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끝나지 않은 꿈 -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 ②
“결정권의 문제”
작성 : 김현(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 중에 하나는 참여예산제도가 허용하는 모든 결정 사항은 주민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정의 범위가 어느 정도가 되는지는 실효성 측면에서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아무리 범위가 작다 하더라도 결정권을 허용하지 않는 제도는 참여하는 주민들의 열정과 관심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포르뚜알레그리 주민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겪는가?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 사이클은 잘 알려진 바대로 3월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16개로 구획된 지구단위보다 더 미세하게 지역의 문제와 주제별 문제들이 주민들 사이에서 논의된다. 이 시기 때 논의되고 결정되는 내용들은 비공식적 결정들이지만, 실상, ‘지역총회’(‘지역총회’는 ‘지구총회’, ‘지역회의’, ‘지구회의’ 등으로 번역된다. 모두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와 ‘주제별총회’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과정이다. 특히 이 단위에서는 조직화된 주민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각종 단체, 모임들의 경합장이라고 표현하면 맞을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도출된 내용들은 그대로 5월부터 개최되는 ‘지역총회’와 ‘주제별총회’로 이어진다. ‘지역총회’에서 결정하는 사항은 크게 세 가지다. 1) ‘지구포럼’(‘예산포럼’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에 참여할 대의원 선출 2) ‘예산평의회’에 참여할 평의원 선출 3) 우선순위 선정 등이 그것이다. 재밌는 것은 ‘지구포럼’에 참여할 대의원들의 수는 ‘지역총회’에 참여한 주민들의 수에 비례한다는 것인데, 각 동네별로 10명의 주민들이 1명의 대의원을 선출할 수 자격이 부여된다. 가령,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를 대표할 대의원을 많이 선출하기 위해서는 ‘지역총회’에 자신이 거주한 동네의 주민들이 많이 참여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장치들은 참여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양념과도 같은 요소들이다. 물론, 이 또한 주민들에 의해 결정된 룰이다. ‘지구포럼’은 주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지구포럼’과 ‘예산평의회’ 위원들은 주기적인 미팅을 갖고 주민들이 결정한 요구사항들을 차년도 예산모형에 반영하게 된다. 의회에 예산모형을 제출하는 연말까지 이런 과정은 계속된다. 주민들이 결정한 예산모형이 의회를 통과한다고 해서 참여예산 주기가 끝나는 건 아니다. 12월-1월 동안 일련의 과정을 평가하면서 제도를 수정하는 과정을 마지막으로 해서, 한 해의 예산 사이클은 마무리된다. 이렇게 참여예산 전 과정은 주민들이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주민들의 결정권을 축소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현재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 현황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참여예산을 처음 실시한 ‘노동자당(PT)’의 16년 아성을 깨고 현 정부(PTB)가 지난 2004년에 들어섰다. 당시 현 정부는 참여예산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참여예산을 바라보는 관점이 ‘노동자당(PT)’과는 매우 달랐다. 쉽게 설명하자면 ‘노동자당(PT)’에 있어서 참여예산은 모든 정책 중에 최우선이었지만, 현 정부에게는 여러 정책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실제로 참여예산으로 운영하는 예산 규모가 축소되었고, 주민들이 결정한 사업 중 50%만이 실행되었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은 참여의 축소이다. 2002년에 참여예산에 참여자 수가 17,000명을 넘는데 반해, 2006년엔 11,000명을 조금 웃돌 뿐이다.
포르뚜알레그리 참여예산은 우리나라에 그대로 투사할 수 없는 특수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조건들 속에는 보편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결정권의 문제’가 그것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주민자치센터를 보라. 주민자치센터가 이름에 걸맞게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주민자치위원회에 결정권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울산이나 광주에서 진행되는 참여예산제도의 경우도 결정권이 더 확대되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높다. 참여하는 주민이 들러리로밖에 역할 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순간, 불신과 소외는 증폭될 수밖에 없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 행정에 대한 냉소 등은 바로 이런 불신과 소외가 축적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전문성의 문제로 결정권은 유보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거나 핀트가 어긋난 판단이다. 왜냐하면, 전문성의 문제는, 생활의 전문가인 주민들의 전문성을 끌어내기 위해 어떤 기재들을 동원할 것인가의 문제이지, 결정권과는 상이한 문제이다. 결정권은 철학이자 민주주의이며 원칙인 것이다. 참여하는 주민들의 결정권이 보장되고 더 확대된다면, 포르뚜알레그리가 전해준 감동의 전율을 광주 북구나 울산 동구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지역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믿음이 쌓이는 순간, 동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정권은 그런 동력의 원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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