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초딩에 입문한 작년 말쯤이었을까? 집에 오더니 투덜대기 시작한다.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처럼 식사당번 안 해? 하더니 얼굴이 뾰루퉁 한다. 옆에 있던 내가, 엄마는 바쁘니까 아빠가 하면 안 될까? 했더니, 싫어! 한다. 부모들, 특히 엄마들이 학교 일을 시중들듯이 하는 모습은 나나 아내는 영 아니다 싶었다. 식사당번에, 도서관 자원봉사에, 녹색어머니에, 체험학습 동행에 등등........우리나라 엄마들은 참 바쁘다. 맞벌이 부모들 입장에선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그 미안한 마음을 유발시키는 이러한 구조가 싫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딸아이의 그런 한 마디에 마음이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얼마 후, 딸아이와 엄마가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몰라도, 딸아이가 대뜸 이런다. 아빠! 하고 싶으면 해! 한다. 뭘? 식사당번 같은 거! 그래서 알겠다고 했고, 2학년에 올라가면 꼭 뭐라도 한 가지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결정한 게 ‘녹색어머니’였다.


아니나 다를까 2학년이 되고 곧이어 한 장의 안내문이 왔다. 그래서 ‘녹색어머니’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학교로 돌려보냈다. 엄마들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얼마 후에 모임이 있으니 오라고 한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얼떨떨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조금 두렵기도 했다. 역시나 20여 명의 엄마들만이 모였다. 이런 자리에 아빠가 참석한 건 처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 엄마는 녹색어머니회의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냐며 호호호 웃는다. 나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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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제 그리고 오늘 3일 동안 ‘녹색어머니’ 활동을 했다. 학교 앞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40여 분 동안 ‘녹색어머니’를 표시하는 조끼와 모자 깃봉을 들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나름대로 참 재밌었고 배울 점도 많았다. 아이를 데려다주는 엄마들은 어김없이 힐끗 쳐다본다. 아빠네! 그런 표정들이다. 더 재밌는 건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큰 소리로 말한다. 어! 아저씨가 하네! 어떤 아이는 차도에 들어서서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저씨가 한다는 게 참 신기했나 보다. 그런 표정들을 구경하는 게 정말로 재밌었다. 금기를 깬다고나 할까? 자동차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가를 깨닫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횡단보도에서 뛰는 아이들, 그것을 무시하고 달리는 자동차........가장 위험한 건, 도로변에 주차한 차들 때문에 운전자들 눈엔 아이들이 안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근, 아이들의 눈에도 자동차는 안 보일 게다. 그렇게 우왕좌왕 40분이 훌쩍 지나간다. 나름대로 힘들었고 열심히 했고 뿌듯했다. 헤헤헤.......


정말로 ‘녹색어머니회’ 이름은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근본적으로 아빠들의 참여를 가로막는다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사회 통념상 시간이 되는 아빠라 하더라도 이런 일에 나서는 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름도 바꾸고 한 명, 두 명 나서게 되면 아빠들도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혹시라도 다음에 학부모 모임이 있다면 그것을 제안해보려고 한다.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또 한 가지 섭섭했던 것은 모자 때문이다. 아래 사진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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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끼는 남녀 구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모자는 구분이 확실했다. 저녁에 모자를 써서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푸하하하 웃는다. 그 거 쓰고 40분 동안 서 있었냐며, 사람들이 웃지 않았냐고 놀려댄다. 딸아이도 덩달아 웃는다. 조끼 대신 앞치마를 두르는 다른 학교보다는 조금 나을 수도 있겠으나, 다소 언발런스하다는 느낌이 든다. 애초에 체면 같은 거 생각지 않아서 나야 별 상관없지만, 보는 사람들이 좀 거북했다면 명칭과 함께 모자도 좀 바꾸면 좋을 것 같다. 남자 모자를 따로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2월에 ‘녹색어머니’ 활동이 또 기다리고 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낯설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자연스럽게 지나가길 희망해본다.^_^

Posted by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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