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꿈 -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 ①
“풀뿌리, 정치권력, 제도가 빚은 환상의 작품”
작성 : 김현(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참여예산. 어찌 보면 식상한 주제를 다시 꺼내들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정부까지 나서서 참여예산을 권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광주북구, 울산동구, 대전대덕 등을 비롯해 전국 30여 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참여예산을 조례로 제정해서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참여예산제도는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제도로 다가와 있고, 지금도 참여예산에 대한 관심의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뿐이랴? 전 세계 어느 대륙을 가도 포르뚜알레그리의 흔적이 투사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뚜알레그리를 다시 짚어보고자 하는 것은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제가 가진 활기 넘치는 에너지와 역동성으로 인해, 여전히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임으로써 우리에게 전달해주고픈 이야기보따리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2003년부터 시작된 광주 북구청의 참여예산을 우리나라 원년으로 삼을 수 있다면, 5년째를 맞이하는 한국식 참여예산을 제대로 바라보고 평가해보면서 비어 있는 공백을 발견하고 채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참여예산제도로 유명한 브라질 포르뚜알레그리. 1988년, PT(노동자당)의 올리브 두트라가 포르뚜알레그리 시장으로 당선된다. 당시는 브라질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25년간의 독재정권이 1985년에 끝났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은 시기에 좌파인 PT가 집권하게 된 것은 그리 놀랄만한 사건도 아니지만, 세계가 격찬한 주민참여예산이 바로 그 시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민들은 좌파정권 두트라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정부는 전체 시예산의 98%를 경상적 경비로 소비할 만큼 시민들의 요구사항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새로운 좌파정권에게 새로운 통치를 원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예산의 분배와 직결된 문제였다. 사회적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고, 사회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예산 2%만으로는 그것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권력을 손에 쥔 두트라의 입장에서도 많은 고민이 뒤따랐을 것이다. 결국 두트라는 시민들과 함께 해결 방안을 강구한다. 현재 주지사 비서로 있는 우비라탄 드 소우짜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다.
“두트라가 시장(1988년 당선)이 되기 전 정부는 공무원들의 월급을 인상시키는 등 전체 예산의 98%를 경상적 경비로 써버렸다. 그 당시 시외 지역에는 기본 인프라가 깔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올리브 두트라 시장에게 그런 인프라를 요구했지만,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호소를 들어줄 수 없었다. 그래서 군중과 토론하는 과정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 아이디어가 참여예산제도이다."
주민참여예산은 이렇게 태어났다. 시민들에게 귀를 기울였고 시민들로부터 답이 나왔다. 이미 시민들은 87년부터 시정부와 예산편성에 대한 논의를 해왔고, 민주적인 예산편성을 요구해왔다. PT는 이러한 시민적 요구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PT는 “권력을 시민에게” 주어야 한다는 본질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요구는 PT의 집권 방향과도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해서 1989년부터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주민참여예산이 시민들로부터 나오고, 19년이 지난 현재까지 탄탄하게 제도가 유지된 주된 이유는 브라질의 바닥 공동체, 즉 풀뿌리운동이 저변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60년대 개발독재가 브라질 경제를 급속도로 발전시키는가 싶더니 70년대 들어 성장 속도보다 더 빠르게 하락하게 되면서 사회 전반적인 변화의 요구가 거세게 불어온다. 특히 페다고지나 가톨릭 바닥공동체 운동의 확산은 좌파의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게 되는데, 예컨대 전통적인 공산당이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시스템이라면, 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운동적 흐름이 저변으로 퍼지게 된다. 사상이나 이념보다 생활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분권, 민주주의, 자치 등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게 된다. 반독재타도라는 단일한 깃발도 인권, 생태, 여성 등의 다양한 전선으로 나뉘고 각 계층의 다양한 요구가 확산되면서 독재정권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형성된 풀뿌리의 힘은 주민참여예산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종합하여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활성화된 풀뿌리, 권력을 해체하려는 정치권력, 그리고 민주적 기재로 작동되는 제도,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잘 맞물린 톱니바퀴”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솔직히 세 가지 요소 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자신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풀뿌리는 정치권력을 움직였던 힘을 가졌다는 것이고 정치권력은 모든 결정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자치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풀뿌리와 정치권력이 제도를 디자인했고, 그런 제도가 참여를 더욱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요소는 상호 촉진작용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포르뚜알레그리의 참여예산은 입법화되지 않은 제도다. 제도 자체도 주민들에 의해 결정된다. 예산주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각 지역의 평의원과 대의원들은 현재적 조건에 맞게 제도를 다시 디자인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지난 19년 동안 제도를 운영하면서 미세한 변화들이 있어 왔고, 제도의 융통성이 어떤 것이라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포르뚜알레그리의 주민참여예산은 ‘제도화되지 않은 제도’라고 명명할 수 있고, 제도화의 문제는 다소 부차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정치권력, 즉 PT가 풀뿌리 활성화에 기여한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 당 활동가들이 바닥으로 내려가 주민들을 조직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과정은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20여 일간 현지를 방문하면서 만난 주민들은 대부분 PT 소속이었을 만큼, 참여예산 성공을 위한 PT의 노력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당원이면서 활동가인 주민들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집권전략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88년부터 2004년까지 16년 간 포르뚜알레그리를 집권한 경험은 브라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설이 되었다.
거버넌스 모델로 거론되는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은 우연찮게 성공한 제도가 아니다. 참여예산을 통해 내 삶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서로간의 신뢰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런 믿음과 신뢰는 세 가지 요소, 즉 풀뿌리와 정치권력, 그리고 제도의 상호작용이 빚어낸 작품이기도 했다. 2004년 선거에서 정당 간 연합에 의해 PT는 집권에 실패했다. 참여예산의 철학과 정신이 다소 왜곡되어 가고 있긴 하지만, 주민들은 ‘꿈은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주민들은 또 어떠한 작품을 만들어낼지, 앞으로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