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2003년 10월1일 자로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청소년 반란, 자치를 꿈꾼다
김지수(푸른희망군포21실천협의회 사무차장)
“경진대회는 대학가는 데 필요하니깐 있으면 좋지만 다 짜고 상 줘요. 공부 잘 하는 애들만 주고, 항상 타는 애들만 타고... 시에서 하는 청소년행사에 청소년들은 동원용일 뿐 이예요. 봉사점수로 꼬시고, 상으로 꼬시고... 정작 청소년을 위한 건 없어요.”
요즘 들어 나오는 10대들의 푸념이다. 새마을 세대도 아닌데 아직도 행사 동원용으로 불려 다니고 있는 현실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청소년활동들이다. 한국사회가 청소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아마도 1991년 뉴키즈언더블럭 사건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 막가파사건, 인천호프집 사건 등 청소년에 대한 관심은 ‘대형 사건’에 맞춰진 ‘청소년문제’에 초점이 맞춰졌고, “뭐 저런 괴물 같은 얘들이 다 있어 쯧쯧...”에 머물러 있다.
반면 1990년대 들어 이런 10대들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신문지상에서 자주 접했던 용어 중 먼저 떠오르는 것은 N세대와 90년대 중반까지 대표적으로 썼던 X세대가 있다. 그리고 Y세대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Z세대라는 단어까지 등장했고, 지금은 R세대, P세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떠오르고 있는 세대론... 물론 이런 분석들은 대부분 10대를 겨냥한 마케팅을 위해 기업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청소년들에 대한 다양한 욕구와 성향을 분석함으로써 나타난 세대론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 데는 아마도 세대구별 방식이 단순했던 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를 맞으면서 인간의 생활과 사회구조는 크게 변화됐기 때문에 기성세대와 젊은이로 나누던 지금까지의 양분법만으로는 이들 두 세대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세상은 변했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풍경들이 있다. 바로 청소년의 인권적 삶이다.물론 아이들도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 반란은 청소년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역사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고, 그러한 반란은 결코 적지 않았으며, 현재도 크고 작은 반란은 청소년자치활동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일제하 3․1 민족해방운동, 6․10 만세운동, 1929~1930년의 광주학생운동의 물꼬를 트기까지 중심 세력은 다름 아닌 중․고등학생인 청소년이었다.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기리는 학생의 날은 그 주체적 저항을 상징한다. 4.19와 한․일정상회담반대운동도 그 연속선상에 있지만 그 뒤, 한국의 역사에서 청소년들은 오랫동안 감추어진 존재였다. 청소년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것은 1987년 6월, 바로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서고련)을 통해서였고, 이후 고등학생운동은 88올림픽이 있던 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보충수업, 자율학습 폐지운동’으로 이어졌으며, 고등학생운동이 전 사회적인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으로 인한 교사 대량 해직 사태였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청소년자치활동은 인터넷의 발달로 그 어느 때 보다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청소년자치활동이 청소년 인권신장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청소년자치활동이 지속적인 운동으로써 전환되지 못하고 있는데는 그 한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지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청소년자치활동의 모습은 그 편차가 클뿐 아니라 여건도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실 제 친구가 학생회장인데요. 걔도 뭐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라 대학 잘 가려고 그냥 한 거래요. 선생님들은 그렇게 뽑아놓고 대학 잘 보내려고 봉사점수 그냥 주고요. 정말 짜증스럽네요.”
“학생회가 하는 일 전혀 없어요. 그냥 대학 잘 가려고 하는 거지... 우린 다 그렇게 생각해요.”
“학생회 회의 공고도 없어요. 회의는 하는 건지... 초.등학교 때는 회의 내용을 회의록 만들어 기록하는데, 고등학교는 뻔해요. 교칙 잘 지키자. 청소 열심히 하자 등... 유치해서... 교무회의 내용이나 운영위원회의나 학생회 회의 등 학생들에게 다 공지되면 학교에서 하는 일에 관심 갖고 참여할 생각이 있는데...”
“학생회요. 믿을 수 없어요. 진짜 공약 실천하려면 교칙 위반해야 하는데 하겠어요? 대학가려고 하는 짓인데...”
'유엔 아동․청소년권리협약’은 아동․청소년을 보호의 대상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권리 주체로 인식하는데 필수적인 권리로서 참여의 권리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참여의 권리를 의사표현의 자유와 자기생활에 영향을 주는 일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권리,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아동․청소년 자신의 능력에 부응하여 적절한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권리주체로서의 한 개인이 온전하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여의 권리가 보장되었을 때를 의미하며, 학교에서의 학생의 권리는 자기 결정과 같은 ‘참여’가 보장되어 있을 때 그 권리가 온전하게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학생의 참여권, 즉 적법절차를 보장받을 권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학생 참여가 교무회의, 학교운영위원회, 학칙과 생활규정의 제․개정, 징계위원회 등에서 여전히 배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학생회자체에도 있다. 형식적인 학생회 선거를 치르면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다보니 학생회 활동의 주체가 되는 학생들도 학생회 사업에 대한 전망과 구상을 가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물론 학생회활동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생회에게 자율적이고, 실질적인 권한을 주지 않는 학교 측의 태도다. 그러나 학생회의도 형식만 갖추고 있을 뿐 학생들의 다양한 의사를 모으고 학교 측에 전달해 현실화시키는 본연의 역할과 거리가 멀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동아리 현실도 상황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동아리활동도 정말 문제가 많아요. 풍물반, 방송반, 교지편집실, 학생부 같은 동아리들만 잘해주지 나머지 동아리들은 만나는 것도 바깥에서 사비내서 모인다니깐요.”
“지도 선생님들은 자기 동아리 애들이 누군지 모르고, 동아리 애들도 지도 선생님이 누군지 모르고 그냥 따로 따로예요. 그리고 학기 초에 동아리 들지 말라고도 해요. ‘너 동아리 들면 공부 못한다. 들지 말아라.’ 처음에 못박더라구요.”
“지도 선생님이 꼭 있어야 하는데 지도 선생님 못 구해 동아리 못 만드는 경우도 많아요. 지도선생님 해달라고 애들이 부탁하지만 선생님도 바쁘다면서 잘 안 해주세요.”
학교에서는 풍물반, 교지편집부, 학생부 등 특정 동아리에 대해서만 예산지원을 하고 있다. 동아리활동을 활성화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아리 들어가면 공부 못한다”는 식으로 동아리 활동의 참여를 비공식적으로 막고 있었으며, 지도교사를 못 구해 동아리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하고 있었다. 청소년자치기구에 대해서도 별생각이 없다.
“글쎄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지만 참여하지 않을 것 같아요. 공부 아닌 다른 활동하는 것을 부모님들이 반대하니깐... 저도 못할 것 같아요”
“필요하긴 한데, 실질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애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거예요. 시간도 그렇고, 권한문제도 그렇고...참여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네요.”
“만들어도 우리가 포기할 거예요. 저희한테 어른들이 권한을 주겠어요. 전 어른들 못 믿어요.”
대부분 청소년들은 청소년자치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인 참여에 대해서는 “글쎄요? 생각해 봐야겠는데요”라는 시큰둥한 대답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아이들이 잠재적으로 어른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뭔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불이익이 올 것이라는 생각, ‘손해=찍힘’은 늘 같은 연결선상에서 아이들을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옥죄고 있었다. 찍힘은 곧 아이들에게 학교생활의 어려움과 직결돼 있으며, 대학 가기 힘듦과도 연결돼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들이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럽다 못해 두려움으로 자리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반란이 학교나 지역사회를 일시적으로 교란하는 데 그칠지 아니라 학교와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 전체를 재편하는 결과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