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김상신(총무) 작성 : 김현(시민자치정책센터 상근 운영위원)
지하철 4호선의 남쪽 종착지는 ‘오이도’이다. 이름에서 나타나듯, ‘오이도’는 ‘까마귀의 귀처럼 생긴 섬’이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이도’를 고작 지하철 역 중에 하나로 인식하고 있지만, ‘오이도’가 국가사적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오이도’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진 ‘암사동 선사주거지’에 버금가는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작년 초에 국가사적으로 지정고시 되었다. 역사책으로만 보아 왔던 ‘조개더미’와 ‘빗살무늬토기’가 바로 이곳 오이도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암사동 유적’은 정부 주도의 사적 지정이었다면, ‘오이도’는 주민주도의 사적 지정이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니까 ‘오이도 사적’은 정부의 무관심으로 방치된 문화재를 주민들의 힘으로 보존시킨 역사에 남을 문화적 사건인 것이다.
‘오이도’는 본섬 전체가 패총으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사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왔다. ‘오이도’의 패총이 지난 60년, 한 고고학자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지만, 이에 대한 보존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수자원공사는 아무런 지표조사 없이 지난 87년부터 시화지구 개발공사를 진행하게 되고, ‘오이도’의 대표적인 패총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포동’ 지역에서 상당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물이 발굴되자,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유물발굴 조사를 벌였지만,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포크레인 삽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신포동’ 유적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시화호 공사는 시화호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선사시대의 유적지도 함께 망가뜨린 것이다. 그런 과정에 90년대 말, 정부는 또 인근 ‘관곡지’라는 곳에 도로를 짓는다는 계획을 세우자, 이때부터 주민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은 더 이상의 파괴를 중지하고 세부적인 조사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결국 그런 노력 끝에 작년 초, 문하재청은 국가유적으로 공식 지정하게 된다. 공식 명칭은 ‘시흥오이도유적’이며 ‘암사동 유적’보다 7배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패총의 의미를 쉽게 얘기하면, 쓰레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쓰레기장을 보면 라면 봉지도 나오잖아요. 그러면 먼 미래의 사람들은 ‘아 이 사람들이 ‘라면’을 먹었구나‘ 하거든요. 마찬가지로 패총도 그 당시 사람들이 조개를 먹고 다 버린 쓰레기더미인데, 조개만 버린 것이 아니라 토기편이라든가, 예전 생활 도구 같은 것을 같이 버리거든요. 조개가 알성이라서 조개와 함께 묻힌 유물들은 시대별로 층층이 남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패총을 보면 선사시대 당시의 생활상들을 쉽게 알 수 있는 거예요. 소중한 문화재인거죠.”
여기서의 ‘선사시대’란 문헌자료가 존재하지 않은 원시시대를 말하는데, 특히 ‘오이도’ 유적에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온돌’과 같이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주거문화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던 선사시대의 역사가 바로 서울 인근 작은 섬에 숨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역사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 정부에 의해 버려질 수밖에 없었을까? 바꿔 말하면, 왜 주민들에 이 지역을 지킬 수밖에 없었을까?
“1999년 말, 오이도 ‘가운데살막’이라는 지역에 도로공사를 하면서 패총이 대단위로 발굴이 됐어요. ‘서울대 박물관’에서 조사를 했었죠. 아무튼, 중요한 유적지로 알려지면서, 일반 언론 방송에 대대적으로 홍보가 된 거죠. 그런데 문제는 발굴된 유물은 ‘서울대 박물관’에서 다 가져가고는 그 지역 자체를 싹 없애버리고 개발을 해버린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구제발굴의 퍼센티지가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도로 공사를 하면서 유물 확인만 하고 역사적인 자료만 남기고 현장은 없어지는, 그런 문제점이 있었던 거죠. ‘오이도’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부는 엄청난 유적지라고 떠들면서도 현장을 파괴시켜버리는, 그런 관행이 계속 되풀이 된 거죠. 그런데 주민들은 이 부분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된 거죠. 유적지라고 한다면, 현장이 보존되면서, 지역의 삶과 연관이 되는 그런 유적지 보존의 방식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 곳에 유물 몇 점 나오고 유적지라는 문서자료만 남고 현장이 다 없어져버린다면, 도대체 어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 하며 반발했던 거죠.”
땅 속에 묻혀 있는 유물을 드러내는 일을 ‘발굴’이라고 한다. ‘발굴’은 인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현장 그대로를 보존한다는 것의 거의 불가능하다. 정말로 보존하려면, 그대로 놔 둬야 한다. 앞에서 말한 ‘구제발굴’이란 도로건설, 택지개발, 해안 매립 등 각종 개발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유물이 발견되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발굴’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구제발굴’이 높다는 의미는 대부분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는 의미이며, 김상신 총무가 지적한 대로 대부분 현장이 파괴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우스개 소리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발굴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는 그만큼 허술하다. 김총무가 지적했듯이, ‘발굴’ 과정의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재 발굴의 주역은 대부분 대학박물관이다. 그러데 대학박물관은 역사적 사명을 띠고 발굴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 자체를 하나의 ‘용역’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어떻게 잘 보존할까가 우선이 아니라 대규모 예산을 어떻게 따낼까, 이름을 어떻게 알릴까에 더 눈독을 들이고 있다. 발굴된 유물을 박물관으로 가져감으로써 이익을 챙기지만, 현장보존을 소홀할 수밖에 없다. 현장보존은 애초부터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김총무의 지적이다. 물론 모든 대학박물관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이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88년 시화지구 개발로 인해 ‘신포동 패총’은 자취를 감추었다. 마찬가지로 ‘소래 패총’도 시화지구 공사로 사라졌고, ‘가운데살막 패총’도 도로 공사 과정에 흔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시민단체와 주민들은 개발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수자원공사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직접 지표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주민들 대부분은 이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분들이죠. 그래서 지역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해요. 주민들은 이 곳에 살면서 예전부터 일상적으로 유물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토기편 같은 것도 줍고, 패총도 확인하면서, 고향 땅이 보존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수자원공사가 자꾸 개발 위주로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마을 젊은이들 중심으로 문화재보존운동을 진행한 거죠. 그 분들이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이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유물을 찾기도 하고, 지표조사에도 참여하게 되고, 그리고 직접 자료수집에 발 벗고 나서게 됐죠. 실제로 10여 편 정도의 삼국시대 유물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신석기 유물’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위해 ‘암사동 유적’을 방문하기도 했고요, 일상적으로 개발 감시자의 역할도 했던 거죠. 공사가 강행되면 온 몸으로 포크레인을 막기도 하면서 문화재보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셨죠. ‘오이도 유적’을 알리기 위한 교육이나 홍보도 소홀하지 않았고요."
‘오이도 어촌계’, 시민단체,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은 ‘오이도 선사유적 보존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대책위 활동은 공동 활동과 더불어 각 참여자들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를테면, 시흥YMCA는 간담회, 토론회 등의 각종 행사와 진정서, 고발장, 보도자료 등의 문서자료를, 그리고 시흥환경운동연합은 생태학습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대외적인 교육․홍보에 힘썼으며, 오이도 어촌계와 주민들은 일상적인 감시자로서, 그리고 오이도를 찾는 탐방객을 대상으로 갯벌과 패총의 안내자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외 시의회와 공무원들과의 대화창구 역할을 했던 단체가 있었고, 자원봉사자들과 유적지 주변의 미화작업을 주도한 단체도 있었다. 이렇게 대책위 활동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잘 돌아갔다.
“당시 사적으로 지정하는 운동을 했던 시민단체와 주민들은 법적, 합리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해 초기부터 사적지적운동을 쭉 했어요. 그 과정에서 주민과 시민단체는 이견이 없었어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주민들은 개발을 하는 과정에 보상을 받고 이주단지로 다 옮기 상태였기 때문에 땅 보상을 통한 사적 이익 창출은 불가능했었습니다. 대부분의 땅이 한국수자원고사 소유였어요. 그러니까, ‘오이도 문화보존운동’이 사적 지정으로 받게 될 보상을 노리고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주민들의 애향심에 의해 발동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다만, 사적 지정 이후에는 사적에서 500m까지는 제한을 받아요. 다른 어떤 개발 행위 제한은 아닌데, 절차가 늦어지죠. 그것으로 인해, 당시 열심히 운동했던 주민들이 간혹 주변 사람들에게 욕먹기도 했죠. 그러나 ‘오이도’는 갯벌도 있고 해서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예요. 연 100만 인원 정도 됩니다. 그래서 그것과 연결해서 좋은 문화관광지로 조성하고자 하는 데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다 동의했다고 볼 수 있죠.”
‘오이도 문화유적 보존운동’에 참여했던 오이도 주민들은 내 고향이 유적으로 보존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뿐이다. 그것으로 인해 관광지로서의 이득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선사시대의 흔적이 파괴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움직였다. 흔히 이런 운동과 대척점에 있던 '보상‘이라는 측면은 발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 또는 시민단체와 주민간의 마찰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가들과 문화재 가치를 놓고 서로 엇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전문가는 발굴된 유물과 그 해석을 통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중요했던 반면, 주민들은 현장의 보존과 조성을 통한 ’생활의 향유‘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전문가들은 현장 보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발굴‘ 그 자체의 일과 그것으로 인한 역사성에 더 관심을 보인다. 더욱이 이런 관점을 부추기는 것은 발굴 과정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발굴은 대부분 수자원공사나 토지공사의 용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문화재 발굴을 하다가 문화재가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공사 주체의 재원으로 용역을 주고,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영역에서는 재원을 낸 공사 주체의 영향력이 발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의 현 주소다. 주민들과 서울대 박물관 팀과 수 없이 싸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이도 유적 보존운동’은 지역 속에 간직된 문화유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이도’의 정체성에 눈을 떠가는 과정이 주민들이 얻은 가장 큰 경험이었다. 또 그런 자각의 산물이 국가사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13만2천 평에 이르는 본 섬 전체의 유적지를 어떻게 복원하고 조성해 나가느냐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부디 유적지 복원 과정이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복원 과정도 주민들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시흥 오이도 유적’은 사적 제 441호이다.
※ 시흥YMCA 홈페이지는 http://www.shymca.org/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