는 치밀하게 더 잘 알고, 똑똑하고, 그리고 저는 민우회에 있으면서 너무너무 좋은 것이, 일을 하는 방식이 민우회에서 여성조직이 그렇고, 민우회가 그렇고, 동북이 특히 그런데, 누구 하나 특출한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모여서 같이 하면서 문제해결을 잘 푸는데, 그러니까 어떤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떤 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 저 개인은 별 생각이 없어요. 우리 모여서 이거 어떻게 할까, 하면 막 의견들이 나와요. 그리고 집을 지어요. 그리고 이것을 해 보면 결과가 좋아요. 이런 식의 토론식, 다수가 참여하는, 이런 운동방식이 여성이니까 가능한 것 같아요. 그런데 여자니까 가능한 것이 약간의 열등감, 그래서 겸손할 수 있는 것, 특히 저희는 그런 것 같아요. 저희 남편이 노동운동을 했으면서도 잘 모르더라고요.”

확실히 남성과 여성의 사고체계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여성이 더 섬세하고 우수하다는 것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김 대표의 판단이다. 그래서 더 많은 여성이 사회에 참여할 때, 우리 사회를 더 윤택해 질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이 일이 재미있냐고 물었다. 힘은 들지만 소중한 경험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민우회 대표로서 기본적으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 그리고 중요한 현안을 판단해야 할 시점에서 그 역할을 대표의 자격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버겁다고 말한다. 그러나 13년의 민우회 역사가 개인의 허물을 감싸 안을 정도로 컸고, 서로 긍정하고 협력하는 조직의 특성이 그런 부담을 덜어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보람을 느끼기도 한단다. 아무튼 동북여성민우회의 장점이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자치를 고민하는 모든 지역에 귀감이 되는 좋은 활동을 펼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북여성민우회 파이팅!!

※ 동북여성민우회 홈페이지는 http://dongbuk.womenlink.or.kr/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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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의 철학, 삶의 철학” -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을 찾아
인터뷰 : 정외영 대표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떠오른 사자성어. 청산유수! 정외영 대표는 거침없이 말을 토해냈다. 역대 인터뷰 중, 가장 적은 질문으로 가장 많은 답변을 한 케이스였다. ‘녹색 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이하 ‘녹색삶’)과 10여 년간 동고동락을 해온 정외영 대표. 그녀가 토해 낸 말들은 10여 년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생생한 증언이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한편의 ‘감동 드라마’다. 다음 일정 때문에 촉박하게 진행된 인터뷰였지만, 시간이 더 허락했더라면, 밤하늘 돗자리 깔아 놓고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시작되던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에 버금갈 정도로 밤샘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였다.

‘녹색삶’은 아기자기 지역살림을 만들어가는 여성들의 사랑방이다. 중년의 나이로 접어든 초기 멤버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 것을 사무실에 들어 선 순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해맑은 아이들과 호흡을 같이 해서일까? 사무실은 봄 들판 파릇파릇 피어나는 새싹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화책으로 둘러싸인 아이들 도서관이 목격되고, 자원봉사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 모두는 소외된 아이들의 안식처로서 손색이 없었다. 자, 그럼 ‘녹색삶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맨 처음 하는 질문, ‘녹색삶’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물었다. 첫 질문부터 답변의 내용이 길어 몇 개 단락으로 나누었다.

“제가 이 지역에 94년도에 이사를 왔어요. 이사 오기 전에 구로에 살았었는데, ‘살구 여성회’라는 곳에서 활동하기도 했었습니다. 어차피 저도 이웃들을 사귀어야 했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만나면서 얘기들을 많이 듣게 되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놀랍다기보다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구로 지역에서 만났던 이웃 여성들의 이야기나, 여기 와서 만났던 이웃 여성들의 이야기가 공통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여성의 삶에 밀착된 부분인데, 자녀 양육의 문제, 그리고 여성 자신의 문제, 가족간의 문제, 이런 등등의 문제를 가지고 이웃간에 서로 서로 얘기를 털어 놓고 살잖아요. 그런데 그런 얘기들이 다 공통적으로 여성의 문제였다는 거죠.
이 지역의 많은 여성들이 이야기해주셨던 것은 뭐냐면, 여기가 너무 지역적으로 여건이 열악하다는 거죠. 10년 전이니까 그 때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일정하게 성장해서 진학하게 될 중학교, 고등학교가 너무 적었어요. 그리고 관내에 도서관이 하나도 없었고, 그리고 구민회관도 없었고, 일반적인 문화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싶은 욕구들을 충족할 만한 곳이 없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여성들도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해야 하는데 이런 것도 취약하고, 이런 어려운 점을 많이 갖고 있더라고요. 이런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강북 쪽 사람들의 해결 방침이 뭐냐면, 이런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려면 빨리 돈 벌어서 강남으로 가야 한다는,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한 피해의식, 자존감, 이런 느낌, 똑 같은 부모로서의 자괴감,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것 같았어요.
한 번은 차를 마시면서 이런 문제를 얘기하다가, 앞으로는 불만만 얘기한다고 해서 어느 날 학교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해서,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해보자, 이러면서 구로구의 사례를 말씀드렸더니, 한 분이 우리가 못 할 것이 없지,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처음에 우리가 뭘 하고 싶은 지 얘기해보자 했더니, 엄청 쏟아 나오더라고요. 공부도 하고 싶다, 아이들한테 좋은 기회도 주고 싶다, 뭐도 하고 싶다, 쭉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는 없잖아요. 이 중에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거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을 우선순위로 정한 것이, 저희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기 때문에, 얘기가 나온 것이 우선 아이들한테 좋은 책을 읽히고 싶은 욕구가 많았어요. 그 중에 한 분이 주부들의 독서모임을 소개하면서, 그런 정도는 아이들 책 읽는 정도는 자원봉사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거죠. 그 다음에 여성들은 뭘 하고 싶은가 쭉 봤더니 그 당시만 해도 배움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지금은 지천으로 널렸지만. 영어도 하고 싶다, 일어도 하고 싶다, 이런 얘기들이 올라왔어요. 그래서 이런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사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런 것을 해줄 수 있는 자원봉사자를 찾은 거죠. 자원봉사자를 찾는 것은 내 이웃에 어떤 자원이 있냐를 찾아보자는 개념이잖아요. 이런 경험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죠. 이렇게 해서 몇 가지 프로그램을 선정했고, 놀랍게도 자원봉사자를 찾을 수 있었어요.”

‘녹색삶’의 지역운동은 이렇게 여성들의 수다를 통해 이루어졌다. 마주보고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서로가 확인할 수 있었고, 그들의 욕구에 대해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하나씩 풀어나갔다.

“자원봉사자를 찾아가는 과정에 많은 힘을 받았어요.......그렇게 조금씩 프로그램도 시작하고, 폐식용류로 무공해 비누 만들기도 하고, 작은 활동들이 생겼어요. 그러다가 한 번은 저희가 실무자도 없어서 회원들이 어느 날은 왔다가도 볼 사람도 없고, 그냥 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누가 공간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집에 돌아가면서 하자고 의견도 있었는데, 한 회원이 자기가 알고 있는 4층짜리 빌딩 옥상에 비어 있는 짜투리 공간이 있다는 얘기를 했는데, 2평도 안 되는 공간이었죠. 그것이 좁고 하니까 아무도 안 빌리는 거예요. 다행히도 주인이 사용하고 싶으면 사용하라는 답을 주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그 곳을 빌려서 책상 하나, 전화 하나를 빌려 놓고 활동을 시작했죠. 그러다보니까, 사람이 많이 찾아왔는데, 금방 좁은 사무실이 복잡해졌죠. 또 공간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사무실 맞은 편 공간에 다른 사무실이 있었어요. 꽤 크죠. 그런데 이 사무실이 뭐 했냐면, 오전에 악세사리 같은 거 여성들이 쭉 모여서 교육을 받고 나서 팔러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찍 와서 교육만 받고 다 나가시기 때문에 우리가 모여서 활동하는 때 쯤 되면 이 공간이 비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그 시간을 쓰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공간을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경험이 저희한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2평짜리 공간도 안 되는 곳에 있으면서 필요하면 밖에 있는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활동의 경험을 얻을 수 있었던 거죠.”

자원봉사자들과 만났던 경험도 소중했지만, 무엇보다 공간을 만들어냈던 과정은 ‘녹색삶’의 전(全)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2평 남짓 빌딩 옥탑방 공간에서 첫 출발을 시작으로 지금의 둥지까지 공간을 얻어나가는 과정은 매우 극적이고 흥미로웠다. 특히 96년 겨울방학, 무턱대고 동사무소를 찾아갔던 기억은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아 있다.

“96년 겨울이었던가, 방학 동안에 아이들한테 새로운 프로그램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 때 자원이라는 개념이 물적인 공간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인적 자원이 얼마나 많은지 또 새삼 실감하게 되었는데, 이웃 동네에 덕성여자대학가 있잖아요. 그 대학에 가면 각종 동아리들이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 한 동아리가 만화동아리가 있었어요. 아이들이 만화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 만화도 하고 NIE도 하고 이런 활동을 해봤더니, 그 때 120명의 아이들이 신청을 했어요. 폭발적인 반응이었죠. 그만큼 이 지역이 소외되어 있었던 거죠.

그런데 당장 공간이 없잖아요. 저희들이 다시 공간 확보를 위해서 동사무소를 찾았어요. 그 당시 동사무소가 새로 지워졌기 때문에 2층 공간이 꽤 넓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동장님을 만나러 갔어요. 동장님 만나러 갔더니 동장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더라고요. 소파가 길쭉하게 딱 있고, 동장님은 이렇게 비스듬히 앉으셨고, 우리는 소파 끝에 엉덩이만 살짝 걸쳤어요. 우리가 공간 얘기를 꺼내니까, 동장이 “동사무소 공간이 이 사람도 달라고 하고 저 사람도 달라고 하면 되겠냐고” 이러시는 거예요. 그렇게 잠시 동안 눈치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한 회원이, “동장님, 저도 이 곳에서 30년 이상 살았는데요.......”라고까지만 했는데, 갑자기 동장님이 이렇게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똑 바로 자세를 고쳐 앉는 거예요.(웃음) 그러면서 동장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우리가 그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안 거예요. 다 주민이잖아요. 그러면서 옆에 있던 사람들도 다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몇 년이다, 나는 몇 년이다, 이렇게 해서 동장이 태도를 바꾸면서, 그러면, 다 우리 주민들이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이니까 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공간을 처음으로 빌리는 경험을 했는데, 그 곳이 꽤 넓었어요. 책상 다 되어 있죠. 겨울에 난방 되어 있죠. 그래서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했어요. 이것이 한 마디로 기폭제가 되었죠.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하는 것을 동 직원들도 보고 동사무실을 들락거리는 주민들도 보시고, 학부모들도 보시니까 이것이 힘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프로그램에 대해서 욕구가 있는 것도 알았고, 자원봉사자도 어떻게 발굴하는 것도 경험이 생겼잖아요.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기 시작한 거죠.”

권위적인 동장의 태도를 표현할 때는 충분히 수긍이 갔다.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동장의 모습. 지금은 주민자치센터로 바뀌면서 주민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지만, 그 당시 높은 지위에 있던 공무원의 태도는 그랬다. 더구나 여성들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그들에게도 커다란 무기가 있었으니, ‘30년을 살아온 주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동사무소의 경험은 그들의 활동에 기폭제가 된다. 그렇다면, 현재 ‘녹색삶’이 가장 주된 활동으로 모델이 되고 있는 가난한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졌을까?

“모임 시간이 되면 여러 얘기들을 하잖아요. 그 때 당시 언론을 통해 저소득 가정 아이들의 어려운 상황들이 일관되게 기사화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기폭제가 되면서,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혼자 크는 것이 아니잖아요. 결국 이웃 아이들과 다 같이 클 수밖에 없는데, 한 회원이 자기 경험 얘기를 한 거예요. 가끔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준비물 안 가지고 가면 학교에 방문을 하기도 하잖아요. 그 어머니가 하루는 방문을 했는데 한 아이가 여름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상황에서 겨울 옷 같은 것을 입고, 머리는 덥수룩하게 해가지고 교실 뒤에 벌을 서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 어머니가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면서, 저 아이가 왜 저러고 있어요, 했더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골치가 아파 죽겠다는 거예요. 준비물 하나 해오나, 숙제를 해오나,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하나, 그러니까 학습에 방해가 된다는 거예요. 선생님도 초기에는 관심을 갖고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이런 경험들이 생기니까, 방해가 돼서 격리시켰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결국은 저 아이들이 커서 주먹질하고 친구들 가방 뺏고 돈 뺏고 그런다는 거예요. 이런 경험이 이야기들이 오가니까 다양한 경험들이 쏟아져 나온 거죠.......

이런 얘기하면서 저희가 중요한 길을 결정한 겁니다. 결국은 우리 아이들이 우리 손바닥에서 우리 애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다 어울려서 크기 때문에 각자의 아이가 잘 자라기 위해서라도 결국 우리 이웃의 아이들이 잘 커야 한다는 것을 쉽게 공감하게 되었죠. 그래서 우리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 동안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면 이제는 필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눈을 돌리자고 했던 거죠. 그래서 그 때 처음 했던 것이 ‘열린 숙제방’이라는 공부방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거죠.......그래서 부모님이 계셔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못 주는 사람, 아니면 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들, 자연히 빈곤한 아이들, 빈곤하면서 저소득이면서 맞벌이 하는 부모의 아이들, 그러면서 저희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보호자가 옆에 올 때까지 만이라도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방황하거나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만은 막아보자, 그래서 아이들을 보호를 하는 방과후 공부방을 만들어보자, 이렇게 된 거죠.

이런 결정이 내려지자, 어떤 회원들은 두려움을 말하는 거예요. 내 새끼도 제대로 못 가르치는데 애들한테 공부를 가르친다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이에 대한 토론을 계속 했죠. 결국, 공부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어려워서 못한다, 단지 우리가 아이들 한 두 명은 다 키워봤지 않았느냐, 우리 경험 정도를 가지고 도와주자, 선생님이 얘기하듯이, 숙제를 해오나 준비물을 해오나, 그렇다면 적어도 아이들이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할 필요가 없지만, 거기에 대해서 자긍심이 자꾸 줄어들고, 일정하게 사회적 관계에서 계속 소외당하는 이런 일은 없도록 노력을 해보자,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숙제를 도와줄 수 있겠다, 왜냐하면 어머니들이 아이들 숙제를 다 도와주잖아요. 그래서 그 이름이 ‘열린 숙제방’이 된 거예요. 그것이 97년경이죠.”

아주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 주변에 가난한 아이들,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아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곧, 내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열린 숙제방’은 ‘측은지심’에 의한 ‘녹색삶’ 여성들의 선택이 아니라, 가난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동네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것도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부모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숙제만이라도 지도해 주는 보모 역할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은? 여기서도 중요한 경험을 겪게 된다.

“......그렇게 결정하고 보니까, 공간이 없는 거예요. 이 때 또 한번의 놀라운 경험이 나타난 거죠. 공간 문제 때문에 운영위원회에서 회의를 하다가, 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자기 경험 속에서 풀어 나오게 되거든요. 사람들이 모여 온갖 얘기들이 막 했어요. 그러자 한 사람이, 탁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먼저 종자돈을 모아야겠다, 그러면서 우리가 각자 자기가 얼마가 있든지 간에 낼 수 있을 만큼 내자, 이렇게 제안한 거예요. 저는 그 때 정말 놀랬어요. 저는 그런 것을 생각도 못했어요. 일반적으로 삶 속에 있는 여성들이 일상적인 경험이 대부분이잖아요. 그런 여성들이 내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아니면서, 갖고 있는 돈은 내자고 했을 때, 저는 진짜 놀랬고, 감동적이었죠. 대부분의 반응이, 그럼 그렇게 하지, 이렇게 된 거죠. 그 대신에 누가 얼마 냈는지 얘기하지 말자, 모으는 사람만 알게 하자, 이렇게 모았죠. 그렇게 모은 돈이 어떤 사람은 조카들 돼지저금통 갖고 온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가족 아무도 모르게 자기만 든 곗돈을 가져온 사람도 있고. 그러게 모은 돈이 500만 원이 좀 넘었어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안 되니까, 일일찻집을 했던 거죠. 사소한 얘기이긴 한데, 일일찻집 하면 사람들이 핑계를 대고 안 올 수 있으니까, 이틀찻집을 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틀찻집을 했어요.(웃음) 그렇게 해서 처음 그 돈을 가지고 마련한 공간이 바로 이 공간이었어요. 이렇게 해서 현재 만 6년이 지난 시점이죠.”

주부들의 수다 속에는 많은 정보들이 있다. 나중에 정외영 대표의 ‘수다철학’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수다 속에 삶이 있고, 철학이 있고 정치가 있다. 준엄한 수사적 언어가 아니라, ‘삼천포로 빠진다’는 그 수다 속에 말이다. 삶의 경험 속에서 나오는 그런 정보는 지금의 ‘녹색삶’의 정체성을 만들었고, 여러 번의 놀라운 경험을 싹틔우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1명의 아이들과 첫 호흡은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는 점점 늘어나 현재의 규모로 발전했고, 공간도 몇 군데 더 확보함으로써, 그야말로 소외받는 아이들을 위한 복음자리고 거듭나게 된다. 여기까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그 다음 질문. ‘녹색삶.......’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짓게 되었나요?

“‘녹색’이라는 말하면 많은 분들이 환경이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녹색이라는 것은 건강하다, 싱싱하다는 뜻으로 우리 삶이 그렇게 건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거기에는 우리 환경도 중요하고, 사회적 환경도 중요한 거죠. 단순히 자연적 환경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녹색삶이라고 한 단계를 높였던 거죠. 우리가 발족식을 하기 전에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었어요. 주변의 사람들이 공부를 해서 이름을 만들자, 해서 창립총회를 할 때 이름을 만든 거죠.”

‘녹색’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재 ‘녹색삶’ 사무실에는 2명의 실무자가 일을 하고 있고, ‘마을 속 작은 학교’(열린 숙제방)에 1명의 교사, 주민자치센터 내 ‘방과후 교실’에도 1명의 교사, 그리고 이를 총괄하는 사무국장 이렇게 모두 다섯 사람이 일을 하고 있다. 한 둥지를 사용했던 ‘녹색가게’는 얼마 전에 완전히 독립되어 나갔다. 대부분 회원들의 회비로 꾸려나가지만, 곧 있으면 재활용사업장이 개장되면 이 곳에서도 수익이 짭짤하게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10여 년의 역사가 현재의 ‘녹색삶’을 이렇게 성장시켰다. 그렇다면 10년이 지난 ‘녹색삶’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제 개인의 꿈이라기보다는 ‘녹색삶’이 꿈꾸는 것은, 신년이 되면 정기적인 워크숍을 하는데, 거기서도 그런 얘기가 나왔어요. 그 때 나온 결과를 모아보면, ‘녹색삶’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냐면, 지속적으로 ‘녹색삶’이 해야 되는 가장 1차적인 사업은 주민을 지속적으로 조직하고, 그 속에서 주민리더들을 키워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토대로 지역에서 필요한 각각의 영역의 사업들에 그 주민 지도자들이 또 다시 역할을 맡아서 또 주민들의 참여를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이 구도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 ‘마을 속 작은 학교’는 마을 속으로 독립적인 활동을 통해, 점점 더 학교의 내용적인 면이나 이런 것들을 해나가면서 생각보다 자기 목표가 빨리 이루어진 것 같아요. 저희가 너무나 필요한 사업이라고 했기 때문에 숙제방을 만들고 나서, 2년 뒤엔가 공청회에서 골목마다 공부방 1개씩 만들기를 제안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혼자서 했다면 힘들었을 텐데, 주변의 호응와 강북구가 정책적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지금 골목에 거의 하나씩 생기게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경험들이 상당히 주효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숙제방 사업은 꾸준히 진행할 것이고.......또 하나는 ‘나우리’(‘녹색삶’의 청소년 모임)에 있는 청소년들이 계속 요구하고 있는 것은 자기들도 공부방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자기들도 학교 마치고 나면 오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청소년 공부방을 지금 준비하고 있어요. ‘나우리’ 학생들의 봉사 경력이 벌써 8년째거든요. 그런 관계를 지속적해서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예요.
도서관의 경우는 지금 굉장히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데, 저희가 회원 가입을 받아보니까 회원이 꾸준히 가입하고 있거든요. 이 회원 가입을 토대로 신간서적을 모으고 있어요. 도서관은 단순히 도서관 사업이 아니라, 굉장히 복합적인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어요. 보시면 아시지만,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자기가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힘을 기르는데 있어 독서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되거든요. 보통 행사를 하면, 결국 엄마들이 손 끌고 가는 아이들만 가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하는 방식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에요. 여기 있는 도서관은 단지 근거지로 있을 뿐이에요. 실제 여기서 하는 활동은, 회원들이 다섯-여섯 군데 되는 어린이집에 월 2회씩 방문하여, 그 곳에 가서 애들한테 동화책을 읽어주고, ‘독후(讀後)활동’을 합니다. 독후활동은 책을 읽고 난 이후의 활동을 뜻합니다. 즉 자기표현 활동이에요.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반응이 좋아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아이들의 성장에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영향으로 주지 못하는 계층을 대상을 도와줍니다. 어린이집뿐만 아니라 방과후도 들어가죠.”

올해 추진하는 사업 중에는 ‘몽실 아빠, 몽실 엄마’라는 프로그램도 있다.

“작년에 심포지엄을 하면서 144가구 정도를 설문조사 했고, 그 중 10가구 정도를 심화 설문을 했는데, 저희가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를 조직화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거든요. 한 아빠만 있거나 한 엄마만 있는 가정이 저희 아이들도 한 70% 이상이 그래요. 저소득에서 가정 해체가 빠르게 일어나거든요. 아무튼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들어가 보면,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는 겁니다. PC방에서 하루 종일 지내다가, 집에 가면 놀다가 자는 거죠. 그 집은 가관도 아니죠. 마치 폭탄 맞은 집 같았어요.......설거지 그릇은 쌓여 있고, 옷은 여기 저기 나뒹굴고, 이런 아이들한테 어떻게 하라는 지침을 주는 곳이 한 군데 없는 것에 놀랐어요. 또 어떤 아이는 언니가 둘이서 지내는데, 아빠가 늘 일이 늦으니까, 여자 애 둘이서 자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방문을 걸지도 않고 자는 거예요. 저희가 기겁을 했잖아요.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거예요.......얘들은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요. 우리가 검증을 해보면. 그런데 여기 와서 우리가 만난 아이들한테는 그런 생활지도를 가지고 들어가지만, 손 안 닿는 아이들이 한 두 명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올해 사업이 뭐냐면, 바로 그렇게 주민들이 얽어낸 얘기들을 그대로 정보로 모아서 다시 사업에 들어가거든요. 2차 사업이 지금 저희가 주민자치네트워크 사업이 그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몽실 아빠 몽실 엄마’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주민들이 조직이 돼서 지원을 하는 구체적 생활지원을 하는 거예요. 가서 아이에게 생활지침을 줘요. 밥을 해먹을 때에는 안전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 그 다음에 내 몸이 소중하기 때문에 내 몸이 필요한 것은 뭐다, 그리고 자기 몸이 소중하니까 깨끗하게 관리도 해야 된다, 등등 교육을 하려고 합니다. 보통 아빠가 있는 가정의 여자 아이들 하고, 엄마만 있는 가정의 남자 아이들이 목욕을 못하는 거예요. 초등학교 이상이 되면 목욕탕을 데려가지 못하니까요. 엄마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집에서도 그냥 밀고 씻기고 그러는데, 아빠들은 대책이 없어요.(웃음) 아빠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어쩔 때는 저희도 화가 나요. 이런 것이 발견되어 올라오는 즉시 프로그램이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얘기하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말만 하면 안 되니까.”

덤덤하게 우리 사회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 말 속에는 참을 수 없는 가난의 무거움이 있었다. ‘녹색삶’은 그들의 말동무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만으로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다. 아이들의 생활의 터전, 즉 가정, 학교, 지역사회가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저희들이 활동이 단순한 교육활동이 아니라, 학교와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이 부분들을 연결하는 역할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보는 거죠. 어느 순간, 이런 활동이 쳇바퀴처럼 제자리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왜 그런가? 고민을 해보니까, 추적할 수 있었죠. 그러니까, 아이들한테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가정도 여전히 중요하고, 학교도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이 모두가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영향을 미쳐요. 그래서 우리가 그냥 아이를 돌보는 것, 여기에 그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래서 학교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거죠. 그래서 저희는 주요하게 연 2회 정기적인 방문을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안이 생길 때마다 방문을 합니다. 이런 활동이 가정으로 연결되고, 또 아이들의 정보를 가지고 학교로 가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왜 필요하냐면, 요즘엔 학교에서 가정 방문을 안 하시잖아요. 그래서 선생님들은 저희의 활동에 늘 고마워하고 있어요. 저희의 역할이 이런 거죠. 이 소통을 누가 하느냐, 누가 추진하느냐, 누가 따로 해줄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각자 아이의 성장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지역이웃이면 누구나가 해야 하는 일이죠.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시민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봐요. 이런 것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단순히 우리가 교육운동이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지 않아요. 내용은 같지만, 표현은 그렇게 하지 않죠. 그렇다면 지역사회는 뭘 하느냐? 우리의 이웃들이 이런 아이들을 발굴하는 거죠. 통장님도 자기 집 앞에서 애가 뒹굴고 있으면 연락해요. 중국집 아저씨가 배달하러 갔다가 빈곤 가정의 아이들을 만나면, 또 저희한테 연락을 줍니다. 그러면 저희가 당장 방문을 하거든요. 이렇게 주민들이 발굴을 합니다. 이렇게 발굴하고, 그리고 누가 어떻게 연결하느냐, 그러면 아이들 직접 인터뷰를 하고 그 조사를 가지고 자원교사선생님들이 결정하는 거죠. 그 다음 진행은, 아이들 정보를 중심으로 해서 지역에 있는 복지관이나 전문 상담소 등 자원을 쭉 연결하는 거죠. 이것이 각 단계에서 문제를 발굴하고 문제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어떻게 역할을 하느냐가 반드시 이런 과정에 들어가죠.”

‘녹색삶’은 갈 곳 없는 아이들을 학교, 가정, 그리고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코디네이터이다. 선생님과 학부모와 공무원이 해야 할 일을 ‘녹색삶’이 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거기에는 주부들이 있다. 전체 자원활동 규모는 12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어린이집을 돌며 책을 읽어지기도 하고, 숙제방이나 방과후의 자원교사가 되기도 하고, 상담 역할도 하고, 조직을 꾸려나가는 운영위원이 되기도 한다. ‘녹색삶’을 이끈 주역은 바로 이런 주부들이다. 정외영 대표에게 물었다. 왜 여성들이 지역운동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지.

“우선은, 지역문제에 1차로 밀접하게 결합된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점이죠. 예를 들면 쓰레기 문제, 자녀교육문제, 가족문제, 노인문제, 전부다 지역 단위의 문제거든요. 누가 제일 많이 노출되고 누가 전적으로 고민하느냐, 그러면 다 여성들이 고민하는 거죠. 많은 문제에 여성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이것이 현재는 개별화되어 있고 파편화되어 있는 거예요. 각자 자기 문제로 되어 있는 거죠. 혼자서 고민하는 거죠. 그런데 한 번만 모여서 고민하다보면, 각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동시에 되어버린다는 것을 실감하는 거예요. 얘기하다보면, 저 사람도 나하고 똑같은 고민을 해, 맞아, 맞아, 우리 공동의 문제야, 하거든요. 그런데 공동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없잖아요. 이것을 누가 줘야하느냐, 이것이 지역단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지역단체라는 것이 주민이 참여하고 관심을 갖게 하고 공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런 목표를 갖고 있는 그런 지역단체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럼 각자 자신의 삶의 문제를 갖고 어떻게 보면 개별화 되어 있고 파편화 되어 있는 우리가 어떤 계기를 갖고 모여 보면, 각자 개인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 지역사회문제로 전부 연결되어 있는 거죠. 그러면 아, 내 문제가 이 문제구나, 하고 받아들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혼자서는 안 되죠.......이렇게 확인하는 과정, 우리가 서로 고립되어 있거나, 서로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관계되어 있다는, 관계성의 확인은 지역운동의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아이의 문제가 단순히 내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과 연결되어 있는 지점, 우리 모두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되, 동시에 내 문제도 해결되는, 이런 구조라야지, 내 문제만 가만 놔두고 남의 문제가 하면 됩니까? 여성의 전체 그런 생활의 문제에 1차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1차적으로 고민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그리고 두 번째, 시간적으로도 그래요. 여성들은 아직은 전업주부들이 대상인데, 시간도 낮 시간에 그런 문제를 가지고 이런 기회를 만들 때,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여성한테 있는 거죠. 그래서 이 부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여성이고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직장생활을 한다던가 하면 이 구조로는 참여할 수 없잖아요. 지역운동은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해 보시겠지만, 지금 전업주부들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갖 활동을 다 하시고, 심지어 종교 활동도 열심히 하세요. 그런데 단지 전적으로 우겨서 그 일만 하지 않기 때문에 생활 속에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여성이 지역운동에서 주요하게 주목받을 수 있는 1차적인 여건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죠. 그런 욕구가 있어요. 실제 그런 기회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거예요. 단지 그런 장이 없는 거죠. 그런데 이런 기회를 누가 만드느냐, 그런 고민하는 주체들이 기회를 만들어가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것이 아니에요. 기회를 주는 거죠.”

일상적인 생활의 문제에 여성들은 전부 노출되어 있다. 당연히 여성들의 생활의 고민은 전방위적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인간으로서 삶의 욕구가 있는 것이다. 가정주부로서가 아닌, 사회인으로서 말이다. 자연히 지역운동과 여성은 만날 수밖에 없다고 정외영 대표는 말한다. 조직사회 경험이 없는 주부들이 잘 할 수 있을까?

“.......어려운 아이들이 있으니까 도와줘야 하는 구나, 이렇게 출발은 소박한 마음에 출발하죠. 우리는 준비해서 오라는 소리는 안합니다. 일단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 다음엔 자원교사 교육에 충실히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하나 전제가 있어요. 저희가 믿음을 가져야 해요. 어떤 믿음이냐면, 각자 우리가 바라는 의식적인 어떤 과정의 경험을 갖지 않더라도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해서 30, 40, 50, 60년에 단련된 경험들을 굉장히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전제에요. 물론 왜 문제가 없겠습니까, 여성들 같은 경우는 조직사회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룹을 이루어서 단일한 목적을 가지고 역할을 나누고 협력하는 경험이 취약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제는 그 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결혼생활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이런 경험 자체가 다 소중한 거예요. 그 경험과 그런 경험을 믿어주는 것, 이것이 ‘녹색삶’이 주부들을 바라보는 기본전제입니다.”

‘개인이 살아온 삶의 경험을 믿는다.’ 쉽지 않지만, ‘녹색삶’은 그렇게 실천해 왔다. 개개인의 삶의 경험만큼 소중한 자산이 또 어디 있겠는가? 지역운동의 정신도 여기에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 만나기. 그래서 ‘녹색삶’의 조직화는 의식적이지 않고, 빠르지도 않는다. 매우 더딜 수밖에 없다. 정외영 대표는 ‘수다의 철학’의 끝으로 인터뷰를 마치고자 한다. 짧은 시간,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녹색삶’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 아름다움이 널리 전파되길 희망하며.......

“주부들의 수다스런 만남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직장처럼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이루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그런 조직이 아니거든요. 여기는 다른 원리예요. 다른 원리의 운동은 다른 원리에 의해 진행된다고 보거든요. 사람을 만날 때도 이 운동은 그냥 어떤 일부의 도움이 되는 부분만 만나고 나머지는 모른다, 이러게 일이 되지 않죠. 전면적으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수다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정보를 주는 거예요. 굉장히 필요한 정보들이에요. 따로 전화해서 속마음을 확인하지 못하거든요. 그러면 저희가 그런 얘기를 들을 때, 활동가는, 조금 관심 있는 사람이 들을 때는, 저 사람이 주요하게 어떤 곳에 관심이 있구나 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내 보이는 거죠. 아이들 얘기는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따라서 저 분은 지금 어떤 지점에서 이야기를 같이 할 때에 힘이 되겠다, 라는 것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효율성으로 볼 수 없는 문제죠. 그것을 명확히 보셔야 됩니다. 전혀 다른 원리의 운동이기 때문에 다른 원리에 기초한 그런 방법들이 연구되고 고민되어야 한다는 거죠. 단순히 남성적인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어렵다는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경험이 반복되면, 자기 얘기를 충분히 얘기하고 나면, 변화되죠. 여성의 눈으로 보면, 충분히 실감할 수 있습니다.”

※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홈페이지는 http://www.glife.or.kr/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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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車)병원을 들어보셨나요?" -‘성미산 차병원’을 찾아-
인터뷰 : 진상돈(사업대표)

먹거리에 신경 쓰는 가정이라면 유기농산물 생활협동조합에 발길을 옮겨본 경험이 여럿 있을 것이다. 이미 생활협동조합은 우리 귀에 낯익은 존재가 되었다. 대부분이 먹거리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지만, 최근에는 생활협동조합운동의 소재가 다양해지면서 대안적인 공동체운동으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성미산 차(車)병원’이 대표적이다. 마포구 망원동에는 ‘성미산 차(車)병원’(이하 ‘차병원’)이라는 생활협동조합이 있다. 주민이 출자금을 모아 만들고, 주민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차병원’은 자동차를 매개로 주민간 소통하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차병원’은 병에 걸린 자동차를 수리하는 곳이다. 자동차 정비업소, 또는 카센터로 불리기도 한다.

자동차를 굴리는 사람에게는 늘 자동차 정비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자동차의 상태는 곧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거리 운행을 뛰어야 할 상황이나, 폭설이나 폭우가 예상되는 계절이면 많은 이들이 카센터에 들러 예방점검을 받곤 한다. 자동차가 생활필수품으로 되어 버린 현대생활에서 집 앞 구멍가게에서 먹거리를 사듯, 정비업소에서 자동차를 고치는 일은 이제 생활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비업소를 찾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왠지 모를 불신의 벽을 지울 수 없다. 정비에 자신 없는 사람일수록, 정비업소에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근본 생태주의자들에겐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치스러운 생활필수품이라며 비판의 화살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밟히는 것이 자동차인데 어쩌겠는가? 기왕 자동차의 홍수 속에 살아가야 한다면, 환경적 피해를 줄이는 것이 으뜸이리라.

‘차병원’은 바로 이런 문제를 지역에서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출발했다. “자동차 정비를 둘러 싼 불신을 말끔히 해결하고 차에 대한 모든 문제를 명쾌하게 풀어주는 곳, 내 차를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주는 곳, 차에 대해 쉽고 진지하게 배울 수 있는 곳, 건전한 녹색자동차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훌륭한 터전”이라며 작년 11월 오픈 하였다. 오늘은 ‘차병원’을 처음부터 준비해왔던 진상돈 사업대표를 만나 ‘차병원’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먼저 어떻게 ‘차병원’이 만들어졌는지 물었다.

“10년 전,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공동육아협동조합이 만들어졌어요. 1호점이 ‘우리어린이집’이고 2호점이 ‘날으는 어린이집’인데, 저는 ‘날으는 어린이집’에 초기 조합원으로 참여를 했었죠. 처음에 이 동네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뭐냐, 해서 아이들 육아 부분은 거기서 담당을 하고, 그리고 먹거리가 필요하다 싶어서 2001년도에 ‘마포두레생협’을 만들었죠. 그 과정에서 2001년도에 이 동네에 ‘성미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마을 주민들이 저항을 했었죠.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배수지 공사였으나, 한양대학재단에서 아파트를 짓겠다고 해서 거기에 반대운동을 했죠. 그러는 과정에, 작년 1월 강제 벌목을 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천막농성을 해가면서 지켰어요. 아빠들이 로테이션을 하면서 천막농성을 했는데, 그러면서 저녁에 춥고 하다보니까 술도 한 잔 하고, 그러다가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이 지역에서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뭘까, 그런 논의를 했었죠. 그런데 공통적으로 다들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더라고요. 차들을 안전하게 맡길 곳이 없더라, 그럴 거면, 우리가 직접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5월 달부터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죠. 그 다음에 구체적인 준비를 해서 작년 11월 1일 날 결국에 개원잔치를 해서 정식 오픈을 한 거죠.”

보통 생활운동이 사소한 계기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무공해 세제로 식기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본 <가나가와 네트워크>의 대리인운동이 발전하였고, 청소년이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담배자판기를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부천의 담배자판기금지조례가 주민들의 의해 전개된 것도 어찌 보면 생활의 사소한 편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차병원’의 출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디어는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뭔가 특별히 하자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생활 속에서 불편했던 사항들을 찾다 보니까, 얘기가 나온 거죠. 이 지역에서는 지금 얘기 나오는 것 중에 하나였던 의료생협은 예전부터 시도를 했던 부분이 있고, 지역통화도 얘기가 되고 있고, 여러 가지 지역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죠.”

거창한 공동체운동이 아니더라도 담장을 허물고 만나서 이야기할 때만이 좋은 아이디어와 실천전략이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생활 속에서 불편한 점, 거기서부터 ‘차병원’은 출발했다. 오픈 당시 조합원 수가 80여 가구에서 2월 말 현재 150여 가구 정도 된단다. 조합원이 되려면 한 구좌에 10만원의 출자금을 내야하고, 일부는 고액 출자도 마다하지 않았다. 초기 출자금 1억2천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다소 부족한 상태로 출발했다고 한다.

“아직은 힘들어요. 다른 것은 특별한 것이 없는데, 일반적인 마진폭과 우리가 지향했던 바와 차이가 커졌어요. 그러다보니까, 거기에 따른 운영의 어려운 점이 있고, 그리고 조합원의 문제인데, 기본조합원이 최초 300명 정도를 예상했었는데, 아직 반 정도밖에 안 차 있어서 그런 것이 좀 어렵죠.”

300명 정도의 조합원 규모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이 진 대표의 계산이다. ‘차병원’이 지향하는 바와 일반적인 마진폭의 차이라.......여기에 대해 물었다.

“여기는 부품이 저렴한 편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렴하다고 생각 하는데, 그게 어떤 차이냐면, 저희는 필요한 부품만 교환을 한다는 원칙과, 그리고 부품을 오픈 시킨다는 원칙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일반 카센터를 갔을 때는 대개 뭉뚱그려서 표현들을 하거든요. 그 다음에 뭘 갈았다 그러면 확인할 바가 없고, 그렇다고 대다수가 다 그런 것은 아닌데, 대다수는 정직하게 하시는데, 간혹 가다 그러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부분에서 저희는 투명하죠. 안 갈아도 되는 것을 굳이 갈 일은 없으니까. 그것이 궁극적으로 환경보호 차원에서도 가능하면 차를 안 굴리면 좋지만, 차를 어쩔 수 없이 굴리는 상황이라면, 가능하면 환경에도 좋게끔 하자라는 취지가 있죠. 그래서 필요한 부품만 갈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지는 것이죠.”

부품을 오픈 시킨다는 뜻은 무엇일까?

“부품 가격을 말하죠. 저희가 어차피 완성차업체에서 부품들을 공급받는데, 지역마다 다 통일되어 있거든요. 한 곳에서 거의 다 납품을 다 받는데, 그것을 보여드리는 것이죠. 조합원들한테. 이를테면 브레이크 패드라고 해서 라이닝이 차마다 다 틀리거든요. 비싼 차는 한 4-5만원 하는 차도 있고, 그러나 웬만한 카센터는 라이닝 그러면, 다 얼마로 거의 비슷하게 통일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비싼 차 같은 경우는 O이 플러스되는 것이니까, 싼 차는 또 싸지고 하는 그런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마진이 떨어지는 거죠. 다른 곳은 일반 마진을 한 50% 보는데, 저희는 작년 11월 이후에 해보니까 마진이 한 30%가 안 되더라고요. 그런 부분이 저희로서는 딜레마일 수가 있죠.”

한 마디로 필요한 부품만 교체하고, 정직하게 부품 가격을 매긴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다른 카센터보다 저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부품 값의 생리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차병원’의 오픈 전략에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이 생협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진 대표는 월 2천5백만 원 정도의 매출이면 손익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은 밑지는 장사를 한단다. 수익금에 대해서는 배당금도 예정하고 있지만, 지역사회로의 환원도 고려 중이다.

“만약, 저희가 수익을 발생하는 것을 10개로 봤을 때, 3은 여기 안의 공구라든지, 기계라든지 감가상각으로 나가고, 3은 여기 직원이 세 명 일하는데(진 대표 외 정비사 2명) 급여만 있고 보너스는 책정을 안 했거든요. 열심히 일한만큼 찾아가자, 라고 해서 그것을 보너스로 책정을 했고, 나머지 3이 출자배당금, 그러니까 출자한 비율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낸 비율에 따라 출자 배당이 돌아갑니다. 나머지 1이 지역사회로의 환원입니다.”

무엇보다 사업의 안정화가 시급한 과제이다. 그래야 수익금의 배당도 실현될 수 있으니까. 진 대표는 그 기간을 1년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합원 300명 이상과 순익분기점 도달을 최소한 1년 이내에 실현시킬 계획이다. 배당금 이외에도 조합원들에 대한 혜택은 무엇인지 물었다.

“지금은 일단 저희가 홍보도 해야 하니까, 비조합원, 조합원의 차이가 없이 똑같이 하고 있는데, 한 1년 정도 되고 안정화되면, 예방점검이라든지, 이런 차원에서 시도들을 할 거고, 지금 홈페이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면 자기가 정비했던 내역이 뜨거든요. 차 번호 치면. 그러면 언제쯤 내가 뭘 갈아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도 할 수도 있고, 저희도 콜도 해드리고요.......교육도 하려고 하고 있어요. 계절별로 아니면, 어디를 멀리 갈 때, 차가 1일 정비를 해야 될 것도 있고, 주간 정비도 필요하고 한데, 그런 부분에 대해 오시는 대로, 이것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정도 확인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거든요. 이 부분은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해드립니다.”

만 5개월 남짓한 성과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른 것 같다. 지금 어떤 성과를 남겼냐보다는 주민들이 주저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내겐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차병원’을 만들게 된 계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뚜렷한 계기라는 것은 성미산을 지켜야겠다는 라는 의지, 그것 때문에 결속력이 많이 생긴 거죠. 여기도 다른 공동육아협동조합과 비슷할 수가 있었는데, 성미산이 유일한 야산이고, 그 산을 개발을 한다고 하니까, 뚜렷한 명분 없이 나왔던 사안이었고, 그리고 지역 사람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성미산에 나들이를 많이 갔던 산이고, 초등학교도 바로 밑에 성서초등학교 아이들이 다니는데, 그것이 개발이 됐을 경우에 아이들이 환경적인 부분이나 여타의 조건들이 반응이 안 좋았었는데도 불구하고 개발을 하려고 하니까, 그러면서 반대운동을 했고, 그것이 큰 역할을 한 거죠. 환경운동연합에서 발표한 작년 환경 10대 뉴스에서도 선정이 됐는데, 주민 자체적으로 해서 이긴 싸움이 유일무일 한 것으로 표현하더라고요. 그런 과정이 있어서 이 지역에서는 그런 자신감들이 생겼던 것 같아요.”

성미산 개발은 일시적으로 주민들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한편으로 주민들을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차병원’이 생기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성미산 투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쨌든, 구체적인 경험은 주민운동, 또는 생활운동에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매개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성미산 투쟁 이전에도 ‘공동육아협동조합’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차병원’의 탄생도 가능했다.

“이 지역에 ‘차병원’ 이외에도 공동육아협동조합이나 두레생협과 같은 각 조합과 성미산 싸움 이후 만들어진 마포연대, 대안학교 등이 대표적으로 있는데, 일련의 흐름 속에 2001년부터 계속 해왔던 일들이 몇 가지가 있어요. 주기별로. 봄에는 축제를 하고 여름에는 조합원 한마당, 가을에는 운동회를 하고, 겨울에는 송년잔치를 하는데, 이렇게 큰 네 가지 틀 속에서 각 조합이 유기적으로 회의도 하고 자주 만나죠.......적어도 100명 이상이 이런 조직에서 활동한다고 보시면 되요.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조직의 흐름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각 파트별로, 각 조합별로 실무진들이 있고, 거기에서 파견을 나오면 일이 묶여지고 짜여지면 실제로 밑에 있는 분들에게 설명을 해서 같이 참여를 하자라든지 이렇게 합니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의 경험이 지역의 터전을 닦는 일을 했다면, 성미산 싸움의 경험이 지역 깊은 곳까지 한 발짝 내딛는 출발선이라는 것이 진 대표의 진단이다. 육아로부터 출발하여 지역사회로 서서히 확장하고 있는 지역운동의 모범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생협운동이 경제적 기반 구축이라는 목표와 운동적 목표가 있을 텐데, 운동적 목표는 무엇이냐고.

“원론적인 부분인데, 많은 분들이 성공한 공동체가 없다고 말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 부분 견주어봐서, 생명력이 길어야겠다는 것이 1차적인 목표고, 그 과정에서 이런 방식이 저희가 틈새를 파고든 부분이 있는 건데, 이렇게 봤을 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적어도 구 단위에서 하나씩 정도 생겨서 전국에 프랜차이즈 비슷하게 이용하면 정비문화라든지, 이런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상당히 수동적으로 접근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거든요. 모르고, 무지한 부분이기 때문에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게, 일단 모르니까, 그래서 아는 사람들이 그런 식의 문제제기를 하면 좀 건전한 자동차 문화가 될 수 있겠다 라는 부분이 바람으로 존재를 하는 거죠. 단적인 예로, 차를 리콜하는 것 같은 경우, 외국 같은 경우는 리콜을 자랑스럽게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 반대잖아요. 우선 숨기죠. 그것도 계속 숨기다가 똑같은 차종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마지못해서 리콜을 하는데, 그런 것들이 분통이 터지는 거죠. 소비자로서. 건전한 소비자 운동 측면에서도 이것은 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죠.......그런 것들에 대한 내용을 시민들과 교류하는 것이 자동차를 건전하게 하는 조건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차병원’만 놓고 본다면,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또 하나가 있다면 이것을 계기로 정비문화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비문화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

“정비는 차주 입장과 정비하는 입장이 틀린데, 정비하는 입장에서 보면 다 문제라고 보는 거죠. 왜냐하면 사람들 심리가 그런 거니까. 정비 개념에서는 이것도 뭔가가 이상한 것 같고, 그런데 그런 판단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잘 모르는 차 주인한테 판단을 하게끔 던져 주는데, 그 과정에서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생기니까, 차주들이 고쳐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고민들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그런 진단을 정확히 해내는 것이 중요한 거고, 그리고 차주 입장에서는 제가 보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만원, 이만 원 아끼려다가 백만 원씩 나가는 경우들이 허다하거든요. 차도 사람과 똑 같다고 보는데, 예방 점검만 잘해도 20만km, 30만km 탈 수 있는, 현재 차들은 잘 나오니까. 그런 구조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차가 굴러가면 되는 개념에서 그냥 다니시거든요. 그런데 차는 부품이 2만 가지가 넘는데, 소모품이 꽤 많거든요. 그것만 시기에 맞춰서 적절히 교환만 해주면 차를 꽤 오래 탈 수 있는데, 그냥 굴러가니까 괜찮다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아니고, 소모품 같은 경우는 정확한 시기에 갈아주는 것이 차를 오래 타고 또 결과적으로 차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 대표는 불편하더라도 차계부를 작성할 것을 권유한다. 그래야 정비업소의 부당 거래를 극복할 수 있단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최소한 스스로 자신의 자동차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차는 자기가 볼 줄 알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여성운전자 같은 경우, 거의 70-80%가 본네트를 열어볼 줄도 모르고, 타이어 가는 방법을 모르거든요. 그것을 보험회사에서 다 처리를 해주는데, 저는 그것도 잘못되었다고 봐요. 보험이 좋고 편리하긴 하지만, 그러면 각 차량이 출고될 때, 기본적으로 스페어타이어와 자키라고 해서 타이어 펑크 났을 때 들어올리는 기구하고 공고 네 다섯 가지 공구를 공급하는데, 그런 것들을 자기가 직접 할줄 알아야 한다고 보거든요. 만약에 서울 시내가 아니고 산 속에서 잘못되어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냥 서 있던지, 아니면 차를 놓고 오던지, 아니면 타이어 펑크 난 상태로 끌고 와야 하든지, 그런 것 밖에 안 되는데, 그런 것은 현대인의 문명의 이기이긴 한데, 그런 것을 적극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건전한 정비문화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건강을 체크하듯, 자동차의 건강에도 애정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차병원’에서 이용자들을 위한 정비 교육을 준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든, ‘차병원’은 단순히 자동차 정비를 매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도시 속의 작은 공동체 정신을 구현하겠다는 것이 큰 목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차병원’의 역할은 주민간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대개 공동체 운동은 여성적인 측면이 강한 것 같아요. 음식이나 아이들 키우는 거나, 이런 것들로 편중이 돼서, 그런데 ‘차병원’ 같은 경우는 아빠들의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해보자, 하는 의미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계획 했던 게, 여름휴가 같은 경우, 건전한 자동차 여행을 간다던지 하는 몇 가지 안을 가지고 있고, 지금 당장이라기보다는 차츰 차츰 해나갈 계획이고요. 그리고 저희가 추진했던 것이 뭐냐면, 아빠들의 직업이 다양하고, 다양한 직업군들이 있는데 실제 사람을 찾으려고 하면 못 찾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랬을 때, 여기가 어떤 커뮤니티의 중심에 서서 만약에 내가 집을 짓는다 그러면, 건설하시는 분들이라든지, 책을 내면 출판업계에 계시는 분이라든지, 그런 쪽에서 한 축을 담당해서 연락을 담당하는, 전화국 역할이라고 하나, 아지트 역할이라고 하나, 뭐 그런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진 대표는 공동체운동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박한 규모에서 소소한 일감들을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 공동체의 출발이라고 본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 꼬마들이 다방구도 하고 짬뽕(?)도 하고 놀았었는데, 요새는 아이들이 놀 시간이 없잖아요. 학원가야 되고, 그리고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볼 수가 없잖아요. 엄마 손 잡고 한두 명 다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어차피 이 사회가 존재하는 한, 도시가 존재하는 한, 필요한 것이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되느냐는 고민의 문제인데, 저희는 가능하면 여럿이 푸는 것이 낫다, 라고 하는 고민이 있었던 거고, 그런 방향에서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봐야 하는 거고, 동네 돌아가는 일도 알고, 그래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이 잘못됐으니까 바람직하게 고치자고 관에다 얘기할 수도 있는 거고, 그것이 우리끼리 고칠 수 있는 것은 우리끼리 고치는 거고. 그 속에서 하나 하나씩 피어나가는 거죠. 저희가 공동육아 했을 때 참 피곤했어요. 일주일에 한번씩 계속 가서 청소하고 뭐 하고, 아마라고 해서 일일교사도 해야 되고, 그러니까 그런 것이 어느 정도 지쳤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10년 정도 하다보니까, 거기서 얻은 것은 아이들이 공동체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들이 그 과정에서 끈끈한 연대로서 친구들을 찾게 된 것이 오히려 이 지역에서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그런 과정인 것 같아요.”

그렇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은 아이들을 위한 배움의 거점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배움터였다. 아이를 위해 힘겹게 살아온 경험이 결국 스스로의 일로 다가온 것이다. 삭막한 도시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되찾으려면, 결국 지역사회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진 대표는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놀이 공간이 청소년에게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술 한 잔 걸치고 수다 떨고 하는 어른들의 놀이 공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방구하면서 동네가 시끌벅적 소란했던 아련한 기억이 이제는 추억 속의 그림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벽이 허물어진 공동체를 꿈꾸는 것은 어찌 보면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로 비출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 대표는 ‘차병원’을 중심으로 그런 꿈을 꾸고 있다. 소박하게 수다 떠는 공간으로, 작은 지역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술 한 잔 속에 정겨움을 나누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싶은 꿈이 있는 것이다. 이제 5개월을 달려왔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차병원’이 우리 사회에 많은 물음들을 던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진 대표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조건에 대해 물었다. 그는 결국 사람에게 그 희망을 찾고 있었다. ‘차병원’의 건승을 빈다.

“모든 건 다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어떻게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서. 쉽게 표현하면 아무 바라는 것도 없이 100만원 출자하시는 분들이 뭘 바라서 한 게 아니고 지역에 이런 것이 생기면 좋겠다 라는 뜻 하나만으로 100만원을 내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거기에서 내가 뭐 배당을 많이 받아서 돈 놀이를 해보자, 하는 분들은 거의 없거든요. 출자를 해서 지역에 이런 형식으로 생기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죠. 물론 이렇게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고, 이런 좋은 것이 있으니까, 철저히 잘 이용을 하자, 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죠. 우리야 전자가 많으면 좋긴 한데, 후자도 여기 오면서 이용하면서 이런 방식에 대해 한 번쯤 생각을 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런 분들이 공동체라든지 이런 것에 관심도 가질 수 있고요. 그렇게 사람이 주요하겠죠.”

※ 차병원 홈페이지는 http://www.maponet.org/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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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잔뿌리의 역할” - 부천 그린 생협을 찾아
인터뷰 : 이금자(상무이사)

풀뿌리운동의 전면에는 여성들이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그들은 주부들이다. 일본 풀뿌리운동의 저력이 주부에게 있듯, 우리나라 풀뿌리운동의 근저에도 주부들이 버팀목이다. 풀뿌리운동에 있어서 여성은 강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부들은 생활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들과 머리 맞대고 싸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동네에서 벌어지는 궂은일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농사꾼인 윤구병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정작 그 커다란 나무를 살리는 힘은 허리가 굵어서 어지간한 폭풍에도 끄떡없는 줄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해 주는 깊이 내린 뿌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 힘은 어지간히 예민한 촉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만져도 확인이 안 되는 잔뿌리, 그리고 그 잔뿌리에서 다시 가지 쳐 나간 눈에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실뿌리에서 나온다.......호밀 한 포기에 자그마치 1,300만 개쯤 되는 잔뿌리가 있다......” 윤구병 선생의 말을 빌면, 풀뿌리운동을 지탱하는 사람들은 바로 주부들이고, 이들은 1,300만개나 되는 잔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풀뿌리운동은 화려하지도, 사회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도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운동이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부천 ‘그린생협’은 밥상 살림을 고민하는 3,000개의 잔뿌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걸어온 길을 추적해보면 10여년이 홀딱 지나버리지만, 본격적으로 ‘그린생협’이란 이름을 내걸고 지역생협에 뛰어든 것은 이제 만 3년을 넘겼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은 처음부터 ‘그린생협’의 잉태과정을 지켜보고 이끌어왔던 이금자 상무이사다. 그녀가 생각하는 협동조합운동, 주부들의 지역사회로의 확장 가능성을 들어보자.

먼저, ‘그린생협’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 지향하는 바를 물었다.

“그린생협을 처음 시작한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한 10년은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사찰에서 조금한 유기농 매장으로 시작을 했어요. 저 혼자 했는데, 그러다가 아무래도 절 안에 있다보니까, 유기농 매장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더라고요. 저는 80학번이에요. 그 당시에는 뭐 노동운동도 하고 다 했으니까, 저도 할 것은 다 했거든요. 저 나름대로는 현장에서 일도 해보고 노동운동도 하면서 90년대를 지나면서, 어쨌든 노동운동 쪽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지속적으로 사회의 어떤 변혁이랄 수도 있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지향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몇 몇 사람의 어떤 선도적 성격의, 일시적 성격의 운동도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그런 것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생협을 시작한 것은, 저는 사실 생태적 관점이나 생명적 관점보다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생활권의 영역에서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 풀(pool)로서 봤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사찰 안에서 쭉 하다가 법인으로 그린생협으로 독립한 것은 2001년 4월 달에 시작됐어요. 그러고 나서 사찰 안에 있는 유기농 매장은 사찰 안에서 유기농 매장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고요, 2001년부터 조합원 조직활동이 시작이 됐어요. 제 꿈은 지역자치와 관련된 생활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때 제가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그러니까 공동체라고 했을 때 지역모임, 마을모임 등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는데, 저로서는 딱 그 때 법인으로 설립했을 때, 주체가 안 보였어요. 다양한 주체가 형성될 수 있는데, 생협은 기본적으로 주부들이 100%예요. 저희는 이사진의 구성도 주부가 100%예요. 남성 이사는 이사장도 없고요, 이사도 없어요. 상무이사까지 여성인 곳은 조합 중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보면 저는 포커스를 조금 좁혀서, 지역자치 중에서도 주체를 주부들로 봤어요. 주부들이 지역 안에서 일상의 영역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부들이니까, 그들이 어떻게 사회적 가치를 발휘하고 생활 안에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일조할 수 있겠느냐 하는 풀로써 생협을 봤고, 그린생협이 처음 그런 일을 시작한 것은 2001년 4월 달부터 해서, 제가 볼 때 1기로 보는 것은 2001년 4월부터 해서 2004년 4월까지, 한 3년으로 봤을 때, 이 때가 1기인 것 같아요. 1기 동안의 저희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주체의 형성의 시기라고 봤고, 그런 일들에 주력해왔어요. 한 쪽에서는 사업이라고 하는 큰 틀이 있고 한 쪽에서는 그렇게 모여 있는 조합원들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의 주체들을 형성할 것인가, 활동가 그룹을 만들 것인가, 주부활동가 그룹을 만들 것인가,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한 포커스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금자 상무는 ‘그린생협’을 잉태시킨 장본인이다. 인터뷰 중에 느낄 수 있었던 고민의 깊이가 아마도 ‘그린생협’의 최고 경영자로서의 책임감으로부터 나오는 것아 아닌가 싶다. 아무튼 사찰로부터 시작된 먹거리 공동구매운동이 지금은 부천과 시흥을 중심으로 3,000명의 조합원과 연 매출액 21억여 원에 달하는 견실한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이금자 상근 상무이사 외에 상근 실무자 1인, 반상근 3-4인, 그리고 자원활동을 하는 주부들 30-50명이 ‘그린생협’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조직은 크게 지역별로 중상동지구, 원미소사지구, 시흥지구가 있고, 주제별로 생활재분과, 마을분과, 매장분과, 생태분과, 교육분과가 있다. 분과 활동에 대해 좀더 자세히 물었다.

“각 지역 안에는 분과가 한 5개 쯤 구성되어 있어요. 우리가 취급하는 1차적인 사업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생활재분과’가 이를 담당하고요, 그리고 ‘교육분과’는 주로 어머니들의 사회교육이라든지, 환경교육 등을 주로 하고요, ‘생태분과’는 아이들 생태프로그램이나 환경프로그램을 엄마들이 다 해요. 그 다음에 ‘매장분과’가 있고요, 그 다음은 ‘마을분과’가 있어요. 저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조합원 기초조직으로서도 그렇고, 지역적인 연계와 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을분과’에요. 나머지는 분과는 테마별 분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을분과’는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조합원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조직이나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주체들을 만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마을분과’가 주로 얘기하는 내용이 조합과 조합원의 관계라든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가, 이런 것들도 있지만, 조금씩 마을의 테마를 가지고 들어가고 있어요. 우리 마을에 뭐가 생기는데, 이게 어떻게 될 것이냐, 지금 탄핵정국 때문에 혼란스러운데, 자연스럽게 먹거리 얘기 하는 와중에서 그런 탄핵정국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요. 특별히 다른 일이 없으면 오는 20일에 광화문에 가자, 라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거죠. 그러니까, 저는 사실은 지역자치분과를 올해 띄어볼까도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것이 주체의 발전 단계만큼 가야 한다고 봤을 때, 바로 띄우는 것보다는 ‘마을분과’에서 자연스럽게 그 마을의 특성에 대해서 공통의 관심사가 생길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물론 지역적 관심사가 다를 수 있죠. 이런 것이 자연스럽게 모아질 때 분과를 띄우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위적인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죠. ‘마을분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이고요, 각 지구마다 마을분과다 가 있는데요, 한 달에 한번씩 해서 한 지구마다 일곱 개 여덟 개씩, 월 1회 계속 만나요.”

이금자 상무이사가 강조하듯, 개인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마을분과’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아직은 정중동의 느린 행보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주민자치의 잔뿌리의 역할을 독특히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머지 분과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든 분과가 분과원들이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의지로 굴러간다. 이금자 상무이사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보고서나 활동의 기획 등 모든 분과의 활동을 조합원 스스로 결정하고 운영합니다. 저는 이것에서 뭘 보냐면, 어쨌든 대한민국이 변화하는 것은, 요번 탄핵정국을 보면서도, 사실은 기층의 시민사회 형성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민사회 형성의 주체 중에서도 사실은 남성들은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잖아요. 그리고 일상의 삶으로부터 관심도가 떨어지고요. 그런데 이해관계가 조금 자유롭고, 일상의 삶에 대해 책임지는 주체가 주부들이 아닌가 해요. 그렇다면 주부들이 사회적 가치나 참여민주주의의 훈련의 장을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그것은 일상적 삶의 구조여야 한다고 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생협이 굉장히 좋은 것이, 어쨌든 먹거리를 통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 또 자주 매장에서 보고, 그 어느 단체보다 아주 자주 보는 구조에요. 밥도 같이 해먹고. 또 아이들이 연령 때가 비슷하거든요. 저도 놀라운 것이 ‘마을분과’에서 자연스럽게 탄핵 얘기가 나오면, 그것이 뭐 이렇게 해서 동원합시다가 아니라, 스스로도 얘기하면서 그들이 회의를 하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회의록을 쓰고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고, 그 주제가 비록 생활재에 대한 안건이든, 조합에 대한 안건이든, 아직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몇 번 해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참여민주주의는 어떻게 운용되고, 다양한 인간들 간의 조율이나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되는지 자연스럽게 배워나가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훈련되어진다면, 지역사회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조금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주체적 힘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동원이 아니라. 자발적인 힘에 의해서요.

주부들의 활동이라는 것이 어떤 상당한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막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주부들 조직이 어디까지는 전제 조건은 아이들을 키우는 거잖아요. 그만큼 진보나 발전의 속도가 굉장히 더뎌요. 그리고 또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그만 두고. 그런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 풀로 각 분과에 5-6명씩 각 지구별로 그렇게 보면 한 50명 정도가 활동가라고 보면 되고, 그들이 조금씩 아줌마들이 처음에 시작할 때는 보고서가 뭔지, 회의가 뭔지, 왜 조율을 해야 되는지, 이런 것들도 모르다가 조금씩 알아 가고, 또 사실은 그 안에서 갈등 구조들도 있잖아요. 그러면 갈등을 푸는 방법들, 이런 것들을 고민해가면서, 저희가 이사회에서 올해는 전면적으로 전환할 수는 없지만, 1기가 끝나고 2기로 접어들었으니까, 지역사회에 조금은 관심을 돌리자, 우리를 향했던 관심을 조금은 타자에 대한 관심을 돌리자, 그래서 학교급식 서명운동 같은 것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분들이 주체가 돼서 자기들이 목표를 정하고, 학교급식 서명을 몇 명을 하자, 그 다음에 부천시에 있는 지역사회 단체에서 푸른부천21이라든지, 지역사회의 다양한 단체들이 있잖아요. 지금까지는 제가 주로 관련을 맺었었는데, 하나씩 점차, 그래서 이번에 평생학습도시 만들기 테마가 있는데, 거기에 처음으로 저희 분과 주부들을 참여시켰어요. 제가 안 가고. 이렇게 조금씩 지역과의 결합도를 높이는 거죠. 그리고 저는 요게 조금 더 주체들이 형성되면서, 만약에 원미소사지구다, 그러면 그 지역 안에서 풀을 가지고, 아 우리 마을에 도서관이 필요하다, 그러면 도서관 만드는 프로젝트를 어디서 받아서 그것에 대한 서포트나 저는 어디까지나 그런 틀만 만들어주고, 그래서 그런 것을 한 번 해보게 한다든지, 그래서 지역사업이 가능한 부분들은 하게끔 할 생각이에요.

저희 시흥의 연성 지구에서는 그런 사업들을 많이 했어요. 시흥에 ‘참이슬’아파트라고 하는 관리사무소가, 제가 볼 때에는 주민들의 힘으로 관리사무소를 운영하는 아주 모범적인 케이스인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관리사무소 2층을 도서관으로 만들고, 순전히 주민들이 만들었거든요. 그런 일을 하는데, 거의 주로 저희 조합원들이 활동했어요. 그린생협이라서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린생협 조합원이 그렇게 하는 거죠. 그렇게 훈련되고 생각이 있으신 분들이 주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주민들의 것이죠. 그래서 그 안에서 도서관도 만들고, 주민 대상으로 하는 좋은 프로그램도 많이 진행을 하고요. 또 거기서 아이들 사업에서 연성지구에서 하는 사업이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역사교실을 해요. 사교육도 중요한데, 아이들한테 역사의식을 어느 정도 심어주는 그런 것을 배울 곳은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역사교실을 1년 단위로 진행해요. 그래서 전부 조합원들이 중심이 돼서, 조합원들이 전부 나와서 진행을 하고, 선생님 모셔다가 자녀 중심으로 해서요. 그런 식의 모델들을 만들어가는 거죠.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긴 이야기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분과활동은 사회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주부들이 서로 소통하고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훈련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흥 조합원들이 일궈낸 아파트 관리사무소 모델은 이후 활동의 전주곡이기도 하다. 만 3년간의 1기가 주체훈련이었다면 2기부터는 점차 사회로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이금자 상무이사는 말한다.

“1기와 2기로 구분한 것은 제가 임의로 나눈 거예요. 사실은 그린생협으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힘들 것이다, 지역에서 생협으로 독립하기도 힘들고 살아남기도 힘들 것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3년을 지나봐야, 생존과 안정, 그러니까 생협은 아시다시피, 운동단체가 아니라, 사업과 운동을 같이 가는 곳이기 때문에 사업으로서의 최소한의 뿌리내릴 수 있는가, 뿌리내릴 수 있는 근거를 저는 3년으로 봤어요. 1년은 생존의 기간이니까, 도저히 가능하지 않다면 1년 안에 나갈 것이고, 그렇지만 생존의 기간을 벗어나면 최소한의 안정의 기간은 3년이 될 것이다, 그랬을 때 그 1기에는 최소한 우리가 생존하고 뿌리내리는 것, 여기에 집중한다, 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최고경영자의 입장인 저의 지표였어요. 그래서 1기가 3년으로 됐고요, 2기부터는 우리가 최소한 안정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생존의 조건과 안정적으로 최소한의 기반을 확인했다면, 이제는 좀 그래도 사회적 책무가 있지 않겠는가, 생협이 가져야 하는. 그런 부분들을 제가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다만 그 사회적 책무에 대한 방향성을 이야기할 때부터는 조금씩, 결합시켜 나간다 하는 부분에서 저한테는 1기와 2기가 있는 거죠.”

1기의 목표가 사업의 안정성과 주체형성이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기반형성과 다른 생협에 견주어 규모가 떨어지지 않는 조합원의 수, 그리고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조합원들의 활동력, 이 모든 지표들이 어느 정도 달성된 것이다. 한 지역에서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맹아는 싹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기로 접어든 지금, 조금씩 주부들이 가능한 영역에서의 지역사회와의 연계성이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은 외부적인 활동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여전히 긴 호흡 중이다.

“외부 활동이 많지는 않아요. 이제 시작이에요. 올해 처음 학교급식 서명을 받은 거죠. 사실 저는 그래요. 정말로 우리 이사회나 위원들이 갈 수 있는 수준만큼만 간다, 그랬을 때 제가 볼 때 3년 동안은 주체들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들만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가 있을 때, 힘도 있고 훈련도 됐을 때, 그리고 그들의 요구가 맞아떨어졌을 때 시작하겠다, 그래서 어찌 보면 지역사회 일 같은 경우는 소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학교급식이 처음 나온 것이고, 원미산 살리기 운동 같은 경우는 이름 걸어주는 정도지 저희가 직접적으로 결합해서 하지는 못했어요. 거기에 제 고민은 어떤 것이 있냐면, 사실은 주부들이 자원활동의 구조에서 주 1회씩 애 둘 엎고 나와서 생협에서 필요로 하는 활동이 있잖아요. 이것만 해도 힘들거든요. 거기에 지역적 과제들을 막 가져들어오면 너무나 부담이에요. 그것이 자기들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느껴서 자기가 자발적으로 하기 이전에는 그렇게 되면 지치는 게 많은 것 같더라고요. 사실은 주부 운동은 그렇게 정리되면 안 될 것 같아요. 되도록이면 생명력 있고, 길고 그리고 이 활동을 통해서 저는 사실 못 꺼냈지만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에서 조금만 더 부담이 가는 것, 그래서 즐겁고 재밌다, 부담이나 힘든 것이 아니라 이 정도면 내가 조금 부담되지만, 감당할 만도 하고 즐겁고 재밌있다, 라는 것들이 조합에 뿌리내리길 바라죠.”

이금자 상무이사는 주부들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활동의 에너지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잘 다듬고, 훈련되고, 학습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욕구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화된 주부가 아닌 이상, 주부운동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2기의 목표도 서두르지 않겠다는 것이 이금자 상무이상의 다짐이다.

“2기의 활동은 구상단계에요. 1기는 저의 의지로 진행됐다면, 2기는 조합원들과 저희 이사님들이나 활동하시는 분들과 같이 논의해서 만들 생각이에요. ‘그린생협’의 조합 규모가 다른 곳에 비해 꽤 많은 편이에요. 그런데 어떤 대사회적 메시지를 전하고 한 지역을 조금이라도 변화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려면, 저는 수의 규모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수의 규모를 가지고 뭘 하겠다는 차원의 문제는 전혀 아니지만요. 부천은요 세대수가 30만 세대 정도 되요. 생협은 한 사람이 가입하는 것은 한 세대가 가입하는 것이거든요. 먹거리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요. 30만이면 한 0.3%정도. 만 세대 정도는 그린생협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먹거리도 만들어가고, 한 편에서는 생협에서 하고 싶은 것은 상당히 많죠. 대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과제고요, 지역사회의 협동사회 구조를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지역사회 협동조합 만들기, 아니면 협동조합 지역사회 만들기 이렇게요. 지금 보면 협동조합의 구조가 의료, 공동육아, 반찬가게 즉 워크즈컬렉티브 등이 있는데, 저는 만 명의 구조면 그런 것들의 틀이 조금 보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2기 때는 맹아라도 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이 2기가 했으면 하는 꿈이다. 물론 2기는 조합원이나 사무국 실무자들의 범위나 발전 수준만큼 움직일 것이다. 2기에 다 이루어진다는 것도 미지수다. 그래서 사회와의 관계를 조금씩 형성해 나가기 위한 맹아를 싹틔우는 일이 2기의 가장 큰 목표이기도 하다. 이금자 상무이사에겐 또 하나의 꿈이 있다. 주부들의 지역정치 진출이다.

“이미 지역정치에 대해서 앞서간 고민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동북여성민우회 정도가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이 지방정치에 진출했을 때, 고민의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단지 내가 혼자 나가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어떤 서포트가 필요한가, 정말 제가 본격적으로 뛰어든다고 하면,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우선순위나 우리 조합의 당면과제라고 생각하고 거기까지 고민에 들어가겠죠.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고, 다만 저는 그런 쪽에서는 일본의 가나가와네트워크가 좋은 모델이이라고 생각해요. 그 모델에 관해서는 실제로 아주 기층민들이, 그리고 기층에서 사람을 내보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네트워크 되고 관리되고, 그것들이 힘을 실어주는 전문 섹터와 이런 것들을 어떻게 분장하고 기금은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그 모델을 배워야 되겠죠.”

아직 조직적인 고민의 틀은 마련되지 않았다. 또 조직적으로 그리 급한 일도 아니다. 다만 생활운동과 지역정치가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유능한 일꾼들이 지역정치로의 진출은 지역사회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물론 당위적 접근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자치라는 큰 틀에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나 자치는 완성된 형태는 없다. 그래서 늘 고민이다.

“저도 그 지점이 고민이에요. 실제로 ‘자치’가 어떻게 가능한가.......저는 자치라고 했을 때, 생협에서 내 놓을 수 있는 모델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협동조합 지역사회 만들기가 앞으로의 답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치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지역경제의 일정한 부분이라도 비영리 섹터로써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럴 때 자치의 영역이 들어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미국의 경우에 있어서 전체 경제를 움직이는 10%는 비영리경제라고 하거든요. 그랬듯이 사실은 자치의 경제적 의미가 들어가려고 하면, 협동조합의 모델이 있잖아요. 의료에 있어서의 협동조합의 모델, 육아, 지역경제를 움직이는 아주 작은 단체, 이를테면 최근에는 카센터를 중심으로 한 차생활협동조합도 있잖아요. 조합원들의 출자에 의해 운영되는데, 그런 식으로 우리 식으로 경제를 움직이는 방식을 협동조합의 방식으로 했을 때, 저는 자치는 경제와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그 모델들이 정말로 주민의 참여에 기초한, 그리고 주민이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에 기초한 협동조합의 경제공동체, 이런 것들이 아주 다양한 영역에서, 발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은 의료, 육아 등으로 한정되어 있잖아요. 이렇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영역에서 넓혀져 나갈 때, 그랬을 때 워커즈컬렉티브 같은 경우, 지금 주부들이 제일 좋은 것이 반찬가게 하잖아요. 그런 것도 협동조합의 모델이죠. 지금은 기본적으로 지역경제를 움직이는 것이 개인이라는 개념밖에 없잖아요. 그게 아니라 몇 사람이 그것들이 훈련되었을 때 갖는 경제공동체가 자치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것 같아요.”

주민자치를 위한 경제적, 조직적 기틀을 마련한다는데 있어 협동조합운동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린생협’만 하더라도 생협을 잘 운영하는 것이 하나의 큰 의제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생활공동체를 구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관념적인 자치의 모델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국 주민자치의 구체성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이금자 상무이사는 주부들이 서 있는 구체적 현장이라고 말한다.

“사실은 돈으로 지불되지 않는 자원활동이라는 것이 굉장한 한계가 많아요. 속도도 굉장히 더디고, 해소되고 고조되고, 또 그들이 일상적 책임성이 좀 약해요. 저는 그런 것들도 조금씩 훈련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보는데, 만약에 모임이 있었다, 회의가 있었다, 그러면 연락도 하지 않고 안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부분이라든지, 교육적 과제,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슈는 주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죠. 그래서 어려운 점이 많아요.......그러나 아파트 단지와 같이 구체적인 현장에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광명YMCA의 경우는 광명의 5단지만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하는 모델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서 각자 지역에서 그런 기운들이 좋은 모델들로 되면 자발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겠죠. 저희가 정책적 방향을 멋지게 딱 정하고 밑으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작은 모델, 그리고 지역적으로 아주 세분화해서 축소된 모델들이 많이 개발되고 확산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깨알 같은 모래들이 모여 큰 백사장을 이루듯, 현장의 작은 모델들이 모여 주민자치의 큰 흐름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주민자치가 바로 이런 난해함과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린생협’은 이제 막 기지개를 폈다. 시나브로 그들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끝으로 하시는 일이 재미있는지,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물었고, 이금자 상무이사의 답변으로 마무리한다.

“저는 재미가 없지는 않은데요, 힘도 들고 많이 지친 것 같아요. 저 개인만 말씀드리면, 개인 조합원들은 저희가 잘 하는 데도 아니고 지지부진해요. 어쩔 때 잘 되기도 하고, 어쩔 땐 잘 안 되기도 한데, 요즘은 많이 재미있어 하세요. 쾌활하시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그게 처음 시작한 사람의 한계일 수 있는데, 굉장히 당위로부터 출발하고 꼭 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있고, 또 제 성격 자체가 워낙 급하고 또 추진력도 강하고 그러다보니까, 저 개인적으로 지쳐요. 힘이 들죠. 그런데 재미가 없지는 않아요. 제 스스로가 원래 이런 일을 좋아하니까. 그러나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이 재충전의 기회가 없잖아요. 더구나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어떤 하나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누구를 향해서 재충전의 시간을 달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이런 일 하는 사람들한테는 뭔가 충전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어떤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희망도 가져 봐요. 그러니까 굉장히 한국사회에 나름대로 시민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나름대로 사회를 바꿔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재충전 프로그램, 이런 것들이 제도화되고 시스템화 돼서 한 번씩 전국적 단위든 뭐든 몇 년 이상 한 사람은 일주일이든, 한달이든, 그 동안 쉬기도 하고, 자기도 돌아보고, 그렇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특히 시민자치, 주민자치 이런 것은 더군다나 주민들이 움직이는 부분이라면 그런 것에 대한 고민들, 활동가들이 많이 양성되었을 때, 실제로 순수하게 주민들을 양성했을 때,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한 2-3년 활동하고 나면, 조금 더 한 단계 자기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고 재충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 제가 보기에는 저희 같은 사람은 한 5년 있다고 해도 되요. 그러나 그런 사람은 2-3년에 한 번씩은 해줘야 할 것 같더라고요.”

※ 부천 ‘그린생협’ 홈페이지는 http://www.greencoop.or.kr/index.html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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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0년과 주민참여가 최대의 화두” -관악사회복지-를 찾아
인터뷰 : 한재랑(조직팀장)


사회복지 영역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빈민운동의 확장된 공간으로서, 지역운동의 생활의 의제화로서 사회복지운동은 지방자치제도의 연착륙과 동시에 관심의 광각(Wide-angle)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직접적 서비스를 넘어,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한 지역사회의 노력은 당위에서 구체적 실천으로 발전되고 있는 것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회복지운동의 큰 흐름이며, 이를 ‘지역복지운동’이라 정의내릴 수 있다. 지역사회의 복지의제를 지역사회가 해결해 나가는 것, 그래서 사회적 약자가 직접 서비스의 수혜자로만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모로 그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체계를 만들고, 그런 활동을 대변하는 것이 지역복지운동의 대체적인 활동 경로이다.

지역복지운동의 역사는 ‘관악사회복지’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구의 ‘우리복지시민연합’과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관악사회복지’는 강산이 한 번 변한 만큼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자부심과 책임감이 남다른지 모르겠다. 앞서 지난 온 10년의 경험만큼, 앞으로 10년의 경험이 더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이 한재랑 팀장의 생각이다. 어쩌면, 사회복지운동의 커다란 밑그림이 구체적인 지역에서 제시되고 실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본다. 실제, 관악사회복지는 지난 3월 13일, 설립 후 첫 총회를 개최하면서 주민과 더 밀착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조직체계의 변화를 모색했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직의 전환 시기에 한재랑 팀장을 만났고, 그가 고민하고 있는 지역복지운동의 미래를 들어보았다.

우선, 대략적인 관악사회복지의 역사에 대해 물었다.

“......관악구에서 빈민운동 하시던 선배들이 지방선거를 치루고 나서 고민하신 것이 지방선거를 계기로 해서 확장되었던 것 같아요. 지역 안에서 이전에 갖고 있던 달동네 모습들이 아니라, 재개발이 90년대 초반과 중반에 걸쳐 대규모 공사가 되면서 기존의 빈민운동하던 분들의 고민이 지방선거 되면 지역 단위의 지역 행정체계가 돌입이 되는데, 그랬을 때 이전의 산동네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였던 활동들이 어떻게 고유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지방선거 진출을 하면서 제도화된 활동에 대해서 고민의 지점이 만나면서 이전의 빈민운동의 역사를 받아 안으면서, 재개발되고 주거환경이 변화해도 변화되지 않는 고유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전문 활동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공부방이나 탁아방, 어머니교실, 건설 일용 노동자들이랑 함께 했던 활동들이 어떤 것으로 정리가 되어야 하나 고민을 했을 때, 이것은 복지 영역이라고 생각했었고, 당시 복지관에서 근무를 하던 의식 있는 사회복지 전문가 그룹들이 이런 문제의식에 공유해서 공동으로 준비를 하게 됐고, 그렇다면 제도 안에서 공신력 있는 그런 단체가 필요하지 않겠나, 예를 들면 달동네에서 어떤 공부방이나 탁아소 활동을 했는데, 주거 환경이 변화되면서 지역이 해체되면서 일단 시설과 기관이 해체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비영리 시설들이 존속될 수 있는,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한데, 그걸 어떻게 가야 할까 고민하면서 사회복지 법인이나 사단법인을 고민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법인 형태가 공신력 있는 단체라고 생각을 했고, 법인을 추진한 것 같아요. 95년 8월부터 모임이 시작되었고요, 공식적으로 준비하던 모임이 사회복지법인추진위원회라고 했어요. 법인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만든 조직이죠. 그래서 당시에 법인이 되기 위해서 기존의 빈민운동 했던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좀 붙었고, 현재까지 있는 이사진들은 당시에 법인을 만들기 위해 참여한 사람들이죠. 당시에는 회원 개념, 이런 것도 없었고, 일단 법인을 만들자, 그래서 법인 허가 난 것이 96년 6월 10일에 서울시에 법인 등록을 했거든요. 그 전에 6개월 정도는 법인을 준비하는 단계였죠.”

빈민운동에서 지역복지운동으로의 전환 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남다른 진통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지역복지운동의 초심을 되새기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며, 지역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변인으로서 관악사회복지의 발자취는 한국사회 지역운동에도 커다란 성과이기도 하다. 물론, 관악사회복지로의 전환은 단순히 내적 요구에 의해서 싹 튼 것만은 아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시대적인 상황, 재개발 붐으로 인해서 관악구 하면 대표되던 달동네가 해체되던 상황이 있었고, 당시 코펜하겐에서 있었던 WSSD인가요, 그 때 이후의 복지의 문제, 삶의 질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이전에는 생존권 투쟁으로 가던 것들이 삶의 질의 문제로 움직임이 있었고, 기존의 주민운동 하시던 분들이 계속 주장했던 생산과 소비가 공존하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고, 그리고 관악구에서 빈민운동을 했던 역사적 흐름과 그 역사적 활동을 계승하기 위한 단위를 고민하다보니까, 사회복지 영역으로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운동의 대상은 무엇인지 물었다.

“보통은 사회복지 쪽으로 보면 지역복지가 하나의 개인사업 같은 그룹이 있는데, 저희는 지역복지를 하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고요, 지역복지의 개념은 원래 사회복지적 개념으로 본다면, 지역사회의 의제를 지역사회 주민들이 해결하는 그런 개념인데, 현재 저희 단체 같은 경우는 그래서 많이 사례화 된 것은 재개발 싸움이나 특별법 반대운동 같은 이슈 같은 것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 전에는 빈곤 문제에 있어서도 아주 핵심 이슈들을 가지고 했었는데, 현재 관악사회복지 같은 경우는 그 대상이 누구냐라고 하면, 지금의 개념은 전체적인 관악구 주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복지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복지의 영역에서 봤을 때는 사회적 약자들을 지원하거나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는 운동인데, 그 이전에 우리가 IMF 이전까지는 그런 활동이 중심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이냐, 그 지원의 구조를 만드는 활동이 주요였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자원봉사를 모집하고 교육하고 연결한다거나, 아니면 사회적 이슈와 복지정책에 대해 개발하고 거기에 추천할 수 있는 제도 개선 활동을 한다거나, 그래서 직접 서비스를 주민들에게 준다기보다는 그런 서비스를 줄 수 있는 하나의 자원 체계를 만들고 그런 활동을 대변했던 것이 주였던 것 같아요. 98년 IMF 이후에 변화된 부분들은 푸드뱅크이라는 활동을 통해 직접적인 서비스를 하고 있는 거고, 그것은 자원 네트워크의 개념으로 푸드뱅크 활동을 하면서 조금 달라진 것 같고요, 현재의 경우는 두 가지가 병행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전체 관악구 주민 중에 현안 이슈를 가지고 논의나 자기 능력을 참여할 수 있는 사회참여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활동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푸드뱅크나 건강지원 사업이나 환경 관련 사업은 직접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연결될 수 있게 하는 것, 저희의 기본적인 원칙은 관악사회복지는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기관은 아니다, 서비스가 연결되고 연결될 수 있는 그런 네트워크와 자원을 개발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네트워크 단위여야 된다라는 것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설립 취지문에서나 지향이 그 때 당시에도 핵심이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자발적인 주민참여 구조를 만들자, 또 하나는 지역복지네트워크를 구축하자, 그런데 그것이 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과제이며 지향으로 남아 있는 것인데, 그 정신은 어쨌든 그 정신에 맞춰 왔다고 생각해요. 현재 우리 단체를 보면 관악사회복지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계층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중산층에 사시는 주민들이 자원활동을 하시거나 모임에 참여하거나 해서 정말 회원으로서 자원활동을 하는 그룹이 있고, 또 푸드뱅크나 의료건강사업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은 정말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극빈층에 있는 분들이고, 그런데 저희는 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원을 개발하고 배분하고 네트워크 하는 것을 저희의 역할이라고 보는 겁니다.”

푸드뱅크과 같은 직접적 복지 서비스도 제공하지만, 큰 틀에서 사회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다양한 그룹의 네트워크가 관악사회복지의 기본적인 그림이다. 어떻게 보면 지역복지운동의 정신이자 실천전략이다. 그러나 지역의 상황에 따라 지역복지운동의 양태도 다 다르다.

“지역복지운동 단체들도 전국단위로 네트워크를 해서 만나 일을 하고 있는데, 다 달라요. 똑같은 지역복지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어느 지역에서 어떤 출생배경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좀 다른 것 같아요. 저희는 워낙에 주민운동 했던 관점에서 주민참여나 이런 개념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네트워크를 강조하죠.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지방자치단체가 복지정책을 집행하고, 각종 복지시설 기관들이 직접서비스를 추진한다면, 지역복지운동은 복지 인프라를 조직하고 각 활동을 네트워크 한다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프라 조직이나 네트워크는 어떤 모양새일까?

“......저희가 어떤 자원활동가를 조직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더라도 애초에 실무자가 100%를 했다면, 그 다음에는 80%의 노력을 투자하고 20%는 참여자에게 권한을 위임해주고, 다음에는 더 줄어들고, 어느 순간이 되었을 때는 실무자의 계획이 1%로 되고 99%가 참여자 중심으로 되는 것, 그런 지향이 저희가 자원활동가를 교육하고 조직하는 관점이라면, 서비스라는 관점도 그런 것인데, 초기에 관악사회복지가 직접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많은 노력을 투여하지만 점점 네트워크라는 구조 자체가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프로그램이나 내용에 따라 기간이나 속도는 다를 것 같지만, 기본 관점은 그렇게 가려고 하는 거죠. 예를 들면, 이전에 푸드뱅크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 제가 시작할 때, 일주일에 한 3일은 꼬박 푸드뱅크 일을 참여했었거든요. 정말. 매일 전화 돌리고 매일 후원자 개발하고, 이런 일이 매일 거의 한 50% 이상 푸드뱅크 업무만 했다면, 지금 저희 단체가 푸드뱅크 관련해서 활동하는 것은 아주 미약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시스템화 되었기 때문에 자발적인 움직임들이 있고, 자생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거죠. 저희 자원활동 모임도 마찬가지에요.”

푸드뱅크와 같은 직접 서비스 이외에 사회복지를 지원하는 다양한 모임들도 독자적인 활동을 지향한다는 것이 한재랑 팀장의 이야기다. 이런 지향성에 기초하여 올해부터 운영위원회 체계도 완전히 바꾸었다. 즉, 이전까지 운영위원회가 소위 사회복지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면, 올해부터는 지역의 주민리더들이 운영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조화한 것이다. 이를테면, 고등학생들의 모임인 ‘햇살’에서 모임의 대표가 참여하고, 직장인 모임의 대표, 여성 모임의 대표, 그리고 각종 자원활동가 대표들이 참여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 정도의 모양새라면 창립 초기 관악사회복지가 추구하는 방향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사회복지 당사자운동’도 염두하고 있다는 것이 한재랑 국장의 설명이다.

“당자사운동은 고민하고 있는 단계예요. 저희가 복지운동단체로서 정체성을 가지려면 어떠한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했을 때는, 하나는 정책이나 제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참여자들이 주체화 되어야 하는, 그게 당사자운동이 되겠죠. 그러니까 공적인 영역에 공공기관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 그리고 참여자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문제 해결을 직접 나설 수 있는 당사자운동, 이런 두 가지의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들이 있는데, 현재까지, 예를 들면, 여성모임이나 청소년 모임 같은 경우는 자족적인 형태가 커요. 또 그렇게 평가도 전문가들로부터 받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의 활동을 당사자운동으로 봐야 하느냐,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당사자운동 그러면, 사실 약자들 운동, 어떤 그룹핑 되는, 장애인, 노인, 가정폭력 피해자들 이런 개념으로 봤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평가받을 수 있느냐 하면 또 아니다, 하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가 생각했던 당사자운동이라고 했다면 현재 수준으로서는 푸드뱅크에 참여하고 있는 독거어르신들의 모임, 그리고 그 사람들의 생활의 문제를 나서서 싸울 수는 없지만 문제화 하거나 인식하게 하는 것, 그리고 조직이 되는 것, 예를 들면 건강사업과 관련해서 차상위 계층의 건강지원 사업을 하고 있는데, 차상위 계층이 의료비가 정말 생활적으로 부담이 된다, 차상위 계층의 의료적인 지원이나 제도가 만들어져야 된다면, 운동화될 수 있는 조직화, 이런 것을 당사자운동으로 보고, 현재 우리의 과제이며 시도하고 있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올해와 내년에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꼭 시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합의하고 있는 수준이죠.”

당사자운동은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문제해결점을 찾아감으로써 복지의 문제를 사회로 넓혀나가는 운동을 말한다. 단순히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란 점이 당사자운동의 핵심이고, 관악사회복지가 장기적인 운동의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현재 관악사회복지는 회비를 납부하는 회원이 250여 명 정도, 자원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이 200여 명 정도 된다. 이들 회원들은 청소년 모임, 여성모임, 직장인 모임, 사회복지 대학생 모임, 환경매장 활동, 의사모임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치구 단위에서 이 정도의 조직규모라면,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긴 했지만, 꽤 큰 편에 속한다. 그들의 활동성을 지켜나가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지역복지운동을 해나가면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 또는 고민거리에 대해 물었다.

“계속 반문되는 것이, ‘지역복지운동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항상 하고 있고요, 지역복지운동의 비전과 사명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어요. 그런 고민이 되고요,(사무국장님이 떡볶이를 건네줌. 잠시 인터뷰를 중단 함.).......그리고 관악사회복지가 지금 9년 째 접어들었고, 올해, 내년에 저희의 가장 큰 과제는 10년을 잘 정리하자는 겁니다. 또 향후 10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대구의 우리복지시민연합이 저희보다 먼저 창립이 되었고요, 근 비슷한 시기에 저희 단체가 설립이 됐는데, 지역은 다르지만 두 단체가 지향했던 부분이 복지운동이었는데, 한국사회의 복지운동의 역사를 두 조직을 통해 한국사회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단순히 관악사회복지가 사업을 잘했네, 못했네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지역복지운동의 비전을 만들어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고민을 해요. 그래서 향후 한국사회 복지운동의 하나의 전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지난 번 전국 네트워크 모임에 가서 서로 그런 고민을 나누기도 했어요. 가능하면 같이 공유하면서 비전을 내보자 했는데,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에요. 그냥 관악사회복지 10년이다가 아니라, 제 욕심은 지역복지운동으로서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져서 사실 일하는 활동가들이 부담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부담을 다 떠나서 정말 철저하게 평가하고 평가받고 사후 10년의 계획들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남들이 보면 그런 역사적 책임까지 생각하냐고 하는데, 어쨌든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조직적으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지점에서 가장 큰 고민은, 지역복지운동이라고 하는 가장 크게 개념화될 수 있는 것이 관악구라는 지역 안에서 복지라는 이슈를 가지고 운동하면서 지역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활동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회원이 몇 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관악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이 조직을 알고 이 조직에 참여하고 또 조직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조직의 활동에 동의하면서 지역사회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가가 고민이긴 해요. 제가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관악구에 사는 A라는 사람에게 참여연대나 환경연합이 회원가입 하세요 라고 할 때랑, 관악사회복지가 회원 가입하세요 라고 하면 제가 보기에는 60-70% 이상이 중앙 단위의 운동 단체에게 회원 가입을 한다는 거예요. 그게 현재 수준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 같은 풀뿌리 조직이 외연을 확장하는 방법은 정말 피나는 활동을 해서 그 속에서 만난 사람이 이 조직을 신뢰하고 확실히 함께 갈 수 있겠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인데, 그만큼 그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되는 거죠. 그래서 일상에서 주민들과 만나서 주민들이 함께 하고 싶도록 하는 것, 그런 메리트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 이런 것이 고민이에요.

아까 지적하신 대로 가장 이상적인, 지향대로 가려면 더 많은 관악구 주민들이 여기에 참여해야 되고, 그래서 저희가 회원가입 캠페인을 할 때, 복지개미운동이라고 하거든요. 일개미들이 모여서 하는 것처럼, 많은 힘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작은 참여들이 모여서 영향력 발휘하는 것이 풀뿌리 조직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데, 참 쉽지 않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지금 현재 역사에 비해 적지만 현재 수준은 대게 높은 수준이거든요. 250여 명의 회원이 회비를 납부하고, 활동 회원이 그렇게 있는 조직이 쉽지 않거든요. 그게 역사의 반영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거예요. 재정적으로도 자립을 해야 하고 이런 문제들도 있지만, 올해 저희가 고민하는 것은, 첫 번째 10년을 잘 정리하고 지역복지운동의 하나의 비전을 제시했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관악구의 풀뿌리 지역단체로서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고민이고, 재정 부분도 100%로 회비로 운영되는 단체로서의 지향, 현재 저희가 70% 정도가 재정자립이 되거든요. 올해 안에는 목표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욕심도 있고, 그래서 외부 프로젝트는 안 하기로 했어요. 순수하게, 순수하다고 하면 다른 단체가 오해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본래적인 활동의 기반을 지역에서 만들어보자는 것이 기본 취지에요.”

10년을 제대로 평가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과 주민들의 참여를 확장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한재랑 팀장의 가장 큰 고민이자 과제이다. 한재랑 팀장이 사무국장직을 다른 활동가에게 넘기고 본인이 직접 주민들을 만나겠다고 다짐하면서 조직팀장을 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민들과 더 밀착하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주민들과 만나는 일상적인 활동은 무엇일까?

"그것도 고민이에요. 제가 볼 때는 관악사회복지를 일반 관악주민보다 시민단체들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일단은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 같고요, 그것이 긍정적 영향이든 부정적 영향이든, 공세적인 그런 활동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올해 사업계획을 쫙 짜 놓은 것은 없어요. 일단 실행 준비하고 있는 것은 지역 이슈 및 단체 홍보 캠페인, 이것이 가장 크고요, 다양한 방법들을 생각해봐야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사람을 만나야겠죠. 조직을 알리고, 또 애정을 갖게 만드는 것, 제가 어떤 생각이 드냐면, 제가 여성모임을 98년부터 쭉 해왔는데, 주부들이 잘 안 움직여요. 아이들을 위해 돈을 쓰지만 자기를 위해 쓰거나 조직을 위해 기여하는 것은 쉽지 않더라고요. 저희 여성모임 분들을 보면 최소 1, 2년 정도가 지나야 조직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조직에 내가 참여해야 한다, 이 조직에 있어서 내가 정말 좋다, 라는 느낌을 갖는 것 같아요. 그 정도 돼야. 그래서 사람들의 자발성은 훈련되는 것 같다, 처음부터 이거보고 내가 해야지, 하지는 않는다, 자발성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자발성은 발휘가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번에 저희가 하는 부분들이 그런 것이고, 저희가 한 6년 동안 신림6동,7동 빈곤 밀집 지역을 선정해서 활동들을 많이 했어요. 환경매장도 만들고, 푸드뱅크 나눔도 하고, 지역조사도 하고, 자원봉사자들이 건강관련 사업들을 하고 있는데, 그 지역을 올해 같은 경우는 난곡, 예전 난곡 신림7동이 재개발 되고 나서 사람들이 그 밑으로 이주를 많이 했거든요. 신림 12,13동인데, 그 지역에 조사를 다시 시작을 해요. 아주 전통적인 방법으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어려움과 필요한 것,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가는 것, 이것은 다음 주부터 준비 들어가서 총선 끝나자마자 조사를 한 달간 실시할 예정이에요. 그래서 지역의 토박이들이나, 동사무소에서 소개받아서 가가호호 방문하는 조사활동, 그런 거예요. 어쨌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주민이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주민들을 많이 만나야 된다, 그래서 많이 나가야 된다는 생각이죠.”

구체적인 실천프로그램이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을 더 많이, 더 자주 만나는 것’이 기본 방향이다. 한재랑 팀장의 타임스케줄도 여기에 맞춰질 예정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차상위 계층에 대한 건강 지원사업의 경우가 이런 흐름 속에서 중요한 사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차상위 계층에 대한 건강지원사업이 있는데, 병원과 차상위 계층의 주민들을 연결해서 본인 부담을 50%로 감면해주는 것을 하고 있어요. 그런 운동을 진행하다가 참여하지 않는 의사들의 문제제기로 인해 정체되고 있어요. 문제제기하는 의사들은 불법이다, 그래서 그 사안 자체가 애매하게 되었어요. 법적으로도 유권해석 하기 나름이고, 구청 같은 경우는 그 부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부분에 대해 우리가 좀 더 전면적으로 고민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에요. 보건소가 있긴 한데, 보건소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고, 예를 들면 보건소에 가려면, 모든 사람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버스를 두세 번 타야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렇게 접근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저희가 하고 있는 일은 신림 그 지역에서만이라도 해보자고 해서 감면하는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특정 의원에 사회단체가 사람을 보내주고 이런 것을 한다는 것에 대해 신고가 들어온 거예요.......약사와도 얘기해서 많은 비용의 약은 무료로 조제해주기로 했는데, 못하겠다고 하며 약사에서 꼬리를 내렸죠. 의사회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죠. 그래서 이 부분을 관악구에서 전면화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서울시 단위의 네트워크가 있는데 이 곳을 통해서 전면화할 것인지 고민 중인데, 저희가 다음 주에 내부 간담회를 하고 그 다음 주에는 같이 활동했던 보건의료 모임의 회원들과 논의할 계획이에요.”

좋은 뜻에서 참여하려 했던 의사들에게 안 좋은 일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관악사회복지도 난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강하게 밀어붙일 수가 없다. 당장은 이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것이 주요 과제다. 그 동안 관악사회복지는 지방선거에 직∙간접적 참여를 해왔다. 앞으로의 생각에 대해서도 물었다.

“합의된 것은 없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전에는 때가 좀 아니었던 것 같고, 이제는 좀 고민해봐야 한다는 생각이고요,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올해와 내년에 그런 것을 검증하는 절차는 필요하지 않느냐를 고민하고 있어요. 공식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것은 아직 없는데,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정책을 내고 그 정책에 동의하는 후보를 지지를 하나, 아니면 훈련된 후보를 내서 이후의 활동을 할 때도 사회복지 전문 의원으로 활동하게끔 하느냐, 하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후자가 더 서로에게 플러스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개인적으로. 이건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죠. 그 이전에는 준비가 안 되었는데, 이제는 준비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일상 활동 속에서 선거라는 것이 이벤트가 아니가 그런 활동을 통해 검증된 사람이 자기 내용을 가지고, 시민사회단체의 대표성을 띄고 진출을 해서 이후에도 하나의 일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가야 하는데, 그렇게 준비해왔는가에 대해서는 물론 반성을 해봐야겠죠. 그래서 그런 고민을 저희 내부에서 확인을 했어요. 빠르단 생각이긴 하지만 그만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몇 년 후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는 사람들 중에 그래도 훈련이 되어야 하니까.......”

최소한 사무국 단위에서는 적극적이 지방선거 참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았다.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조직적인 참여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지방선거가 첫 시험대일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조직팀장으로서 한재랑 팀장은 지방선거를 비롯한 앞으로의 10년이 화두였다. 9년 차로 접어든 활동 경력이 나날이 새로울 수 있는 이유가 끊임없는 자기 고민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고민의 한 단면을 끝으로, 한재랑 팀장과의 인터뷰를 정리하고자 한다.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되요. 주민운동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주민운동단체인가, 이 활동이 운동인가, 끊임없이 고민이 드는 거예요. 지역복지운동이 도대체 무엇인가? 현재에서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하는가? 원칙, 이런 것이 중요한 것 같고, 생활의 원칙 이런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운동이라는 것, 관악구라는 지역 안에서 복지라고 하는 일이 어떤 운동이 될 수 있는가? 그런 것이 계속 고민이죠.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지금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고민이죠. 전체적인 중앙단위의 이슈들이 지역 단위로 내려와서 지역단위에서 실천화되어야 하는 것들, 어떻게 보면 현재 저희 조직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장 명확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지향을 가진 활동이다,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지역단위에서 생활과 운동과 이슈가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가 고민이죠. 정치질서 쪽에서 움직임들과 내가 갖고 있는 현장과의 갭, 지역화 한다는 것 자체가 고민이죠. 우리가 모인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함께 갈 것이냐 하는 근원적인 고민이 있는 거죠.”

※ 관악사회복지 홈페이지는 http://www.kasw21.or.kr/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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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주민자치운동 하기! - “대구참여연대”를 찾아 -
인터뷰 : 강금수(조직국장)


지역운동을 큰 범위에서 몇 가지 틀로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려고 한다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비해 시대적 상황이나 운동의 토대가 상당히 달라지기도 했지만, 지방자치제도의 연착륙과 함께 지역운동의 과제들도 밑바닥으로 점점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의 고민들이 운동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래서 주민 대변(advocacy)형 운동을 고유 특성으로 했던 단체라 하더라도, 개별 주민을 중심으로 생활의 과제를 고민하는 단체가 있다면, 평가의 잣대를 달리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대구참여연대가 바로 그런 경우다. 광역적인 사안으로 지역운동을 펼치는 단체치고 주민자치운동에 과반수 역량을 동원하는 단체가 드물 현상에서 대구참여연대의 운동 지향성은 눈여겨볼만하다.

대구참여연대에 등록된 회원 수는 1,500명 정도다. 이 중 꾸준히 회비내고 큰 행사에도 참여하는 회원은 과반수 정도, 또 그 중 과반수가 구(區)모임까지 참여하는 적극적인 회원이라고 할 수 있다. 98년도에 창립했으니, 6년여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늘은 대구참여연대에서 조직국장을 맡고 있는 강금수 씨를 만났다. 시청에서 불과 20-30m 떨어진 대구참여연대 사무실에서 그와 나눈 이야기들을 들어보자.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주민자치운동센터’라는 기구가 있었다. 이 곳에서 하는 일과 구별모임의 근황을 물었다.

“그야말로, 기초단위, 대구로 치면 구 단위가 될 텐데, 구 단위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운동을 합니다. 대구참여연대로 보면 초창기라서 구별로 분포된 회원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가 관건이죠. 대구에는 한 개 군을 포함해 8개 구가 있죠. 7개 구, 한 개 군이죠. 아직 구별 모임은 출발 단계인데요, 저희는 98년도 창립해서 그 해부터 해서 구별로 회원모임을 만들어놨어요. 회원모임을 친목위주로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는데, 실제로 자치운동을 하는 조직으로서 바꿔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시면 되고, 전 구에 있어서 다 있는 것은 아니고, 현재는 서구, 동구가 나름대로 활동하는 편이고, 수성구, 달서구, 북구 이 정도 모임이 꾸려지고 있습니다.”

구모임에 참여하는 회원들은 일반회원보다 좀 더 적극적인 회원이라고 보면 된다. 적게는 15-20명, 많게는 30-40명 정도가 꾸준히 구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활동들을 할까?

“대외적으로 참여연대 주민모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은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딱 그 단계입니다. 회원들이 같은 구에 사는 회원들끼리 모여서 얼굴보고, 친목도모를 하는 그 단계에서 어떻게 그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주민운동을 펼쳐나갈 것인가 고민하는 단계, 그렇게 고민하는 단계에서 모임의 성격이나 질을 또는 인적구조를 바꿔가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장거리 달리기 선수를 생각해보자. 출발선 앞에서 얼마나 고민이 많겠는가? 그러니까 대구참여연대 주민모임(구모임)은 창립과 더불어 만들어졌지만, 이제 막 출발 지점에서 몸을 풀고 있는 그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정당 조직 이외의 기초 단위까지 목표를 두고 주민운동을 고민하고 추진하는 단체는 대구참여연대 주민모임 이외에 대구에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강금수 국장의 고민도 딱 거기다. 딱 그 지점에서 강금수 국장의 고민은 바로 이거다.

“제일 중요한 것은 주체형성입니다. 주민운동을 목적의식적으로 자기 활동 과제로 삼고, 그 지역에 활동 모델을 설정하고,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초동주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어쨌든 저희로서는 저희 회원들을 활용하는 회원조직으로 출발하기 위해 기존의 회원 중에서 할 수 있는 분들을 골라내고 교육시키고 이래 하려니까 쉽지 않네요. 그것도 아래로부터 회원들이 이것이 필요하다고 상향식으로 올라오는 구조를 만들기가 참 어렵습니다. 대구참여연대 본부, 상근자, 임원들이 우리 운동이 이래서 안 되겠다, 기초까지 확장하고 심화시키자, 그런 문제의식에서 위로부터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다보니까, 이미 준비된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꽤 힘듭니다.”

이상적인 조직구조에 대한 지향성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시스템화 되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임에 틀림없다. 마치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맞닥뜨린 시지프스처럼. 그러나 사람이 있기에 희망이다. 시스템화도 결국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운용되지 않는가? 그래서 강금수 국장은 초동주체의 안정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주민자치운동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운동의 전체적인 방향성 속에서 나온 고민이 한 가지 있고, 그리고 참여연대 단체 운영의 내적 요구에 의한 요청이 있을 텐데, 전자로 보면, 누구나 제기하고 있다시피, 지역이나 뿌리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그 동안 가치 위주의 활동, 공중전 위주의 운동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인 것 같고, 사회 자체를 실질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운동의 방향성 속에서 나오는 문제의식에 착목했던 것이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단체를 운영하다보니까, 조직이 확대되고 회원 규모가 커지곤 하는데, 기존까지 있어 왔던 이런 활동 기구, 본부에 있는 센터라든지, 위원회라든지, 이런 기구만 가지고는 회원들의 참여 욕구 이런 것들을 다 수렴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회원들이 좀 더 쉽고, 시간 활용도 쉽고 참여하기도 쉽고, 시공간적으로 참여하기에 효율적인 구조가 필요하겠다는 인식이 있었죠. 그것도 마찬가지로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 사는 곳을 중심으로 해서 모임을 조직하고 거기서 나오는 과제를 가지고 참여하는 이런 구조가 아니면, 저희가 매번 시청 감시하고 시의회 감시하는데, 회원들이 구 활동에 이렇게 일상적으로 참여하기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하는 내적 요청이 있었던 거죠.”

사회적 요청과 내적 요청이 자연스럽게 주민자치운동으로 이끌었다. 기실, 강금수 국장의 고민은 여타의 지역단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시민’을 찾는 일은 시민단체의 난맥이었고, 거점으로서의 지역이 아니라 실제 운동으로서 지역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변화된, 또는 변화될 사람이 있는 것이다. ‘사람 농사’만큼 힘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주민자치운동은 긴 호흡의 운동이고, 느려터진 운동이다.

“길게 보고 오래 투자하지 않는다면, 안 하니 못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성과를 성급하게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문제는 아니다, 다만 투자할 때는 과감하게 투자해서 길게 보자, 인적 역량이든 경제적 역량이든 어쨌든 우리가 전략적으로 목표방향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투자할 것은 투자하고, 성과를 쉽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길게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액션보다는 내실을 기하고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학습 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주민자치운동에 관련된 기초이론부터 해서 실무, 각 주민운동의 부문적 과제에 대한 어떤 프로그램이나, 지금까지 돼왔던 어떤 사례에 대한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공부 하려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개적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학교’라고 해서 작년에 2차례 했었죠. 그나마 이것을 하면서 구별 모임의 핵심 회원들이 주민운동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평가를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고, 공개된 프로그램은 대중성 있는 프로그램으로 해서 일반 시민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저희가 내부적으로 지역 조직의 핵심 일꾼이 된다는 사람들을 꾸려서 이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목적의 교육은 따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크게는 대중성을 목적으로 하는 ‘시민학교’와 조직된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내부 심층교육이 있다. 전자의 경우, 연 2회 정도로 계획하고 있다. 자치시대에 시민들이 갖춰야 할 소양에 관한 것이 주 내용이다. 후자는 활동가용 심층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직된 회원들의 질은 높여서 조직을 확장해 나가고, 지역운동을 해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아무래도 대구참여연대 입장에서는 후자가 조직의 1차적 과제이다. 그래서 각 지부들이 요구하는 교육과제를 발굴해서 지원하고 교육하는 그런 것이 강 국장의 역할이기도 하다.

“‘시민학교’ 이후의 지속성이요? 그게 참 쉽지가 않죠.(웃음) 참가하시는 분들이 비슷한 질의 교육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천차만별이라서 나름대로 앞서 계시는 분은 기본적으로 저희 참여연대 지역조직에 가입시키거나, 연결시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저희 활동기구에 맞는 그런 위치에 권유를 해서 하게 하고, 사실 그게 다더라고요. 그 외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아요. 답답하죠.”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길게 보고 장기 투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대구를 보수성의 메카라 하지 않는가? 당연히 보수적인 지역의 특성은 운동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보수성이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죠?

“아무래도 기본적인 대구 사회의 보수성은 이 운동뿐 아니라 어떤 운동이든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그래서 쉽지 않죠. 뭔가 이렇게 운동적인 이미지나 이런 걸로 내세우거나 할 때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죠. 좀 꺼려하죠. 그런 점은 분명히 있죠. 다른 지역에서 못 느끼는 정도의 뭔가가 있죠.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주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주민운동을 이렇게 지역으로 침투해서 주민운동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해본 경험이 없어요. 과거 민주화운동 진영이 전국적 과제를 가지고 움직이거나 하는 것 이외에 현대적 의미에서 주민운동적 의식을 가지고 운동 주체들이 지역으로 내려간 경험이 없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최근 4-5년 사이에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그것을 평가하기에 이른, 사례라고 딱 내놓고 교훈을 얻어내기는 아직 이른 단계죠. 그 상태입니다.”

대구참여연대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몇 몇 영역을 제외하고, 지역주민들에게 침투(?)해서 본격적인 주민자치운동을 벌인 예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우리네 실정이다. 시대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주민자치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현재적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저희로서는 활동가와 활동가를 운영할 수 있는 경제적인 토대가 중요하고, 아직 소박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서 열댓 명에서 수십 명까지 모임이 있는데, 전업적으로, 내지는 적어도 반상근 형태라도 이 모임을 고민하고 운영해나갈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생업을 하면서 하든 어떻게 하든 운동의 비중을 두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의제가 있더라도 이것을 한 번 시도해 보고 할 텐데, 그게 갖춰져 있지 않죠. 그게 제일 급선무고.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이 사람을 운영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안 되니까, 어렵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가 예를 들어 ‘구미시민회’라고, 대구참여연대 ‘구미시민회라’는 조직이 있거든요. 한 3-4년 4-50명이 모여서 모임 하다가 안 되겠다, 아무리 이렇게 고민하고 논의를 해도 일할 간사가 없으니까 안 되겠다, 해서 처음에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 보내다가 지금은 일주일에 4-5일 정도는 아예 구미로 전문 활동가를 파견하게 되었죠. 그래가지고 한 6개월 정도 되니까 확실히 다른 것이, 일을 하게 된다는 거죠.(웃음) 물론 꼭 이런 유형만 필요한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저희 입장에서는 무작정 주민운동이라고 해서 아는 사람들 끌어 모아서 교육시키고 그 곳에서 활동가가 나오게 만들고, 이렇게 가기에는 너무 지난하고, 그런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어쨌든 위로부터 투자할 것이 있으면 투자해서 가야 되는데, 그런 점에서 활동가와 경제력이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죠.”

주민자치운동의 지난함을 드러낸 부분이 이 대목이다. 활동가와 활동가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제적 토대 - 대개, 직업전선에서 뛰고 있는 소시민들에게 활동가만큼의 활동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삶의 무게만큼의 하중을 더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뜻은 원대하나 현실은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문제는 주민자치운동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필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 국장은 몇 개의 구가 반상근이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경제력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 ‘구미시민회’의 경험이 좋은 선례 듯이 말이다. 이 참에 ‘구미시민회’의 결성 과정을 잠깐 더 들어보자.

“구미에서 몇 몇 분들이 구미에서 참여연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어요. 본부 조직에서 담당 인사를 보냈죠. 보내가지고 꾸준히 의논하고 토론하면서 세를 확장시켜 나가다가 일정한 수준이 되다보니까, 뭔가 운동 프로그램을 가지고 활동을 해야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일정 정도 모인 사람들이 우리 왜 모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고, 조직의 정체가 오니까,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겠다, 운동의 조직을 만들자고 고민하는데, 간사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이래 가지고 간사 붙이고 활동한 거죠.”

‘구미시민회’와는 다른 형태의 조직적 틀은 없었을까? 그래서 다시 물어봤다.

“그것도 뭐.......어쩔 수 없이 그래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다만 적어도 전략적으로 한두 군데 정도 지역을 아예 딱 잡고 여기만큼은 비용이나 사람을 투자해서 이 지역에서 나름대로 참여연대의 주민운동조직의 모델이라고 하는 정도의 모델까지는 안 되더라도 참여연대 주민조직의 운영은 이렇게 한다, 활동은 이렇게 한다,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전파시켜낼 수 있는 특정 모델을 하나 만들어보자, 이런 거죠. 이 모델이 전파되면서 다른 회원조직 내지는 지역까지 움직이게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해보고 있긴 합니다.”

다른 지역에서 이 정도의 고민을 하는 곳이 있을까 할 정도로 강 국장의 고민의 깊이는 매우 깊었다. 대구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그리고 대구참여연대의 색깔을 흐리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민조직의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강 국장의 희망이다. 대구참여연대의 색깔은 시민단체 중에서도 매우 강성에 속한다. 그래서 관(官)과의 관계도 그리 매끄럽지는 않다. 주민자치운동을 본격화되면 관의 협력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할 텐데, 최근 벌어지는 민관협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공직사회에서 저희 단체를 본다면, 협력하고 싶지 않은 단체 중에 하나일 거예요. 시민사회단체에서 본다면, 그 나름대로 연대운동이 그 나마 여러 가지 중심 중에 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희는 지역운동에서도 강경파에 속하죠.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관이라고 불리는 집단 세력이 운동에 의해서 극복되는 과정으로서 민관협력이 된다면 다행인데, 최소한 대구는 그렇지 못한다고 느껴지거든요. 뭐, 이래 자치정부가 마인드가 변화되고 발전, 진보되면서 시민운동과 협력하고 이렇게 되면서 더 승화되가는 그런 과정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이 과정이 좀 몇 년 흘러가고 하다보니까 운동조직이 관변화되는, 신관변화된다고 할까, 그런 점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지역에서 딱 지정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한편으로는 시정부의 질적인 변화가 거의 없고, 한편에서는 시민운동이 뭐랄까, 운동성이 약화돼가는 것 같고, 어설픈 민관협력이 진행된다는 그런 느낌이 들죠.......”

민관협력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깊숙한 늪에 들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설픈 민관협력.......내 생각과 딱 맞아 떨어진다. 이 쯤 돼서 지방정치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조직들이 생각하는 지역정치는?

“저희는 직접적 선거 참여는 안 했고, 어떻게 보면 의식적으로 차단을, 제어를 한 측면도 있어요. 왜냐하면,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단련되지 않은 사람이 참여연대의 명망성 내지는 규모를 너무 과신해서 우리가 쉽게 정치 참여를 허용했을 때에는 시민운동의 도덕성의 문제에 금이 갈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실수하는 그런 것이 예견되기 때문에 그렇고, 그나마 인제, 대구에서 나름대로 참여연대가 입지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운동 역량 자체가 이미지는 물론이고 훼손될 수 있겠다, 해서 많이 제어시켰죠. 실제로 인제, 예전에 저희 달서구 모임이 꽤 활성화되었는데, 가다가 그 중에 한 분이 지방선거 출마한다고 이 회 모임을 그렇게 이용하려고 움직였죠. 여기에 다수의 회원들이 반발하고 이렇게 하면서 갈등이 조장이 되가지고 회 모임 자체가 약화되었어요. 한 동안 복구하느라고 꽤 애를 먹었는데, 그런 사례가 있기도 하고, 해서 의식적으로 배제를 했었는데, 다가오는 지방선거부터는 저희가 생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구의회, 더 넓히면 시의회, 특히 구의회 정도까지는 정말 우리가 정치로 보지 않고 자치의 영역이라고 확장을 해서 목적의식적으로 개입하자, 참여하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의 후보를 많이 출마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못되겠지만, 어쨌든 풀뿌리 정치를 무당파적인, 비정당적인 그런 자치세력의 진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다음 지방선거, 그 다음 지방선거까지는 의회를 진출하려는 그 정도까지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구모임이 이 정도의 동의는 하고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물론 제도권 정치 참여에 알레르기를 지닌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기초의회 정도까지는 주민자치운동의 확장된 영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어떤 원칙으로, 어떤 절차를 거쳐 후보를 낼 것인가가 관건이다.

“......지난 번 지방선거 때 자치연대라고 해서 몇 몇 분들이 자치연대 후보로 시민후보라고 해서 출마한 사례가 있긴 한데, 일단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평가할 것이 별로 없고, 또 그런 흐름도 시민사회운동 전체에 논의를 통해서 탄력을 받아서 그렇게 됐으면 효과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일부, 이렇게 출마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의, 후보자의 연합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런 흐름만이 있으니까 전체 시민운동 역량이 받쳐주는 과정이 못됐죠.......뭐, 그런 분들도 자체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자치운동의 의미, 정체성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기성정당에 합류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많이 갔거든요.......(전화 와서 잠시 중단) 지금은 그렇습니다. 앞으로 발굴되는 후보자군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직이 발굴하고 조직의 멤버십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까지 보면 현재도 이렇게 저렇게 출마하려고 하는 운동조직 출신이 있긴 한데, 그런 분들 중에서 운동을 중심에 두고 출마하려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성장하신 분들이 또 기성정당으로 가면 운동이 고유하게 보유한 정치역량이 또 백지 상태로 돼버리는 것이죠. 그런 것이 우려가 많이 되죠.”

대구참여연대 주민조직은 바둑으로 치면, 전체를 조망할 포석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거쳐야 난관들이 참 많다. 그러나 주민모임의 행로가 불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원칙을 견지하면서 소박한 발걸음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 국장이 지적했듯, 현대적 의미로서 주민자치운동은 그 역사가 일천하다. 그래서 가능성도 열려있는지 모르겠다. 모쪼록 대구참여연대의 주민모임이 주민자치운동의 가능성을 한껏 열어주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이 일이 재미있는지, 앞으로의 과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재미는 있습니다. 오기도 생기고. 하하. 저희로서는 제 작년부터 해가지고 거의 우리 단체 역량의 절반 내지는 최소한 1/3정도는 주민조직을 꾸리고 주민운동을 개척을 해보자 해서 역량을 그렇게 투자해왔고, 작년 경우만 해도 상근자 7명 중에 조직국에 3명을 배치했으니까, 조직국 업무 자체가 주민을 꾸리고 지원하고 관리하는 그런 역할인데, 아직까지는 뚜렷한 성과는 없어요. 그래서 긴 호흡을 가지고 오기도 생기고(웃음).......그렇게 가보자 하고 있고, 지금도 투자를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그런 생각이고, 한 두 개 구 정도에는 필요하면 정말로 간사까지 내려 보내가지고 개척해보겠다, 이런 각오도 있습니다.......하면 안 될게 있겠습니까? 많이 더딜 것 같아요. 조금만 잘못되면 시행착오라든가 하면 또 역량 손실도 클 것 같고, 또 이렇게 보수 관료화 돼버리면, 한편으로는 실용성과 효율성 위주로 나가버리면 그런 위험성도 있을 것 같고 해서, 원칙과 정신을 살려가면서 가게 되면 매우 길고 지난한 과정이 될 것 같고, 어쨌든 저희는 초기 역량만 안정적으로 구축되기만 하면, 의제를 찾아내고 활동해 나가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지역주민의 기대에 맞는 맞춤형 의제와 프로그램이 있다면, 어디든, 대구뿐이겠습니까, 주민들이 자기한테 맞는 프로그램과 일을 하는데 참여 안하겠습니까?”



※ 대구참여연대의 홈페이지는 http://www.civilpower.org/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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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의 힘! 한살림의 힘!" - 한살림을 찾아 -
인터뷰 : 윤희진(조합원활동 실장)


당분간 지운운동사례는 지역의 주민자치운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주민자치를 위한 현장의 문제의식들을 담아보고 싶어서다. 그 첫 번째로 한살림을 찾았다.

한살림은 지역자치운동에 있어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단지 7만6천의 회원이 버티고 있어서가 아니다. 지역자치운동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7만6천의 회원을 정확히 표현하면 7만6천 가구를 말한다. 이 중 한살림 운동의 적극성을 보이는 이들은 단연 주부들이다. 전일시민으로서의 주부, 생활자로서의 주부, 지역자치운동 주체로서의 주부들은 한살림의 튼튼한 버팀목이다. 그 동안 한살림은 유기농산물 직거래 조직으로서 농업을 지키는 일에 큰 역할을 해왔고, 이를 계기로 지역 안에서 다른 영역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터득하고 있다. 이런 경험은 자연스럽게 지역의 농업 생산방식을 바꿔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의 방식, 생활의 방식을 바꿔내고 있는 것이다. 삶의 방식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가족의 건강과 안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소한 물음일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삶의 문제의식은 없을 것이다. 한살림 18년 역사 속에 싹튼 이런 문제의식은 조합원들의 사회의식과 지부들의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역할을 한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부들의 주체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제 문제는, 이런 에너지를 어떻게 확산할 것인가로 집약되고 있다.

이렇게 한살림의 역사성과 문제의식은 앞으로 한살림 활동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를 해주었던 윤희진 조합원활동 실장도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갈지가 고민이다. 이미 지역에 따라 한살림의 저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윤희진 실장. 녹취록 전문을 살리면서 윤실장이 생각하는 한살림의 자치운동을 들어보자.

먼저 언제부터 한살림 운동에 참여했는지, 조합원활동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다.

“저는 들어오기는 86년 12월부터 들어왔고요, 그리고 중간에 91년부터 95년까지 잠깐 쉬었어요. 한 1년 정도 일본에 가 있었어요. 96년부터 다시 들어왔죠. 일본에서는 큐슈에 있는 그린주부생협에 있었어요. 생활클럽 생협 다음에 지방에서는 가장 잘 하고 있는 곳이죠. 현재 제가 하는 일은 조합원 활동 전체를 포괄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부활동이나 각 위원회 활동을 총괄하는, 활동은 직원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이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어서 조합원 입장에서 조합원 활동가들 참여를 만들어가는 제도예요. 제가 하는 일을 각 지부나 각 위원회에서 상근 활동을 하는 분들을 아우르는 이런 일을 하고요, 구체적으로는 1년 동안 활동가들 연수 및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일을 합니다. 교육소위원회가 있는데, 여기서 나온 것을 도와주고 하는 간사 역할을 합니다. 일종의 한살림 조직활동이라고 보시면 되요.”

윤희진 실장은 한살림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살림 홈페이지를 보면 한살림의 출발이 1986년으로 제시되고 있다. 윤희진 실장과 해를 같이 한다. 한살림 조합원 수를 물었더니 2003년 12월 31일 통계자료를 보여준다. 이 자료에 의하면 서울만 4만9천명, 전국적으로 7만6천6백 명이다. 웬만한 시민단체의 회원 수를 능가하고 있다. 이런 조합원이 지금도 하루에 1,000명 씩 늘고 있단다. 주부들의 활동이 왕성할 수밖에 없을 텐데, 주민자치운동의 가능성이라고 할까,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저의 고민도 언제가 주민자치운동의 기점이 될까 하는 점인데요, 그 동안 한살림의 역할은 직거래 조직으로서 우리나라의 농업을 지키는 역할에 강조점이 찍혔었죠. 어떤 부분운동으로서, 유기농업을 활성화시키는 그런 것을 통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창조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그런 운동으로, 농산물이 핵심에 있었죠. 이렇게 초기의 운동을 풀어내려고 했기 때문에 모든 에너지들이 직거래 사업으로 집중돼 있었죠. 그래서 이만큼 물질적, 조직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봐야겠죠.
또 한살림의 생협운동이라든가 직거래운동이 더 지향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지역의 순환적인 삶의 모습, 또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해 내는 것을 궁극적인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앞으로 이런 운동을 어떻게 더 활성화시켜 낼 것인가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유기농산물의 유통을 계기로 해서 지역 안에서 다른 영역과 어떻게 연대해 나갈 것인가 하는 주체성이 생기는 것이죠. 우리가 다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연대해 낼 수 있는 주체성이 생긴 거죠.......엊그제 생명학교를 진행했던 홍성 영동 같은 경우, 지역에서 군부대가 전차 도로를 확장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여기 계신 생산자 분들이 반대운동을 주도해서 그런 지역의 여러 가지 사안들을 앞장서서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를 보이는 곳도 있어요.......
저희 회원들은 그냥 평범한 주부들이에요. 대부분. 우리 아이들의 건강, 가족의 건강, 행복을 추구하는 아주 기본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식이 있어서 왔다기보다도 들어와서 조금씩 변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죠. 지금 각 지부라는 조직이 처음으로 한살림 내에서 자주적으로 활동하는 실험을 했던 곳이에요. 그래서 지역 회원들에게 모든 활동들을 위임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조합원들, 또는 주부 사이에서 처음으로 자발적인 운영, 자주적인 운영, 자주적인 경영을 하면서 내부적으로 리더십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지금 상당히 오랜 시간을 거쳐서 조합원들의 주체성이 결국 지역에서 리더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은 막 그런 지부에서 배출된 지부장들이 지역의 활동가로 막 팽창하는 그런 시기에요. 그러면서 그 지부장들의 주체적인 역량만큼 우리가 지역과 연계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기기도 하거든요. 내부의 논리들에 의해 만나지는 것 같아요. 우리들이 얼마만큼 조직 내에서 조합원들의 주체성을 살리려고 했던가, 그것을 잘 키워왔던가, 이런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조합원들이 원하는 활동들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역량도 생기고, 그리고 권한도 위임이 되고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지부장과 지부 회원들의 역량이 지역 활동의 역량이라고 볼 수 있고요, 내부적으로의 논리에 의해서 온 것을 지금은 지역 안에서 다시 주체적으로 연계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또 하나의 운동이 창조될 수 있겠다고 판단하는 시기에요. 작년부터 더 활발하게 지역 안에서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인가, 지역을 다시 보기 시작한 거죠.”

한살림 활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 생산자와의 교감은 주민자치운동에 깊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것으로 인해 다시금 지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윤실장의 이야기다. 5만여 명의 수도권 회원 중, 고양시만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고양시의 회원은 3,700여 가구. 첫 출발지로서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았다.

“고양시의 경우 조금 있으면 임원연수회가 있는데, 지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다만 임원연수를 하고 나면, 각 지부의 독립성들에 대해 더 폭넓게 얘기가 나오겠죠. 방향성은 그것으로 잡고 있어요. 서울 지역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자립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자립을 할 수 있는 그런 평가들을 할 겁니다.”

심도 있는 평가가 뒤따라야겠지만, 일단 고양의 독립채산제는 성공적이라고 말한다. 활동의 방향은 역시 지역에서 자치운동을 일궈내는 것이다. 고양시의 사례가 서울의 다른 곳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며, 자립적인 지부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주부들의 지역 활동에 있어서 어려운 점을 물었다.

“굳이 어떤 당면과제나 당위성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결국 시민운동이나 새로운 운동을 찾아내야 한다는 가치 중에 하나는 개인의 자발성, 자주성, 독립성, 자율 이런 것들이 완성되어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진행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 주부들인 경우에 자기 삶이 어떤 자치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 것인가가 더 선결해야 할 문제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거기서 진정한 자신감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개개인의 자신감,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 이런 것들을 발견하는 것과 사회적 가치 지향성이, 특히 여성인 경우는 동시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늘 여성에게 좌절할 요소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들도 서로 털어가면서 가는 것이 운동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한살림인 경우에 생명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영성적인 삶이라든가, 평화라든가, 고요라든가 하는 생활 자체를 중요시 여기거든요. 또 한 줄기로는 생산자와 소비자와의 관계라는 것 자체가 생산자는 자연을 대표하는 관계거든요. 우리가 굳이 환경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이미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라고 하는 것 안에는 농촌이라는 것 자체보다 광범위한 환경이기 때문에 그 관계가 또 한 줄기가 있고, 또 하나는 지역에서 조합원과 조합원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화시키는 것이 우리 운동에 어떻게 담아갈까 이런 것들이 고민이고, 올해 프로그램 중에 그런 것들을 넣어보려 하고 있어요. 자신의 본성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프로그램, 주요 사업에 대한 이해, 지역 안에서의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 이런 것들을 다 같이 해야 되지, 하나만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목적의식적 만남보다는 여성들의 자발성과 성취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큰 담론보다는 작은 담론, 나의 일, 나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에게 자신감, 성취감을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주부로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잖아요. 그런 부정적인 감각들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도 필요하고, 개인으로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그룹으로 하는데, 저희는 ‘창조력 키우기 워크숍’이라고 해서 글쓰기, 자기 글쓰기 작업을 그룹으로 같이 하죠. 물론 개인이 다 하는 거지만. 여성들의 글쓰기는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수련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가도록 하죠. 그걸 많이 인정해주는 편이죠.”

정당으로 비유하면, 한살림의 진성당원(딱히 기준은 없지만, 적극적인 회원 정도)은 대략 10% 정도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10% 정도는 지부에 자주 들락거리며 흐름을 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어떤 교육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었다.

“보통 지부별로 하는데, 활동연수프로그램이 있고 각 파트별로, 부문별로 하죠. 한꺼번에 집체교육과 같은 집단교육은 선호하지 않아요. 지부에서는 지부 단위로 스스로 1년 동안의 교육 일정을 잡고, 각 위원회 별로 하죠. 가능하면 자주 조금 자기들에 맞게 하고 있어요. 좋은 점고 있고 한계도 있는데, 아직은 교류가 많지 않아요. 대신 파견연수를 올해 많이 보내려고 하고 있어요. 개인의 성장을 위한 파견일 수도 있고, 경영자로서의 성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리더십교육이라든가, 사전 교육을 하고 있어요. 또 여기 ‘모심과 살림 연구소’가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다 도움을 주죠. 올해는 좀 많이 하려고 할 계획이에요.”

‘모심과 살림 연구소’는 일종의 한살림 전략연구소와 비슷하다. 조합원활동실 바로 위층에 자리하고 있다. ‘모심과 살림 연구소’가 많은 힘이 되겠다고 물었더니,

“물론이죠. 올해부터 사회운동 전략화 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각 지역에 중심적인 활동가들과 연수를 작년부터 시작했어요. 3년 프로젝트로 올해에 저도 가려고 하는데, 한살림 다운 지역자치운동, 생명자치운동 등을 구상하고 있어요.”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지역정치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몇 몇 지역에서 한살림의 지역정치활동도 있었으니까.

“반드시 의원을 배출하지 않더라도 지역정치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한다는 취지에는 합의를 했어요. 지역운동의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후보를 내는 방법도 있고, 이것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방법으로 인정을 하고 있죠. 물론, 우리가 다 후보를 내겠다고 하는 그런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에 학교급식 서명하면서 한살림이 많이 받았거든요. 지역에서 그런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라는 것을 회원들이 배우는 거죠. 참여하면서. 아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구나, 먼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배워나가는 과정이라고 보고, 어떤 특정 후보를 생각하기 보다는 지부가 알아서 자연스럽게 연결할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2006년이 상당히 중요할 것 같아요.”

꼭 의원을 배출하지 않더라도.......라며 말을 흐리긴 했지만, 2006년 지방선거에 한살림 여성들의 지역정치 개혁 바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윤실장의 어조도 매우 자신감에 넘쳤다. 따뜻한 훈풍처럼 느껴진 건 왜일까? 또 지방선거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저는 후보를 내면 다 될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조직 기반에 대한 자신감이 있고, 이렇게 서명 받을 때마다 많이 받거든요.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조직적 기반을 평가한다면 자신 있죠. 그렇지만 개인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바는 없죠. 왜냐하면 지부장님들도 대리인이잖아요. 한살림 순환도 빠르죠. 지금 지부장들이 올해부터 2년 임기거든요. 내년까지 하고 그 분들이 나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제 경험을 같이 논의도 해주고, 조직 내 역할도 해주고, 일정도 딱 맞고,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인 판단도 있어서.......지부장님들은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사업을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경영평가를 항상 하잖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낯설지 않고, 예산을 보거나 하는 과정에 다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많이 지역 현안들을 잘 알고 있고, 그렇죠.”

딱히 결정된 바는 없지만, 현재의 지부장들이 지역정치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점친다. 덧붙여 윤실장은 어떤 원칙과 의제를 잡아야 하느냐, 어떤 상을 그려야하느냐를 두고 논의할 시기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런 것은 저 개인의 수준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저희 내부의 정책 토론회를 거쳐야 하는 내용이라서 아마 올해 정도에는 논의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튼 염두에 두고 있어요.......어찌됐던 저희 조직으로도 책임을 져야 하고, 어설프거나 헐렁헐렁 진행하는 것은 반대하기 때문에 일단 이렇게 시작하면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 잡도록 에너지를 모아야 되고, 성공해야 되는 거죠.”

그것이 큰 부담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적요인이든, 외적요인이든, 자연스럽게 한살림에게 던져진 지역정치개혁이라는 사회적 책임으로 인해 과부하가 안 걸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윤실장도 지역자치운동의 활성화가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지부로서는 급한 것이 지부의 발전이니까, 여성들에게 지역의 경영 리더십이 필요하고, 저희도 그런 경제적 자립이나 총체적 자립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경영자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내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뭐, 지부에서는 자연스럽게 지역 연결성을 고려하면서 잘 하시더라고요.......특히 도봉 같은 경우는 생태공원 만들기도 했었고, 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어요. 도봉사랑시민회와 관련된 일도 하고, 북한산 살리기운동도 했었고요. 지부장은 그 지역을 굉장히 잘 알아요. 복지활동을 쭉 했었으니까요. 지역에서 아이들 모아서 같이 진행하고 자신감을 얻었어요. 지역에서 우리 방식으로 해보면서 연습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런 거부감을 없애는 것도 참 힘든 과정이었어요. 우리끼리 하다가 지역으로 방향전환을 한 것은 한 2년 정도 된 것 같아요.......우선은 조합원들을 많이 가입을 시켜서 조합원들이 주체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 삶의 진정성이라든가 주체성 찾기와 같이 가는 거기 때문에, 막연히 무엇인가 하자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윤희진 실장은 이 일이 재미있고 배우는 것이 많다고 말한다. 억지로 무슨 일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역의 목소리에 맞춰 일을 진행하다 보면, 조직도 발전하지만 자기 자신도 성큼 성장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자치운동은 자원을 효율화시키는 것만큼, 자치운동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경험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을 끝으로 그와의 인터뷰를 마쳤다. 지역에서의 한살림 여성들의 활동이 자못 기대된다.

※ 한살림 홈페이지는 http://www.hansalim.co.kr/입니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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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받는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 - ‘남부교육센터’
인터뷰 : 김한수 사무국장
작 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교육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민간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단체들도 주민(시민)교육에 대한 자기 고민이 깊다. 특히 지역을 기반으로 한 운동단체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주민과 직접 만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조직화의 전단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민들이 어떤 내용을 갈망하느냐를 잘 파악하는 것이 가장 일차적인 과제일 것이다.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차원은 이제 어느 곳이든 매력적이지 않다. 피교육자들이 원하는 내용을, 쌍방향 교류를 통해, 이후 활동까지를 담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것인가가 지역단체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고민거리다.

그러나 한편으로 더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리면, 여전히 교육에서 소외된 계층이 존재한다. 정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비문해자가 전국의 7%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민간 영역은 정부 통계에 비해 더 넓게 잡고 있다. 단순히 글을 읽느냐 읽지 못하느냐를 떠나 실용적인 차원에서 글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23% 정도가 비문해자로 분류된다. 정부가 단순히 글자를 읽느냐로 접근하다면, 민간영역은 도표를 볼 수 있느냐, 반상회 회보를 정확히 이해하느냐, 영수증을 보고 계산할 수 있느냐 등으로 접근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문해자뿐만이 아니다. 정규교육과정에서 이탈한 많은 탈학교 아이들이 있다. 자의든 타의든 이들 학생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제도권교육의 희생양들이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정규과정에서 이탈한 학생부터 제도권 교육에 반기를 든 학생까지 다양하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가정교육, 즉 홈스쿨링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은 이미 1만 가정이 홈스쿨링을 실천하고 있고,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4만 가정이 홈스쿨링(일본에서는 ‘홈슈레’라고 한다)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도 넓게 보면, 제도권 교육에 소외받고 있는 계층이다. 전통적인 야학운동도 마찬가지다. 일찍부터 생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던 노동자들, 도시 빈민 학생들, 농촌 부녀회 등을 대상으로 야학운동은 발전되었다. 그러나 야학운동은 군사정권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사회주의혁명 조직으로 조작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야학운동은 '민중교육‘이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변화된 사회에 맞게 새로운 교육운동을 모색하고 있다. 신림동 난곡에서 터를 잡고 있는 ’남부교육센터‘도 이런 흐름의 한 가운데 있다.

‘남부교육센터’는 1973년에 개설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남부고등공민학교’에서 ‘남부야학’으로, 그리고 지난 2001년 12월 ‘남부교육센터’로 명칭을 개칭하였다. 그렇다고 교육의 중심이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민중교육’을 지향한다. 그들에게 ‘민중교육’이란 무엇일까?

“얼마 전에 저희 단체를 비롯해 몇 몇 단체와 공동으로 ‘민중교육 워크숍’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이번 워크숍은 ‘민중’이라는 부분과 ‘민중교육’이라는 부분을 지금 처한 상태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큰 쟁점이었는데요, 어쨌든, 뚜렷하게 하나의 집단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야학 교육이나 공부방의 큰 특징이 한국 사회의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데 있습니다. ‘민중’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를 통틀어 말할 수 있는 말로 사용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을 넘어오면서 ‘민중’이라는 말은 집회할 때를 제외하고, 민중 스스로가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우선은 변화된 사회에 대한 흐름을 파악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만, 중요한 것은 개념이나,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민중교육을 시작한 100년 동안 여전히 민중들이 존재해왔다는 것이죠. 그러나 민중교육이라는 개념을 고집하고 갈 것인가는 한 번 더 판단해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민중교육’이라는 개념을 절대적으로 고집할 수는 없지만, ‘민중교육’이 가지고 있는 운동의 정체성, 지향성을 놓칠 수 없다는 것이 김한수 국장의 지적이다. 여전히 소외받는 계층이 존재하는 한, ‘민중교육운동’은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실과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활동가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자원활동을 하는 교사들의 입장에서도 ‘민중교육’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점점 감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야학운동을 전개했던 이들도 90년대를 넘어오면서 ‘지역’이라는 구체적 현장에서 발 딛고 서지 않는다면, 생존하기도 힘들고 발전 가능성도 희박하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추상적인 노동자계급 또는 부녀회가 아니라, ‘신림12동의 아줌마들’이 그들이 만나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사어(死語)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민중교육’이라는 명칭도 ‘주민교육’, ‘지역사회학교’등으로 개칭하는 것도 심각히 고려 중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용어가 바뀌는 순간, 그들의 정체성도 흔들린다. 천천히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야학운동사에서 명칭이 사라지거나 바뀐 것이 없진 않다. 소위 ‘학강’, ‘강학’ 등의 용어는 역사 한 켠에 밀려 있다.

“이전 야학 시절에는 호칭을 ‘강학’, ‘학강’이라고 불렀습니다. 학강이 학생을 뜻하는데, ‘배우면서 가르친다’라는 뜻이고요, ‘강학’은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뜻이거든요. 이런 용어를 사용했었는데, 90년대 넘어서면서 그 사람들을 활동가로 봐 왔죠. 지금에 와서는 말 그대로 자원교사로 보죠. 오는 사람들조차도 자원봉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원교사들을 위한 교육이라는 것도 야학시절에는 ‘한국 야학사’, ‘민중교육론’, ‘강학학강론’, 그리고 탐방도 갔다 오고 그러는데, 한 10년 넘은 커리죠. 저희들이 그 부분을 전환할 필요는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자원봉사활동이란 무엇인가’ 뭐, 이렇게 갈 수는 없겠죠. 학생들의 생활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듯이, 교사들도 마찬가지로 나와 사람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런 것인데, 최근에 들어오는 자원교사들을 보면, 젊은 사람들인 반면에 제가 볼 때는 별로 창조력이나 상상력들이 부재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부분들에 대한 교육이라든지, 그 다음에 주민들에 대한 응대 기술이라든지, 지역이란 무엇인가라든지, 이런 교육이 필요하겠죠.”

‘남부교육센터’는 크게 네 교실이 있다. ‘한글교실’, ‘야학교실’, ‘지역주민교실’, 그리고 대안학교인 ‘꿈꾸는 아이들이 학교’가 그것이다. 이 네 교실을 담당하는 교사들 중 상근 교사는 4명, 나머지 40여 명은 자원교사들이다. 자원교사들의 수만 보더라도 그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전 ‘강학’과는 이해하는 수준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 김한수 국장의 설명이다. 이런 부분도 시대적 변화가 주요 원인일 것이다. 그래서 변화된 시대를 어떻게 받아 안을 것인가가 ‘남부교육센터’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한글교실’은 한글을 모르는 지역주민을 위한 생활 문해교육 과정이다. 주부들이 주 대상이며, 주간반, 야간반으로 운영된다. ‘야학교실’은 제도권교육에서 배울 기회를 놓친 성인들을 위한 초, 중, 고등교육 과정이다. ‘한글교실’보다는 교과과목이 더 넓다. 대다수는 주부들이다. ‘지역주민교실’은 지역주민을 위한 일종의 교양, 또는 전문 과정이다. 영상, 컴퓨터, 사진 등이 이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 밖 도시형 대안학교다.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는 학교를 그만 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서울시 대안교육센터 내에는 ‘작업장 학교’를 운영하는데, 8개의 현장 학교가 있다. 8개의 현장학교 중에 하나가 바로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다. ‘하자센터’만으로 대안학교의 판을 넓힐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대안교육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한 별도의 단위를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8개의 현장학교다. 지금은 8개의 현장 학교에 각각 2인의 상근비 보조와 어느 정도의 사업비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를 비롯해, 은평의 ‘씨앗학교’와 용산의 ‘도시 속 작은 학교’가 유일한 순수 민간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저희는 교육부가 인정하는 학력인정 대안학교는 아닙니다. 보통, 학력인정 대안학교는 법인이고, 주로 지방에 있습니다. 서울에는 없죠. 그런 대안학교는 정규학교랑 똑 같은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같은 소규모의 학교들이 있죠. 형태는 여러 가지죠. 대체로 도시형 대안학교가 있고, 그리고 종교기관에서 학력을 미인정하는 지방의 학교가 있고요. 그 다음에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방과후 학교도 있고, 주말형 학교도 있고요. 최근에는 초등대안학교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남부교육센터’가 법인을 설립하려고 하는 이유는 학력인정 대안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다. 어려운 재정난 돌파를 위한 자구책의 일환이다. 법인 자체로 합법적으로 지원되는 것은 없다. 다만, 후원시스템을 안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올 해에는 법인 설립이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다.

김한수 사무국장과 인터뷰 하는 동안 ‘남부교육센터’가 올 해 안에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변화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법인을 통한 재정독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 안에서의 교육운동 실마리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거리다. 김현수 사무국장이 밝히고 있듯, ‘남부교육센터’가 지향하는 가장 큰 목표는 ‘사람의 변화’와 그것을 통한 ‘지역사회의 변화’다. 사실, 한국사회가 여러 분야에서 단 시간 내에 빠른 변화를 보여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부교육센터’가 지향하는 이 두 가지 목표는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김한수 사무국장에게 2004년 갑신년은 버겁기만 하다. 끝으로 그에게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전략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으로 끝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번 워크숍 주제도 교육과 조직화라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지역운동단체의 조직화라는 것 하고, 우리 같은 교육단체의 조직화가 어떻게 다른가? ‘안양시민대학’이나 ‘마들주민회’나, 청주의 ‘일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개를 혼합시킨 형태를 취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안양시민대학’은 굉장히 많은 회원들을 기반으로 해서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해나가는, 급식사업이나, 생활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들주민회’도 마찬가지고요. 한편으로 보면, 우리의 목표가 지역의 변화에도 있지만, 사람의 변화에도 있는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교육이라는 부분이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조직화라는 부분에 수단으로 사용되지는 않는가? 예를 들면 한글부터 영어, 산수 쫙 프로그램 개설하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실제적으로 교육을 통한 것은 축소되면서 그런 영역들을 확장시키는 것이 맞는가라는 고민이 있는 거죠. 저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어떤 일을 해나갈 수 있는가, 또는 예전에 교육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 개발의 필요성이 있는 거죠. 울해 같은 경우는 대중강좌 형태, 월례강좌 형태로 해서 주민들이 관심을 있을만한 주제나 사회적 이슈들을 월례강좌로 했었죠. 그런 부분이 한 부분이 있고, 또 한 부분은 지역에서의 저소득 주민들의 교육적인 욕구, 생활문화적 욕구들을 주민들이 주체가 되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예를 들면, 난곡 지역이 재개발 되면서 주민들이 아랫동네로 내려왔는데, 윗동네는 공부방이 있는데 아랫동네는 공부방이 없습니다. 거기에서의 아이들의 방치되는 문제가 있는데, 저희가 가서 거기에 깃발을 꽂고 공부방으로 와라라고 하는 방식으로 하면 잘 되겠지만, 조직화라는 것을 고려하면서 일을 한다면, 우선은 지역 현황 파악부터 들어가서 주민들 속에서 결합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거죠.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냐, 저희가 조력자 역할을 하는 거죠.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볼까? 방안이 어떤 것이 있을까 같이 주민들과 논의하는 거죠. 또는 부업이라든지, 기술교육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교육을 매개로 해서 조직화를 해나가는 방편이 될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다른 단체에서도 하고 있는 주민자치센터와의 관계, 관과의 관계 등을 고려할 수 있는데,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문화적인 도움들을 줄 수 있는 축제라든지 등 지역 내에서 대안적인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남부교육센터 홈페이지는 http://www.nambuedu.org/입니다.
(2003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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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도 국가사적 지정운동" - 시흥YMCA를 찾아
인터뷰 : 김상신(총무)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지하철 4호선의 남쪽 종착지는 ‘오이도’이다. 이름에서 나타나듯, ‘오이도’는 ‘까마귀의 귀처럼 생긴 섬’이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이도’를 고작 지하철 역 중에 하나로 인식하고 있지만, ‘오이도’가 국가사적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오이도’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진 ‘암사동 선사주거지’에 버금가는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작년 초에 국가사적으로 지정고시 되었다. 역사책으로만 보아 왔던 ‘조개더미’와 ‘빗살무늬토기’가 바로 이곳 오이도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암사동 유적’은 정부 주도의 사적 지정이었다면, ‘오이도’는 주민주도의 사적 지정이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니까 ‘오이도 사적’은 정부의 무관심으로 방치된 문화재를 주민들의 힘으로 보존시킨 역사에 남을 문화적 사건인 것이다.

‘오이도’는 본섬 전체가 패총으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사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왔다. ‘오이도’의 패총이 지난 60년, 한 고고학자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지만, 이에 대한 보존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수자원공사는 아무런 지표조사 없이 지난 87년부터 시화지구 개발공사를 진행하게 되고, ‘오이도’의 대표적인 패총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포동’ 지역에서 상당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물이 발굴되자,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유물발굴 조사를 벌였지만,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포크레인 삽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신포동’ 유적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시화호 공사는 시화호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선사시대의 유적지도 함께 망가뜨린 것이다. 그런 과정에 90년대 말, 정부는 또 인근 ‘관곡지’라는 곳에 도로를 짓는다는 계획을 세우자, 이때부터 주민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은 더 이상의 파괴를 중지하고 세부적인 조사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결국 그런 노력 끝에 작년 초, 문하재청은 국가유적으로 공식 지정하게 된다. 공식 명칭은 ‘시흥오이도유적’이며 ‘암사동 유적’보다 7배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패총의 의미를 쉽게 얘기하면, 쓰레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쓰레기장을 보면 라면 봉지도 나오잖아요. 그러면 먼 미래의 사람들은 ‘아 이 사람들이 ‘라면’을 먹었구나‘ 하거든요. 마찬가지로 패총도 그 당시 사람들이 조개를 먹고 다 버린 쓰레기더미인데, 조개만 버린 것이 아니라 토기편이라든가, 예전 생활 도구 같은 것을 같이 버리거든요. 조개가 알성이라서 조개와 함께 묻힌 유물들은 시대별로 층층이 남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패총을 보면 선사시대 당시의 생활상들을 쉽게 알 수 있는 거예요. 소중한 문화재인거죠.”

여기서의 ‘선사시대’란 문헌자료가 존재하지 않은 원시시대를 말하는데, 특히 ‘오이도’ 유적에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온돌’과 같이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주거문화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던 선사시대의 역사가 바로 서울 인근 작은 섬에 숨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역사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 정부에 의해 버려질 수밖에 없었을까? 바꿔 말하면, 왜 주민들에 이 지역을 지킬 수밖에 없었을까?

“1999년 말, 오이도 ‘가운데살막’이라는 지역에 도로공사를 하면서 패총이 대단위로 발굴이 됐어요. ‘서울대 박물관’에서 조사를 했었죠. 아무튼, 중요한 유적지로 알려지면서, 일반 언론 방송에 대대적으로 홍보가 된 거죠. 그런데 문제는 발굴된 유물은 ‘서울대 박물관’에서 다 가져가고는 그 지역 자체를 싹 없애버리고 개발을 해버린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구제발굴의 퍼센티지가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도로 공사를 하면서 유물 확인만 하고 역사적인 자료만 남기고 현장은 없어지는, 그런 문제점이 있었던 거죠. ‘오이도’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부는 엄청난 유적지라고 떠들면서도 현장을 파괴시켜버리는, 그런 관행이 계속 되풀이 된 거죠. 그런데 주민들은 이 부분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된 거죠. 유적지라고 한다면, 현장이 보존되면서, 지역의 삶과 연관이 되는 그런 유적지 보존의 방식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 곳에 유물 몇 점 나오고 유적지라는 문서자료만 남고 현장이 다 없어져버린다면, 도대체 어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 하며 반발했던 거죠.”

땅 속에 묻혀 있는 유물을 드러내는 일을 ‘발굴’이라고 한다. ‘발굴’은 인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현장 그대로를 보존한다는 것의 거의 불가능하다. 정말로 보존하려면, 그대로 놔 둬야 한다. 앞에서 말한 ‘구제발굴’이란 도로건설, 택지개발, 해안 매립 등 각종 개발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유물이 발견되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발굴’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구제발굴’이 높다는 의미는 대부분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는 의미이며, 김상신 총무가 지적한 대로 대부분 현장이 파괴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우스개 소리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발굴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는 그만큼 허술하다. 김총무가 지적했듯이, ‘발굴’ 과정의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재 발굴의 주역은 대부분 대학박물관이다. 그러데 대학박물관은 역사적 사명을 띠고 발굴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 자체를 하나의 ‘용역’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어떻게 잘 보존할까가 우선이 아니라 대규모 예산을 어떻게 따낼까, 이름을 어떻게 알릴까에 더 눈독을 들이고 있다. 발굴된 유물을 박물관으로 가져감으로써 이익을 챙기지만, 현장보존을 소홀할 수밖에 없다. 현장보존은 애초부터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김총무의 지적이다. 물론 모든 대학박물관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이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88년 시화지구 개발로 인해 ‘신포동 패총’은 자취를 감추었다. 마찬가지로 ‘소래 패총’도 시화지구 공사로 사라졌고, ‘가운데살막 패총’도 도로 공사 과정에 흔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시민단체와 주민들은 개발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수자원공사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직접 지표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주민들 대부분은 이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분들이죠. 그래서 지역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해요. 주민들은 이 곳에 살면서 예전부터 일상적으로 유물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토기편 같은 것도 줍고, 패총도 확인하면서, 고향 땅이 보존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수자원공사가 자꾸 개발 위주로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마을 젊은이들 중심으로 문화재보존운동을 진행한 거죠. 그 분들이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이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유물을 찾기도 하고, 지표조사에도 참여하게 되고, 그리고 직접 자료수집에 발 벗고 나서게 됐죠. 실제로 10여 편 정도의 삼국시대 유물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신석기 유물’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위해 ‘암사동 유적’을 방문하기도 했고요, 일상적으로 개발 감시자의 역할도 했던 거죠. 공사가 강행되면 온 몸으로 포크레인을 막기도 하면서 문화재보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셨죠. ‘오이도 유적’을 알리기 위한 교육이나 홍보도 소홀하지 않았고요."

‘오이도 어촌계’, 시민단체,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은 ‘오이도 선사유적 보존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대책위 활동은 공동 활동과 더불어 각 참여자들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를테면, 시흥YMCA는 간담회, 토론회 등의 각종 행사와 진정서, 고발장, 보도자료 등의 문서자료를, 그리고 시흥환경운동연합은 생태학습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대외적인 교육․홍보에 힘썼으며, 오이도 어촌계와 주민들은 일상적인 감시자로서, 그리고 오이도를 찾는 탐방객을 대상으로 갯벌과 패총의 안내자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외 시의회와 공무원들과의 대화창구 역할을 했던 단체가 있었고, 자원봉사자들과 유적지 주변의 미화작업을 주도한 단체도 있었다. 이렇게 대책위 활동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잘 돌아갔다.

“당시 사적으로 지정하는 운동을 했던 시민단체와 주민들은 법적, 합리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해 초기부터 사적지적운동을 쭉 했어요. 그 과정에서 주민과 시민단체는 이견이 없었어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주민들은 개발을 하는 과정에 보상을 받고 이주단지로 다 옮기 상태였기 때문에 땅 보상을 통한 사적 이익 창출은 불가능했었습니다. 대부분의 땅이 한국수자원고사 소유였어요. 그러니까, ‘오이도 문화보존운동’이 사적 지정으로 받게 될 보상을 노리고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주민들의 애향심에 의해 발동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다만, 사적 지정 이후에는 사적에서 500m까지는 제한을 받아요. 다른 어떤 개발 행위 제한은 아닌데, 절차가 늦어지죠. 그것으로 인해, 당시 열심히 운동했던 주민들이 간혹 주변 사람들에게 욕먹기도 했죠. 그러나 ‘오이도’는 갯벌도 있고 해서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예요. 연 100만 인원 정도 됩니다. 그래서 그것과 연결해서 좋은 문화관광지로 조성하고자 하는 데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다 동의했다고 볼 수 있죠.”

‘오이도 문화유적 보존운동’에 참여했던 오이도 주민들은 내 고향이 유적으로 보존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뿐이다. 그것으로 인해 관광지로서의 이득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선사시대의 흔적이 파괴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움직였다. 흔히 이런 운동과 대척점에 있던 '보상‘이라는 측면은 발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 또는 시민단체와 주민간의 마찰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가들과 문화재 가치를 놓고 서로 엇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전문가는 발굴된 유물과 그 해석을 통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중요했던 반면, 주민들은 현장의 보존과 조성을 통한 ’생활의 향유‘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전문가들은 현장 보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발굴‘ 그 자체의 일과 그것으로 인한 역사성에 더 관심을 보인다. 더욱이 이런 관점을 부추기는 것은 발굴 과정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발굴은 대부분 수자원공사나 토지공사의 용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문화재 발굴을 하다가 문화재가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공사 주체의 재원으로 용역을 주고,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영역에서는 재원을 낸 공사 주체의 영향력이 발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의 현 주소다. 주민들과 서울대 박물관 팀과 수 없이 싸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이도 유적 보존운동’은 지역 속에 간직된 문화유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이도’의 정체성에 눈을 떠가는 과정이 주민들이 얻은 가장 큰 경험이었다. 또 그런 자각의 산물이 국가사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13만2천 평에 이르는 본 섬 전체의 유적지를 어떻게 복원하고 조성해 나가느냐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부디 유적지 복원 과정이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복원 과정도 주민들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시흥 오이도 유적’은 사적 제 441호이다.

※ 시흥YMCA 홈페이지는 http://www.shymca.org/입니다.
(2003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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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과 환경문화보존은 공존할 수 있는가?"
- 청주 택지개발의 경우 - "생태교육연구소 터"를 찾아
인터뷰 : 박완희 사무국장
작 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운영위원)


오늘은 우리 사회가 첨예하게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개발’과 ‘환경보존’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논쟁은 계속 있을 것이다. 어느 선에서 개발을 허용하고 어떻게 환경을 보존할 것인가? 30년 만에 고속 압축 성장을 해왔던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는 여전히 개발로 인한 이익을 염두하지 않을 수 없고,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정책에도 개발이익을 노리는 땅 투기꾼들이 흔들림 없이 우뚝 버티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허긴, 땅 투기로 인한 졸부들이 천지에 널려 있는 상황에서 ‘나만 손해 본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쉽게 번 돈을 쉽게 쓰는 저 천민성을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아, 부럽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땅을 보유한 원주민들의 처지는 좀 다를 것이다.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번듯한 집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하고 누추하게 몇 십 년을 살았던 그들에게 ‘환경보존’이라는 올가미를 덧씌우며 개발을 억제한다면, 그것은 사유 재산권 침해임이 틀림없다. 원주민과 땅 투기꾼들은 근본적으로 달리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무한정 개발을 허용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는 현명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두꺼비는 연어처럼 모천회귀를 하는 동물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생활하다, 다시 알을 낳기 위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동물이다. 만약 두꺼비의 알 낳는 서식지가 파괴된다면 그들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강원도 남대천을 살려야만 연어가 올라오듯, 두꺼비의 산란 장소를 보존해야만 두꺼비는 살아남는다. 충청북도 청주시 산남 3지구 택지개발예정지구(전체 33만평 규모)에는 ‘원흥이 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원흥이’란 말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예전에 이 곳에 ‘원흥사’라는 절터가 있었다는 게 유력한 설이다. 이 곳에 조그마한 방죽이 하나 있는데, 이 곳이 바로 두꺼비들이 산란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이 택지개발 지구로 묶이면서 조만간 개발과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저희 단체는 자연생태교육을 주로 하는 곳입니다. 올 봄, 이 근처에서 생태교육을 하다가 두꺼비가 알을 낳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 때부터 아이들과 함께 삼삼오오 두꺼비 관찰을 시작했어요. 원래 이 곳은 택지개발 예정지구예요. 개발이 되면 두꺼비 산란처가 파괴될 것이 뻔한데, 저희도 처음에는 두꺼비 산란지만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두꺼비가 다닐 수 있는 길이라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저희가 구호로 내세웠던 것이, “두꺼비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세요”였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두꺼비가 다닐 수 있는 길만으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주셨어요. 왜냐하면 두꺼비 통로를 만든다 하더라도 개발로 인해 주요 산이 다 깎여, 두꺼비 서식지가 사라지는 마당에 길을 만들어준다고 해서 두꺼비가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개발을 하더라도 최소한 방죽을 포함한 2-3만평의 터를 그대로 보존하자는 것이 저희의 입장입니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청주시 산남 3지구는 94년도에 택지개발예정지구로 결정되었지만, IMF 등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5년 내에 택지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오늘에까지 연기되어 왔다. 그렇게 10여 년간, 인위적인 훼손이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었고, 흰뺨검둥오리, 백로, 황로 등의 다양한 새들이 날라 오고, 방죽 주변에는 1급수에서 서식하는 가재, 플라나리아, 엽새우 등의 수서생물과 더불어 반딧불이, 두꺼비 등의 생물이 살 수 있었다. 우연히 올 초, 생태교육연구소 ‘터’에서 자연생태교육을 하던 중, 두꺼비들의 산란을 발견하게 되면서 주변 주민자치위원회, 여러 시민단체들과 자연환경을 보존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추가하자면, 청주는 원래 직지금속활자본이 출토되어 고인쇄문화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서 원래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고 '직지심요', '직지' 또는 '심요'라고 약칭되기도 한다.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보다 약 70여년이 앞선 이 활자본이 바로 청주 흥덕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금속활자 정도의 인쇄문화가 발전된 곳이라면, 그 이전 선행단계라고 할 수 있는 목판인쇄가 활성화됐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목판인쇄에 대한 뚜렷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리 나무가 잘 썩는다하더라도 목판인쇄본이 출토되지 않는 것은 전문가들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 고려 말 원흥사에서 목판인쇄를 통해 금강경이 인쇄되었다는 자료를 발견하면서 원흥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바로 이 원흥사가 ‘원흥이 마을’ 어딘가에 있는 절터를 말한다. 그래서 청주의 두꺼비 산란지 보존운동은 단순히 자연환경만 보존하자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쇄문화의 역사를 살리자는 문화보존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 운동을 “생태문화보존운동”이라 부른다. 이 곳 상황을 잘 모르는 필자의 생각에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다시 작성할지 모르는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개발을 강행하려는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청주가 직지나 금속활자와 같은 고인쇄문화의 메카로서 뿌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곳이 될 수 있는데, 지금 상태에서 묻어버린다면 얼마나 큰 역사문화를 훼손하는 것이냐 라고 청주시에 요구했거든요. 그리고 사실 지금도 발굴조사가 다 끝나지 않았어요. 저희 시민단체에서 한 여덟 개 지점에 시술조사를 요구했고, 이것에 대해 토지공사가 받아들여 여덟 개 지점을 조사하고 있죠. 아직 조사가 다 안 끝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률상으로는 문화제 발굴과 공사가 병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문화제보호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해, 문화제 관련 전문가들은 잘못된 조항이라고 얘기합니다. 더군다나, 공사를 하다가 문화제가 나오면 그것에 대한 보존을 시행업체가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개발업자들은 문화제가 나오면 골치 아프니까 문화제가 나와도 덮어버리는 거죠. 이런 부분은 정말 잘못되어 있죠. 문화제의 근거가 나오면 국가나 자치단체에서 보존을 해야 하는데, 개발하는 사람이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개발하는 사람이 보존하겠습니까? 법률도 문제가 있는 거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개발이 뭐길래 두꺼비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역사의 현장을 묻으려 하는지.......당장의 개발이 우리 세대가 살아남기 위한 절제절명의 과제가 아니라면, 어떤 선택이 우리에게 더 많은 이익을 남길 것인가를 신중하게 곱씹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청주시 산남 3지구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이 곳에 사는 주민들은 크게 두 부류예요. 다수는 토지공사에 땅을 팔고 나가신 분들이죠. 나머지 분들은 토지공사에 보상을 제대로 못 받은 분들인데, 지금도 남아서 행정권 보장 투쟁을 하고 계산 분들이예요. 이미 나가신 분들은 장기간 계획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개발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고, 지금 남아 있는 분들은 무조건 개발해서는 안 되고, 자연환경도 보존을 해야 하고, 그리고 보상을 못 받았기 때문에 생존권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개발은 못한다고 라며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는 분들이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주자 분들과 일정정도 대립적인 갈등이 있었는데, 이 분들도 저희들이 얼마 전에 기자회견을 통해서 법원 검찰청의 권위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더니, 이런 부분에 대해 동의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현재 개발 지역에 남아 있는 가구 수는 14가구다. 이 분들이 순수한 동기에 의해 이 곳을 지키고 있다고 볼 수 없지만, 최소한 자연환경이 지켜지길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 떠난 사람들은 개발에 대한 욕구가 넘친다. 그러나 최근 법원․검찰청이 택지개발 지구 내에 건물을 새로 짓겠다고 밝히면서 택지개발계획이 수정되었고, 차츰 이주한 주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법원․검찰청이 아파트가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애초의 계획을 바꿔, 대부분의 아파트를 산 쪽으로 옮기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권위적인 발상은 여전히 그 위용을 떨쳤고, 택지개발계획 마저 바꾸고 말았다. ‘법과 정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은 떠나라?

이미 대규모 택지개발을 완료한 주변 주민들은 이 곳만이라도 보호되길 희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산남 3지구만이라도 자연과 개발이 조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분평동 주민자치위원회와 지역주민회 등은 여러 시민단체와 주도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고 있다. 개발 예정 지구 주변으로 70여 개의 ‘현수막 이어달기’를 비롯해 ‘작은 음악회’, ‘서명전’ 등 부당한 개발의 내용을 주민들에게 호소했고, 많은 시민들이 자녀와 함께 이 곳을 방문할 수 있도록 생태교육도 꾸준히 실시했다. 이런 노력으로 청주시민들은 생태문화보존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익을 추구하는 토지공사와 권위를 철회하지 않는 법원․경찰청으로 인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생태론자의 입장에서는 이 일대를 다 보존해야 하는 것이 원칙일 겁니다. 그러나 저희가 이 원칙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도 있고, 지역주민들의 요구도 있는데, 무조건 지역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무조건 생태공원으로 만들어라, 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저희들이 조율, 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이 정도만 남겨야 한다고 요구를 했던 거죠. 여기에는 측정할 수 없는 생태적인 가치와 문화적인 가치가 공존합니다. 과연 당장의 개발이 지금 세대와 다음 세대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묻고 싶습니다. 환경의 문제는 크게는 지구의 문제이고 작게는 동네의 문제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지속가능한 도시, 환경친화적인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연생태를 보존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자산을 우리가 함부로 써도 되는 걸까요? 합리적인 결단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미 택지개발지구의 아파트 분양은 끝난 상태다. 모든 계획이 마무리된 상태에서 계획을 수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토지공사의 입장이다. 개발 승인의 절차를 보더라도 경기도의 승인만 남았다. 물론, 택지개발의 규모가 100만㎡가 넘게 되면, 중앙의 도시계획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게 되어 있는데, 산남 3지구가 이 규모를 약간 넘는다. 그래서 중앙의 심의를 거치지만,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심의는 무난히 통과될 것을 보인다. 이런 약간의 절차를 넘기면, 공사를 바로 시작된다.

흔히 개발론자들은 환경단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뒤늦은 반대, 이제 와서 뒷북 치냐!’라고. 오래 전에 계획된 내용을 뒤늦게 반대한다는 뜻이다. 얼핏 들으면, 타당한 비판으로 보인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자. 택지개발계획을 발표하기 전에, 주민들의 의견을 얼마나 들었는가? 혹시 경제적 논리에 의해 형식적으로 하지 않았는가? 사전 지질조사, 또는 생태조사는 철저히 했는가? 주민들에 의하면 환경부 보호종인 맹꽁이와 구렁이가 서식하고, ‘원흥사 절터’가 있었다는데, 이에 대한 조사는 철저히 했는가? 그리고 주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는가? 두꺼비의 산란지, 법원․검찰청의 이기주의, 목판인쇄 출현 가능성, 주민편의 시설의 부족 등, 이 모든 정보를 주민들에게 제공했는가? 마지막으로 주민들의 의견을 얼마나 반영했는가? 뒤늦은 뒷북 타령은 너무나 식상한 개발론자들의 논리에 불과하다.

만약 지금의 계획대로 택지개발이 이루어지면 2-3만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 곳에 두꺼비와 반딧불이, 맹꽁이와 구렁이가 서식한 사실도 모를 것이고, 고인쇄문화의 숨길이 묻어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를 것이다. 최근까지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정을 요구하며 서명을 했다는 사실도, 수 천 명의 시민들이 두꺼비를 살리자며 현수막을 매달았던 사실도 기억 속에 잊혀질 것이다. 포크레인은 자연생태와 역사문화를 한 순간에 삼켜버리고 말 것이다. 아이들의 애절한 눈물도 삼켜버리고 말 것이다. 아래는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이 아파트를 짓는 모습을 연상하게 되었다는 한 초등학생의 청주시장에게 쓴 글이다. 그들의 외침이 무시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안녕하세요. 시장님?
시장님 원흥이 방죽에 가서 올챙이와 두꺼비 새끼를 보았어요.
올챙이였을 때는 너무 많아서 한 주먹씩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 아파트를 짓는다면서요?
그러면 새들과 두꺼비가 모두 죽잖아요.
그러니까 아파트를 짓지 말고 동물들을 살려주세요.
또 이 원흥이 방죽을 살려두고 많은 아이들이 오다보면 두꺼비 개구리 축제가 될 수 있잖아요.
또 다음에 가봤는데 두꺼비들이 산으로 올라가는데 뱀이 옆에서 숨어서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았어요.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는 것이 꼭 어른들이 여기를 아파트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요.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른들이 원흥이 방죽을 없애는 것은 당연한 것도, 되는 것도 아니예요. 그러니까 차라리 두꺼비가 살 수 있도록 숲으로 만들면 더욱더 좋잖아요........
복대초등하교 3학년 여지선 올림

※ ‘ 태교육연구소 터’ 홈페이지는 http://www.ter.or.kr입니다.
(2003년 시민자치정책센터 김현 운영위원 작성)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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