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대안, 지역운동으로서의 생협운동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1. 들어가며
어제 세계화의 의미나 식량주권에 관해 좋은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그런 논의들을 심화시키는 자리에 이렇게 서게 되서 굉장한 부담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제게 주어진 세 개의 키워드인 세계화, 지역운동, 생협운동, 하나하나가 굉장히 크고 중요한 주제라서 그 부담은 더 커지는 듯합니다. 이 부담감을 놓치 않으면서 부족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부분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일단은 어제 많은 얘기를 나누셨을 세계화에 관해 얘기를 하려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는 세계화, 지역화라는 사안에 관해 일정정도 공감이 있어야 지역에 관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생협운동을 잘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지역운동을 중심으로 생협운동의 가능성을 얘기하려 합니다.
2. 세계화와 지역화, 동전의 양면
세계화, 언제부턴가 이 단어를 쓰지 않으면 그 무엇도 설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평상시엔 잘 신경도 쓰지 않던 다른 나라와의 무역협상이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건, 이제 그런 협상이 우리의 일상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한편에서는 세계화의 가능성과 이득을 강조합니다. 즉 세계화가 국경을 넘나드는 교역과 이동을 활성화시켜서 경제를 활성화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화가 1세계와 3세계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건전한 경제를 파괴하는 대재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세계화에 대한 ‘당위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계화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에서는 금융자본과 초국적 산업자본이 국경을 넘나들면서 약소국에 개입하고 이득을 꾀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동노동과 착취노동이 제3세계의 대중에게 죽음과 가난, 폭력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분명 세계화의 부정적인 면이고 ‘허울뿐인 세계화’라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세계화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초국적 자본이나 그들을 대변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는 아닌, 자본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운동도 1999년 시애틀 이후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움직임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진정한 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한 연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요즘 많이 얘기되는 공정무역fair trade도 이런 흐름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각주1) 그리고 실상 인류문명은 세계화되면서, 즉 서로 다른 문명들이 충돌하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세계화는 인류 역사의 발전방향이기도 합니다.(각주2)
더구나 이미 자본과 상품의 세계화는 상당 부분 진행되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본과 상품의 세계화를 중지시키고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그 부분은 많은 고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단지 세계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세계화의 대안이 진정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지역에 독립적인 규모의 경제를 수립하는 것인가? 그런 방안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자본과 상품의 세계화의 대안은 지역화인가? 라는 물음은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진지하고 깊은,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의 대화를 요구합니다.
제가 조금 자극적인 단어일 수도 있는 ‘당위적인’ 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현재의 상황이 간단한 노력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기에 결코 만만치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의 삶 속에는 세계화의 영향이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간단한 먹거리만 살펴봐도 이제 국내(지역이 아닙니다!)에서 생산된 재료만을 가지고 국내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각주3) 먹거리만이 아닙니다. 노동환경이나 생활환경 등에 관한 권한들이 점점 국가기관이나 초국적기업, 초국적기관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각주4) 따라서 지역을 강화하자는 주장만으로는 사회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없고 여러 영역의 다양한 활동이 필요합니다.
또한 세계화(globalization)는 세방화(glocalization, globalization+localization)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황사가 중국에서 한반도로 국경을 넘어 불어 닥치듯이, 과거의 국민국가(nation-state)체제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국가의 능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제 각 지방이 중심이 되어 세계화 시대에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지역혁신이니, 지역 차원의 공공서비스 강화니,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니, 거버넌스니, 이런 얘기들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건 전통적인 복지국가 체계나 국민국가 체계가 지방정부 중심의 공공서비스 체계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 건 전혀 아니지만요, 지방화의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본과 상품의 세계화만이 아니라 이런 지방화에서도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때로는 지역의 억압적인 노동관행이나 생활방식이 지방의 고유함이나 특수성으로 포장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각주5) 그리고 자칫 지역공동체의 폐쇄성이 강화될 경우 ‘그들만의 공동체’로 닫혀서 ‘운동’으로서의 방향성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계화의 문제점은 지방화의 문제점의 동전의 양면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세계화의 대안으로 지역화를 주장하는 건 때론 위험하기도 합니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를 주장하니 아마도 제 입장이 뭔지 궁금하실텐데요, 실은 딱히 입장이 없습니다.^^;; 그건 잘 몰라서 그런 면도 있고, ‘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무엇이 무엇이라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게 위험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운동의 방향성은 그 운동에 참여해서 이끌어가는 주체들의 몫이라고 전제하면서, 제가 한쪽 발을 담구고 있는 지역운동에 기초해서 앞으로의 운동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으면 좋을지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 지역이란 무엇이고 지역운동이란 무엇일까?
제가 생각하기에 세계화든, 지역화든, 현재 진행되고 있는 흐름에서 가장 문제점은 바로 ‘자기결정권의 상실’입니다(여기서의 ‘자기’에 인간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생명체도 포함시킨다면 이 상실감은 훨씬 더 깊어질 겁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먹거리, 놀거리, 일할거리 등 모두가 자신의 결정권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대형마트가 점점 재래시장을 대체하면서 한 가지 상품에 수천 km의 이동거리가 포함되고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쉴새없이 TV가 제공하는 오락거리들은 우리가 진정 무엇을 하며 노는 걸 즐기는지를 잊어버리고 자극적인 욕망에 몸을 맡기게 합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일터는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타율적인 노동공간이고, 무한경쟁의 논리가 도입되면서 노동규율은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결정권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지역은 이런 흐름을 강화시키는 공간이기도 하고 이런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지역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전에 본 <GO>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팔을 쭉 뻗어서 그릴 수 있는 그 공간이 진정 자신의 공간이라고. 그 말을 바꾸면, 내가 직접 걷고 보고 만지며 다니는 공간만이 지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울지역이라는 말은 가능하지 않지요. 더 좁혀서 제가 사는 과천이라는 곳도 제가 지역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심심하면 산책을 많이 하는데도, 아직 과천의 행정구역을 다 돌아본 건 아니니까요. 따라서 행정구역은 지역이 될 수 없고, 내 마음에 그려지는 일종의 심상(心想)이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역은 유동적입니다. 내가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며 파악할수록 지역은 넓어지고 움직이지 않고 같은 길만 오가면 지역은 그대로이고, 때론 좁아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직접 눈으로 봤다고 해서 지역을 다 아는 건 아닙니다. 그런 부분적인 단면들을 모아서 전체를 구성할 때 지역사회가 온전히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직접 마을지도를 그려보거나 제작된 지도에 자기 마을을 그려보는 게 지역에서 일을 시작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서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이런 기초작업이 반드시 필요하겠죠.
그리고 돌아보면 지역사회에 무엇이 있는지가 보입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것들만 따져보면 지방정부와 여러 가지 공공기관이 있을 터이고, 공장이나 기업체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시민단체들도 존재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주민들이 살고 있을 것이구요. 이런 다양한 주체들이 한데 어울려 지역사회를 움직이고 있습니다.(각주6) 따라서 지역사회를 바꾸려면 이런 다양한 지역의 주체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이런 주체들이 다 우리 편이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죠. 따라서 두 가지 방법이 필요합니다. 이런 주체들과 협상/거래(bargain)하거나 토론/설득(deliberation)해야 할 겁니다. 운동은 어떤 가치지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그런 가치지향과 방법을 가지고 다양한 주체들과 접촉을 하게 됩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가치는 개발인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더 강한 듯 합니다. 다양한 주체들을 묶고 있는 강력한 가치가 ‘개발’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방정부나 기업, 지역토호 등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생태’나 ‘여성’, ‘평화’ 등의 가치는 지역사회에서 쉽게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토론/설득으로 공감을 얻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소속된 단체 이름만 듣고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리라 미리 넘겨짚고 자기 얘기만 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이런 경향은 소위 진보적인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더구나 지역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곤 합니다. 소위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학연, 혈연 등이 동문회, 향우회, 종친회 등을 통해 은근히 힘을 발휘합니다(농촌지역의 경우 어떤 사안에 관해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면 고모에서 큰아버지까지, 동문선배에서 후배까지 전화가 쭉 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사람들을 거의 모을 수 없다고). 거기에다 정부지원을 받는 관변단체에서 자영업자들의 다양한 협회들이 지역사회에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합리적인 협상이나 토론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겠죠.
그렇다면 지역운동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지역에서 가장 보수적(이념이 아니라 그 관습적인 면에서)이면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주민들입니다. 따라서 주민의 마음을 얻고 주민을 움직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제 아무리 지방정부나 기업이라 하더라도 주민들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면 지역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역운동은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지리산생명연대>라는 곳에서 도로확장반대운동을 해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환경단체임을 분명하게 연상시키는 ‘생명연대’라는 단체이름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지리산생명연대>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서 판단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당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충분히 설득하고 토론해서 그들 스스로 판단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다수의 환경운동이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건 지역주민들과의 교감이나 공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역운동은 직접 몸으로 뛰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지역사회의 대안적인 발전모델을 구성할 때 자신의 목표에 한 걸음씩 다가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공감을 얻으며 주체의 범위를 확대하고, 운동의 방향성을 현실 속에서 잡아나갈 때 지역운동의 성공이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들이 강력하게 연대하듯이, 지역운동도 지역 내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묶고, 때로는 입장이 다르더라도 설득이 가능한 사람들로 생각되면 계속 만나고 접촉해서 같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양성 속의 연대’가 추상적인 구호로 그치지 않으려면 말이죠.
생협운동을 논하는 자리에서 왜 이렇게 지역운동을 길게 얘기하고 그것의 어려움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운동을 펼친다는 것이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역은 분명히 세계화의 시대에, 자본과 상품의 세계화를 거스르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생협운동이야말로 지역운동에 적합한 조직일 수밖에 없고 지역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운동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생협운동이 지역운동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를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생협운동은 지역운동의 토대가 될 만큼 지역사회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나, 생협운동은 소수 활동가 중심의 운동방식이나 사업운영방식을 벗어났나, 생협조직에는 조합원들의 자발적고 실질적인 참여가 보장되고 있나, 지역사회에서 생협은 폐쇄적인 조직이 아닌 개방적이고 능동적인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나, 생협은 지역사회의 다른 단체들과의 네트워크를 확장시켜나가고 있나, 등의 질문을 스스로 던져봐야 할 겁니다.(각주7)
4. 지역사회에서 생협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아무래도 제가 생협운동을 직접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제가 잠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여성민우회 생협도 일본과의 교류가 잦은 듯합니다. 일본의 클럽룸이나 데포에 관한 호기심도 많으신 듯하구요. 사실 제가 직접 일본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쪽은 잘 모릅니다. 그러니 일본쪽 시스템의 문제가 뭐일 것 같고 우리와 뭐가 안 맞고 이런 얘기들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에 제가 대충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한국사회를 중심으로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심심하니까 잠깐만 얘기해 볼까요? 만일 한국에서도 그런 공간을 마련하면 여러 가지 클럽들이 자연스럽게 활성화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외국의 좋은 모델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현재 소속된 조합원들이 어떤 욕구를 품고 있는가를 먼저 조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생협이 지역복지를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해 가고 있고, 워커즈 콜렉티브를 통한 대안적인 사회경제도 활성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생협의 움직임은 분명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가지지만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흐름이 한국사회의 남성 중심의 정규직 노동구조와 맞물리면서 여성노동의 제한이나 저임금화 현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워커즈 콜렉티브에 속하거나 생협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노동권에 관한 논란은 일본사회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장점을 수용하려면 단점에 대한 고민도 함께 받아 안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조금 전 얘기한 욕구조사와 관련해 조금 더 얘기를 해보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조합원이 아니라 오히려 활동하지 않는 조합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나 면접조사를 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조합원(활동가)와 적극적이지 않은 조합원들을 구분해서 역량강화(empowerment)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적극적인 조합원들은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구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할수록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됩니다.(각주8) 적극적인 조합원들에게는 조합원 개인보다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리더십 교육을 병행해서 풀뿌리 지도자로 성장시키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민주적이고 비폭력적인 의사소통방법이나 의사결정방식을 함께 공부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이지 않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는 일종의 수다모임을 조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욕구조사를 바탕으로 조합원들이 실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에서 조금 더 큰 사안으로 서서히 의식을 확대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이런 확대과정이 바로 생활정치라고 생각합니다.(각주9)
또한 일방적으로 어떤 가치를 주입하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이 서 있는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조합원들이 어떻게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총체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가족이 직면한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개인 또는 가족이 개별적으로 대응하며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족이 공동으로 대처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위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필요성이 제기되는 듯합니다. 세계화 시대에 문제인식이나 사유의 틀은 국제적이어야 하지만 문제해결은 개인이나 한 가족에 의존할 수 없고 공동체적인 연대를 필요로 합니다. 가족을 보호하려면 그 속에 머무르길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확장시키고 사회적인 영역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같이 학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생협에 관한 얘기는 이쯤 해두고 외부의 사람으로서 생협운동이 지역운동과 접목될 수 있는 몇 가지 단초들을 제안하고 얘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사실 지역경제의 재구성에 관한 총체적인 그림은 호지가 이미 제시했다고 봅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면,
“지역 소비를 위한 지역 생산을 장려함으로써 지역공동체들은 세계화 경제의 질곡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먹을거리는 건강에 더 이롭고, 낭비적인 포장과 수송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돈이 지역사회 안에 머물고 생물학적 다양성이 커지고 시골생활의 활기가 되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는 ‘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은 농민과 소비자를 직접 연결시킨다. 10개 이상의 나라에 생겨난 ‘레츠’(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s)는 상품과 서비스를 돈 없이 거래할 수 있게 한다. 영국만 해도 이미 400개가 넘는 레츠 조직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생산품 사기’ 캠페인은 작은 사업체들이 심지어 엄청난 보조금 혜택을 누리는 기업들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캠페인은 돈이 지역경제로부터 ‘새나가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값은 더 싸지만 멀리서 생산된 상품을 구매할 때 따르는 감춰진 비용환경과 지역공동체가 치르는 대가에 대해서 알려주는 데도 보탬이 된다…또한 지역공동체가 운영하는 학교들은 어린이와 학부모로 하여금 그들의 공동체에 보다 큰 소속감을 갖게 하고, 지역에 절실히 필요한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작은 도시와 마을의 힘을 키우는 데 기여한다.”(호지/ISEC. 2002. 『허울뿐인 세계화』, 15~16쪽).
이제 조금 더 상세하게 논의해 보면, 저는 생협운동이 교육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현재 한국사회에서 주부나 가족이 가장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이 점은 일본사회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에서는 생협이 교육에 관심을 쏟으며 교육활동센터를 건설하는 등 교육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습니다.(각주10) 일본의 시민운동을 연구한 한영혜의 글은 그런 점에서 한국의 생협운동이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학교 또는 교육전문가 집단이 아닌 생협 조직이 주도하는 교육운동의 의의는 바로 이런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추진하는 ‘학교와 지역사회 및 가정의 연계’는 자칫하면 학교가 가정과 지역사회에 더 많은 협조를 요구하는 결과가 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거꾸로 이른바 지역유지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행사나 강화를 위해 학교와의 관계를 이용하는 문제도 좀더 빈번히 발생할 수 있다. 시민조직인 생협(쓰루오카 생협 측의 입장에서는 시민조직이라는 용어보다는 대중조직이나 민중조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음)이 전개하는 지역교육운동은 지역에서 자본의 논리에 지배받지 않는 대안적인 사회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이에 기초한 교육혁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급진적인 성격을 띤다.…이것은 곧 교육이 단지 조합원 육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청소년이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논리에 대항하여 주체로서 ‘살아가는 힘’을 획득할 수 있게 한다는 교육목표의 실현이 결과적으로 조합원의 육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한영혜,, 275~276쪽)
그런 점에서 생협운동과 전교조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지역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전교조만큼 중요한 조직이 없는데도, 그 조직이 아무런 힘도 못 쓰고 영향력을 상실하거나 폐쇄적인 이익집단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 전교조와 상호작용을 하며 방향성을 잡아나갈 단체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최근 ‘학교급식’에 관한 관심이 높은데, 아이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만이 아니라 건강한 교육내용을 습득하게 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저도 구체적인 방안을 찾지는 못했지만 함께 고민하다보면 좋은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실업을 가져오는 시대에 생협운동이 지역운동의 토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은 ‘지역화폐’ 또는 ‘지역교환무역체계(레츠)’ 또는 ‘사회경제체제’(각주11)의 구축이라고 봅니다.
1996년부터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지역화폐운동은 이미 30개를 넘을 정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전의 <한밭레츠>처럼 지역사회에 자리를 잡은 곳도 있습니다. 아마 생협에서도 이런 부분을 고민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이것이 필요하니까 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위험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지역화폐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내부역량이 이것을 담당할 수 있을 만한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합원들 대다수가 지역화폐체계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면, 지역화폐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각주12) 그러니 내부 합의를 먼저 이끌어내는 게 반드시 필요하고 그 과정은 아주 장기적인 설득을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앞에서 얘기한 교육과도 연관된 문제인데, 조합원들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아이들의 지역화폐를 구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역화폐를 하다보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경제관념을 익히게 되고 지역사회도 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되거든요.(각주13)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어른들도 관심을 가지며 서로 연결되게 될 거구요. 그런 것에 기반해 어른들의 레츠를 시작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단순히 개인과 개인이 서로 도울 뿐 아니라 지역의 소규모 가게들과 연합해서 지역화폐망을 구축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런 지역경제망이 형성된다면 지역경제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되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대형마트의 독점 현상을 견제하면서 소매상들도 자연스럽게 활성화 될 겁니다.
특히 생협이 주부들의 공동체로서 적극적인 매개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생협은 생활의 가장 기본인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지역화폐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단지 소속된 조합원들만이 아니라 지역의 실업자나 노동이 어려운 분들에게도 지역화폐는 생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푸드뱅크>활동과의 결합도 가능합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차원의 노력들은 지역사회의 복지에 관한 확장된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남성/여성, 제도정치/생활정치 등의 구분이 분명한데, 이런 노력들은 그런 구분선을 지우는 역할도 하리라 생각됩니다. 즉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운동세력들이 힘을 모으는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각주14) 그리고 먹거리 정치를 중심으로 이런 네트워크가 실제로 시도되고 있습니다.(각주15) 또한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기업이나 공공기관, 대학 등이 보육시스템을 갖추고 지역주민들에게 그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펼치며 새로운 연대를 모색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5. 나오며...
요즘 드는 생각들을 그냥 주절주절 떠들었습니다. 생협은 지역사회/지역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촉매제라는 말이 암시하듯 새롭고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어렵습니다. 특히 자본과 상품의 세계화라는 시대에서는 어느 한 부문운동의 힘만으로는 그 무엇도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야 하고, 그 뭉쳐진 힘들이 지역사회만을 중심에 놓고 고민하지 않고, 세계를 고민하면서 지역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잠재력이 살아나리라 봅니다.
※ 각주
1. “생협의 목표는 기존의 산업질서와 그 가치체계에 복종하지 않으며, 자립적이며 생태적인 자급사회라는 새로운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생협은 이런 점에서 반지구화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그러나 생협이 공정무역과 만나게 되면서 생협은 대안적인 지구화의 단서를 제시하는 운동으로 발전한다. 즉 제3세계의 민중/여성과 제1세계의 여성 소비자가 지구적인 호혜적 관계망을 구축함으로써 ‘안전 식수에 대한 밀레니엄 발전 목표’와 같이 유엔이 국가의 과제로 제시한 것을 민간의 힘으로 이루어내고 있음은 물론, 초국적 자본에 빼앗긴 식량주권을 초국적 수준에서 회복해 가고 있다.”(김정희, “필리핀 네그로스 지역의 공정무역과 여성”. 『여성학논집』 제 23집 2호, 132쪽)
2. “내가 이런 역사적인 비유와 숙고를 전개한 이유는, 세계화를 문화적인 궁핍과 빈곤을 생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이다. 기술적 변화의 편재성과 속도의 결과로 인간의 호기심이나 창조성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할 이유는 없다. 전 지구적인 사회․경제적 통합에 의해 만들어질 세계 문화는 로마에서 번성했던, 이상한 동양의 신전으로 출현했던 문화에 비하면 훨씬 다양한 색채를 갖게 될 것이다. 그 문화는 대부분의 서구와 아시아 국가들에 의해 오늘날 제공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개인적 다양성의 공간을 허용할 것이다.”(리차드 로티, 2006. “철학과 문화의 혼성화”. 『지식의 지평』, 40쪽)
3. “현재 우리는 먹을거리의 75% 이상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소비한다. 이 사실은 우리가 범지구적인 먹을거리 시스템에 소비자로 편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윤형근, 2006. “먹을거리의 공공화와 새로운 지역자립운동”. 『초점과 대안』. 117쪽)
4. “지역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국가와 국제적 차원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거대기업의 독점시대에 ‘지역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는 지역공동체를 매우 취약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무력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풀뿌리 조직이 다국적기업과 초국가기관의 손아귀에 엄청난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럽의 많은 녹색주의자들은 유럽연합과 더불어 권력이 지역분산화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서 국민국가의 해체에 기꺼이 찬성하고 있다.”(헬레나 노르베리-호지/ISEC 지음. 이민아 옮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