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2005년 1월17일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얼마 전 환경운동연합의 산하 단체인 에코생활협동조합(이하 에코생협)이 기업에 친환경공산품을 강매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KBS <9시 뉴스>가 한국수력원자력(주)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기업을 감시해야 할 환경단체가 기업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고 보도하자, 소식을 접한 많은 시민들이 분노했고 에코생협의 자유게시판에 비난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책임을 지고 최열씨는 이사장직을 사퇴했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해 KBS가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미디어를 통해 걸러졌기에 분명히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미디어가 사실을 왜곡했다는 ‘재현방식’의 문제를 넘어서 현재 한국사회 ‘운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시민단체와 기업 사이에 비판적 거리가 필요하다는 ‘당위적인 목소리’를 넘어서 더 근본적인 고민 역시 필요하다.
일단 이번 일은 우연히 터진 사건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환경재단과 에코생협이 ‘환경이 건강이다’ 공개강연회를 열기 위해 기업의 협찬을 받는 게 옳은가?, 환경재단이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수익의 1만분의 1을 유치하는 ‘만분 클럽’을 추진하는 게 옳은가?(참고로 최열 총장은 2003년 2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기업을 1만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에코생협이 가장 불만을 느끼고 억울해 할 점은 이번 사건이 친환경공산품을 보급하려는 사회적(또는 생태적)으로 올바른 ‘의도’에서 나왔다는 점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도 때문에 그런 판매방식이 더욱더 잘못되었다고 본다. “어떤 방식으로 보급했다”가 아니라 “몇 개를 팔았다”에 중심을 둔다면, 그 운동이 생태운동일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식을 사용해도 좋다는 생각은 ‘도구적 합리성’을 따르는 전형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은 생태적 사유가 가장 철저히 배격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면, 과연 그 운동이 운동일 수 있을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올바름만을 무기로 운동을 벌이는 것은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다. 상대방은 온갖 술책을 쓰며 압박해오는데, 정당한 무기만을 들고 싸운다는 건 상당한 희생마저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과 힘듦,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기에, 그런 과정을 통해 이루는 작은 성과이기에 운동은 사회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효율적이고 빠른 목표 달성’은 아깝지만 버려야 할 대표적인 운동방식이다.
사실 위기의 근원은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002년 에코생협이 출범할 당시, 이미 여러 생활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환경운동연합이 별도의 또 다른 단체를 만들며 운동을 ‘확장’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2003년 2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최열 총장 스스로도 YMCA를 예로 들며 “YMCA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사업구조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라며 “사업을 지나치게 하다보면 운동조직이 사업조직의 악세서리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에코생협을 시작할 2002년도에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괜찮지만 남은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남을 비판하는 잣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면죄부’ 또한 아깝지만 버려야 할 운동방식이다.
또 운동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방면에서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실현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도 항상 그런 유혹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문어발식 확장’은 운동을 뿌리내리게 하고 내실(內實)을 찾는 데, 운동이 서로 연대하며 상승효과를 낳는데 치명적인 해악을 미친다(이번 일로 많은 단체들이 사회의 의심을 받는 동반하강효과를 누릴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발상 역시 아깝지만 버려야 할 운동방식이다.
결국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점은 아까운 것들을, 즉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동방식이자 근본적으로 자신의 세계관과 충돌하는 운동방식의 문제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 사건은 최열씨의 이사장직 사퇴로 슬며시 정리되었다. 에코생협은 “이사장은 무보수로 봉사하는 자리이지만 생협사업상의 모든 활동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기에 그 책임을 지고 오늘자로 최 열 이사장은 이사장직을 사퇴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총대메기식 문제해결’ 역시 운동이 버려야 할 방식이 아니던가. 앞서 얘기했듯이 이번 사건은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성찰을 필요로 하는 운동방식의 문제이다. 슬그머니 사건을 덮을 게 아니라 더 많은 얘기와 주장이 필요하다.
일본에서 30년 이상 생활협동조합운동을 이끌어온 요코다 카쓰미씨는 운동이 “국가정부에 의한 조작․지배의 실체를 간파하고 대항하는 힘을 단시일에 길러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조그만 실력행사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고 전통적인 체제를 바꿔나가는’ 계기를 창출하고 창조력을 발휘하는 역할”(<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중에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운동으로서의 생협’을 지향한다면 우리의 고민도 필요하지 않을까?
"운동할 때 버려야 할 몇 가지 아까운 것들"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운영위원)
얼마 전 환경운동연합의 산하 단체인 에코생활협동조합(이하 에코생협)이 기업에 친환경공산품을 강매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KBS <9시 뉴스>가 한국수력원자력(주)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기업을 감시해야 할 환경단체가 기업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고 보도하자, 소식을 접한 많은 시민들이 분노했고 에코생협의 자유게시판에 비난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책임을 지고 최열씨는 이사장직을 사퇴했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해 KBS가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미디어를 통해 걸러졌기에 분명히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미디어가 사실을 왜곡했다는 ‘재현방식’의 문제를 넘어서 현재 한국사회 ‘운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시민단체와 기업 사이에 비판적 거리가 필요하다는 ‘당위적인 목소리’를 넘어서 더 근본적인 고민 역시 필요하다.
일단 이번 일은 우연히 터진 사건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환경재단과 에코생협이 ‘환경이 건강이다’ 공개강연회를 열기 위해 기업의 협찬을 받는 게 옳은가?, 환경재단이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 수익의 1만분의 1을 유치하는 ‘만분 클럽’을 추진하는 게 옳은가?(참고로 최열 총장은 2003년 2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기업을 1만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에코생협이 가장 불만을 느끼고 억울해 할 점은 이번 사건이 친환경공산품을 보급하려는 사회적(또는 생태적)으로 올바른 ‘의도’에서 나왔다는 점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도 때문에 그런 판매방식이 더욱더 잘못되었다고 본다. “어떤 방식으로 보급했다”가 아니라 “몇 개를 팔았다”에 중심을 둔다면, 그 운동이 생태운동일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식을 사용해도 좋다는 생각은 ‘도구적 합리성’을 따르는 전형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은 생태적 사유가 가장 철저히 배격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면, 과연 그 운동이 운동일 수 있을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올바름만을 무기로 운동을 벌이는 것은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다. 상대방은 온갖 술책을 쓰며 압박해오는데, 정당한 무기만을 들고 싸운다는 건 상당한 희생마저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과 힘듦,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기에, 그런 과정을 통해 이루는 작은 성과이기에 운동은 사회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효율적이고 빠른 목표 달성’은 아깝지만 버려야 할 대표적인 운동방식이다.
사실 위기의 근원은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002년 에코생협이 출범할 당시, 이미 여러 생활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환경운동연합이 별도의 또 다른 단체를 만들며 운동을 ‘확장’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2003년 2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최열 총장 스스로도 YMCA를 예로 들며 “YMCA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사업구조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라며 “사업을 지나치게 하다보면 운동조직이 사업조직의 악세서리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에코생협을 시작할 2002년도에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괜찮지만 남은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남을 비판하는 잣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면죄부’ 또한 아깝지만 버려야 할 운동방식이다.
또 운동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방면에서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실현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도 항상 그런 유혹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문어발식 확장’은 운동을 뿌리내리게 하고 내실(內實)을 찾는 데, 운동이 서로 연대하며 상승효과를 낳는데 치명적인 해악을 미친다(이번 일로 많은 단체들이 사회의 의심을 받는 동반하강효과를 누릴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발상 역시 아깝지만 버려야 할 운동방식이다.
결국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점은 아까운 것들을, 즉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동방식이자 근본적으로 자신의 세계관과 충돌하는 운동방식의 문제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 사건은 최열씨의 이사장직 사퇴로 슬며시 정리되었다. 에코생협은 “이사장은 무보수로 봉사하는 자리이지만 생협사업상의 모든 활동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기에 그 책임을 지고 오늘자로 최 열 이사장은 이사장직을 사퇴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총대메기식 문제해결’ 역시 운동이 버려야 할 방식이 아니던가. 앞서 얘기했듯이 이번 사건은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성찰을 필요로 하는 운동방식의 문제이다. 슬그머니 사건을 덮을 게 아니라 더 많은 얘기와 주장이 필요하다.
일본에서 30년 이상 생활협동조합운동을 이끌어온 요코다 카쓰미씨는 운동이 “국가정부에 의한 조작․지배의 실체를 간파하고 대항하는 힘을 단시일에 길러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조그만 실력행사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고 전통적인 체제를 바꿔나가는’ 계기를 창출하고 창조력을 발휘하는 역할”(<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중에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운동으로서의 생협’을 지향한다면 우리의 고민도 필요하지 않을까?
'시민사회운동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민운동의 경험을 통해 노동운동에 드리는 제언" (0) | 2007.09.28 |
---|---|
민주주의 문제와 시민환경운동의 정체성 (0) | 2007.09.28 |
'우리들의 리그'를 위해 (0) | 2007.09.28 |
한국자본주의와 세계자본주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사회운동포럼 2007 (0) | 2007.09.28 |
[자료집] "공공성과 한국사회의 진로"-참여사회연구소 (0) | 2007.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