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내음 팀블로그/이호의 "투덜투덜"'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07.08.23 과천지역과 풀뿌리운동
  2. 2007.07.25 우리나라 풀뿌리 자치의 실상과 과제-1
  3. 2007.06.25 지역사회 비전만들기
  4. 2007.06.10 살고 싶은 마을만들기 사업과 참여예산
* 이 글은 과천지역 풀뿌리운동가들이 제작하고 배포하는 <마을회관>이라는 마을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맑은 내 칼럼>

과천지역과 풀뿌리운동


이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어느 날 과천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모임에 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직전에 과천에서 실시한 빈곤층 실태조사의 내용을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모임에 참석한 이후 얼마 후에 다시 과천에서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려고 하니, 그에 관해 전에 조사했던 내용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래서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려고 하는구나 하는 반가운 생각에 흔쾌히 참석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런데 당일 무척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최 측에서도 예기치 않았던 듯 문원동의 한 집에서 열린 모임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참석해, 발표를 하는 필자마저도 방 한구석에 쭈그려 않아 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었다.

저소득층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겠다는 몇 사람의 의도는 이렇듯 과천에 뜻하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 모임을 추죄한 이들은 이에 관한 적극적 홍보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이해와 크게 상관되지 않는, 이웃들을 위한 이러한 계획에 많은 과천시민들이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공부방 공간마련을 위한 일일주점에 과천시민의 1% 이상이 참석했다는 것 역시 첫 번째 모임 못지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풀뿌리운동이란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일반 대중들이 주체가 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지역사회에서의 풀뿌리운동이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대중들이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벌이는 운동이다. 그러다보니 풀뿌리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변화・발전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은 집단적인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힘이 커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변화와 발전의 내용이 개별적 이해를 충족시키기보다는 그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시민들 다수의 공동체적 이해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개별적 이해의 충족을 위한 노력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지만, 특히 도시지역 거주민들의 다양하고 때로는 상충된 이해들이 모두 같은 공간에서 제기될 때에는 지역사회의 발전이 아니라 극심한 이해충돌로 인한 혼란이 가중될 뿐이다.

풀뿌리운동은 또한 지역사회의 주인인 시민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인으로서의 자기 권리와 책임을 충실히 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풀뿌리운동에 있어 그 주체인 시민들의 역할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살기좋은 지역사회의 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앞서의 맑은 내 공부방 설립 과정은 매우 풀뿌리운동적 방식에 충실했던 사례라 볼 수 있다.

얼마 전 신문을 통해 과천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서울 강남지역의 그것을 추월했다는 보도를 접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천의 특징이 과연 자랑스러운 과천시민의 훈장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보다는 앞서와 같은 과천시민들의 공동체적 이해 달성을 위한 노력의 과정이 더욱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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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방행정연구원에서 발간하는 [자치행정] 8월호에 실은 원고로, 앞으로 2회에 걸쳐 추가로 연재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풀뿌리 자치의 실상과 과제①


이 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작년 초, 안식년을 맞아 동남 아시아 지역으로 배낭여행을 갔다 한국에서 온 초등학교 선생님 몇 분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분들은 휴가철도 아닌 시기에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 내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풀뿌리 자치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일을 주로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그 분들이 대뜸 하시는 말씀은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풀뿌리 자치’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용어의 차이와 유사점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먼저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오해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방자치제는 단지 풀뿌리 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 제도적 틀에 불과하다. 그 틀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내용마저 자연스럽게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풀뿌리 민주주의는 상호 연관성은 있으나, 같은 것으로 등치시킬 수 없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지방자치제도의 내용을 채우려는 일련의 노력을 통해 정착시켜야 할 핵심적인 내용이다.

두 번째 오해는, 풀뿌리 민주주의는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올곧게 대표하는 사람들을 잘 뽑고, 이들이 그 의사를 존중해서 정치를 잘 하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풀뿌리’라는 용어를 잘 살펴보면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풀뿌리’라는 용어는 ‘풀의 뿌리’라는 뜻으로, grassroots 라는 단어의 순 우리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순히 ‘풀의 뿌리’라는 뜻 이외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풀뿌리(grassroots)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다수 대중’, ‘보다 근본적인 원리’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단순히 주민들이 자신들의 대표자로 선량(善良)들을 뽑고, 이들이 자신의 통치행위를 잘 한다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은 너무 폭 좁은 해석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단순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중요한 핵심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다수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역의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일상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지역사회의 실질적인 의사결정과정을 주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풀뿌리 자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이러한 점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풀뿌리 자치, 풀뿌리 민주주의는 지방자치제도가 내포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인 주민자치와 그 맥을 같이 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우리의 지방자치제도는 주로 단체자치를 중심으로 그 제도 및 운용이 이루어지고 있어, 일반 시민들 즉 우리 사회의 풀뿌리들이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정치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선거일에만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는 많은 정치사상가들로부터 정치의 주체여야 할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는 비민주적인 현상이라 비판받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풀뿌리 자치는 일상적으로 시민 대중, 특히 지역사회의 일반 시민 대중들이 정치적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거나 또는 최소한 그러한 의사결정과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형태와 운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지방자치제도가 달성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그러한 목표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명확히 제시되거나 일상적으로 발현되지 못하는 것이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또는 풀뿌리 자치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볼 수 있겠다.

물론, 우리 사회의 지방정부 및 정치인들도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을, 남에게 뒤질세라,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각종 위원회를 구성하여 시민들을 참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종 주요한 계획 과정에 공청회 등을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도 시민참여의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행정과 정치권의 합리화 전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먼저, 각 지방정부마다 수 십개, 거의 1백 여개에 이르는 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형태를 살펴보면, 왜 이러한 비판이 정당한가를 잘 알 수 있다. 먼저, 권한 범위에 있어서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대부분의 위원회는 단순한 자문형태의 권한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 자문이란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무리 위원회에서 이야기를 해도, 결국 그를 채택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행정 담당자 또는 단체장 및 정치인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이런 상태를 풀뿌리 자치의 한 형태라 볼 수 없다. 자치의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위원회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결정을 위원회라는 기구를 통해 전문가 및 시민의 의견을 수렴한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참여하는 시민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다. 위원회에 참여하는 위원은 대개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행정이나 그와 관련된 정치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명・위촉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는 위원들에게 시민의 대표성을 부여할 수 없다. 이는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에 전문가를 위촉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전문가는 자신의 영역에서는 전문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시민들의 욕구와 생활에 대해서도 전문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들의 의견이 시민들의 의견을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그 전문성이라고 하는 것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자타가 공인한다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각종 사안들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들이 개진되는 것을 봐도, 그 전문성에 대해 객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관련 이해 당사자가 위원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작금의 위원회 구성 방식으로는 위원회가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통로라고 할 만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세 번째는 운영 형태를 지적할 수 있겠다. 실질적으로 위원회는, 일부 위원회를 제외하고는, 매우 부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각 자치단체마다 1년에 1회 모임을 갖지 않는 위원회도 다수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많은 위원회의 위원장이 시장 또는 부시장 등의 공무원이 맡는 경우도 있어, 행정의 편의에 따라 위원회 개최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정의 각종 정책에 대해 시민들로부터 직접 의견을 듣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공청회 역시 시민참여를 통한 풀뿌리 자치, 풀뿌리 민주주의의 의의를 충실히 시행치 못하고,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공청회가 열리는 시간이 주로 낮 시간대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미 시간대에서부터 직장에 다니는 시민들의 참여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그리고 공청회는 주로 전문가들의 말잔치로 시작해 말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이 쏟아 붓는 어려운 전문용어들은 참여자들을 주눅들게 하고, 이는 결국 행정과 함께 작업해 왔던 전문가들의 말잔치로 끝나곤 한다. 이 과정에서 그 이해당사자들인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려는 세심한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러한 절차는 매우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역할을 잃어버린 시민들이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권한이 없는 곳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시민들의 참여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의 동기를 제공해 주지 못한 것에 일차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몇몇 가지 현상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다음 호에서는 각종 행정문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거버넌스가 실제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 연재의 마지막에서는 민간으로부터 풀뿌리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과 그 과제 등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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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비전만들기



이 호(한국도시연구소 주민운동실장)



논의의 제기 배경

1990년대 들어오면서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지역사회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정치적 정당성을 추구하던 80년대의 운동이 그 효력을 잃어가면서 점차로 사회적 정당성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정당성 건설의 가장 핵심적 요소는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의한 대안적 사회만들기이다. 그러나 전국적 이슈를 통해서는 시민들의 일상적이고 주체적인 참여가 가능하지 않았다. 반면, 지역사회는 지역주민들의 생활에 기반한 이슈로 인해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이끌어 낼 가장 유력한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역사회운동은 여전히 그 운동의 주체인 주민들로부터 유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에 그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민들에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뿌리내림 없이 지역사회를 어떻게 변화・발전시킨다고 하는 논의는 또 다른 정치엘리트들의 주도성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당시에 전문가 및 전문적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지역사회운동은 지역에서 일정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역주민들의 주체적 참여를 이끄는 역할은 미흡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만으로는 지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음이 많은 지역사회운동가들에게 인식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회의 변화는 외적인 조건의 변화보다는 그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그를 통한 주체의식의 성장을 통할 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주민들의 일상적인 문제에 착근한 지역사회운동의 성과들을 서서히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뭔가 새로운 세상이 올 것만 같던 2000년도 훌쩍 5년이나 지나, 이제 2000년대라는 것이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 진부함이 관성이 되어가던 시기에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고민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금까지의 성과들(물론, 아직도 풀뿌리에 기반한 성과는 매우 미약하다)이 과연 사회운동의 입장에서 어떤 의의를 갖느냐 하는 것이다. 즉, 개별 단체들 및 모임들의 성과들은 하나 둘 쌓여가지만, 결국 이러한 성과들이 지역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켜 나가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양한 활동의 영역들이 개발・구축되어 왔고, 또한 그러한 활동 속에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또한 과거에 비해 활성되어 가고 있지만, 그것이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활동으로 힘을 발휘한다고 바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개별적인 모임과 활동들 자체도 그 속성을 들여보면, 분명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활동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결집되는 흐름은 아직 부족한 것이 또한 사실이다.

지역사회 비전만들기는 바로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즉, 지역사회 비전만들기는 기존의 활동성과들을 비판하면서 출발했다기보다는, 지금까지의 활동성과들을 보다 사회운동의 지향성에 따라 질적인 발전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실천계획 전략 차원으로 고민되어지고 제기되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역사회 비전만들기는 지역사회의 단편적 쟁점들의 해소보다는 종합적이고 균형 잡힌 지역사회의 발전을 지역사회운동이 주도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지역사회의 개별단체의 활성화와는 조금 달리 접근할 문제이다. 물론, 사회발전의 지향을 지니는 개별적 사회운동단체의 활성화가 지역사회의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발전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사실이나, 실상 이는 가능하지도 그리고 바람직한 것이라 볼 수도 없다. 지역사회의 비전과 이를 통한 발전은 지역주민들 다수의 공유와 참여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전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은 개별 단체 차원보다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도출되고 실천될 수 있도록 고안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의 성과를 기반으로 실천적 비전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상 그러한 기반 없는 비전 만들기는 또 하나의 그림그리기에 불과할 수 있다.


지역사회 비전만들기의 주체

지역사회 비전만들기는 바람직한 정책의 나열과는 다르다. 물론, 정책의 나열 자체도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전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을 나열하는 것은 실상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지역사회에서는 지방의제21을 만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정책적 차원에서 실천을 매개하기 위한 것은 바로 이 의제에 그 핵심적 내용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많은 지역에서 이 의제를 작성하고 실천하는 과정에 여러 시민사회단체와 그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지역사회의 비전을 만들고자 하는 주체와 의제를 작성한 주체들 사이에는 그리 차별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또 새삼스럽게 지역사회 비전을 만들자고 하는가?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 진 지방의제21은 여러 가지 장점과 한계를 안고 있지만, 이 논의와 관련해서는 그 의제를 만드는 과정이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널리 소통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또한 그 실천계획에 있어 지역사회의 주인이자 지역사회 비전만들기와 발전의 주체인 주민・시민들의 구체적 참여계획이 이들로부터 도출되지 않음으로써 단지 선언적 실천계획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겠다.

따라서 지역사회 비전만들기가 새롭게 주장되는 것은 시민들의 참여와 소통이라는 점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논의에 있어 가장 걱정되는 것은 우리의 논의가 또 다시 사회운동가들의 논의와 실천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시민의 참여를 표방하지만 결국 시민운동단체, 그 중에서도 시민운동 활동가들만의 참여에 그치는 것이다. 시민운동단체의 참여가 곧바로 건강한 시민들의 참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양적인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비록 시민단체들이 다수 시민들을 대변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이의를 달 수 없겠지만, 그리고 시민운동단체들이 소수 주민만을 대변하기보다는 공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겠지만, 다수 시민들이 시민운동단체에 자신들을 대표하도록 위임한 적도 없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일반 시민들의 참여와 시민운동단체, 특히 전문화된 시민운동 활동가의 참여에 대한 역할이 구분되어 정립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 양자 간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면, 몇몇 시민운동 명망가 또는 활동가들의 참여가 시민들이 참여로 둔갑될 위험이 높다. 그럴 경우 시민운동은 오히려 시민들을 주체적 참여의 과정에서 소외시키고 무임승차자로 만드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세상에 어느 시민운동단체도 일부러 시민들의 참여를 가로막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나름대로 갖은 방법들을 동원하곤 한다. 하지만,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은 산적함에도 시민들의 참여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시민운동단체들은 당연히 시민사회 일반의 이해를 ‘대변(advocacy)’하는 운동방식을 채택하곤 해왔다. 그렇다면 시민들의 대중적 참여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시민운동의 방법이 잘못된 것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시민운동가들이 시민의 참여를 목청높이 외치는 것만큼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 하는 것 자체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 중심의 사고는 만연했지만(task oriented),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과정 중심의 사고(process oriented)는 미약했다고 판단된다. 세상에 권한 없는 참여를 매력적이라 느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는 시민운동단체나 시민운동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일반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권한이 주어지지 않은 동원 대상임에도 그 참여행위에 대해 지속적인 기쁨과 보람을 느낄 사람은 없다. 기쁨과 보람(혹은 돈?) 없이 참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참여의 행위에 권한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그러하지 못한다면, 시민운동 진영이 정부의 행동에 대해 ‘동원’이라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주체는 일반 시민 또는 주민 대중이다. 시민운동단체와 전문적 시민운동가는 그러한 주체를 형성하는(자치적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즉, 이들은 시민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는 주체이기보다, 일반 시민대중의 참여를 조직하고 매개하고 지원하며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중앙시민운동이 아닌 지역의 시민운동이 지닌 장점과 특징을 잘 살리는 것이다. 물론, 모든 시민운동이 이러한 대중운동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고 강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비전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조차 이러한 풀뿌리적 관점을 간과한다면, 지역사회의 시민운동은 또 다른 엘리트운동으로서의 자기 전망밖에는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문가의 역할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총체적인 지역사회의 비전을 만든다고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비전을 가장 잘 만들 수 있을 듯한 전문가를 섭외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 과정이었다. 전문가는 자신의 분야에서 깊은 지식과 고민을 쌓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비전은 전문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일반 시민들의 욕구와 바램을 통해 비전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전문가는 그러한 시민들의 욕구와 바램을 현실 가능한 것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간혹 또는 자주 이러한 전문가의 역할이 일반 시민 대중의 역할 영역까지 침범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또 다른 엘리트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치이다.

따라서 지역사회 비전 만들기는 비전을 만드는 주체를 형성화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지역사회의 비전을 만들기 위한 지금의 논의가 당장 내년 선거에 써먹을 공약을 만들고자 한다면, 거창하게 지역사회발전 비전이라기보다는 출마자들의 공약을 만드는 것으로 그 위상을 축소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굳이 시민의 참여니 하는 것들을 고려할 필요 없이, 바람직한 정책을 도출해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실천은 그 이후에 생각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진정한 지역사회비전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부터 풀뿌리적 관점을 견지하기를 제안한다. 그럴 경우, 내년 6월 지방선거 이전까지 총체적인 지역비전이 도출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지금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정치인이 만드는 지역사회비전이 아니라 시민들이 만드는 지역사회비전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종종 가장 중요한 것들을 흘려보내는 일을 반복해 오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비전만들기의 실천

최근에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지역사회 비전만들기는 일단 지역사회에서 중요하게 쟁점이 될 만한 주제들을 골라 이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수준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렇듯 주제분류를 통해 지역사회 비전만들기를 접근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 주요한 내용을 규정하게 되고, 나머지는 전문가들의 작업에 일정한 조언과 수정을 가하는 것 정도에 그칠 위험이 매우 높다. 이는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정책을 만드는 과정으로는 매우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전만들기는 정책만들기와 전혀 다른 개념이어야 한다.

비전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정책적 수위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상정한 목표를 달성해 나갈 것인가 하는 실천계획을 수립하고 직접 실천해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몇 가지 주제들을 나열하고 그 주제에 맞는 정책 및 실천적 과제를 도출하는 식의 방향은 지역사회의 총체적인 비전의 내용들을 나열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비전만들기를 위한 참고서로서의 기능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작 지역사회 비전만들기는 지역사회 주민들로부터 그 의제가 제기되고 또 그 실천의 내용이 도출되어야 한다. 그것이 실천적 만들기의 바람직한 경로이며, 또한 이 시기에 우리가 지역사회 비전만들기를 논의하는 주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실천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사회의 시민들이 참여하여 자신들의 바램과 욕구를 쏟아 붓는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서, 그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욕구와 바램을 체계적으로 정리・분석하여 다시 검증받는 등의 기회를 여러 차례 가지자. 이것은 지역사회운동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지역조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 가능한 대로 많은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도록 조직하고 중재하자. 최소한 몇몇 전문가와 활동가들에 의해 비전을 만드는 과정이 이루어지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럴 경우, 그 결과물은 우리 지역사회의 비전 만들기가 아닌 지역발전 ‘정책’의 제시에 그칠 것이다. 물론, 이 결과물은 선거시에 공약으로 활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그럴 바에는 따로 지역사회비전을 만들기보다 현재 있는 지방의제21을 수정하는 작업이 보다 효율적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밟는 방법으로는 마을만들기에서 많이 활용하는 다양한 디자인 게임의 기법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워크숍의 진행에서부터 시민참여자들이 스스로 지역사회의 문제와 개선방향을 조사하고 제시하며 이를 가시적이고 구체적으로 체계화하여 공유하는 법, 우선순위의 도출과 향후 실천계획의 수립 등등에 있어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조사의 과정에 시민들이 참여하고, 그 조사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실천계획까지 수립하게 되는 과정이 지역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한 지역조사이자 실천계획 수립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이를 PAR(Participatory Action Research)라 한다).


비전을 만들기 위한 힘(power)의 형성

지역사회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실천해) 가는 힘은 당연히 지역사회의 정치적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가능하다. 문제는 이 정치적 권력을 어떻게 형성해 가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현재 제도적으로 주어진 권력에 제도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즉, 지방의원 또는 자치단체장 선거에 후보를 출마시키고 당선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참여를 전제로 하지 않는 이런 시도는 무모할 뿐이며, 설령 그러한 전제 없이 제도적 권력을 일정 정도 차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역사회비전 만들기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비전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주장하지 말자. 지금까지 이러한 시도들이 낳은 결과는 정작 엉뚱한 곳으로 우리를 이끌 뿐이었다.

시민들의 참여 없는 제도적 권력의 배분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행동만을 낳을 뿐이다. 제도적 권력은 시민 대중의 권력을 형성하는 전략적 목표를 위해 채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지역사회 시민들이 주체가 되고 또 이를 통해 실천하고자 하는 비전을 만들고자 한다면, 시민들의 참여를 어떻게 활성화시키고 이를 어떻게 정치적 힘으로 표출할 수 있을까를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똑똑한(?) 몇몇이 시민들을 위해 살기 좋은 지역사회를 만들겠다고 한다면, 대다수 시민들은 또 다시 지역정치(권력)의 주변인으로 남도록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정치권력을 형성하는 방법은 시민대중의 정치적 권력을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다. 만약 내년 지방선거가 바람직한 지역사회를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정치적 계기라고 판단한다면, 누구를 출마시키고 당선시켜 우리가 원하던 바를 이루자고 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의 참여를 활성화시키고 이들에 의해 권력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그 하나의 역할로 누군가 제도적 권력을 분점할 수 있는 지방정치인이라는 지위를 통해 이 일을 하도록 하자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제도정치인을 만들고자 하는 논의는 그 제도정치인을 통해 지역사회의 비전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그 제도정치인의 역할을 지역사회비전을 만드는 주체를 형성하고 비전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역할분담의 차원으로 고려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대중이 정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정치조직을 지역 내에 건설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누누이 강조하듯이 이 정치조직의 가장 큰 목적은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지 기존 정당과 같이 많이 출마시켜 제도화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다. 많이 출마시켜 제도화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은 기성 제도정당의 역할이다. 이들에게는 그런 목적이 있으며, 그것이 잘못이라 볼 수 없다. 이러한 정당과 시민사회운동과의 바람직한 관계설정은 긴밀한 연대 또는 네트워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 정당과 연대한다는 것은 시민사회운동의 역할이 정당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또 달라야 한다.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통해 스스로 대안적인 지역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시민대중권력의 창출, 그것이 시민사회운동이 기성정당과 달리 지향해야 할 바라 하겠다. 이 권력은 기존의 제도화된 권력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의미의 권력인 것이다. 즉, 시민사회운동은 기존의 권력을 우리가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고자 하는 지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시민대중의 정치조직을 지역 내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역 내 다양한 자원들 간의 네트워크 건설이 필요하다. 어차피 개별 시민운동단체가 지역사회 발전의 총체적 비전을 실천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시민운동을 평가하면서, 개별 단체의 발전이 곧바로 그 지역사회 전반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 역시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총체적인 발전을 위한 비전은 그보다는 이러한 개별 자원과 성과들을 해당 지역사회의 발전이라는 하나의 지향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통해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네트워크는 연대(회의체, 협의회, 연합 등)와는 다른 개념이다. 연대는 상시적으로 함께 한다는 개념인데 반하여 네트워크는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자가 가진 일정 자산(재능)만을 공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네트워크에서는 그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각 부분들이 크든 작든 자신들의 역할을 나누어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지역사회의 다양한 인적・물적 자원들이 하나의 지향 하에 각자의 역할분담을 통해 지역사회비전을 만들기 위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 성과를 하나로 모아 또 다시 골고루 분배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역사회비전을 만들기 위한 네트워크는 단체 간 네트워크보다는 인적 네트워크가 현 시기에서는 더욱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라 여겨진다. 아무래도 단체가 네트워크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게 되면, 이중적 의사결정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네트워크가 원만히 운영되기 힘들다. 그리고 아무래도 단체들은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활동 전면에 정치적 활동을 내거는 데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체 간 네트워크는 기존 단체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제한하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역사회비전 만들기는 어느 일방에 의해 주도되기보다는 지역사회를 시민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지향에 동의하는 지역사회의 광범한 자원들의 네트워크 건설을 통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방법이라 볼 수 있겠다.


글을 나오며

이 발제문의 한계는 지역사회의 비전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 상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들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상들은 이어지는 워크숍을 통해 참여자들이 그려보았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제안하고 주장한 내용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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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마을만들기 사업과 참여예산


이 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1. 마을만들기와 지역만들기


정부에서 추진하는 ‘살기좋은 지역만들기’라는 용어는 몇 가지 점에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수행해 오던 ‘마을만들기’와 차별적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을’과 ‘지역’의 차이이다. 지역은 영어로 area 또는 region이라 번역된다. 이는 물리적인 지역적 범주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마을은 neighborhood이라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이 용어는 물리적인 지역적 범주를 나타내기보다는 인근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간의 긴밀한 관계를 주로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마을은 community와 더욱 유사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커뮤니티는 그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관계를 의미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물리적 지역 범주를 설명하기보다는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주민들의 범주에서 형성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을은 생활권이 일치하고 또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면(顔面)이 높은 그러한 공간적 범주를 갖는다. 따라서 마을만들기로 할 것이냐, 지역만들기로 할 것이냐는 우리가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 지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지 단순히 비슷한 개념의 용어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없다. 민간 차원에서 지금까지 수행해 온 마을만들기는 그러한 점에서 지역만들기와는 차별성이 있는 것이고, 또한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편익시설을 만들려는 행위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마을만들기는 무엇보다도 ‘마을’을 만들려는 의도적 실천행위이다.

이러한 공동체라는 용어는 사람들마다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그 용어의 사용에 있어 공통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힐러리라는 학자는 이러한 공동체의 공통적 요소로 세 가지를 확인하였는데, 그것은 지역성(locality), 사회적 상호작용(interaction), 공동의 유대(common tie)이라는 것이다. 즉, 특정한 지역에 기반하여 그 구성원들이 상호 안면성이 높은 상태에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들이 같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일체감을 갖는 상태를 공동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이란 공동체의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 진 집단이 거주하는 공간적 범주를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마을만들기는 바로 그러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사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마을의 구성요소가 충족되었는지를 어떻게 측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지역적 범위의 정도와 사회적 상호작용의 정도, 그리고 공동의 유대감 정도는 매우 다양한 질적 층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공동체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요소들의 질적 수준이 끊임없이 향상되거나 하락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정태적(情態的) 현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지속적으로 외연히 확대되고 그 정도가 심화되는 ‘과정’을 밟아 나가는 ‘운동(運動)’이라는 동태적(動態的)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마을만들기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과 이웃들의 공동체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 즉 마을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지향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용어이다. 하지만, 지역만들기에는 그러한 ‘가치’가 생략되어 있다. 지역주민들이 살고 싶은 또는 살기 좋아 하는 지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주민들은 보다 번듯한 물리적 시설이나 편익시설이 많은 것을 ‘살기 좋은 지역’이라 할 수 있겠고, 또 어떤 이들은 ‘친환경적인 자연조건’으로 ‘살기 좋은’ 지역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는 애초부터 그 사업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이들의 관점에서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들고자 하는 실천적 의미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실천의 지원과 기획에 있어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이어지는 현 정책의 라인은 지역주민들을 지역만들기의 주체가 아니라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을 애초부터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민들 간의 공동체적 관계가 아닌 편익시설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누가 주체가 되든 별 상관이 없을 수 있다. 단지, 의견을 수렴하여 참고하는 정도로도 족할 수 있다.



2. 마을만들기의 주체와 과정

마을만들기는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주민들 간의 끈끈한 공동체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에 일정한 방법론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즉, 마을만들기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실천과정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마을만들기는 누군가 타인에 의해 주민들을 위한 생활환경 등을 만들어 주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마을만들기는 그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또는 살아갈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마을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행정과 외부의 전문가들이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 주는 마을은 진정한 마을일 수 없다. 그리고 우리나 외국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조성된 마을은 그 구성원들에 의해 곧바로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따라서 마을을 만들어 가는 가장 주요한 주체는 그 마을에서 살아가고 앞으로 살아갈 그 구성원들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마을은 지속가능성을 확보한 채 진정한 마을로 유지・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실험된 몇 가지 마을만들기 사례에서도 마을을 만드는 주체의 중요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전농동의 차없는 골목만들기 사업의 경우 동장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어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으나, 동장의 의지에 비해 주민들의 의지는 비교적 수동적이었다. 이에 동장이 바뀌자 이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에 반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된 마을만들기는 그 지속적 생명력의 부분에서나 그 주체들의 역량이 강화되는 과정 등에 있어 위의 사례와는 차별적이다. 예를 들면, 마을만들기의 사례 중 가장 유명한 대구 삼덕동의 ‘담장 허물기’사업은 담장을 허물었다는 것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 이 사업이 유명세를 타면서 전국 여기저기에서 주택가의 담장을 허무는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지만, 정작 삼덕동에서는 담장을 허문 이후의 운동적 실천과정이 더욱 중요하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삼덕동에서는 담장을 허문 후 만들어진 공간을 단지 주차장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활동 및 잔치(어린이들의 발표회 및 인형마임 축제 등), 마을지도 그리기를 통한 지역의 정체성 찾기 프로그램 등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서울시 강북구와 은평구에서 실시된 어린이 놀이터 만들기 사업 역시 이와 비슷한 마을만들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쓰레기를 적치하고 어른들이 모여 술 마시는 공간으로 변질된 어린이 놀이터를 마을 어린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실시된 이 사업은 결국 어린이 놀이터를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한 시민단체가 어린이 놀이터 주변에 사는 주민들을 조직하여 이들이 직접 이 사업에 팔 걷고 나서도록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어린이들과 지역의 주민들이 이 놀이터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하여 백일장 및 한 밤의 영화제 등 지속적인 공동체 프로그램을 이 공간에서 시도하였다. 결국, 이 사업을 주도한 주민들은 이러한 성공에 고무 받아 다양한 지역사업을 꾀하는 주체로 성장・발전하였다.

이렇듯 우리가 비교적 성공적이라 여길 수 있는 마을만들기의 사례들은 그 주체들이 주민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며, 그 사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지역사회 내에서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마을만들기에 있어 그 주체를 명확히 하였다는 점 이외에도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지가 명확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반면, 행정 또는 전문가의 주도에 의한 마을만들기 실천들은 이러한 마을만들기의 의의를 아직은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최근 건교부에서 추진하는 ‘살기 좋은 도시만들기’와 관련하여 건교부는 대한국토・도시계획 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학자들에게 국내외의 사례를 조사토록 하여 그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마을만들기와 관련한 일단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언급한 사례들 속에는 주민들의 주체적 마을만들기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 대신 주민 편익적인 시설을 저비용으로 제공한 성공사례들이 주요하게 언급되는 편이다. 이는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주체들이 생략된 채, 시민들을 위한 도시계획의 사례들을 마을만들기로 호도하기도 한다. 물론, 시민들의 참여를 계속해서 언급하고는 있지만, 이들의 주체적 역량이 어떻게 만들기의 과정에서 발휘되는가 또는 이 과정을 통해 그 도시의 주체적 역량이 어떻게 길러지고 형성되는가 하는 운동적 관점이 생략되어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을만들기는 시민들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해 나가는 사회운동의 한 과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일본의 마을만들기 관련 전문가가 우리나라의 마을만들기 사례 몇 가지를 평가한 적이 있다. 이 학자는 서울의 청계천과 광주시 문화동의 문화마을만들기, 서울의 성미산 지역을 그 사례로 언급하였다. 이 중 청계천은 시민들의 동참이 생략된, 시민들을 위한 행정의 실천일 뿐이고, 광주시 문화동의 경우에는 단지 특정한 지역을 문화적으로 특화시킨 것이므로 향후 이 지역주민들의 지속적 실천행위의 여부와 그 방향에 의해 마을만들기의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는지가 판가름 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성미산의 경우 행정의 일방적 개발계획에 반대하는 것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향후 이 마을을 어떻게 주민들이 가꾸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학자가 우리나라 사례를 평가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러한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마을만들기는 단순히 주민들을 위한 어떠한 개발계획 또는 일회적인 물리적 시설 및 환경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마을만들기는 주민들의 참여를 배제한 일방적 개발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을만들기는 주민들이 자신들의 ‘마을’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대안을 창출하고자 하는 사업이다. 즉,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힘으로 강화하여 자신들의 마을을 자신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으로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지칭한다. 따라서 마을만들기는 지역사회의 풀뿌리운동이 지향하는 일체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지역사회운동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3. 마을만들기의 실천

마을만들기는 어떤 이념이나 궁극적인 지향점을 나타내는 개념이라 볼 수 없다. 마을만들기는 매우 실천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을만들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정확한 개념을 정립하는 것보다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가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실천의 방식과 만들고자 하는 대상은 지역 및 그 구성원의 상황에 따라 매우 창의적이고 다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실천방법을 언급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마을만들기를 실천하는 데에 있어 주요하게 고려해야 할 몇 가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 주체의 형성이 필요하다

어떤 사업을 함에 있어 그 주체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주체를 형성한다고 하는 것은, 최근의 실천활동에서 알 수 있듯이, 자주 간과되기도 한다. 즉, 마을만들기의 주체인 마을의 구성원들이 마을을 만들기 위한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을만들기의 주체는 결코 시민운동단체나 일부 전문가 또는 전문적 운동가가 아니다. 따라서 시민운동단체나 일부 활동가와 전문가들이 특정한 지역에서 마을만들기 사업을 진행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 마을의 중심적 구성원이 될 주민들을 우선 조직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주민들을 조직한다는 것은 만들 대상을 결정하기 전에 지역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주민들을 먼저 모으는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특정한 필요로 도출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주민들을 모으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로를 거치든 간에 그 마을의 구성원이어야 할 주민들이 모여야 어떠한 실천이라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와 그 역할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으면, 마을만들기가 상정하는 마을이 결코 만들어 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만들어 진다 하더라고 그 마을이 지속적으로 유지・발전될 수 없다.


▶ 주민들의 생활욕구에 기초해야 한다

마을의 구성원인 주민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들의 일상생활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욕구가 먼저 명확해야 한다. 즉, 자신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 때, 그러한 욕구를 가진 주체가 나서거나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만들기의 주요한 주체가 마을만들기에 관심을 갖는 사회운동가나 사회운동단체가 아니듯이, 마을만들기 사업의 구체적 주제 또는 소재 역시 주민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많은 경우, 주민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에서의 욕구가 무엇인지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라도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해보도록 자극하는 작업(다양한 방법의 조사나 프로그램 등을 통해)이 우선되어야지, 조급하게 주민들에게 특정한 주제를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럴 경우, 비록 특정한 사업 한 가지는 잘 수행할 수 있을지라도, 주민들의 주체적인 지속적 행동으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민들의 생활욕구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활욕구는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일 수도 있고, 때로는 개별화, 익명화되어 있는 도시에서의 삶을 보다 공동체적인 관계가 풍만한 삶터로 바꾸려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을을 구성할 주민들이 과연 어떠한 대상을 어떠한 내용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 구체적인 실천사업이 필요하다

마을만들기는 주민들이 참여하는 구체적인 실천활동을 통해서 진행된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장을 마련하고, 그를 통해 수렴된 주민욕구를 해결하는 실천활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실천활동이라는 것이 막연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마을만들기가 주로 물리적인 환경 및 시설을 개선하고 설립하는 분야에서 주로 실천되는 것은 그것이 가시적으로 매우 명확한 실천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주민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 애초에 바라던 성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참여자들의 구체적 역할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전체 사업을 이루기 위한 각 분야의 역할이 참여자들 모두에게 주어져야 그 사업이 주민들의 참여를 통해 전과정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단지, 주민들에게 의사결정권한만 준다거나 실천꺼리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에서부터 실천에 이르기까지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참여자들이 각자의 구체적 역할을 맡을 수 있을 때, 마을만들기는 가시적 성과의 여부를 떠나서 마을을 건설하고 지속적 발전을 위한 주체적 역량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4. 마을만들기와 주민참여예산

1) 주체의 형성과 그들의 욕구로부터 출발

앞서 마을만들기에 대한 설명은 지방정부의 예산기획에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한 주체와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마을만들기는 그 구체적 실천의 소재에 있어서도 물질적 시설뿐만이 아니라, 문화・역사 등의 비물질적 소재도 중요한 실천꺼리로 활용되고 있다. 주민참여예산도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서 지역의 발전과 자신들의 삶의 질 발전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마을만들기와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즉, 주민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사회를 자신들의 직접적 참여를 통해 발전의 구체적 실천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는 매우 유사한 주체 설정과 과정을 보여준다.

마을만들기는 무엇보다도 마을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전문가들이나 전문적 운동가들이 만들고 싶은 것을 주민설득을 통해 이루려는 시도는 참여 주민들의 자발성과 적극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밖에 없다. 주민참여예산 역시 이와 비슷하다. 아무리 공적인 지출에 대한 필요성이 있더라도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의 예산책정이 이루어져야 주민들의 주도적 참여가 보장될 수 있다. 주민참여예산제의 모범적 사례로 거론되는 브라질 뽀르또 알레그리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 뽀르또 알레그리에서 주민참여예산제를 도입한 브라질 노동당의 전 시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지출의 우선순위와 주민들이 원하는 지출의 우선순위가 다르자, 과감하게 주민들의 지출 우선순위를 보다 앞에서 배치하였다. 결국, 몇 년이 지나면서 주민들 스스로 전 시장이 생각했던 시급한 재정지출 사항인 대중교통체계 개선을 제시하게 됨으로써, 시장의 이러한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주민참여예산에서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직접 그 예산을 책정하는 과정에 참여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주민들의 토론장을 조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주민참여예산제를 도입한 지방자치단체가 하나 둘 늘어가지만, 결국 핵심적으로 발생하는 걸림돌은 주민들의 참여와 이를 통한 토론의 장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과 매우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마을만들기와 주민참여 예산은 모두 다 공개와 공모의 원칙으로부터 시작되어야 그 사회적 의의가 달성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업 모두에 있어서의 핵심은 참여의 주체를 형성하고, 이 주체들이 참여하고픈 일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이 일반 주민들의 참여가 가능하고, 또한 자신의 참여에 보람을 느낀 주민들의 지속적 참여가 가능하다.


2) 참여자의 역량강화

마을만들기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실천을 통해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지역사회의 주인으로서 자신들의 위상과 역할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하는 민주시민 교육 및 훈련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역사회에 잠깐 ‘빌붙어’ 살고 있는 사람이냐 아니면 진정한 주인이냐 하는 것의 위상과 역할의 차이는 가옥주와 세입자의 경우를 빌어 잘 설명할 수 있다. 세입자는 자신이 사는 집에 문제가 있을 경우, 그 문제의 해결을 집주인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가옥주의 경우에는 자신의 집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기꺼이 자신이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된다. 마을만들기는 그 참여자들로 하여금 바로 이와 같은 ‘가옥주’로서의 자기 위상을 실천을 통해 인식케하는 과정이다.

참여예산 역시 마찬가지이다. 참여예산은 그 참여자들로 하여금 지역사회의 주인으로서 자기 위상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뽀르또 알레그리에서는 참여예산제가 실시된 이후 자신들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세금을 내지 않던 불법 정착민들이 자진해서 세금을 내겠다고 시정부에 신청을 하는 사례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참여예산이든 마을만들기든 그 실천의 과정에서는 참여자들의 주체적 의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의 기능을 명확히 설정하고, 또 그러한 기능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지역사회의 변화는 주민들이 스스로의 주체적 힘을 가질 때에만이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역시 다양한 주민들의 참여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다양한 주민들이 참여하면 제각기 다른 이해와 요구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의 배타적 이해는 공동체의 공공 이해로 귀결되는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과정은 매우 번거롭고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론장에서 다양한 이해가 충돌하고 그러한 충돌과 갈등을 봉합해 가는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은 자신의 이해를 공동체의 이해와 조화시키는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민들, 시민들이 그 지역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은 배타적 소유권이 아니라 공동체적 소유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참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해와 이웃의 이해를 조화하는 과정은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가장 최적의 교육・훈련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지역사회운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민조직화가 지향하는 핵심적 가치 중의 핵심적 내용이다.

정리하면, 마을만들기와 참여예산은 모두 참여자들의 개인적 역량을 육성하고 이를 집단적 역량강화로 발전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효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는 바로 지역사회운동이 지향하는 운동적 핵심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마을만들기나 참여예산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천되는 많은 마을만들기 사례나 참여예산의 사례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지도록 의도적이고 세심한 계획의 수립과 실천, 그리고 핵심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집요한 실천을 통해 이러한 과정은 서서히 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사회운동(社會運動)이 과정을 말하고 있듯이, 바로 그러한 실천과정 그 자체가 우리가 지역사회에서 실천하는 사회운동의 핵심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


3) 행정과 전문가와의 관계 고려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 중에서 간혹 지나친 주민참여의 강조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원칙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핵심적 가치를 현실적 어려움으로 포기하려는 것은 과거 행정이 주민들을 동원의 대상 이상으로 설정하지 않으려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당장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러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아야 미래가 보인다. 하지만, 당장의 어려움으로 인해 현실적 판단만을 하게 된다면, 10년 후 우리의 지역사회운동 기반도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술적 실천은 유연하게 채택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전략적 가치를 구체적 실천 속에 녹여내려는 노력은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참여예산이나 마을만들기가 전문가나 행정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여기서 주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 실천에 있어서의 주도뿐만이 아니라, 결정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마을만들기에서 행정과 전문가의 바람직한 역할은 주민들의 주체적 결정과 실천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를 간단한 그림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즉, 행정의 역할은 주민들의 실천활동에 행/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주민들의 실천활동에 안정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주민들에게 이러한 실천활동의 동기를 부여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동기부여란 주민들의 참여에 대한 권한 부여를 통해 가능하다. 전문가와 시민단체 및 그 활동가들의 역할은 주민들의 참여를 조직하고 행정과의 관계를 중재하며, 참여한 주민들의 의견과 욕구를 조정하고 이를 통합하여 실천가능한 청사진을 제시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먼저 주민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줄 수도 있다고 보는데, 이는 행정의 동기부여와는 달리 주민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의미한다.



5. 마을만들기식 참여예산 실천

예・결산에 대한 감시보다도 더욱 적극적인 참여예산은 그만큼 제도적 보장을 더욱 필요로 한다. 따라서 참여예산에 관심 있는 주체들은 그 제도를 만드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제도를 만드려는 노력과 더불어 그 제도의 내용을 채우기 위한 주민참여를 조직하는 일은 제도를 만드는 일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참여예산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을만들기와 결합된 방식의 사업을 구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즉, 단지 예산을 책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참여자들이 이를 직접 실천하는 영역으로까지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뽀르또 알레그리에서도 이러한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뽀르뽀 알레그리시의 한 빈민가는 주민들이 먹고 살 길이 없어 마약을 판매하는 범죄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스스로의 자활을 위해 재활용사업장을 만들고 이를 위한 예산을 시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이를 통해 주민들은 자신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고, 나아가 마을에 도로를 내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등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단지 예산을 지원받는 것만으로 달성될 수 없고, 주민들 스스로 자활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한 빈민가에서는 열악한 주거와 기반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지구재생사업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지구재생사업이란 단지 주거환경의 개선뿐만이 아니라, 교육, 복지, 위생, 치안, 소득 등의 지역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하는 사업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해결의 주체로 자신들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의미하는 바는, 참여예산이 단지 예산 기획에 있어서의 주도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산의 집행에 있어서도 주민들의 자발적 실천에 의한 가시적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진정한 지역사회의 변화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만들기와 주민참여예산이라고 하는 것은 비슷한 사업이라는 차원을 넘어, 지역사회운동에, 지역사회 발전에 있어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주체들이 같다는 것이며, 보다 구체이고 대안적인 사업을 통해 이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어떻게 기획하고 조직하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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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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